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naver.com/2010corea?Redirect=Log&logNo=130012279541

911테러가 일어난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911테러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이 대테러전쟁을 선포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다.

어떻게 되었는가?

알카에다는 아직도 건재하며

( 미국의 적이 아니라 미국의 공작원이란 것도 여러곳에서 밝혀졌다)

이라크는 더욱 더 혼란에 빠져있다.

그 5년동안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은 얼마인가?

그 속에 우리나라의 고 김선일씨도 들어가 있다.

911테러로 부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든 무엇이든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석유회사는 이라크의 석유를 독점하고 있으며

군수업체의 자금은 날로 늘어가고 있다.

그리고 죄없는 무고한 사람들은

아직도..

미국이란 괴물에 의해 죽어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답해주고 있다.

911테러를 누가 일으켰는가?

911테러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본 세력은 누구인가?

9.11테러가 명백한 자작극이란 증거는 너무나 많다.

첫째, 가장 주목해야할 곳이 바로 펜타곤 타격이다.

거대한 보잉기가 와서 박았다고 했는데 뚫린 구멍이 보잉기에 비해 너무 작다.

뚫고 들어간 길이만 보았을 때는 보잉기 머리 깊이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보잉기의 몸뚱이는 잔디밭에 남아 있어야 하는데 폭발 당시 장면을 보면 비행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한 미국 조사위원회에서는 항공유가 폭발하면서 비행기가 모조리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녹았다고 해도 녹았다 굳은 잔해라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소방대원이 막 도착했던 사진에도 잔해가 없었다. 후에 조사위원회에서 발표한 사진에만 이상한 잔해가 몇 개 소개되었다.

보잉기가 뚫고 갔다고 한 세 번째 마지막 벽은 강철 보강제로 되어 있는데 지름 5미터의 구멍이 완벽하게 뚫려 있다.

미사일이 아니고서는 그런 구멍을 낼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의견이다.

펜타곤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공안요원들이 사건 후에 병원에 찾아와 비행기를 보았다고 진술할 것을 강요하였다고 고백해다.

현장목격자들 중에 비행기가 날아오는 것은 전혀 보지 못했고 미사일 소리만 들었다고 말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가장 기가 막힌 일은 펜타곤을 주위를 샅샅이 감시하는 카메라가 그렇게 많았고 주변 주유소에도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사건 직후 공안요원들이 모조리 수거해갔으며 관계자들에게 절대로 그 사실을 누설하지 못하게 하였다.

시민단체에서 강력하게 카메라 영상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자 미국 정부가 한참 뒤에 마지 못해 공개했는데 동영상에도 비행기가 날아와서 부딪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미사일처럼 보이는 물체가 순식간에 펜타곤을 타격하는 것만 보인다.
무역센터로 돌진하는 보잉기의 모습은 선명하게 보였는데 펜타곤은 확연히 다르다.

이 공개된 영상이 더욱 의혹을 증폭시켰다.

보잉기가 날아갔다고 하는데 타격지점 바로 옆에 있는 가로등이 온전하게 서 있다.

보잉기라면 날개가 반드시 부딪쳤을 위치에 너무나 멀쩡하게 서 있다. 나머지 부딪친 가로등 기둥들도 나동그라지기는 했지만 꺽어지지 않았다. 크루즈 미사일의 속도에 의해 그렇게 되었거나, 증거를 조작하기 위해 급하게 밀어서 넘어뜨렸기 때문일 것이다.

4층짜리(옥탑까지 5층) 펜타곤이 타격받은 직후 출동한 소방대원들은 곧바로 건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건물 3,4층이 위쪽이 멀쩡히 남아 있어서 떨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큰 보잉기가 건물 위쪽을 타격한 것도 아니고 정확히 1,2층을 타격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높이가 거대한 보잉기 동체가 반드시 바닥 잔디밭을 깊이 파고들면서 펜타곤에 접근해야 한다.

잔뒤밭을 완전히 뒤집어 놓아야 한다. 그러나 긁힌 자국도 전혀 없다.

이 펜타곤 타격 하나만 보아도 이번 사건은 명백한 음모에 의한 것이 분명하다.

둘째 무역센터의 타격도 의문투성이이다.

무역센터테러사건 발생 6주전에 새로운 주인이 35억달러짜리 테러보험에 가입한 후 무역센터 건물 전체를 임대했다.

무역센터 지하에 보관했던 1600억 달러의 금괴 중 2억 달러어치만 발견한 점도 의문이나 나머지는 누군가 사건 전에 미리 옮겼던 것이다.

사고 항공기 회사주식이 사건 전 몇주 동안 엄청나게거래되었다.사건을 예감한 주주들이모조리 팔아치웠을 것이다.

무역센터 건물은 보잉기가 여러 대 와서 부딪쳐도 무너지지 않을 강철 심을 50여개나 박아두었다. (루스체인지에서 건축 학자 증언)
그런 건물이 항공유에 붙은 불에 녹아서 자유낙하속도로 폭삭 주저앉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항공유의 온도로는 강철을 녹일 수 없다는 것이 건축학자들의 주장이다.

녹더라도 그 층만 녹아야지 왜 모든 층이 순식간에 주저앉을 수 있는가.

비행기 충돌과 화재로 이렇게 튼튼한 건물이 1시간여만에 폭삭 주저앉은 적은 한번도 없다고 한다.

루스체인지의 제작자들은 건물이 내려앉을 때 차례로 창문과 벽을 뚫고 나오는 작은 폭발 연기와 화염을 정확히 포착해 내었다. 폭파공법의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당시 현장에 있던 피난민과 소방대원들은 몸이 들썩거릴 정도의 연속 폭발음을 분명히 들었다고 한다.(그것이 알고 싶다.)
보통 건물에 불이 나도 뼈대는 남게 마련이며 그것만 있으면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고층빌딩일수록 더욱 강하게 짓는 것이 기본이다. (루스체인지)

세 번째 의혹은 승객들이 테러범들과 격투 끝에 백악관으로 가려고 했던 유나이티드 항공 소속 여객기를 펜실베니아에 추락하게 했다고 조사위원회에서는 발표했으나 이는 명백한 공중 격추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면 땅에 추락했다면 잔해가 추락 지점에 모여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실제로 비행기 잔해는 반경 2킬로미터 안에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 있었다.

이것은 물리학 법칙이다. 공중에서 폭파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잔해가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럼스펠트 장관이 부지불식간에 실토한 바 있다.

[28일(2004년 23월) CNN에 따르면 럼즈펠드 장관은 크리스마스 이브 이라크를 전격방문, 미군 병사들에게 "(9.11테러 당시)뉴욕에서 미국을 공격했던 사람들이 펜실베니아 상공에서 문제의 여객기를 격추시켰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것은 승객들이 격투끝에 펜실베니아 들판에 여객기를 추락시켰다고 결론을 내린 미국 정부의 진상조사위원회의 의견과 완전히 다른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국방부 대변인은 럼스펠트 장관이 당시 피곤해서 잘못 말했다고 주장했다.]- 2004년 12월 29일 연합뉴스

아마도 럼스펠트는 3년이나 지나다 보니 음모각본을 잠시 잊어버려 좀 더 극적으로 테러리스트들의 악랄성을 말하려다가 테러리스트들이 여객기를 격추시켰다는 말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미국의 네오콘들은 자국의 민간 항공기를 미사일로 자기들의 미사일로 격추시켜버린 것이다.

이 외에도 무역센터 테러보고를 받고도 부시는 초등학교 수업 참관을 10분이나 더 보고 나서야 일어나 에어포스 원을 타고 돌아왔다. 돌아올 때 어떤 전투기도 에어포스 원을 호위하지 않았다.

부시와 그 일당은 자기들이 꾸민 연극이기에 절대 공격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익히 알았을 것이다.

무역센터의 강철 기둥이 녹아내릴 정도의 화염이라고 하면서 테러리스트의 여권은 전혀 타지 않고 발견되었던 점도 기가 막힐 일이다.

음모임을 주장한 사람이나 음모임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연쇄총격 살인사건 와중에 차례로 죽어갔다.

테러범들이 사건 직후 너무나 빨리 잡혀들고 사건 전모가 발표된 점도 정말 기가 막히다.

펜타곤을 타격했다는 비행기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비행기의 승객들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도 비밀 실험실에 가두어 두고 화학무기 생체실험용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을까.


- 자주민보 기사 발췌-

주일미군 금지한 폭탄, 주한미군은 오폭사고 일으켜도 쓴다? 미국과 주한미군

2006/12/16 14:22

복사 http://blog.naver.com/2010corea/130012279541

매향리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것은 2000년 오폭사고때문이었다.

농섬 폭격 과정에서이미 수차례 민가에 폭탄이 떨어진 오폭사고로 인해

임산부가 죽고 어린아이가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는것또한 알려지면서

매향리 쿠니사격장의 충격적인 실태가 밝혀지고

매향리주민들의 눈물겨운 투쟁과 전국민적 지지속에 매향리 폭격장은 폐쇄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주한미군이 있는 한 대한민국 그 어디든 언제든지 매향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11월 29일, 충북 음성 철사 제조업체 A3주식회사의 공장에서 백주대낮에 난데 없이 폭탄이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날 낮 11시 50분 경,

주한미공군 폭격기(A-10)에서 일명 '방망이 폭탄'이라 불리는 BDU-33 훈련용 폭탄이

이 공장 2층 숙소 벽과 이불장, 바닥을 차례로 관통하여

1층 사무실 벽에 큰 구멍을 내고 튀어 올라 철제 캐비넷 까지 부수어 놓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다행히 폭탄은 폭발을 일으키는 뇌관이 없는 것으로 공장 벽을 뚫고 들어왔으나 폭발하지 않고 사무실 바닥에 떨어졌으며 다행히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에서 떨어진 육중한 쇠뭉치가 일으킨 굉음과 안개같은 먼지에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놀라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대낮에 난데 없이 날아든 BUD-33폭탄은 공장 2층 외벽을 뚫고 들어갔다.

작은 사진은 이날 떨어진 폭탄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매향리에서 흔히 발견되던 폭탄이다.

ⓒ사진제공=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그런데 이 BDU-33폭탄 오폭 사건은 주일미공군에서도 두 번이나 발생해

주일미공군에서는 이에 기술적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해당 폭탄을 장착하지 않도록 조치한 바 있다.

그러나 주한미군의 태도는 주일미군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주일미군은 오폭사고 해당 폭탄 사용을 금지한 데 비해

주한미군은 오폭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자체를 철저히 함구하며 미온적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기술적 결함이 확인되지 않은 BDU-33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낳고 있다.

BDU-33라는 폭탄은

이미 그 수차례 매향리 오폭사고의 주범으로 그 결함이 누누히 이야기 된 바 있으나

오폭사고 때마다 주한미군은 미온적 자세를 유지하며

제 2, 3의 오폭사고를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이 있는 한

대한민국 어디도 안전할 수 없다는 그 말을 다시 한 번 실감케 하는 사건이다.

어뢰 버블젯이 맞다면 그건 미군의 오폭을 인정하는 꼴입니다!
조회 : 57
기본그룹 > 기본폴더 | 2010-04-25 (Sun) 12:15
http://blog.dreamwiz.com/gh8qkr/12686594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로는,, 정부나 軍 당국은 끈질기게 북한군에 의한(?)
버블젯으로 몰아가고 있고 대부분의 네티즌들은 침수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극명하게 갈리는 걸까요? 우선 그 책임이 사건이 난


처음부터 끝까지 비공개, 잦은 말바꾸기로 인한 주최측에 그 책임이 있음!
지금도 보세요. 찟겨진 부분엔 아직도 그물망이 쳐져있어서 전부 공개했던
DJ, 노무현 민주정부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 네티즌은


설사 버블젯이라해도 믿지를 않는 겁니다. 또, 설사 버블제트 어뢰라 해도,,
북한군에 의한(?) 버블젯은 최하위 확률 이야기고 버블젯이면 버블젯일수록
미군의 오폭에 의한 가설이 더 힘을 받는겁니다! 함 생각해 보셈! 세계에서


버블젯 만드는 나라는 美, 獨 두나라 뿐입니다. 한국도 독일서 구매해왔음!
그러니까 만약에 버블젯에 의한 사고라면 韓, 美, 獨 이 세나라 사고입니다!
설사, 조중동 언론들의 소설을 100% 감안해 中,러시아가 만들 수 있다해도


자국의 1급무기를 북한에 판다는것도 어불성설이고,, 또 북한이 수십억짜리
버블젯어뢰를 전함대에 무슨돈이 있어 배치하겠슴? 한국보다 ‘100배’이하로
못살아 오직 핵무기에다만 국방예산을 쏟아부을수밖에 없는실정 다 알면서,,


수꼴들은 네티즌들이 뽈갱이라 북한편 든다고 하지만 북한편을 든게 아니라
가장 확률높은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다 수꼴들은 지금까지 선거철이면
일본이 독도 건드리듯 북풍을 이용해 왔습니다. 그러니 정부를 믿지 않지요!

http://media.daum.net/politics/dipdefen/view.html?cateid=1020&newsid=20100425072404764&p=sbsi

http://nodong.com/hong
침몰 천안함 한국정부대응, 영화 '괴물'과 흡사 (기사옮김)





"천안함 정부대응, 영화 괴물과 흡사"


2010년 04월 01일 (목) 19:22 연합뉴스
















FT, 정부-국민 소통 부재 집중 지적



(런던=연합뉴스) 이성한 특파원 = 영국 경제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FT)가 천안함 침몰 사건 이후 한국 정부의 대응을 영화 `괴물'과 비유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FT는 1일 자 `한국인들, 국가를 실제 괴물로 여겨(South Koreans see their state as the real monster)'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천안함 침몰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부에 대한 불신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보도에 따르면 영화 괴물의 진짜 악당은 겁에 질리고 비탄에 잠긴 사람들을 잘못 이끌고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는 국가 그 자체라는 것.



영화에서 화생방 복장을 한 정부 당국자들은 괴물의 1차 광란에서 정신을 차린 가족들을 아무런 설명도 없이 집단 격리시키고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이나 답을 주지 않는다.



