한방침술, 한의사들의 전유물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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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가 아닌 일반사람들은 한의사가 침을 놓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침구사 단체의 주장을 들어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건가 봅니다. 일례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크게 약의(한의사)와 침의(침구사)로 나뉘어졌었다고 합니다.(이 부분은 침구사/한의사 단체간 이견이 많고 논란이 되는 부분임). 어찌됐건 현재는 국가 주관 침구사 관련 시험 제도는 없고, 자격증 소지자중 극히 일부만 활동중)

그리고 IMS와 침술이 유사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는 분명히 다릅니다.(이 문제로 재판까지 벌였는데 결과는 IMS/한방침술은 다르다고 결론났습니다) 한방침술이 음양오행/기와 혈 같은 것에 기반을 두고 보/사 하는 것이라면. IMS는 해부학/생리학에 근거해 신경과 근육을 자극해 통증을 조절하는 치료술입니다.


"한방침술, 한의사들의 전유물 아니다"
(청년의사 08/3/18)

의료일원화특위, IMS '불법침' 주장에 발끈…"한의사들 착각에 의한 억지"

대한한의사협회가 지난 16일 대의원총회에서 IMS를 한방침이라고 규정하고 한방영역을 침범하는 세력에 대해 사생결단의 의지로 척결해 나가겠다고 운운하자 의료계가 한의사들이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먼저 반성부터 하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의료일원화특별위원회는 18일 성명서를 통해 "현대의학의 한 분야로 자리 매김한 IMS를 한방에서 ‘불법침’이라고 함부로 규정짓고 대법원을 압박하는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한의사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WHO 발간 전통의학표준용어집의 내용도 IMS와는 전혀 상관없는 한의사들의 착각에 의한 억지"라고 주장했다.

의료일원화특위는 "최근 한의사들이 바라던 세계적인 침술 학회인 ICMART 가입이 좌절된 것을 이미 전 세계가 다 알고 있다"며 "한방침술을 세계가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현대의학의 범주인 IMS를 한방침술이라고 억지 부리는 것은 실소를 자아내게 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미 전 세계 의사들이 다양한 침술을 과학적으로 연구, 시행하고 있고, '한방침술 역시 한의사들의 전유물이 아니다'라는 침구사 등의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음을 한의사들은 직시하기 바란다고 꼬집었다.

의료일원화특위는 특히 최근 한의계가 '사생결단'이라는 표현을 쓰며 의사들의 한방영역침범에 대해 경계하자 "한의사들이 사생결단 하던 말던 자유지만 그전에 의사들의 현대의료기를 함부로 쓰며 현대의학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대해서 ‘사생결단’의 반성부터 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한의협 신임 회장의 선언처럼 현대의학을 흉내 내고 폄훼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좌시하지 않고 강력한 척결과 응징을 가해 나가겠다"고 천명했다.

[Why] 배고픈 변호사들 "패소하면 환불"… 소송 맡으려 입찰까지

입력 : 2017.04.29 03:00

4명 중 1명이 월 매출 400만원… 변호사 업계 생존경쟁 격화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서 개업 중인 로스쿨 출신 전모 변호사는 최근 다른 변호사 7명과 입찰 경쟁을 통해 사건을 수임했다. 사건 의뢰인은 기술 모방 등 다른 회사의 불공정 행위로 피해를 봤다는 한 IT기업이었고, 이 업체는 입찰을 통해 변호사를 뽑아준다는 '로비드(LAWBID)'에 변호사 선임을 의뢰했다. 로비드 측은 사건 내용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렸고, 일주일 만에 이를 본 변호사 8명이 수임료와 자신의 승소 사례, 활동계획 등을 담은 입찰 제안서를 냈다. 이 사건은 결국 700만원을 적어낸 전 변호사에게 낙찰됐다. 수임료로 220만원을 제시한 다른 변호사도 있었지만, 의뢰인 측은 승소 가능성과 제안서 내용을 고려해 전 변호사를 선택했다고 한다. 작년 12월 창업한 로비드는 지금까지 이런 입찰 방식을 통해 변호사 20명에게 사건을 넘겨줬다. 로비드의 정세광(27) 대표는 "한 건으로 수억원씩 버는 전관 변호사도 있는 반면, 능력 있으면서도 생활이 어려운 변호사들이 많다"면서 "여기에 최소 비용으로 가장 적합한 변호사를 찾으려는 의뢰인들의 노력을 덜어주기 위해 회사를 만들었다"고 했다. 의뢰인과 변호사를 연결해주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은 변호사법 위반이기 때문에 로비드의 입찰은 현재 무료로 운영된다. 정 대표는 "사건 중개가 많아지면 나중에 새로운 수익 모델이 생겨나지 않겠느냐"면서 "로비드에 가입하는 변호사들이 꾸준히 늘어나는 편"이라고 했다.

패소하면 수임료 환불해주기도

변호사들의 생존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알리거나 사건을 수임하는 한편, 비용 절감을 위해 마른 수건을 쥐어짜는 식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사법연수원 출신 박모 변호사는 얼마 전 의뢰인에게서 받았던 수임료 1000만원을 모두 돌려줬다. 지난해 사기 사건 피해자인 의뢰인으로부터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게 한다는 조건으로 사건을 맡았고, 만일 실패하면 받은 수임료를 모두 환불해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박 변호사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변호사가 승소하지 못하면 돈을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사건을 수임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사건 성격에 따라 절반 환불 혹은 전액 환불 등으로 나뉘곤 한다"고 했다. 사건 수임을 위해 공짜 변론도 각오한다는 것이다.

일부 변호사들은 소셜미디어에서 무료 법률 상담을 해주며 수임 기회를 엿본다. 로스쿨 출신 이모 변호사는 "네티즌 상대로 법률 자문을 해주다 보면 실제 사건 수임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면서 "그렇게라도 적극 홍보하지 않으면 검찰·법원에 인맥이 없는 신참 변호사에겐 사건이 맡겨질 리가 없다"고 했다. 아예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법률 상담에 나서는 변호사가 적지 않고, 지방자치단체에서 만든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 법률서비스 행사에 동참하려는 변호사들이 줄을 잇고 있다. 10년째 개업 중인 송모 변호사는 "의뢰인이 봤을 때 경력 적은 변호사는 아무래도 사건 수임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면서 "명함에 넣을 만한 경력 관리를 위해서 단체나 기관에 무료로라도 활동하는 것이 좋다고 후배 변호사들에게 조언한다"고 했다.

로스쿨 출신 정모 변호사는 최근 서초동 사무실을 정리하고 집에서 근무한다. 3년 전 선배들과 함께 사무실을 빌리고 여직원 1명을 공동 고용하는 등 최소 비용으로 사무실을 유지해왔으나, 이 비용마저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변호사는 "사무실을 유지하려면 최소 월 150만~200만원이 들어간다"면서 "한 달 300만원짜리 사건 한 개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고정 비용이라도 줄일 겸 집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부 변호사 사무실은 1명 남은 여직원도 내보내고 변호사들이 직접 복사와 의뢰인 차 접대 등을 담당한다. 팩시밀리값을 아끼기 위해 이메일로만 서류를 주고받는 변호사도 있다.

최근 국세청은 개업 변호사 4명 중 1명의 연 매출이 4800만원 미만이라고 밝혔다. 일부에선 월 매출 400만원이면 그나마 나은 것 아니냐는 얘기가 있지만, 변호사들은 월 매출 400만원이 자신들에게 근로자 최저임금(월 135만원)도 안 되는 수입이라고 말한다. 사무실 유지 비용과 교통비, 통신비, 세금 등을 빼고 나면 집에 가져갈 수 있는 돈은 100만원이 안 될 것이라는 얘기다. 서초동에서 개업 중인 공모 변호사는 "최소 한 달에 800만원, 1년 매출 1억원쯤 돼야 400만원짜리 월급쟁이가 되는 것"이라며 "결국 개업 변호사 4명 중 1명은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매출 상위 10%의 변호사들이 전체 매출액의 70%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 변호사 업계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뚜렷하게 감지됐다.

사무실 비용 아까워 재택근무

재작년 대법원은 형사사건의 성공보수는 무효라고 판결해 변호사들에게 타격을 줬다. 하지만 그사이 변호사들은 다른 방식으로 성공보수를 챙긴다. 성공보수가 포함된 착수금을 미리 받아뒀다가 나중에 패소하면 성공보수에 해당하는 금액만큼은 의뢰인에게 되돌려주는 방식이다. 이 때문에 환불 금액의 범위를 놓고 변호사와 의뢰인이 갈등을 벌이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모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받은 착수금을 다 써버렸다가 사건에 지고 돌려줄 돈이 없어 의뢰인과 변호사가 싸우는 광경을 가끔 본다"고 했다.

