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승낙하는 것은 반드시 신용이 적고, 쉽다는 것이 많으면 반드시 어려움이 많다. -노자 가장 강력한 무기는 축복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런 것에 기대는 사람이야말로 현자이다. 그들은 전쟁 한번 하지 않고 평화로 싸움에서 이긴다. -노자 가장 완전한 것은 무엇인가 모자란 듯하다. 하지만 그 효용이 다함이 없다. 충만된 것은 텅 빈 것같이 보인다. 하지만 그 효용에는 끝이 없다. 크게 곧은 것은 굽은 것 같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서툴게 보이며, 뛰어난 웅변은 눌변처럼 들린다. 움직이면 추위를 이길 수 있고, 고요히 있으면 더위를 이길 수 있다. -노자 가장 으뜸가는 처세술은 물의 모양을 본받는 것이다. 강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물처럼 되어야 한다. 장애물이 없으면 물은 흐른다. 둑이 가로 막으면 물은 멎는다. 둑이 터지면 또 다시 흐른다. 네모진 그릇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또 다시 흐른다. 네모진 그릇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된다. 그토록 겸양하기 때문에 물은 무엇보다 필요하고 또 무엇보다도 강하다. -노자 가장 이상적인 생활 태도는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만물에 혜택을 주면서 상대를 거역하지 않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물처럼 거스름이 없는 생활 태도를 가져야 실패를 면할 수 있다. -노자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머물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있게 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천하의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강한 것을 지배한다. -노자 강한 군대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 -노자 강한 인간이 되고 싶다면, 물과 같아야 한다. -노자 강해지려면 흐르는 물처럼 되어야만 한다. 물이란 장애물만 없으면 유유히 흐르고 장애물이 있으면 흐르지 않는 법이다. 네모난 관이면 물은 네모나게 흐를 것이요 둥근 관이면 물은 둥글게 흐를 것이다. 물은 부드럽고 마음대로 흐르기 때문에 가장 불요불급(不要不急)하고도 강한 것이다. -노자 곧으려거든 몸을 구부리라. 스스로는 드러내지 않는 까닭에 오히려 그 존재가 밝게 나타나며,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지 않는 까닭에 오히려 그 옳음이 드러나며 스스로를 뽐내지 않는 까닭에 오히려 공을 이루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 까닭에 오히려 그 이름이 오래 기억된다. 성인(聖人)은 다투지 않는 까닭에 천하가 그와 맞서 다툴 수 없는 것이다. '구부러지는 것이 온전히 남는다'는 옛말을 믿어라. 진실로 그래야만 사람은 끝까지 온전할 수 있다. -노자 공을 세운 뒤에는 물러가는 것이 하늘의 길이요, 사람의 도리다. -노자 공(功)이 이루어지면 그 속에 살 생각을 마라. 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나야 한다. -노자 군대가 강하면 즉 멸망할 것이요, 나무가 단단하면 즉 부러진다. -노자 금욕은 반드시 습관이 되어야 한다. 금욕을 하면 할수록 덕을 그만큼 쌓게 되고, 덕을 많이 쌓은 사람은 억제치 못할 것이 없게 된다. -노자 끝을 맺기를 처음과 같이 하면 실패가 없다. -노자 --> 이건 노자의 명언입니다.. 노자(老子/?~?) 중국 고대의 철학자·도가(道家)의 창시자. 성 이(李). 자 담(聃). 이름 이(耳).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 고현(苦縣:河南省鹿邑縣) 출생.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周)나라의 수장실사(守藏室史:장서실 관리인)였다. 공자(BC 552~479)가 젊었을 때 뤄양[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한 후 서방(西方)으로 떠났다. 그 도중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上下)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道德經)》(2권)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사상】노자는 도(道)의 개념을 철학사상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이 도는 천지만물뿐만 아니라 상제(上帝)보다도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형상과 소리가 없어서 경험할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無)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지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생성 소멸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가 아니라 유(有)이다. 천지만물과 달리 도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자연(自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간섭·지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위(無爲)하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가 만약 이러한 무위자연을 본받아 백성들을 간섭·지배하지 않고 그들의 자발성에 맡긴다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진다. 노자에 의하면 일체 사물·사건들은 그들 자신과 상반하는 대립자들을 지니고 있다. 유(有)가 있으면 무(無)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다. 이들 대립자들은 서로 전화한다. 화는 복이 되고 흥성한 것은 멸망한다. 이러한 대립전화(對立轉化)의 법칙을 알고 유(柔)를 지키면 강(剛)을 이길 수 있다. 이를 귀유(貴柔)사상이라고 한다. -->이건 노자의 일생과 사상입니다..
老子에 대하여 - 史記중에서 -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苦縣) 여향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다. 성은 이(李)씨, 이름은 이(耳), 자(字)는 백양(白陽),시호는 담(聃)이니, 주(周)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관(史官)이다. 공자(孔子)가 주나라에 가서 삼가 예에 관해 노자에게 물어보자, 노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말하는 것은, 그 사람과 뼈는 이미 다 썩었는데 오직 그 말만이 남았을 뿐이다. 또 군자(君子)는 때를 만나면 벼슬하는 몸이 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 속의 쑥대처럼 굴러다닌다고 한다. 내 들으니, 장사를 잘하는 상인은 물화(物貨)를 깊이 간직함을 없는 것처럼 하고, 군자는 성덕(盛德)이 있으나 그 용모는 우매한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대의 교만한 기상과 욕심 많음과 얼굴과 태도를 꾸미는 일과 산만한 뜻을 버려라. 그런 것은 그대의 몸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은 이것뿐이다." 공자는 돌아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새가 잘 난다는 것을 안다. 물고기가 잘 헤엄친다는 것도 안다. 짐승이 잘 달린다는 것도 나는 잘 안다. 달아나는 자에게는 그물을 칠 수 있고, 헤엄치는 것에게는 낚시질 할 수 있으며, 나는 것에게는 화살을 쏘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용(龍)에 대하여는 나는 그것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다. 그는 용과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노자는 도(道)와 덕(德)을 닦아서, 그의 학문은 스스로 숨기고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힘쓰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주나라에 살더니 주나라의 도가 쇠미하게 되는 것을 보고 드디어 떠나게 되었다. 함곡관(函谷關)에 이르자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말하였다. "선생께서 장차 숨으시려 하시는데, 귀찮으시더라도 저를 위하여 글을 지어 주십시오." 이에 도덕경(道德經) 상하편을 지어 오천여언(五千餘言)으로 도(道)와 덕(德)의 뜻을 말하고 가버렸는데, 그의 최후를 아는 이가 없다. 어떤 이는 말한다. "노래자(老萊子)도 또한 초(楚)나라 사람이다. 책 15권을 지어서 도가(道家)의 효용을 말하였는데, 공자와 같은 때의 사람이다." 대체로 노자는 160여세를 살았다고도 하고 200여세를 살았다고도 한다. 그가 도를 닦고 덕을 길렀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가 죽은 뒤 129년의 사관(史官)의 기록에 의하면, 주(周)나라의 태사(太史) 담(聃)이 진(秦)나라의 헌공(獻公)을 뵙고, "처음에 진나라는 주나라와 합하였다가 합한 지 500년 뒤에 분리하고, 분리한 지 70년이 되면 패왕( 王)이 될 자가 나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어떤 이는 담이 곧 노자라고 하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도 진정 그러한지 아닌지를 알지 못한다. 노자는 숨은 군자였다. 노자의 아들 이름은 종(宗)이니 위(魏)나라의 장군이 되어 은간(殷干)을 봉읍(封邑)으로 하는 봉작을 받았다. 종의 아들은 주(注), 주의 아들은 궁(宮)의 현손(玄孫)은 가(假)이니 가는 한(漢)나라 효문제(孝文帝)에게 벼슬하였다. 그리고 가의 아들 해(解)는 교서왕(膠西王) 앙의 태부(太簿)가 되고 그로 인하여 제(齊)나라에 정주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사람들은 유학(儒學)을 배척하고, 유학을 배우는 이는 또한 노자를 배척한다.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일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이(李耳)는 작위(作爲)함이 없이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바르게 되게 하였다. ******************************************************** 老子 ?∼? 중국 고대의 도가(道家)사상의 시조가 되는 인물 또는 그가 저술한 책명. 〔인 물〕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성(姓)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字)는 담(聃), 춘추시대에 초나라의 고현(苦縣)에서 태어났다. 주(周)나라 왕실의 수장실리(守藏室吏;도서 관리인)를 지냈다. 공자가 방문하여 예(禮)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얼마 후에 주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은거를 결심하고 서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도중, 관문에서 관문지기 관윤희(關尹喜)의 청에 의해 상하 2편의 책을 저술한 후 떠났는데 행방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설에는 의문시되는 점이 많고, 그것을 전하는 가장 오랜 자료 사기(史記)의 노자전에서도 의문을 표명하고 있어, 공자의 선배로서 BC 6세기에 활약한 인물이라는 실재성은 희박하다. 오늘날의 학설로서는 BC 479년에 죽은 공자보다 100년 정도 후배라는 설과, 가공의 인물로서 실재를 부정하는 설 등이 있다. 요컨대, 분명하지 않고 현존하는 책과 결부하여 생각하면 춘추전국시대의 중기(BC 4세기)보다 올라갈 수는 없다. 〔서 적〕 노자 2편은 도덕경이라고도 불린다. 상편이 도(道)자로 시작되므로 도경, 하편이 덕(德)자로 시작되므로 덕경, 즉 이들을 합친 명칭이나, 유교의 도덕과는 달리 우주인생의 근원과 그 활동을 나타내는 말이다. 내용은 약 5000자. 현재는 81장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것이 최초의 형태는 아니다. 문장은 간결한 격언적 표현의 집적으로 대구(封句)와 각운(脚韻)을 많이 썼고 의표를 찌르는 역설적인 말이 특색이다. 민간에 널리 구전되어 온 속담과 격언을 모은 듯한 느낌이다. 따라서 세속적인 이야기와 함께 비유적인 난해한 어구도 많고 고래의 해석에도 이설(異說)이 많다. 완성된 것은 전국시대 말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주석(註釋)의 수는 대단히 많지만 위(魏)나라 왕필(王弼)의 주가 현존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랜 것으로 무(無)의 철학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하상공(河上公)의 주는 치신치국(治身治國)의 현실적 해석 외에 양생(養生)에 관계하는 신선도교(神仙道敎)의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 두 가지가 고주(古註)의 대표적인 것이다. *** 道德經 *** 중국의 사상가이며 도가철학의 시조인 노자(老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저서. 노자 또는 노자도덕경이라고도 한다. 약 5000자, 81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편 37장의 내용을 도경(道經), 하편 44장의 내용을 덕경(德經)이라고 한다. 원래 도덕경은 상·하로만 나누어졌을 뿐이지만 장구지학(章句之學)이 성행한 한대(漢代)에 들어와서 장·절로 나누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덕경의 구성체제에 대해서는 한 사람이 한꺼번에 저술하였다는 관점과, 도가학파의 손에 의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당시의 여러 사상을 융합시켜 만들어진 것이라는 관점이 있다. 한 사람의 전작물임을 주장하는 관점은 노자를 공자와 같은 시대의 실존인물로 보아 도덕경을 그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부정하는 관점은 노자가 가공인물이며 설사 실존인물이라 하여도 도덕경과는 상관이 없다는 관점에서 현존하는 도덕경은 여러 사람에 의하여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이루는 기본사상은 변함없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유가사상은 인·의·예·지의 덕목을 설정하여 예교(禮敎)를 강조하면서 현실적인 상쟁대립이 전제된 반면, 도덕경의 사상은 상쟁의 대립이 인위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생긴다고 보고 무(無)와 자연의 불상쟁(不相爭)논리를 펴나간 것이다. 이러한 도덕경의 사상은 학문적인 진리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위·진·남북조 시대와 같은 혼란기에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혜를 밝혀주는 수양서로서도 받아들여졌으며, 민간신앙과 융합되면서 피지배계급에게 호소력을 지닌 사상 및 세계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국에서도 도덕경에 나오는 내용이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도덕경의 기본흐름은 일찍부터 도교신앙과 접합되어서 민중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혀 기층의민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 상〕 노자사상의 중심은 개인적 또는 정치적인 성공을 쟁취하기 위한 무위(無爲)의 술(術)에 대해 논하고, 이를 위한 근거로서 형이상학적 근원인 도(道)를 논하는 것이었다. 우선 도란 이것을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이것을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며… 혼합하여 하나가 된다와 같이 감각을 초월한 하나의 것으로 천지만물의 존재에 앞서 독립자존하며 그 위에 큰 현실적인 활동을 수행한다. 즉,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와 같이 만물생성의 근원으로서 천하의 어머니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을 포함한 세계의 존재는 모두 도에 의해서 각각 본연의 자세를 수행한다. 그래서 만물은 도에 따라 있는 그대로(자연 그대로) 있지만, 인간은 사욕(私慾)으로 인해 종종 도를 벗어난다. 이것이 인간의 불행이다. 그래서 단지 도만을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약은 꾀를 버리고 고의적 소행을 피하는 무위(無爲)의 입장에 몸을 놓고 무욕(無慾)이 되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게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지 말고, 약하게, 겸손하게 행하는 것이 좋다. 무위이면서 무위함이 없다 즉, 무위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도의 큰 활동은 그 활동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 자연 본연의 모습이므로 사람은 그것을 모범으로 하여 도의 절대세계에 복귀하라는 사상이다. 노자의 사상은 열자(列子)와 장자(莊子)에게 계승된다. 단 열자의 현실적 세속적인 성공주의와 장자의 관념적·사변적인 철학과는 차이가 있다.
