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길바닥에 새기고 가슴에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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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짐작조차 못했다. 자그마하고 네모난 놋쇠 동판이 집 앞 길가에 박혀 있으니, 그저 건축주나 건축가의 이름과 건축 연도를 새겨넣은 건축 기념물이겠거니 싶었다. 보통은 건물 귀퉁이에 새겨 놓을 법도 한데, 집 앞 길바닥이라니. 처음에는 독일인들의 특이한 풍습인 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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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뜻이 아니었다. 그 작은 동판은 참혹한 역사 그 자체였다. 동판 안에 새겨진 이름의 주인공은 나치에 의해 학살된 유대인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 앞에 이 동판을 박아놓은 것이다. "이 유대인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 언제 추방되거나 살해되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살았다".

희생자는 '유대인'으로 통칭되는 막연한 역사속 존재가 아니었다. 불과 몇 십년전까지 이 집에서 거주하던 실존 인물이자 이웃이었다. 10*10 cm 크기의 작은 동판은 그렇게 역사 속 희생자들을 현실 속으로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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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판의 이름은 '슈톨퍼스타인 (Stolpersteine)'. 독일의 설치작가이자 행위예술가인 군터 뎀니히가 지난 1993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예술 프로젝트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의해 희생된 유대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베를린 시내에만 7천 여개가 있고, 독일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우크라이나 등 유럽과 전 세계 20개국에 6만개가 넘는 동판이 설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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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술가의 머리에서 나온 이 프로젝트는, 많은 이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개당 120 유로가 드는 제작 비용은 모두 개인들의 기부금으로 충당됐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 '야드 바셈'에서는 희생된 유대인들의 주소록 등 주요 자료를 제공했고, 수 많은 독일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이 자료 정리를 도왔다. 시민단체들 역시 '슈톨퍼스타인'의 청소와 유지 관리 등을 주기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사진 4)

독일 마리온 된호프 재단에서는 지난 2012년 '국제 이해와 화해의 상'을 이 프로젝트에 수여하며 상금 만 유로를 지원했다. 나치의 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기억을 일깨워, 독일인들이 이를 잊지 않게 했다는 공로였다. 같은 해 독일 드레스덴의 언론 재단인 에리히 캐스트너 재단에서도 공로상을 수여했다.

전 독일 주재 이스라엘 대사인 아비 프리모는 이 프로젝트를 이렇게 칭찬했다. "슈톨퍼스타인은 억압의 반대이며, 우리의 눈앞에서 우리의 발로 서서, 우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비로소 독일과 이스라엘 국민의 대화가 가능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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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독일은 자신들의 범죄 사실을, 정부 문서나 역사 교과서 같은 기록으로뿐 아니라, 이렇게 길바닥에까지 새기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돌아오지 못한 이웃들의 아픈 사연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뼈저리게 희생자를 추모하고 사죄하고 있다. 역사 도발을 일삼는 일본은, 이 누런 동판의 교훈을 외면해선 안될 것이다.

이민우기자 (minoo@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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