이 신문은 "영화 속 국가는 가상적인 것이고 실제 한국은 군사독재 정권 이후 발전을 해왔다"며 "한국은 지난 2000년 잠수함 침몰사고 이후 피하주사로 장병들의 부모를 진정시켰던 러시아와는 다르다"고 단서를 달었다.



그러면서도 "한국은 아직도 정부와 국민 사이에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고전하고 있으며 최근 일어난 일들은 이를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라고 풀이했다.



실종 부모들은 침몰 함정이 항해하기 적합한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군 당국이 자신들을 성가신 적처럼 취급했다고 항의했다.



이 신문은 "한국인들이 그토록 분노하고 쉽게 은폐기도를 의심하는 이유는 다분히 정보전달 방식과 관계가 있다"면서 천안함 참사 이외에 여러 가지 사례를 들었다.



지난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을 때 정부는 촛불시위를 우려해 진압 전경 수만명을 서울에 배치해 슬픔을 분노로 바뀌게 했다는 것이다.



또 삼성그룹의 내부문제를 고발한 전 법무팀장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광고수입을 재벌에 의존하고 있는 신문들이 서평이나 홍보를 거부해 이 책은 트위터를 통해 홍보효과를 거뒀다는 것이다.



반면 금융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건희 회장은 특별사면되면서 서민들 사이에 `힘 없으면 감옥에 간다'는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고 이 신문은 소개했다.



국민의 정부와 언론에 대한 불신은 트위터 등 웹사이트를 반대 의사를 나타내고 항의하는 장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FT는 끝으로 "한국 민주주의를 위한 과제는 부패와 기업지배구조에 관한 소통적 논쟁을 성난 트위터들로부터 끌어내 주류로 만드는 것"이라며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한 정부 당국은 음모론에 시달리고 정부를 믿지 못하는 대중들의 분노 폭발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ofcourse@yna.co.kr



천안함은 미군의 오폭에 의한 것이다.

Posted at 2010/04/16 16:32 // in 분류없음 // by 임쓰
아직은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기자로부터 들었다는 지인의 이야기와
아래 글을 적은 정치학 박사의 글을 종합해 볼때 미군의 오폭에 의한 사고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치적인 폭풍을 받을것을 예견한 MB정권의 지금과 같은 대처는 탄핵감이다.
어찌하여 국민의 생명을 가지고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가..
6월 선거에서 제대로 국민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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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로 부터 들은 내용 요약

(이 내용은 가장 빠른 뉴스가 도는 증권가에서 정설로 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함)

천안함침몰은미국훈련중오발이원인이라고함.
당시천안함은훈련지역에서벗어나있었음.미국과의합동훈련에서제외된것임.문제는미군이훈련도중신종어뢰를테스트하던중작동실수로어뢰가발사됐다고함.신종어뢰는추진중파도소리를내기때문에기존레이더망에안잡혔다고함.천안함에서어뢰흔적을사전에포착못한것이이때문이라고함.

천안함이침몰된이후주한미군사령관이다로다음날미국본토로날아간것은한국정부와협상안을협의하기위한것이라고함.

협상의귀재인MB가과감하게국방부에미국의오발을침묵시켰다고함.사고직후미군이천안함이침몰될당시인근에있었다는언론보도가하루지나자마자언론기사에서모두사라진것도이때문임.

오바마가MB한테직접전화하고미군이어떤식으로든한국군을돕겠다고자발적으로나선것도이때문임. MB는이번사건을사업가기질을발휘해미국으로부터쎈것을빼내겠다고하고있음.갑자기미국에갔다온것도이와연관이있는듯함.

군은이번사건을알수없는기뢰로몰고갈것으로보임.북한을끌어들이고있는것도이런전략의일환임
이준희준위가사망한장소는천안함침몰지역에서떨어진곳임.어뢰흔적을없애고알수없는기뢰의흔적을뿌리다가무리해서사망한것이라고함.MB가이례적으로이준희준위장례식장에간것도이때문이라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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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에 대한 의문점들 몇 가지(미군의 실수?& 북한의 도발?)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정치학 박사 이신욱

미군의 이지스함이 지난 3월 28일 사고 난 천안함 근처인 서해일원에서 훈련 중이었다는 기사다. 현재 여러 가지 가설들이 난무하지만 거론되지 않는 가설이 있기에 제기해 본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사고가 난 3월 26일은 독수리훈련 차원에서 미 해군 이지스함 2척이 서해에서 해상훈련 중이었다.'키리졸브/독수리(KR/FE)' 훈련에서 키리졸브는 3월 18일 종료되었지만 야외기동훈련인 독수리연습은 3월 30에 마친다.3월 26일 사고당일 서해에서 한미합동 독수리 해상훈련이 진행 중이었으므로 천안함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이 훈련과 관련된 것이라는 의혹으로 증폭될 수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도 속 시원한 해명이 필요하다. "해군 2함대사령부는 미 해군 이지스함 2척이 '한미 독수리훈련' 참가를 위해 평택항에 입항, 해상 훈련 중에 있다고 26일 밝혔다. 이지스함은 지난 19일 입항해 2함대 장병 및 군 가족, 시민을 대상으로 함정 공개행사를 가진데 이어, 지난 23일부터 서해상에서 본격적인 훈련에 참가했다.
이번 훈련에는 한국 최초의 이지스함인 세종대왕 함을 비롯한 최신예 전투함인 최영함, 윤영하함과 2함대 배속 함정이 참가해 대함 및 대공사격, 해양 차단 작전 등 다양한 해상 훈련을 하고 있다. 미 함정은 독수리훈련을 마치고 오는 28일 돌아갈 예정이다." (연합뉴스 2010.3.26)

위의 내용은
천안함 사건이 있을 당시 미군의 최신예 이지스함 2대와 함께 한국 최초의 이지스함인 세종대왕 함이 서해에 집결해 있는 상황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북한의 잠수함이나 잠수정의 서해침투가 가능했을까? 하는 여러 의문이 생긴다.

첫째, 백령도와 대청도 사이에서 천안함이 침몰했는데 아직까지 원인을 찾기가 힘든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북한의 잠수함, 잠수정이 어뢰를 쏘고 도망갔다면 이를 모를 이지스함들이 아니지 않는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만약 몰랐다면 이지스함에 치명적인 결함을 드러낸 것이고, 만약 알았다면 정치적인 고려에 의한 판단(북풍)으로 생각된다.

둘째, 그러나 처음부터 미국은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북한군과 함정을 탐지하는 한미해군의 주요전력인 이지스함이 3대나 서해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 정찰위성의 자료를 근거로 미국정부가 발표한 것이다.

셋째, 당시 미함정과 함께 한국함정이 대함 및 대공사격, 해양 차단 작전 등 다양한 해상 훈련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대체적으로 편 나누기를 하는데, 대체적으로 한국군은 북한군의 역할을 하며 미군은 연합군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훈련 마지막 날 천안함 침몰사건이 났다는 것이다.

만약 천안함 침몰사건이 이 훈련과 관련되었다면 어떨까? 그 후폭풍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일 것이다. 한국은 반미정국으로 돌아설 것이며, 대통령과 정부는 탄핵의 위기에 직면하고 한미동맹은 무너질 가능성마저도 있다. 아니 혁명의 조짐마저도 보일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국내외정세를 염려한 미국과 한국의 수뇌부들은 천안함 사건을 영구미제사건이나 아니면 북한에 의한 공격으로 몰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그 가능성은 여러 정황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 천안함이 기습을 받았다는 것이다. NLL 주변에 경계는 북쪽으로 집중되어져 있다. 게다가 승정원들은 평상시 대비태세를 하고 있었다. 즉 긴급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북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면 즉각적인 대비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천안함은 기습당했으며 급속히 반파되어 침몰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구조된 승정원가운데 중상자는 극히 일부였다. 이것은 어뢰에 의한 직접타격이 아니라 버블제트 상황이라는 것이다.

둘째, 미국정부가 북한의 행위가 아니라는 단언이다. 세계최고의 정보력과 군사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받고 있는 미국정부가 북한의 행위가 아니라고 했다. 잠수함의 천국은 평균수심이 1,000미터가 넘는 동해이지 100미터가 안 되는 서해가 아니다. 잠수정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도 의문사항이다.

최신예 이지스함이 있는 바다에는 항상 정찰위성이 24시간 감시한다. 게다가 한반도 최대의 화약고인 NLL근처 서해상(광범위하게 서해상과 경기만 일대)에서 기동하는 훈련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
한국정부의 대응방식의 문제다.

처음부터 실종자 46명의 생사를 알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천안호 급의 초계함들을 운용하고 있는 국방부가 실종 장병들이 어떻게 되었으리라고는 제일먼저 알았을 것이다. 초계함은 잠수함이 아니기 때문에 침수하면 여느 배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도 실종자들의 생존시간을 발표하며 실종자 가족들과 언론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국방부의 사고원인에 대한 중언부언의 설명들과 우왕좌왕하는 행동들은 무언가 의심쩍다. 매일같이 국방부 설명과 다른 증거들이 나오고 있으며, 국방부는 이를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또한 이명박 대통령은 3월 30일 백령도 인근에 대기 중인 독도함을 전격 방문했다. 만약 북한에 의한 피습이면 과연 대통령이 최전선인 백령도에 갈 수 있었을까? 아마도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넷째 대외정세도 의문이다.

원래 일본의 독도에 대한 야망은 한국과 중국, 미국, 러시아에 의해 적절히 견제되어왔다. 그런데 서해의 천안함 사건이 벌어진 틈을 타서 지난 3월 30일 교과서에 독도영유권을 표기하더니 지난 4월 8일에는 급기야 일본 수상 하토야마가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망언을 대놓고 하며 도발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도 천안함 사건을 잘 알고 있다는 증거다. 한국과 미국이 서해에서 천안함침몰이라는 큰 위기에 있는 상황에서 동맹국이라는 일본이 하기에는 매우 힘든 일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일본이 파악하기에는 미국이 관련된 사건으로 천안함 침몰을 파악하고 있는듯하다.

다섯째, 북한 현 위치다.

현재
북한의 심각한 경제난을 격고 있다. 천안함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북한은 6자회담을 준비하고 남한과의 관광재개를 위해 회담을 열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방문을 준비하는 등 여러 가지 긴장완화 조치를 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도발을 해봤자 좋을 것이 없는 시점인 것이다. 그리고 도발은 도발수준으로 끝내야지 국지전이나 경제제재를 받을 정도의 큰 사건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즉 천안함을 침몰시킬 정도의 도발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천안함 침몰과 같은 큰 사건이 벌어져 중국에게 큰 부담을 준다면 이것도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내용들이 북한 관련설을 부정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북한이 관련된 확증이 나온다면 대북제재는 불가피
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고를 종합하면 북한의 도발보다는 미국과 관련된 사고가 아닐까 하는 강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만약
미군이나 한국군의 연습 중 실수였다면 어떨까? 지난 4월 9일 김태영 국방장관의 소나 미탐지 스텔스 어뢰로 인한 피격발언의 설명이 가능하다. 세계적인 무기 거래국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과 러시아다. 이들 나라만이 앞서서 말하는 스텔스 어뢰가 가능할 것이다.

미군이 이번 훈련 중 스텔스 어뢰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천안함 근처에서 실수로 어뢰가 폭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 정부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북풍의 시작이 아닐까 사료된다. 기나긴 인양시간과 언론에 대한 견제, 불확실한 사실에 대한 언론과의 전쟁, 일본의 독도발언 등이 이러한 미국과의 연루설을 사전 차단하는 장치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매우 우려스럽다.

위에서 천안함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을 제시하였다. 부디 조속히 천안함 문제가 해결되고 국민들에게 납득할 만한 결과가 나왔으면 한다. 또한 미국과 관련된 의혹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아울러 천안함 실종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심심한 위로를 표한다.

From. 블로그씨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친 천안함 희생장병들의 명복을 빕니다.
당신들의 값진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천안함은 미군오폭에 의해 침몰

1.스티븐 주한 미 대사가 왜 독도함을 방문하였을까? 동맹에 대한 우의의 표시?

2.왜 미국 폭약 전문가 미 해군 구조요원들 및 미 해군함정 살보함이 왜 왔을까?

3.왜 MB는 미국을 방문하였을까

4.핵안보 정상회담이 오바마의 전격적 제안으로 회원국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5.올해 G20정상회담이 있다

6.무디스가 한국의 신용등급을 A2에서 A1으로 전격 상향하였다

7.미국이 6자회담을 천안함 원인규명이후로 연기하였다

(천안함 원인규명이 먼저라는 이야기)

8.대학생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천안함 침몰은 북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시위하다가

붙들려 갔다

(대학가 정보망이 얼마나 정확하고 빠른지는 아는 사람은 안다)

9.북한의 의도는 무엇일까

- 북한은남조선 함정 격침 소식을 퍼트림으로서 흔들리는 북한내 민심을 잡으려 한다

- 북한은 오명을 쓰는 대신 MB정부와 미국으로 부터 경제적 지원을 얻으려 한다

(지금의 북한경제는 화폐개혁 후유증으로 극심하다 못해 처참하다고 할 지경이다)

10.대만 정부가 초미의 관심으로 지켜보고 있다

- 사건발생후 대만총통이 대만국방부장에게 만반의 태세로 예의주시 하라고 했다

왜 일까

- 2차례에 걸친 남북간 서해교전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대만이 왜 이번 천안함 침몰

사건을 예의주시할까

(대만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중국과의 대전을 전제로 미 해군과 훈련을 많이 한다)

11.일본언론의 반응이 미군오폭이라는 반증이다

만일 북한의 도발이라면 일본 언론들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절대로 없다

서해교전때 얼마나 일본 언론들이 우리나라 언론보다 더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던가

12.YS는 왜 북한이라고 할까

MB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도와주려고

13.MB가 말한 "죄지은 자"는?

중국 해군? 일본 해상자위대? 대만 해군? 러시아 태평양 함대?

아군끼리의 오폭?

결국은 용의선 상에 있는 자는 북한 해군과 미 해군 뿐이라는 것은 절대로 부인할수 없는 사실

입니다

14.우리는 60 70년대 남북간의 극심한 냉전기에도 비밀리에 있어왔던 남북간의 "적대적 의존관계"

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5.북한의 경제가 화폐개혁으로 인한 휴우증을 극복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북한당국이 군량미를 풀어서라고 했다

그러면 북한당국은 군량미 조달은 어디서 했단 말인가?