변호사회비와 등록 비용을 최대한 아껴 보려는 새내기 변호사들도 있다. 사법고시나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려면 먼저 대한변협과 지방변호사회에 등록을 해야 한다. 이때 서울의 경우 400만원의 등록·입회비를 내며, 이후 매달 5만원 회비를 납부해야 한다. 하지만 신참 변호사들은 사건을 맡기 전까지 최대한 등록을 늦춘다고 한다. 로스쿨 출신 한 변호사는 "사건이 없는 데 등록할 필요가 뭐 있느냐. 등록 비용도 만만치 않고 월회비 5만원도 부담스럽다"면서 "그래서 첫 사건 수임과 동시에 등록하는 변호사들도 적지 않다"고 했다. 26일 현재 서울지방변호사회 소속 개업 변호사 1만3900여 명 가운데 월회비 5만원 미납자는 1805명이다. 이 중 3개월 이상 체납자가 1600명이고, 8개월 이상 장기 체납자도 220명이나 된다. 8개월 이상 회비를 연체하면 사건 수임 등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서울변회 관계자는 "장기 회비 미납자를 살펴보면 할 일이 없어 놀고 있는 변호사이거나 잠적한 변호사, 투옥된 변호사 중 하나"라고 했다.

비리에 손대고 브로커 하수인 전락도

생존 경쟁이 격화되면서 불법·비리를 넘보는 변호사도 늘어나고 있다. 대한변협에 따르면 지난해 각종 비위·비리로 징계를 받은 변호사는 모두 206명이었다. 징계 변호사는 2012년 48명, 2013년 49명, 2014년 56명, 2015년 79명이었고, 작년 처음으로 세 자리 숫자에 진입했다. 올해 들어서만 벌써 70명이 징계를 받았다.

교도소 수감자에게 반입금지 물품을 넣어주다 적발되는가 하면, 범죄 유형도 횡령·사기·폭행·주가 조작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배고픈 변호사가 굶주린 사자보다 무섭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법조계는 특히 일부 변호사들이 법조브로커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걱정한다. 검찰과 법원 주변에 맴돌며 인맥 쌓기에 치중했던 브로커들이 월급 변호사를 고용한 소위 '브로커 법무법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 인수·합병이나 증권 시장에 진출한 일부 조직폭력 출신들이 잦은 송사(訟事)에 대비해 아예 로펌을 차린다는 얘기도 있다. 사건을 가져오는 브로커에게 수임료 절반 가까이를 떼어주며 브로커와 공생하는 변호사도 많다.

일부 변호사들은 변리사·세무사·법무사·공인중개사 등 다른 전문직 분야로 눈길을 돌린다. 최근 한국공인중개사협회와 대한변리사회, 한국기술사회, 한국관세사회, 한국감정평가사협회, 대한법무사협회 등은 공동으로 주요 일간지 1면에 의견 광고를 냈다. 이들은 "변호사 업계가 포화 상태에 이르자 부동산중개업계는 물론이고 법무사·관세사·손해감정사 영역까지 넘보고 있다"면서 "변호사에게 무소불위 업역 침탈의 면죄부를 줘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대한변호사협회 측은 "로스쿨 도입 취지에 따라 전문 경험을 갖춘 변호사들이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는 입장이다. 현행법상 변호사는 세무사 자격을 갖게 되고 실무 연수를 거치면 변리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

한편 사건 수임 경쟁이 격화되다 보니 검찰과 법원 간부 출신의 전관(前官) 변호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변호사는 대형 로펌에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로펌 변호사들은 살인적인 격무에 시달린다고 호소하고 있다. 이익금을 분배받는 '파트너 변호사' 와 달리 월급을 받는 고용 변호사들은 직장 유지와 승진을 위해 휴일도 반납하고 일하는 경우가 잦아, 과로사가 의심되는 사건이 몇 차례 발생했다.

대형로펌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개선하라는 성명서를 냈던 대한변협 측은 "한 해 1500명 이상의 법조인이 배출되는 한 살아남기 경쟁은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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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결혼·출산 포기...'화병'나는 청춘들
취업·결혼·출산 포기...'화병'나는 청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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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중년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화병이 최근 20~30대 젊은 층에서도 늘고 있습니다.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는 물론,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이 화병의 원인으로 꼽힙니다.

최아영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이른바 3포 세대에 이어, 내 집 마련이나 인간관계, 희망 등 수많은 미래를 포기한 이른바 N포 세대.

요즘 20~30대 청년을 일컫는 대명사가 됐습니다.

[김상일 / 대학교 4학년 : 친구들 보면 취업이 안되는 사람들도 많고 되게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그래서….]

[양다인 / 대학교 1학년 : 다 힘들기 때문에 저 하나 힘든 게 아니라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화를 표출하기도 힘든 상황인 것 같아요.]

이런 걱정과 불안감을 안고 사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화병 환자가 늘고 있습니다.

화병은 가슴이 답답하거나 무기력해지고 갑자기 분노가 표출되는 증상을 의미합니다.

그대로 두면 우울증이나 분노조절장애는 물론 소화장애나 고혈압 등 심혈관질환을 앓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병인 만큼 치료를 위해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첫 단추입니다.

[김종우 / 강동경희대학교 한방 신경정신과 교수 : 내가 갖는 분노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서 객관적 평가를 받아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또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명상을 통해 초조함과 불안감을 안정시키는 것도 도움됩니다.

이와 함께 가볍게 산책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화를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YTN 최아영[cay24@ytn.co.kr]입니다.

[특파원 리포트] “길바닥에 새기고 가슴에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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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짐작조차 못했다. 자그마하고 네모난 놋쇠 동판이 집 앞 길가에 박혀 있으니, 그저 건축주나 건축가의 이름과 건축 연도를 새겨넣은 건축 기념물이겠거니 싶었다. 보통은 건물 귀퉁이에 새겨 놓을 법도 한데, 집 앞 길바닥이라니. 처음에는 독일인들의 특이한 풍습인 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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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뜻이 아니었다. 그 작은 동판은 참혹한 역사 그 자체였다. 동판 안에 새겨진 이름의 주인공은 나치에 의해 학살된 유대인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 앞에 이 동판을 박아놓은 것이다. "이 유대인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 언제 추방되거나 살해되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살았다".

희생자는 '유대인'으로 통칭되는 막연한 역사속 존재가 아니었다. 불과 몇 십년전까지 이 집에서 거주하던 실존 인물이자 이웃이었다. 10*10 cm 크기의 작은 동판은 그렇게 역사 속 희생자들을 현실 속으로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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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판의 이름은 '슈톨퍼스타인 (Stolpersteine)'. 독일의 설치작가이자 행위예술가인 군터 뎀니히가 지난 1993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예술 프로젝트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의해 희생된 유대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베를린 시내에만 7천 여개가 있고, 독일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우크라이나 등 유럽과 전 세계 20개국에 6만개가 넘는 동판이 설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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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술가의 머리에서 나온 이 프로젝트는, 많은 이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개당 120 유로가 드는 제작 비용은 모두 개인들의 기부금으로 충당됐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 '야드 바셈'에서는 희생된 유대인들의 주소록 등 주요 자료를 제공했고, 수 많은 독일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이 자료 정리를 도왔다. 시민단체들 역시 '슈톨퍼스타인'의 청소와 유지 관리 등을 주기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사진 4)

독일 마리온 된호프 재단에서는 지난 2012년 '국제 이해와 화해의 상'을 이 프로젝트에 수여하며 상금 만 유로를 지원했다. 나치의 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기억을 일깨워, 독일인들이 이를 잊지 않게 했다는 공로였다. 같은 해 독일 드레스덴의 언론 재단인 에리히 캐스트너 재단에서도 공로상을 수여했다.

전 독일 주재 이스라엘 대사인 아비 프리모는 이 프로젝트를 이렇게 칭찬했다. "슈톨퍼스타인은 억압의 반대이며, 우리의 눈앞에서 우리의 발로 서서, 우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비로소 독일과 이스라엘 국민의 대화가 가능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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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독일은 자신들의 범죄 사실을, 정부 문서나 역사 교과서 같은 기록으로뿐 아니라, 이렇게 길바닥에까지 새기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돌아오지 못한 이웃들의 아픈 사연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뼈저리게 희생자를 추모하고 사죄하고 있다. 역사 도발을 일삼는 일본은, 이 누런 동판의 교훈을 외면해선 안될 것이다.

