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엔] 공 줍던 추신수, '아, 허리 통증'

출처 뉴스엔 | 입력 2016.07.17 04:29

기사 내용

[시카고(미국)=뉴스엔 조미예 특파원]

7월 17일(한국시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리글리 필드에서 ‘2016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와 텍사스 레인저스의 경기가 열렸다.

경기가 열리기 전, 타격 훈련을 마친 추신수가 공을 줍고 있다.

한편 허리 통증으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추신수는 하루 전날 촬영한 MRI에서 이상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고, 휴식과 물리치료를 병행하며 상황을 지켜볼 예정이다. 경기에 앞서 추신수는 캐치볼을 제외한, 스트레칭과 외야 수비, 그리고 타격 훈련을 소화했다.

뉴스엔 조미예 mi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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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자전거 절반 중국·대만서 생산… 대만 1·2위 업체가 미국 1·2위 브랜드 만들어

박정현 조선비즈 기자  | 2016/07/09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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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트(Giant), 트렉(Trek), 스페셜라이즈드(Specialized)는 고급 자전거 '빅3' 브랜드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 고급 브랜드로는 이탈리아 비안키(Bianchi), 피나렐로(Pinarello), 콜냐고(Colnago) 등이 있다. 유럽 업체는 미국 브랜드에 비해선 소비자 가격이 더 비싼 편이다. 미국과 유럽 고급 자전거 브랜드들은 중국이나 대만에 있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경우가 많다.

자전거 업계에선 전 세계 중·고가 자전거는 절반 이상 중국과 대만에서 생산된다고 보고 있다.

 

접는 자전거 브롬턴(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순으로), 트렉의 '암스트롱 자전거', 비안키, 스페셜라이즈드. /Weekly BIZ

하이엔드 자전거 3강 자이언트·트렉·스페셜라이즈드

미 위스콘신주에 본사를 둔 트렉은 연간 글로벌 매출이 미화 10억달러(약 1조1600억원)로, 매출 기준 미국 1위 업체다. 트렉은 사이클 선수인 랜스 암스트롱을 오랫동안 후원해 '암스트롱 자전거'로 유명세를 탔다. 암스트롱은 세계적인 자전거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에서 사상 최초로 7연패(1999~2005년)를 달성했지만, 약물 복용으로 수상 실적이 모두 박탈됐다.

스페셜라이즈드는 제품 평균 단가가 200만~300만원대인 고가 미국 브랜드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스페셜라이즈드의 초고성능 제품은 1500만원대에 달해 자전거 업계 '벤츠'라고 불린다. 2014년 이 회사가 후원하는 이탈리아 사이클 선수 벤센초 니발리가 투르 드 프랑스 종합 우승을 하면서 브랜드 인지도가 더 높아졌다. 스페셜라이즈드의 지분 35%를 가진 대만 업체 메리다(Merida)가 스페셜라이즈드의 자전거 대부분을 만든다. 메리다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도 하고 '메리다' 브랜드로도 자전거를 만든다. 스페셜라이즈드는 연간 미화 8억달러(약 9300억원), 메리다는 280억6000만 대만달러(약 1조원) 매출을 낸다.

 

영화 E.T.의 대표적인 장면. /조선일보 DB

E.T.가 탔던 것은 묘기 자전거

고급 자전거 시장은 크게 사이클링 자전거(로드바이크)와 산악자전거(MTB)로 나눌 수 있다. 사이클링 자전거는 속도와 성능을 즐기기 위해 가볍고 얇은 반면, 산악자전거는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게 바퀴가 두껍고 튼튼한 게 특징이다. 주요 자전거 업체들이 기술 개발에 공을 들이는 것도 이 두 분야다.

이 외에 묘기나 극한 스포츠를 위한 BMX(바이시클 모터크로스), 변속이나 브레이크가 없는 픽시(fixie) 자전거, 좁은 장소에 보관할 수 있는 접이식(폴딩) 자전거, 20인치 이하 바퀴를 장착한 소형 자전거인 미니벨로 등은 주류는 아니지만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돼 있다. 픽시는 치넬리(Cinelli), 접이식 자전거는 영국 브롬턴(Brompton), 버디(Birdy) 등이 유명하다.

BMX는 울퉁불퉁한 흙길을 달리면서 공중 회전을 하는 등 묘기를 부리는 자전거를 말한다. 미국 슈윈이 1960년대 출시한 '스팅레이'가 미국서 전국적 인기를 끌면서 BMX라는 스포츠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1970~80년대 유럽에선 스피드를 즐기는 사이클링이 많이 발달했다면 미국에선 BMX가 고급 스포츠로 인식됐다. BMX는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영화 'E.T.'(1982년작)에서 주인공이 E.T.를 태우고 공중에 붕 뜨는 자전거가 어린이용 BMX다.

