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법륜대법을 선택했는가?

샤오씨는 중국에서 의대를 나오고 기공과 침술에 관한 석사학위를 받았고 양의와 한의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前 중국기공 연구회 연구원과, 이 연구소 회장을 지냈다. 1985년부터 미국과 유럽에 초대되어 기공과 의학 방면에 관한 강의를 해오고 있다. 그리고 1989년부터 일본 어느 대학으로부터 초청받아 교수생활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의학과 기공등의 분야에서 주요 직위를 지냈다. 샤오씨가 이런 화려한 배경이 있음을 간략하게 말한 이유는 그가 결코 의학과 과학, 기공등의 분야에서 전혀 초보자가 아니며 아주 많은 경험과 연구를 한 것과 그로 인해 미신적이지 않고 맹목적이지 않으며, 샤오씨는 그 누구보다도 분석적인 시야로 기공과 인체 과학을 본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리고자 함이다.

나의 조사

1993년 저는 여러 종류의 기공을 연구하기 위해 일본을 떠났습니다. 북경의 한 공원에서 아주 아름다운 음악에 이끌려 가보니, 약 12명 정도의 사람이 연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연공은 제가 전에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놀라게 한 것은 서서 연공하는 공법 4개 중 3개의 자세는 손바닦이 어깨보다 높은 위치에서 하는 것입니다. 제가 기공에 관한 전문가이기 때문에 아는 일인데, 전통적 기공의 공법들은 처음부터 손의 위치가 낮거나 중간정도 높이부터 연공을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타 어느 공법의 기공들 중에서 연공인이 연공을 언제 시작했던지와 관계없이 또는 연공인이 고혈압이 있던지와 상관이 없이 처음부터 높은 위치에서 연공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상례적인 치병기공(병을 치유하는 것이 목적인 기공)에서 본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높은 위치에서 연공을 한다면 고혈압을 발생시킬 수 있고 고혈압 환자에게는 아주 위험한 상황을 초래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법륜공 연공인과의 대화에서 전에 고혈압이 있던 환자를 포함, 저는 이 공법을 연마함이 고혈압에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뿐 더러 고혈압 환자들은 연공후 혈압이 내려갔고 저혈압 환자는 혈압이 정상 상태로 올라 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현상은 전통적인 기공 이론과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표면적으로 본 것이지만 이 기공은 건강증진 차원의 일반 기공과 다름을 알겠더군요. 이 기공은 아주 특별하고도 심오한 것 같았어요. 그리고 나중에 제가 법륜공 수련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각 수련인의 복부에는 법륜이 하나씩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법륜은 다른 공간에서 존재하고 그것은 항상 돌고 있으며 이 법이 연공인을 수련시킨다는 것 입니다. 연공인은 연공을 함으로써 법륜을 가지하고 수련과정의 모든 것은 기제의 모두가 자동적이라고 했습니다.

제 관찰이 계속 되면서 더욱 놀란 것은 제5조 공법을 할 때 모든 수련인은 완전 가부좌를 해야함을 요구하고 그들이 견딜 수 있는 한 계속 그 자세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타 모든 공법에서는 반드시 수련인의 어느 정도 연공한후 고층차에 오른 다음에야 가부좌 연공을 하게 되어있고 또한 가부좌란 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대부분에 사람들은 집에서 하며 남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습니다. 아주 광범위하게 가부좌 연공을 대중에게 홍보하고 또 소위 비밀중의 비밀에 속하는 수인(손으로 동작을 하는 것)을 하는 것은 거의 볼 수 없으며 혹은 들어 보지도 못했습니다. 겉으로 보고 판단한 것에 따르면 이 공법은 기타 건강 향상 공법과는 다른 고층차에서 연공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관찰자 입장에서 내린결론이고 그후 책에서 읽은것에 의하면 이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이 한조의 연공 방법은 고층차의 수련법이고, 과거에 나 혼자 수련할때 했던 것이며 이것을 아무런 교정없이 내놓은 것이다."

1993년 8월 27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축하할 날입니다. 제가 바로 제 13회 법륜공 수련반에서 강의를 듣고 수련을 시작하게 된 날입니다.

