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대충 민방위 교육? 진짜 유익하네!”

기사입력 2008-01-16 09:40
[주간동아]

지난해 예비군 8년을 ‘졸업’한 김 대리. 이제는 2박3일 동원훈련도, 8시간짜리 향방훈련도 안 받게 돼 좋았는데 웬걸, 아파트 경비실에서 민방위 소집통보서가 나왔다고 받아가란다. ‘4시간밖에 안 되는 교육이지만 지겨울 게 분명한데 어쩌나’ 싶어 스포츠신문과 MP3 플레이어로 ‘중무장’하고 교육장인 구민회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김 대리는 구민회관에서 신문도 MP3도 꺼낼 수 없었다. 뻔한 안보교육, 고리타분한 정신교육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각 분야별 전문가인 민방위 강사들이 실생활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여러 위기상황에 유용한 응급조치 방법을 프레젠테이션, 동영상 등의 교육시스템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수많은 ‘김 대리들’에게 잠잘 틈을 주지 않는 우리 동네 민방위 명강사들을 소개한다.



[임만철 강사·응급처치]

“심장마비는 5분 안의 응급처치가 생사 갈라”

30대 남성이 대부분인 민방위 교육 참가자들에게는 나이 든 부모와 어린 자녀의 건강과 안전이 최대 관심사다.

“노부모가 갑자기 쓰러지거나 수영장에서 아이가 물에 빠지는 등 위기상황의 대처요령을 가르치면 딴 짓 하던 대원들도 ‘어! 이거 들어둬야겠구나’ 하면서 정신을 바짝 차립니다.”

베트남 전쟁에 장교로 참가했던 임만철(58) 강사는 1988년 전역 이후 모 금융회사 비상기획관으로 근무하며 민방위 교육을 시작해, 정년퇴임한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부모가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참가자들은 교육이 끝난 뒤 일대일 교육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심장마비는 5분 안에 응급처치를 해야 하거든요. ‘고맙다, 큰 도움이 됐다’는 말도 많이 듣습니다.”

임 강사는 운전이나 운동하다가 생길 수 있는 골절, 출혈, 화상 등 위기상황에 대한 대처방법을 비롯해 심폐소생술 및 기도폐쇄 시 응급처치법(하임리히법) 등을 가르친다. 특히 베트남전 참가 당시 부상한 병사들을 응급처치한 사례를 들려주거나, 교통사고 현장이나 병원 응급실에서 심폐소생술로 환자를 살려낸 사례를 영상으로 보여줘 교육 참가자들의 호응이 높다.

“동영상을 많이 보여주는 편이에요. 2000년 4월18일 당시 30세였던 롯데 자이언트 임수혁 선수가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주면 남의 일 같지 않죠.”

임 강사는 강의자료를 확충하고 교수방법을 연구하는 데 힘을 쏟는 노력파다. 자비를 들여 필요한 영상물을 구입하는가 하면, 강의 잘하는 강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먼 곳까지 찾아가 강의를 받고 오기도 한다. 임 강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참가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다”며 활짝 웃었다.



[정태식 강사·생화학 테러]

“유독가스 발생 때 손수건에 물 적시면 10분 거뜬”

‘생화학 테러’가 실생활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1995년 도쿄 지하철 독가스 테러를 일으킨 옴진리교 한국지회가 세워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생화학 테러를 교육하는 정태식(60) 강사의 말은 다르다.

“우리 사회에서도 산업체의 유독물질이나 유독가스가 누출, 누수될 수 있고, 몇 년 전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처럼 화재로 인해 유독가스가 퍼질 경우 대응요령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화학부대 출신인 정 강사는 1993년 중령으로 예편한 이후 개인사업을 하다 2001년부터 서울과 경기도 지역 민방위 강사로 일하고 있다.

“한 번 교육 시 참가자가 200명에서 250명 정도 됩니다. 이들을 장악하는 데는 강사의 능력이 90%를 차지하죠. 군에서 교관으로 생활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간단하지만 알아두면 유용한 유독가스 응급대처법 한 가지. 유독가스가 발생할 경우 손수건을 물에 적셔 코와 입을 막으면 10분가량 견딜 수 있고, 손수건이 없을 때는 옷소매로 가린 뒤 맑은 공기가 남아 있는 아래쪽으로 몸을 숙인다.

정 강사는 민방위 교육 참가자 대부분이 위급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를 뿐 아니라,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고 말한다.

“일례로 화상 입었을 때 연고를 바르는 경우가 있는데요. 연고는 환부의 열이 빠지는 것을 차단하거든요. 연고는 나중에 바르고 가장 먼저 20분 정도 차가운 물에 환부를 담가 화기를 빼야 합니다.”

오전 9시부터 2시간 교육을 마친 뒤 다른 동네로 이동해 오후에 2시간 교육을 하는 바쁜 일정이지만, 민방위 대원들이 ‘좋은 교육 받았다’며 음료수라도 대접하면 정 강사는 보람을 느낀다.

“생활 속 안전사고 대처방법을 가르치는 곳은 민방위 교육장밖에 없어요. 민방위 교육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도 직접 받아보면 생각이 달라질걸요.”