어떤 특정한 이념을 정해 놓고, 그것을 보편적이라거나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하면서 기준으로 사용하는 일은 사회를 구분하고 배제하고 억압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고 노자는 비판했다. 가치론적 기준을 근거로 해서 세계와 관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노자가 인간이 아니라 자연에 주목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연에는 가치론적 기준이 작용하지 않고 그 기준이 목적으로 상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치론적 기준을 보편적인 틀로 사용하지 말고, 개별자들의 자발적 생명력이 마음껏 발휘되게 할 것을 권한다.
그는 이런 그의 생각을 ‘거피취차(去彼取此)’라고 표현했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는 말인데, 저 멀리 걸려 있으면서 인간과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론적인 이념과 결별하고 바로 여기 있는 구체적인 개별자들의 자발적 생명력에 주목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모든 개별적 존재들이 보편적 가치로 합의된 ‘예(禮)’를 기준으로 하고 그 예에 일치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는 이념을 주장하는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와 정반대되는 입장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되면 구체적 세계에 있는 개별적 존재들에게는 추구해야 할 보편적 이념도 없고, 세계와 관계할 때 사용해야 할 절대적인 가치 기준도 없으며, 내용적으로 정해진 분명한 도달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게 된다. 보편적인 이념의 형태로 행사되는 기준이 없는 한, 개별자들이 각자의 삶을 자율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권리는 빛을 발하게 된다.
개별적 존재들이 보편이라는 모자를 쓴 특정한 이념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로지 각자의 자발적 생명력에만 의지해서 약동하는 상태를 노자는 ‘무위(無爲)’라고 표현한다. 삶을 영위하는 어떤 사람이 ‘반드시 어떠해야 한다’거나 ‘바람직함’이라는 당위의 굴레를 벗어나서 아무런 기준이나 목적성의 제어를 받지 않고 하는 자발적 발휘를 말하는 것이다. 기준이나 목적의식을 덜고 또 덜어내고, 약화시키고 또 약화시키고 나면 결국 무위의 지경에 이르게 된다고 본다(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쉽게 말해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멋대로 하는 상태다.
사람들이 모두 멋대로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람들은 모두가 멋대로 하게 되면 바로 비도덕적 혼란의 상태로 빠지고 말 것이라고 걱정하겠지만, 노자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멋대로 해야 제대로 된다고 말할 뿐이다. 멋대로 해야 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노자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 ‘멋대로 하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다(無爲而無不爲, 도덕경 제37장)’. 멋대로 하면 되지 않는 일이 없기도 하지만, 사회도 비도덕적 혼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절로 교화되고, 저절로 올바르게 되며, 저절로 부유해지고, 저절로 소박해진다(도덕경 제57장)’고 본다. 통치자는 백성들이 각자 제멋대로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제멋대로 하는 것이 주가 되면, 위에서 특정한 기준을 강요하는 위치에 있는 지도자는 존재의 의미가 희박해질 것이다. 노자가 ‘최고 수준의 통치 단계는 통치자가 있다는 사실만 겨우 알고(太上, 下知有之, 도덕경 제57장), 통치자의 존재를 부담으로 느끼지 않는 단계’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보편적 이념의 틀은 모든 사람들에게 원래부터 갖춰진 것으로 인식되는 이성에 의해서 지탱된다. 멋대로 하는 힘은 각자의 욕망에서 나온다. 공자는 인간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인간인 성인들이 만들고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공인된 ‘바람직한 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원칙’ 그리고 ‘좋다고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따르고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자는 그렇지 않다. ‘바람직함’보다는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하고, ‘해야 하는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좋은 일’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편적 이성보다는 개별적 욕망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사회나 조직이 보편적 틀을 수행해야 하는 엄숙주의가 지배하는 한, 생동감이나 자발적 창의성은 고갈돼 조직 자체가 경색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노자의 시각에 의하면 국가나 사회 혹은 기업 조직이 진정한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도권이 구성원들의 자발성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 자발성들이 모여서 하나의 조직을 이뤄야지 조직이 갖는 이념의 틀에 개별적인 각자가 맞춰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삶의 주도권이나 삶에 대한 의미의 확인이 정해진 틀 안에서 이뤄지면 안 되고, 각자의 생활 속에서 확인돼야 한다. 각자의 생활은 이성보다는 욕망의 충동에서 힘을 받는다.
노자가 보기에 조직이나 사회의 건강성은 개별적인 각자가 얼마만큼의 자율성을 부여받고 얼마만큼의 자발적 생명력이 허용되는가에 달려 있다. 거대 사회나 거대 조직에서는 구성원들이 자기만의 고유함을 드러내기 어렵다. 모두 익명성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익명성 속에 존재하는 한, 구성원으로서의 자기는 존재의 가치를 부여받는 느낌을 갖기가 어렵다. 단지 부속품으로만 존재한다고 느낄 것이다. 노자는 개별자들을 자신의 고유명사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나 조직 안에서 자기가 하는 일이 바로 자기 자신의 생명력을 실현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조직을 작은 단위로 운영해야 한다고 본다. 사회나 조직이 거대해지면 구성원들을 익명적 존재로 만들지 않기가 어렵다. 구성원들이 고유한 존재 가치를 느낄 수 있으려면 작은 단위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서울에서의 삶과 시골 고향에서의 삶을 비교해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작은 단위 속에서는 각자의 활동이 모두 자기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진다. 거기서 인간은 보편을 추구하는 인간이 아니라 개별적 욕망을 실현하는 매우 자발적인 존재로 재탄생될 수 있다.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욕망의 존재로 살 수 있게 된다. 거기서 상상력과 창의성이 비로소 움을 틔운다. 노자는 사회나 조직의 이런 작은 단위를 ‘소국과민(小國寡民)’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노자의 기획은 조직이나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삶의 주도권을 돌려주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이나 사회가 강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왜 모든 상품이 소비자의 이성보다는 감성을 자극하려는 시도에서 개발되는가? 현대에서 조직은 어떻게 관리돼야 하는가? 이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렇다면 도대체 현대란 무엇인가?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 지성사의 맥락에서, 현대를 연 것으로 인식되는 철학자들을 꼽으라면 아마 대표적으로 칼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그리고 소쉬르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이성’ 혹은 ‘이성적’인 것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이성은 보편, 본질, 실체, 목적, 이상, 거대함, 기준, 표준, 통일, 집중 등의 개념과 한 가족이다. 이성이 부정되면서 이성의 가족들도 모두 빛을 잃어가는 것이 현대의 방향이다. 그래서 현대는 이성의 가족들보다는 감성의 가족들, 즉 개성, 비본질, 관계, 무목적, 일상, 불확정성, 분산 등의 방향으로 나아가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 많은 거대 조직들이 중앙집권보다는 분산형 팀제로 조직관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왜 그런가? 아마 현대인의 유형에 맞추다 보니까 피할 수 없는 방식이 됐을 것이다. 팀제라고 하는 작은 단위 속에서라야 구성원이 자기의 활동을 자기 삶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노자의 소국과민 시스템이다.
왜 디자인은 모두 감성을 주요 코드로 붙잡는가? 왜 직선보다는 곡선에 긍정적인 시선을 주는가? 왜 인간의 욕망이 긍정되는가? 모두 현대의 방향이 그렇기 때문이다. 만약 현대의 방향이 이렇다면 공자나 맹자보다는 노자나 장자를 만나는 것이 실속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치 오래된 미래처럼 노자나 장자는 기성품처럼 현대를 미리 빚어놓았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현대를 만나고 싶다고? 그렇다면 노자나 장자 그리고 주역 혹은 불교에 주목하시라!
지식보다 깊은 지혜의 말들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을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과 참된 진리가 한 권에 담겨 있다!
무위무욕으로 인위적인 것을 거부하다!
현대인에게 쉴 ‘틈’을 주는 노자의 사상
자본주의와 물질 만능 사회의 병폐가 뿌리 깊어질수록 동양 고전에 대한 관심도 커진다. 삶에 지친 현대인들이 정신적인 안정과 치유를 원하기 때문이다. 삶의 진리를 일깨우고 사색하게 하는 깊은 철학이 고전의 힘이다. 그리고 동양 고전은 서양의 고전과는 다른 ‘여백의 미’를 가졌다. 현대는 과잉이 결핍을 부르는 이상한 시대이다. 현대인은 너무 많이 바쁘고 사회는 너무 많은 정보와 지식들로 넘친다. 그리하여 숨 쉴 ‘틈’, 여백이 존재하지 않는다. 누리는 편리함이 늘어날수록 현대인의 조급증은 심해진다. 하지만 바쁘게 살아도 삶의 속도는 올라가기만 할 뿐 쉴 틈은 주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채우기에 급급한 현대인에게 노자의 세계관, 자연관은 비움을 강조한다. 순리를 따르라고 말하고 억지로 행하는 것들, 인위적인 것들을 부정한다. 노자가 말하는 참된 것은 텅 비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노자는 인간성을 속박하는 시비(是非)나 미추(美醜) 등의 대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원초적인 본성을 찾아야 하고 자연의 도에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노자의 사상은 실질적으로 적용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여유를 잃은 현대인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가르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노자』의 핵심 구절을 다룸으로써 노자의 도에 보다 가까이 가고자 했다. 또한 노자에 영향을 받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사상가들의 사상을 들여다볼 수 있어 노자는 물론 다른 사상가들의 철학도 알 수 있다.
젊어서는 유위의 지식을 불혹에는 무위의 지혜를
젊은 시절에는 이루고 싶은 꿈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다. 그것들은 시간에 마모되면서 완성된 형태를 갖춘다. 꿈을 이뤘든 이루지 못 했든 아직 그 중간에 있든 나이를 먹으면 성숙한 자세가 요구된다. 마흔을 불혹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유혹을 받아도 혹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나온 삶을 천천히 음미하고 앞으로의 삶을 흔들림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젊어서 쌓은 ‘지식’들을 ‘지혜’로 바꿔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젊어서는 유위의 지식을, 불혹에는 무위의 지혜가 필요하다. 『노자』에서 말하는 무위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내려놓고 비우도록 강조한다. 쌓은 욕망과 지식을 두고 한 걸음씩 가벼워지게 한다. 숨 가쁘게 달려온 당신에게 평안을 주고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기를 수 있는 힘이 무위에 있다.