인체공능에 관한 중국에서의 연구

나는 과거에 중국과학 기술계에서 실행되었던 인체 공능에 관한 연구를 했었습니다. 그 당시 인민일보에서는 한 논설위원의 "인체 공능 부인" 의 기사를 싣곤 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문학 과학계의 사람들도 기공계에서 말하는 인체 공능을 비과학 ,무지한 미신이라고 몰아부치는 기사를 써서 지방과 국가에서 발행되는 신문, 잡지등에 실었습니다. 만장일치로 사회적인 기조가 기공을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분위기였습니다. 그 결과 기공을 연구 하러온 많은 과학자들은 무서워서 도망쳐버리고 정신이 말짱한 과학자와 진지한 과학자만이 계속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 당시 가장 유명한 과학자인 관수샌씨의 후원 아래, 전국의 공능이 있는 기공사를 불러 모았습니다. 과학계의 물리학 연구소, 생 물리학 연구소, 고 에너지 물리 연구소, 그리고 1129국민 보안청의 연구원들이 모두 힘을 합해 많은 종류의 하이테크 기계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미 광선 비디오 카메라(Micro beam video camera), 반응 탐지기, 뇌 전자경, 등등을 이용하여 인체 공능, 천안통을 이용한 사물 투시력, 요시 공능, 공간 장애물을 뚫고 물체를 움직일 수 있는 능력들을 실험 했습니다. 우리는 이 연구를 통하여 현재 인간이 살고 있는 이 공간 외에도 또다른 공간이 존재함을 밝혀냈습니다. 중국 최고위층 과학계의 인체연구실험 결과, 다른 공간의 존재를 확실히 재 확인 했고 그 공간들은 당시 "숨겨진 상태(Hidden State)" 또는 "장의 상태(Field State)" 라고 불리워 졌습니다.

이후 국가안보과학청과 산업 위원회의 지도 아래, 또 하나의 실험에 성공 했는데 그것은 어떤 공능을 에너지 영향 아래, 하이테크 카메라를 이용해서 알약이 약병의 공간 장벽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감지해 냈습니다. 이런 일년의 성공적인 실험 결과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책회의는 인체 과학과 기공에 대한 "Three No" 정책을 책정했는데, 즉, 기공을 장려하지 말 것, 비판하지 말 것, 논쟁하지 말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Three No" 정책에도 불구하고 1996년 중국의 일부 언론은 공개적으로 법륜공을 공격했습니다. 그것은 나라의 정책을 위반한 것이고, 그 언론사 중에는 광명 일보도 속했습니다. 결과 사태는 급발전해서 공안당국이 법륜공 연공인을 체포하고, 4월 25일에 종난해 상소 사건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최근 중국 정부의 깃발아래 진행되고 있는 반 법륜공 캠페인에는 소위 전문가니 학자니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협애한 인체 과학에 대한 지식과 추측을 가지고 자신들이 모르는 현상을 성급하게 부정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도 모르는 것을 가지고 결론을 짓는 그들의 태도야 말로 비 과학적인 것입니다. 심지어는 실험 과학의 관점에서도 우리가 현재 이해 할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무책임하게 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법륜공은 비밀중의 비밀을 드러냈다.

법륜대법은 성명쌍수의 수련법이고, 이것은 불체의 수련이다. 전법륜 책의 "현관설위" 강의 부분에서 이 대사님은 불체수련의 과정 하나하나를 똑똑하게 밝히셨다. 그리고 비밀중 비밀에 속하는 "현관"에 대해서도 명백히 말씀하셨다. 나는 중국한의 과학연구소에서 단경과 도장 연구를 전공 했고, 나의 석사학위 논문 제목은 "고대 연구 자료를 통한 중국 도가(道家)기공에서의 내단(內丹) 연구" 였다. 도장(道藏) 하나에 관해서만도 도서관은 장장 5185권의 책이 있었고 모든 책을 뒤지고 뒤져도 현관설위가 무었인지 얼떨떨하게 만들어 놔서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고대로부터 수련계의 비밀중의 비밀을 전법륜 책에서 완전히 밝혀 놓으셨다.




      삶의 향기 가득한 곳에서-



      그윽한 삶의 향기 소중한 인연은
      언제나 흐르는 강물처럼 변함없는
      모습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맑고 순수한 인연으로


      마음 나눌수 있기를 소망하며...
      찌든 삶의 여정에 지치고 힘이들 때
      배려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사랑과 정이 넘치는 우리들에 이야기로
      우리 마음에 남겨지길 나는 소망하고 바랍니다.


      언제나 좋은생각 푸른 마음으로
      아픈 삶을 함께하고 글이나 꼬리로 배려하고
      위로 받으면서 맑고 향기로운 삶의 향내음
      가득 내마음 깊이 남겨지길 소망합니다


      둘이 아닌 하나의 마음으로
      우리 모두 가꾸면서 변치 않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뜻한 정 나누면서
      그윽한 향기 우리 삶의 휴식처에서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의
      인연으로 영원히 남겨지길 소망합니다.


      - 좋은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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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의 생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노자의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 초(楚)나라 고현(苦縣: 지금의 하남 河南 녹읍현 鹿邑縣) 사람으로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공자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노자는 일찍이 주(周)나라 궁정의 하급 관리를 역임하였으며, 후에 주왕조의 부패를 보고 궁정을 떠났다. 노자는 공자와 함께 중국 고대의 위대한 사상가이며, 그의 사상은 후세 사람이 편집한 ≪노자(老子)≫(≪도덕경 道德經≫이라고도 함) 한 권 속에 집중되어 있다. 노자 도가사상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道)"는 "만물의 근원(萬物之宗)"이다.

