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특정한 이념을 정해 놓고, 그것을 보편적이라거나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하면서 기준으로 사용하는 일은 사회를 구분하고 배제하고 억압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고 노자는 비판했다. 가치론적 기준을 근거로 해서 세계와 관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노자가 인간이 아니라 자연에 주목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연에는 가치론적 기준이 작용하지 않고 그 기준이 목적으로 상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치론적 기준을 보편적인 틀로 사용하지 말고, 개별자들의 자발적 생명력이 마음껏 발휘되게 할 것을 권한다. 그는 이런 그의 생각을 ‘거피취차(去彼取此)’라고 표현했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는 말인데, 저 멀리 걸려 있으면서 인간과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론적인 이념과 결별하고 바로 여기 있는 구체적인 개별자들의 자발적 생명력에 주목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모든 개별적 존재들이 보편적 가치로 합의된 ‘예(禮)’를 기준으로 하고 그 예에 일치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는 이념을 주장하는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와 정반대되는 입장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되면 구체적 세계에 있는 개별적 존재들에게는 추구해야 할 보편적 이념도 없고, 세계와 관계할 때 사용해야 할 절대적인 가치 기준도 없으며, 내용적으로 정해진 분명한 도달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게 된다. 보편적인 이념의 형태로 행사되는 기준이 없는 한, 개별자들이 각자의 삶을 자율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권리는 빛을 발하게 된다. 개별적 존재들이 보편이라는 모자를 쓴 특정한 이념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로지 각자의 자발적 생명력에만 의지해서 약동하는 상태를 노자는 ‘무위(無爲)’라고 표현한다. 삶을 영위하는 어떤 사람이 ‘반드시 어떠해야 한다’거나 ‘바람직함’이라는 당위의 굴레를 벗어나서 아무런 기준이나 목적성의 제어를 받지 않고 하는 자발적 발휘를 말하는 것이다. 기준이나 목적의식을 덜고 또 덜어내고, 약화시키고 또 약화시키고 나면 결국 무위의 지경에 이르게 된다고 본다(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쉽게 말해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멋대로 하는 상태다. 사람들이 모두 멋대로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람들은 모두가 멋대로 하게 되면 바로 비도덕적 혼란의 상태로 빠지고 말 것이라고 걱정하겠지만, 노자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멋대로 해야 제대로 된다고 말할 뿐이다. 멋대로 해야 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노자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 ‘멋대로 하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다(無爲而無不爲, 도덕경 제37장)’. 멋대로 하면 되지 않는 일이 없기도 하지만, 사회도 비도덕적 혼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절로 교화되고, 저절로 올바르게 되며, 저절로 부유해지고, 저절로 소박해진다(도덕경 제57장)’고 본다. 통치자는 백성들이 각자 제멋대로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제멋대로 하는 것이 주가 되면, 위에서 특정한 기준을 강요하는 위치에 있는 지도자는 존재의 의미가 희박해질 것이다. 노자가 ‘최고 수준의 통치 단계는 통치자가 있다는 사실만 겨우 알고(太上, 下知有之, 도덕경 제57장), 통치자의 존재를 부담으로 느끼지 않는 단계’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보편적 이념의 틀은 모든 사람들에게 원래부터 갖춰진 것으로 인식되는 이성에 의해서 지탱된다. 멋대로 하는 힘은 각자의 욕망에서 나온다. 공자는 인간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인간인 성인들이 만들고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공인된 ‘바람직한 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원칙’ 그리고 ‘좋다고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따르고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자는 그렇지 않다. ‘바람직함’보다는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하고, ‘해야 하는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좋은 일’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편적 이성보다는 개별적 욕망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사회나 조직이 보편적 틀을 수행해야 하는 엄숙주의가 지배하는 한, 생동감이나 자발적 창의성은 고갈돼 조직 자체가 경색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노자의 시각에 의하면 국가나 사회 혹은 기업 조직이 진정한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도권이 구성원들의 자발성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 자발성들이 모여서 하나의 조직을 이뤄야지 조직이 갖는 이념의 틀에 개별적인 각자가 맞춰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삶의 주도권이나 삶에 대한 의미의 확인이 정해진 틀 안에서 이뤄지면 안 되고, 각자의 생활 속에서 확인돼야 한다. 각자의 생활은 이성보다는 욕망의 충동에서 힘을 받는다. 노자가 보기에 조직이나 사회의 건강성은 개별적인 각자가 얼마만큼의 자율성을 부여받고 얼마만큼의 자발적 생명력이 허용되는가에 달려 있다. 거대 사회나 거대 조직에서는 구성원들이 자기만의 고유함을 드러내기 어렵다. 모두 익명성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익명성 속에 존재하는 한, 구성원으로서의 자기는 존재의 가치를 부여받는 느낌을 갖기가 어렵다. 단지 부속품으로만 존재한다고 느낄 것이다. 노자는 개별자들을 자신의 고유명사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나 조직 안에서 자기가 하는 일이 바로 자기 자신의 생명력을 실현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조직을 작은 단위로 운영해야 한다고 본다. 사회나 조직이 거대해지면 구성원들을 익명적 존재로 만들지 않기가 어렵다. 구성원들이 고유한 존재 가치를 느낄 수 있으려면 작은 단위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서울에서의 삶과 시골 고향에서의 삶을 비교해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작은 단위 속에서는 각자의 활동이 모두 자기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진다. 거기서 인간은 보편을 추구하는 인간이 아니라 개별적 욕망을 실현하는 매우 자발적인 존재로 재탄생될 수 있다.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욕망의 존재로 살 수 있게 된다. 거기서 상상력과 창의성이 비로소 움을 틔운다. 노자는 사회나 조직의 이런 작은 단위를 ‘소국과민(小國寡民)’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노자의 기획은 조직이나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삶의 주도권을 돌려주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이나 사회가 강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왜 모든 상품이 소비자의 이성보다는 감성을 자극하려는 시도에서 개발되는가? 현대에서 조직은 어떻게 관리돼야 하는가? 이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렇다면 도대체 현대란 무엇인가?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 지성사의 맥락에서, 현대를 연 것으로 인식되는 철학자들을 꼽으라면 아마 대표적으로 칼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그리고 소쉬르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이성’ 혹은 ‘이성적’인 것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이성은 보편, 본질, 실체, 목적, 이상, 거대함, 기준, 표준, 통일, 집중 등의 개념과 한 가족이다. 이성이 부정되면서 이성의 가족들도 모두 빛을 잃어가는 것이 현대의 방향이다. 그래서 현대는 이성의 가족들보다는 감성의 가족들, 즉 개성, 비본질, 관계, 무목적, 일상, 불확정성, 분산 등의 방향으로 나아가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 많은 거대 조직들이 중앙집권보다는 분산형 팀제로 조직관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왜 그런가? 아마 현대인의 유형에 맞추다 보니까 피할 수 없는 방식이 됐을 것이다. 팀제라고 하는 작은 단위 속에서라야 구성원이 자기의 활동을 자기 삶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노자의 소국과민 시스템이다. 왜 디자인은 모두 감성을 주요 코드로 붙잡는가? 왜 직선보다는 곡선에 긍정적인 시선을 주는가? 왜 인간의 욕망이 긍정되는가? 모두 현대의 방향이 그렇기 때문이다. 만약 현대의 방향이 이렇다면 공자나 맹자보다는 노자나 장자를 만나는 것이 실속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치 오래된 미래처럼 노자나 장자는 기성품처럼 현대를 미리 빚어놓았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현대를 만나고 싶다고? 그렇다면 노자나 장자 그리고 주역 혹은 불교에 주목하시라!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653호(12.04.18~24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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