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동 패권 속셈 후세인 제거 2002년 1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이라크를 이란 및 북한과 함께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미국의 중동지역 패권 장악을 위한 아프간 다음의 목표는 제2의 산유국 이라크였다. 자신들의 전략적 의도에 의해 정권을 잡은 후세인이 원유대금으로 일절 달러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이미 후세인 정권의 운명은 미국의 중동 패권 계획 속에서 제거되고 있었다. 미국은 이라크 공격의 정당성을 위하여 빈 라덴과 이라크와의 연계를 찾아내고자 했으나 명쾌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이라크가 ‘알 카에다’를 배후에서 지원하고 있으며, 후세인 정권이 불법적으로 WMD(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테러를 지원,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또한 지난 30년간의 철권통치로 국민들을 억압하고 있는 후세인 정권을 축출해야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라크를 침공하였다. 2003년 3월 20일, 30만 명의 병력과 최첨단 유도미사일과 살상폭탄으로 무장한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하였다. 작전명 '이라크의 자유(Freedom of Iraq)' 미국의 이라크 침공 명분은 모두 ‘거짓’ 2003년 3월20일 미국은 개전과 동시에 3000여발의 각종 정밀 유도미사일과 신형 폭탄으로 이라크군 지휘부와 주요 기지를 집중 타격하였다. 4월 9일에 이라크 수도인 바그다드가 함락되고, 12월 13일 24년간 집권해 오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체포됨으로써 이라크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한지 4년이 지나도록 이라크가 ‘알 카에다’의 배후라는 어떤 증거도 내놓지 못했으며, 다량 보유하고 있다던 대량살상무기는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이라크 주민을 사담 후세인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호언 했지만 종전 이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위해 내세운 모든 명분이 거짓으로 드러나면서 비판 여론이 거세어지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이라크가 미국의 무장해제 요구에 순순히 응해 미국의 공격에 맞설 수 있는 자체의 무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의 공격을 받은 것이라는 가설들이 오히려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라크 전쟁 뒤에 감춰진 역사는 전 세계 전쟁을 사주하는 미국의 추악한 세계지배전략을 명료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미국의 이익 대변할 보수정권 수립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체제의 강화를 위해 값싼 원유의 확보가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면서 미국은 중동에서 안정적인 석유자원을 공급해 줄 정치 세력이 필요했다. 서구 제국주의와 아랍 민중간의 이해가 날카롭게 충돌하게 되자 미국은 중동지배 전략을 간접지배방식으로 전환하고, 이 지역에 다국적 석유기업과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보수적인 정권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이라크 왕정 역시 이런 서구 다국적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민중의 반발에 부딪혀 1958년 압둘 카림 케심 대령이 이끄는 ‘자유장교’의 군사 쿠데타로 붕괴된다. 군사쿠데타 당시 이라크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집단은 이라크 공산당이었다. 이 시기 이란, 이라크를 비롯해 이집트 등에서는 개혁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는데 1차적인 시도는 대부분 석유산업의 국유화로부터 시작되었다. 군사쿠데타 이후 이라크의 여러 정치 세력들은 상이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나간다. 결과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은 바트당이었다. 바트당은 1963년 짧은 집권 이후 잠시 실각하기도 했으나 우익 군부와 연대하여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이라크의 지배 세력으로 성장한다. ‘유물론적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아랍주의’라는 모토를 내걸었던 바트당은 아랍민족주의를 주장하며 이라크에서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바트당은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했으나 1973년 쿠르드족 진압을 위해 일시적으로 공산당과 연립정부를 수립한 기간을 제외한다면 집권 기간 동안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일이 공산당 탄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세인, 미국의 배후 선동으로 이란 공격 56년 바트당에 입당한 후세인은 68년 쿠데타에서 핵심역할을 한 뒤 마침내 79년 이라크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다. 