[책 속 한 문장]
공자는 노자와 헤어지고 나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새는 잘 날아다니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치며, 들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달리는 들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싯대를 드리워서 낚으며, 날아다니는 새는 주살을 쏘아야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나 용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아오른다고 하니 나로서는 용의 실체를 알 수가 없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마치 용과 같아 전혀 잡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기』「노장신한열전」
공자는 노자를 매우 존경하여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용처럼 실체를 알 수 없고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공자가 노자를 용이라고 한 일화는『장자』의「천운」에도 나온다. -공자에게 가르침을 준 노자
노자에 따르면 도는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적이며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이다. 그가 말하는 도는“ 태곳적부터 자연적으로 존재하면서 우주와 만물을 다스리는 절대적이고 현묘 불가사의한 영원불멸의 허무虛無”이다. 노자가 바라는 세상은 생명과 자연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만난다. 무위자연의 도는 흐르는 물 같은 과정에서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고 인위적이고 파괴의 힘을 배척한다. 노자의 가르침은 생명 존중과 일맥상통한다. 생활에 있어서도 극단적이고 과격한 일 대신 사치를 버리고 검소함을 취하도록 주장한다. 노자는 “인간에게 타오르는 탐욕의 불을 끄고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면 장차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노자와 무위자연
노자는 모순된 관계에 있는 쌍방이 상호 의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립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배척하거나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세상의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것은 추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착한 것을 착하다고 알아보는 것은 착하지 않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有와 무無는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도 서로의 관계를 성립시켜 주며, 긴 것과 짧은 것도 서로를 이뤄 주고, 높은 것과 낮은 것도 서로를 포함하며, 노래와 소리도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도 서로 따른다. 『노자』 제2장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것은 추함이 존재하기 때문
출판사 서평
노자는 어떤 인물인가
노자는 동양의 사상을 지배했던 성인들 중 한 사람이다. 사마천의 『사기』의 「노장신한열전」에 따르면 노자는 춘추시대 말기의 사람으로 성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이耳이며 자는 담聃이다. 노자를 주나라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이라고도 하는 견해도 있고 은둔자였다는 견해도 있는 등 주장이 엇갈린다. 노자가 살았던 시대는 중국 사회가 계급, 경제, 신분 관계 등 모든 부분에서 구조가 뒤집어지던 혁명적인 때였다. 혼란과 변화가 많던 시기에 유가 사상은 현실적으로 지배 계층의 논리로 사용되었고 노자의 도가 사상은 초현실적으로 다가서며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일깨웠다. 또 인위적으로 백성을 지배하려는 유가 사상을 거부하고 백성을 억압하지 않고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자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노자』는 내용이 상·하 두 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상편을 ‘도경(道經)’ 하편을 ‘덕경(德經)’이라고 구분해서 『도덕경』이라고도 부른다. 『도덕경』은 5,000자 밖에 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진리는 깊고 심오하며 인생의 꿰뚫는 통찰이 압축되어 있다. 동서양 ․ 시대를 막론하여 많은 영향력을 주었고 그 사실을 방증하듯이 수많은 사상가가 노자를 스승으로 모셨고 현대에는 많은 번역본을 갖고 있는 고전들 중 하나이다.
인위적인 것을 거부하고 무위를 외치다
유가의 중심 사상은 사람으로 ‘예’는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유교적 윤리이다. 이에 반해 노자의 도가는 그보다 넓은 범위의 ‘도’를 생각한다. 하나의 일화를 예로 들면 초나라 사람이 활을 잃어버렸다. 그가 활을 찾지 않자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에 초나라 사람은 “초나라에서 잃어버렸으니 초나라 사람이 주우면 됐지. 무엇 때문에 찾는가?”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공자는 “‘초나라라는 말만 빼면 훌륭하다”라고 얘기했다. 즉 사람이 잃어버리고 사람이 찾으면 된다는 뜻으로 공자의 인본주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노자는 “공자의 말에서 사람만 빼면 훌륭하구나”라고 얘기했다. 활을 주운 대상이 사람이 아니어도 어떠냐는 말이다. 따라서 노자는 더욱 더 넓은 범위에서 사고했고 그 사고의 바탕에는 자연과 도가 있었다. 노자의 중심 사상은 도이다. 도는 모호하면서 동시에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의 유한한 언어로는 설명해도 도가 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노자의 도는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것들을 부정한다. 노자 사상은 자연을 추구하며 ‘자연’은 인위적이지 않고 순리를 따르며 ‘저절로 그러한 것’을 뜻한다. 노자는 정치에 있어서도 백성에게 간섭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는 ‘무위이치’를 주장했다. 비폭력을 강조하고 물처럼 흐르고 아이처럼 순수하고 여성처럼 부드러운 것을 최고로 쳤다. 노자의 이러한 사상은 당시에는 유가의 인위성을 폭로했고 도교의 형성을 비롯해 후대에 사상가에게 많은 영향력을 주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 욕망이 극대화된 현대의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미래에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소박한 것에서 멀어진 것을 반성하고 순리를 따르라는 가르침이다. 노자의 가르침은 단순하지만 심오하고 실행하기 어렵다. 버림으로써 얻고 비움으로써 채움이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단순해 보이지만 심오하고 낡은 것 같지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중국 사상계를 지배한 노자의 사상
노자의 풍부한 철학적 내용은 중국 사상계에서 유가 못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도가의 사상가들을 보면 그 면면에는 여러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노자 사상을 골자로 하고 있다. 노자 사상은 도가 철학의 뿌리였고 기초 이론이었다. 중국에서 자생한 도교 역시 도가 철학을 받아들이면서 노자 사상을 흡수했다. 그리하여 노자가 직접 도교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도교의 대표적 인물이자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노자 철학을 받아들인 대표적인 인물은 장자이다. 장자는 노자 사상을 이어 받아 발전시켰다. 장자 외에도 많은 사상가와 정치가들이 노자에게 영향을 받았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 예를 물은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 유가에도 노자 사상의 흔적이 묻어 있다. 또한 법가를 구축한 한비자, 손자병법의 손무, 황로 사상을 발전시킨 왕충 등 수많은 사상가가 그의 가르침을 잇거나 받아들여 새로운 사상을 만들었다. 또한 정치가들은 혼란스러운 시대에 고압적인 정치가 아닌 무위이치를 강조하면서 백성과 더불어 안정을 찾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렇듯 중국 사상계를 지배했던 노자 철학이 현대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노자』를 통해 그 가르침과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불려질 수 있다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만물의 처음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을 때 그 미묘함을 보고 항상 욕심이 있을 때 그 밝게 드러난 모습을 본다 두 가지는 한곳에서 나와서 이름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것은 같으니 현묘하고 또 현묘해서 모든 미묘함의 문이 된다.
도가 밝게 드러나면 도가 아니고 말에 분변하는 것이 있으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천하가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만 알면 이것은 추악한 것이고 모두 선만을 알면 이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있고 없음은 서로를 낳고 어렵고 쉬움은 서로를 만들며 길고 짧은 것은 서로를 드러내고 높고 낮은 것은 서로를 보이게 하고 악기 소리와 목소리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르니 항상 그런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무위의 일에 머무르면서 말 없는 교화를 행한다 만물이 움직이더라도 억지로 시작으로 삼지 않고 베풀면서도 은혜로 내세우지 않고 공을 세우더라도 그 공에 머물지 않으니 오직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 공을 없앨 수 없다.
천지는 위대하구나 낳으면서도 자식으로 삼지 않고 이루면서도 소유하지 않는다.
능력 있는 자를 높이지 않아서 백성들이 공명을 다투지 않도록 하고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히 여기지 않아서 백성들이 도둑질하지 않도록 하며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아서 백성들이 문란함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 이 때문에 성인이 다스릴 때는 마음을 비우게 하고 배를 채우며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하여 항상 백성들이 무지무욕하도록 한다 무릇 지혜로운 자가 감히하지 않고 억지로 하지 않도록 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
지덕의 세상에서는 능력 있는 자를 높이지 않았고 재능 있는 자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다 윗사람은 작은 나뭇가지 같았고 백성은 들판의 사슴 같았다.
도는 조화롭게 사용하니 넘치지 않음이 있다 깊도다 만물의 근본인 것 같구나. 날카로움을 꺾고 어지러움을 풀며 빛남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함께하나니 고요하도다 마치 있는 듯 없는 듯하구나 나는 그가 누구의 자식인 줄 알지 못하나 마치 상제보다도 앞서 있는 것 같다.
현명한 임금은 나라가 클수록 더욱 조심하고 나라가 강할수록 더욱 두려워한다.
천지는 어질지 않으니 만물을 짚강아지처럼 여기고 성인은 어질지 않으니 백성을 짚강아지처럼 여긴다.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와 같구나 텅 비어서 굴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더 큰 소리를 낸다 많이 들으면 빨리 궁해지니 조화로움을 지키는 것이 낫다.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싫어하기 때문에 겨울을 거둬 가는 것이 아니다 땅은 사람이 먼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광야를 가리는 것이 아니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현묘한 암컷이라고 하고 현묘한 암컷의 문을 일러 천지의 뿌리라고 한다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듯 없는 듯하고 써도 써도 지치지 않는다.
높은 것은 삶을 주로 하고 낮은 것은 죽음을 주로 한다 구릉은 수컷이고 계곡은 암컷이다.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 하늘과 땅이 길고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 때문에 장생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성인은 자신을 뒤로 물리면서도 자신이 앞에 있게 되고 자신을 밖으로 내몰면서도 자신을 보존하게 되니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결국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
경공이 안자에게 물었다 반듯한 정치를 해서 장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안자가 대답하였다 그 행함은 물과 같은 것입니다.
지극히 선한 것은 마치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뭇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거함에 좋은 것은 땅처럼 낮은 곳이고 마음 씀에 좋은 것은 못처럼 깊은 것이다 남과 사귈 때 좋은 것은 믿음이고 정사에 좋은 것은 다스려짐이고 일을 할 때 좋은 것은 능함이고 움직일 때 좋은 것은 적절한 때이다 오로지 다투지 않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무릇 군사의 모습은 물과 같다 물의 움직임은 높은 곳을 피하고 아래로 달려가며 군사의 모습도 실한 곳을 피하고 허한 곳을 공격한다 물은 땅의 모양을 따라서 흘러가고 병사는 적에 따라서 승리를 얻는다.
굳게 잡아서 가득 채우는 것은 채우기를 그만두는 것보다 못하다. 다듬어서 날카롭게 하면 길이 보전할 수 없다 금은보옥이 방에 가득하면 지킬 수가 없고 부귀하면서도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기는 것이니 공을 이룬 뒤에는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다.
총명하고 지혜로우면서도 어리석음으로 지키고 공이 천하를 뒤덮는데도 퇴양으로 지키며 용맹과 힘은 세상을 어루만지는데도 비겁함으로 지키고 부유함은 사해를 가질 만한데도 겸손으로 지키는 것 이것이 이른바 물을 뜨면서 조금을 덜어내는 도다.
몸을 이고 하나를 껴안되 능히 떨어짐이 없겠는가. 기운을 고르게 하여 부드러움에 이르되 능히 어린아이처럼 될 수 있겠는가 거뭇한 거울을 닦아서 능히 흠을 없앨 수 있겠는가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살리면서도 능히 지혜로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힐 때도 능히 암컷처럼 할 수 있겠는가 명백히 알아 사방으로 통달하면서도 능히 지혜로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낳아주고 길러주되 낳으면서도 자기 것으로 하지 않고 길러주면서도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을 현묘한 덕이라고 한다.