선군시대에 북한당국이 군인들을 굶겨죽이고 인민들은 살리겠다?

그러면 북한 군인들이 왜 가만이 있겠가

임오군란이라도 일어나야 되는것 아닌가

북한에서 임오군란이 안일어난 것은 어디선가 군량미 조달이 있었다는 반증인데

북한의 현 상황으로는 화폐개혁 휴유증으로 자체 군량미 조달이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외부지원인데...

아니면 북한이 어디서 돈벼락이라도 맞았다는 이야기인가?

16.대한민국 해군은 지금 알릴것은 감추고, 감출것은 알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83년 소련 사할린 상공에서 대한항공기 여객기가 소련 극동 방공군 전투기(조종사 겐나디)

에 의해 격추되었다

많은 사람이 허무하게 죽었다

당시 TIME지 표시는 이러했다

"The murder in the air - the target is destroyed"

미국은 소련을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였다

그 증거로 미국의 국익을 위해 대신 일본 육상자위대 와카나이 통신분견반이 추적한

대한항공기와 소련전투기의 비행 항적을 제시하였다

당시 일본총리 나카소네의 결단이었다

이 일로 일본의 군사기밀이 손상을 받기는 커녕 일본의 군사력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17.

911 자작극 음모론 동영상

큰 화면은 아래 링크 클릭하면 뜹니다.
1) 펜타곤에 충돌했다는 AA77(보잉 757)기 잔해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잔해로 발견된건 보잉 757 부품이 아닙니다.
이건 최근에 문제가 됐던게 아니라, 911 직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던 의문입니다.
적어도 이부분에선 미국방성이 거짓말하는거 확실합니다.
민항기로 충돌한게 아니라 벙커버스터로 때렸을 가능성이 크죠.
2) WTC 빌딩 두개가민항기와의 충돌 뒤 한시간 전후에한번에 내려앉았는데..
항공유 연소로 인한 고열(지속적으로 연료 공급시 섭씨 약 1100도)로 철골 구조가 약해졌다고 하지만,
36개기둥이 받히고 있는 상태에서 그렇듯 내려앉는다는게 이해하기 힘듦니다.
당시 소방관들과 WTC 관리원들은 비행기 충돌 후 건물 지하 및 저층에서 몇번의 폭팔이있었다고 합니다.
단순 가스 폭팔로 철골 구조를 발살낼 수 없죠.특히 건물 붕괴시 아슬아슬하게 도망쳤던 소방관은
연쇄적인 폭팔 소리를 들은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폭파 공법에 의한 건물 해체가 진행된거죠.
참고로, 화재로 인한 고열로 철골 구조가 약해져서 건물이 내려 앉는다면 고층 건물의 건축 허가 자체가 않나오겠죠.
더군다나 당시 세계 최고층이었는데.. 불량 빔을 사용했다는건 말이 않되죠.
WTC에 사용된 빔은 섭씨 1100도에서도 몇시간 이상 견디는 미국 건축 요건 등을 통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충돌 부위의WTC의 최고 고온은 섭씨 약 800도 정도였죠. 충돌 후 항공유 대부분 연소한 상태였죠.
3) 동영상에 있듯이 911 사태 직전에 풋옵션 거래가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옵션 거래한 자들에 대한 조사만 해도 뭔가 나올겁니다. 전혀 말이 없죠.
4) 당시 18명의 용이자중 절반이 현재 사우디 공항 관리인,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건 당일 나왔던 용의자들.. 그 뒤로 아무말 없었죠.
과거 통킹만 사건(미국의 베트남전 참전 계기), 쿠바 사태 등 음모론이 제기됐다가 사실로 드러나 사건들이 몇 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계기가 됐던 일본의 진주만 공습시에도 뭔가 음모론이 제기됐죠. 미 군수업자들의 공장을 원활하게 가동하려면 10년에 한번은 재고를 풀어줘야 하는 걸로 들었습니다.
911 테러로 가장 이득을 본건 누가 뭐래도 미국이죠.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공격으로 세계 무기 재고의 40%를 팔지못해 애가 탄 군수업자들 속을 풀어줬고, 전후 재건 사업에 부시 주변 인물들 엄청난 이득을 챙겼습니다. 작금의 오일 가격 상승..미국의 거대 석유 회사들 먹는게 많다는거 상식입니다.
이라크전쟁의 진실 세계사

2010/04/21 10:37

복사 http://blog.naver.com/donmany0203/30084717519

미국, 중동 패권 속셈 후세인 제거
2002년 1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이라크를 이란 및 북한과 함께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미국의 중동지역 패권 장악을 위한 아프간 다음의 목표는 제2의 산유국 이라크였다. 자신들의 전략적 의도에 의해 정권을 잡은 후세인이 원유대금으로 일절 달러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이미 후세인 정권의 운명은 미국의 중동 패권 계획 속에서 제거되고 있었다.

미국은 이라크 공격의 정당성을 위하여 빈 라덴과 이라크와의 연계를 찾아내고자 했으나 명쾌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이라크가 ‘알 카에다’를 배후에서 지원하고 있으며, 후세인 정권이 불법적으로 WMD(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테러를 지원,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또한 지난 30년간의 철권통치로 국민들을 억압하고 있는 후세인 정권을 축출해야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라크를 침공하였다.
2003년 3월 20일, 30만 명의 병력과 최첨단 유도미사일과 살상폭탄으로 무장한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하였다. 작전명 '이라크의 자유(Freedom of Iraq)'
미국의 이라크 침공 명분은 모두 ‘거짓’
2003년 3월20일 미국은 개전과 동시에 3000여발의 각종 정밀 유도미사일과 신형 폭탄으로 이라크군 지휘부와 주요 기지를 집중 타격하였다. 4월 9일에 이라크 수도인 바그다드가 함락되고, 12월 13일 24년간 집권해 오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체포됨으로써 이라크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한지 4년이 지나도록 이라크가 ‘알 카에다’의 배후라는 어떤 증거도 내놓지 못했으며, 다량 보유하고 있다던 대량살상무기는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이라크 주민을 사담 후세인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호언 했지만 종전 이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위해 내세운 모든 명분이 거짓으로 드러나면서 비판 여론이 거세어지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이라크가 미국의 무장해제 요구에 순순히 응해 미국의 공격에 맞설 수 있는 자체의 무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의 공격을 받은 것이라는 가설들이 오히려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라크 전쟁 뒤에 감춰진 역사는 전 세계 전쟁을 사주하는 미국의 추악한 세계지배전략을 명료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미국의 이익 대변할 보수정권 수립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체제의 강화를 위해 값싼 원유의 확보가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면서 미국은 중동에서 안정적인 석유자원을 공급해 줄 정치 세력이 필요했다. 서구 제국주의와 아랍 민중간의 이해가 날카롭게 충돌하게 되자 미국은 중동지배 전략을 간접지배방식으로 전환하고, 이 지역에 다국적 석유기업과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보수적인 정권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이라크 왕정 역시 이런 서구 다국적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민중의 반발에 부딪혀 1958년 압둘 카림 케심 대령이 이끄는 ‘자유장교’의 군사 쿠데타로 붕괴된다. 군사쿠데타 당시 이라크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집단은 이라크 공산당이었다. 이 시기 이란, 이라크를 비롯해 이집트 등에서는 개혁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는데 1차적인 시도는 대부분 석유산업의 국유화로부터 시작되었다.

군사쿠데타 이후 이라크의 여러 정치 세력들은 상이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나간다. 결과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은 바트당이었다. 바트당은 1963년 짧은 집권 이후 잠시 실각하기도 했으나 우익 군부와 연대하여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이라크의 지배 세력으로 성장한다. ‘유물론적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아랍주의’라는 모토를 내걸었던 바트당은 아랍민족주의를 주장하며 이라크에서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바트당은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했으나 1973년 쿠르드족 진압을 위해 일시적으로 공산당과 연립정부를 수립한 기간을 제외한다면 집권 기간 동안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일이 공산당 탄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세인, 미국의 배후 선동으로 이란 공격
56년 바트당에 입당한 후세인은 68년 쿠데타에서 핵심역할을 한 뒤 마침내 79년 이라크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다.

같은 해 이란에서는 이슬람교의 시아파 종교지도자 호메이니에 의해 팔레비왕조가 붕괴되고 새로운 이슬람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꿈꾸던 후세인은 80년 9월 이란과의 전쟁에 돌입한다. 이란·이라크 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걸프만과 연결되어 있어 경제적, 군사적으로 양국의 중요한 국경지역인 샤트 알-아랍(Shatt al-Arab)수로에 관한 영유권 문제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동안 친미적 성향의 팔레비왕조를 통하여 중동에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던 미국이 호메이니의 등장으로 인해 중동 거점이 사라지자 이란과의 관계를 끊고 경제적 봉쇄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이라크로 하여금 이란을 공격하도록 배후 선동을 한 결과이다.

1980년 1월 이란 혁명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후에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카터 독트린’으로 알려진 선언문을 발표했다. “페르시아만을 통제하려는 모든 외부 개입은 미합중국의 이해관계에 대한 중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며, 우리는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그런 공격에 맞설 것이다.”
빈라덴도 미국이 키운 게릴라 출신
이러한 강조에 발맞추어 서아시아를 담당하는 미군 중부사령부가 창설됐다. 미군 중부사령부는 이 당시 아프카니스탄의 소련 점령군에 맞서는 이슬람주의 게릴라들에게 자금을 주고 그들을 훈련시키고 무장시켰는데 9·11테러의 범인으로 지목한 오사마 빈라덴이 바로 이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전사)출신이다. 미국의 카터 정부와 뒤이은 레이건 정부는 막대한 원조를 약속하고 이라크의 후세인으로 하여금 이란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하게 하였다.
이란-이라크전은 미국의 대리전
미국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중동의 군사대국이 된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에서 쉽게 승리 할 것이라 장담했다. 그러나 이라크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서, 별다른 성과 없이 휴전협정을 맺기까지 무려 8년 동안이나 전쟁이 지속되었다. 시리아·리비아 등의 전통 우방을 등에 업은 이란과 사우디·쿠웨이트·이라크(미국을 대표로 한 서방측)와의 싸움은, 1988년 이라크의 승리로 끝이 났다.
당시 미국은 물류와 기술뿐 아니라 이란군의 이동정보와 무기까지 이라크에 제공했다. 미국 기업들은 정부의 묵인 하에 탄저균 등 다양한 생화학 무기의 원료를 팔았다. 83년 11월 미 국가안보회의(NSC)는 이란의 승리를 막기 위해 ‘합법적이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놓기도 했다. 이란- 이라크전이야말로 전형적인 미국의 대리전이었다.
후세인 석유 포기 않자 미국 돌변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자신들이 원조한 결과로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된 이라크가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지배에 위협적인 요소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제 미국은 이라크를 무장 해제시키기 위해서 무언가 조처를 취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명분이 필요했으며, 그 명분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함으로써 주어졌다.
1989년 6월 사담 후세인은 투자 자문회사 ‘키신저 협회’와 트러스트 뱅크·모빌 오일을 비롯해서 미국 다국적 기업과 은행의 중역 등 미국 경제 사절단을 바그다드에 초청했다. 후세인 정부는 미국 사절단에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8년 전쟁에서 이라크를 측면 지원하던 미국 정부가 전후 복구 사업에도 관심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사절단은 투자에 앞서 조건을 내세웠다. 이라크 정부가 대외 채무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절단은 후세인 정부가 채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국영 석유산업 민영화’를 제시했다. 그러나 후세인으로서는 국가 주권의 상징이자 정권의 돈줄이기도 한 석유산업을 포기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투자 협상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미국 정부는 후세인에게 약속했던 23억 달러 차관을 동결했다. 미국과 영국 언론에는 이때부터 이라크의 재무장을 경계하라는 보도가 줄을 잇기 시작했다. 8년 전쟁에서 줄곧 이라크를 지원하던 서방이 전후 복구에 등을 돌리는 통에 후세인은 ‘어느 날 갑자기’ 국제 금융계에서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었다.
둘도 없는 우군이었던 쿠웨이트 변심
궁지에 몰린 후세인에게 또 다른 복병이 나타났다. 쿠웨이트 왕족이다. 석유 왕국 쿠웨이트는 이라크가 이란과 전쟁을 벌일 당시 둘도 없는 우군이었다. 이라크가 8년 동안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쿠웨이트에서 흘러 들어간 전쟁 자금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쿠웨이트 왕족이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원유값 폭락을 막기 위해 마련된 수출량 제한 원칙을 깼다. 그 결과 1990년 7월에는 원유값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들이 쿠웨이트의 반칙에 반발했지만 쿠웨이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변심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몰렸다. 원유 수출 가격이 곤두박칠치면서, 빚을 갚을 수 있기는커녕 식량 수입마저 어렵게 된 것이다. 격앙된 후세인은 쿠웨이트가 국경 부근의 이라크 유전을 도둑질하고 있으며 부당하게 빚 독촉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쿠웨이트는 왜 석유수출국기구 합의를 깨고 남의 나라 자원을 도굴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으면서까지 석유수출국기구와 후세인의 거듭된 협상제안을 거부했을까.
‘쿠웨이트 침공’덫에 걸린 이라크
결국 참다못한 후세인은 8월 2일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은 이라크가 미국이 주도한 ‘사막의 폭풍’ 작전에 의해 보복을 당하고 오늘날까지 국제 무대에서 고립당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미국이 이라크·쿠웨이트 분쟁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무력 충돌설이 떠돌던 7월27일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 글라스피는 후세인과의 면담에서 쿠웨이트 분쟁은 미국의 국익에 무관하며 따라서 미국은 앞으로도 입장을 밝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라크의 군사 작전에 미국은 개의치 않는다는 뜻이 담긴 이 날의 면담 기록을 후세인은 쿠웨이트 침공 후에 공개했다. 부시(현 조지 W.부시 대통령의 아버지)는 이 문서가 날조된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그 내용은 1년 후 미국 의회에서도 사실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막상 이라크가 쿠웨이트로 진군해가자마자 부시는 대규모 전쟁을 선언했고 어떠한 협상의 가능성도 모두 닫아버렸다. 후세인은 중동평화회담이 소집된다면 쿠웨이트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키겠다고 제안했으나 미국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부시는 이 갈등이 협상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음을 분명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 볼 때 협상을 통한 해결책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필요한 것은 협상이 아니라 신속하고 결정적인 타격과 승리였다.
1979년 이라크 최고지도자가 된 사담 후세인은 중동의 패권을 노리다가 결국 2006년 12월 3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그의 몰락은 물론 영광의 배후에도 항상 미국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 역시 제국주의 미국의 희생양인지도 모른다.
후세인, 믿었던 미국에 ‘발등’
후세인이 미국의 불간섭 방침을 믿고 쿠웨이트를 기습 침공한 이후 놀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쿠웨이트 왕족이 이미 나라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점이었다. 쿠웨이트 왕족을 인질로 삼는다는 계획은 이렇게 해서 물거품이 되었다. 영국 은행과 미국 정부는 후세인이 기습 작전을 벌인 바로 그 날, 모두 천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쿠웨이트의 해외 자산을 압류했다. 후세인의 기습 작전에 못지않은 또 다른 기습 작전이 벌어진 것이다.