이 손은 흉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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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가락은 흉기다. 45년이 넘게 단련한 손가락이다. 마음을 다스리고 경계하지 못하면 큰일이 벌어진다가라테 나수권법류 관장 임상진((48ㆍ인천시 학익동·가라테 9)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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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ㆍ수박ㆍ멜론ㆍ 파인애플 등 두꺼운 껍질의 견과류가 이 손가락 하나에 격파되거나 구멍이 뚫린다. 손가락 격파술이다. 오른손 검지 손가락 하나면 직경 10mm, 길이 15cm인 철근나사를 2초면 구부릴 수 있다. 손목에서 중지손가락까지 길이가 20cm, 중지는 9cm, 중지 두께 2.8cm. 가운데 손가락 하나만으로 물구나무를 선다. 물구나무를 서기 위해 손가락에 파우더를 바르는 순간 고도의 긴장감이 몰려온다물구나무를 서는 동작은 온몸의 피가 역류해 손가락 끝으로 모아진다. 손가락에는 빨간 피가 몰려 있다. 이를 꽉 깨물어 기를 모으기 때문에 잇몸에서 피가 터질 것 같다. 손가락?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다. "함부로 따라하지 마라. 겹겹의 세월을 훈련으로 단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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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에게 지기 싫었다?

 

네 살부터 운동을 했다. 아버지가 오랜시간 일본에 있어 어린시절부터 일본을 오가며 가라데를 익혔다스무살 때 본격적으로 가라테를 배우기 위해 일본에 건너갔다무도인으로서 세계에 도전하고 싶었다.
스물두 살 때부터 손가락 단련을 했다. 함께 운동하는 일본 동료들에게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기 싫은 마음도 생겼다세 손가락으로 팔굽혀펴기를 하자 일본인들은 "손가락 부러진다. 바보 같은 짓"이라며 조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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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라는 긍지와 자부심 때문에 오기가 생겼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더 강인한 정신력이 있어야 함을 잘 안다. 10년동안 하루에 1400~1500번 정도 모래 찌르기, 콩 속 찌르기 등의 훈련으로 손을 단련시켰다어느 날 수박을 검지 손가락으로 찔러보니 수박이 '쩌억' 하고 갈라졌다. 스피드와 파괴력에 스스로 놀랐다. 세 손가락이 어느 정도 단련되자 두 손가락으로 팔굽혀펴기를 했다. 반복 훈련을 통해 나도 모르게 기술이 터득되는 것을 느꼈다.
 "
양 손가락 검지와 중지만으로 하는 팔굽혀펴기는 기본 180회 정도다. 양손 검지로만 앉은 채로 몸을 들어올리는 것도 쉬운 죽 먹기다."

"지난 1998년 한 방송사 기인열전에 출연, 중지로 물구나무를 서는 시범을 보여 평가원들로부터 200점 만점에 199점을 기록했다. 그 프로(1997.3~19989)가 폐지 될 때까지 기록은 깨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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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마다 굳은살이 박혔다?


이 손은 다른 여느 사람들처럼 아름답지 않다. 울퉁불퉁하다. 여러 번 꿰매기도 했다. 손가락 손톱 밑이 찢어지는 아픔에 비하면 차라리 골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손가락이 부러지면 다른 손가락을 단련시켰다. 처음 물구나무를 시도 할때는 잇몸이 빠질 것 같았다. 허리도 아프고, 검지ㆍ중지 손가락은 통통부었다. 굳은살이 박힌 정권도 찢어지는 등 많은 아픔이 있었지만 참았다. 반복 훈련으로 손가락 지문이 있는 끝 부분은 만져도 들어가지 않는다. '철 손'이다. 만져본 이들은 '흉기'라고 부른다하지만 나를 다스려야 한다. 1인자가 되겠다는 목표가 있다이 분야에서 세계최고가 되기 위해서 터득하고 견뎌야 할 과정이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다.
그렇다고 내가 손가락 단련만 하는 걸로 알면 좀 곤란하다. 현재 국내 가라테 사범ㆍ관장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킨다. 최고의 파이터 최배달(본명ㆍ최영의) 선배와 표도르와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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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없는 무도철학
 