기운을 고르게 하여 신과 같아지면 만물이 모두 마음속에 갖추어진다 능히 고르게 할 수 있는가 능히 하나로 할 수 있는가 능히 점치지 않고서도 길흉을 알 수 있는가 능히 멈출 수 있는가 능히 그칠 수 있는가.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으로 모이니 바퀴통 속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수레의 쓸모가 있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니 그릇 속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릇의 쓸모가 있다 방을 만들 때는 방문과 창문을 뚫으니 방문과 창문 안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방의 쓸모가 있다 그러므로 있음이 이로운 것은 없음이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
방안에 빈 공간이 없으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싸우게 되고 마음이 자연에서 노닐지 않으면 여섯 개의 구멍이 서로 싸우게 된다.
다섯 가지 좋은 빛깔은 눈을 멀게 하고 말 달리고 사냥하는 것은 마음을 미치게 하고 얻기 어려운 재물은 행동을 그르친다. 다섯 가지 좋은 맛은 입맛을 잃게 하고 다섯 가지 좋은 소리는 귀를 멀게 한다 이 때문에 성인이 다스릴 때는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무릇 사사롭게 보는 것은 눈을 멀게 하고 사사롭게 듣는 것은 귀를 멀게 하며 사사롭게 생각하는 것은 마음을 미치게 한다.
총애나 욕됨에 모두 놀라는 듯이 하고 큰 근심이 몸에 닥칠까 조심한다. 무엇을 총애나 욕됨에 모두 놀라는 듯이 한다고 하는가 총애는 하찮은 것이니 얻을 때도 놀라는 듯이 하고 잃을 때도 놀라는 듯이 한다 이것을 총애나 욕됨에 모두 놀라는 듯이 한다고 한다 무엇을 큰 근심이 몸에 닥칠까 조심한다고 하는가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은 내게 몸이 있기 때문이니 몸이 없다면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천하를 위하는 것보다 자기 몸을 더 소중히 위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기 몸을 아끼는 것처럼 천하를 위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줄 수 있다.
천하는 중한 물건이지만 그것으로도 생을 해치지 않으니 다른 물건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오직 천하로 그 생을 해치지 않는 사람에게만 천하를 맡길 수 있다.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니 어슴푸레하다고 하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니 어렴풋하다고 하고 만지려고 해도 그럴 수 없으니 두루뭉실하다고 한다 이 세 가지는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 때문에 서로 섞여 하나가 된다. 이 하나는 그 위는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으며 끝없이 이어져 이름 지을 수 없으니 무물로 돌아간다 이것을 형상이 없는 형상이라고 하고 사물이 없는 상이라고 하니 이것을 일러 황홀하다고 한다 좇아가려고 해도 그 뒤를 볼 수 없고 맞아들이려고 하여도 그 머리를 볼 수 없다 지금의 도를 잡고서 지금의 일을 다스려 옛날 그 처음을 안다 이것을 도의 줄기라고 한다.
도라는 것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니 형상을 나타낼 수 없다.
옛날에 도를 잘 행한 사람은 미묘하고 그윽히 통달했으니 깊고 깊어 기록할 수 없었다. 오직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억지로 그를 형용하니 머뭇거림은 마치 겨울에 강을 건너는 것 같고 망설임은 마치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엄숙하기는 마치 손님이 된 듯하고 넉넉하기는 마치 얼음이 녹는 듯하며 질박하고 두텁기는 마치 통나무와 같고 흐릿하기는 마치 탁한 물과 같고 드넓기는 마치 골짜기와 같다고 한다 혼탁하면서도 고요히 하여 서서히 맑아지며 편안해하면서도 움직여서 서서히 살아나니 이런 도를 간직한 사람은 채워짐을 원하지 않는다 오직 채워짐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가리고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를 얻은 선비는 귀하기로 천자가 되었어도 교만하지 않고 부유하기로 천하를 소유할 만하면서도 방종하지 않으며 비천하기로 베옷을 입었으면서도 낙담하지 않고 가난하기로 의식이 부족하면서도 근심하지 않는다.
허함에 이르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돈독히 한다 만물이 바야흐로 깨어날 때 나는 그것을 통해 그들이 돌아가는 곳을 본다 세상의 사물은 많지만 모두 그 뿌리로 돌아간다. 고요함이라고 하였으니 고요함을 일러 명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명으로 돌아가는 것이 항상된 이치이고 항상된 이치를 아는 것이 명철함이다 항상된 이치를 모르면 망령스럽게 행동할 것이니 망령스럽게 행동하면 흉하다 항상된 이치를 알면 너그러워지고 너그러워지면 공정하게 되며 공정하게 되면 왕과 같이 된다 왕과 같이 되면 하늘과 짝하고 하늘과 짝하면 도와 하나가 되고 도와 하나가 되면 장구하게 되니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사람은 어떻게 도를 아는가 마음이다 마음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비우고 전일하게 하고 고요히 함으로써이다.
가장 좋은 것은 백성들이 임금이 있는 것만 아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며 그 다음에는 두려워하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임금을 모욕하는 것이다. 믿음이 부족하면 불신이 생기니 머뭇거리며 말을 아낀다 공을 세우고 일을 이루어도 백성은 모두 자기 스스로 그러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대도가 사라지자 인의가 생겼고 지혜가 나타나자 큰 거짓이 생겼다 육친이 불화하면서 효도와 자애로움이 생겼고 나라가 혼란해지자 곧은 신하가 생겼다.
크도다 요임금의 임금됨이여 높구나 오직 하늘이 위대하거늘 오직 요임금이 그를 본받았으니 그 덕이 넓고도 넓어 백성이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 배가 될 것이다 인을 끊고 의를 버리면 백성이 다시 효도하고 자애할 것이다 기교를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이 사라질 것이다. 이 세 가지 말은 본받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 때문에 붙이는 말이 있게 하니 흰 바탕을 드러내고 통나무를 껴안을 것이며 자기를 적게 하고 욕심을 줄여라.
성인의 도는 지혜와 기교를 없애는데 있으니 지혜와 기교가 없어지지 않으면 상도(常道)를 만들기 어렵다.
배움을 끊으면 걱정이 없다 공손한 대답과 불경스러운 대답이 얼마나 차이가 있으며 아름다움과 추악함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남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아득하구나 끝이 없도다 뭇사람들은 즐거워하며 마치 잔치 고기를 먹고 봄에 누대에 오르는 듯한데 나는 덤덤하여 드러나질 않으니 마치 갓난아이가 아직 웃지 못하는 것 같고 피곤하여 돌아갈 데가 없는 것 같다 뭇사람들은 여유가 있는데 나만 홀로 버려졌다 이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바보같다 세속 사람은 환히 빛나는데 나만 홀로 어두우며 세속 사람은 똑똑한데 나만 홀로 어리숙하다 없는 듯하되 마치 어두컴컴한 것 같고 있는 듯하되 마치 멈출 데가 없는 것 같다 뭇사람들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 나만 홀로 어리석고 비루하다 나만 홀로 남과 다르게 되고자 하여 유모를 귀하게 여긴다.
배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니 배우지 않으면 해로움이 없다.
큰 덕의 모습은 오직 도를 따른다. 도라는 물건은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다 없는 듯 있는 듯 그 가운데 상이 있고 있는 듯 없는 듯 그 가운데 사물이 있다 어둡고 컴컴한 듯 그 가운데 실정이 있으니 그 실정이 심히 진실하고 그 가운데 믿음이 있다 지금부터 옛날에 이르도록 그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만물에 순응한다 내가 어찌 만물이 그러함을 알겠는가 이 때문이다.
도는 실정이 있고 믿음이 있지만 무위하고 무형하다 전할 수는 있지만 받을 수는 없고 얻을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다.
뒤꿈치를 들면 오래 설 수 없다. 스스로 보면 환하지 않고 스스로 보면 밝지 않으며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공을 세울 수 없고 스스로 과시하는 사람은 뛰어나지 않다 그런 사람을 도로 보아 말하자면 찌꺼기 음식이나 사마귀와 같다 사람들이 종종 그것을 싫어하니 그 때문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거기에 거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공이 없고 공을 이룬 자는 망하고 이름을 이룬 자는 이그러진다고 하였으니 누가 공과 이름을 버리고 뭇사람들과 함께하겠는가.
구부리면 온전할 수 있고 휘어지면 바로 펼 수 있다 움푹 파인 구덩이는 가득 채워질 수 있고 낡으면 새로워질 수 있고 적게 가지면 얻을 수 있고 많이 가지면 미혹된다. 이 때문에 성인은 하나를 잡아서 천하의 모범이 된다 스스로 보지 않기 때문에 밝고 스스로 보지 않기 때문에 환하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공이 있고 스스로 과시하지 않기 때문에 뛰어나다 무릇 다투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그와 함께 다툴 수 없다 옛날의 이른바 구부리면 온전해진다는 말이 어찌 말뿐이겠는가 진실로 온전하게 되어 그곳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정말로 쓸모없는 나무이니 그 때문에 이렇게까지 클 수 있었다.
말을 적게 하고 자연에 따른다. 회오리 바람도 아침 나절을 넘기지 못하고 폭우도 한나절을 가지 않으니 누가 이렇게 한 것인가 하늘과 땅도 오래가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그러므로 일을 할 때 도를 따르는 사람은 도와 함께할 것이다 얻음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얻음과 함께할 것이고 잃음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잃음과 함께할 것이다 얻음과 함께하는 사람은 도도 얻을 것이고 잃음과 함께하는 사람은 도도 잃을 것이다.
가을에 일찍 추워지면 겨울은 반드시 따듯하고 봄에 비가 많으면 여름에는 반드시 가문다 천지도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어떤 물건이 있어 혼돈스럽게 이루어졌으니 천지보다도 먼저 생겨났다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이 홀로 서서 변하지 않으니 천지의 어미가 될 만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니 자를 붙여 도라고 하고 나는 억지로 이름하여 ‘크다’고 한다 크면 갈 것이고 가면 멀어질 것이고 멀어지면 돌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고 왕도 크다 나라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으니 왕이 그 중의 하나를 차지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스스로 근본이 되고 뿌리가 되어서 천지가 아직 없을 때에도 예로부터 진실로 존재했다.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요 고요함은 조급함의 주인이다. 이 때문에 군자는 하루종일 길을 가도 옷과 음식을 실은 수레 곁을 떠나지 않으며 비록 호화스러운 궁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평소의 거처에서 담담히 기거한다 어찌 만승의 왕이 되었으면서도 그 몸으로 천하에 경거망동하겠는가 가벼우면 근본을 잃을 것이고 조급하면 주인을 잃을 것이다.
큰 것으로 작은 것을 부리고 무거운 것으로 가벼운 것을 부리며 많은 것으로 적은 것을 부리는 것 이것이 왕 노릇 하는 사람이 집안을 이루어 온전히 할 수 있는 길이다.
길을 잘 가는 사람은 자취를 남기지 않고 말을 잘 하는 사람은 흠을 남기지 않으며 셈을 잘 하는 사람은 산가지를 쓰지 않는다 잘 닫는 사람은 빗장이나 자물쇠를 쓰지 않지만 열 수 없고 잘 묶는 사람은 새끼나 밧줄을 쓰지 않지만 풀 수 없다. 이 때문에 성인은 항상 사람을 잘 구제하여 그들을 버림이 없고 물건에는 재물을 버림이 없다 이것을 총명함을 가린다고 한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스승이요 선하지 않은 사람은 선한 사람을 돕는 자다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돕는 자를 아끼지 않는다면 비록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크게 미혹될 것이니 이것을 미묘한 요체라고 한다.
무릇 곡자나 먹줄, 그림쇠나 자를 가지고서 남을 바르게 하는 것은 그 본성을 해치는 것이고 새끼줄이나 아교를 가지고서 든든하게 만드는 것은 그 덕을 훼손하는 것이다.