노자가 창시한 학파를 도가(道家)라고 하는 까닭은 그의 "천도관(天道觀)"에서 유래된 것이다. 노자는 "도(道)"가 "만물의 근원"이라는 근본적인 관점을 제기하였다. 그는 "도"가 세상 만물의 근원인 동시에 주재(主宰)이며, 천지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도"는 형태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만질 수도 없고 소리도 없고 맛도 없다. 그것은 분명하지 않고 혼돈 상태에 있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 만물은 모두 "도"에서 탄생된 것인 동시에 모두 "도"를 따르고 있다. 이러한 "도"의 관념은 노자의 사상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핵심이며 근본이다.

둘째, 갈등 대립하고 상호 변화한다.

노자는 "도(道)"의 관념에서 출발하여 세상 만물은 변화하는 것이며 어떤 사물이든지 모두 갈등 대립과 운동 변화 속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있음과 없음(有無), 어려움과 쉬움(難易), 길고 짧음(長短), 높음과 낮음(高低), 아름다움과 추함(美醜), 앞과 뒤(前後), 굳셈과 부드러움(剛柔), 강함과 약함(强弱), 영예와 치욕(榮辱), 행복과 불행(福禍), 크고 작음(大小), 삶과 죽음(生死), 지혜로움과 어리석음(智愚), 승리와 패배(勝負) 등은 그들 중의 어떠한 한 쌍이든지 모두 서로 대립하면서 변화한다. 만물은 모두 생존과 강대함을 힘써 구하지만, 생존을 구할 때가 실제로는 멸망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지혜를 사용하고 위세를 부리며 투쟁을 하는 것은 원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 때문에 재앙을 입는다. 따라서 노자는 "화는 복의 원인이 되고, 복은 화의 원인이 된다(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고 하였는데, 이는 재앙 속에 행복이 깃들어 있고, 행복 속에 재앙이 깃들어 있다는 말이다. 변증사상은 노자사상 중의 핵심으로 후세 사람들에 대한 계몽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셋째, 무위(無爲)로써 다스리고 자연에 순응한다.

노자는 공자를 비롯한 유가사상가와는 달리 "천도(天道)"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는 과정 속에서 자연현상을 매우 중시하였으며, 그 결과 자연(自然)이 바로 천도(天道)라는 결론을 얻었다. 자연은 바로 자연 그 자체이며 무엇을 위한 것도 아니고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 만물의 발육과 생장(生長)은 모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늘이 비를 내리는 것은 누구의 명령이 없어도 자연현상에 의해 고르게 내리고, 만물의 생장 변화는 누구의 명령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과 같다. 천지만물이 이와 같으니 사람의 행위도 당연히 이러하다. 성인(聖人)이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당연히 하나의 대원칙을 세워야 하고 사사건건 간섭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충심으로 복종하게 된다. 자연의 원칙으로써 사물을 대하는 것이 바로 무위(無爲)이고, 무위(無爲)는 바로 그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것이다. 일편단심 성과를 올리려고만 하면 오히려 성공을 할 수 없고, 무위(無爲)로써 다스려야 비로소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다. 여기에 근거하여 노자는 유가의 "예치(禮治)"도 반대하고 법가(法家)의 "법치(法治)"도 반대하였던 것이다.

넷째, 세상과 다투지 않고 조용히 편안함을 추구한다.

이것은 노자의 처세철학이다. 노자는 대인관계에서 매사에 인내하고 양보하여 현실에 만족해야지,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반드시 이기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모든 사물은 약소할 때에 생기가 왕성하며, 일단 강대해지면 죽음에서 멀지 않게 되고, 포악한 사람은 결국 훌륭한 죽음을 맞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천하에서 가장 부드럽고 약한 것은 물이지만, 물은 굳고 단단한 것 속을 이리저리 뚫고 지나갈 수 있어서 어떠한 힘으로도 그것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약함이 강함을 이길 수 있고 부드러움이 굳셈을 이길 수 있으며, 물의 그러한 특성이 도(道)에 가장 가깝다는 것이다. 사람의 처세도 당연히 이와 같아야 하는데, 비록 무엇이 강한 것인지를 익히 알지만 부드러움에 만족하면서 기꺼이 천하의 계곡을 받아들여야 하고, 비록 무엇이 영예와 영광인지를 익히 알지만 우매함에 만족하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 비록 무엇이 남보다 특출한 것인지를 익히 알지만 비천함에 만족하면서 기꺼이 천하의 산천(山川)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하면 결국은 오히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자신을 낮추어서 오히려 만족할 수 있으며, 자신을 굽혀서 오히려 보전할 수 있고, 자신을 대중의 뒤에 두어서 오히려 대중의 앞에 있을 수 있다. 노자는 이러한 도리에 의거하여 사람들에게 치욕을 참고 분수를 지켜야지 매사에 너무 적극적으로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훈계하였는데, 이는 결국 세상과 다투지 말고 조용히 무위(無爲)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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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철학자·도가(道家)의 창시자. 성 이(李). 자 담(聃). 이름 이(耳).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 고현(苦縣:河南省鹿邑縣) 출생.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周)나라의 수장실사(守藏室史:장서실 관리인)였다.