현재 66(20)의 개인 수련실에서 매일 오전 4시 반에 일어나 수련을 한다. 20년 동안 꾸준히 세 손가락으로 1100~1300회 정도 팔굽혀펴기를 한다. 공백 없이 15년 이상 단련을 해야지 어느 한 부분이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알았다. 단련을 위해 사생활도 포기했다. 단란한 가족생활을 꿈꾸었지만 더 많은 수련을 하고 싶다. 밤이 되면 외로워 잠 못 이룰 때가 많지만 수련의 일부라고 치부한다.
나의 무도 철학은 '거짓이 없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많은 훈련을 했다. 내 몸이 할 수 있는 것만 보여주면 된다. 거짓으로 세상을 속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진솔한 마음으로 기술을 터득하면 그 자체가 스승이고 선배로 존경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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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테? 국내 무도계에서 정통성이 없다는 이유로 배척했다하지만 나는 가야할 길이 있다. 정도를 걷는 것. 남이 알아주든 아니든 그것은 이미 경지를 넘어섰다. 반복된 훈련을 통해 터득하는 것이 도이다. 마지막 꿈은 한국에서 가라데의 정통성을 키워보는 것. 하지만 이 길을 혼자 걷자니 너무 외롭다. 옆에서 함께 하는이가 있다면 더 힘이 날 것 같은데… 손가락 격파술이 훈련이 힘들어 누구에게 함께 하자고 권하지 못하겠다. 내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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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컵 하나를 준비한다. 뒤집어 놓은 컵 밑동에는 미끄러지지 않게 페드가 붙혀져 있다. 비장한 눈빛과 긴 호흡. 자세를 바로잡더니 힘찬 기합과 함께 이내 물구나무를 선다. 오른손 중지 손가락 하나를 뒤집어진 컵 밑동에 올린 상태다. 70kg의 무게가 올라갔는 데도 컵이 깨지질 않는다. 그 동작으로 45초를 버텼다. 물구나무를 서고 난 이후에는 연신 거친 숨을 토한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긴장의 연속일까? 담배를 꺼내문다. 그의 손가락은 흉기가 아니라 그의 인생을 지탱해 준 다이아몬드로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임상진 관장이 말하는 가라테

가라테는 중국에서 무술을 하던 이가 일본 오키나와에서 중국 권법인 당수를 가르쳤다. 이후 일본은 자가 중국 당나라를 연상시킨다며 자를 빼자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 1971년 국제용어로 공수도(空手道), 가라테로 바뀌게 됐다. 1970년대까지 국내에서도 당수도라는 명칭을 썼다. 가라테 선수로 잘 알려진 파이터 최배달(본명 최영의)씨가 일본에서 공수도 대회 우승 후 일본 전국을 돌며 도장깨기, 황소와의 싸움 등을 벌여 가라테가 유명해졌다. 가라테는 치고ㆍ차고ㆍ막는 타격계통의 격투술로 형 속에 내포된 기술 중에는 잡고, 꺽고, 던지는 기술이 포함돼 있는 호신술이다. 태권도ㆍ쿵후ㆍ무예타이 등과 함께 동양을 대표하는 입식 격투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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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진 관장 프로필

생년월일:1961 4. 23

체격: 177cm 70kg

가라테입문: 1964 4
특기:한 손가락 물구나무 서기.양쪽 한 손가락을 이용해 앉은 채 몸 들어올리기. 취미:트로트 감상
주량:소주 반 병
좌우명:입산 수도자의 마음으로 수련에 전념하는 것.인간 한계에 도전 하는것.
주요경력:가라테 9. 일본 진키 졸(송도관류 파 가라테 훈련)

             1986년 전일본 가라테 선수권 대회 입상
             1987년 홍콩 무도 선수권대회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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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스물 여섯 살 때부터 검지로 물구나무를 설 수 있었다. 중지 손가락은 안됐다. 일본생활은 서른 두 살까지 했다. 1992 1 30일 한국에 왔다고.

아사히 방송에서 한손가락으로 물구나무서는 것을 보여 주었는데 다들 거짓이라고,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범 보인 것은 서른여덟.가라테 8단이었을때. 방송이 나가고 난 후 종로의 어느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시민들이 자신을 알아봐서 흐뭇 했다고 하네요.

과학적인 운동과 신체단련으로 진실을 보여줄 수 있는데 신체적인 거짓을 보여주는 무도인이 가장 싫다고. 최소 엄지 손가락으로 물구나무서서 팔굽혀펴기 10회 정도는 할 수 있어야 자신의 문화생이 될 수 있다고. 그 정도가 가라테의 의미를 알 수 있다고.도를 닦기 위해서는 자신을 포기할 줄 알고 입산 수도하는 마음으로 훈련에 임해야 된다고 합니다. 담배는 하루 한 갑이 넘는다고 하니 얼마나 긴장하는지 이해가 가네요.

류강석(62ㆍ전 한국가라테도연맹(가칭)총재는 "무도인으로써 손가락 하나로 물구나무서기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고 본다. 평생 운동에만 전념한 무도인으로 끝없이 훈련하고 도전하는 정신은 현 세대가 본 받아야 할 점이다"고 평했습니다.