또한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 군인들이 인큐베이터에 들어 있는 영아들을 집단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폭로함으로써 미국에서 전쟁 지지 여론에 불을 지른 소녀가, 실은 쿠웨이트 대사의 딸이며 이 인터뷰도 날조극이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걸프전 일으켜 이라크 초토화
결국 이라크 침략으로부터 쿠웨이트를 해방시킨다는 명분하에 미국은 1991년 1월 17일부터 ‘사막의 폭풍 작전’이라 일컫는 걸프전을 개시한다. 6주간 지속된 이 작전은 1천여 시간의 공중폭격과 그 뒤 지상작전 4일 만에 이라크의 항복을 받아냈다. 당시 미국은 열화우라늄탄까지 사용했는데, 이 방사능탄은 현재 이라크인과 미군들 모두에서 나타나고 있는 암과 기형아 출산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공할만한 폭격 뒤 부시가 지상군을 투입했을 때, 이라크는 이미 쿠웨이트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키고 있었다. 결국 미군 지상군이 투입된 것은 이라크군을 쿠웨이트로부터 물리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라크로 돌아가는 길목은 봉쇄됐으며,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던 수 만 명의 이라크군은 미군에 의해 체계적으로 학살됐다. 다른 곳에서는 이라크 수비 병력을 깨부순다는 작전 아래, 미군의 탱크와 불도저가 참호에 들어 있던 수천의 이라크군을 산채로 매장했다. 이렇게 미군에 의한 의도적 학살로 희생된 이라크인은 모두 15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라크인들의 비극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됐다. 미국은 이라크의 전력과 상하수도 체계를 철저히 파괴했으며, 이로 인해 수인성 전염병이 창궐하여 전쟁 때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미국은 이라크에 대해 10년 넘도록 유사 이래 최악의 경제 재제를 가해, 가뜩이나 피폐해진 이라크 경제를 더욱 목 졸랐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이라크 국민들에게 돌아갔다.
걸프전 후 미국 중동지역 패권 확고
반면 미국의 대외 무기 판매는 1989년의 80억달러에서 1991년 4백억 달러로 불과 2년 만에 다섯 배나 증가했다.
걸프전쟁은 미국이 중동 지역에서 그들의 패권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또한 걸프전의 발발로 중동 지역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이라는 대결구도에서 시아-수니의 아랍인간의 새로운 형태의 갈등을 빚게 되었다. 중동 지역에서 발생했던 영토, 종교, 이념적 갈등, 석유자원 배분 문제 등의 원인은 세계 전체의 질서를 재편하려는 미국을 포함한 강대국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라크전쟁의 진짜 이유 ‘석유’
브렌단 넬슨 호주 국방장관은 <2007년 호주 국방백서>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 한 기자의 질문을 받고 “호주가 이라크전쟁에 동참한 이유는 중동지역의 석유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넬슨 장관은 “이라크를 포함한 걸프지역은 세계 에너지의 주요 공급원”이라면서 “호주는 석유공급처의 안정적인 확보가 전략적으로 불가피”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또한 미국의 경제 대통령으로 불렸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전 의장 그린스펀의 회고록 <격동의 시대 회고 : 신세계의 모험(The Age of Turbulence : Adventures in a New World)>에 “이라크전쟁의 주된 원인이 석유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정치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현실이 서글펐다”고 전해 전 세계에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한 “석유시장의 현존 시스템을 계속 작동시키는 목적 달성에 후세인 제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그리스펀은 덧붙였다. 그 현존 시스템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국제 원유값은 현재 배럴당 80달러를 넘어섰다. 그러나 이러한 고유가에도 불구하고 산유국들은 3년간 30%나 떨어진 미국 달러 가치하락으로 실질적 이득은 없다고 한다. 이유는 석유는 달러로만 구입이 가능한 석유-달러본위제 때문인데 이는 과거 사우디의 국왕 알 사우드가 미국의 전함 퀸시 호에서 루즈벨트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시작된 소위 ‘워싱턴-리야드 밀약’의 산물이다.

2003년 유가는 달러기준 150% 오르고 유로화 기준으로는 78% 올랐다. 석유대금은 싼 달러로 받고 상품수입대금은 비싼 유로화로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앉아서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란, 말레이시아, 러시아 등은 원유를 유로화 결제로 수출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잇따른 선언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2000년 9월24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원유대금으로 달러는 일절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이라크 원유판매를 관장하던 유엔이 후세인의 의견을 들어줬다. 이렇듯 미국 근간을 흔들 석유-달러 본위제가 위기에 처하자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감행했다는데 강한 설득력이 부여되고 있다.

이라크 민중의 저항이 계속될수록 세계 2위의 석유매장국인 이라크에 친미정권을 세움으로써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정치경제적 위상을 확실히 하겠다는 미국의 검은 속셈이 선명하게 전 세계에 드러나고 있다.
미국이 없었다면 `킬링필드` 있었을까 세계사

2010/04/24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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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영화 단체관람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영화는 퇴계로의 '대한극장'에서 상영됐는데, 할머니 댁을 오가는 길목에 있는 그 극장의 벽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영화 간판이 아직도 기억난다. 극장 앞을 가득 메운 사람들과 '반공영화' 어쩌고 하는 요란한 선전문구도. 군사독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어린 학생들의 머리통에 반공 이데올로기를 주사 놓겠다는 그 유치하고도 무모한 발상이라니…지금 생각하면 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뉴욕타임스> 특파원 시드니 쉔버그(Sydney Schanberg)가 캄보디아에 가서 취재하다가 자신을 돕던 캄보디아인 동료 디스 프란(Dith Pran)과 극적으로 헤어진 뒤, 고국으로 돌아가 그 동료의 가족들을 돌보면서 자신을 도왔던 그 캄보디아인 동료를 찾는 내용이다. 이 영화가 반공 이데올로기의 선전물일 수 있었던 것은 크메르루주(Khmer Rouge)라 불린 공산주의 세력의 잔혹한 학살 만행 때문이다.

'킬링필드'가 반공영화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이유

▲ 영화 '킬링필드' 포스터

1975년에서 1979년에 이르는 크메르루주 치하에 사망자 수는 대략 80만에서 100만 명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들판과 하천을 가득 메운 뼈 무덤을 보여주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면 공산주의 학살자들의 만행에 주먹을 불끈 쥐고 치를 떨 법도 하다.

그 생지옥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자유의 품'에 안긴 캄보디아인 디스 프란이 미국인 시드니 쉔버그와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관객들은 급기야 동서양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우정에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킬링필드'라 불리는 캄보디아 학살은 그 시기를 둘로 나누어야 한다.

이 영화가 묘사하는 시기는 저 악명 높은 폴포트(Pol Pot)가 이끈 크메르루주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실권을 장악한 론놀(Lon Nol)의 꼭두각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집권했던 1975년부터 1979년까지에 해당한다.

크메르루주가 이 시기에 10만 명에 이르는 지식인과 시민들을 처형하고, 이후 70만에서 80만에 이르는 캄보디아인들이 사망한 것은 모두 입증된 사실이다. 이 영화는 통상 '2기 킬링필드'에 해당하는 바로 이 시기만을 제한적으로 다루고 있다.

1969년 3월 18일, 미국 대통령 닉슨의 승인을 받은 미 공군 B-52 폭격기가 최초로 캄보디아에 폭격을 시작했다. 1973년 8월 15일까지, B-52 폭격기가 캄보디아에 쏟아 부은 포탄의 양은 무려 54만 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했던 16만 톤의 세 배가 넘고, 한국전쟁 기간에 미군이 사용한 49만 5천 톤마저 능가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제네바협약을 위반한 불법 폭격이었다. 죄 없는 수십만 민간인들이 숨지고, 그보다 더 많은 숫자가 평생 불구가 됐다.

1973년 6월 19일 캄보디아 폭격 명령을 거부한 죄로 법정에 선 B-52 부조종사 도널드 도슨 대위는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지만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공격 목표물로 삼았다"고 증언했다. 1969년에서 1973년에 이르는 바로 이 시기가 잘 알려지지 않은 '1기 킬링필드'에 해당한다.

미군 폭격에 의해 희생된 캄보디아인들에 대해 주류 언론 일제히 침묵

따라서 '2기 킬링필드' 이전의 캄보디아가 '평온한 땅'이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미 '1기 킬링필드' 시기에 캄보디아인들은 억압과 착취, 학살과 고문을 충분히 경험하고 있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나라가 미국의 손에 넘어간 후, 미국 꼭두각시 정권의 총수인 론놀의 정부군은 농촌마을에서 무자비한 학살극을 벌였다. "그들은 어린아이의 다리를 잡아 찢는 것으로 담력 시험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 지역에서 살아남아 크메르루주의 병사가 된 사람들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행동이었다."

▲ 시드니쉔버그

그러니 "폴포트주의는 모두가 거기서 잉태된 것이었다." 미국이 없었다면 킬링필드도 없었다.

'킬링필드' 신화는 모든 것을 크메르루주에 뒤집어씌우려는 "미국식 음모"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후에 만든 영화 <미션>과 함께 롤랑 조페 감독은 저 역겨운 서양인들의 '더럽고 추잡한 양심'을 자랑스럽게 떠벌린다.

무자비한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을 희생시켜 놓고도 미국은 그동안의 관례대로 '부수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시드니 쉔버그가 쓴 캄보디아에 관한 칼럼 45건 가운데 미군 폭격의 희생자들에게 단 몇 마디라도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할 기회를 준 것은 단 3건 뿐이었다. 미국과 국제사회, 그리고 주류언론은 침묵했다.

뛰어난 국제분쟁 전문기자 정문태는 '킬링필드'에 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하고 있다. "현대사에 최고·최대 거짓말인 이 미국식 킬링필드의 전설을 끊어버리는 일이야말로, 세계시민사회가 더 이상 미국으로부터 '개죽음' 당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선언이고 엄숙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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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 책임자가 크메르루주뿐인가

4월 관련자 기소 절차 시작됐지만, 1960년대 미국 대규모 공습은 전혀 논의되지 않아

▣ 국제분쟁 전문기자·정치학 박사 kimsphoto@hanmail.net

캄보디아 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킬링필드>(Killing Field)다. 1975년 크메르루주 세력이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자, 미국 <뉴욕타임스> 특파원의 통역을 하던 주인공이 겪는 고난에 초점을 맞추었다. 논란거리가 있지만, 캄보디아의 비극을 전세계로 알리는 데 이 영화가 한몫했다. 캄보디아 현대사가 지닌 색깔은 죽음의 잿빛이다. 20년 내전과 베트남 전쟁의 불똥으로 숱한 생목숨이 희생됐다. 희생자 규모는 지금도 논란거리지만, 최대치는 150만 명에서 200만 명까지 올라간다.


△캄보디아 학살 희생자들을 모신 사당 앞의 소년. 1960년대 미국 지도자들이 결정한 공습으로 5만~15만명의 캄보디아 농민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이 소년은 알고 있을까?(사진/ 김재명)

아침,점심,스낵… ‘메뉴’대로 퍼붓다

사건은 30년 전에 벌어졌지만, 킬핑필드 관련자에 대한 공식 기소 절차는 4월 들어서야 시작됐다. 향후 재판이 열릴 장소는 캄보디아와 유엔이 2006년 7월 공동으로 설립한 캄보디아 국제전범재판소 법정. 그곳에 서게 될 피고들은 이제는 다들 노인이 된 크메르루주 정권 지도자들이다. 이 가운데 실제로 몇 명이나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게 될지는 불투명하다. (크메르루주 최고지도자 폴 포트는 1998년 캄보디아 북부 정글에서 73살로 눈을 감았다.)

여기서 따져볼 문제 두 가지. 첫째, 캄보디아에서 저질러진 학살범죄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폴 포트를 비롯한 크메르루주 지도자들뿐인가. 둘째, 캄보디아 학살이 1970년대 후반 크메르루주 집권 시절에만 벌어졌는가. 캄보디아 국제전범재판소는 크메르루주 집권 시절인 1970년대 후반에만 국한했다. 그렇다면 캄보디아 학살에 관련된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과 그의 국가안보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에게 사면장을 쥐어주는 셈이다.

1970년대 후반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 군의 공포정치가 있기 앞서 캄보디아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1968년 초 미국의 베트남전 군사 개입이 한창일 때 미군 병력은 55만 명에 이르렀다. “베트남전을 끝내겠다”는 공약 아래 1969년 1월 미 대통령이 된 닉슨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키신저는 오히려 전선을 캄보디아로 넓혀나갔다.

두 사람은 캄보디아 동부 베트남 접경지대의 ‘호찌민 루트’를 따라 움직이는 적대세력(북베트남군과 베트남인민해방전선, 즉 베트콩)을 겨냥한 대규모 공습을 결정했다. 그에 따라 B-52기들이 캄보디아로 출격했다. 공습은 ‘메뉴’(Menu)라는 은어로 일컬어졌고, 공습작전 이름도 식사 시간과 관련됐다. 아침작전, 점심작전, 스낵작전, 저녁작전 그리고 후식작전 등이다.