[정인화 강사·지진]

“한반도에서 큰 지진 일어나지 말란 법 없지요”

“지진이나 재난과 관련한 기록을 뒤져보고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재난 다큐멘터리가 나오면 밤을 새워가면서 봅니다.”

‘지진’ 과목을 가르치는 정인화(63) 강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지진전문가. 1995년 일본 고베 지진 이후 방재계획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지진의 이해’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당시만 해도 지진 관련 학술단체나 연구기관은 있었지만 일반인을 상대로 한 교육용 자료는 없었거든요. 서울시에서 처음으로 국민교육용 책자를 만든 것이죠.”

1967년 서울시 공무원을 시작해 방재기획과장을 마지막으로 2004년 은퇴한 정 강사는 “기상재난이나 화재, 건물 붕괴 등 인위적 재난, 전산망 장애 등 사회적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시민 모두가 안전요원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2000년을 전후해 민방위 교육이 남북화해 무드에 발맞춰 기존 안보교육에서 생활민방위 교육으로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재난 발생 시 초기에 얼마나 신속하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피해규모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민방위 교육은 매우 중요합니다.”

정 강사는 우리나라도 지진의 안전지대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면 한두 시간 안에 해일이 우리 해안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보통 지진은 판의 경계에서 일어나지만, 판 내부에 있는 중국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던 것만 봐도 한반도에 그런 지진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정 강사는 “교육 끝나고 나면 자기 회사 안전교육에 초청하겠다는 교육생도 있다”며 “교육시간에 야한 농담이나 하면 잠깐 주목을 끌 수는 있겠지만 그보다는 전문가 처지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내용을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김종선 강사·교통안전]

“실감나는 뺑소니범 검거 사례에 눈이 번쩍”

김종선(62) 경찰종합학교 교수는 우리나라 뺑소니 사건 수사의 최고 전문가다. 경찰간부 출신으로 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 교통사고조사부장으로 일한 김 교수는 지난해부터 민방위 교육 교통안전 강사로 일하고 있다.

“옛날처럼 칠판에다 쓰면서 말로 설명하면 다들 졸게 마련이죠. 저는 주로 실제 교통사고 현장의 동영상이나 시내 교차로 감시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보여줍니다. 대원들 대부분이 운전자다 보니 아무래도 실감날 수밖에 없죠.”

서울시내에서 교통사고가 가장 잦은 신촌오거리, 강남교보타워 사거리, 영등포 로터리, 광화문, 광진교차로 등을 사례로 들어 설명하면 자연 민방위 교육생들의 집중도가 높아진다.

뺑소니 전문 수사관 출신으로 경찰종합학교에서 뺑소니 사건 수사요령을 가르치는 김 교수는 일선 경찰관에게서 수사 관련 문의도 받는다. 뺑소니범 검거를 도와주고 범인을 잡은 뒤에는 검거사례를 교육에 활용해 민방위 교육생들의 경각심을 높이고 있다.

“교통사고 사망자가 한 해 6300명에 이르고 부상자는 34만명이나 됩니다. 하지만 운전자는 면허증 딸 때 한두 시간 학과시험 문제 풀어보고 안전교육 받으면 끝이거든요. 도로교통법이 바뀌고 자동차 성능, 도로환경이 달라져도 교통안전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는 게 현실입니다. 법규를 위반해 도로교통안전공단에서 안전교육을 받지 않는 한 민방위 교육 시간이 유일한 셈이죠.”

김 교수는 “저한테 교육받은 대원들이 나중에 운전하면서 ‘아차, 그때 민방위 교육 시간에 강사가 이렇게 말했지’라고 기억하고 안전운전에 임하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윤재석 자유기고가

생화학 무기는 속칭 "가난한 나라의 핵무기"라 불릴만큼 제조및 보관이 간단하고 비용

이싸며 엄청난 파급효과를 지니는 무기체계이지만 2차적인 통제가 불가능하고

심각한 휴우증을 동반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사용을 금지하는 추세이며 실제로도

국가간 전쟁에서 화학무기나 생물학 무기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문편입니다

먼저 사용하게 된다면 자기역시 혹독한 보복을 각오해야할만큼 치명적인 무기체계

이기 때문이죠..생산하는데 큰 비용이 드는것도 아니고 특수한 기술력을 요구하는것도

아니기 때문에 생화학무기는 인정을 안해서 그렇지 군대를 보유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제작 보유하고 있는게 기정사실화 돼있읍니다.. 특히 북한같은 경우는 화학전사단이

따로 존재할만큼 생화학무기에 노골적으로 집착하고 있죠 생화학 무기는 대부분

염소계열 화학체를 많이 사용하는것으로 알려져 있지만..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만큼

수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과학에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분이라면 어떻게 혼합하느냐

에 따라 무궁무진할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아시겠죠.. 화학무기가 인체에 어떻게 해를

끼치느냐는...1996년에 나온 숀 코넬리,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영화 "더 록"의 초반부

에 여실히 드러나있읍니다.. 물론 영화라서 약간 과장된면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증세는 신경계통에 작용해 살상하는 체계이며. 반응 시간은 종류별로

틀리지만 흡입후 1분후에 증상을 보이는것도 있는반면 가스가 퍼졌다는걸 느끼기도

전에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물질들도 있습니다 현재 공식적으로 생화학테러로 기록된

사건은 1990년대초 일본의 광신적인 종교집단에 의해 지하철역에 가스를 살포 불특정

다수를 노린 사건이 있었고 이후에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_ -;;

생화학테러 대비라...대비를 한다고는 하지만..막상 당해보면.. 대비책이 없습니다..