 

 

 

 

 

열정과 철학, 조직 리더십을 보여준 야신(野神, 야구의 신神) 김성근 감독 명언

좋은 글 2015.07.26 03:30

열정과 철학, 조직 리더십으로 야구의 또 다른 전설을 만들고 있는,

야신(野神, 야구의 신) 김성근 감독 명언

 

 

 

 

 

 

 

 

2015년 개봉한 '파울볼'이란 다큐멘터리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진한 감동과 함께 큰 아쉬움을 남겨 주었다.

적자생존, 우승열패의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무서운 경쟁 사회에서 프로야구도 예외는 아니다.

 

체력이 안 되는 사람, 실력이 부족한 사람, 의지가 박약한 사람, 선택받지 못한 사람, 방출된 사람, 능력을 계발 못 한 사람들이 모인 한마디로 주류에서 소외된 그야말로 세상에서 버림받은 오합지졸의 외인구단 고양 원더스 독립구단이 2011년 창단되었다.

 

 

'파울볼'은 고양 원더스 독립구단 안에서 선수들의 투지와 열정, 그리고 김성근 감독의 리더십이 생생하게 담긴 실화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영화에는 선수와 감독 모두가 하나의 꿈을 꾸며 고된 훈련과 어려움을 견디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배우며 희망의 꿈을 향해 질주하는 불굴의 의지가 담겨 있다.

 

 

70대 중반이 되기까지 야구에 한평생을 바쳐온 인간 김성근, 야구인 김성근이 고양 원더스에서 이루고자 하였던 꿈은 결국 좌절됐다. 13번의 해임도 웃어넘기던 김성근 감독은 야구를 사랑하고 야구를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꿈을 포기하게 해야 하는 현실의 벽 앞에 부딪히며 젊은이들에게 꿈을 이루지 못하게 한 것이 마치 자신의 죄처럼 가슴 아파하며 현실 속에서 나약한 자신의 모습, 서글픈 현실을 생각하며 눈가에 눈물을 고이게 하였다.

 

 

그리 길지 않았던 고양 원더스 시절, 동고동락하였던 야신(野神) 김성근 감독과 코칭스태프, 그리고 선수들. 

감독 한 사람이 꿈은 그냥 꿈으로 끝날 수도 있었겠지만, 감독과 코칭스태프, 고양 원더스 선수들이 같이 꾼 꿈은 차츰 현실이 되었으며 꿈의 구단으로 탈바꿈하는 듯 하였으나 아쉽게도 창단 3년이 된 2014년 고양 원더스는 해체를 선언했다.

  

 

 

 

 

 

 

 

1942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교포 2세로 태어난 김성근 감독은 일본 동아대학교 재학 시절까지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대학을 중퇴하고 60년대 초부터 대한민국 실업야구에서 활동하다 부상 후유증으로 20대 후반의 이른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하여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고등학교 야구팀 감독과 실업야구팀 코치와 감독을 역임하다가 대한민국에 프로야구가 시작된 1982년 OB 베어스 투수 코치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프로야구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OB 베어스,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감독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한화이글스 감독을 맡고 있다. (프로야구 2군 감독 3회)

 

 

 

 

 

 

 

 

대한민국 최고의 야구 감독, 야구의 명장, 야구의 전설 김응룡(1941년생) 감독이 지난 2002년 한국시리즈 기간에 접전을 벌였던 김성근 감독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야구의 신과 같다.'라는 말을 하면서 김성근 감독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야신(野神, 야구의 신)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정치논리로 시작된 대한민국의 프로야구지만 이제는 국민 스포츠가 된 야구에서 야신(野神, 야구의 신)으로 불린 김성근 감독의 발자취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조국(祖國) 대한민국 야구계를 선택한 김성근 감독은 50여 년의 활동 기간에 40여 년의 야구 지도자 생활을 하였다. 

2015년 야신(野神) 김성근 감독은 꼴찌 한화 이글스를 중위권으로 끌어올리는 돌풍의 주역으로 야구 역사의 또 다른 신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고등학교 야구팀, 실업야구팀, 고양 원더스(독립구단)와 7개 프로야구 구단, 그리고 대한민국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야구의 신(神) 김성근 감독의 조직 리더십에는 야구에 대한 그의 열정과 철학, 그리고 선수들과 함께 흘린 땀방울과 꿈을 향한 열정이 다이아몬드 그라운드에 오롯이 스며들어 있다.

 

 

 

 

야신野神 김성근 감독 명언

 

 

 

 

 

 

 

 

 

 

 

 

 

 

 

 

 

[그라운드의 이방인] vs [파울볼], 영화보다 영화같은 제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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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영화볼래?33명이 봤어요 ·0개 댓글
"이게 영화가 될까 싶었죠." ('그라운드의 이방인' 양시철 씨) 

"영화가 완성된 것 자체가 반갑고 고마운 일입니다." ('파울볼' 김성근 야구감독) 

다큐멘터리의 묘미는 여기에 있는 지 모른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이고 되짚기 머쓱한 과거가 다른 누군가에겐 위안과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 덧붙여 다큐 영화는 극 영화와는 차별화된 강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연기상 트로피를 휩쓴 배우가 열연해도 연기는 어디까지나 연기일 뿐. 당사자가 덤덤하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는, 오랜만에 집밥을 먹는 것처럼 소박하지만 따뜻한 감상을 준다. 