미군의 북베트남 공습은 1973년 1월 파리 평화회담으로 그쳤다. 그러나 캄보디아 공습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공습은 미 의회나 언론, 국민들에겐 비밀이었다. 닉슨 대통령의 사임(1974년 8월)을 몰고 온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져서야 비로소 캄보디아 공습 사실이 알려졌고, 그제야 공습도 멈췄다. 1973년 공습 마지막 6개월 동안에 집중적으로 25만t의 공습이 행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일본에 떨어뜨린 폭탄(16만t)보다 9만t이 많았다.

캄보디아 공습은 키신저의 바람과 달리 공산세력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지 못했다.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당시 캄보디아를 취재했던 영국 저널리스트 윌리엄 쇼크로스는 “크메르루주 세력이 불어난 것은 미국의 군사 개입이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공습으로 가족과 생활 터전을 잃은 캄보디아 농민들은 미국의 지지를 받았던 론 놀 장군의 친미 군사정권에 적개심을 품게 됐다. 그들은 반군세력인 크메르루주를 위해 기꺼이 총을 들고 나섰다.

키신저는 왜 사과하지 않나

당시 캄보디아 주재 미 대사 에모리 스원크는 미군 공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1973년 캄보디아 주재 미 대사직을 그만두면서 미국의 캄보디아 공습을 가리켜 ‘인도차이나의 가장 헛된 전쟁’이라 불렀다. 그 무렵 캄보디아를 방문했던 미 하원의원 페티 매클로스키는 “미국은 베트남 전쟁 때문에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 미국이 저지른 악(evil)보다 더 큰 악을 캄보디아에서 저질렀다”(1975년 2월 미 상원 외무위원회에서의 증언)고 말했다.

캄보디아 농민들은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다가 폭격으로 죽고, 밤에는 집에서 자다 네이팜탄에 불타 죽었다. 5만∼15만 명의 농민들이 목숨을 잃고, 200만 명이 논밭을 버리고 난민이 됐다. 따라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크메르루주 치하의 1970년대 후반이 아니라 이미 1960년대에 시작됐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캄보디아 공습 결정을 내렸던 키신저는 지금껏 자신의 정책이 잘못됐다고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1994년에 사망한 닉슨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미국 정치권에 나름의 영향력을 지닌 키신저가 무덤 속의 닉슨과 함께 캄보디아 국제전범재판소로 불려나와 준엄한 단죄를 받을 날은 영영 오지 않을까. ‘역사의 심판’이란 용어는 그들 사전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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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포트는 억울하지 않을까

캄보디아 200만 학살의 원흉, 아시아판 히틀러로 평가된 최악의 인물
60만을 죽인 1차 킬링필드의 전범은 미국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하라

▣ 류이근 기자/ 한겨레 경제부 ryuyigeun@hani.co.kr

얼마 전 우연히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아시아네트워크 지음)를 읽었다. 그리고 문뜩 ‘그가 억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100여 명의 아시아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한겨레21>의 설문조사에서 폴포트는 예상대로 1위로 나왔다.

말할 것도 없이 200만 명에 이르는 캄보디아인 학살의 ‘원흉’으로서 그를 아시아판 히틀러로 평가한 것이다. 지난 100년 동안 아시아인들에게 가장 영향이 컸던 정치·사회적 사건으로 꼽힌 2차 세계대전의 아시아·태평양 쪽 가해자인 일본의 히로히토 국왕이나 1급 전범 도조히데키보다 그가 더 ‘나쁜 놈’이었다.

메콩강에 50만t의 폭탄을 쏟아붓다

이제 무덤에 묻힌 폴포트가 억울하지 않을까 하고 뇌까렸던 것은 킬링필드의 공범에 대한 분노이자 역사의 무지가 빚어낼 수 있는 잘못된 전설에 대한 반성이다.

1997년 이후 킬링필드의 주역을 법정에 세우려는 미국과 유엔의 압박에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는 “1969~73년에 벌어졌던 일들도 재판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맞섰다. 이 기간 동안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킬링필드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시아 최악의 지도자인 폴포트(맨 왼쪽) 뒤엔 미국이 있다. 200만 명의 대량학살을 상징하는 킬링필드의 반은 미국의 몫이다.

핀란드 정부의 독립적인 조사보고서인 ‘캄보디아, 10년간의 학살’은 이 기간을 1차 킬링필드라고 불렀다. 그리고 1975~79년은 2차 킬링필드로 나뉜다. 1차 킬링필드에선 60만 명이 죽었다고 이 보고서는 분석했다. 누구에 의해? 미국이다. 미국은 캄보디아 산악지대를 이용한 북베트남군의 전쟁 물자 운송을 차단한다는 목적으로 의회와 언론에 이 사실을 숨긴 채 메콩강 일대에 4년 동안 50만t의 재래식 폭탄을 쏟아부었다.

당시 미 백악관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키신저는 “베트콩들이 남부 베트남과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를 보급 거점으로 삼아 준동하고 있다. 캄보디아 폭격으로 캄보디아 공산당과 북베트남 연대를 끊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 논리를 충실히 따른 폭탄에 맞거나, 폭격으로 황폐화된 농토를 바라보며 수십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숨졌다.

그러고 나서야 캄보디아 혁명에 성공한 크메르루주가 1975년 등장한다. 폴포트는 미국 괴뢰정부 론놀에 봉사했던 지식인과 시민 10만 명을 처형했고, 이후 집권 5년 동안 질병과 기아로 숨진 이들이 70만~80만 명에 이른다. 폴포트는 마오사상의 이상을 실현시킨다며 지식인들과 숙련된 기술자, 근로능력이 없는 노인들을 색출해 농촌으로 보내 강제 노역에 투입했다. 이 기간 동안에도 미국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단체들이 캄보디아 구호사업에 뛰어드는 것을 차단했다.

“닉슨과 키신저도 재판 받아야”

미국의 언론들은 킬링필드의 주연은 크메르루주, 조연은 북베트남이라며 자국 정부의 논리를 충실히 세계에 퍼뜨렸다. <킬링필드>란 영화도 크메르루주에 대한 저주를 증폭시켰을 뿐이다. 지금까지도 미국의 학살 책임은 알려진 게 거의 없을 정도다. 촘스키는 <프로파간다와 여론>에서 “1970년대 초에 캄보디아 농촌을 상대로 역사상 가장 집중적인 폭격을 지시했던 사람들도 당연히 전범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밝힌다. 그가 말하는 폭격을 지시한 사람들은 바로 닉슨과 키신저 등 미국의 고위 정부관료들이다.

킬링필드에서 죽은 200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은 말이 없고, 죽인 자들도 말이 없다. 그래서 역사는 지켜보는 자들의 몫이다. 킬링필드의 책임을 모두 폴포트에게 돌리는 것은 우리가 아시아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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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 20세기 최대의 거짓말

크메르루주를 능가했던 69~73년 미군의 대량폭격학살… 책임자 키신저부터 국제법정에 세워야

1970~80년대 ‘문화교실’이란 게 있었다. 요즘도 그런 게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선생이 학생들을 이끌고 단체로 극장에 가는 군대식 문화행사였다. 그렇게 줄지어 가서 본 영화들이 <성웅 이순신 장군>이었고 <의적 홍길동>이었다. 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외국 순정물도 있었다.

“전두환 독재타도”를 외치는 함성과 최루탄이 하루도 멈춘 날이 없던 1984년, 전국 극장은 여고생들로 울음바다가 됐다. 여고생들은 길거리로 쏟아져나온 뒤에도 메케한 최루탄 기운 탓인지 아니면 ‘감동’이 식지 않은 탓인지 연신 눈물을 찍어댔다.

영화 <킬링필드>엔 꿍꿍이가 있다


△사진/ 살아 있는 크메르루주쪽 학살범으로 엥 사리(오른쪽)를 기소하겠다면, 적어도 아메리카쪽 학살주범인 키신저(왼쪽)를 같은 법정에 세워야 한다. (GAMMA/ 정문태)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라는 영화, 그 문화교실은 시대상과 뒤섞여 감수성 예민한 여학생들을 자극했고, 그들은 중년이 된 지금도 가슴 한쪽에 <킬링필드>를 매달고 있지 않나 싶다.

<킬링필드>는 시드니 샨베르그라는 <뉴욕타임스> 기자와 그를 도운 캄보디아 현지 기자 사이에 폴 포트가 집권한 ‘1975~79년’이라는 정치공간을 집어넣고, 이별과 만남 같은 통속적인 주제로 감성을 자극해 크메르 루주에 대한 저주를 증폭시키는 동시에 아메리카 학살사를 교묘하게 은폐시킨 영화였다.

“영화가 지닌 창작성을 인정하더라도 ‘실화’로 강조한 다음에는 역사를 왜곡할 수 없다. 특히 민감한 정치적 사안은 ‘선전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크고, 그렇게 되면 영화는 이미 음모가 되고 만다.”

1975년 4월17일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에 입성할 당시 시드니와 함께 마지막까지 프랑스 대사관에 남아 캄보디아를 취재한 종군기자 나오키 마부치(뉴스 카메라맨)의 말마따나 현장에 있던 대다수 기자들은 <킬링필드>가 인물관계에서도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모두 ‘아메리카 지상주의’를 살포한 무슨 ‘꿍꿍이’가 있는 영화라 혹평했다.

그럼에도 <킬링필드>는 전설이 됐다. 전설은 곧 역사가 되었다. 희생자들이 두 눈 빤히 뜨고 살아 있는 기껏 30년 전 캄보디아 현대사는 그렇게 아메리카가 만든 ‘킬링필드’에 묻혀 전설 따위나 기록하는 어처구니없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킬링필드’든 무엇이든 학살을 이야기할라치면 적어도 아래와 같은 세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학살자가 누구였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는가” “왜 학살을 했는가”

캄보디아에서도 아메리카에서도 또 한국에서도 ‘킬링필드’ 전설에 따르면 대답은 간단하다.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 루주.” “200만명.” “공산주의 체제 건설한답시고.”

이렇듯 아무도 의심하는 이 없이 모든 책임을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운 채 역사가 돼온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놓고 1997년부터 국제사회는 학살범을 처단하겠다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출발부터 아메리카 정부가 쥐고 흔드는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 사이에 승강이만 벌였지 정작 재판도 한번 열어보지 못한 채 5년 가까운 세월만 흘려보냈다.

“누구를 재판에 회부할 것인가” “재판정은 어디에 설치할 것인가” “비용은 누가 부담할 것인가” “캄보디아와 국제사회가 판사를 각각 몇명씩 배치할 것인가” “형벌을 사형으로 할 것인가 무기형으로 할 것인가” 이런 것들을 정하는 데만도 무려 5년이나 걸렸다. 그 과정은 그야말로 희생자들을 두번 죽이는 정치적 흥정이었고 음모였다.

69~73년 제외, 훈센과의 흥정


△사진/ 아메리카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건물에 차곡차곡 쌓아둔 유골들. 이래도 아메리카는 1969~73년에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을 숨겨왔다. (정문태)


이 마가 낀 킬링필드 학살재판을 통해 취약한 정치적 합법성을 국내외로부터 인정받겠다는 캄보디아 훈센 총리의 야심과 킬링필드에 종지부를 찍어 모든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아메리카 속셈이 충돌한 한판이다 보니 처음부터 ‘순정’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었지만.

“1969~73년에 벌어진 일들도 재판에 포함시켜야 한다.” 훈센은 막힐 때마다 이 카드를 은근히 뽑아들었지만, 유엔과 아메리카 정부는 그때마다 경제지원을 들먹이며 달래기도 하고, 두들겨패기도 하며 결국 자신들 뜻대로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1975~79년의 기간만을 학살재판 대상으로 삼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 아메리카는 킬링필드 학살재판에서 사력을 다해 ‘1969~73년’을 제외시켰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1969~73년에 아메리카가 먼저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걸 편의상 제1기 킬링필드라고 하면, 1975~79년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발생한 학살은 제2기 킬링필드에 해당한다. 캄보디아 양민학살은 이렇게 10년 동안 서로 다른 두 집단이 두번에 걸쳐 자행했고, 따라서 크메르 루주 집권기만을 범죄대상으로 다루면 킬링필드 역사를 온전히 밝혀낼 수 없거니와 결국 모든 책임을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우겠다는 아메리카식 음모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진 라코처가 쓴 <이어 제로>(Year Zero, cited Pol Pot official)가 있다. 크메르 루주가 200만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한 이 책은 아메리카에게 ‘성경’ 같은 책이었다. 그런데 이 작자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스스로 그 수를 조작한 것이라 해명하는 촌극을 벌였다. 그래도 지금까지 그 책은 크메르 루주가 200만명을 죽였다는 전설, 그 공식적인 자료로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100만명이든 200만명이든 학살 희생자 수를 따지려면 1969~73년에 아메리카가 폭격해서 죽인 60만~80만명에 이르는 양민들을 흔히 알고 있는 킬링필드 전설에서 분리시켜야만 온전한 역사가 된다.

이미 알려진 대로 마오이즘을 본떠 1975년 캄보디아 혁명에 성공한 크메르 루주는 화폐통용 금지, 무역 금지 같은 조치들을 취하며 공상적 사회주의라 부를 만한 극단성을 드러냈다. 특히 크메르 루주는 아메리카 괴뢰정부 론 놀에 봉사한 이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10만명에 이르는 지식인과 시민들을 처형했고, 1975~79년의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과로와 질병이나 기아로 죽은 이들이 70만~80만명을 웃돌았다.

이 기간에 발생한 기아와 질병 사망자는 아메리카가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의 대캄보디아 구호사업을 차단해버린 데서 비롯한 일이기도 해서 크메르 루주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리가 상당한 설득력을 얻어온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튼 결과만 놓고 보면 크메르 루주는 시민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시민들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크메르 루주 킬링필드가 존재했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가 시민을 살해했다는 사실만으로 10년 동안 자행된 킬링필드 책임을 모조리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워도 좋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얼마나 죽었는가


△사진/ 캄보디아 땅은 아직도 아메리카 비밀폭격 상처를 안고 있다. 이런 대형 폭심지도 크메르루주가 만들었다고? (정문태)


학살 제2기에 해당하는 1975~79년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죽은 사람들 수는 연구자나 정치적 배경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수많은 캄보디아 연구서들을 쏟아낸 데이비드 챈들러나 마이클 비커레이 그리고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가 대체로 극단적인 추산을 피한 경우로 꼽혀왔다.