수컷을 알면서도 암컷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 천하의 계곡이 되면 언제나 덕이 떠나지 않는다 덕이 떠나지 않으면 어린아이로 되돌아간다 깨끗한 것을 알면서도 더러운 것을 지키면 천하의 골짜기가 된다 천하의 골짜기가 되면 언제나 덕이 족하다 덕이 족하면 통나무로 돌아간다 흰 것을 알면서도 검은 것을 지키면 천하의 모범이 된다 천하의 모범이 되면 언제나 덕이 어그러지지 않는다 덕이 어그러지지 않으면 무극으로 돌아간다 통나무가 흩어지면 그릇이 되고 성인이 쓰이면 군왕이 된다 무릇 큰 제도는 갈라짐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일)를 아는 것을 알면 통나무로 돌아간다.
장차 천하를 취하려 하면서 억지로 하려는 것 나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안다. 무릇 천하는 신명스러운 그릇이니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하는 자는 그르칠 것이고 잡으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사물은 혹은 앞서 나가기도 하고 혹은 따르기도 하며 혹은 뜨겁기도 하고 혹은 차갑기도 하며 혹은 강하기도 하고 혹은 꺾이기도 하며 혹은 북돋우기도 하고 혹은 망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성인은 심하고 지나치고 사치한 것을 멀리한다.
향기롭고 맛난 음식과 좋은 술, 기름진 고기는 입에는 즐겁지만 몸을 병들게 하고 고운 피부와 하얀 이의 여인은 정에는 기쁘지만 정기를 해친다 그러므로 심하고 지나친 것을 멀리해야 몸에 해로움이 없다.
도로 임금을 보좌할 것이며 군사로 천하를 제패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금세 보응이 있다 군사가 있었던 자리에는 가시가 돋아난다. 용병을 잘하는 사람은 이길 따름이니 그것으로 강함을 취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기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이기면서도 내세우지 않고 이기면서도 자랑하지 않고 이기면서도 부득이하게 그런 것이다 이것을 이기면서도 거세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만물은 억세지면 곧 늙어버리니 그를 일러 도가 아니라 한다 도 아닌 일을 행하면 일찍 죽을 것이다.
병사에 힘쓰지 않고 욕됨을 꺼리지 않으며 잘못을 보복하지 않으면 사직이 편안하고 병사에 힘쓰고 욕됨을 꺼리며 잘못을 보복하면 사직이 위태롭다.
무릇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니 사람들이 종종 그것을 싫어한다 그 때문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거기에 거하지 않는다. 군자는 평소에는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용병할 때는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무기는 군자의 기물이 아니며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니 부득이하게 사용할 뿐이다 날카로운 무기가 좋기는 하지만 아름답게 여겨서는 안 된다 만약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면 이것은 살인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무릇 살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천하에 뜻을 얻을 수 없다 이 때문에 길한 일에는 왼쪽을 높이고 상사에는 오른쪽을 높인다 그러므로 편장군은 왼쪽에 자리잡고 상장군은 오른쪽에 자리잡으니 상례에 따라 자리잡는 것이다 죽인 사람이 많으면 슬퍼하면서 나아가고 싸움에서 이기면 상례로 처리한다.
무릇 무기는 천하의 흉기이며 용맹은 천하의 흉덕이다 흉기를 들고 흉덕을 행하는 것은 부득이함에서 나온다.
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다 통나무는 비록 작은 것이지만 천하가 감히 신하로 삼지 못한다 후왕이 이 도리를 잘 지키면 만물이 스스로 복종할 것이다. 천지가 서로 합하여 감로를 내리고 백성은 명령하지 않아도 스스로 균평하였다 처음에 제도를 만듦에 명분이 있게 되었으니 명분이 이미 있다면 또한 장차 그칠 것을 알아야 한다 그칠 것을 알아야 위태롭지 않다 비유하건대 천하에 대해서 도는 마치 작은 계곡이 강이나 바다에 대한 것과 같다.
그칠 것을 안 이후에야 정해짐이 있고 정한 이후에야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해진 이후에야 편안할 수 있고 편안해진 이후에야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한 이후에야 얻을 수 있다.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고 스스로를 아는 사람은 밝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고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은 강하다. 족함을 아는 사람은 부유하고 힘써 행하는 사람은 뜻을 가진 것이다 제자리를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 갈 것이고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살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이기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스스로를 이겨야 하고 남을 논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스스로를 논해야 하며 남을 알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신을 알아야 한다.
도는 그득히 넘실거리며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갈 수 있다. 공을 세우고 일을 이루면서도 그 이름을 가지지 않고 만물이 돌아가는데도 주인이 되지 않으니 언제나 욕심이 없다 그러므로 작다고 할 수 있다 만물이 돌아가는데도 주인이 되지 않으니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성인이 위대할 수 있는 것은 위대해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대해지는 것이다.
도에는 애당초 경계가 없고 말에는 애당초 항상된 이치가 없다.
대상을 잡으면 천하가 그에게로 가니 가서 해치지 않으면 태평을 누린다 음악과 음식은 과객을 멈추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도가 말을 낼 때는 담백하여 아무 맛이 없으며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을 수 없으나 쓰임에 다함이 없다고 한다.
종일토록 보려고 해도 보지 못하고 들으려고 해도 듣지 못하고 만지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장차 움츠러들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벌리게 하고 장차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하며 장차 없애려면 반드시 먼저 높이고 장차 빼앗으려면 반드시 먼저 줄 것이다. 이것을 미묘한 데서 밝다고 하니 유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고기는 못을 벗어날 수 없으니 나라의 좋은 물건은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용병이란 속이는 길〔詭道〕이다 그러므로 능하면서도 불능한 것을 보여주고 사용하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며 가까우면서도 먼 것을 보여주고 멀면서도 가까운 것을 보여준다.
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으니 후왕이 그것을 잘 지키면 만물이 스스로 교화될 것이다. 교화되면서도 욕심이 일어나면 나는 이름 없는 통나무로 누를 것이다 이름 없는 통나무로 누르면 장차 욕심이 없어질 것이니 욕심이 없어져서 고요해지면 천지가 스스로 바르게 된다.
왕께서 만약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싶으시다면 백성의 입을 막고 그들을 이끌어 쓸데없는 일과 번거로운 가르침에 몰두하도록 하십시오.
뛰어난 덕은 덕에 마음을 두지 않으니 이 때문에 덕이 있고 하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고 하니 이 때문에 덕이 없다. 뛰어난 덕은 무위하며 또 그렇게 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뛰어난 인은 사랑하지만 그렇게 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뛰어난 의는 의를 행하면서 그렇게 하여 무엇인가 하려고 한다 뛰어난 예는 예를 따르면서 사람이 응하지 않으면 팔을 걷고 사람을 잡아당긴다 그러므로 도를 잃는다 도를 잃은 이후에 덕이고 덕을 잃은 이후에 인이고 인을 잃은 이후에 의고 의를 잃은 이후에 예다 무릇 예는 건실함과 믿음이 옅은 것이니 어지러움의 싹이다 미리 아는 것은 도의 헛된 꽃이니 어리석음의 싹이다 이 때문에 대장부는 두터운 곳에 머물지 옅은 곳에 머물지 않으며 열매에 머물지 꽃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지극한 지혜는 지혜를 버리고 지극한 인은 인을 버리며 지극한 덕은 덕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옛날에 하나를 얻은 것은 이러했다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 편안하고 귀신은 하나를 얻어 신령스럽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 가득 차고 후왕은 하나를 얻어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그 경계함에는 하늘이 끊임없이 맑으면 장차 찢어질까 두렵다고 하고 땅이 끊임없이 편안하면 장차 흔들릴까 두렵다고 하고 귀신이 끊임없이 신령스러우면 장차 영험하지 못할까 두렵다고 하고 골짜기가 끊임없이 가득 차면 장차 마를까 두렵다고 하고 후왕이 끊임없이 귀하고 높으면 장차 거꾸러질까 두렵다고 한다 그러므로 귀해지려면 반드시 천함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고 높아지려면 반드시 낮음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이 때문에 후왕은 스스로를 일컬어 고·과·불곡이라고 하니 이것이 천함의 근본됨이겠는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영예로움을 헤아리면 영예로움은 없다 이 때문에 영롱하여 옥과 같이 되려고 하지도 않고 거무튀튀하여 돌과 같이 되려고 하지도 않는다.
성왕이 하나를 잡으면 사방의 오랑캐가 복종한다는 것이 이 뜻이다 하나를 잡는 사람은 지극히 귀한 사람이니 지극히 귀한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뛰어난 선비가 도를 들으면 힘써 그것을 실천하고 그럭저럭한 선비가 도를 들으면 보존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며 하찮은 선비가 도를 들으면 크게 웃으니 저들이 웃지 않으면 도라 하기 어렵다. 그래서 세워진 말에 이런 것이 있다 밝은 길은 어두운 듯하고 나아가는 길은 물러서는 듯하며 평탄한 길은 울퉁불퉁한 듯하다 뛰어난 덕은 골짜기와 같고 참으로 깨끗한 것은 더러운 것 같으며 넓은 덕은 부족한 것 같다 씩씩한 덕은 게으른 것 같고 본래부터 곧은 것은 변하는 것 같고 큰 모에는 모서리가 없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며 큰 소리는 잘 들을 수 없고 하늘의 형상은 드러나지 않으니 도가 성하면 이름이 없다 오직 도로 해야만 아름답게 시작해서 아름답게 마칠 수 있다.
슬프구나 큰 소리는 세상 사람의 귀에 들어가지 않고 듣기 좋은 유행가는 갈채를 받는다 이 때문에 고매한 말은 뭇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으니 지극한 말이 나오지 않으면 속스러운 말이 유세를 떨치는 법이다.
뒤집어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고 유약한 것이 도의 쓰임이다. 천하의 사물은 유에서 나오지만 유는 무에서 나온다.
지극히 긴 것은 거꾸로〔反〕 짧아지고 지극히 짧은 것은 거꾸로〔反〕 길어지는 것이 하늘의 도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지를 등지고 양지를 껴안아 그 가운데의 기운을 조화롭다고 여긴다. 천하가 싫어하는 것은 오직 외롭고, 덕이 부족하며, 선하지 않은 것이나 왕공은 스스로 그것으로 이름한다 일이란 혹 덜어내려고 하여도 오히려 보태지고 보태려고 하여도 덜어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는 또한 이 뜻으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강하고 굳세기만 한 사람은 옳게 죽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배움의 근본으로 삼을 것이다.
이미 하나가 되었으니 또 말이 있을 수 있는가 이미 하나라고 하였으니 또 말이 없을 수 있는가 하나와 말이 합쳐서 둘이 되고 둘과 하나가 합쳐서 셋이 된다.
천하의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지극히 굳센 것을 뚫는다. 형체가 없는 것은 틈이 없는 곳으로도 들어가니 이로써 나는 무위의 유익함을 알겠다 말 없는 가르침과 무위의 유익함은 천하에 능히 도달할 자가 드물다.
때려도 찢어지지 않고 찔러도 상하지 않으며 잘라도 잘라지지 않고 태워도 태워지지 않는다 질척하게 흘러다니고 뒤섞여 몰려다니면서도 뭉개지지 않으니 그 날카로움은 금석을 뚫고 그 강함은 천하에 통한다.
이름과 몸 중에 어느 것이 더 가까운가 몸과 재물 중에 어느 것이 더 중한가 얻음과 잃음 중에 어느 것이 더 근심스러운가. 지나치게 아끼면 반드시 크게 쓰게 되고 많이 간직하면 반드시 크게 잃게 된다 그러므로 족함을 알아야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아야 위태롭지 않으니 이렇게 해야만 길고 오래갈 수 있다.