프로야구 시즌 시작을 전후해 두 편의 다큐 영화가 등장했다. 잊혀진 재일동포 야구 소년들을 조명한 '그라운드의 이방인'(감독 김명준ㆍ제작 ㈜인디스토리), 김성근 감독과 고양 원더스의 뜨거웠던 3년을 담은 '파울볼'(감독 조정래,김보경ㆍ제작 티피에스컴퍼니)이다. 스크린 속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정말 영화가 되겠느냐며 의아해 한다. 비슷한 의구심을 관객들도 품었을 지 모른다. 다큐멘터리도 야구도, 접근하기 쉬운 장르와 소재는 아닌 탓이다. 물론 영화를 보면 장르와 소재는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에서도 고국에서도 '이방인'일 수 밖에 없는 재일동포들의 애환, 낙오자 딱지를 떼기 위한 선수들의 고군분투는 그 자체로 가슴 먹먹하다. 우여곡절 많았던 제작 과정도 극 영화 이상으로 극적이었다. 

▶"이게 영화가 돼?", '그라운드 이방인'
누적관중 1억 명을 자랑하는 국민 스포츠 프로야구. 한국의 프로야구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까지, 그 과정엔 재일동포 학생 야구단의 숨은 활약이 있었다. 정부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6년, 한국 야구의 발전을 위해 재일동포 야구단을 초청해 경기를 갖기 시작했다. 모국 방문 초청 경기는 거의 40여년 간 이어졌고, 이들의 선진야구 기술과 장비가 자연스럽게 전파됐다. 

재일동포팀의 족적을 대중은 물론, 야구계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재일동포는 관심 밖 대상이거나 친북 혹은 북한 국적, 심지어 '반(半) 쪽바리'일 뿐이었다. 1982년 봉황대기 고교야구 경기에 참여한 재일동포 학생 야구단 역시 고국 동포들의 냉대와 야유에 맞닥뜨렸다. 그럼에도 이들은 조국의 햇빛과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그라운드를 내달렸다. 까까머리 소년들은 어느덧 희끗한 머리의 중년이 되어 카메라 앞에 섰다. 

김명준 감독은 '600여 명의 재일동포 학생 야구인들이 한국 야구사에서 영영 잊혀질 수도 있다'는 말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이들을 찾아나섰다. 제작팀이 최초로 취재를 시작한 건 2010년 5월, 본격적인 촬영 준비에 돌입한 건 2011년 새해를 맞은 뒤였다. 그러던 중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사태가 벌어지면서 촬영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한동안 김명준 감독은 대지진 피해를 입은 조선학교와 재일동포 사회를 돕는 일에 몰두했고, 2012년 8월이 돼서야 '그라운드의 이방인'의 공식적인 첫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재일동포들이 매체 노출을 꺼려한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이 공공연히 알려지면 일본땅에서 싸늘한 시선과 처우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재일동포들은 고국에서도 이방인이지만, 일본에서도 역시 이방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또 한국의 방송과 영화 제작자 등을 사칭해 사기를 당한 동포들의 사례도 있어, 그들에게 신뢰를 심어주는 것 또한 제작팀의 몫이었다. 영화를 찍는다는 말에 반신반의했던 재일동포들은 차츰 경계심을 풀고 묵혀둔 이야기를 털어놨다. 10대 시절 함께 그라운드를 달렸던 동료들과 소주잔을 부딪히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마지막 과제는 이들을 32년 만에 고국의 마운드에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멤버들을 프로야구 시구 무대에 올릴 수 있을 지 확신이 없었다. 시구의 성사 여부를 두고 고심했던 제작진은 '불가능하면 불가능한대로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촬영을 이어갔다. 결국 야구 인맥을 총동원한 제작진의 노력과 한 때 프로야구에서 명성을 떨친 투수 임호균 씨의 도움으로 두산 베어스의 프론트를 움직일 수 있었다. 결국 주인공들은 30여 년 만에 마운드에 다시 섰고, 관중들의 환대에 눈시울을 붉혔다.
▶구단 해체, 전화위복 된 '파울볼' 
오합지졸이 따로 없었다. 구단에서 방출된 선수, 전직 대리운전 기사, 헬스 트레이너 등 다양한 사연과 경력을 지닌 이들은 실력도 체력도 형편 없었다. 고양 원더스의 훈련을 지켜보는 '야신' 김성근 감독의 얼굴은 어두웠다. 