공자(BC 552~479)가 젊었을 때 뤄양[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한 후 서방(西方)으로 떠났다. 그 도중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上下)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道德經)》(2권)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사상】노자는 도(道)의 개념을 철학사상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이 도는 천지만물뿐만 아니라 상제(上帝)보다도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형상과 소리가 없어서 경험할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無)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지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생성 소멸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가 아니라 유(有)이다.

천지만물과 달리 도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자연(自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간섭·지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위(無爲)하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가 만약 이러한 무위자연을 본받아 백성들을 간섭·지배하지 않고 그들의 자발성에 맡긴다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진다. 노자에 의하면 일체 사물·사건들은 그들 자신과 상반하는 대립자들을 지니고 있다.

유(有)가 있으면 무(無)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다. 이들 대립자들은 서로 전화한다. 화는 복이 되고 흥성한 것은 멸망한다. 이러한 대립전화(對立轉化)의 법칙을 알고 유(柔)를 지키면 강(剛)을 이길 수 있다. 이를 귀유(貴柔)사상이라고 한다.

【전개 노자사상은 열자(列子)와 장자(莊子)에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한(漢)나라 초기에 성행하였던 황노(黃老)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한고조(漢高祖)는 오랜 전란에 시달려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자의 무위자연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동한(東漢) 말엽에 도교를 창도한 장도릉(張道陵)이 노자를 교조(敎祖)로 추존(追尊)하고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을 신도들이 외우고 익혀야 할 경전으로 받들어 노자사상은 도교의 교리가 되었다.

위진시대(魏晉時代)에 하안(何晏)이 도덕론을 짓고 왕필(王弼)이 노자주(老子注)를 저술함으로써 노자사상은 위진 현학의 기본사상이 되었다. 또한 인도에서 들어온 불경을 해석하는 데 노자의 용어와 이론이 활용되어 격의(格義)불교 형성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상고시대 이래의 신선사상이 삼국시대에 이르러 도가사상과 결합, 풍류를 숭상하는 기풍을 조성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재난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과의(科儀)도교가 성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산림(山林)을 찾아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 노자의 도

"천지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기를 등에 지고 양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음양의 두 기가 서로 작용하여 조화로운 기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노자가 주장하고 있는 도란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하는, 우주만물의 근원과 법칙임을 알 수 있다. 도는 기(물질)이면서 리(법칙)이다.

"이름이 없는 것을 만물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머니라고 한다." 여기에서 이름이 없는 것과 이름이 있는 것은 모두 도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도가 만물을 발생한다고 했을 때 도는 혼성된 물의 존재이다. 그래서 "혼돈 가운데 이루어진 무엇이 있으니 그것은 천지에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동시에 도는 만물을 떠나 있는 일종의 절대적 '리'이다.

상도(常道), 즉 영원불변하는 도라 불린다. 영원불변하는 도는 가장 추상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사물을 떠나 있으므로 형상이 없다. 그래서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라 하며,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미(微)라 한다. 이 세 가지는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뒤섞여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도는 어떠한 성질을 가질까?

첫째, 도는 이름이 없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그러한 도(常道)가 아니다.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있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노자는 도를 무한한 것으로 어떠한 규정성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한계가 있는 명칭으로 이름 지을 수 없다.

그렇다면 『논어』에서 발견되고 있는 도란 무엇인가? 노자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공자가 강조한 인과 예는 그들이 지어낸 도일 뿐,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도는 참된 도가 무너졌기 때문에 나타났다고 생각하였다.

"큰 도가 사라지니 인의가 나오고 지혜가 생겨 큰 거짓말이 있게 되었다. 가까운 친척이 서로 화목하지 않자 효도니 사랑이니 하는 말이 생기고, 국가가 혼란하니 충신이 나오게 되었다."

둘째, 도는 공평무사하다. 노자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인격신인 '상제(上帝)'에 대한 관념을 도로 변화시키면서 도의 성질을 객관적인 존재라고 하였다. 도는 인간적인 감정이나 의지가 없고, 인간의 기대나 의지에서 독립하여 존재한다.

"천지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만물을 추구(芻狗)로 여긴다." '추구'는 풀로 만든 강아지인데, 제사 때 만들어 쓰고는 아무데나 버리는 것이다. 이 주장은 도가 인간의 일에 대하여 무정하고 냉담함을 나타내고 있다.

셋째, 도는 허정(虛靜)하다. "도는 텅비어 있으나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 "도는 공허한 것이어서 영원히 충만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도는 또한 고요히 머물러 있다." 만물은 모두 장대하게 생장하지만 최후에는 모두 그것들이 본원인 도로 돌아간다. 이것을 두고 만물이 근원으로 돌아간다라고 하는데 결국 고요히 머물러 있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 노자의 덕

"도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고 인간도 크다. 우주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인간이 그 하나를 차지한다. 인간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덕론이란 만물의 본성을 토론하는 것이다.

