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2월5일 제주국제공항에서는 하루 앞으로 다가온 신활주로 준공식을 앞두고 군사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제주공항에는 지난 3년여간 264억원이 투입돼 길이 3000m의 새 활주로 공사가 완료됨에 따라 보잉747기 등 대형 항공기 취항이 가능하게 됐으며 이를 기념해 전두환 대통령이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날 훈련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게 공중 납치돼 우간다의 엔테베공항에 억류돼 있던 에어프랑스 여객기에서 이스라엘 인질 104명을 무사히 구출해 유유히 사라졌던 ‘엔테베 작전’과 비슷했다.
아침부터 전개된 군사작전으로 제주공항은 쉴새없이 이.착륙하는 제트기의 굉음으로 뒤덮였으며 바다에는 군함이 여러 척 출동해 전시를 방불케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제주도경에 설치돼 하루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순시 최종 준비에 몰두하고 있던 대통령 경호지휘본부는 오후 들어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대통령의 제주 순시때 외곽 경비를 맡을 특전사 장병들을 태우고 제주에 오던 군 수송기 한 대가 도착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두절된 채 행방불명됐기 때문이었다.
사라진 군 수송기는 나중에 출발한 군용기가 도착한 후에도 행방이 묘연했다.
이에 따라 추락 사고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측되기 시작했으며 공군기가 출동해 제주해역에 대한 수색작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바다를 샅샅이 뒤져도 비행기 잔해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제주 근해에 대한 수색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한라산에 추락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당시 한라산 지역은 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친데다 눈까지 내려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성판악에 설치된 항공시설을 공항 시설로 잘못 파악해 착륙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점쳐졌던 것이다.
다시 방향을 선회해 한라산 일대에 대한 수색작업이 계획됐다.
이미 해는 저물어 어둠이 짙게 깔린 뒤였다.
한라산 일원에 대한 수색은 군사작전의 특성상 그날 다른 지방에서 들어온 특전사 병력 중심으로 조를 편성해 진행됐는데 각 팀의 인원은 30~70여명이었다.
이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정예병력이었지만 한라산 지리에는 문외한이었으며 눈 덮인 한라산에서 나침반에 의존해 길을 찾기는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긴급히 수색작전에 투입되다보니 장시간 겨울 한라산에 오를 준비조차 제대로 돼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한라산 지리에 능한 민간인들을 길잡이로 동원해 이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수색작업은 대원들의 생사마저 위협하는 고난의 길이었다.
먹을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허기와 싸우면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속을 헤치고 전진해야 했고 무전조차 제대로 터지지 않아 나무에 기어올라가 무전을 시도해야 했다.
한라산은 밤새 군용기에서 퍼부어대는 조명탄의 불빛으로 대낮처럼 밝았다.
수색대원들은 폐허가 돼버린 표고버섯 재배 움막 등에서 몸을 맞대고 추위를 피하며 잠시 숨을 돌리면서 수색을 강행했다.
수색대원들 가운데는 찰나에 운명이 뒤바뀐 대원도 여럿이었다.
당초 특전사 대원들은 여러 대의 수송기에 나눠 타고 제주로 향했는데 출발 직전 탑승할 비행기가 뒤바뀐 것이 생사의 갈림길이 된 것이었다.
이들은 ‘내가 죽을 건데 전우가 대신 죽게 됐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체 찾기에 혈안이 됐다.
그러나 눈덮인 광활한 한라산에서 기체를 찾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색대가 난항을 겪고 있을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한 대학 산악팀의 제보였다.
사고 당시 항공기 추락지점 인근에서 산악훈련을 실시했던 이들은 ‘요란한 소리를 들었다’고 제보했다.
이에 따라 이들이 제보한 지역을 중심으로 수색에 박차를 가한 결과 마침내 6일 오후 4~5시께 동탐라계곡과 서탐라계곡 사이의 작은 골짜기인 개미등 부근 적송지대(해발 1060m지점)에서 추락한 군수송기의 기체를 찾아낼 수 있었다.
기체가 발견된 곳은 등산로에서 한참 떨어진, 폭이 15m에 불과한 작은 골짜기여서 이들의 제보가 없었다면 수색은 한참 지체될 수밖에 없었을 상황이었다.
현장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밑둥부터 잘려 나가 있었고 작은 계곡에 처박힌 수송기는 꼬리, 몸통, 앞부분 등 3부분으로 쪼개지고 바퀴를 하늘을 향해 쳐든 채 뒤집혀 있었다.