이민우기자 (minoo@kbs.co.kr)
                          난징 대학살



중일 전쟁 도중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약 5만 내지 30만 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이뤄졌으며,1939년 4월에는 1644 부대가 신설되어 생체실험 등이 자행되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이를 난징 대도살이라 부르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난징 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그래서 아시안 홀로코스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대학살 배경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마르코 폴로 다리, 노구교라고도 불린다.)으로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무력 사건이 터지면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베이징, 톈진 등 북부 주요도시들을 손쉽게 점령하고,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면서 일본군 수뇌부는 "단 3개월 안에 중국대륙을 점령하겠다"고 큰소리 쳤을 만큼 기세등등했었다.



그러나, 상하이 전투에서 2~3개월이나 전투가 장기화되었는데, 여기서 일본군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중국 국민당군의 저항이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상하이 전투에서 국민당군은 장제스(蔣介石)의 엘리트 직계군대가 투입되었고 이들의 저항이 상당히 격렬했던데다가 여기서 일본군은 오송 상륙 전투에서 무모한 작전을 펼치다가 상당한 피해를 입으면서 일본군은 중국군과 중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에 악이 받칠 대로 받쳐 있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11월,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어렵게 상하이를 점령하고, 예정도 없이 곧바로 중국 국민당의 수도인 난징을 향해 진격을 한다




대학살 전개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하는 동안 중국 국민당 정부는 수도난징을 버리고 충칭(중경)으로 옮긴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 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난징성을 삼면에서 좁혀들어오는 일본군의 포위속에 국민당 주요관리와 부유층들은 재빨리 손을 써서 도시를 빠져나갔고, 중일전쟁 이전에 약 110만 명에 육박했던 난징은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시민들과 일본군을 피해 도시로 피난들어오는 피난민 등이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난징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중국군 사령관에게 투항하라고 권고 및 경고를 했다. 그러나 난징성을 지키고있던 탕셩즈 사령관 휘하의 15만 명의 중국군은 투항을 끝내 거부했다. 중국군의 당시 전략은 도시 밖 요충지를 포기하고 난징성 안에 머물며 고립한 채로 방어하겠다는 전략 방식으로 나가려했었다



12월 10일, 일본군은 중국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피의 양쯔강을 만들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결국 역시 중국군은 끝까지 거부했고,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간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성을 점령하고 난징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국민당 군대가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는 흐뜨러진 군기와 지휘관들의 부재 및 무능함에서 비롯되었으며, 여기에 단합이 안되었던 것에 큰 한 몫을 했다. 결국 중국군은 제대로 전투도 못해본 채로 뒤숭숭한 혼란속에 빠져있기만 했다.


그 무렵, 난징이 함락되기 직전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자신의 휘하 중국군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 채, 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을 쳤다.


 여기서 피난가지도 못한 채 남아있던 50~60만의 난징 시민들과 중국군인들은 공황 상태속에서 4~6주간 일본군에 의해 처참한 대량학살을 겪게된다





6주간의 학살과 강간



탕셩즈 사령관이 도망가면서 난징성이 허무하게 일본군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난징에 남아있던 시민들과 병사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일본군은 백기를 들며 항복한 중국군 포로 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하여 닥치는 대로 끌고가 성외곽 밖이나 양쯔강 하구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이나 되는 단위로,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남자들은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으로 되거나 목 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파묻혀서 생매장 당하거나 칼로 난도질당했다




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몇 개의 단위로 열로 구분되어 세워졌는데, 이들 가운데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등 수많은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석유를 쏟자마자 곧바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총탄이 사람들의 몸을 꿰뚫을 때 석유에 불이 붙었고, 시체더미는 산처럼 이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어느 일본군의 일기가 발견되었는데, 일기내용에서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즉, 일본군들은 군인포로들이나 민간인들 가릴 것없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학살을 하였다.






이러한 잔인한 '인간 사냥'이 극에 달하면서 일본군은 여자들에게도 눈을 돌렸다. 이른바, '집단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 먼저 강간하고 다음에 죽임)로 일본군은 여성을 성노리개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다. 





그 대상은 10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어린이부터 60, 70대 노파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은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하여 난징에 보이는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능욕했다.







1938년 1월, 일본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廣田弘毅)가 주미 일본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 내용에는 다음과 같다.

특별소식: 믿을 만한 목격자들의 직접 추산과 신뢰도 높은 일부 인사들이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일본 군이 저지른 모든 행위와 폭력 수단은 아틸라왕과 흉노족을 연상시킨다. 최소 30만명의 민간인이 살육됐고, 많은 수는 극도로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전투가 끝난 지 수주가 지난 지역에서도 약탈과 아동 강간 등 민간에 대한 잔혹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당시 일본 외무부는 난징에서의 학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난징에 있던 서방 외교관들을 불러 맛있는 음식과 공연을 제공하며 매수를 시도했다고 한다



난징 안전지대


독일 나치스당원이자 지멘스의 직원으로 난징에 근무하던 욘 라베는 외교관, 사업가 등 난징에 있던 다른 외국인들과 힘을 합쳐 '국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자신의 자택과 대사관 부지 등을 중심으로 일본군이 들어올 수 없도록 '난징 안전지대’를 설정해 이곳에서, 피난하는 중국인들에게 음식과 머물 곳을 제공했었다. 


'난징 안전지대'에 전체 약 2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일본군들로부터 대피할 수 있는 은신처 및 음식을 제공받았다.

난징안전지대 구역은 모두 난징 주재 외국대사관과 난징대학교 주변에 설치되었다. 또한, 이러한 안전지대를 주도한 욘 라베는 자신의 소유지를 650명이 넘는 피난자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개방하였으며, 안전구역 내의 행정 책임자들은 끔찍한 학살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파나이 호 사건


파나이 호 사건은 1937년 12월, 난징 대학살이 한창 벌어지던 시기에 난징 인근의 양자강 유역에서 일본 해군(해군 소속 전투기)에 의하여 당시 난징인근 양자강 유역을 순찰중이던 미국 아시아함대 소속의 경비정인 파나이 호가 침몰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서 미국과 영국 정부에게 정중하게 사과하였고, 미국 정부에 배상금을 지불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100인 참수 경쟁








난징 대학살 시기인 1937년 11월 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살(斬殺)시키는지를 겨뤘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던 것을 말한다.

종전 후 무카이, 노다 두 소위는 함께 난징에서 군사재판을 받았고, 역시 최후까지 자신이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谷寿夫)와 함께 총살되었다





대학살 이후


1937년 12월 13일, 난징이 함락된 이후 6주간의 대학살이 계속되었고 1938년 봄에야 비로소 종결되었다. 그 후 일본군은 도시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일본정부는 난징에 있는 사람들을 피라미드형 위계질서에 따라 편재하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방법을 고안했었다.

1938년 1월 1일, 일본은 새로운 시 정부인 '난징자치위원회'를 구성했다. 난징자치위원회는 도시의 행정, 복지, 금융, 상업, 치안, 교통 등을 담당하는 중국인 관리들로 구성되어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의 통제 정책은 너무도 가혹하게 다뤘다. 1939년 4월에는 의학연구기관을 설치하고 마루타(통나무)같은 형식의 실험대상을 모아 생체실험 연구를 하곤 했었다. 이를 'Ei 1644부대'라 불리는데, 매주 10여 명의 사람들이 생체실험에 의해 희생당하고, 그 사체는 'Ei 1644부대'의 소각로에서 처리되었다.


이어서 1940년에는 왕징웨이(汪精衛)를 정부수반으로 친일 꼭두각시 정부인 왕징웨이 정권이 난징을 수도로 수립되었다. 그러나, 민중들은 왕징웨이 정권에 대한 지지가 거의 없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Ei 1644부대 등 일본군, 일본인들은 중국 국민당군이 난징에 입성하기전 모든 데이터를 파괴하고 도주했다




전범재판




난징전범재판은 1946년 8월~1947년 2월까지 난징에서 B급, C급 전범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에서 1천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460여 건의 살인, 강간, 방화, 약탈에 관해 증언했었다.


재판이 계속되면서 감춰졌던 증거들이 속속 공개되었는데, 여기서 일본 신문에 보도된 '100인 참수 경쟁'의 노다 쓰요시 중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중위가 재판받게 된다. 

두 사람은 '살인시합'을 벌인 장본인이었는데, 재판 도중 둘다 150명 이상을 죽였다는 사실을 일체 부인했으며 급기야 한 사람은 외국인 특파원이 멋대로 상상해 기사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본에 돌아갔을 때 아내를 놀라게 해주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 둘은 1947년 12월 18일 평결이 내려져 사형을 언도받는다.