노자는 우주의 본원인 도가 만물에 깃들여 만물의 본성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만물의 본성은 곧 도의 덕성이다. 노자가 말한 '덕'은 '자연'이다. 자연이란 '스스로 그러하다', '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도, 욕망도, 행위도 없는 '무위(無爲)라는 뜻이다.

▶ 노자의 윤리론

노자는 최고의 인격을 갖춘 성인은 우주의 본원인 도의 덕성을 체현하고 무위자연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주장한 도덕 원칙은 다음과 같다.

가. 갓난아이와 같이 유약(柔弱)하라.

"덕성을 풍부하게 머금고 있는 자는 마치 처음 태어난 갓난아기와 같다. 갓난아이는 무지하고 무심하므로 독충도 찌르지 않고 맹수도 덤벼들지 않고 사나운 짐승도 발톱을 대지 않는다. 뼈는 연약하고 근육은 부드러우나 꽉 움켜쥔 주먹은 단단하다. 아직 남녀의 성교도 모르는데 고추는 서 있다. 최고로 충만해 있다는 증거이다.

하루 종일 울부짖어도 목이 쉬지 않는다. 자연과의 조화가 최고로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다." "사람은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었을 때는 단단한 것으로 변한다. 초목도 자랄 때에는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었을 때는 마르고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굳세고 강한 것은 죽음에 속하는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에 속하는 무리이다. 따라서 무력이 강하면 오히려 적을 이길 수 없고 , 나무도 억세면 결국 생명을 마치고 만다. 그러니 강하고 큰 것은 결국 아래에 깔리게 마련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로 오르게 마련이다."

가. 돈후하고 질박해야지 경박하거나 겉치레를 꾸며서는 안된다.

"도를 잃은 뒤에 덕이 있게 되고, 덕을 잃은 뒤에 인이 있게 되었으며, 인을 잃은 뒤에 의가 있게 되고, 의를 잃은 뒤에 예가 있게 되었다. 예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 엷어서 나타난 것이니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재앙의 시작이다.

근거도 없이 하는 억측은 도의 겉치레에 지나지 않으니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따라서 대장부는 돈후함으로 처신하지 경박함으로 처신하지 않으며, 소박하고 진실함으로 처신하지 겉치레로 처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박함과 겉치레를 버리고 돈후함과 질박함을 취한다." 따라서 그는 성인이라면 겉으로는 비록 남루한 옷을 결쳤을망정 안으로는 아름다운 옥석을 품은 듯하다고 하였다.

나. 겸허히 아래에 처해야지 교만하거나 우쭐대서는 안된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게 큰 이익을 주면서도 자기를 주장하여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장소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서 도의 본래 모습에 가깝다." "강이나 바닷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낮은 곳에 잘 처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분명하지 못한 것이며, 자기가 식견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총명하지 못한 것이다. 자기를 뽐내는 것은 도리어 공을 이루지 못한 것이며, 스스로 잘난 체하는 것은 도리어 여러 사람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 "귀한 것은 천한 것을 뿌리로 삼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바탕으로 삼는다. 그러니 후왕(侯王)은 스스로를 '외롭고(孤)', '부족하며(寡)', '좋지 못한(不善)' 사람이라 부른다. 이것이 바로 천한 것을 뿌리로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최고의 영예는 도리어 영예가 아니다. 옥같이 귀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돌같이 굳세기를 바라지 않느다." 성인은 언제나 자신을 겸손하게 아래에 처한다고 표시하여 영원히 자신의 겸허한 미덕을 유지하는 것이

다. 사심과 욕망을 줄여야 한다.

"욕심이 많은 것보다 죄악이 큰 것이 없고,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해악이 큰 것이 없으며, 얻겠다는 탐욕보다 죄의 근심이 큰 것은 없다. 만족할 줄 알아 그치는 사람만이 영원히 만족한다." "성인은 사사로이 자신의 것을 쌓아 두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모두 주므로 오히려 자기가 더 갖게 된다.

다른 사람을 위해 모두 주므로 오히려 자기가 더 많게 된다." 노자가 사심이 없음을 사심에 있음에 도달하는 한 가지 수단으로 간주한 것은 아지곧 사심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도덕 원칙은 결코 '아주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는'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있는' 그런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라. 적에게도 덕을 베풀어 주라.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천하가 그와 더불어 다툴 수 없다. ???적에게도 덕을 베풀어 주라. ??? 선한 사람도 그를 선하게 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도 나는 그를 선하게 하니, 이것은 덕이 선하기 때문이요, 신실한 사람도 내가 그를 신실케 하고, 신실치 못한 사람도 내가 그를 신실케 하니 이는 덕이 신실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세상에서 말하는 악이란 '선이 결핌된 상태'를 말하는 것일 뿐이고, 도는 선과 악을 갈라서 악을 박멸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 노자의 생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 보이는 노자의 전기에 의하면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苦縣) 려향(려鄕) 곡인리(曲仁里)사람이다. 성은 이(李)씨이고, 자는 백양(伯陽), 시(諡)를 담(聃)이라 하였으며, 주(周)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史)라는 벼슬을 지냈다. 일찌기 공자가 주나라로 가서 노자에게 예(禮)를 물으려 하였는데, 노자는 '그대는 교기(驕氣)·다욕(多欲)·태색(態色)과 음지(淫志)를 버리라'고 꾸짖었었다.