같은 해 이란에서는 이슬람교의 시아파 종교지도자 호메이니에 의해 팔레비왕조가 붕괴되고 새로운 이슬람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꿈꾸던 후세인은 80년 9월 이란과의 전쟁에 돌입한다. 이란·이라크 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걸프만과 연결되어 있어 경제적, 군사적으로 양국의 중요한 국경지역인 샤트 알-아랍(Shatt al-Arab)수로에 관한 영유권 문제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동안 친미적 성향의 팔레비왕조를 통하여 중동에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던 미국이 호메이니의 등장으로 인해 중동 거점이 사라지자 이란과의 관계를 끊고 경제적 봉쇄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이라크로 하여금 이란을 공격하도록 배후 선동을 한 결과이다. 1980년 1월 이란 혁명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후에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카터 독트린’으로 알려진 선언문을 발표했다. “페르시아만을 통제하려는 모든 외부 개입은 미합중국의 이해관계에 대한 중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며, 우리는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그런 공격에 맞설 것이다.” 빈라덴도 미국이 키운 게릴라 출신 이러한 강조에 발맞추어 서아시아를 담당하는 미군 중부사령부가 창설됐다. 미군 중부사령부는 이 당시 아프카니스탄의 소련 점령군에 맞서는 이슬람주의 게릴라들에게 자금을 주고 그들을 훈련시키고 무장시켰는데 9·11테러의 범인으로 지목한 오사마 빈라덴이 바로 이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전사)출신이다. 미국의 카터 정부와 뒤이은 레이건 정부는 막대한 원조를 약속하고 이라크의 후세인으로 하여금 이란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하게 하였다. 이란-이라크전은 미국의 대리전 미국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중동의 군사대국이 된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에서 쉽게 승리 할 것이라 장담했다. 그러나 이라크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서, 별다른 성과 없이 휴전협정을 맺기까지 무려 8년 동안이나 전쟁이 지속되었다. 시리아·리비아 등의 전통 우방을 등에 업은 이란과 사우디·쿠웨이트·이라크(미국을 대표로 한 서방측)와의 싸움은, 1988년 이라크의 승리로 끝이 났다. 당시 미국은 물류와 기술뿐 아니라 이란군의 이동정보와 무기까지 이라크에 제공했다. 미국 기업들은 정부의 묵인 하에 탄저균 등 다양한 생화학 무기의 원료를 팔았다. 83년 11월 미 국가안보회의(NSC)는 이란의 승리를 막기 위해 ‘합법적이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놓기도 했다. 이란- 이라크전이야말로 전형적인 미국의 대리전이었다. 후세인 석유 포기 않자 미국 돌변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자신들이 원조한 결과로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된 이라크가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지배에 위협적인 요소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제 미국은 이라크를 무장 해제시키기 위해서 무언가 조처를 취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명분이 필요했으며, 그 명분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함으로써 주어졌다. 1989년 6월 사담 후세인은 투자 자문회사 ‘키신저 협회’와 트러스트 뱅크·모빌 오일을 비롯해서 미국 다국적 기업과 은행의 중역 등 미국 경제 사절단을 바그다드에 초청했다. 후세인 정부는 미국 사절단에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8년 전쟁에서 이라크를 측면 지원하던 미국 정부가 전후 복구 사업에도 관심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사절단은 투자에 앞서 조건을 내세웠다. 이라크 정부가 대외 채무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절단은 후세인 정부가 채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국영 석유산업 민영화’를 제시했다. 그러나 후세인으로서는 국가 주권의 상징이자 정권의 돈줄이기도 한 석유산업을 포기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투자 협상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미국 정부는 후세인에게 약속했던 23억 달러 차관을 동결했다. 미국과 영국 언론에는 이때부터 이라크의 재무장을 경계하라는 보도가 줄을 잇기 시작했다. 8년 전쟁에서 줄곧 이라크를 지원하던 서방이 전후 복구에 등을 돌리는 통에 후세인은 ‘어느 날 갑자기’ 국제 금융계에서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었다. 