챈들러는 크메르루주가 처형한 수를 10만명으로, 비커레이는 처형한 수를 15만~30만명 정도에 기아·질병·중노동으로 죽은 이들을 약 75만명으로,

그리고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는 사형과 질병, 기아로 죽은 이들을 합해 약 100만명으로 각각 밝힌 바 있다. 이런 조사연구를 기준삼아 전문가들 사이에는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죽은 이들 수를 80만~100만명이라 여겨왔다.

여기에 학살 제1기에 해당하는 1969~73년에 아메리카가 폭격으로 죽인 양민 수를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는 약 60만명으로, 위 다른 연구자들은 40만~80만명 정도로 각각 추산했다.

이렇게 해서 제1기 아메리카 학살과 제2기 크메르 루주 학살을 모두 합해 10년 동안 약 150만~160만명에 이르는 양민들이 살해당했는데, 이게 킬링필드의 전모다.

이래도 아메리카가 주장하는 대로 1975~79년 크메르 루주 집권기만을 킬링필드로 부른다거나, 10여년 동안 진행된 킬링필드 책임을 모두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이 온당한 일일까

아메리카는 킬링필드를 모두 크메르 루주가 저지른 짓이라 잡아떼겠지만, 프놈펜에서 1번국도를 따라 약 35km 떨어진 프레크트렝 마을을 기억해보라 권하고 싶다. 1973년 B-52 전략폭격기가 무차별 포격을 가한 마을주민들은 아직도 당시 희생자 유골을 담은 보따리를 간직하고 있으니.

끝내 아메리카가 시치미를 떼겠지만 프놈펜에서 남쪽으로 베트남 국경에 이르는 어디든 좋다. 어느 마을이든 가보라 권하고 싶다. B-52에 폭격당하지 않은 마을을 발견할 수 있으면 당장 아메리카는 자유로워져도 좋다. 모든 학살책임을 크메르 루주에게 돌려도 좋다는 뜻이다.

캄보디아가 너무 멀다고 그러면 이번에는 아메리카 안에서 찾아보라고 권할 수도 있다.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목표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캄보디아 불법폭격을 고발한 도널드 도슨(당시 공군 대위·B-52 부조종사)을 아메리카는 1973년 6월19일 폭격명령 거부죄로 법정에 세웠다.

아메리카 군사자료를 종합해보면, 1969~73년에 아메리카는 B-52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캄보디아에 무려 53만9129t에 이르는 각종 폭탄을 투하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메리카가 일본에 투하한 총량 16만t을 3배나 웃도는 엄청난 양이었고, 파괴력은 히로시마 핵폭탄 25배를 웃도는 것이었다. 그렇게 캄보디아에 퍼부은 폭탄이 불바다를 만드는 네이팜탄이었고, 고엽제로 자손 대대 치명상을 입히는 에이전트 오렌지였고, 수백개 새끼탄을 까며 시민들을 살해한 클러스터밤(CBU)이었다.

1957년 제네바협약을 송두리째 위반한 이 폭탄들은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말썽이 나자 자취를 감췄지만, 클러스터밤만은 여전히 걸프전과 코소보전, 최근 아프가니스탄전에서도 악명을 떨치며 아이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베트콩 잡겠다며 캄보디아 민간인 학살

게다가 B-52란 놈은 핵무기 수송수단으로 개발한 탓에 공군전략사령부 소속이었으나 캄보디아 폭격에 비밀스레 동원한 B-52는 아메리카 남부 베트남사령부에서 명령을 내렸고, 심지어 국방장관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불법작전을 수행했다. 그렇게 비밀불법전을 통해 학살한 캄보디아 양민 수가 60만~80만명이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만천하에 드러난 크메르 루주쪽 학살주범 폴 포트와 달리 아메리카쪽 학살주범은 누구였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모든 관련자들이 ‘최고 명령권자’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안보고문(1974년부터는 국무장관)을 지목했다.

“베트콩들이 남베트남과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를 보급거점으로 삼아 준동하고 있다. 캄보디아 폭격으로 캄보디아공산당(CPK)과 북베트남 연대를 끊어야 한다.” 당시 국가안보회의(NSC)를 주도하며 닉슨을 주무른 헨리 키신저가 강조한 캄보디아 비밀폭격 논리였다.

“캄보디아에 대한 공격이 아니었다. 캄보디아에 거점을 둔 베트콩을 공격했을 뿐이다.” 이건 1973년 들어 결국 대캄보디아 비밀폭격을 눈치챈 의회가 공습을 중단하라며 난리를 치자, 키신저가 맞받아친 말이다. 키신저에 따르면 60만~80만명에 이르는 캄보디아 양민들이 베트콩이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결론이 난다.

키신저, 왜 그를 학살주범으로 기소해야 하는지는 처음부터 이렇게 분명했다.

전쟁선포도 하지 않은 중립국에 융단폭격을 가했다는 사실도, 전쟁과 무관한 중립국 정부를 쿠데타로 뒤엎은 사실도, 시민들에게 공습경고 한번 내리지 않은 사실도, 제네바협약을 어기며 불법 폭탄을 퍼부은 사실도,

4년 동안 폭격하면서 의회에 대한 보고의무를 한번도 수행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군 명령권자가 아니면서 폭격점까지 지시하며 권력을 남용한 사실도, 군 명령과 보고체계를 무시한 채 비밀전쟁을 수행한 사실도, 캄보디아 폭격에 대한 진실을 철저하게 부정한 사실도, 그렇게 해서 양민 60만~80만명을 살해한 죄목은 모두 키신저 몫이다.

살아 있는 크메르 루주쪽 학살범으로 엥 사리, 키우 삼판, 눈 치에, 타 목을 기소하겠다면 적어도 아메리카쪽 학살주범인 키신저를 같은 법정에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 ‘감동적인 눈물’의 진실

세계적 석학이니 국제전략전문가라 불리며 호사스러운 여생을 보내는 키신저를 기소하지 않고는 킬링필드도 학살재판도 모두 영원히 반쪽짜리 전설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밀불법전쟁을 주도한 키신저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아메리카식 킬링필드에 침묵해온 언론들은 키신저를 존경하는 석학이라 떠들어대며 거금을 주고 글 나부랭이나 받는 걸 명예로 여겨왔다. 옳은 일인지 어떤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아메리카식 정의만 있는 캄보디아 학살재판, 아메리카식 킬링필드를 지우려는 캄보디아 학살재판, 그래도 이 학살재판을 인정할 것인가 그래도 킬링필드 전설을 따라 감동적인 눈물을 흘릴 것인가

현대사에 최고 최대 거짓말인 아메리카식 킬링필드 전설을 끊어버리는 일이야말로, 앞으로 더 이상 세계 시민사회가 아메리카로부터 ‘개죽음’당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경고다.

1. 6.25 전쟁의 개요


여러분은 6.25전쟁에 대해 어떻게,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정규 교육을 받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6.25전쟁에 대해 학교에서 배우셨을 겁니다. 제가 학교에서 배운 6.25전쟁에 대한 개략적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조선은 해방을 맞았고, 또한 곧바로 38선이 그어져 남과 북으로 국토가 분단되고 말았습니다.


2. 소련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격 남침을 감행,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3. 하지만 우방인 미국은 공산권의 발호에서 민주주의 남한을 지킨다는 정당한 명분 하에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기로 결정하고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며,


4. 곧바로 유엔군도 연합군을 구성하여 전쟁에 참가하게 됩니다. 인민군의 압도적인 공세에 밀린 국군과 연합군은 경상도를 제외한 남한 전 지역을 빼앗기게 되지만,


5/6.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감행으로 전세를 회복, 서울을 수복한 뒤 단숨에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갑니다.


7. 하지만 통일이 이뤄지려는 그 때 안타깝게도 10월 8일 인해전술로 유명한 중공군이 참전, 전세가 역전되어 국군과 연합군은 경기도 오산까지 밀려 내려오고야 맙니다.


8. 압도적인 숫자의 중공군에 밀리던 연합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 서울을 다시 수복하고 38선 근방에서 전선이 고착화되어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이어지게 됩니다.


9. 이후 1951년 7월에 개성에서 미국과 중국 북한이 참가하여 휴전회담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포로 교환문제로 1년 6개월 이상이나 회담이 이어졌고, 그러는 와중에도 크고 작은 전투는 끊임없이 벌어졌습니다.


10. 1953년 7월 27일, 결국 협정이 체결되었고, 38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의 분단이 고착화됨으로써 6.25 전쟁은 휴전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영향권에 편입되어 아시아 공산주의 국가로 성장해 나갔고, 남한은 일본ㅡ대만ㅡ필리핀을 잇는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 편입됐습니다. 폐허가 되었던 남한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재건되었고, 스스로 한강의 기적을 일구고 경제발전을 거듭하여 현재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었고, 전후의 피폐해진 경제상황에서 굶주리는 우리 국민들에게 많은 원조를 해주어 우리 국민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인도적 차원에서 도와주었습니다.


이 정도면 제가 학교에서 배운 6.25의 전후사정에서 어긋남이 없고, 여러분들께서 상식으로 알고 계신 내용과도 크게 상치되는 부분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진상을 과연 제도권에서 알려주는 그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좋은 것인지 사례를 들어가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 전쟁 전 남과 북의 동향.


가. 북한의 군비증강


1948년 12월 17일, 소련 중국 북한의 3국 비밀 전략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서 3국은 북한의 군비증강 계획에 관해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으며, 그 합의사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추후 18개월 동안(49년~50년 6월까지) 아래와 같은 군비증강책을 실시한다.


? 북한에 이미 창설한 3개 사단 1개 혼성여단 외 새로 편성될 6개 사단과 1개 돌격사단분, 총 열개 사단 분의 장비를 제공한다.

? 3개 기계화부대 분의 장비를 제공한다.

? 7개 보안대대 분의 장비를 제공한다.

? 공군창설을 위해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중/경 폭격기 30대를 제공한다.

? 120명의 군사고문단을 평양에 파견한다.

? 1949년 5월 말까지 북한통용 화폐가치로 100억 상당의 군수품을 제공한다.

? 중공은 만주 동북의용군 3만 명을 무장한 채 입북시켜, 이들을 기간으로 8개 전투사단과 8개 예비사단을 편성케 한다.

? 북한은 웅기, 청진, 원산 등 동해안 여러 항구를 소련의 잠수함 기지로 제공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할 당시엔 보잘 것 없던 북한의 군사력은 급속도로 확장되어서, 전쟁 발발 직전에는 각종 신형 무기를 보유하는 한편 도합 169000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북한이 무력도발 남침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소련과 중국의 전폭적인 원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 국군의 열악한 상황.


북한이 1950년 6월까지 착착 전쟁준비를 하는 동안, 남한은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요? 남한에서는 1946년 1월 15일 남조선 국방경비대를 발족하였습니다.



하지만 국방경비대의 무장은 너무 빈약해서 전쟁수행보다는 치안유지에나 적합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경비대를 무시하는 경찰과 사사건건 충돌해서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또한 국방경비대에는 남로당원들이 대거 침투하여 내부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남로당이 주동이 된 4.3사태가 벌어졌는데요, 이를 기화점으로 군 내부의 남로당원들이 호응, 14연대 반란을 시작으로 4연대 일부, 6연대 일부, 15연대가 반란에 가담했습니다. 반란군은 순천, 보성, 광양, 구례를 장악하면서 세를 확장하다가 6개월 만에 진압되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남로당은 불법단체로 규정됐는데요, 군에서 4749명이 남로당원으로 적발돼서 숙청됐고, 숙청기간 동안 탈영한 남로당원이 5568명이었습니다. 전군이 98000여 명이었는데, 그 중 10%, 한 개 사단분의 인원이 좌익 공산세력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1949년 5월 4일, 국군 8연대의 표무원, 강태무 두 대대장이 각자의 대대를 이끌고 월북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 밖에도 강동정치학원 출신의 인민유격대가 48년 11월부터 50년 6월까지 모두 다섯 차례 남파되어 국군과 전투를 치뤘고, 전쟁 전까지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남파된 인민유격대원은 총 2450여 명이었습니다.



또한 38선에서는 49년 한 해 동안만 874회에 이르는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고, 그 대부분은 북한의 도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6.25 전까지 내전을 치르고 인민유격대와 전투를 치르느라 국군은 훈련이 부족했고, 군수물자도 태부족이었습니다.



국군이 미군으로부터 지원받는 군사원조는 65000명 분량이었는데 실제로는 병력이 10만 명으로 증강이 되었기 때문에 물자가 부족하고 무장이 빈약한 것은 어쩔 수가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쟁 직전, 북한과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 육군참모총장의 정보 묵살 의혹.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을 틈타 인민군이 노도처럼 밀려 내려오자 안심하고 장병들에게 휴가를 보냈던 국군은 미리 대비를 하지 못 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6.25에 관해 이야기할 때 흔히 듣는 말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육군 수뇌부에서 그러한 남침 징후를 몰랐을까요? 전쟁 전에 육군본부로 보고된 정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 1950년 3월 25일 북한 수 개 사단이 38선에서 39선에 전진배치, 만주에서 입북한 전사들이 각 사단에 배속하여 그 수가 증가하고 있음. 북한 전역에서 10만에서 15만에 이르는 강제징집 실시. 3월 중순 38선 일대 주민을 5킬로 북쪽으로 소개시킴.

? 1950년 4월 15일 북한의 전면남침 징조 관측됨.

? 1950년 4월 28일 북한 공군 중위 이건준이 YKA-9형 전투기를 몰고 월남, “몇 개월 사이에 전쟁이 발생할 것이다.” 라고 진술.

? 1950년 6월 10일 춘천 오대산, 강릉 해상을 통해 인민유격대 침투, 포로 심문 결과 “전쟁준비는 완료되었고, 명령하달만 기다리고 있다.”는 진술 확보.

? 1950년 6월 20일 정보원 김기희를 통해 북의 전쟁준비 사실 입수.