사후 시신들이나 수습하는게 대책이라고 할까요.. 그렇다고 국민들한테 방독면을

의무적으로 휴대하라고 해도 소용없는거도 방독면 착용하기도 전에 당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만큼 치명적인 무기 체계이죠

911 자작극 음모론 동영상

큰 화면은 아래 링크 클릭하면 뜹니다.
1) 펜타곤에 충돌했다는 AA77(보잉 757)기 잔해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잔해로 발견된건 보잉 757 부품이 아닙니다.
이건 최근에 문제가 됐던게 아니라, 911 직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던 의문입니다.
적어도 이부분에선 미국방성이 거짓말하는거 확실합니다.
민항기로 충돌한게 아니라 벙커버스터로 때렸을 가능성이 크죠.
2) WTC 빌딩 두개가민항기와의 충돌 뒤 한시간 전후에한번에 내려앉았는데..
항공유 연소로 인한 고열(지속적으로 연료 공급시 섭씨 약 1100도)로 철골 구조가 약해졌다고 하지만,
36개기둥이 받히고 있는 상태에서 그렇듯 내려앉는다는게 이해하기 힘듦니다.
당시 소방관들과 WTC 관리원들은 비행기 충돌 후 건물 지하 및 저층에서 몇번의 폭팔이있었다고 합니다.
단순 가스 폭팔로 철골 구조를 발살낼 수 없죠.특히 건물 붕괴시 아슬아슬하게 도망쳤던 소방관은
연쇄적인 폭팔 소리를 들은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폭파 공법에 의한 건물 해체가 진행된거죠.
참고로, 화재로 인한 고열로 철골 구조가 약해져서 건물이 내려 앉는다면 고층 건물의 건축 허가 자체가 않나오겠죠.
더군다나 당시 세계 최고층이었는데.. 불량 빔을 사용했다는건 말이 않되죠.
WTC에 사용된 빔은 섭씨 1100도에서도 몇시간 이상 견디는 미국 건축 요건 등을 통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충돌 부위의WTC의 최고 고온은 섭씨 약 800도 정도였죠. 충돌 후 항공유 대부분 연소한 상태였죠.
3) 동영상에 있듯이 911 사태 직전에 풋옵션 거래가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옵션 거래한 자들에 대한 조사만 해도 뭔가 나올겁니다. 전혀 말이 없죠.
4) 당시 18명의 용이자중 절반이 현재 사우디 공항 관리인,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건 당일 나왔던 용의자들.. 그 뒤로 아무말 없었죠.
과거 통킹만 사건(미국의 베트남전 참전 계기), 쿠바 사태 등 음모론이 제기됐다가 사실로 드러나 사건들이 몇 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계기가 됐던 일본의 진주만 공습시에도 뭔가 음모론이 제기됐죠. 미 군수업자들의 공장을 원활하게 가동하려면 10년에 한번은 재고를 풀어줘야 하는 걸로 들었습니다.
911 테러로 가장 이득을 본건 누가 뭐래도 미국이죠.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공격으로 세계 무기 재고의 40%를 팔지못해 애가 탄 군수업자들 속을 풀어줬고, 전후 재건 사업에 부시 주변 인물들 엄청난 이득을 챙겼습니다. 작금의 오일 가격 상승..미국의 거대 석유 회사들 먹는게 많다는거 상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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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민국 재난구조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 씰정현석

봉황새작전(1) + [대테러/707. 5,18 . 4,3사건]| 2007/03/21 16:57
수정 : 수정(창으로) | (발행)→비공개로 변경합니다 | 관련글(트랙백) | 삭제
25년 전, '검은베레'의 집단순직은 극비였다2007-03-13 15:39:10, 조회 : 351, 추천 : 1

82년 2월 5일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추락한 공군 수송기 C123.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무려 53명의 군인들이 전원 몰살한 이 사고는 이미 역사속에 묻혀졌다. 이 사고를 기억하는 유족은 대부분 고인이 됐거나 연로하지만, 여전히 25년전 사고에 은폐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2월부터 일명 '봉황새작전'으로 불리는 이 사고의 원인과 사후처리과정 등을 발굴, 탐사해왔다. 총 4차례로 나눠 이 사고에 얽힌 잘못된 역사를 낱낱이 파헤친다.<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오마이뉴스 장윤선 기자]

▲ 1982년 2월 5일 특전사 대원 등 53명을 태운 C123기가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 바위에 머리를 박고 추락했다. 사진은 25년만에 다시 가본 사고현장이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 이재수씨. 지난 1일 <오마이뉴스>와 함께 사고현장을 찾아나선 그는 25년 전 사고기의 잔해가 1분도 채 안 돼 땅속에서 나오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그만 파요. 이제 와서 뼛조각이 나온들 뭘 어쩌겠어요. 유족 두 번 죽이는 꼴 아니에요?"