둘도 없는 우군이었던 쿠웨이트 변심 궁지에 몰린 후세인에게 또 다른 복병이 나타났다. 쿠웨이트 왕족이다. 석유 왕국 쿠웨이트는 이라크가 이란과 전쟁을 벌일 당시 둘도 없는 우군이었다. 이라크가 8년 동안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쿠웨이트에서 흘러 들어간 전쟁 자금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쿠웨이트 왕족이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원유값 폭락을 막기 위해 마련된 수출량 제한 원칙을 깼다. 그 결과 1990년 7월에는 원유값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들이 쿠웨이트의 반칙에 반발했지만 쿠웨이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변심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몰렸다. 원유 수출 가격이 곤두박칠치면서, 빚을 갚을 수 있기는커녕 식량 수입마저 어렵게 된 것이다. 격앙된 후세인은 쿠웨이트가 국경 부근의 이라크 유전을 도둑질하고 있으며 부당하게 빚 독촉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쿠웨이트는 왜 석유수출국기구 합의를 깨고 남의 나라 자원을 도굴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으면서까지 석유수출국기구와 후세인의 거듭된 협상제안을 거부했을까. ‘쿠웨이트 침공’덫에 걸린 이라크 결국 참다못한 후세인은 8월 2일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은 이라크가 미국이 주도한 ‘사막의 폭풍’ 작전에 의해 보복을 당하고 오늘날까지 국제 무대에서 고립당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미국이 이라크·쿠웨이트 분쟁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무력 충돌설이 떠돌던 7월27일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 글라스피는 후세인과의 면담에서 쿠웨이트 분쟁은 미국의 국익에 무관하며 따라서 미국은 앞으로도 입장을 밝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라크의 군사 작전에 미국은 개의치 않는다는 뜻이 담긴 이 날의 면담 기록을 후세인은 쿠웨이트 침공 후에 공개했다. 부시(현 조지 W.부시 대통령의 아버지)는 이 문서가 날조된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그 내용은 1년 후 미국 의회에서도 사실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막상 이라크가 쿠웨이트로 진군해가자마자 부시는 대규모 전쟁을 선언했고 어떠한 협상의 가능성도 모두 닫아버렸다. 후세인은 중동평화회담이 소집된다면 쿠웨이트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키겠다고 제안했으나 미국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부시는 이 갈등이 협상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음을 분명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 볼 때 협상을 통한 해결책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필요한 것은 협상이 아니라 신속하고 결정적인 타격과 승리였다. 1979년 이라크 최고지도자가 된 사담 후세인은 중동의 패권을 노리다가 결국 2006년 12월 3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그의 몰락은 물론 영광의 배후에도 항상 미국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 역시 제국주의 미국의 희생양인지도 모른다. 후세인, 믿었던 미국에 ‘발등’ 후세인이 미국의 불간섭 방침을 믿고 쿠웨이트를 기습 침공한 이후 놀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쿠웨이트 왕족이 이미 나라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점이었다. 쿠웨이트 왕족을 인질로 삼는다는 계획은 이렇게 해서 물거품이 되었다. 영국 은행과 미국 정부는 후세인이 기습 작전을 벌인 바로 그 날, 모두 천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쿠웨이트의 해외 자산을 압류했다. 후세인의 기습 작전에 못지않은 또 다른 기습 작전이 벌어진 것이다. 또한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 군인들이 인큐베이터에 들어 있는 영아들을 집단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폭로함으로써 미국에서 전쟁 지지 여론에 불을 지른 소녀가, 실은 쿠웨이트 대사의 딸이며 이 인터뷰도 날조극이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걸프전 일으켜 이라크 초토화 결국 이라크 침략으로부터 쿠웨이트를 해방시킨다는 명분하에 미국은 1991년 1월 17일부터 ‘사막의 폭풍 작전’이라 일컫는 걸프전을 개시한다. 6주간 지속된 이 작전은 1천여 시간의 공중폭격과 그 뒤 지상작전 4일 만에 이라크의 항복을 받아냈다. 당시 미국은 열화우라늄탄까지 사용했는데, 이 방사능탄은 현재 이라크인과 미군들 모두에서 나타나고 있는 암과 기형아 출산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공할만한 폭격 뒤 부시가 지상군을 투입했을 때, 이라크는 이미 쿠웨이트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키고 있었다. 