소인은 이익을 위해 몸을 죽이고 선비는 이름을 위해 몸을 죽이며 대부는 집안을 위해 몸을 죽이고 성인은 천하를 위해 몸을 죽인다 이 몇 가지 경우는 사업이 다르고 명성도 다르지만 본성을 해치고 몸을 죽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크게 이루어진 것은 흠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 크게 채워진 것은 마치 빈 듯하다 하지만 그 쓰임은 궁색하지 않다. 큰 곧음은 마치 구부러진 듯하고 큰 재주는 마치 졸렬한 듯하고 큰 여유는 마치 부족한 듯하다. 몸을 급히 움직이면 추위를 이길 수 있고 고요히 안정하면 더위를 이길 수 있으니 맑고 고요해야만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움직이면 자기 자리를 잃을 것이니 고요해야만 자득한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잘 달리는 말을 버리고 농사를 짓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군마가 전쟁터에서 새끼를 낳는다. 죄는 욕심이 많은 것보다 큰 것이 없고 화는 족함을 알지 못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며 허물은 얻기를 원하는 것보다 아픈 것이 없다 족함이 족함이 되는 것을 알면 항상 족할 것이다.
마음을 기르는 데는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사람됨이 욕심이 적으면 간직하지 못한 것이 있더라도 적을 것이며 사람됨이 욕심이 많으면 간직한 것이 있더라도 적을 것이다.
문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창문으로 내다보지 않아도 천도를 안다. 멀리 나서면 나설수록 아는 것은 점점 적어진다 이 때문에 성인은 돌아다니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고서도 이름을 말하고 하지 않고서도 이룬다.
인이 멀리 있는가 내가 원하기만 하면 인이 나에게 이를 것이다.
학문을 하는 자는 날마다 더하고 도를 들은 사람은 날마다 덜어낸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무위에 이르니 무위하면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바야흐로 천하를 취하려 한다면 언제나 일이 없음으로 해야 할 것이니 만약 일이 있게 되면 천하를 취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대개 알지도 못하면서 글을 짓는 사람이 있으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많이 듣되 그 선한 것을 택하여 따를 것이니 많이 보고 그것을 기록하는 것은 이것보다 못한 앎이다.
성인은 언제나 사심이 없으니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 선한 사람은 선하게 대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도 선하게 대하니 그 덕은 선이다 미더운 사람은 믿어주고 미덥지 않은 사람도 믿어주니 그 덕은 믿음이다 성인이 천하에 임할 때는 두루뭉실하게 천하를 위하여 마음을 섞는다 백성은 모두 성인의 행동에 이목을 기울이나 성인은 모두를 어린아이로 대한다.
남이 나를 잘 대해주면 나도 잘 대해줄 것이고 남이 나를 잘 대해주지 않아도 나는 잘 대해줄 것이다.
태어났다가 죽는 일에서 생명의 무리가 십 분의 삼이고 죽음의 무리가 십 분의 삼이다 백성들은 살고 또 살려고만 하니 몸을 움직여 사지로 가는 것이 또 십 분의 삼이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살고 또 살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대개 듣건대 생명을 잘 지키는 사람은 높은 언덕에 나아가도 코뿔소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고 군대에 들어가도 갑옷이나 병기를 갖추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코뿔소는 그 뿔로 들이박을 수 없고 호랑이는 그 손톱으로 할퀼 수 없으며 병사는 그 칼날을 먹일 수 없다고 하였다 무엇 때문인가 사지가 없기 때문이다.
옛날의 진인은 삶을 즐거워하지도 않았고 죽음을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 태어남〔出〕을 기뻐하지도 않았고 그 돌아감〔入〕을 거부하지도 않았으니 거칠 것 없이 가고 거칠 것 없이 왔을 따름이다.
도는 낳고 덕은 기르니 사물은 형체를 이루고 기물은 완성된다. 이 때문에 만물은 도를 높이고 덕을 귀하게 여기니 도의 높음과 덕의 귀함은 벼슬을 주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스스로 그러할 뿐이다. 도는 낳고 기르고 자라게 하고 완성시키며 형체를 주고 바탕을 이루게 하고 길러주고 덮어준다 낳으면서도 자기 것으로 하지 않고 위해주면서도 뽐냄이 없고 길러주면서도 마음대로 하지 않으니 이것을 현묘한 덕이라고 한다.
명왕의 다스림은 공이 천하를 덮을 만하면서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고 교화는 만물에 미치는데도 백성들은 그것에 의지하지 않는다.
천하에는 시작이 있으니 그것을 천하의 어미로 삼는다. 이미 어미를 얻고 그를 통해 자식을 알며 다시 그 어미를 지킨다면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그 입을 막고 그 귀를 닫으면 죽을 때까지 수고스럽지 않다 그 입을 열고 그 일을 이루게 한다면 죽을 때까지 구제할 수 없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눈이 밝다고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빛을 사용하되 그 밝음으로 되돌아가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감추고 또 감춘다고 한다.
천지에는 시작이 있다 하늘은 가벼운 것으로 이루어지고 땅은 무거운 것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천지가 서로 화합하는 것이 태어남의 큰 법칙이다.
만약 내가 조금이나마 아는 것이 있어서 대도를 행한다면 오직 허세를 부릴 것이 두려울 뿐이다 대도는 심히 평탄한데 백성들은 작은 길만 좋아한다. 조정은 잘 정리되었으면서도 밭은 황폐하며 창고는 비었는데도 화려한 옷을 입고 날카로운 검을 차고 배부르도록 먹으면서도 재물이 남는 것을 도둑질을 자랑한다고 하니 도둑질을 자랑하는 것은 도가 아니다.
산 속 작은 길 사람 다니는 곳은 넓지 않더라도 자꾸 이용하다보면 결국은 길이 된다 그렇지만 한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잡초가 길을 가린다.
잘 세운 것은 뽑히지 않고 잘 간직한 것은 달아나지 않으니 자자손손 제사가 끊기지 않을 것이다. 그것으로 몸을 다스리면 그 덕은 참됨이고 그것으로 집을 다스리면 그 덕은 여유로움이며 그것으로 마을을 다스리면 그 덕은 장대함이고 그것으로 나라를 닦으면 그 덕은 풍족함이고 그것으로 천하를 다스리면 그 덕은 광대함이다 몸으로 몸을 살피고 집안으로 집안을 살피고 고을로 고을을 살피고 나라로 나라를 살피고 천하로 천하를 살핀다 내가 어떻게 천하의 그러함을 알겠는가 이것 때문이다
집안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고을로 고을을 다스리며 나라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로 천하를 다스린다.
덕을 두텁게 머금은 사람은 갓난아이에 비길 수 있다. 벌이나 독충이나 독사도 물지 않고 발톱이 억센 새나 사나운 짐승도 후려치지 않는다 뼈는 약하고 힘줄은 부드러운데도 쥐는 것은 억세고 암수의 교접을 알지 못하면서도 양물은 성나 일어서니 정기의 지극함이다 하루종일 울어도 목이 메이지 않으니 조화로움의 지극함이다 조화로움을 적당함이라고 하고 조화를 아는 것을 밝다고 한다 목숨을 더하려는 것을 요망하다고 하고 마음이 기를 억지로 하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만물은 억세지면 곧 늙어버리니 그를 일러 도가 아니라 한다 도 아닌 일을 행하면 일찍 죽을 것이다.
어린아이는 종일토록 울어도 목이 잠기지 않으니 화기가 지극한 것이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입을 막고 그 귀를 닫으며 빛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함께한다 날카로움을 꺾고 분란을 푸니 이것을 현묘한 어울림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까이할 수도 없고 또 멀리할 수도 없다 이롭게 할 수도 없고 해롭게 할 수도 없다 귀하게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천하의 귀한 것이 된다.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도는 책에 있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은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니 말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뜻〔意〕이다 뜻은 따르는 바가 있으니 뜻이 따르는 것은 말로 전할 수 없다.
올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기이함으로 군사를 지휘하며 일삼음이 없음으로 천하를 취한다. 내가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무릇 천하에 금기가 많으면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에게 좋은 물건이 많으면 나라는 더욱 혼란해지며 사람들이 아는 게 많으면 이상한 물건도 많아지고 법령이 복잡해지면 도적은 더 많아진다 이 때문에 성인의 말씀에 이르기를 내가 무위하니 백성은 스스로 교화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니 백성은 스스로 올바르게 되며 나에게 일삼는 것이 없으니 백성은 스스로 부유해지고 내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자 하니 백성은 스스로 소박해진다고 하였다.
먼저 부르짖지 않고 단지 어울리며 앞에 나서지 않고 단지 따른다.
다스림이 어리숙하면 그 나라는 돈후해지고 다스림이 깐깐하면 그 나라는 황폐해진다 재앙에는 복이 기대고 있고 복에는 재앙이 엎드리고 있으니 누가 그 끝을 알겠는가 정해진 올바름이란 없다. 올바른 것은 다시 이상한 것이 되고 선한 것은 다시 요망한 것이 된다 사람들의 미혹됨은 참으로 오래되었구나 이 때문에 반듯하면서도 남을 재단하지 않고 모가 서려 있으면서도 남을 찌르지 않으며 곧바르면서도 널리 펼치지 않고 빛나면서도 번쩍거리지 않는다.
상서는 복에 앞서서 나타나지만 상서를 보고 불선한 일을 행하면 복이 이르지 않고 요얼은 재앙에 앞서서 나타나지만 요얼을 보고 선을 행하면 재앙이 이르지 않는다.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 아끼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오직 아끼기 때문에 일찌감치 준비할 수 있으니 일찌감치 준비하는 것을 두텁게 덕을 쌓는다고 한다 두텁게 덕을 쌓으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고 이기지 못할 것이 없으면 막히는 곳을 알 수 없으며 막히는 곳을 알지 못할 정도라야 나라를 가질 수 있으니 나라의 어미가 있어야 장구할 수 있다 이것을 휜 뿌리는 깊고 곧은 뿌리는 단단하다고 하니 장생구시의 길이다.
생각이 일찍 정해졌기 때문에 머리 쓰는 것을 일찍 아낄 수 있었고 머리 쓰는 것을 일찍 아낄 수 있었기 때문에 정기가 고갈되지 않은 것이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지지는 것과 같다. 도를 가지고 천하에 나아가면 귀신도 영험을 부리지 않는다 귀신이 영험을 부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영험함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이고 그 영험함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만 아니라 성인도 귀신을 해치지 않는다 무릇 이 둘이 서로 해치지 않으니 그 때문에 덕을 나누어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 땅에는 일찍 죽고 상처입는 것이 없으며 사람들은 요절하지 않고 물건들은 병나지 않고 귀신은 영험을 부리지 않는다.
큰 나라는 아래로 흐르는 물이니 천하의 암컷이며 천하가 모이는 곳이다 암컷은 항상 고요함으로 수컷을 이기니 고요하기 때문에 마땅히 아래로 처한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 아래에 처하면 작은 나라를 취할 수 있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 아래에 처하면 큰 나라에 용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는 아래로 처하여 취할 수 있고 어떤 경우는 아래로 처하여 용납될 수 있다 큰 나라가 원하는 것은 남을 끌어안아 기르는 것에 지나지 않고 작은 나라가 원하는 것은 남의 품안으로 들어가 그를 섬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릇 모두 원하는 것을 얻은 것이니 큰 나라가 마땅히 아래로 처해야 한다.
큰 나라로 작은 나라를 섬기는 사람은 천명을 즐거워하는 사람이고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기는 사람은 천명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니 천명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천하를 보존할 수 있고 천명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나라를 보존할 수 있다.
도는 만물의 주인이니 선한 사람에게는 보배이며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보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말을 하면 장사를 할 수 있고 존귀한 행동을 하면 남보다 뛰어날 수 있다 사람의 불선함을 어떻게 버릴 수 있는가 그 때문에 천자를 세우고 삼경을 둔 것이다 비록 한아름 되는 벽옥을 앞세우고 네 필 말이 끄는 수레로 빙문(聘問)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 가만히 앉아 이 도에 나아가는 것보다 못하다 옛날에 이것을 귀하게 여긴 이유는 무엇인가 구하면 얻고 죄가 있더라도 면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천하의 귀한 것이 되는 것이다.