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 재수(57)씨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을 감았다. 지난 1일 한라산 해발 1100m고지에서 류머티스관절염도 잊은 채 정신없이 25년 전 비행기 잔해와 유골을 찾던 그녀가 철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섞어 토해낸 말이다. 잊고 싶은 맘 반, 찾고 싶은 맘 반인 듯 싶었다.

일순간 정적이 감돌았고, 재수씨는 눈 안 가득 눈물을 머금고 먼 하늘과 맞닿은 제주바다를 응시했다. 반평생 가슴 속 응어리가 돼버린 한을 바닷물에 씻어내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날아든 한 마리의 까마귀가 적송 가지에 앉아 까악까악 울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누이에게 이 준위가 인사하는 듯 말이다.

이재훈 준위는 특전사령부 707대대 소속으로 82년 2월 5일 오후 1시 30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을 출발한 공군 수송기 C123기에 탑승했다. 제주 연두순시와 제주국제공항 준공식에 앞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특전대원들을 미리 태워 출발시킨 항공기였다.

그러나 이 비행기는 제주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한라산 중턱 개미등 계곡에 머리를 박고 추락했다. 이 사고로 53명의 군인(특전대원 47명, 공군 6명)들이 전원 사망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등 전쟁을 제외하고 평시 작전 중 군인들이 한꺼번에 몰살한 이 사건은 매우 큰 사건이었음에도 '단신' 거리로 취급됐다. 유족들은 지금도 이 사건에 은폐된 진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족들은 이 사건을 '제주 봉황새작전'으로 기억하고 있다.

"저것 봐요, 저것 봐. 이런 게 다 예사로 안 보인다니까."

재수씨가 다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분홍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 밑에 흙이 껴 시커멓게 될 정도로 땅을 팠다. 판초우의, 랜딩기어 일부 조각, 안전벨트, 알루미늄 기체, 쇠사슬, 탄피, 천 조각…. 재수씨가 땅 밖으로 끌어올린 것은 25년 전 사고로 불에 탄 C123기 잔해들이었다.

한 뼘 길이의 나무막대기로 5㎝ 정도 팠을까, 흙에 섞여 부식된 사고기의 고철 덩어리를 찾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종이뭉치가 딱딱하게 굳은 것 같은 회백색의 항공기 잔해들은 마치 줄기에 달린 고구마가 무더기로 땅 속에서 끌려나오듯 그렇게 우르르 몰려 나왔다.

재수씨는 "개미등 계곡 사고현장을 정밀하게 조사하면 유골도 나올 것"이라며 "군 당국이 당시 사고를 얼마나 허술하게 수습했는지 아느냐"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한 줌 재로 변한 남동생 죽음의 진실을 이제는 밝히고 싶다는 재수씨는 굳게 다문 입술을 깨물었다.

사고기가 머리를 박은 커다란 바위에 세워진 원점비. 재수씨는 원점비 앞에 종이컵을 놓고 소주를 콸콸콸 쏟아붓고, 평소 남동생이 사랑하던 담배를 스무 개비 올려 일일이 불을 붙였다. 담뱃불이 긴 꼬리표를 달고 하늘로 연기를 피워올리는 동안 재수씨는 낮은 톤의 목소리로 25년 전 사고현장 속으로 기자들을 안내했다.

▲ 제주 한라산 관음사 입구 등산로 4.1km에 위치한 원점비. 이 원점비에서 사고현장까지는 조릿대를 헤치고 약 150m 더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양송남 한라산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은 82년 2월 6일 군 수색대와 함께 사고현장을 수색했다. 양씨는 "당시 사고현장에서 갈기갈기 찢어지고 불에 탄 시신들을 목격했다"고 술회했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장면1] 양송남씨 "갈기갈기 찢어진 시신, 외부에 절대 발설하지 말라더라"

82년 2월 2일부터 제주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당시 신문들은 모두 "제주에 북서풍 바람이 불고 가끔 흐리고 한때 눈이나 비가 내리겠다"는 기상예보를 연달아 보도했다. 지난달 28일 제주 한라산 영실매표소에서 만난 양송남(57·한라산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씨도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눈이 참 많이 왔습니다. 날씨도 많이 흐렸고. 한라산엔 1m 높이의 눈이 쌓일 정도로 눈이 계속 왔어요. 사고 전날(4일) 밤 12시경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다음날(5일) 청와대에서 대통령 비서진들이 한라산 등반을 해야 하는데 안내자가 필요하니 좀 협조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 날도 이렇게 궂은데 무슨 한라산 등반인가 생각했지만 당시 청와대 부탁은 거절할 수 없었어요. 힘이 셌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도저히 등산할 기상이 아니었어요."

양씨는 솔직히 불만이었다. 전문산악인이 아니면 등반하기 어려운 날씨에 권력을 내세워 등산로를 안내하라는 것은 '명령'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날씨 좋을 때 오시라고 권유할 형편도 못 됐다.