뒤에 노자는 주나라 왕실이 쇠하는 것을 보고서 서쪽으로 떠나가려 하였으나, 이때 관(關)의 영윤(令尹) 희(喜)라는 사람의 요청으로 도덕(道德)의 뜻을 말하는 오천여언(五千餘言)의 책 상하편(上下篇)을 지어놓고 떠났다.]고 한다. 따라서 옛부터 <노자>는 공자의 선배인 노담(老聃)의 저서라고 믿어져 왔었으나, 최근에 이르러는 노자 자신의 생애와 함께 <노자>의 저자 및 <노자>의 저술연대가 모두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크게 문제되고 있다.


이미 <사기>의 열전에서도 '혹은 말하기를 노래자(老萊子)도 역시 초나라 사람으로 도가의 말을 써서 책 십오편(十五篇)을 지었는데 공자와 같은 때 사람이라고 한다.'하였으나, 장수절(張守節)은 그의 <정의(正義)>에서 '사마천은 노자가 혹은 노래자일 것이라 의심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쓰고 있다.'는 설명을 가하고 있다. 또 <사기> 열전에는 '공자가 죽은 뒤 백이십구년에 주(周)나라의 태사(太史) 담(담)이 진(秦)나라 헌공(獻公)을 뵈었다....혹은 말하기를 담이 곧 노자라고도 하고 혹은 그렇지 않다고도 하는데, 세상에서는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를 아는 이가 없다.

'고도 하였다. 이로서 이미 한대(漢代) 초기에도 노자의 생애에 대하여는 많은 의문이 있었고, <노자>의 저자도 이담(李聃)인지 노래자(老萊子)인지 태사(太史) 담(담)인지 확실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대(唐代) 사마정(司馬貞)은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후한 허신(許愼)의 설이라 하여 '담(聃)이란 귀가 늘어졌다는 뜻으로, 그래서 이름은 이(耳), 자를 담(聃)이라 하였다. 이를 자를 백양(伯陽)으로 알고 있으나 바르지 않은 것이다.'라 설명하고 있어, 노자의 성과 이름을 이이(李耳)라 보는 이도 있었다.


노자라는 인물에 대하여는 청대(淸代)의 최술(崔述) 같은 고증학자(考證學者)들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었다.(<崔東璧遺書>) 이 뒤로 어떤 학자는 <노자>의 저자가 이이(李耳)라고도 하였고, 어떤 이는 노래자(老萊子)라고도 하였으며, 어떤 이는 사실은 태사(太史) 담(담)이 그 작자라고도 하였다.

또 <노자> 작자의 생존연대에 있어서도 그는 바로 공자가 예(禮)에 관해 물으려 하였던 공자의 선배인 노담(老聃)이라 하였고, 어떤 이는 공자보다 후세의 사람이라 하였으며, 심지어 장자보다도 후세의 사람이라 주장한 이도 있었다(錢? <先秦諸子?年>). 모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한가지 근거에 의하여 이처럼 각기 다른 주장을 내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대(漢代)의 사마천(司馬遷)이 이미 <노자>의 확실한 작자를 알 수 없었으니만치 지금 와서 더욱 확실한 단정을 내리기는 곤란한 것이다. 사마천은 <노자>의 작자가 이담인지 노래자인지 또는 태사 담인지 확실히 몰랐지마는, <노자>라는 위대한 저서가 후세에 끼친 사상적인 영향 때문에 애매한대로 그러한 열전을 쓰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자나 장자의 사상이 <무위(無爲)> <무아(無我)>를 크게 내세우고 있어 그것은 결국 <무명(無名)>으로 통하는 것이므로 도가의 인물들이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이름을 들어내려 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작자도 자기를 들어내지 않고 숨어 산 현인(賢人)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사마천의 시대에 이미 노자라는 위대한 사상가가 있었고, 그가 지은 책 <노자>가 있다는 것은 알면서도 그 노자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확실히 알 수 없었던 것은 이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에 와서 <노자>의 작자가 누구이며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 가를 고증하려 든다는 것은 무리한 일임에 클림없다.