주변에는 비행기 잔해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시신들이 흩어져 있었다.
추락때 불이 나면서 타다 보니 잘려 떨어진 손은 수분이 빠져 장난감처럼 조그맣게 오므라들어 있었고 군화와 다리만 따로 놀고 있는 등 현장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사고 현장은 즉시 민간인들의 접근이 엄격히 통제된 채 군인과 방위병들에 의해 시신 수습과 정리가 이뤄졌다.
20여일에 걸쳐 현장이 정비되자 기체는 폭파됐다.
한편 사고 다음날인 6일 국방부는 “지난 5일 오후 3시께 제주도지역에서 대침투작전 훈련중이던 C123군용수송기 1대가 악천후로 한라산 정상 부근에 추락,이 수송기에 타고 있던 육군과 공군 장병 53명 전원이 순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짤막하게 공식 발표했다.
박종식 국방부 대변인은 “이 수송기는 이날 육군 7787부대 장병 47명과 공군 5672부대 소속 승무원 6명등 모두 53명을 태우고 훈련지역인 제주해안에 도착,착륙을 시도하던 중 갑자기 강한 북서풍에 의한 이상기류에 휘말려 한라산 정상 북쪽 3.7㎞지점에 추락했다”고 덧붙였다.
이날 대변인을 통한 국방부 발표에서는 대통령 경호에 관한 언급은 전연 없었으며 훈련중 사고였다는 점만 강조됐다.
한편 전 대통령은 사고 소식에도 예정대로 6일 오전 전용기편으로 제주공항에 도착해 낮 12시에 열린 활주로 준공식에 참석한 후 제주 순시에 나섰다.
전 대통령은 이틀간의 제주 체류기간에 군용기 추락에 대해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다가 이도하기 전에야 제주해역사에 마련된 순직 장병들의 빈소에 들려 고인들의 넋을 위로했다.
(군용기 사고 이후)
군 수송기가 추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 지점에는 추락 지점을 알리는 원점비가 세워졌다.
또 그해 5월15일에는 박희도 당시 특전사령관과 군 관계자,유족들이 참가한 가운데 관음사 등반로 입구에 충혼비가 세워져 불의의 사고로 산화한
젊은 넋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가 유족들의 아픔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사고 발생후 내도한 유족들은 수송기가 추락한 현장을 찾아 가족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울부짖었다.
유족들은 해마다 현장을 찾아 불에 탔던 흙과 잿더미를 뒤지며 아픔을 달랬다.
이같은 과정에서 장병들이 소지했던 시계나 반지 등 쇠붙이가 발견되기도 해 유족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다시 겪어야 했다.
유족들은 유품이 발견될 때마다 ‘이것은 누구 것이다’며 서로 확인하고 마치 숨진 가족을 보듯 애지중지 품에 품고 자리를 떴다.
이처럼 유족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유족들은 명확한 진상 규명을 요구했지만 언론과 일반인들의 접근은 철저히 통제됐다.
그러다가 6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인 1988년 10월12일 제주도에 대한 국회 건설위원회의 국정감사 도중 김운환 의원(민주)이 공식 제기하면서 이 문제가 새롭게 부각됐다.
김 의원은 “기내에 타고 있던 정예 군인들은 군사 목적이 아니라 특정인에게 지나친 경호를 하기 위해 오다가 죽은 것이 아니냐”며 “누구를 위해 죽었는지 분명한 규명이 있어야만 원혼을 달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1989년 4월27일 제주일보(제주신문)는 사고 현장을 생생히 담은 사진을 처음으로 공개하면서 사고의 전말을 보도했다.
그해 9월17일 관음사 등반로 입구 충혼비 앞에서는 순직한 대통령 경호장병 53위에 대한 한가위 위령제 및 추모제가 순직 장병의 부모,미망인 등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장대비가 내리는 가운데 특전사 2.5유족친목회가 주최한 이날 추모제에서 유족들은 “대통령 경호는 경찰이 담당한다는 법을 초월,권력 남용으로 군인을 강제 동원하고 도저히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는 날씨에 강제로 비행기를 이륙시켜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또 대통령 경호임무로 행해진 ‘봉황새작전’이 사고 다음날 동계특별훈련(대간첩 침투작전)으로 명칭이 변경돼 서류가 조작됐다고 주장하며 관련자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