당시 등산로에는 입구에만 20㎝ 이상의 눈이 쌓일 정도로 상당한 눈이 내렸다. 일반인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간다는 것은 사실 무리였다. 당시에는 변변한 등산화도 든든한 오리털점퍼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안개가 짙게 깔리고 시야거리가 50m도 안 될 정도로 시계가 무척 안 좋아도, 등반은 해야 할 처지였다.

"6일 새벽 3시경 집으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어요. 다짜고짜
용담1동 동사무소 앞으로 나오라는 거예요. 어디에 간다는 말도 없이 무조건 경찰트럭에 타라고 해서 탔죠. 차에 타보니 동료 2명이 동행했어요. 모두 4·3제주항쟁을 겪은 탓에 아무도 말하지 않고 20~30분 정도 달렸는데, 도착한 곳은 아라초등학교였습니다. 군인들이 교실에 커다란 군 작전지도를 걸어놓고 한라산 전체를 구역별로 나눠놓고 누가 어느 길로 갈지 정했습니다."

"흰 눈 위에 조각난 주검들이"

양송남씨는 50여명의 특전사 대원들과 함께 본부 수색대 안내를 맡았다. 나머지 두 명은 어리목 길과 성판악 코스를 안내했다. 하늘에서는 계속 공군 비행기가 웽웽 거렸고, 바다에는 해군 함정이 왔다 갔다 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한편으로는 놀랐고, 한편으로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증이 몰려왔다.

"도대체 왜 별안간 군인들이 한라산에 떼를 지어 올라가야하는지 몰랐어요. 그냥 안내하라니까 안내했지, 군인들에게 감히 뭘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민간인은 나 포함 우리 직원 2명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모두 군인이었으니까요. 그날도 날씨가 무척 좋지 않았습니다. 책임 인솔자는 최락도 소령, 그 사람이었어요."

관음사 입구를 출발해 산천단 검문소로 향했다. 도로는 빙판이었고 군인들이 탄 버스가 도랑에 빠졌다. 버스를 빼내지 못해 그 때부터 무조건 걷기 시작했다. 그 길에 공주사대 산악훈련팀을 만났는데 최 소령이 "어제 오후 3시경 산속에서 굉음을 듣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양씨는 그때서야 '사고로구나' 직감했다.

새벽 4시부터 걷기 시작해 낮 12시가 돼서야 탐라계곡 흙붉은오름 중간지대에 도착했다. 해발 1200m 고지였다. 점심식사로는 군인들이 짊어지고 올라온 쌀을 항고(코펠)에 넣고 눈을 퍼담아 지은 밥이 준비됐다.

그러던 오후 1시경 최 소령에게 무전이 왔다. 사고가 난 기체를 찾았다는 연락이었다. 양씨와 최 소령, 군인들은 서둘러 방향을 돌려
오후 5시가 돼서야 개미등 계곡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울창한 숲의 나무들을 싹둑 잘랐더군요. 등산로에서 100m 정도 걸어들어가면 움푹 패인 골짜기가 나오는데, 거기 암반을 들이받은 사고현장은 무척 참혹했습니다. 시신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죠. 최 소령이 군인들을 집합시켜놓고 업무를 나눴습니다. 시신 수습팀, 폭발물 꺼내는 팀 등으로 나눠 일에 착수하라고 했는데 군인들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머뭇머뭇 주저하니까 다시 재집합시키고 호통을 쳤습니다."

날은 이미 저물기 시작했고 기체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으며 주변에는 항공기 안에 실었던 물건과 조각난 사체들이 흰 눈 위에 널려 있었다.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검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그 때 최 소령이 양씨에게 다가왔다.

"민간인으로서는 처음 목격한 것이니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줄로만 알고 지금 이날까지 이 사건에 대해서는 쉬쉬하면서 살아왔지요."

양씨는 25년 만에 처음으로 당시 사고에 대해 떳떳하게 털어놓는다면서 말을 보탤 것도 없고 덜 것도 없이 당시 겪고 본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 82년 2월 5일 C123기 사고 뒤 특전사에서 세운 충혼비.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충혼비 앞에서 마주친 새색시와 타올세트

산에서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 뒤 내려와 밤 9시 저녁뉴스를 보는데, TV엔 아주 짤막한 자막으로 '공군기 추락사고'라고만 언급돼 있어 의아했다. 정확한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지 일체 보도가 없었다. 다만, '작전 중 순직'이라는 짧은 멘트만 있었다고 기억했다. 양씨는 사고현장의 심각성에 비해 보도는 터무니없이 약소했다고 지적했다.

"그 당시 최 소령 얘기로는 특전사 군인 1명당 1억원 이상 돈이 들어갈 정도로 훈련이 잘 된 사람들이라고 했어요. 태평양 한 가운데 떨어뜨려놔도 살아나올 사람들이라고
말이에요. 그런데도 이렇게 무참하게 사고를 당한 것은 당시 엄청난 눈보라에 안개가 잔뜩 끼는 등 기상이 안 좋은데 무리하게 비행기를 띄워 그런 게 아닌가 추측을 해봅니다. 시계가 안 좋으니까 조종사가 한라산을 공항으로 착각한 것 아닌가 이거죠."