도는 한 사람이 사용하여도 남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고 천하가 그것을 행하여도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이것을 도라고 한다
무위를 행하고 아무것도 일삼음이 없음을 일삼으며 맛없음을 맛보니 큰 것은 작게 여기고 많은 것은 적게 여기며 원한은 덕으로 갚는다. 쉬운 데서 어려운 것을 도모하며 작은 데서 큰 일을 행한다 천하의 어려운 일은 쉬운 일에서 시작되고 천하의 큰 일은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이 때문에 성인은 끝내 위대해지려고 하지 않으니 그 때문에 그 위대함을 이룰 수 있다 무릇 가벼운 승낙은 반드시 믿음이 적으며 크게 쉬운 일은 반드시 크게 어려워진다 그래서 성인은 오히려 그것을 어렵게 여기니 그 때문에 어려움 없이 마칠 수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덕을 갚겠느냐 곧바름으로 원한을 갚고 덕으로 덕을 갚을 것이다
고요히 있을 때는 유지하기 쉽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은 도모하기 쉬우며 허약한 것은 쪼개기 쉽고 작은 것은 흐트러뜨리기 쉽다. 아직 있지 않을 때 그것을 위해 행동하고 아직 어지럽지 않을 때 그것을 다스린다 한아름 되는 나무는 털끝만한 데서 자라고 아홉 층이나 되는 누대도 한 삼태기의 흙에서 세워지며 백 길이나 되는 높은 곳도 발끝에서 시작된다. 억지로 하려는 사람은 실패하고 잡으려는 사람은 잃게 된다 성인은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으니 그 때문에 실패가 없으며 잡으려고 하지 않으니 그 때문에 잃는 것이 없다 백성들이 일을 할 때는 항상 일이 다 될 때쯤 잘못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을 조심하기를 처음과 같이 한다면 잘못되는 일이 없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성인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자 하니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아무것도 배우지 않기를 배우면서 뭇사람들이 지나간 곳을 다시 지나간다 능히 만물의 자연스러움을 도와 감히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는다.
처음을 조심하고 마지막을 생각하면 항상 곤궁하지 않다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으면 마침내 곤궁할 것이다.
옛말에 도를 행하는 사람은 백성을 지혜롭게 하지 않고 우매하게 한다고 하였으니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 지혜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해악이고 지혜롭지 않음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복덕이다 언제나 이 두 가지를 아는 것이 또한 예나 지금이나 같이 본받는 바이니 예나 지금이나 같이 본받는 바를 아는 것을 현묘한 덕이라고 한다 현묘한 덕은 깊고도 아득하구나 뭇 사물과 다른 길을 택하여 크게 순응하는 데 이른다.
백성들은 그렇게 하게 할 수는 있어도 그 이유를 알게 할 수는 없다.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아래로 잘 처하기 때문이니 그 때문에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성인은 백성 위에 서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말을 낮추고 백성 앞에 서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몸을 뒤로 한다 그러므로 앞에 있더라도 백성들은 해롭다고 여기지 않고 위에 있더라도 백성들은 무겁다고 여기지 않는다 천하가 즐겨 추대하여 싫어할 줄 모르니 다투지 않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천하가 그와 다툴 수 없는 것이다.
성인은 백성 위에 올라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 때문에 천하에 왕 노릇을 하려는 자는 반드시 백성을 우선하니 그 다음에 그들을 보호하면 길게 이로울 것이다.
나라는 작게 여기고 백성은 적게 여긴다. 열 사람 백 사람을 감당하는 인재가 쓰이지 않도록 하며 백성이 죽음을 중히 여겨 집을 옮기는 것을 멀리하도록 한다 수레나 배가 있더라도 타지 않고 갑옷과 무기가 있더라도 벌려놓지 않으며 백성들이 다시 새끼를 묶어 사용하도록 한다 먹는 것은 달게 여기고 입는 것은 아름답게 여기며 풍속을 즐거워하고 사는 곳에 편안히 한다 이웃 나라와 서로 볼 수 있을 정도이고 닭과 개 우는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라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장사 지내거나 집을 옮기더라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여러 집이 한 우물을 사용한다 집에 들어오고 나감에 서로 같이 다니고 도둑을 지킴에 서로 도우며 병이 났을 때 서로 돌보도록 하였으니 백성이 친목하였다.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않다.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않고 박식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칭송을 받지 않고 칭송을 받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 성인은 쌓아놓은 것이 없다 이미 남을 위해 행동했는데도 자신은 더욱 많이 가지게 되고 이미 남에게 주었으면서도 자신은 더욱 많아진다 그러므로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하면서도 해치지 않고 성인의 도는 행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나라는 명당의 바깥문을 닫아놓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쌓아놓은 것이 없음을 천하에 보인 것이다 오직 쌓아놓지 않았기 때문에 지극히 귀한 물건을 지킬 수 있었다
천하 사람이 모두 나를 일컬어 광대하면서도 어리석은 것 같다고 하니 오직 광대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이다 만약 똑똑하다면 자잘하게 된 지가 오래되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언제나 세 가지 것이 있으니 그것을 보배로 여긴다 첫째는 자애로움이고 둘째는 검약이며 셋째는 감히 천하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무릇 자애롭기 때문에 용감할 수 있고 검약하기 때문에 넉넉할 수 있으며 감히 천하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높은 관리가 될 수 있다 이제 자애로움을 버리고 용감을 택하며 몸을 뒤로 물리는 것을 버리고 앞에 나서니 반드시 죽을 것이다 무릇 자애로움이란 그것으로 싸움을 벌이면 이기게 되고 그것으로 지키면 견고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이 나라를 세우면 너는 자애로움으로 그 담을 세우라.
나라에 도가 있으면 지혜롭게 행동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게 행동하니 그 지혜는 미칠 수 있지만 그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
훌륭한 장수가 되는 사람은 무용을 중시하지 않고 싸움을 잘 하는 사람은 노하지 않는다 적을 잘 이기는 사람은 남과 다투지 않고 남을 잘 부리는 사람은 아래로 처한다. 이것을 싸우지 않는 덕이라고 하고 이것을 사람을 부린다고 하며 이것을 하늘과 짝한다고 하니 옛날의 지극함이다.
이 때문에 백전백승하는 것은 가장 훌륭한 것 중에서도 훌륭한 것이 못 되고 싸우지 않고서도 남의 병졸을 굴복시키는 것이 가장 훌륭한 것 중에서도 훌륭한 것이다.
용병가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나는 감히 먼저 군사를 일으키지 않고 단지 응적하며 나는 한 치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한 자 뒤로 물러난다. 이것이 이른바 행군하려고 하여도 진영이 없고 팔뚝을 걷어붙이려 해도 팔뚝이 없으며 잡으려고 해도 병기가 없고 잡아채려고 해도 적이 없다는 것이다 재앙은 적이 없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니 적이 없으면 거의 내 보물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비슷한 군사가 서로 부딪칠 때는 애통해 하는 사람이 이긴다.
뛰어난 사람이 병사를 운용할 때는 적에게 마치 빈 곳에 발을 딛고 그림자를 잡은 것처럼 느끼도록 한다.
내 말은 무척 알기 쉽고 무척 행하기 쉽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행하지도 못한다. 말에는 근본이 있고 일에는 중심이 있으니 저들이 모를 뿐이다 이 때문에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아는 자가 드물면 나는 귀해지리라 이 때문에 성인은 겉으로는 베옷을 입고 안으로 옥을 품는다.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남을 탓하지도 않는다 아래로부터 배워서 위로 통달하였으니 나를 아는 것은 저 하늘일진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좋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병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그 병을 병으로 여기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안다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면 이것이 아는 것이다.
백성들이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큰 두려움이 닥칠 것이다. 백성들의 기거함을 방해하지 말고 그 삶을 억누르지 말라 오직 억누르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스스로 알면서도 스스로를 뽐내지 않고 스스로를 중히 여기면서도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사랑 받을 때 위태로움을 생각하니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두려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감히하는 데 용감한 사람은 죽을 것이고 감히하지 않는 데 용감한 사람은 살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혹은 이롭고 혹은 해로우니 하늘이 미워하는 것을 누구라고 이유를 알겠는가 그러므로 하늘의 도는 싸우지 않고서도 잘 이기고 말하지 않고서도 잘 응하며 부르지 않고서도 스스로 찾아오고 느긋해 하면서 잘 도모한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도 넓으니 성기면서도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는다.
공자가 말하였다 자로 같은 사람은 옳게 죽지 못할 것이다.
만약 백성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죽임으로써 그들을 두렵게 하겠는가 만약 백성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옳지 못한 행동을 한다면 내가 잡아다 죽일 것이니 누가 감히 그렇게 하겠는가. 만약 백성들이 정말로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언제나 죽임을 관장하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무릇 죽임을 관장하는 것을 대신해서 죽인다면 이것은 큰 목수를 대신해서 나무를 자르는 것이니 큰 목수를 대신해서 나무를 자르면 그 손을 다치지 않는 자가 드물다.
임금이 된 자는 백관을 통솔하는 도를 닦고 관부의 자세한 일은 말하지 않는다 신하가 된 자는 관부의 일에 종사하고 그 바깥의 일은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배를 곯는 것은 먹을 것과 세금을 취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배를 곯는다. 백성들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위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게 있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다스려지지 않는다. 백성들이 죽음을 소홀히 하는 것은 그들이 삶을 구하는 것이 지나치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죽음을 소홀히 한다 무릇 살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생명을 귀하게 잘 여기는 것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길을 따르는 것을 삶의 길잡이로 삼으면 몸을 보존할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으며 몸을 기르고 천수를 누릴 수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부드럽고 약한데 죽고 나면 뻣뻣하고 딱딱해진다 만물 초목이 태어날 때는 부드럽고 약한데 죽고 나면 마른다. 그러므로 딱딱한 것은 죽음의 무리고 유약하고 미세한 것은 삶의 무리라고 한다 병사가 강하면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강하면 부러지게 된다 강대한 것은 아래에 거하고 유약하고 미세한 것은 위에 거한다.
강함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이기는 것이고 부드러움은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이기는 것이니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이기던 사람이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위태롭지만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이기는 사람에게는 위태로움이 없다고 하였다.
하늘의 도는 마치 활을 당기는 것과 같다 높이 있는 것은 누르고 아래에 있는 것은 올려주며 여유 있는 것은 덜고 부족한 것은 더해준다. 그러므로 하늘의 도는 여유 있는 것을 덜어서 부족한 것에 더해준다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아서 부족한 것을 덜어서 여유 있는 것을 받든다 누가 여유가 있으면서도 하늘에서 본받음을 취할 것인가 오직 도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을 차지하지 않으며 공을 세우더라도 그 공에 머물지 않는다 이처럼 자신의 뛰어남을 보이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익(益)이란 위를 덜어서 아래를 더하는 것이니 백성의 기쁨이 끝이 없다 스스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니 그 도는 크게 빛난다.
천하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지만 굳세고 강한 것을 공략하는 데는 그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그 성질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부드러움이 굳셈을 이기고 약함이 강함을 이기는 것은 천하가 다 알지만 능히 행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성인의 말씀에 이르기를 온 나라의 치욕을 끌어안는 것을 사직의 주인이라고 하고 온 나라의 불길함을 끌어안는 것을 천하의 왕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올바른 말은 마치 비딱한 듯하다.
내와 못은 더러운 진흙을 용납하고 산과 늪은 해충을 품고 있고 아름다운 옥은 티를 숨기고 있고 나라의 임금은 치욕을 끌어안으니 하늘의 도다.
큰 원망을 누그러뜨리더라도 반드시 남은 원망이 있을 것이니 어찌 좋다고 하겠는가. 이 때문에 성인은 오른쪽 계(契)를 가지고서도 남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덕이 있는 사람은 계만을 살펴보고 덕이 없는 사람은 그 행적을 살펴본다 무릇 하늘의 도는 친한 바가 없으니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
황천은 친한 바가 없으니 오직 덕이 있는 사람을 돕는다 민심은 무상하니 오직 은혜로운 자를 사랑한다.
