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영화 단체관람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영화는 퇴계로의 '대한극장'에서 상영됐는데, 할머니 댁을 오가는 길목에 있는 그 극장의 벽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영화 간판이 아직도 기억난다. 극장 앞을 가득 메운 사람들과 '반공영화' 어쩌고 하는 요란한 선전문구도. 군사독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어린 학생들의 머리통에 반공 이데올로기를 주사 놓겠다는 그 유치하고도 무모한 발상이라니…지금 생각하면 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뉴욕타임스> 특파원 시드니 쉔버그(Sydney Schanberg)가 캄보디아에 가서 취재하다가 자신을 돕던 캄보디아인 동료 디스 프란(Dith Pran)과 극적으로 헤어진 뒤, 고국으로 돌아가 그 동료의 가족들을 돌보면서 자신을 도왔던 그 캄보디아인 동료를 찾는 내용이다. 이 영화가 반공 이데올로기의 선전물일 수 있었던 것은 크메르루주(Khmer Rouge)라 불린 공산주의 세력의 잔혹한 학살 만행 때문이다. '킬링필드'가 반공영화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이유
1975년에서 1979년에 이르는 크메르루주 치하에 사망자 수는 대략 80만에서 100만 명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들판과 하천을 가득 메운 뼈 무덤을 보여주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면 공산주의 학살자들의 만행에 주먹을 불끈 쥐고 치를 떨 법도 하다. 그 생지옥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자유의 품'에 안긴 캄보디아인 디스 프란이 미국인 시드니 쉔버그와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관객들은 급기야 동서양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우정에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킬링필드'라 불리는 캄보디아 학살은 그 시기를 둘로 나누어야 한다. 이 영화가 묘사하는 시기는 저 악명 높은 폴포트(Pol Pot)가 이끈 크메르루주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실권을 장악한 론놀(Lon Nol)의 꼭두각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집권했던 1975년부터 1979년까지에 해당한다. 크메르루주가 이 시기에 10만 명에 이르는 지식인과 시민들을 처형하고, 이후 70만에서 80만에 이르는 캄보디아인들이 사망한 것은 모두 입증된 사실이다. 이 영화는 통상 '2기 킬링필드'에 해당하는 바로 이 시기만을 제한적으로 다루고 있다. 1969년 3월 18일, 미국 대통령 닉슨의 승인을 받은 미 공군 B-52 폭격기가 최초로 캄보디아에 폭격을 시작했다. 1973년 8월 15일까지, B-52 폭격기가 캄보디아에 쏟아 부은 포탄의 양은 무려 54만 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했던 16만 톤의 세 배가 넘고, 한국전쟁 기간에 미군이 사용한 49만 5천 톤마저 능가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제네바협약을 위반한 불법 폭격이었다. 죄 없는 수십만 민간인들이 숨지고, 그보다 더 많은 숫자가 평생 불구가 됐다. 1973년 6월 19일 캄보디아 폭격 명령을 거부한 죄로 법정에 선 B-52 부조종사 도널드 도슨 대위는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지만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공격 목표물로 삼았다"고 증언했다. 1969년에서 1973년에 이르는 바로 이 시기가 잘 알려지지 않은 '1기 킬링필드'에 해당한다. 미군 폭격에 의해 희생된 캄보디아인들에 대해 주류 언론 일제히 침묵 따라서 '2기 킬링필드' 이전의 캄보디아가 '평온한 땅'이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미 '1기 킬링필드' 시기에 캄보디아인들은 억압과 착취, 학살과 고문을 충분히 경험하고 있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나라가 미국의 손에 넘어간 후, 미국 꼭두각시 정권의 총수인 론놀의 정부군은 농촌마을에서 무자비한 학살극을 벌였다. "그들은 어린아이의 다리를 잡아 찢는 것으로 담력 시험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 지역에서 살아남아 크메르루주의 병사가 된 사람들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행동이었다."