김성근 감독이 내린 처방은 오직 훈련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김성근 표 '지옥의 펑고(수비 연습을 위해 공을 직접 쳐주는 것)'는 고양 원더스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선수들의 온 몸은 파스로 도배를 했고, 손바닥은 물집이 터져 성한 곳이 없었다. 결국 고양 원더스는 창단 3년여 만에 90승25무61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총 31명을 프로구단에 진출시키는 기적 같은 성과도 일궈냈다. 

'파울볼'의 공동연출을 맡은 조정래, 김보경 감독은 2011년 고양 원더스가 창단할 때부터 카메라를 들었다. 심지어 김보경 감독은 김성근 감독이 화장실을 갈 때도 그림자처럼 쫓아다녔다. 구단 해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선수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건, 그들과도 오랜 시간 동고동락한 덕분이었다. '파울볼' 팀은 촬영을 하든 안 하든 선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들보다 늦게 퇴근했다. 김성근 감독도 촬영팀이 익숙해지면서 이들을 원더스 직원처럼 생각하고 그라운드 안으로 불러들였다. 

"원더스 선수들은 진짜 열심히 해요. 누구 하나를 집어 말할 수 없이, '어떻게 저렇게 열심히 할 수 있을까?' '숨도 안 쉬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늘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김보경 감독) 

김성근 감독이 감기몸살 때문에 꼼짝 없이 누워 계시다가도 일어나서 펑고를 계속 치는 모습을 봤어요. 원더스는 처음에는 외인구단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김성근 감독과 혼연일체를 이루면서 외인구단화 됐어요. 모든 구단에서 버렸던 선수들이 한계를 뛰어넘기 시작한 거죠."(조정래 감독) 

2014년 9월 11일, 구단의 갑작스러운 해체 소식에 순조롭던 촬영은 위기를 맞았다. "여기서 끝이구나. 절망적이다." 김보경 감독은 망연자실했다. 애초에 영화는 고양 원더스의 창단 취지와 같은 맥락에서 '패자부활'의 메시지를 담으려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구단 해체라는 변수와 맞닥뜨리면서 영화는 완성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오히려 촬영팀을 일으켜 세운 건 원더스의 선수들이었다. 이들은 동료들을 프로구단으로 먼저 떠나보내고, 구단 해체로 갈 곳까지 잃은 상황에서도 늘 하던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머릿속엔 온갖 상념들이 뒤엉켜있을 지 모르지만, 적어도 두 팔은 공을 던졌고 두 다리는 운동장을 달렸다. 숱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 이들은 "언제든지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파울볼'의 의미를 몸소 체득했던 것이다. 

이혜미 기자/ham@heraldcorp.com 

극진가라데(공수도) 창시자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최영의) 명언

좋은 글 2016.02.27 03:30

무술로 세계를 제패한 한국이 낳은 무도인, 극진가라데(공수도) 창시자,

전설이 된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 (최영의, 大山培達 오오야마 마쓰다츠) 명언

 

 

 

 

 

 

 

 

 

 

 

 

일본의 공수도(가라데)는 오키나와 지방 무인들이 중국 남권을 기반으로 만든 무술로 20세기 초 일본 공수도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나코시 기친에 의해 일본 본토에 전수되었다고 한다. 후나코시 기친은 가라데(공수도)를 가르치는 송도관 공수도(松濤館 空手道)를 만든다.

  

 

 

 

 

 

 

 

 

 

한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무도인으로 전설이 된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최영의)는 일제강점기였던 1923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났다. 최배달(최영의)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조종사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나시 소년 항공학교에 입학하였다.

 

 

 

 

 

 

 

 

 

 

 

최배달은 소년 항공학교 재학 중이던 1939년 일본 송도관 공수도에서 가라데에 입문하여 무도인의 첫발을 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과 일본 패망은 일본 국민뿐 아니라 최배달에게도 어렵고 힘든 시절을 보내게 한다. 

 

그 어려운 과정에서도 최배달은 전일본 가라데 선수권대회를 제패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일본 여인에게 행패를 부리는 미국 군인을 폭행하는 바람에 미군에게 쫓기는 등 최배달의 삶은 극에 몰리게 된다. 

 

 

 

 

 

 

 

 

 

 

최배달은 지바현 남부 기요즈미 산으로 입산하여 약 20개월 동안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가며 피나는 훈련을 한다.

 

에도 막부 시대 일본의 전설적 사무라이 미야모토 무사시의 검술에 대한 내용이 담긴 오륜서를 읽으며 무도인으로서 무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하는 열망은 극진가라데라는 모습으로 태어난다. 50여 마리의 황소와 격투를 벌여 황소 뿔을 꺾어 버리고 그 중 3마리는 즉사할 정도로 바람의 파이터 전설을 만들어 나갔다.