이미 미국 학자 R. B. Blakney는 그가 번역한 <노자>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아마도 사실은 노자란 본시 가명(假名)이었을 것이다. <노(老)>란 성이 아니고 다만 형용사로서의 <노>자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저술(著述)의 관습에 의하면 <도덕경>의 작자는 반드시 고인(古人)일 것이라고 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책을 쓸 적에는 반드시 노인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추정(推定)은 고증학적인 입장에서 볼 적에는 근거없는 일이지만, 역사적인 상식에서 볼 때에는 퍽 그럴사한 이론인 듯하다. 노자의 생애나 그와 관계되는 기록은 사마천 이전 것으로는 전혀 믿을만한 게 없다. 따라서 우리는 노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고증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노자가 어떤 사람인지,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산 사람인지 모른다해서 <노자>란 책의 가치나 의의가 줄어들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가의 창시자로서 옛날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노자라는 사상가가 있었는데 그는 무위(無爲)와 자연(自然)을 내세우던 분이라서 그의 생애나 이름같은 것은 제대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었다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인식이 될 줄로 믿는다.

▶ 도가사상

1. 도가사상 형성의 시대적 배경

앞에서 논한 바와 같이 노자의 생존 년대는 불확실하지마는 적어도 그에 의하여 대표되는 도가사상은 춘추시대로부터 전국시대에 걸쳐 형성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주나라 왕조의 세력이 약해져서 각 지방제후의 나라들이 서로 멋대로 다투어 무수한 나라가 생겨났다가 무수히 많은 나라들이 망해간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따라서 이 무렵에는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보려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바로잡을 경륜을 들고나와 자기의 주장을 선전하기에 힘썼다. 후세에 이들을 제자백가라고 부르는데, 거기에는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를 비롯하여 유가·묵가·명가·법가·병가·농가·음양가 등 수많은 유파들이 있었다.


춘추전국시대란 혼란이 극한 시기이기는 하였지만 한편 이처럼 다양한 사상가들이 나와 중국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어지러운 세상에 학문의 꽃이 피어났던 것은 자기의 독특한 경륜을 세상에 널리 알림으로써 출세를 해보려는 개인의 공리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여러나라의 임금들이나 권세가들이 각기 어진 사람들을 자기 밑에 끌어들여 이들을 보호해 줌으로써 자기 세력을 기르려 했었다는 데도 큰 원인이 있었다.

예를 들면 제나라 위왕같은 이는 직하에 송견·윤문·신도·전변·환연·접자 같은 사상가들을 모아놓고 자유로이 학문을 연구하며 서로 토론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귀족으로는 제나라의 재상을 지낸 맹상군이 평소에도 수천명의 식객을 집에서 먹여 길렀었고, 뒤에 그는 이들의 힘을 빌어 여러가지 큰 일을 하였다.


춘추전국시대에 이처럼 수많은 사상가들이 나왔지만 이들의 기본 경향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사회가 혼란하기는 하였지만 그 시대의 봉건제도를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는 이들과 부정적인 입장에서 파악하는 이들이다. 유가와 묵가를 긍정적인 학파들의 대표라 한다며는 도가와 법가는 부정적인 학파들의 대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긍정이나 부정에 있어서도 그 내용이나 성격에 큰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유가가 이미 존재하여 오던 권력의 지배관계를 기초로 하는 봉건제도를 올바른 도덕으로서 다시 바로 잡아보려고 애쓴데 비하여, 묵가들은 일종의 사회계약설로서 봉건지배의 기초를 삼고 그 권력관계를 종교적인 의미의 지배로서 존재케 하려 했었다.

그리고 부정하는 쪽에 있어서도 법가는 인위적인 제도를 강화하여 강력하고 빈틈없는 권력의 지배관계를 집권적 독재정치로 승화시키려 한데 비하여, 도가는 혼란한 세상의 인위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고 무위자연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불행의 요소로부터 해방하여 완전한 자유로운 인간의 경지를 추구하려 했었다.

따라서 노자를 비롯한 이 시대 제자백가들의 사상의 발생과 전개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주나라 봉건제도의 붕괴와 정치사회상의 혼란 및 이들의 관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중국에 있어서의 유가와 도가는 왕조의 흥망성쇠와 사회의 치란과는 거의 표리의 관계를 유지하고 후세에까지도 발전계승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제도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더욱 일체의 인위와 인간들의 가치평가를 부정하는 도가사상이란 결국 어지러운 세상에서 뜻 잃은 지식인들의 도피주의를 대표한다고 볼 수도 있다. <논어>만 보더라도 장저·걸익·접여 같은 수많은 은자들의 언행이 보인다. 이러한 현실에서 뜻을 얻지 못하고 숨어 사는 지식인들의 사상이 심화하여, 도가사상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흔히 도가사상을 비현실적이고 소극적인 것으로 규정해버리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조그만 자기욕구나 지나친 성취 같은데 억매이기 쉬운 인간관계를 초극하고, 거시적인 입장에서 인생과 사회와 자연을 바라보는 방법을 그에게서 배워야 할 줄로 안다.

2.도론 - 도의 본체

노자의 사상은 <도>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의 학파를 도가, 그의 학문을 도학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공자도 <논어>에서 '아침에 도에 관해 들어 알게 된다면 저녁에 죽는다고 하여도 괜찮겠다.'는 등 <도>란 말을 쓰고 있지만, 유가에서 말하는 도와 도가의 도는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다. 유가에서 말하는 <도>란 간단히 말하면 사람이 올바로 살아나가고 세상을 옳게 다스릴 수 있는 올바른 <도리> 또는 <진리> 같은 것이다.