또한 난징전범재판에서 다니 히사오 중장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는 1937년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이었는데, 일본군 6사단은 난징 시내에서 온갖 많은 만행을 저질러왔던 부대였다. 

1946년 8월, 재판에 회부된 다니 히사오 중장은 난징으로 소환되었다. 그를 기소하기 위해 법의학 전문가들이 난징시내 근처에 있는 매장지를 파헤쳐 수천 구의 유골을 발굴했다.

1947년 2월 6일, 다니 히사오에 유죄판결이 내려지면서 3월 10일 다니 히사오 중장은 전쟁법 전쟁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헤이그 협정을 위반하고 자신의 군대가 난징에서 30만 명 학살한 것에 동조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으면서 공개총살이 집행된다.


극동국제군사재판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동아시아의 전쟁 범죄인을 심판한 재판이다. 도쿄 재판이라고도 한다.

 60여 명 이상의 전쟁 범죄 용의자로 지명된 사람 중 28명이 기소되어, 판결 이전에 병사한 사람 2명과 소추가 면제된 1명을 제외한 2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이중 난징 대학살에 관련된 전범들 가운데 당시 난징대학살 지휘관이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朝香宮鳩彦王)는 일본 황족이란 이유로 처벌을 면해, 재판소에 출석하지 않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난징대학살 당시 총책임자였던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는 사형판결을 받아 교수형을 당했고, 중일전쟁 당시 일본 외무성 장관이었던 히로타 고키(広田弘毅)도 사형을 선고받아 교수형에 처했다. 


하지만, 극동국제군사재판은 난징대학살 당시 주요 범죄자들이 단 한 명도 법정에 서지 않았다는 점이 한계다



살의 주요 책임자

  • 조 이사무 (1895년 1월 19일 ~ 1945년 6월 23일) - 난징전투 당시 아사카 야스히코의 참모. 난징대학살에 깊게 관여했고 포로 학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 아사카 야스히코 (1887년 10월 2일 ~ 1981년 4월 12일) - 일본의 황족으로서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 현장 책임자. 모든 포로들을 죽이라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 마쓰이 이와네 (1878년 7월 27일 ~ 1948년 12월 23일)- 난징대학살 당시 총책임자. 그러나 난징 함락될 당시 병으로 전선에 있지 않았다.
  • 다니 히사오 (1882년 12월 22일 ~ 1947년 4월 26일) -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 난징 함락 직후 항복한 중국군 포로와 비무장 민간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도록 지시하였다.


위키백과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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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장 -The Rape of Nanking(난징의 강간)









난징의 강간은 사망자 수뿐만 아니라 이들이 죽음을 맞이한 참혹한 방식 때문에라도 기억되어야 한다. 중국인 남성들은 총검술의 연습 대상으로, 그리고 일본군의 목 베기 시합의 대상으로 희생되었다. 또한 2만~8만 명에 이르는 중국 여성들이 강간을 당했다. 








일본 군인들은 이 여성들을 강간했을 뿐 아니라 배를 가르고 내장을 들어내거나 가슴을 도려내고, 산 채로 벽에 못을 박기도 했다.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딸을, 아들은 어머니를 강간하도록 강요받았다. 





산 채로 매장하기, 거세하기, 신체 장기를 도려내기, 산 채로 불태우기 등이 다반사로 행해졌을 뿐 아니라 혀에 쇠갈고리를 걸어 사람을 매달아 놓거나 허리까지 사람을 파묻은 후 독일산 세퍼드들의 먹이로 삼는 일 등의 악마적인 행위가 벌어졌다. 그 광경이 너무나 역겨워 난징에 머물던 독일 나치들도 공포에 떨 정도였다. 


(난징강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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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잊혀진 홀로코스트 












2부 진실게임







   



 3부 증언 1937년 겨울



  







# 사견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 한다"-조지 산타야나
"대학살을 잊는 것은 두 번째 학살을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노벨 수상자 엘리 위젤





출처: http://hopergy.tistory.com/2138 [가난한 여행자]

3년만에 모습 드러낸 세월호, 인양 과정서 무슨 일 있었나

등록 :2017-03-29 16:25수정 :2017-03-2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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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AS]
지난 23일 세월호 선체가 수면 위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2014년 4월16일 전남 진도 인근 해역에서 침몰한 지 1073일 만이다. 예상보다 순조롭게 인양이 진행되면서 그동안 왜 인양이 오래 걸렸는지 의문이 제기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 당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1073일의 기다림’…세월호 인양, 안 했나 못했나)

3년간의 세월호 인양 과정은 기다림과 슬픔, 기대, 분노, 의혹의 시간이었다. 인양기술 검토, 업체 선정, 인양방식 변경, 4·16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활동 연장 거부 논란 등을 거치면서 세월호 유가족들은 정부의 ‘인양 의지’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했다. 해양수산부 선체인양추진단은 지난해 7월까지 인양을 완료하겠다고 약속했다가 기상악화와 기술적 결함 등을 이유로 인양 시기를 8월, 11월, 올해 3~5월로 거듭 미뤘다. 선체 인양의 핵심 과정인 선수들기도 7번의 시도 끝에 지난 7월에야 겨우 성공했다. 마침내 세월호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지만 정부는 미수습자 수습과 선체 정리 방법을 놓고 또다시 유가족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유실방지 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졸속 인양’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정부의 ‘구멍 난’ 세월호 인양과정을 되짚어봤다.

■ 참사 371일…세월호 인양, 1년 만에 결정

참사 이후 미수습자 수중수색이 7개월여 계속됐다. 295번째 희생자를 끝으로 더는 미수습자가 발견되지 않자 정부는 미수습자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2014년 11월11일 수색 중단을 발표한다.

수색 중단 직후부터 미수습자 가족들은 ‘조속한 인양’을 요구했다. 그해 11월, 정부는 선체 인양을 검토할 ‘세월호 선체 처리 기술검토 태스크포스(이하 티에프)’를 구성했다. 12월엔 세월호 특별법에 따라 특조위 설립준비단도 출범했다. 티에프에서 기술 검토 결과가 나온 건 2015년 4월10일이다. 미수습자 수색 중단 이후 5개월 만이다. 티에프는 인양 방식으로 크레인과 케이슨 플로팅독(항만공사용 플로팅독)을 함께 사용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크레인의 쇠줄로 세월호 선체를 어느 정도 끌어올린 상태에서 플로팅독에 실어 수면 위로 띄우는 방식이다.(▶크레인 2대로 들어 ‘이동식 부두’에 실어 올리는 방식 제안)

정부가 구성한 ‘세월호 선체 처리 기술검토 태스크포스’가 2015년 4월10일 발표한 세월호 인양 방법과 절차. <한겨레> 그래픽.
정부가 구성한 ‘세월호 선체 처리 기술검토 태스크포스’가 2015년 4월10일 발표한 세월호 인양 방법과 절차. <한겨레> 그래픽.
그러나 티에프가 내놓은 결과는 정부가 참사 직후인 2014년 5월5일 영국 해양구난 컨설팅업체 티엠씨(TMC)와 자문계약을 맺으면서 이 업체가 제시한 인양 기술과 거의 일치했다. (▶<뉴스타파> ‘세월호 인양가능’ 작년 5월 결론…1년간 은폐) 신중하게 접근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판박이’ 결론을 얻기 위해 아까운 시간만 흘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공식 인양 결정은 참사 371일 만인 2015년 4월22일에 나왔다. 정부는 인양업체 선정 절차를 거쳐 이르면 그해 9월에 현장 작업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인양은 업체 선정 뒤 1년~1년6개월이 걸린다”며 2016년 6~12월을 인양 가능 시점으로 짚었다. 정부가 시간끌기를 하고 있다는 의혹이 커졌다. 활동 기한이 2016년 9월로 예정돼 있는 특조위가 진상규명의 핵심 증거인 선체 조사를 해보지도 못한 채 활동이 종료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이다.(▶세월호 특별조사위 활동 끝난 뒤 ‘핵심 증거물’ 세월호 인양?)