그러니 "폴포트주의는 모두가 거기서 잉태된 것이었다." 미국이 없었다면 킬링필드도 없었다. '킬링필드' 신화는 모든 것을 크메르루주에 뒤집어씌우려는 "미국식 음모"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후에 만든 영화 <미션>과 함께 롤랑 조페 감독은 저 역겨운 서양인들의 '더럽고 추잡한 양심'을 자랑스럽게 떠벌린다. 무자비한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을 희생시켜 놓고도 미국은 그동안의 관례대로 '부수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시드니 쉔버그가 쓴 캄보디아에 관한 칼럼 45건 가운데 미군 폭격의 희생자들에게 단 몇 마디라도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할 기회를 준 것은 단 3건 뿐이었다. 미국과 국제사회, 그리고 주류언론은 침묵했다. 뛰어난 국제분쟁 전문기자 정문태는 '킬링필드'에 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하고 있다. "현대사에 최고·최대 거짓말인 이 미국식 킬링필드의 전설을 끊어버리는 일이야말로, 세계시민사회가 더 이상 미국으로부터 '개죽음' 당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선언이고 엄숙한 경고다." ----------------------------------------------------------------------------------- ‘킬링필드’ 책임자가 크메르루주뿐인가 ▣ 국제분쟁 전문기자·정치학 박사 kimsphoto@hanmail.net
캄보디아 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킬링필드>(Killing Field)다. 1975년 크메르루주 세력이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자, 미국 <뉴욕타임스> 특파원의 통역을 하던 주인공이 겪는 고난에 초점을 맞추었다. 논란거리가 있지만, 캄보디아의 비극을 전세계로 알리는 데 이 영화가 한몫했다. 캄보디아 현대사가 지닌 색깔은 죽음의 잿빛이다. 20년 내전과 베트남 전쟁의 불똥으로 숱한 생목숨이 희생됐다. 희생자 규모는 지금도 논란거리지만, 최대치는 150만 명에서 200만 명까지 올라간다.
아침,점심,스낵… ‘메뉴’대로 퍼붓다
사건은 30년 전에 벌어졌지만, 킬핑필드 관련자에 대한 공식 기소 절차는 4월 들어서야 시작됐다. 향후 재판이 열릴 장소는 캄보디아와 유엔이 2006년 7월 공동으로 설립한 캄보디아 국제전범재판소 법정. 그곳에 서게 될 피고들은 이제는 다들 노인이 된 크메르루주 정권 지도자들이다. 이 가운데 실제로 몇 명이나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게 될지는 불투명하다. (크메르루주 최고지도자 폴 포트는 1998년 캄보디아 북부 정글에서 73살로 눈을 감았다.)
여기서 따져볼 문제 두 가지. 첫째, 캄보디아에서 저질러진 학살범죄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폴 포트를 비롯한 크메르루주 지도자들뿐인가. 둘째, 캄보디아 학살이 1970년대 후반 크메르루주 집권 시절에만 벌어졌는가. 캄보디아 국제전범재판소는 크메르루주 집권 시절인 1970년대 후반에만 국한했다. 그렇다면 캄보디아 학살에 관련된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과 그의 국가안보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에게 사면장을 쥐어주는 셈이다.
1970년대 후반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 군의 공포정치가 있기 앞서 캄보디아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1968년 초 미국의 베트남전 군사 개입이 한창일 때 미군 병력은 55만 명에 이르렀다. “베트남전을 끝내겠다”는 공약 아래 1969년 1월 미 대통령이 된 닉슨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키신저는 오히려 전선을 캄보디아로 넓혀나갔다. 두 사람은 캄보디아 동부 베트남 접경지대의 ‘호찌민 루트’를 따라 움직이는 적대세력(북베트남군과 베트남인민해방전선, 즉 베트콩)을 겨냥한 대규모 공습을 결정했다. 그에 따라 B-52기들이 캄보디아로 출격했다. 공습은 ‘메뉴’(Menu)라는 은어로 일컬어졌고, 공습작전 이름도 식사 시간과 관련됐다. 아침작전, 점심작전, 스낵작전, 저녁작전 그리고 후식작전 등이다.