양송남씨는 25년 전 '봉황새작전'으로 희생된 특전대원들을 생각하면서 가끔 충혼비를 찾는다.

재작년(2005년)에는 충혼비 앞에서 한 신혼부부와 마주쳤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새색시는 이 비행기 사고의 내력을 알아보고 싶다며 양씨에게 다가왔었다. 알고보니 이 C123기에 탑승했던 한 특전대원의 딸이다. 생후 6개월에 아버지를 잃은 딸은 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이 많았던 게다. 양씨는 군 당국이 그를 위해서도 정확한 사고원인을 말해주어야 할 것이라고 피력했다.

양씨는 25년 전 본부 수색대원을 이끌고 눈 덮힌 한라산 사고현장을 수색해준 대가로 고맙다는 소리 한 마디 듣지 못했다. 83년, 3장짜리 타올세트를 받은 게 끝이었다.

"최락도 특전사령관 명의로 수건 3장이 배달됐어요. 82년 2월 눈범벅이 된 한라산을 옆집 드나들듯 돌아다닌 저와 제 동료들이 함께 한장씩 나눠썼습니다. 그 뒤로 일체의 연락도 없었죠.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 서재철 전 <제주신문> 기자는 82년 2월 7일 새벽 한라산 관음사 코스로 올라가 개미등 사고현장을 촬영했지만 당시 보도통제때문에 단 한 컷도 지면에 쓰지 못했다. 서 전 기자는 "89년엔가 민주화 바람이 분 뒤에야 이 사진을 지면에 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장면2] 서재철 <제주신문> 기자 "취재했지만 보도는 못 했던 그 사건"

2월 5일 제주 날씨는 매우 음산했다. 하늘은 잿빛이었다. 서재철 당시 <제주신문> 사진기자는 편집국을 요란하게 울리는 텔레타이프 소리에 맞춰 긴급 타전된 세 줄짜리 뉴스를 봤다. '공군 비행기 제주 훈련 중 추락-추자도 인근'. 1보가 떴다. 2보엔 '제주해역'으로 바뀌었다. 9시 저녁뉴스가 흘러나오는 TV 브라운관에도 마찬가지로 짧게 언급됐다.

지난달 28일 제주문예회관 휴게실에서 만난 서 전 기자는 82년 신군부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언론은 입이 있으되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고 술회했다.

서 전 기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제주 연두순시와 제주공항 준공식 행사의 근접취재권이 나와 아침부터 공항에서 대통령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미리 참석한 몇몇 장관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한라산을 수색했는데 아직도 못 찾았대?" "그래요."

전날 댕댕댕 편집국을 요란하게 울리던 텔레타이프 소리와 장관들의 말이 오버랩 됐다. '한라산이구나' 연두순시 등 '대통령 취재'를 마감한 서 전 기자는 6일 오후 회사에 들어가 보고했다.

"우리 고장에 이렇게 큰 사건이 발생했는데 안 갈 수 있나, 가야한다고 그랬죠. 회사에서는 모두 위험하다고 했어요. 당시엔 정말 그랬죠. 6일 해질녘 한라산 관음사 코스에서 양송남씨를 만났어요. 사고지점이 개미등 계곡이라는 것만 알려주고 조심하라고 했어요. 군인이 사방에 깔려있는 상황에서는 취재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어서 일단 철수하고, 인적이 뜸한 새벽에 올라가서 다시 촬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서 전 기자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사고소식을 접하고 취재를 온 <경향신문> 기자들과 함께 7일 새벽 빙판길을 달음박질로 뛰어 올라갔다. 아라초등학교에 본부를 차린 수색대는 벌써 출발 채비를 하고 있었다.

"현장에 도착하니 아수라장이었어요. 한쪽에 사체와 불발된 포탄들을 늘어놓은 걸 봤습니다. 시신이 어떤지 확인할 새도 없이 후닥닥 찍고 빨리 내려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혹시라도 군인들과 마주칠까 두려웠죠. 등산객으로 가장해 사진 찍고 내려오는데 사고수습에 동원된 도청 공무원이 계속 '서 기자님, 이거 보도 못하는 줄 알죠? 보도하시며 안 됩니다' 그러는 거예요. 못들은 척 했지만 굉장히 거슬리는 소리였습니다."

서 전 기자는 흑백필름으로 총 6롤을 촬영했다. 죽을 고생을 해서 사진을 찍었지만 당시 그는 단 한 장의 사진도 지면에 쓸 수 없었다. 보도통제 때문이었다.

"회사에 들어가 촬영한 내용을 보고하니 필름을 모두 가져오라고 하더군요. 뭔가 낌새가 이상해 5롤은 회사에 제출하고 1롤만 따로 갖고 있었죠. 나중에 어떻게 될 줄 모르니까요. 제가 제출한 필름 5롤은 몽땅 특전사에 넘겨졌더군요. 그 땐 뭐 다 그랬죠."