■ 참사 476일…‘부적합’ 판정 기술 가진 인양업체 선정

정부는 참사 476일째인 2015년 8월4일 상하이샐비지 컨소시엄을 인양업체로 선정한다. 선정 과정은 비공개로 진행됐다. 이때까지 특조위는 예산을 받지 못해 정식 활동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여서 인양업체 선정 과정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상하이샐비지는 선정 보름 만에 첫 수중조사를 시작한다.(▶490일 만에…세월호 인양 ‘첫발’) 그러나 정부는 인양 작업 참관을 원하는 유가족과 특조위의 조사 활동에 비협조로 일관했다. 유가족들은 8월29일 동거차도에 초소를 세우고 인양 작업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세월호 인양업체로 선정된 상하이 샐비지가 2015년 8월16일 첫 수중조사에 나섰다. <한겨레> 자료사진.
세월호 인양업체로 선정된 상하이 샐비지가 2015년 8월16일 첫 수중조사에 나섰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부와 상하이 샐비지는 2016년 7월까지 인양을 장담했다. 하지만 인양은 계속 지연됐고, 상하이 샐비지의 기술력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상하이 샐비지는 선정 과정에서 평가 총점 2, 3위 업체와 기술 평가에서 엇비슷한 점수를 받았으나 인양 가격이 가장 낮아 선정됐다. 기술 평가 1위를 받은 네덜란드 업체가 정부가 제시한 금액이 너무 낮아 입찰을 포기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렇게 ‘가격’이 강점이었던 상하이 샐비지의 경쟁력은 두 달 만에 무색해졌다. 정부가 유실방지망 비용 60억원, 작업중단 보전 비용 5억원을 추가로 지급하게 된 것이다. 처음 851억원이던 계약금액은 916억원으로 불어났다. 인양 비용을 우선시할 필요가 있었냐는 지적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더 심각한 것은 인양 방식이다. 2016년 3월29일 특조위는 2차 청문회에서 상하이 샐비지의 인양 방식이 인양업체 선정과정에서 티에프가 제안했던 ‘크레인 인양 뒤 플로팅독 안착’ 방식과 다를 뿐 아니라, 티에프와 같은 인양 결론을 낸 바 있는 영국업체 티엠씨가 ‘부적합’하다고 평가한 기술이라는 점을 밝혔다.(▶<뉴스타파> “정부, ‘인양 가능’ 알고도 5개월 허송”…세월호 2차 청문회)

실제로 상하이 샐비지가 채택한 ‘부력재 인양’ 방식은 인양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지난해 5월 부력 확보를 위해 설치한 고무폰툰에 공기를 주입하는 과정에서 폰툰이 불규칙적으로 팽창하면서 연결 장치에서 떨어져 나갔다. 6월에는 세월호 선수를 들어올리는 작업 중 일부 와이어에 하중이 몰려 갑판부 두 곳이 6.5m, 7.1m 찢어지고 선체 옆면도 손상을 입었다.(▶불안감 커지는 세월호 인양…뱃머리 들다가 선체 갑판 두 군데 훼손) 부력재를 선내에 넣기 위해 뚫은 구멍(천공)도 140여개가 넘는다. 크기가 제각각인 구멍들로 인해 선체 파손 위험은 물론 미수습자와 유품 유실 가능성도 커졌다. 해수부는 선체 인양 과정에 방해가 된다며 스테빌라이저(균형장치), 앵커(닻), 불워크(파도를 막아주는 울타리) 등을 절단해 육상으로 옮기기도 했다. 특히 불워크 부분은 특조위가 침몰 원인 조사에서 주요 증거라며 작업 중지 요청까지 했지만 묵살됐다. 침몰 원인을 밝힐 핵심 증거들이 무참히 훼손됐다.

인양 과정에서 각종 문제가 불거지면서 인양 일정도 꼬였다. 2016년에는 인양이 성공한다고 공언했던 해수부는 지난해 11월11일 인양 일정을 올해 3~5월로 미룬다고 발표했다.(▶올해 꼭 성공하겠다더니…정부 ‘세월호 연내 인양 실패’ 공식화) 인양 방식도 변경했다. “바람이 강한 겨울에 해상 크레인은 위험해 사용할 수 없게 됐다”며 인양 방식을 ‘재킹 바지선’과 ‘반잠수식 선박’을 이용하는 공법으로 바꾼 것이다. 이를 준비하느라 시간이 또 흘렀다.

정부와 상하이 샐비지는 2016년 11월11일 해상크레인을 이용한 ‘플로팅도크’ 방식에서 재킹바지선을 이용하는 ‘텐덤리프팅’ 방식으로 인양 공법을 변경했다. 해수부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참사 1073일…유실방지책 유명무실

지난 22일에야 시험인양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본인양이 시작됐지만, 인양 과정에서 선체 훼손이 이어지고 있다. 23일에는 선미 램프(자동차 등이 출입하는 통로의 출입문)가 열려 있는 것이 발견돼 뒤늦게 절단 작업이 진행됐다. 1년6개월 넘게 잠수사들이 세월호 곳곳을 조사하며 인양 준비를 했는데도 램프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인양 준비 부실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물빼기용 구멍을 뚫었다 기름이 쏟아져 나와 작업이 중지되기도 했다.(▶세월호 침몰 원인 ‘안갯속’, 증거물 소홀히 다루는 해양수산부)

세월호가 26일 오후 반잠수식 선박에 선적돼 있다. 세월호는 해수 배출과 잔존유 제거, 고박 작업 등을 마친 뒤 30일 목포신항을 향해 ‘마지막 항해’에 나선다. 진도/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세월호가 26일 오후 반잠수식 선박에 선적돼 있다. 세월호는 해수 배출과 잔존유 제거, 고박 작업 등을 마친 뒤 30일 목포신항을 향해 ‘마지막 항해’에 나선다. 진도/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28일에는 급기야 동물뼈가 선체로 쏟아지면서 유실방지책에 구멍이 뚫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동물뼈 발견으로 유해 유실 우려 커져) 2014년 11월 실종자 수색을 중단하면서 세월호 문과 창에 설치해 놓은 실종자 유실방지책이 ‘망’이 아니라 가위표(X) 형태로 쳐놓은 2개의 유실방지줄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유실방지책 문제가 계속 제기돼 왔지만, 여태껏 제대로 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셈이다.(▶‘세월호 실종자’ 유실 방지 장치 ‘망’아닌 ‘줄’이었다)

미수습자 주검 수습 방식도 문제다. 지난해 8월29일 정부는 세월호가 눕혀진 상태에서 객실 구역만 절단해 바로 세운 뒤 미수습자 수색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선체정리업체로는 이런 내용의 제안서를 제출한 코리아쌀베지가 선정됐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즉각 반대했다. 객실 부분과 화물칸을 분리할 경우 침몰 원인 조사에 필요한 조타실, 기관실 구역과 이어지는 배선 라인이 분리되는 점, 절단 과정에서 화물칸 화물이 쏟아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거센 반발에 해수부는 새롭게 꾸려진 선체조사위원회와 미수습자 가족들의 의견을 모아 처리 방식을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한발 물러선 해수부 “세월호 선체절단 집착 않겠다”) 그러나 세월호가 30일 목포신항으로 떠나 뭍에 거치되면 선체 절단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정부의 ‘구멍 난’ 인양으로 녹슬고 긁힌 세월호를 마주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3년. 미수습자 수습과 진상 규명 과정에서 또다시 시간이 허투루 흘러가는 일이 없도록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이유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참고자료: 세월호 인양 국회 토론회 자료집(2017.3.23)

<세월호 인양과정>

- 2014. 11.11 정부, 수색 중단 발표

- 2014. 11.24 세월호 선체 처리 기술검토 태스크포스(TF) 구성

- 2015. 2.5 정부 TF, 기술적으로 선체 인양 가능 결론

- 2015. 4.22 인양 공식 결정. “9월 착수, 2016년 6~12월 인양 가능”

- 2015. 8.4. 인양업체 결정. 상하이 샐비지 컨소시엄

- 2015. 8.16. 상하이 샐비지, 첫 수중조사 착수

- 2016. 4.14 “7월 선체인양” 계획 발표

- 2016. 5.28 선수들기 작업 중 폰툰 이탈사고

- 2016. 6.13 너울성 파도로 인한 대규모 선체 파손

- 2016. 7.29 선수들기 7회 시도 끝에 성공

- 2016. 8.29 선체 인양 후 절단 방식 발표

- 2016. 9. 30 세월호 특조위 활동 종료

- 2016. 11.11 “연내 인양 불가” 발표, 인양 방식 변경

- 2017. 3.19. 시험 인양 시도했으나 줄꼬임 현상으로 실패

- 2017. 3.22 시험 인양 성공 뒤 본인양 시작

- 2017. 3.26 세월호 전체 모습 공개

- 2017. 3.30 목포신항으로 출발(예정)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88483.html#csidx3c709e74d628206bf52aab9c0d8495e

박근혜 자택 상공 드론 출현…한때 ‘술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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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박근혜 전 대통령 자택 상공에 드론이 출현(위쪽), 경찰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 연합뉴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눈물 많은 우리는 '세월호 세대'
카메라로 기록한 세월호 그 이후

거리에서 사진을 찍으며 지켜본 세월호 참사 이후의 이야기

17.01.09 16:53l최종 업데이트 17.01.09 17:59l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천 일 전인 2014416일 아침, 진도 근처에서 커다란 여객선이 옆으로 기울었고, 점점 차갑고 어두운 바다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전원 구조'라는 어처구니없는 오보를 뒤로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쏘아 올린 조명탄들이 빛을 내며 하늘로 올랐다. 하지만 정말 무심하게도 그 배는 조금씩 바다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고, 조명탄을 따라 삼백 하고도 네 개의 빛도 함께 하늘로 올랐다. 그 수많은 빛들이 오르면서 사람들의 가슴 한구석에 뜨거운 상처를 남겼고, 그 상처는 불에 덴 흉터, '화인(火印)'으로 남았다.