미군의 북베트남 공습은 1973년 1월 파리 평화회담으로 그쳤다. 그러나 캄보디아 공습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공습은 미 의회나 언론, 국민들에겐 비밀이었다. 닉슨 대통령의 사임(1974년 8월)을 몰고 온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져서야 비로소 캄보디아 공습 사실이 알려졌고, 그제야 공습도 멈췄다. 1973년 공습 마지막 6개월 동안에 집중적으로 25만t의 공습이 행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일본에 떨어뜨린 폭탄(16만t)보다 9만t이 많았다. 캄보디아 공습은 키신저의 바람과 달리 공산세력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지 못했다.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당시 캄보디아를 취재했던 영국 저널리스트 윌리엄 쇼크로스는 “크메르루주 세력이 불어난 것은 미국의 군사 개입이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공습으로 가족과 생활 터전을 잃은 캄보디아 농민들은 미국의 지지를 받았던 론 놀 장군의 친미 군사정권에 적개심을 품게 됐다. 그들은 반군세력인 크메르루주를 위해 기꺼이 총을 들고 나섰다.
키신저는 왜 사과하지 않나
당시 캄보디아 주재 미 대사 에모리 스원크는 미군 공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1973년 캄보디아 주재 미 대사직을 그만두면서 미국의 캄보디아 공습을 가리켜 ‘인도차이나의 가장 헛된 전쟁’이라 불렀다. 그 무렵 캄보디아를 방문했던 미 하원의원 페티 매클로스키는 “미국은 베트남 전쟁 때문에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 미국이 저지른 악(evil)보다 더 큰 악을 캄보디아에서 저질렀다”(1975년 2월 미 상원 외무위원회에서의 증언)고 말했다.
캄보디아 농민들은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다가 폭격으로 죽고, 밤에는 집에서 자다 네이팜탄에 불타 죽었다. 5만∼15만 명의 농민들이 목숨을 잃고, 200만 명이 논밭을 버리고 난민이 됐다. 따라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크메르루주 치하의 1970년대 후반이 아니라 이미 1960년대에 시작됐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캄보디아 공습 결정을 내렸던 키신저는 지금껏 자신의 정책이 잘못됐다고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1994년에 사망한 닉슨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미국 정치권에 나름의 영향력을 지닌 키신저가 무덤 속의 닉슨과 함께 캄보디아 국제전범재판소로 불려나와 준엄한 단죄를 받을 날은 영영 오지 않을까. ‘역사의 심판’이란 용어는 그들 사전엔 없는 것일까. ---------------------------------------------------------------------- 폴포트는 억울하지 않을까 ▣ 류이근 기자/ 한겨레 경제부 ryuyigeun@hani.co.kr
얼마 전 우연히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아시아네트워크 지음)를 읽었다. 그리고 문뜩 ‘그가 억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100여 명의 아시아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한겨레21>의 설문조사에서 폴포트는 예상대로 1위로 나왔다. 말할 것도 없이 200만 명에 이르는 캄보디아인 학살의 ‘원흉’으로서 그를 아시아판 히틀러로 평가한 것이다. 지난 100년 동안 아시아인들에게 가장 영향이 컸던 정치·사회적 사건으로 꼽힌 2차 세계대전의 아시아·태평양 쪽 가해자인 일본의 히로히토 국왕이나 1급 전범 도조히데키보다 그가 더 ‘나쁜 놈’이었다.
메콩강에 50만t의 폭탄을 쏟아붓다
이제 무덤에 묻힌 폴포트가 억울하지 않을까 하고 뇌까렸던 것은 킬링필드의 공범에 대한 분노이자 역사의 무지가 빚어낼 수 있는 잘못된 전설에 대한 반성이다.