? 1950년 6월 22일 동두천 1연대에 인민군 전사 귀순, 남진을 위한 38선 지뢰해체 명령을 받고 탈영했다고 진술.

? 1950년 6월 22일, 국군 7연대는 유천면 인민군 부대에 1개 대대의 전차가 집결하고 포 진지를 만들어 포신을 남으로 지향, 빈번한 차량 이동을 관측, 보고.

? 1950년 6월 24일 옹진반도 국군 17연대 전면에 인민군 증강, 모든 포신이 남쪽을 지향. 군관들이 남쪽을 지속적으로 관측하는 것이 목격됨.

? 1950년 6월 24일 국군 9연대는 양문리 38선 2킬로 전방 고지에 인민군 군관들이 지도를 펴고 남쪽 지형을 관찰하는 모습을 목격.

? 1950년 6월 24일 국군 1연대 정면 초성리 북쪽 고지에서 인민군 군관들이 남쪽 지형을 관찰하는 모습이 목격됨.



6월 22일부터 24일 오후까지 육본 정보과는 전방부대에서 오는 전화를 받느라 24시간 정신이 없었고, 육본 정보국의 장도영 국장은 각종 보고를 종합 분석한 결과 인민군의 전면남침 가능성을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보고합니다.



한편 미 군사고문단은 북한의 남침은 불가능하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고, 채병덕 참모총장은 서울에 가만히 앉아있으면서 전방에서 들어오는 긴급한 보고들을 묵살하고 인민군의 남침은 불가능하다는 미군의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습니다.




라. 이해할 수 없는 인사이동 및 군수후송 조치.



인민군의 전면남침 위협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1950년 6월 10일 채병덕 참모총장은 전군에 인사이동 명령을 내렸습니다. 인민군 남침 시 가장 중요한 방어지역인 포천과 의정부의 사단장들을 교체하였고, 서울 방어에 가장 중요한 7사단과 수도사단의 사단장을 전방사단과 맞바꾸는 등, 부대를 혼란케 하였습니다.



또한 전쟁 시 가장 중요한 부서인 작전국의 국장, 차장, 과장을 모조리 갈아치워 버리고 각 부대를 타 부대에 배속시켜 지휘에 혼란을 유도했습니다.




? 이형근 준장, 8사단장 -> 2사단장? 김종오 대령, 참모학교 -> 6사단장

? 유재홍 준장, 2사단장 -> 7사단장? 이상가 대령, 16연대장 -> 8사단장

? 신상철 대령, 6사단장 -> 인사국장 ? 강문봉 대령, 작전국장 -> 미 참모대학

? 김홍일 소장, 육사교장 -> 참모학교장 ? 이준식 소장, 7사단장 -> 육사교장

? 김점곤 중령, 12부연대장 -> 정보국 차장

? 박림항 대령, 3연대장 -> 작전국 차장 ? 정래혁 중령, 참모학교 -> 작전과장

? 장창국 대령, 참모학교 부교장 -> 작전국장

? 이종찬 대령, 국방부 1국장 -> 수도경비사령관

? 2사단 25연대 -> 6월 20일 -> 7사단 배속 -> 의정부

? 7사단 2연대 의정부 -> 6월 15일 부로 수도사단 -> 6사단 배속 6월 23일 홍천으로

? 6사단 8연대 홍천 ->수도사단 배속 -> 서울




또한 육군 보유 차량 총 1500대 중 500대를 뜬금없이 정비를 해야 한다며 부평으로 후송 명령을 내렸고, 중화기의 일부도 수리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부평으로 후송토록 명령해 전쟁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게 했습니다.



마. 6월 23일의 의혹



6월 23일 낮, 미 군사고문단장 직무대리인 참모장 헨리 대령은 일본에 가 있는 브라운 준장의 전화명령을 받고 채병덕 참모총장을 방문했습니다. 이날의 대화에서 헨리 대령은, 24일 밤 한국 육군참모학교 구내의 장교구락부 개관을 축하하는 성대한 칵테일 파티를 열 것을 제안했습니다. 또한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도록 설득하여, 채병덕 참모총장은 이를 수락합니다.



(1) 비상경계령 해제와 휴가 외출 실시



채병덕 참모총장은 헨리 직무대리와 만난 후 김백일 참모부장을 불렀습니다. 6월 24일 낮 12시를 기해, 전군에 내려졌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장병들에게 휴가와 외출을 보내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명분은 농번기이므로 군 장병들이 휴가를 나가 농사일을 돕도록 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24일 오후, 정보국에서는 참모총장에게 보고하여 경계령 부활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참모총장은 오전에 해제하고 오후에 다시 경계령을 내릴 수는 없다며 요청을 묵살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전방 부대는 텅 비고 주말 도심은 휴가를 나온 장병들로 흥청거렸습니다.



(2) 24일 밤의 성대한 파티


이렇게 하여 24일 밤, 장교구락부 개관 파티가 열렸고, 몇 달째 계속되던 경계령이 해제된 데다 주말 밤이기도 해서 육본 수뇌부와 일선 지휘관을 포함한 50여 명의 고급장교들이 참석했고, 재경 미 군사고문단 장교들도 여럿 참석을 했습니다. 이 파티는 밤 10시경 끝났지만, 참석자들은 장소를 옮기며 25일 새벽 2시경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즉, 남침이 있기 2시간 전까지 고주망태가 되어 골아 떨어져 있던 겁니다. 이후 국군은 전쟁발발 후 각급 지휘관들이 인사불성으로 자리를 비운 탓에 남침에 대해 명민한 대응과 파악을 할 수 없었고, 육군본부 장교들은 6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북한의 전면공격이라는 것을 전달받고 본격적으로 대응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인민군이 포천을 점령하고 의정부를 향해 진격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였습니다.



(3) 도쿄에 가 있던 미 군사고문단장




이 때 한국군을 총 지휘해야 할 미 군사고문단장 브라운 준장은 이미 6월 10일에 정년퇴임을 했고, 24일 밤에는 귀국을 위해 도쿄로 가 있었습니다. 또한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파티를 건의했던 군사고문단장 직무 대리헨리 참모장은 정작 자신은 파티에 얼굴만 비춘 뒤 주말 휴가를 명분으로 밤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몇 가지 의혹이 생깁니다. 미국은 과연 북한의 남침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다면 왜 미리 방비하도록 하지 않았는가? 채병덕 참모총장은 어째서 정보를 묵살하고 의도적으로 북한의 남침을 도와주었을까?



바. 남로당의 공작인가?




앞서, 충실한 우익인사로 알려져 있던 국군 8연대의 표무원, 강태무 두 대대장은 남로당원이라는 그들의 정체가 들통 날 위기에 처하자 49년 5월 4일, 각자의 대대를 이끌고 월북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편 의정부 주둔 7사단 공병대장 최정훈 소령은 6월 25일 오전 9시에 운현궁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주위에 알려, 공병대대 작전과장과 7사단 참모들은 24일에 모두 외출을 했습니다. 상당수 공병대대 장병들도 비상이 해제되자 상관의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외출을 나와 서울로 갔습니다.



그러나 최소령의 결혼식은 위장결혼식이었고, 인민군 남침으로 비상이 걸렸으나 최정훈 소령과 작전과장은 끝내 부대에 복귀하지 않고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이 탓에 7사단 공병대는 완전히 마비되어 동두천에서 의정부, 양문리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구간의 교량폭파, 장애물 설치 등을 전혀 하지 못 해 인민군에게 성문을 열어준 꼴이 되었습니다. 최정훈 소령과 공병대대 작전과장은 남로당 비밀당원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한 일부 연구가들에 따르면 채병덕 참모총장도 남로당의 공작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49년 무렵엔 이미 남로당 세력이 군에서 축출되었지만, 비밀리에 군 수뇌부에 남아있는 자들이 존재했습니다. 사후 조사결과 채병덕 참모총장의 부관인 라엄광은 장교 병적부에도 없는 남로당 공작원임이 밝혀져서 채병덕은 남로당과 직/간접적으로 분명히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채병덕 참모총장은 남로당의 공작을 받아 군의 방비를 스스로 허물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만, 미 군사고문단은 어째서 파티를 건의해서 전쟁직전에 국군 수뇌부를 마비시켰는지 궁금합니다. 단순히 우연히 그렇게 겹친 것이 아니겠느냐는 반박이 있을 수 있겠는데요, 정황상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몰랐으리라고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미국이 국군으로 하여금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도록 하면서까지 말도 안 되는 파티를 열게 한 이유가 뭘까요? 다음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3. 미국의 한반도 정책


가. 애치슨 선언과 태도 변화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미합중국의 태평양 지역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 일본 본토, 오끼나와 제도를 거쳐 필리핀 제도로 연결되는 라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른바 ‘애치슨 선언’이라는 것인데요, 이 라인을 벗어난 태평양 기타 지역에 있어서는 어떤 군사적 공격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전에 이미 미국은 49년 초부터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 49년 6월경에는 500여명의 비 전투 병력과 군사고문단만을 남긴 채 모두 철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반도가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완전히 제외된 셈이었습니다. 또한 트루먼은 애치슨 선언이 있기 일주일 전에 성명을 통해 한국과 대만에 군사적 불개입 정책을 천명했습니다. 또한 미 통합참모본부에서 작성한 아시아에 관한 전략계획서의 한국 부분에 대해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대도 결코 무력의 수단으로 한국을 방위하지 않는다.”라고 명시해 이를 국제사회에 공개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정작 전쟁이 터지자 하루 만에 공군을 투입해 전선에 개입했고, 이틀째 되는 27일에는 유엔안보리 이사회를 회동해 연합군 파병 결의안을 통과시킵니다. 그리고 전쟁 발발 5일 뒤인 6월 30일, 지상군 파병을 결정할 정도로 발 빠르게 6.25 전쟁에 깊이 개입함으로써 전쟁 직전까지의 대 한반도 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 버립니다. 이 같은 미국의 정책은, 북한과 공산권으로 하여금 남침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라는 후대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정책 돌변에 대한 미국의 변명은 “공산주의의 발호로부터 민주주의 국가를 수호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은 “정말 몰랐다. 예상 밖이다.” “남침 준비설은 더러 듣기는 했어도 설마, 믿을 수가 없다.” “주한 미 군사고문단장 브라운 준장으로부터도 남북 간의 급박한 사태는 보고되지 않았다.”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 브라운 준장으로부터 남북 간의 급박한 사태에 관해 어떤 보고도 받지 못했다는 변명은 6.25와 관련된 인사들이 특히 강조하는 단골메뉴입니다.



브라운 준장이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의 최고책임자였기 때문에, 그의 보고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이러한 주장은 넌센스에 불과하다는 것은 다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 당시 미국의 첩보기관들


당시에는 6.25 직전까지 상당한 조직망을 갖추고 대북 첩보활동을 하던 미국 정보기관이 여럿 있었습니다. CIA는 물론, 주일 미 극동군 총사령부 제2부장 월로비 소장(G2) 휘하의 캐논첩보기관, 역시 G2부장 휘하의 8240첩보부대, 미 공군 특수첩보대 등 최소한 3개 이상의 첩보기관이 북한, 만주, 연해주, 중공, 모스크바까지 원정해 첩보활동을 펼쳐, 워싱턴 통합참모본부와 CIA본부로 막대한 정보를 전송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맥아더 장군이 사령관으로 있는 극동군 총사령부에서는 휘하의 캐논첩보기관과 8240첩보기관으로부터 올라온 첩보를 검토하여 워싱턴에 보고했습니다. 그 정보 건수는 주한미군이 철수 완료한 다음날인 1949년 6월 30일부터 전쟁 발발 직전까지 1년 간 무려 1195건이었고, 1950년 초부터 전쟁이 일어나기 전날까지 약 6개월 동안 보고된 긴급 정보 건수만 해도 417건에 달합니다.



미국이 극동지역 CIA로부터 보고를 받지 못 했다고 우기더라도, 극동군 총사령부에서 올라온 보고를 받지 못 했다고 변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미국이 북한의 남침계획을 몰랐으리라고는 절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1950년 초 브라운 준장은 “현재의 종합적인 한반도 정세 판단으로는 한국군은 적당한 규모이며 훈련도 아시아에서는 1급 수준이다. 북한군의 훈련은 부실하며 사기는 낮다. 소련의 대규모 원조는 믿기 어렵다. 만약 남침이 일어나도 한국군은 그들을 물리칠 수 있다.” 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워싱턴에 보낸 바 있습니다.



브라운 준장은 1950년 초 북한이 남침을 할 수 있다는 한국 육본의 보고서를 받고도 묵살했습니다. 또 미 군사고문단 휘하에는 정보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한반도는 안전하다라는 보고서를 워싱턴에 보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추측하건대 그와 같은 브라운의 보고서는 전쟁 발발 후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히든카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현지의 최고 책임자 브라운 장군의 정세 보고서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변명이 가능하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은 브라운 준장을 들먹이며 6.25발발을 예측하지 못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 걸프전 참전의 예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 막상 일이 터지면 전광석화처럼 개입하는 미국의 이러한 수완은, 걸프전 때도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라크는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가 경제적 압박을 가하자 쿠웨이트 침공을 계획하고, 그 결의를 미국에 알렸습니다. 이 때 미국은 쿠웨이트와의 국경분쟁에 미국은 언급할 입장이 아니라고 대응하여, 사실상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승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태도를 돌변하여 이라크와의 대대적인 전쟁을 준비하면서 평화해결 가능성을 애초에 배제했습니다. 이라크가 중동평화회의를 개최하면 물러날 수도 있다고 제안했지만 부시 대통령이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던 것입니다.



"쿠웨이트와의 국경분쟁에 대해 미국 정부는 의견을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가 정부의 보도관에게 이 점을 강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위의 발언은 1990년 7월 미국 대사 에이프릴 글래스피가 사담 후세인 대통령에게 한말이다. 실제로 미국이 이라크를 자극함으로써 쿠웨이트 침공을 유도해놓고는 오히려 그것을 군사개입의 구실로 삼았다는 증거가 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 침공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가 자신들에게 혹독한 경제적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쿠웨이트 침공 결의를 미국에 전했을 때, 미국 정부는 후세인에게 사실상의 승인의사를 전달한 셈이다.