우리는 세월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천 일이 지났고, 그 흉터, 화인은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아마 평생 남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 낙인은 ", 혹은 내 가족의 일이 아니라 다행이다"라는 마치 만년설 같아 보이던 무관심을 점차 녹였다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버린 유가족들의 호소에 사람들이 조금씩 관심을 보이고 함께 하도록 하는 데 꽤나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음 한켠의 상처와 유가족들의 피눈물 가득한 호소 끝에 우리는 이곳저곳에서 옷이나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세월호 참사를 단순한 '사고'  아닌 '참사'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가슴팍에 그 상처가 아로새겨질 때의 아픔과 슬픔을 잊지 않으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함께 하자고, 기억하자고 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우리는 결코 세월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2017년 1월 7일, 광화문 광장의 시민들 세월호 참사 1000일을 이틀 앞둔 1월 7일에는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피켓과 촛불을 들고 유가족의 발언을 지켜보고 있는 시민들.
201717, 광화문 광장의 시민들 세월호 참사 1000일을 이틀 앞둔 17일에는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피켓과 촛불을 들고 유가족의 발언을 지켜보고 있는 시민들.장성열
내가 지켜본 세월호 '사건'

소설가 박민규는 세월호 참사를 두고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만큼 이 사건, 그리고 2014416일 이후로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았음'이 중요한 골자가 되었고, 그 골자를 빼놓고서는 세월호 참사와 이후 천 일 동안의 일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국가는, 그리고 정부는 자신들이 자국민을 '사고'에서 구조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 책임지기는커녕 사람들의 가슴 한켠에 자리잡은 세월호의 흔적을 벅벅 긁어 없애고 또 망각을 강요했다. 국가와 정부는 이 참사가 그저 '사고'였을 뿐이고, 자신들에겐 책임도, 또 책임을 질 의무 따위도 없다고 말해왔다.

최종 책임자인 대통령은 자신이 그날 무려 7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 대해 일언반구의 제대로 된 해명조차 하지 않았고, 참사 1주기 때는 해외 순방을 떠나기도 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햇수로 3년이 된 참사에 대해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헷갈린다는 투의 말을 하며 자신은 세월호 참사에 관심조차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했다.

'교통사고'를 들먹이며 피해자들을 조롱하거나, 이외에도 지겹다는 말과 배상금 문제를 운운하며 입에 담지도 못할 조롱과 공격을 퍼붓는 이들도 숱하게 있었다.
2015년 4월 11일, 피켓을 든 유가족들 2015년 4월 11일에는 경찰이 광화문 광장 북단을 바리케이드로 막고 최루액을 뿌리며 행진을 막았다. 그러자 유가족들이 최루액을 온 몸으로 막아가며 충돌을 멈추었다.
2015411, 피켓을 든 유가족들 2015411일에는 경찰이 광화문 광장 북단을 바리케이드로 막고 최루액을 뿌리며 행진을 막았다. 그러자 유가족들이 최루액을 온 몸으로 막아가며 충돌을 멈추었다.장성열
나는 20148월부터 세월호 참사 이후의 여파들에 대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내가 약 2년 반에 가까운 시간 동안 거리에서 보고 느낀 국가의 무책임과 망각에의 강요는 경찰 공권력을 동원한 국가폭력을 통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경찰은 대통령을 만나러 청와대로 가겠다는, 혹은 고립되어 있는 이들을 만나러 가겠다는 유가족들과 연대자들을 차벽과 방패, 바리케이드로 막아섰고 2014416일 그때처럼 까불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협박했다.

그리고 그 명령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최루액과 물대포를 쏴서 윽박질렀고, 도로교통법과 집시법 등을 들먹이며 해산을 종용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린 것도 모자라, 도리어 국가가 자신들의 무책임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2015년 4월 11일, 경찰벽 앞의 유가족들 2015년 4월 11일에는 경찰이 광화문 광장 북단을 바리케이드로 막고 최루액을 뿌리며 행진을 막았다. 그러자 유가족들이 최루액을 온 몸으로 막아가며 충돌을 멈추었다.
2015411, 경찰벽 앞의 유가족들 2015411일에는 경찰이 광화문 광장 북단을 바리케이드로 막고 최루액을 뿌리며 행진을 막았다. 그러자 유가족들이 최루액을 온 몸으로 막아가며 충돌을 멈추었다.장성열
공권력은 무척이나 잔인하고 비열했다. 2015411일에는 광화문 광장 북단에 차벽과 바리케이드를 치고 '도로교통법 위반'이라며 행진을 막았다. 광장에서 어떻게 도로교통법을 이야기하냐는 항의에 경찰은 최루액으로 대응했고, 유가족들은 자신들과 함께해 주는 사람들이 최루액을 맞는 것을 못 보겠다며, 자신들이 앞으로 나가면 경찰이 최루액을 쏘지 않을 거라며 매캐한 냄새가 진동하는 충돌의 맨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경찰은 "우리 대원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는 최루액을 쏘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도, 가리지 않고 최루액을 발사했다. 유가족들이 맨 앞에서 온몸으로 사람들에게 향하는 최루액을 막으며 겨우 충돌을 멈추게 했는데, 그 장면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장면 중 하나다.
2015년 4월 18일, 차벽을 뚫고 앞으로 가는 시민들 2015년 4월 18일에는 경찰이 광화문 앞에 유가족을 고립시켰다. 그러자 시민들이 유가족들을 만나러 광화문으로 갔고, 결국 차벽과 물대포, 최루액을 뚫고 광화문에 도달했다.
2015418, 차벽을 뚫고 앞으로 가는 시민들 2015418일에는 경찰이 광화문 앞에 유가족을 고립시켰다. 그러자 시민들이 유가족들을 만나러 광화문으로 갔고, 결국 차벽과 물대포, 최루액을 뚫고 광화문에 도달했다.장성열
그리고 바로 일주일 뒤인 418일에는 소수의 유가족들이 광화문 앞에서 고립된 채 농성을 하고 있었다. 음식은 물론 화장실조차 허용되지 않았고, 경찰은 마치 성을 쌓는 듯 겹겹의 차벽으로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도, 소리가 들리지도 않도록 만들어 버렸다. 또 시민들이 길을 지나가겠다고 해도 옷이나 가방에 노란 리본이 달려 있으면 '광화문에 가는 것이 아니냐'며 통행을 허가하지 않았다.