1997년 이후 킬링필드의 주역을 법정에 세우려는 미국과 유엔의 압박에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는 “1969~73년에 벌어졌던 일들도 재판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맞섰다. 이 기간 동안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킬링필드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핀란드 정부의 독립적인 조사보고서인 ‘캄보디아, 10년간의 학살’은 이 기간을 1차 킬링필드라고 불렀다. 그리고 1975~79년은 2차 킬링필드로 나뉜다. 1차 킬링필드에선 60만 명이 죽었다고 이 보고서는 분석했다. 누구에 의해? 미국이다. 미국은 캄보디아 산악지대를 이용한 북베트남군의 전쟁 물자 운송을 차단한다는 목적으로 의회와 언론에 이 사실을 숨긴 채 메콩강 일대에 4년 동안 50만t의 재래식 폭탄을 쏟아부었다. 당시 미 백악관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키신저는 “베트콩들이 남부 베트남과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를 보급 거점으로 삼아 준동하고 있다. 캄보디아 폭격으로 캄보디아 공산당과 북베트남 연대를 끊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 논리를 충실히 따른 폭탄에 맞거나, 폭격으로 황폐화된 농토를 바라보며 수십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숨졌다.
그러고 나서야 캄보디아 혁명에 성공한 크메르루주가 1975년 등장한다. 폴포트는 미국 괴뢰정부 론놀에 봉사했던 지식인과 시민 10만 명을 처형했고, 이후 집권 5년 동안 질병과 기아로 숨진 이들이 70만~80만 명에 이른다. 폴포트는 마오사상의 이상을 실현시킨다며 지식인들과 숙련된 기술자, 근로능력이 없는 노인들을 색출해 농촌으로 보내 강제 노역에 투입했다. 이 기간 동안에도 미국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단체들이 캄보디아 구호사업에 뛰어드는 것을 차단했다.
“닉슨과 키신저도 재판 받아야”
미국의 언론들은 킬링필드의 주연은 크메르루주, 조연은 북베트남이라며 자국 정부의 논리를 충실히 세계에 퍼뜨렸다. <킬링필드>란 영화도 크메르루주에 대한 저주를 증폭시켰을 뿐이다. 지금까지도 미국의 학살 책임은 알려진 게 거의 없을 정도다. 촘스키는 <프로파간다와 여론>에서 “1970년대 초에 캄보디아 농촌을 상대로 역사상 가장 집중적인 폭격을 지시했던 사람들도 당연히 전범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밝힌다. 그가 말하는 폭격을 지시한 사람들은 바로 닉슨과 키신저 등 미국의 고위 정부관료들이다.
킬링필드에서 죽은 200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은 말이 없고, 죽인 자들도 말이 없다. 그래서 역사는 지켜보는 자들의 몫이다. 킬링필드의 책임을 모두 폴포트에게 돌리는 것은 우리가 아시아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 킬링필드, 20세기 최대의 거짓말 크메르루주를 능가했던 69~73년 미군의 대량폭격학살… 책임자 키신저부터 국제법정에 세워야 1970~80년대 ‘문화교실’이란 게 있었다. 요즘도 그런 게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선생이 학생들을 이끌고 단체로 극장에 가는 군대식 문화행사였다. 그렇게 줄지어 가서 본 영화들이 <성웅 이순신 장군>이었고 <의적 홍길동>이었다. 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외국 순정물도 있었다. “전두환 독재타도”를 외치는 함성과 최루탄이 하루도 멈춘 날이 없던 1984년, 전국 극장은 여고생들로 울음바다가 됐다. 여고생들은 길거리로 쏟아져나온 뒤에도 메케한 최루탄 기운 탓인지 아니면 ‘감동’이 식지 않은 탓인지 연신 눈물을 찍어댔다.
영화 <킬링필드>엔 꿍꿍이가 있다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라는 영화, 그 문화교실은 시대상과 뒤섞여 감수성 예민한 여학생들을 자극했고, 그들은 중년이 된 지금도 가슴 한쪽에 <킬링필드>를 매달고 있지 않나 싶다.
<킬링필드>는 시드니 샨베르그라는 <뉴욕타임스> 기자와 그를 도운 캄보디아 현지 기자 사이에 폴 포트가 집권한 ‘1975~79년’이라는 정치공간을 집어넣고, 이별과 만남 같은 통속적인 주제로 감성을 자극해 크메르 루주에 대한 저주를 증폭시키는 동시에 아메리카 학살사를 교묘하게 은폐시킨 영화였다.
“영화가 지닌 창작성을 인정하더라도 ‘실화’로 강조한 다음에는 역사를 왜곡할 수 없다. 특히 민감한 정치적 사안은 ‘선전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크고, 그렇게 되면 영화는 이미 음모가 되고 만다.”