서 전 기자가 촬영한 당시 사고현장 사진은 민주화운동 바람이 분 뒤에나 쓸 수 있었다. <경향신문> 기자들도 이 사건에 대한 보도는 일체 하지 못했다. 서 전 기자는
전두환 정권 당시 보도통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잘 모를 것이라며 입을 뗐다.

"82년 당시 군 관련 보도내용은 쓰라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절대로 쓸 수 없었어요. 요즘 기자들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그렇게 엄혹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89년인가 이 사건을 첫 보도하면서 '몇년만에 햇볕 본 사고현장' 이런 식으로 보도했던 것 같아요."

서 전 기자가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었다.

▲ 이재수씨가 원점비 부근에서 발견한 숟가락과 유품으로 보이는 시계줄 일부.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장면3] 마대자루에 담긴 시신을 보았다는 증언

82년 2월 7일 강석모(가명) 한라산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은 평소와 다름없이 관음사 매표소 근무를 서기 위해 출근했다. 평소와 다른 것은 군인들이 관음사 매표소 주변을 철통같이 둘러싸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던 것.

지난 1일 한라산 관음사 매표소에서 만난 강씨는 당시 일반인들은 이 사건의 현장에 가까이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자세히 둘러볼 수는 없었지만 먼 발치에서 시신더미가 마대자루에 실려 내려오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군인 2~3명당 한 자루씩 뭔가가 담긴 마대자루를 운반했어요. 뭐냐고 물었더니 '극비'라고 하면서 5일 날 사고 난 비행기에 탔던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그래도 사람을 어떻게 마대자루에 담나, 아무리 군인이라지만 너무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광목이나 붕대로 시신을 감쌀만한 여유나 상황이 안 되었겠지만 말입니다."

강씨는 7일 하루 동안 군인들이 마대자루에 담긴 시신을 리어카로 운반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2~3명의 군인들이 마대자루의 네 귀퉁이를 붙잡고 내려오는 식이었다. 군인들은 불에 탄 시신이 끔찍한 형상이라고 귀띔해줬지만 그는 그 말을 다른 데로 옮기지 않았다. 군인들이 며칠간 이 사고를 수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 당국은 단 하루만에 무려 53명이나 사망한 큰 비행기사고를 후딱 해치우고 자리를 떴다. 7일 이후 강씨는 관음사 매표소 부근에서 군인들을 만나지 못했다.

"감히 사고현장에 가볼 엄두가 안 났죠. 하도 극비, 극비 해서 근처에 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개미등 계곡 인근에는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한참 뒤에 우리 직원들끼리 궁금하니까 한번 가보자 해서 가봤는데, 눈이 녹아내리면서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시신토막을 볼 수 있었어요. 개미등 계곡에서 손가락 마디들을 본 기억이 또렷해요. 무척 끔찍했죠."

▲ 이재수씨가 82년 2월 5일 사망한 남동생 고 이재훈 준위를 위해 담배 스무 개비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 재수씨와 <오마이뉴스> 취재진이 한라산 개미등 계곡의 한 부분을 파기 시작하자 채 1분도 안돼 사고기의 잔해들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장면4] 머리 뚜껑, 군화 신은 다리... 53인의 유골과 유품들

이재수씨는 스무 개의 담배가 모두 필터 끝까지 다 타들어가자 그제서야 노란 소국 한 다발을 싼 투명 비닐과 리본을 풀었다. 꽃대를 하나씩 풀어 원점비 앞에 가지런히 놓고 주변에 몰려든 까마귀들을 향해 먹을 것을 휘휘 돌렸다.

▲ 한라산에서 흔하게 마주치던 까마귀. 이재수씨는 한 마리의 까마귀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까마귀 떼는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라산에서 숨진 '검은 베레' 특전대원을 상징하듯 사람들을 따라다닌다며 허망하게 웃었다.

"여기 와 앉으면 금세 까마귀 떼가 몰려와요. 까마귀가 영물이라 음식냄새를 맡고 오는 것이겠지만 유족들은 혹시 저게 내 새끼 아닌가 하죠. 적송에 까마귀 떼가 시커멓게 앉으면 흠칫 놀랄 때가 있어요. 까마귀 떼가 사람 가까이로 저공비행을 하면 정말 무섭거든요."

까마귀 얘기를 하던 재수씨가 다시 고개를 떨구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25년이 지나도록 단 한번도 군 당국으로부터 비행기 사고의 원인에 대해 소상히 듣지 못했다며 가슴을 쳤다. 못난 누이가 좀더 일찍 철이 들었더라면 답답증은 해갈됐을 것이라며 씁쓸해했다.

전두환정권은 당시 유족들에게 이 비행기 사고의 원인에 대해 성실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당시 사고 원인을 추측할 뿐이지 구체적인 사고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는 게 유족들의 갑갑증이다.

이 사고 이후 100일
위령제를 지낼 때까지도 유족들에게 사고현장을 공개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도 팽배하다. 군인들 몰래 유족끼리 가본 사고현장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100일이 지나도록 군 당국이 제대로 현장수습을 해놓지 않아 처참한 광경을 그대로 목격한 것이다.