'집중'으로 효율을 높이는 시간관리 방법 - 시간을 요리하는 뽀모도로 테크닉_ 스토리매니악
'시간'을 알차게 사용하고 싶은 욕구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나 또한 줄줄 새는 시간을 단속하기 위해 다양한 시간관리에 대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지만,썩 만족스럽진 않다.
이 책'시간을 요리하는 뽀모도로 테크닉'은 나 같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간관리 테크닉을 제시해준다.뽀모도로 테크닉은25분 동안 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5분은 완전히 쉬고,다시25분 동안 일에 집중하는 사이클의 시간관리 방법이다.간단히 말해 사람이 집중력을 잃지 않는 시간 동안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고,집중력이 떨어질 쯤에 완전히 비우는 휴식을 취하고,다시 집중력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간단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시간 단위를 잘게 쪼개서,집중을 통하여 일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둔다.시간은 꼭25분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자신의 역량에 맞춰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즉,자신이 가장 효율적으로 일하는 시간 사이클을 찾아 하나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효율적 시간관리를 선사하는 것이다.
책의 내용은 이런 방법을 기준으로 어떻게 이 테크닉을 익히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를 정리하고 있다.정해진 시간 동안 방해하는 것들을 효율적으로 제거하는 방법,하나의 일에 집중하기 위해 일의 우선순위를 정리하는 방법 등을 간단하고 쉽게 설명한다.
저자는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하느라,데드라인 전에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에,일의 크기에 대한 부담감 등으로 효율적인 집중을 방해하는 것들을 나열하고,이를 효율적으로 제거하는 방법들도 일러준다.즉,이러한 것들을 제거함으로써 정확히25분의 시간 동안 한가지 일에만 집중적으로 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내용들을 보면,내가 일을 하면서 느꼈던 부분들이 상당 부분 있다.즉,우선순위를 쉽게 정하지 못한다거나,일 하다 보면 자꾸 효율을 방해하는 것들이 생기는데,그런 부분들을 잘 짚어 주고 있다.
다만,아쉬운 건,그 내용들을 정리하는 내용이 너무 간단한 경우가 많다.좀 더 세세한 설명이나 이해하기 쉬운 사례를 통해 설명해 주었으면 하는 부분이 많았다.물론,저자가 제시하는 방법이 꽤나 간단하기에 부연 설명이 크게 필요 없는 것도 있지만,조금은 세세한 설명이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것은'집중'이란 키워드로 정리 된다.이 집중을 위해 어떤 테크닉을 구사해야 하는지를 정리해 주는 책이라 하겠다.
시간의 효율적인 사용을 고민하고 있는 이들이라면,저자가 전하는 테크닉을 한번쯤 응용해 보는 것도 좋아 보인다.
<뽀모도로 테크닉의 기본>
1.주방 타이머가 돌아가는 동안 할 일을 한 가지만 정한다. 2.주방 타이머를25분으로 맞춘다. 3. 25분 동안 오로지 그 일에만 집중한다. 4.타이머가 울리면5분간 휴식을 갖는다. 5.다시 주방 타이머를25분으로 맞추고 일에 집중한다.
유쾌한 나비효과 린다 카플란 탈러(Linda Kaplan Thaler), 로빈 코발(Robin Koval), 정준희 | 흐름출판 | 20100617 평점 상세내용보기 | 리뷰 더 보기 | 관련 테마보기
사소한 한 걸음이 큰 성공을 만들어 낸다 - 유쾌한 나비효과 _ 스토리매니악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다. 천리라는 먼 길을 가더라도, 그 시작은 작은 한 걸음부터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뭔가를 이루려 할 때, 큰 그림을 그리고 원대한 목표를 세운다. 하지만, 그 목표에 도달하기는 영 쉽지가 않다. 바로 한 걸음 한 걸음의 작은 행동들이 쌓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소한 일들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책이 바로 이 책, '유쾌한 나비효과'다.
이 책은 작은 것이 불러오는 영향력과 그 변화를 다룬다. 일상에서의 작은 관심과 행동, 남을 배려하는 마음 등의 사소한 것들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큰 목표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저자는 '오바마', '제이 레노' 같은 유명인들의 사례를 통해 그들이 어떻게 작은 변화부터 시작하여 큰 성공을 이루었는지를 들려 준다.
저자가 소개하는 것은 정말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다. 낯선 사람과의 가벼운 대화,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 작은 친절 베풀기, 1분을 더 투자해 문서 다시 읽기 같은 큰 힘 들이지 않고도 실천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저자는 이처럼 실생활 속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내용들을 제시하고, 이런 사소한 행동들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뭔가를 이루기 위해 거창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늘 좀 더 완벽한 기회, 좀 더 액션이 큰 행동을 위해 오늘 그리고 내일로 자꾸 행동의 기회를 미룬다. 그러다 보면 목표는 어느새 흐지부지 되고 만다. 저자는 인생을 좌우할 만큼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고, 아주 작고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면, 그 내용에 상당히 수긍이 간다.결국 모든 것은 처음의 작은 한 걸음이 없이는 불가능 하다는 것 말이다.
저자는 그런 작은 행동을 위한 지침도 들려 준다. 행동을 잘게 쪼개고 자꾸 실천함으로써 성취의 기쁨을 쌓아가고,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관심, 행동, 배려의 지침들을 알려 준다. 당장 지금이라도 실천해 볼 수 있는 것 들이다. 저자의 말처럼 조금씩의 성취의 기쁨을 느껴본다면 다음의 행동 행동을 자꾸 불러 올 것 같다.
꾸준한 노력은 만고불변의 진리 같다. 작은 걸음을 내디디며 목표를 향해 가는 연습을 몸에 익혀보고 싶다. 그런 걸음을 딛는데 이 책의 내용이 많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사소한 행동을 통해 목표를 이루는 방법을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해 본다.
Go - http://blog.naver.com/storymaniac/40164335761
그대는 지금 꿈을 향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_ 스토리매니악
가끔 불안할 때가 있다.오늘의 내 모습을 보고 있으면,내일의 내가 잘 그려지지 않는다.미래의 목표를 세우고 그곳을 향해 매진해도 부족할 판에,지금의 한계에 부딪혀 그 목표를 잊거나 심지어는 현실과 타협하여 수정해 버리고 만다.불안의 늪에 빠져 용기와 신념을 조금씩 소모하고 있는 느낌이다.
꿈을 이룬 사람들은 그래서 대단하다.나처럼 불안했던 때가,포기하고 싶은 때가,그들도 분명 있었을 터이다.그러나,그런 순간들을 이겨내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꾸준히 달려간 그들은 성공이라는 면류관을 차지했다.그들은 어떻게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삶을 만들며 바라던 꿈에 다가갔을까?
이 책은 그런 질문에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영화배우에서 유니세프 대사가 된'오드리 햅번',세계를 감동시킨 마라톤 부자'팀 호이트',천상의 목소리르 들려준 테너'루치아노 파바로티',평생을 천리포수목원을 가꾸는데 바친'민병갈'등,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대로 자신의 꿈을 향해 살아간'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네 인생을 만족시킬 단 한 사람은 너 자신뿐이란다.네 엄마나 나 또한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단다.우리를 기쁘게 만들려 하지 말거라.명심하거라.네가 생각할 것은 오직 너 자신에게만 질문하고 대답하는 일이란다.
저자는 꿈을 이루기 위해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자신의 생각대로 꾸준히 걸어간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자신의 신념과 생각대로 살아간다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일생이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인간이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장애물에 꺾이지 않고,꿈을 향해 갈 수 있는 원동력!그 원동력의 아주 단순하지만 핵심의 진리를 짚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과 꿈의 경계에 서서 끊임없이 고민한다.그 고민의 순간에 내 꿈을 포기하지 않게 등을 토닥여 줄 수 있는 메시지가 이 책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이미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들의 용기를 통해 배우는 것이다.나는 이 책에서 특히 천리포수목원을 가꾼'민병갈'선생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았다.외국인으로서 낯선 나라의 벌거벗은 산하를 안타까워하고,그곳을 푸르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바친'민병갈'.인생은 기껏해야100년이지만,적어도300년 길게는 천 년이라는 시간을 보며 수목원을 시작했다는 그의 말은 큰 울림을 주었다.기껏 내일의 나를 위해,몇 년 후의 나를 위해,오늘을 타협하며 살아가는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인생은 길어야 백 년이지만 나무는 천 년까지 삽니다.나는 적어도300년은 내다보고 수목원을 시작했습니다.내가 죽은 뒤에도 자식처럼 키운 천리포 나무들은 몇 백 년 더 살며 내가 제2의 조국으로 삼은 한국에 바친 마지막 선물로 남기를 바랍니다.내가 평생을 바쳐 나무를 가꾸면서 깨달은 것은 수목원 사업은 영원한 미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여러 사람의 사례를 통해 자신의 현재 모습과 삶을 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그것이 단지 머리 속에 깨달음으로 새겨지기만 하느냐,행동으로 나 자신을 이끄느냐는,이제 의지의 문제다.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곱씹어 보면 그 의지를 새로이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이 순간에도'생각대로 살지 않고,사는 대로 생각하고 있는'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적극 권해 본다.
고전의 지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 시대의 상황에 맞게 그 지혜의 해석과 적용도 달라진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고전에서 지혜를 찾는 것이다.때문에 고전을 들여다 보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 다양한 의미의 지혜를 습득하는 훌륭한 보고다.
이 책은 <노자>에 대한 이야기다. 노자의 사상이 어떻게 정치적 이념과 연관이 있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를 짚어내고 있다. 굵직한 선거가 연이어 있어 연초부터 시끄러운 이때에, 우리 정치가 무엇을 놓치고 있고 무엇을 바로 세워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책의 내용은 노자의 <도덕경>을 충실하게 번역하고, 그 번역에 대해 저자가 해설을 다는 형태다. 그 과정에서 도덕경의 재해석과 나아가 정치를 하려는 자들에 대한 교훈들을 보게 된다. 근래에 출간되는 고전들을 살펴보면, 원문보다는 시대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고 저자의 개인적 주관이 많이 들어간 책들이 많다. 분명 그런 책들은 우리 눈높이에 맞춰져 있기에 고전에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런 장점도 있지만, 본래의 뜻을 희석시킨다는 점을 들어 원론적인 번역에 충실했다고 하다.
때문에, 그 내용이 만만치는 않다. 도덕경에 대한 사전지식도 없고, 노자의 사상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기에 더 그런 면이 있다. 다행히 저자의 해설을 통해 하나하나의 문장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명확히 알 수 있다. 그 해설을 통해 지금의 정치상황이 연결 되면서, 원론적이지만 지극히 타당한 정치의 본질을 보게 된다.
문장에 실린 각각의 뜻을 모두 이해하기엔 살짝 무리지만, 저자는 그 내용을 '대동의 통치이념'으로 보고 있다. 내가 알기로 도덕경은 '무위자연' 사상이다. 거짓됨과 인위적인 것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말이다. 때문에 이상적이라는 비판도 받는 모양인데, 저자의 해석을 보면 좀 더 실체가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저자가 말하는 '대동의 통치이념'이란 '백성의 뜻을 지도자의 뜻으로 삼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 해석만 놓고 본다면, 우리 정치인들이 '아주 꼭 무지 완전히 정말'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또, 궁극적으로 제대로 된 정치가 가야 할 길이라고도 보인다. 저자는 이런 관계에 주목하고 그 내용들을 충실히 해석해내고 있다.
도덕경에 대한 내용의 이해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려는 내용은 절절히 와 닿는다. 국민을 '한 표'로만 보지 말고, 자신들이 펴려는 정치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 책의 내용 숙독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