1975년 4월17일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에 입성할 당시 시드니와 함께 마지막까지 프랑스 대사관에 남아 캄보디아를 취재한 종군기자 나오키 마부치(뉴스 카메라맨)의 말마따나 현장에 있던 대다수 기자들은 <킬링필드>가 인물관계에서도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모두 ‘아메리카 지상주의’를 살포한 무슨 ‘꿍꿍이’가 있는 영화라 혹평했다.
그럼에도 <킬링필드>는 전설이 됐다. 전설은 곧 역사가 되었다. 희생자들이 두 눈 빤히 뜨고 살아 있는 기껏 30년 전 캄보디아 현대사는 그렇게 아메리카가 만든 ‘킬링필드’에 묻혀 전설 따위나 기록하는 어처구니없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킬링필드’든 무엇이든 학살을 이야기할라치면 적어도 아래와 같은 세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학살자가 누구였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는가” “왜 학살을 했는가”
캄보디아에서도 아메리카에서도 또 한국에서도 ‘킬링필드’ 전설에 따르면 대답은 간단하다.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 루주.” “200만명.” “공산주의 체제 건설한답시고.”
이렇듯 아무도 의심하는 이 없이 모든 책임을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운 채 역사가 돼온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놓고 1997년부터 국제사회는 학살범을 처단하겠다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출발부터 아메리카 정부가 쥐고 흔드는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 사이에 승강이만 벌였지 정작 재판도 한번 열어보지 못한 채 5년 가까운 세월만 흘려보냈다.
“누구를 재판에 회부할 것인가” “재판정은 어디에 설치할 것인가” “비용은 누가 부담할 것인가” “캄보디아와 국제사회가 판사를 각각 몇명씩 배치할 것인가” “형벌을 사형으로 할 것인가 무기형으로 할 것인가” 이런 것들을 정하는 데만도 무려 5년이나 걸렸다. 그 과정은 그야말로 희생자들을 두번 죽이는 정치적 흥정이었고 음모였다.
69~73년 제외, 훈센과의 흥정
이 마가 낀 킬링필드 학살재판을 통해 취약한 정치적 합법성을 국내외로부터 인정받겠다는 캄보디아 훈센 총리의 야심과 킬링필드에 종지부를 찍어 모든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아메리카 속셈이 충돌한 한판이다 보니 처음부터 ‘순정’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었지만.
“1969~73년에 벌어진 일들도 재판에 포함시켜야 한다.” 훈센은 막힐 때마다 이 카드를 은근히 뽑아들었지만, 유엔과 아메리카 정부는 그때마다 경제지원을 들먹이며 달래기도 하고, 두들겨패기도 하며 결국 자신들 뜻대로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1975~79년의 기간만을 학살재판 대상으로 삼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 아메리카는 킬링필드 학살재판에서 사력을 다해 ‘1969~73년’을 제외시켰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1969~73년에 아메리카가 먼저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걸 편의상 제1기 킬링필드라고 하면, 1975~79년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발생한 학살은 제2기 킬링필드에 해당한다. 캄보디아 양민학살은 이렇게 10년 동안 서로 다른 두 집단이 두번에 걸쳐 자행했고, 따라서 크메르 루주 집권기만을 범죄대상으로 다루면 킬링필드 역사를 온전히 밝혀낼 수 없거니와 결국 모든 책임을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우겠다는 아메리카식 음모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진 라코처가 쓴 <이어 제로>(Year Zero, cited Pol Pot official)가 있다. 크메르 루주가 200만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한 이 책은 아메리카에게 ‘성경’ 같은 책이었다. 그런데 이 작자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스스로 그 수를 조작한 것이라 해명하는 촌극을 벌였다. 그래도 지금까지 그 책은 크메르 루주가 200만명을 죽였다는 전설, 그 공식적인 자료로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100만명이든 200만명이든 학살 희생자 수를 따지려면 1969~73년에 아메리카가 폭격해서 죽인 60만~80만명에 이르는 양민들을 흔히 알고 있는 킬링필드 전설에서 분리시켜야만 온전한 역사가 된다.