결국 시민들은 펜스를 뚫고 차벽 아래 좁디좁은 틈으로 기어들어가 유가족들을 만났는데, 경찰은 거기다 대고 마치 게임을 하는 것마냥 물대포와 최루액을 조준 사격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끽해야 얇은 비닐 우비를 입고 있었는데, 그 우비만으로 견디기엔 물대포는 너무 차갑고 강한 고통이었다.
2016년 3월 20일, 단원고등학교 기억교실 기억교실이 단원고등학교에 남아 있던 작년 3월, 취재를 위해 단원고 기억교실을 방문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교실에서 발견한, 청소를 위해 널어놓은 잘 마른 손걸레와 그 아래의 종이학.
2016320, 단원고등학교 기억교실 기억교실이 단원고등학교에 남아 있던 작년 3, 취재를 위해 단원고 기억교실을 방문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교실에서 발견한, 청소를 위해 널어놓은 잘 마른 손걸레와 그 아래의 종이학.장성열
우리는 '세월호 세대'

세월호 참사 천 일을 이틀 앞둔 지난 17일에는 생존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친구들이 보고 싶다는 슬픈 이야기에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눈물을 흘렸다. 그 서글픈 이야기를 들으며 감정을 애써 누르고 있으려니 작년 3월의 한 술자리가 생각났다. 16학번 후배와 술을 마시던 자리였는데 막차 직전까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다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그 후배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해서 왜 우느냐고 물어보니 그 사람들, 그러니까 참사의 피해자들이 대부분 자신과 동갑이라고, 그래서 자신은 너무 무섭고 슬프다고 이야기했다. 또 학내 독립언론에 있을 때는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안산에 있는 분향소와 단원고등학교 기억교실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함께 취재를 했던 (피해자들과 동갑인) 동료 기자들 또한 "자신과 동갑인 피해자가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더 크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2016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2주기 2016년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년이 되는 날이었다. 한 추모제 참가자가 우비를 입고 손피켓을 들고 있다.
2016416, 세월호 참사 2주기 20164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년이 되는 날이었다. 한 추모제 참가자가 우비를 입고 손피켓을 들고 있다.장성열
물론 단원고등학교 재학생이던 희생자들을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대학생이었을 '친구'"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고 불러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와는 별개로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 세대'라는 것이 생겨났고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세대'라는 것은 몇 살부터 몇 살까지라는 식으로 특정할 수는 없지만 단원고 희생자들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비슷한 학교생활이나 문화생활, 기억 등을 공유했거나 공유하는 이들을 주로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 외에도 폭넓게는 '세월호 참사 이후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람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결코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인데,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경험했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7년 1월 7일, 촛불이 가득한 광화문 광장 세월호 참사 1000일을 이틀 앞둔 1월 7일에는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시민들이 광장에 앉아 촛불을 들고 추모제에 참여하고 있다.
201717, 촛불이 가득한 광화문 광장 세월호 참사 1000일을 이틀 앞둔 17일에는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시민들이 광장에 앉아 촛불을 들고 추모제에 참여하고 있다.장성열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나는 천 일이 지나도록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에 대해 국가와 정부는 '선주인 유병언이 사망했으니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는, 맥빠지는 주장만 내놓았고, 자신들이 '' 국민들을 구조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 그 문제 많은 배의 과적을 눈감았는지, 더 나아가 '' 사람들이 죽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해명하지 않았다.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함께 기억하는 이들의 화인에 대못을 박고만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천 일 동안의 어둠과 고통을 견뎠고, 얼마 안 가 빛이 올 것이라 믿는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지난 1225일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축일 중 하나인 성탄절이었고, 참사의 3주기인 416일은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이다. 성스럽게 태어나 죽임을 당했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해 승천한 '하느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의 죽음과 슬픔만을 극복하지 않을 이다. 그는 모든 양들과 함께 하기 위해 내려왔고, 죽었고, 부활했고, 승천한 이이기 때문이다. 천일을 앞두고 태어난 예수는 416일에, 혼자가 아닌 삼백 네 명과 함께 부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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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 “김대중 전 대통령, 연평해전 때 축구 봤다”… 사실은?

2002년 6월 30일 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일본 요코하마 경기장을 방문한 김대중(빨간 단상 오른쪽 두 번째) 전 대통령 내외. 아키히토(오른쪽 세 번째) 일왕 내외와 경기를 관전하며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국민일보 DB© Copyright@국민일보 2002년 6월 30일 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일본 요코하마 경기장을 방문한 김대중(빨간 단상 오른쪽 두 번째) 전 대통령 내외. 아키히토(오른쪽 세 번째) 일왕 내외와 경기를 관전하며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이 제2차 연평해전 당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행적을 앞세워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정 주필은 8일 오전 방송된 KBS1 ‘생방송 일요토론'에서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의원, 남경필 경기도지사 등과 함께 출연해 ‘공정한 대한민국,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놓고 토론했다.

보수측 패널로 출연한 정 주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연평해전 때 축구(2002 한일월드컵 경기)를 보러 갔지만 탄핵은 안 됐다”며 “그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이 묘연한 박 대통령의 탄핵 사유와 관련한 반대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이 제2차 연평해전을 대응하지 않고 2002 한일월드컵 경기를 먼저 관전했다는 정 주필의 주장은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2002년 6월 29일 서해 연평도 부근에서 남북 해군간 교전이 발생하자 임성준 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긴급 보고를 받고 “단호하면서도 의연하게 대응하라”며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소집을 지시했다.

오후 1시30분 김 전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NSC 전체회의가 열렸다. NSC는 서해 교전사태의 배경을 분석하고 재발방지를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일 저녁 국무위원들과 함께 청와대 본관에서 한국과 터키의 한일월드컵 3ㆍ4위전을 시청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이 경기는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다.

월드컵 폐막식 참석을 위해 다음날 일본 방문이 다시 검토됐다. 아시아 사상 처음으로 개최한 월드컵 결승전은 제2차 연평해전 다음 날인 그해 6월 30일 일본 요코하마 국제경기장에서 열렸다. 한국이 개막식을, 일본은 폐막식을 각각 열었다.

폐막식은 개최국 정상은 물론 전 세계의 국빈들이 모이는 월드컵의 가장 중요한 일정 중 하나다. 김 전 대통령이 이 행사에 불참하면 국민 불안감이 높아지고 외국 투자자들의 우려를 촉발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방일 일정은 그대로 진행됐다.


최민우 인턴기자 cmwoo11@kmib.co.kr

[커버스토리]“안 겪어보면 몰라요, 카메라가 운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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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지성이 아빠, 문종택씨의 1000일

경향신문

단원고 ‘지성이 아빠’ 문종택씨가 지난 4일 경기 안산시 세월호 합동분향소 앞 416TV 사무실에서 촬영용 비디오카메라를 점검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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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 옆 작은 컨테이너에 마련된 그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한창 편집 작업 중이던 컴퓨터가 있고, 그 옆에 유통기한이 임박한 빵들이 놓여있다. 시민들이 아이들을 추모하며 ‘416 기억교실’에 놓고 간 간식이다. 유통기한이 다 돼 갈 즈음 차마 버릴 수 없어 유족 사무실로 옮겨 오는 이런 빵들로 문종택씨(55)는 대충 한 끼를 때우곤 한다.

“내 이름 안 쓴 지 오래됐어. 지금 내 삶은 지성이 아빠로만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게 초심이고 앞으로도 변하면 안되니까.” 그는 인터뷰 시작 전 이름과 나이를 묻자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지난 1000일 동안 인터뷰를 여기저기서 많이 했지만, ‘제정신’으로 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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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문종택씨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416TV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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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으로서 직접 카메라를 들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유족은 요구를 하는 당사자 입장인데, 카메라는 관찰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잖아요.

“2014년 8월8일 국회에서 처음 단식을 시작한 날이었어요. 특별법 통과시켜달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데 쳐다도 안 보던 여당 의원들이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니까 갑자기 방긋방긋하더라고요. 그때 느꼈죠. 아, 카메라가 중요하구나. 그래서 우리도 캠코더를 구해왔어요. 그땐 방송할 생각은커녕 유튜브란 말 자체도 몰랐어요. 그냥 ‘유족이 여기 있다, 눈길이라도 달라’라는 심정이었어요. 카메라를 들이대니까 의원들이 그제서야 우리를 한번 쳐다는 보더라고. 참 더러웠죠.”

그날부터 방송은 그의 ‘직업’이 됐다. 현장에서 만난 독립언론 종사자들에게 카메라 조작법 등을 부지런히 배웠다. 그동안 쌓인 방송 목록은 700여편에 이른다. 컴퓨터 하드에 기록된 동영상 분량만도 20테라바이트(TB)가 넘는다.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누비는 일은 젊은 기자들에게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요.

“아주 상상도 못 하죠. 제일 중요한 게 노트북이에요. 라이브 방송을 하려면 카메라에 핸드폰, 멀티탭까지 3개 선을 노트북에 연결해야 돼요. 경찰들하고 광화문에서 충돌이라도 나면 집사람이 노트북 들고, 나는 카메라 삼각대 들고 동시에 같이 뛰어요. 연결 잭이 끊어지면 안되거든요. 동거차도에서도 그 바람 부는 곳에 노트북과 카메라를 설치하고 혼자 촬영을 하면서 바닷속에 잠든 아이들 이름을 불러주려는데 바람에 선이 조금만 움직여도 끊어져서….”