결국 미군 지상군이 투입된 것은 이라크군을 쿠웨이트로부터 물리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라크로 돌아가는 길목은 봉쇄됐으며,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던 수 만 명의 이라크군은 미군에 의해 체계적으로 학살됐다. 다른 곳에서는 이라크 수비 병력을 깨부순다는 작전 아래, 미군의 탱크와 불도저가 참호에 들어 있던 수천의 이라크군을 산채로 매장했다. 이렇게 미군에 의한 의도적 학살로 희생된 이라크인은 모두 15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라크인들의 비극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됐다. 미국은 이라크의 전력과 상하수도 체계를 철저히 파괴했으며, 이로 인해 수인성 전염병이 창궐하여 전쟁 때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미국은 이라크에 대해 10년 넘도록 유사 이래 최악의 경제 재제를 가해, 가뜩이나 피폐해진 이라크 경제를 더욱 목 졸랐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이라크 국민들에게 돌아갔다. 걸프전 후 미국 중동지역 패권 확고 반면 미국의 대외 무기 판매는 1989년의 80억달러에서 1991년 4백억 달러로 불과 2년 만에 다섯 배나 증가했다. 걸프전쟁은 미국이 중동 지역에서 그들의 패권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또한 걸프전의 발발로 중동 지역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이라는 대결구도에서 시아-수니의 아랍인간의 새로운 형태의 갈등을 빚게 되었다. 중동 지역에서 발생했던 영토, 종교, 이념적 갈등, 석유자원 배분 문제 등의 원인은 세계 전체의 질서를 재편하려는 미국을 포함한 강대국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라크전쟁의 진짜 이유 ‘석유’ 브렌단 넬슨 호주 국방장관은 <2007년 호주 국방백서>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 한 기자의 질문을 받고 “호주가 이라크전쟁에 동참한 이유는 중동지역의 석유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넬슨 장관은 “이라크를 포함한 걸프지역은 세계 에너지의 주요 공급원”이라면서 “호주는 석유공급처의 안정적인 확보가 전략적으로 불가피”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또한 미국의 경제 대통령으로 불렸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전 의장 그린스펀의 회고록 <격동의 시대 회고 : 신세계의 모험(The Age of Turbulence : Adventures in a New World)>에 “이라크전쟁의 주된 원인이 석유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정치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현실이 서글펐다”고 전해 전 세계에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한 “석유시장의 현존 시스템을 계속 작동시키는 목적 달성에 후세인 제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그리스펀은 덧붙였다. 그 현존 시스템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국제 원유값은 현재 배럴당 80달러를 넘어섰다. 그러나 이러한 고유가에도 불구하고 산유국들은 3년간 30%나 떨어진 미국 달러 가치하락으로 실질적 이득은 없다고 한다. 이유는 석유는 달러로만 구입이 가능한 석유-달러본위제 때문인데 이는 과거 사우디의 국왕 알 사우드가 미국의 전함 퀸시 호에서 루즈벨트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시작된 소위 ‘워싱턴-리야드 밀약’의 산물이다. 2003년 유가는 달러기준 150% 오르고 유로화 기준으로는 78% 올랐다. 석유대금은 싼 달러로 받고 상품수입대금은 비싼 유로화로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앉아서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란, 말레이시아, 러시아 등은 원유를 유로화 결제로 수출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잇따른 선언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2000년 9월24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원유대금으로 달러는 일절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이라크 원유판매를 관장하던 유엔이 후세인의 의견을 들어줬다. 이렇듯 미국 근간을 흔들 석유-달러 본위제가 위기에 처하자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감행했다는데 강한 설득력이 부여되고 있다. 이라크 민중의 저항이 계속될수록 세계 2위의 석유매장국인 이라크에 친미정권을 세움으로써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정치경제적 위상을 확실히 하겠다는 미국의 검은 속셈이 선명하게 전 세계에 드러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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