 

 

 

 

 

 

 

 

 

 

최배달(최영의)는 자신의 무예에 온 힘을 다하였다. 자신이 창시한 극진가라데로 이른바 도장 깨기로 일본의 가라데 10대 문파를 모두 격파하고 나서 세계 무술인과의 100여 차례 대결에서 모두 승리하여 무패의 기록으로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파이터가 된다.

 

 

 

 

 

 

 

 

 

 

1953년 최배달은 도쿄에 오야마 도장을 열었고 1957년에야 비로소 극진(極眞)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처음 나오게 된다.

1964년 국제가라데연맹 극진회관을 창설하여 극진가라데를 지구촌으로 전파하여 140여 나라에 천만 명에 육박하는 수련생이 있다고 한다. 최배달은 무도인으로는 드물게 62권의 많은 책을 썼다.

 

 

 

 

 

 

 

 

 

 

최배달은 일본의 전설적인 유도왕이며 유도의 귀신이라 불린 기무라 마사히코의 소개로 유도를 배우며 무술의 기본기를 익히기도 하였다. 기무라 마사히코는 유도를 바탕으로 프로레슬링으로 입문하였고 역도산에게 패배하게 된다. 

 

일본 유도계에는 '기무라 전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후에 기무라 없다.'라는 말이 회자하였는데

기무라 마사히코는 최배달에 대해 "최배달 앞에 최배달 없고, 최배달 뒤에 최배달 없다."라고 하며 최배달(최영의)을 최고의 무도인으로 인정했다.

 

극진가라데 창시자이며 세계 최고의 파이터 최배달은 1994년 향년 72세로 전설의 파이터가 되었다. 

힘들어야 위대해진다 연습이 즐겁다면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근육이 자라려면 긴장과 부담을 통해
근섬유가 찢어져 늘어나야 한다.
기술과 지식이 개발되는 방식도 똑같다.
고통을 헤치고 숙련을 향해 매진하는 사람에게 영광이 있다.
자기 노력의 극한까지 가야한다.
녹초가 될 정도로 기를 쓰지 않는다면
충분히 노력하는 게 아니다.
- 제프 고인스, ‘일의 기술’에서

촌철활인 : 한치의 혀로 사람을 살린다!

“원래 힘든 법이다. 힘들지 않으면 누구나 할 것이다.
힘들어야 위대해진다.”
영화 ‘그들만의 리그’에 나오는 톰 행크스의 명대사입니다.
“인생의 무게는 무거울수록 좋다.
그것으로 인해 사람이 성장할 수 있으니까.”
도쿠가와 이에야스 어록입니다.

두연양행, 반영구적 '마스터 골프 스윙연습기' 선봬

[일간스포츠] 입력 2014.12.12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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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연양행(대표이사 이종우)이 파열되지 않는 골프볼을 국내 처음으로 개발해 제작한 '마스터 골프 스윙연습기'(사진)를 내놓았다.  
  
이 제품은 골프장과 연습장에 가지 않고도 가정이나 사무실, 옥상 등에서 스윙 연습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특히 이 스윙 연습기는 골프 네트와 볼 공급기가 필요 없는 일체형으로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면서 아이언 샷의 스윙 감각을 키울 수 있다. ☞ 맛있게 먹고 미친다이어트 하자  
  
기존 연습기는 볼과 매트가 가벼워 스윙 감각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이번 제품은 볼이 실제 볼과 무게가 같아 평상시의 타구감을 느낄 수 있고 장기간 타적시에도 파열이 안 않는다. 또 볼 표면의 마모 때는 볼의 교체가 가능하기 때문에 반영구적인 제품이다.
  
새로 개발된 볼은 일반 플레이용인 우레탄 재질로 제작돼 임팩트 때 탄력과 유연성을 100% 체감할 수 있다. <사진>에서 처럼 볼을 타격하게 되면 360도 상하로 회전하기 때문에 임팩트 각도에 따라 슬라이스, 훅의 방향까지 확인할 수 있다. 슬라이스 때는 볼이 아웃사이드로 돌고, 훅일 때는 볼이 안쪽으로 회전한다. 스스로 스윙까지 교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 탄수화물 얼만큼 드시나요?  
  
이와 함께 연습기에 매달린 공과 샤프트는 한 세트로 특수한 재질로 개발한 제품이며 탄력성이 유연하여 강력한 임팩트에도 완충효과가 뛰어나다. 스윙매트의 인조잔디는 특수재질로 짜여져 마모성이 거의 없다. 매트 크기는 가로 70cm, 세로 45cm, 높이 2cm, 중량은 12kg이다. 소비자가격은 15만원. (02)766-1890 

최창호 기자 chchoi@joongang.co.kr


아웃도어활동이 뜨고 있는 요즘, 서핑(surfing)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제주도 조천, 감귤 창고를 개조하여 서프보드(surfboard)를 만들고 있다는 서퍼(surfer)의 정보에  
우리는 그를 만나러 갔다.
전형적인 제주도 돌담길을 따라 밭에 둘러싸인 파란지붕.
그곳에서 그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Q.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A. 반갑다. 내 이름은 유경호 (ATOM) 이고 올 해 39살이다.
    직업은 셰이퍼이며 우리나라 1세대 서퍼(surfer)이다.