재수씨는 "당시 군 당국은 큰 덩어리 위주로만 처리했다"며 "머리카락이 달린 사람의 머리뚜껑, 군화 신은 다리뼈 등의 유골, 수첩이나 시계 같은 유품들 등 여러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82년 근 한 해 동안 개미등 계곡에 비행기가 방치돼 있었어요. 제대로 수습하려고 했다면 헬리콥터를 띄워 바구니를 매달아 온전히 사건처리를 했을 거예요. 군 당국이 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고만 했지 정상적으로 처리하지 않았어요. 그저 대충 눈에 띄는 것만 치우고 끝낸 거예요. 전두환정권은 이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전두환 한명을 위해 젊은 군인 53명이 억울하게 죽은 거죠.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장윤선 기자

관련자료

http://cheoneui.tistory.com/category/대테러/707.%205,18%20.%204,3사건

불특정 다수의 인명피해 발생
집단적인 심리적 공황(panic)으로 사회불안초래
방사능 테러의 위험은 화학ㆍ생물테러에 비하여 낮다
화학테러는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타나지만 방호는 어렵다
생물테러는 잠복기를 가지며 감염여부를 측정하기가 어렵다.
화생방테러는 테러분자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어 선호한다.
- 방사능 테러는 핵무기의 직접적인 사용뿐만 아니라 핵관련시설에 테러를 가할 수 있다.
- 방사선보호복 및 개인선량계를 착용하고 필요시 옥소제를 복용후 현장에 진입한다.
- ‘방사선 응급구역(REA; Radiation Emergency Area)'을 중심으로 구조작전을 수행하며 과다한 방사능 피폭에
주의한다.
- 개인 방사능 피폭한계를 넘지 않으며 지휘관은 방사능의 량, 피폭시간, 작업시간 기록 유지한다.

- 생물학적 테러는 증상발현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계속 전염되어 피해가 확산되며 생물학적 공격에
의한 테러가 발생했다는 사실마저도 감지하기 어렵다는
점에 유의한다.
- 탄저병은 피부ㆍ호흡기ㆍ위장관 탄저병으로 나눌 수
있으며, 호흡기 탄저가 가장 치사율이 높다.
- 신경작용제 : 무색, 무취이지만 과일냄새가 나며 ‘95년 일본 사린가스 테러도 신경작용제의 일종이다.
- 수포작용제 : 피부발작, 수포가 발생하고 마늘(냉이, 겨자)냄새가 나며 ‘84년 중동전 때 이라크가 사용되었다.
- 질식작용제 : 두통, 현기증, 메스꺼움,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풀, 마늘, 옥수수, 복숭아 냄새가 난다.
- 기타 - 무능화작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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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충사업 | 소방사범 단속현황

국고보조 구조·구급장비 확충 사업 현황

장비 보강 계획

구 분

2006년도 실적

2007년도 계획

비 고

집행액 (천원)

수 량(종/점)

예산액 (천원)

수 량(종/점)

844,408

86/456

1,575,440

48/614

구조구급장비 보강

267,528

69/259

280,000

15/49

국비

생화학테러장비 보강

60,000

10/39

855,440

23/25
(
생화학인명구조차 1대 포함)

국비

응급의료기금 장비 보강

516,880

7/158
(구급차6대포함)

440,000

10/540
(구급차2대포함)

응급의료기금

※ 2006.집행잔액 : 없음

2007년도 장비보강 계획

구 분

보강 계획

추진사항

비 고

48종 614점

☞ 2월중 추진예정

구조구급장비보강

【15종 49점】
- 첨단장비 :
열화상카메라 등 2종 2점
- 개인장비 : 공기호흡기 20점
- 수난장비 : 잠수장비 등 4종 9점
- 산악장비 : 산악용로프 등 3종 8점
- 특수장비 : 절단기 등 5종 10점

생화학테러장비보강

【23종 25점】
- 생화학인명구조차 : 1대
-
테러대응장비 : 방사능보호복 등 20종 24점

응급의료기금장비 보강

【10종 540점】
- 구급차 : 2대(신규1, 교체)
-
구급장비 : 차량소독기 등 8종 238점
- 무선페이징 : 300대




방호구조과, 방호구조담당042-600-5161
포인트:5456point (94%), 레벨:7/30장동건
2008.07.13 05:09:20 (*.186.243.3)
122
해양 관광지를 지나는 항공모함의 멋진 모습!!

미해군 항공모함USS Ronald Regan (CVN 76)호와항모비행단 Carrier Air Wing 14 (CVW) 14가 괌의
Agana Harbor에 입항하는 모습을 하늘에서촬영하였습니다.
괌으로 여행을 떠나 저푸른 바다로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대신에사진으로나마 즐겨도 시원한 듯합니다.
현재 7함대 관할 해역에 배치되어 있는 Ronald Reagan Carrier Strike Group은필리핀에서 태풍Fengshen의 피해를 입은 필리핀국민들에게 구호활동을 펼친 후 괌을 방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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괌 Agana항 입항 바로전항해하는 미해군 항공모함USS Ronald Regan (CVN 76)호

http://pudding.paran.com/art5


대테러부대 GIGN의 인질구출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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