-사실 언론이 해야 할 일들을 직접 하고 계신 셈입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언론들이 많이 지탄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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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단식 행사가 이어지던 2014년 문종택씨가 한 시민을 인터뷰하고 있다. 416TV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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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옷을 안 입어요. 항상 땅바닥에 주저앉아야 하니까 검정 옷을 입죠. 그럼 현장 기자들이 내가 유족인지 모르고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요. ‘오늘은 세월호 특조위원들끼리 안 싸우네.’ ‘유족들 그림 안 나오는데.’ 그런 장면만 찍으려고 온 의도가 뻔히 보이는 거예요. 그렇다고 그 친구들이 미운 건 아니에요. 다 자식뻘이고, 어찌 보면 시위 막는 의경들이랑 똑같잖아요.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걸 텐데. 그래도 내가 뭐라고 하는 건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자꾸 일깨워 주고 싶어서예요. 기사 한 줄에 사람 수백명을 죽였다 살렸다 할 수 있는데.”

카메라를 들면 그는 냉정한 ‘관찰자’가 돼야 한다. 머리로는 잘 알지만 실천은 늘 어렵다. 아무리 객관적 입장을 유지하려 해도 유가족이라는 그의 정체성은 바뀌지 않는다. 서서히 세월호를 잊어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다시 끌려면 눈물샘을 자극하는 영상을 만들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먼저 감정이 복받쳐 촬영을 포기한 적도 여러 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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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416TV 사무실에서 편집 작업 중인 문종택씨가 모니터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김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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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인양작업 현장으로 가고 있었어요. 배가 막 흔들리는데 미수습자 가족인 은화 어머니, 다윤이 어머니가 처절하게 우시는 거예요. 우리 엄마·아빠들은 다 알거든요. 사람이기 이전에 동물로서, 정말 밑바닥부터 끓어오르는 새끼를 찾는 울분의 소리가 있어요. 그런 걸 찍어서 알려야 하는데, 도저히 못 찍겠더라고요. (잠시 침묵) 카메라가 울거든요. 그거는 안 겪어보면 몰라요. 카메라가 운다는 거.”

찍은 영상을 편집하는 작업도 같은 이유로 그에겐 고역이다. 바라만 봐도 저절로 울음이 터지는 화면을 여러차례 돌려보다 보면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한참 울다가 다시 들어와서 또 우는 과정의 반복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편집도 못하고 울기만 하다 밤새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문씨의 딸 지성이는 연예기획사에서 섭외 제안을 받을 정도로 외모가 출중했다. 경제적 이유로 연예인을 포기한 후에는 스튜어디스가 되겠다며 영어학원을 자청해 다녔던 기특한 딸이었다.

-1000일 전으로 한번 시간을 돌려볼까요. 지성이와 마지막으로 통화하신 게 2014년 4월16일 9시4분이었죠.

“저는 세월호가 ‘학살’이라는 거에 0.001%도 의심이 없는 게, 아이하고 통화하면서 배에서 나오는 방송 소리를 내가 들었어요.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그걸 듣고 내가 안심했으니 애들은 오죽했겠어요.”

가족들과 함께 팽목항으로 달려갔을 때 지성이 이름은 생존자 명단에 있었다. 그러나 짧은 안도는 곧 공포로 변했다. 생존 학생들이 모인 장소에 딸은 없었다. 당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발표한 잘못된 생존자 명단을 그대로 보도한 언론 기사 중 일부는 아직도 버젓이 인터넷에 걸려 있다.

-참사 다음날 박근혜 대통령과 직접 통화하셨죠.

“(한참 침묵) 밤 10시 넘어서 ‘발신번호표시제한’으로 전화가 오더라고요. 통사정하는 심정으로 땅바닥에 엎드려 전화를 받았어요. 아이들 한 명이라도 구해달라고, 제발 하나라도. 그런데 수색상황을 알 수 있게 스크린을 설치해준다는 약속을 지켰다는 말 하려고 전화한 거였더라고. 홍보용이구나 싶었죠. 나도 그렇지만, 우리 가족들이 그때까지만 해도 참 바보 같았지. 대통령을 믿었다는 게.”

사실 문씨는 대통령과 통화할 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하지 못했다. ‘우리 딸 지성이가 생존자 명단에는 있는데 행적을 찾을 수가 없다. 제발 알아봐 달라.’ 그러나 그 다급한 순간에조차 자기 애부터 찾아봐 달라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지성이는 그로부터 2주 후에야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4월30일 사고해역 인근에서 한 어부가 닻에 걸린 지성이를 끌어올렸다.

그때부터 문씨는 ‘지성이 아빠’로만 살아왔다. 카메라를 들고 유족들이 가는 곳 어디든 뛰어갔다. 삼보일배, 도보순례, 삭발, 단식, 기자회견, 거리집회…. 피부 알레르기 때문에 군대도 방위로 다녀왔던 그는 서릿발 같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촬영하느라 얼굴이 퉁퉁 부었다. 안 그래도 마른 체형에 몸무게가 한때 8㎏이나 빠졌다. 그렇게 1000일이 흘렀지만, 그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여전히 멈춰있다.

“지금도 2014년에 만든 피켓을 여전히 가지고 다니면서 쓰고 있어요. 변한 게 없다는 거죠. 과거에 만든 영상물은 과거의 기록이 돼야 하는데, 세월호 소식은 과거가 없어요. 딱 하나 바뀐 게 ‘특별법 제정하라’고 썼다가 ‘개정하라’고 글자 하나 고친 거. 현수막이나 서명지나 하나도 고쳐 쓸 게 없어요.”

-국가가 했어야 할 일을 그동안 피해 당사자인 유가족들이 해왔습니다. 최근에서야 박 대통령의 국정농단 실체가 드러나면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분노도 되살아나고 있어요.

“나는 박근혜가 탄핵당한다 해도 그건 처벌이 아니라고 봐요. 김기춘이 비서실장 하다 내려오고 국회의원이 ‘배지’ 내려놓는다 해도 그게 어떻게 책임지는 거예요. 원래 그게 기본인데. 국민 세금으로 봉급 받으면서 그동안 잘못된 일을 했으면, 그 돈까지 다 게워내야지. 우리 가족들은 애도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생업까지 포기하고 공무원이 했어야 할 일까지 하고 있는데.”

그는 지난 1000일 동안 단 1초도 행복해지면 안 되는 사람처럼 살아왔다. 유가족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건립된 ‘안산온마음센터’에서 족욕기로 안마를 받는 순간에도 머릿속에 먼저 떠오른 것은 동거차도의 천막 안에서 벌벌 떨고 있을 엄마들이었다. “족욕기가 정말 뜨끈뜨끈하고 좋대. 근데 나만 편하고 그런 거 같아서 도저히 못 받겠더라고. 그거 받는다고 나쁜 것도 아닌데, 아마 내 트라우마겠죠.”

화석처럼 굳어버린 자신의 아픔을 시종일관 담담하게 말하던 그는 인터뷰 도중 딱 한 번, 눈물을 보였다. 자신의 비극 앞에 철저히 무관심했던 사람들 때문에 눈물조차 말라버렸을 텐데도, 그는 오히려 고마웠던 시민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특별법 제정 서명운동을 위해 서해안 고속도로 휴게소를 나 혼자 차 타고 돌아다녔어요. 서명대 설치하려고 휴게소마다 전화를 돌렸는데 많이들 난색을 표하는 거예요. 다음번에도 휴게소 재입찰을 받으려면 한국도로공사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인 거 같더라고요. 그런데 화성휴게소에 갔더니 나이 지긋한 소장님이 나에게 주겠다고 직접 간 생과일주스를 내오면서 휴게소 명당자리를 마음대로 골라서 얼마든지 하라고 하는 거예요. 내 목이 아플까봐 30분마다 ‘단원고 2학년 1반 지성이 엄마·아빠가 서명을 받고 있으니 동참해달라’고 전체 안내방송까지 해주셨어요. 거기서 음반 팔고 있던 무명가수들도 ‘저희도 모금해서 세월호 후원금 냈습니다’ 하면서 자리를 비켜주고.” 그는 카메라와 핫팩을 마련해 준 온라인 요리 커뮤니티 ‘82쿡’ 회원들과 날이 추운데도 유모차를 밀고 나와 매주 촛불모임을 여는 전국 곳곳의 시민들을 떠올리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고 말했다.

인터뷰 도중 문씨의 휴대전화 알람이 울렸다. 오후 4시16분이었다. 매일 같은 시각에 울리도록 알람을 맞춰놓은 것이다. 그는 알람을 ‘진실의 벨’이라 불렀다. “제 욕심이지만 노란리본 다는 것처럼 전 국민이 안전을 위한 벨소리 운동을 했으면 좋겠어요. 4시16분에 다들 알람 울리면 가족들한테 전화해서 사랑한다, 고마웠다 말하고 안부도 확인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그 말이 가슴에 맺혀있거든요.”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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