Q. 프로필이 화려하다. 셰이퍼(shaper)란 직업은 어떤것인가?

A. 그렇다. 나는 대한민국 서핑대회 최다 우승자며, 최다 입상자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서프보드 셰이퍼(shaper)이기도 하다. 
    셰이퍼란 말그대로 서프보드를 만드는 사람이다.
    이 일을 시작한지는 1년이 되었고 구상끝에 올해 작업실을 만들었다. 



Q. 어떻게 서핑(surfing)을 접하게 되었고, 어떻게 셰이퍼(shaper)가 되었는가?

A. 서핑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94년도이고, 서핑보드를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한지는 서핑을 접하는 초창기부터 시작되었다. 5년 정도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오다가 1년 전에 본격적으로 시작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타고 싶은 보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다른 서퍼들의 보드를 수리하고 만드는 셰이퍼가 되었다.


원래는 음악을 전공했다. 고등학교부터 음악활동을 했었고 밴드활동을 했었다.  음악공부를 하고 싶어서 부산 동아대 음대를 가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실용음악과가 없어 클래식 전공을 하게 되었고 부산에서는 락 밴드 활동도 꽤 오래했고 음악스튜디오도 운영을 했었다.



그런데 태풍 매미 때 스튜디오가 날라가 버려서 3개월 만에 접게 되었다. 머리를 좀 식히고 다시 시작을 하려고 하다가 예전에 잠깐 접했던 서핑을 다시 타게 되었다. 태풍 때문에 망했다가 태풍 때문에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특이한 케이스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태풍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태풍 때 파도의 사이즈가 커져 투어를 다니고는 한다.)







Q. 서프보드는 어떤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가?

A. 대형사는 기계로 폼(form)을 깎지만  원래의 서프보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서핑으로 유명한 호주, 하와이, 뉴질랜드, 일본등지에도 수작업을 하는 셰이퍼가 많다.
    쉽게 말해 스티로폼과 같은 재료로 형태를 만든다. 그위에 응집력을 위해 천과같은 재료를 둘러싼다.
    로고(logo)나 그림(painting)은 이 작업 후에 이루어 진다. 그리고 방수와 견고함을 위해 에폭시를 입힌다.
    지느러미 같이 생긴 핀을 끼우면 보드가 완성된다.
    



 

 
Q. 서프보드를 만드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얼마인가?

A. 날씨가 좋고 한 보드에만 매달린다고 가정할 때 4~5일이 걸린다.
   
보통은 쉐이핑 작업, 도색작업, 에폭시 작업 등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한꺼번에 하고 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A. 내가 타는 보드 위주와 주문 들어오는 보드를 만드는데 앞으로는 인명구조용 서핑보드를 만들고 싶다.
   차후에 해양경찰 쪽과 연계하여 인명구조용 서핑보드를 만들어 보급을 하고 싶다. 
   서퍼들은 그동안 서핑을 타면서 많은 인명을 구조해 왔다.
   해수욕장 라인 근처에서 서핑활동을 하기 때문에 해변의 종합상황실보다 물에 빠진 해수욕객을 발견하기 쉽다.
   서퍼 한명한명이 바다에 떠다니는 구조대원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강습용 렌탈 보드가 있는데 일반 보드와 차이점이 있다.
   초보자들이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도록 서핑 문화의 저변확대를 원한다.

   그리고 친환경 보드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다. 보드자체의 재료가 몸에 너무 해로워서 연구를 통해 친환경적인
   보드를  만들고 싶다. 나중에는 서핑보드 쪽 보다는 요트 쪽으로 가고 싶다. 반잠수정 같은 선박을 하고 싶다.


 

 

 

미래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른 스포츠도 마찬가지겠지만) 1세대 선배로서 후배들을 많이 양성하고 싶다. 
도내의 유소년들을 가르치고 싶은 생각도 있다. 그리고 현재 국내의 보드는 전량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지만 수입한 보드보다 퀄리티 높은 보드를 저렴한 가격으로 보급 하고 싶다.
생각보다 보드가 파손율이 높고 비싸서 열심히 보드를 타려는 서퍼들이 부담을 많이 느끼고 과감한 고급기술들을 시도하지 못한다.
 1세대 보더로써의 사명감을 가진 다양한 활동이 앞으로의 나의 활동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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