이미 알려진 대로 마오이즘을 본떠 1975년 캄보디아 혁명에 성공한 크메르 루주는 화폐통용 금지, 무역 금지 같은 조치들을 취하며 공상적 사회주의라 부를 만한 극단성을 드러냈다. 특히 크메르 루주는 아메리카 괴뢰정부 론 놀에 봉사한 이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10만명에 이르는 지식인과 시민들을 처형했고, 1975~79년의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과로와 질병이나 기아로 죽은 이들이 70만~80만명을 웃돌았다. 이 기간에 발생한 기아와 질병 사망자는 아메리카가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의 대캄보디아 구호사업을 차단해버린 데서 비롯한 일이기도 해서 크메르 루주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리가 상당한 설득력을 얻어온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튼 결과만 놓고 보면 크메르 루주는 시민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시민들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크메르 루주 킬링필드가 존재했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가 시민을 살해했다는 사실만으로 10년 동안 자행된 킬링필드 책임을 모조리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워도 좋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얼마나 죽었는가
학살 제2기에 해당하는 1975~79년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죽은 사람들 수는 연구자나 정치적 배경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수많은 캄보디아 연구서들을 쏟아낸 데이비드 챈들러나 마이클 비커레이 그리고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가 대체로 극단적인 추산을 피한 경우로 꼽혀왔다. 챈들러는 크메르루주가 처형한 수를 10만명으로, 비커레이는 처형한 수를 15만~30만명 정도에 기아·질병·중노동으로 죽은 이들을 약 75만명으로, 그리고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는 사형과 질병, 기아로 죽은 이들을 합해 약 100만명으로 각각 밝힌 바 있다. 이런 조사연구를 기준삼아 전문가들 사이에는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죽은 이들 수를 80만~100만명이라 여겨왔다.
여기에 학살 제1기에 해당하는 1969~73년에 아메리카가 폭격으로 죽인 양민 수를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는 약 60만명으로, 위 다른 연구자들은 40만~80만명 정도로 각각 추산했다.
이렇게 해서 제1기 아메리카 학살과 제2기 크메르 루주 학살을 모두 합해 10년 동안 약 150만~160만명에 이르는 양민들이 살해당했는데, 이게 킬링필드의 전모다.
이래도 아메리카가 주장하는 대로 1975~79년 크메르 루주 집권기만을 킬링필드로 부른다거나, 10여년 동안 진행된 킬링필드 책임을 모두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이 온당한 일일까
아메리카는 킬링필드를 모두 크메르 루주가 저지른 짓이라 잡아떼겠지만, 프놈펜에서 1번국도를 따라 약 35km 떨어진 프레크트렝 마을을 기억해보라 권하고 싶다. 1973년 B-52 전략폭격기가 무차별 포격을 가한 마을주민들은 아직도 당시 희생자 유골을 담은 보따리를 간직하고 있으니.
끝내 아메리카가 시치미를 떼겠지만 프놈펜에서 남쪽으로 베트남 국경에 이르는 어디든 좋다. 어느 마을이든 가보라 권하고 싶다. B-52에 폭격당하지 않은 마을을 발견할 수 있으면 당장 아메리카는 자유로워져도 좋다. 모든 학살책임을 크메르 루주에게 돌려도 좋다는 뜻이다.
캄보디아가 너무 멀다고 그러면 이번에는 아메리카 안에서 찾아보라고 권할 수도 있다.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목표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캄보디아 불법폭격을 고발한 도널드 도슨(당시 공군 대위·B-52 부조종사)을 아메리카는 1973년 6월19일 폭격명령 거부죄로 법정에 세웠다.