그러나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시작되자 부시 대통령은 대대적인 이라크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평화적인 해결가능성을 애초부터 배재해버렸다. 이라크는 (체면을 세우려는 정도의 의의밖에 없었을지라도) 중동평화회의가 개최되면 쿠웨이트에서 철수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그 제안을 그 자리에서 거부했다.



라. 중공에 협력한 미국



(1) 대만의 본토 상륙을 저지



전쟁 발발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대만의 장 제스 총통은 본토를 찾을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본토로의 진격 의도를 내비쳤으나 트루먼 대통령은 단호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또한 미국 제 7함대를 대만과 중공 사이의 해상에 배치, 대만군의 본토 진출을 물리적으로 차단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습니다.



“미국이 자유중국으로 하여금 중립을 지키게 한다면서 제 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함으로써 중공의 한국전 참전이 가능해졌다. 이것은 장 제스 50만 군을 막아줌으로써 중공을 보호한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중공은 본토 중심부를 지켜야 하는 2개 군을 안심하고 동북부 압록강 북쪽으로 뺄 수 있었다.”


(2) 중공군을 끌어들인 워싱턴



국군과 연합군이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갔을 때, 1950년 10월 중공군은 참전을 선언하고 압록강 도강을 실시했습니다. 이 때 압록강과 두만강의 다리들을 폭파하면 중공군의 도강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으나, 미 통합참모본부는 어떤 이유에선지 폭격금지명령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 도강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맥아더 장군은 명령을 어기고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등 여섯 곳의 교량을 즉시 공중폭격으로 파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맥아더는 집결한 중공군의 참전을 대비하여 본국에 병력과 군장비, 보급품 지원을 요청했지만 묵살되었기 때문에 중공군이 내려온다면 맞서 싸울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맥아더의 폭격 명령은 워싱턴으로부터 날아온 전보로 즉시 철회되고 말았습니다. 마샬 국방장관은 ‘한/만 국경에서 북한 쪽으로 2킬로미터 범위에 있는 모든 목표에 대한 폭격의 금지’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한편 미 극동군 총사령부에는 중공군 제4야전군 지휘하의 제38, 제39 및 제40군단이 교량을 건너 계속 신의주로 들어오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맥아더는 강력한 항의전문을 워싱턴에 보내 교량 폭파를 금지하려면 중공군 대병력에 대응할 수 있는 병력, 무기, 장비 등을 긴급지원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워싱턴에서는 제한적 폭격을 승인했는데, 그 조건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 압록강 교량을 절반으로 나누어 그 이북만을 폭격할 것.

? 압록강 이북 영공을 침범하지 말 것.



폭격기가 출격하자 중공군들은 완충지역 일대에 고사포를 늘어놓고 집중포격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폭격제한 때문에 고사포에 대해 반격을 할 수 없었고, 적 미그기가 출격하여 폭격을 방해했지만 추격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서너 차례의 출격에도 불구하고 교량 폭격은 실패하고 맙니다.

또한 통합작전본부는 다음과 같은 명령도 하달했습니다.



? 만주 방향으로 도주하는 북한군에 대하여 모든 폭격이나 기총소사를 금지할 것.

? 나진을 폭격하지 말 것.

? 압록강의 수풍 수력발전소를 폭격하지 말 것.




나진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북한으로 투입되는 물자를 집적하는 보급기지로서, 중요한 공격 대상이었고, 수풍 수력발전소는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는 곳으로서 폭격 시 중공군과 인민군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전략적 목표였습니다.



미 극동공군 사령관 스트레이트 메이어 사령관은 후일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폭격기 전투기 정찰기 등이 충분해서 압록강 북쪽의 적 보급시설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었으며, 압록광과 목단강 사이에 주둔해 있는 적 주력을 완전히 괴멸시킬 수도 있었다. 또한 중공의 철도시설을 파괴하여 보급을 차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많은 미국 청년들의 피가 한국에 뿌려졌다.”



또한 당시 중공군 제4군 사령관 임표는 후일 중공 내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단을 배포했다고 합니다.



“맥아더가 나의 보급기지 및 통신시설과 압록강 교량 등에 대해 공격하는 것을 워싱턴 당국이 금지한다는 보증이 없었던들, 나는 공격을 개시하여 부하들이나 나의 군인으로서의 평가를 위험에 내맡기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작전 계획이 적군에게 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록에 적고 있는데요, 그 가능성을 짚어보겠습니다.



마. 공유하는 작전 정보?



당시 미군은, 군부에서 작전 보고서를 올리면 정부 고위 관료를 통해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대통령의 승인이 떨어지면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UN과의 협약조문 때문에 대통령을 거치고 난 정보를 UN의 ‘정책 및 안전관리국장’에게 보내야 했고, 그는 이것을 UN총장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UN의 정책 및 안전관리국장이 누구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1945년에 미국의 스테티니우스 국무장관은 UN이 세계 경찰 활동을 하는 것에 동의하면서 정책 및 안전관리국장이라는 요직에 동유럽 공산국가 출신을 보직하자는 조건에 합의한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 당시 정책 및 안전관리국장은 콘스탄틴 진첸코라는 소련인이었습니다.



또한 소련의 바실리예프 장군은 북한의 군사고문관이자 작전 책임자였는데, 그는 UN에서 정책 및 안전관리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UN군사위원회’의 의장직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안전보장이사회 밑에서 전세계의 군 활동에 대한 정보를 책임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소련인은 UN에서 연합군 쪽의 일에 관여하는 동시에 북한의 편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들을 통해서 연합군의 작전 기밀이 소련과 중공, 북한으로 유출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 가능성만은 충분하다고 생각되어 언급했습니다.



바. 적에게 무기를 팔다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미 극동군 총사령부 G2에는 또다른 첩보가 입수되었습니다. 마카오와 홍콩을 통하는 루트를 거쳐, 연합군과 중공군이 전쟁물자 거래를 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입니다. 1950년 초순 캐나다, 일본, 서독, 미국 등 자유진영은 중공과 공공연하게 여러 물자를 거래했으며, 홍콩은 중공의 중요한 전략물자 보급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홍콩은 1950년 현재 총 거래액이 전년도 대비 50%이상 증가했으며, 4/4분기 중 각종 자동차 차량 및 운송시설, 의약품, 세철과 강철, 비철금속 및 그 제품, 전기기계 기타 기계류 등을 광범위하게 구입해 들였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 측은 전쟁을 하면서도 전쟁 당사자인 적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모택동의 중공군은 미국의 장비와 무기로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련으로부터 제공받은 것이었습니다. 또한 소련은 그 무기를 2차대전 말기, 연합군에 참전했을 때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미국은 조기에 종결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잉여 군수물자들을 6.25전쟁을 이용해 확실히 처분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4. 전쟁의 종결



1953년 7월 27일, 1년 6개월여를 끌어오던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전쟁의 양상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북의 남침이 있었고, 남쪽으로 내려오며 남한 전국토가초토화됩니다. 유엔군이 참전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북진을 시작해서 압록강까지 진격합니다. 이 과정에서 마찬가지로 북한 전 지역이 초토화됩니다. 그 시점에서 다시 중공군이 개입, 연합군은 다시 밀려 내려와 38선에서 전선이 고착됩니다. 그리하여 전쟁 전과 똑같은 38선에서 국경이 정해졌고, 전과 마찬가지로 북은 소련과 중국에, 남한은 미국에 예속되게 됩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우리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국군 전사자 227748명, 실종 43572명, 부상 717083명, 총 99834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민간인은 양민학살 128936명, 사망 244663명, 납치 84532명, 행방불명 303212명, 강제의용군 400000명으로 총 1161343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북한도 피해정도는 이와 비슷했으며, 사망한 인민군과 중공군을 합치면 142000명으로 집계되었으며, 남과 북에 1000만의 이산가족이 발생했습니다.



남한의 물질적 피해는 당시 국민총생산 2년분의 30억 달러, 공업시설 43%, 발전력의 41%, 탄광의 50%가 파괴되고, 공공건물, 학교, 병원 등의 시설은 물론 개인주택과 상가건물까지 전부 파괴되었습니다.



미국은 37개월 동안의 전쟁에서 33629명의 전사자와 103284명의 부상자에 9명의 실종자를 냄으로써 총 136922명의 인명손실을 냈습니다. 또 UN 15개 회원국은 총 15200명의 인명손실을 냈습니다.



미국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숭고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자국 청년들의 뜨거운 피를 흘리고 막대한 전비를 소진해가면서 극동의 조그마한 소국인 남한을 사지에서 건져주었다는 것이 지금 우리들, 후대 제도권의 평가입니다.





5. 문제 제기



그러나 저는 이상과 같은 조사를 통해서, 그와 같은 순진한 발상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싶습니다. 6.25전쟁은 열강들의 이익을 위해 사전에 계획된 전쟁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조사한 내용만으론 모든 것을 입증할 수 없고,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만은 제시할 수 있다고 봅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의 예상치 못한 조기 종전으로 인한 잉여 전쟁물자 때문에 경제공황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군수산업이 아사지경에 이르러 트루먼 행정부를 압박하던 때, 국공내전이 벌어졌습니다. 미국은 국부군에 군수물자를 제공함으로써 경제 공황의 타개책으로 삼았고, 뒤이어 6.25전쟁으로 불황을 극복했습니다.



휴전협정 체결 이후 미국은 한미방위협정을 빌미로 하여 우리의 숨통을 조였습니다. 우리의 국군 전력 강화 의지는 반세기 이상이나 미국에 의해 억제되어 왔습니다. 단적인 예로 장거리 미사일 사거리 제한 협정을 들 수 있겠습니다. 한국은 미국에 의해 언제나 북한보다 열세병력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게 되었고, 이를 견제한답시고 미국은 반세기 이상이나 남한에 미군을 주둔시켜 왔습니다.



미국은 1995년에야 평화시 훈련작전권을 한국에 이양했습니다. 전시에는 주한미군사령관이 국군통수권을 행사하게 되니 우리나라가 과연 자주국가라 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하면서 가장 회의를 느꼈던 점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나라를 지키러 군대에 갔지만 전쟁이 나면 우리민족의 이익보다는 미국의 이익을 우선시 할 미 군부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점에 저는 분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6.25 전쟁을 통해 우리나라는 막심한 피해를 입은 반면에, 다른 나라들은 나름대로 이익을 건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중공은 기아로 인해 민중봉기 위험이 있었지만 전쟁을 통해 국민을 단결하여 위기를 넘겼고, 일본은 군수기지로써 막대한 수입을 올려 전후 복구를 하고 경제발전의 터전을 닦았습니다. 미국은 잉여 군수품을 해결하고 군수산업을 부흥시켜 경제난을 타파했습니다. 또한 주한미군을 주둔시키며 남한의 전후 복구는 미국이 도맡아 하게 되었으며, 이것 역시 미국 경제에 이익이 되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현재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전후복구 사업에 열을 올리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남한은 미국에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지금은 미국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형님 아우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 기정사실입니다. 지금도 미국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 불량국가로 낙인찍어 강경책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과 북의 평화적인 통일을 원하지만, 미국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요원한 일입니다.



전쟁이 있는 곳에 미국의 이익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미국은 전쟁을 만들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는 나라입니다. 미국은 막대한 예산이 투자될 MD 계획을 이미 실행하고 있고, MD계획이 명분을 가지려면 미국을 위협하는 불량국가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은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에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미국은 국회에서 MD 예산안을 가결할 때마다 온갖 미디어를 동원하여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과장해서 보도해 왔습니다. 때문에 미국은 북한과 화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남과 북의 군사적 대치가 유지되어야 남한에 무기를 팔고 경제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지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미국이 한반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 제2의 6.25전쟁이 발발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들은 우선, 과거에 겪었던 전쟁을 철저히 분석하고 원인과 결과를 따져 현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상, 여기까지가 제가 준비한 6.25전쟁과 민족분단의 고착에 대한 조사입니다.



? 6.25전쟁 개략사



1950년 6월 25일 남침

6월 28일 서울 점령(3일 체류)

6월 27일 미5공군과 20공군 전선 투입

6월 27일 소련 불참 유엔안보리이사회에서 유엔군 결의 통과

7월 14일 이승만, 국군 작전지휘권 미군에 이양(미군은 유엔군과 국군까지 지휘권 장악)

7월 하순 인민군 경상남북도 제외한 남한 전지역 점령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감행 전세회복

9월 28일 서울 수복

9월 30일 중국정부 수립 기념식, 외교부장 주은래, 참전의사 살짝 피력

10월 8일 중공군 참전, 전세가 역전되다. 오산까지 철수

1951년 3월 18일 서울 재차 수복, 38선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 이어져.

4월 11일 맥아더 유엔총사령관직에서 해임

7월 개성에서 미 중 북 참가하여 휴전회담. 이로부터 포로 교환문제로 1년 6개월 이상
회담이어져.

1952년 6월미국, 압록강 수풍댐 및 10여개 발전소 폭격.

7월 11/12일 평양 폭격, 양일간 7천 명 사망.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1954년 4월평화해결을 위한 제네바 회의 결렬



? 참고문헌


1. 강좌 한국근현대사.

역사학연구소 지음. 1995년 3월 14일.

1. 38선도 6.25한국전쟁도 미국의 작품이었다!

하리마오 지음. 새로운 사람들. 1998년 6월 25일.

2. 제 2차 한국전쟁, 끝나지 않은 전쟁 6.25를 말한다.

이선교 지음. 도서출판 봄. 2003년 6월 25일.

3. 석유 때문에 벌어진 전쟁, 석유 때문에 막을 수 있는 전쟁.

박종욱 지음. 도서출판 드림21. 2003년 5월 6일.

4. 그림자 정부 정치편.

이리유카바 최 지음. 해냄. 1998년 8월 25일.


일본에게 한국전쟁
요시다 시게루 일본 수상 "한국 전쟁은 신이 내린 선물"
전쟁 중 미군의 모든 물자를 일본에서 조달.
역사상 최대의 호황
미국과 카르텔에게 한국전쟁
지구촌의 초강대국으로 만들어준 전쟁
불황에 허덕이던 미국을 호황국면으로 이끌어줌
자작극에 중독된 개때들로 만들어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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