아메리카 군사자료를 종합해보면, 1969~73년에 아메리카는 B-52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캄보디아에 무려 53만9129t에 이르는 각종 폭탄을 투하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메리카가 일본에 투하한 총량 16만t을 3배나 웃도는 엄청난 양이었고, 파괴력은 히로시마 핵폭탄 25배를 웃도는 것이었다. 그렇게 캄보디아에 퍼부은 폭탄이 불바다를 만드는 네이팜탄이었고, 고엽제로 자손 대대 치명상을 입히는 에이전트 오렌지였고, 수백개 새끼탄을 까며 시민들을 살해한 클러스터밤(CBU)이었다. 1957년 제네바협약을 송두리째 위반한 이 폭탄들은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말썽이 나자 자취를 감췄지만, 클러스터밤만은 여전히 걸프전과 코소보전, 최근 아프가니스탄전에서도 악명을 떨치며 아이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베트콩 잡겠다며 캄보디아 민간인 학살
게다가 B-52란 놈은 핵무기 수송수단으로 개발한 탓에 공군전략사령부 소속이었으나 캄보디아 폭격에 비밀스레 동원한 B-52는 아메리카 남부 베트남사령부에서 명령을 내렸고, 심지어 국방장관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불법작전을 수행했다. 그렇게 비밀불법전을 통해 학살한 캄보디아 양민 수가 60만~80만명이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만천하에 드러난 크메르 루주쪽 학살주범 폴 포트와 달리 아메리카쪽 학살주범은 누구였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모든 관련자들이 ‘최고 명령권자’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안보고문(1974년부터는 국무장관)을 지목했다.
“베트콩들이 남베트남과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를 보급거점으로 삼아 준동하고 있다. 캄보디아 폭격으로 캄보디아공산당(CPK)과 북베트남 연대를 끊어야 한다.” 당시 국가안보회의(NSC)를 주도하며 닉슨을 주무른 헨리 키신저가 강조한 캄보디아 비밀폭격 논리였다.
“캄보디아에 대한 공격이 아니었다. 캄보디아에 거점을 둔 베트콩을 공격했을 뿐이다.” 이건 1973년 들어 결국 대캄보디아 비밀폭격을 눈치챈 의회가 공습을 중단하라며 난리를 치자, 키신저가 맞받아친 말이다. 키신저에 따르면 60만~80만명에 이르는 캄보디아 양민들이 베트콩이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결론이 난다.
키신저, 왜 그를 학살주범으로 기소해야 하는지는 처음부터 이렇게 분명했다.
전쟁선포도 하지 않은 중립국에 융단폭격을 가했다는 사실도, 전쟁과 무관한 중립국 정부를 쿠데타로 뒤엎은 사실도, 시민들에게 공습경고 한번 내리지 않은 사실도, 제네바협약을 어기며 불법 폭탄을 퍼부은 사실도, 4년 동안 폭격하면서 의회에 대한 보고의무를 한번도 수행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군 명령권자가 아니면서 폭격점까지 지시하며 권력을 남용한 사실도, 군 명령과 보고체계를 무시한 채 비밀전쟁을 수행한 사실도, 캄보디아 폭격에 대한 진실을 철저하게 부정한 사실도, 그렇게 해서 양민 60만~80만명을 살해한 죄목은 모두 키신저 몫이다.
살아 있는 크메르 루주쪽 학살범으로 엥 사리, 키우 삼판, 눈 치에, 타 목을 기소하겠다면 적어도 아메리카쪽 학살주범인 키신저를 같은 법정에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 ‘감동적인 눈물’의 진실
세계적 석학이니 국제전략전문가라 불리며 호사스러운 여생을 보내는 키신저를 기소하지 않고는 킬링필드도 학살재판도 모두 영원히 반쪽짜리 전설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밀불법전쟁을 주도한 키신저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아메리카식 킬링필드에 침묵해온 언론들은 키신저를 존경하는 석학이라 떠들어대며 거금을 주고 글 나부랭이나 받는 걸 명예로 여겨왔다. 옳은 일인지 어떤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아메리카식 정의만 있는 캄보디아 학살재판, 아메리카식 킬링필드를 지우려는 캄보디아 학살재판, 그래도 이 학살재판을 인정할 것인가 그래도 킬링필드 전설을 따라 감동적인 눈물을 흘릴 것인가
현대사에 최고 최대 거짓말인 아메리카식 킬링필드 전설을 끊어버리는 일이야말로, 앞으로 더 이상 세계 시민사회가 아메리카로부터 ‘개죽음’당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경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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