그러나 노자가 말하는 <도>는 우주와 만물의 근원이 되는 것이며, 또 우주와 만물이 존재하고 변화하는 섭리가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도>는 사람의 지각으로서는 인지할 수도 없고, 또 사람의 지혜로서는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어떤 물건이 혼돈히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의 생성보다도 앞서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형체도 없지마는 홀로 존재하여 변화하지 않고 모든 것에 두루 행하여지면서도 위태롭지 않으니, 천하의 모체라 할만한 것이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그것을 <도>라고 이름하였고, 억지로 그것을 대라고 부르기로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노자>의 첫머리에서
'<도>라고 알 수 있는 도라면 그것은 절대 불변하는 참된 <도>는 아니다.'고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또
'<도>라는 것의 성격은 황홀하여 종잡을 수가 없다.'


이처럼 <도>란 사람의 지각으로서는 제대로 인지할 수도 없는 미묘한 것이지만, 그것은 위대하여 세상에는 그것에 포괄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또 미세하여 티끌이며 가는 티럭 속이고 그것이 들어 있지 않은 것도 없다. <한비자> 해로편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말이 <도>를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는 듯하다.


'<도>라는 것은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요 모든 이치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만물은 제각기 이치가 다르지만 <도>는 만물의 이치의 모든 근거가 된다....'
<도>는 우주의 본원이며 만물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곧 우주 만물은 도로 말미암아 도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노자는 만물생성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고, 이는 삼을 낳고, 삼은 만물을 낳았다.'
이는 마치 <역>의 생성과정과도 흡사하다. 여기의 일이 태극이라면 이는 음양, 삼은 오행과도 비슷한 것이다.


앞에서 이미 <도>의 성격은 <황홀한 것>이라 하였는데, <황홀하다>는 것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으며, 변화하면서도 변화하기 전의 아직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언제나 <무>는 도의 묘용을 들어내보이려 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있다. 다시 '천하의 말들은 <유>에서 생겨났고, <유>는 <무>에서 생겨났다.'고도 하였다.

<도>와 <무>의 관계는 미묘하다. <무> 이전에도 <도>는 존재하여 만물의 생성과정에 있어서는 <도>가 <무>를 이루고, <무>가 <유>를 낳았다는 것이다. 도가의 <무>의 철학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무>의 철학은 장자에게서 더욱 발전하여 그는 심지어 <무의 무> <무의 무의 무> 식으로 인간의 지각으로서는 추리하기 힘든 절대무의 경지까지도 추구하게 된다.


도는 만물을 생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물을 존재케 하고 변화시키는 법칙이 되기도 한다. 노자는
'사람은 땅을 법도로 삼고, 땅은 하늘을 법도로 삼고, 하늘은 도를 법도로 삼으며, 도는 자연을 법도로 삼는다.'고도 하였다. 만물은 도에 의하여 존재하고 변화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자연의 상태로서 그렇게 된다. 노자는
'위대한 도는 장마물처럼 왼편 오른편 어디에나 퍼져있다.

만물은 이것에 의하여 생성되고 있지만 그것을 내세워 얘기하지 않으며... 만물을 입혀주고 길러주고 하면서도 그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도>는 안하는 일이 없이 큰 일을 하면서도 아무런 작위도 없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만든다. 따라서 사람들은 <도>의 위대한 작용이나 존재는 의식조차도 못하기 일수이다.

<도>처럼 아무런 작위도 가하지 않고 되어지는 것을 <무위>라하고, 그러한 상태를 <자연>이라 부른다. 도가의 이른바 <무위·자연>의 사상은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노자가
'도는 언제나 <무위>하면서도 하지 않는 일도 없다.'고 말한 것도 이것을 설명한 말이다. 도는 언제나 <무위>하고 또 도는 <자연>을 법도로 삼고 있는 것이다.

3.도론-도의 작용

<도>는 만물을 생성하며 변화시키고 있지만 그 작용에는 도가의 사상을 특징지우는 몇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로 노자는
'되돌아간다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다.'고 하였다. <도>는 만물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킨다. 이때 만물의 발전은 반드시 일정한 정도(곧 극점)에 이르면 다시 자연히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물 중에는 무조건 영원히 발전해나가기만 하는 것이란 있을 수가 없다. 생물들은 태어났다 자라서는 늙고 죽음으로써 다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이러한 변화의 단계를 노자는
'... 그것을 <도>라고 이름지었고, 억지로 그것을 <대>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대>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간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은 멀리 극도에까지 이른다. 멀리 극도에 다다르면 제자리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도>란 위대한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무슨 사물이든 발전하여서는 극점에 이르고, 극점에 이르러는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운동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도>는 언제나 변화하고 있으면서도 영원한 것이다. 그리하여 노자는
'만물이 아울러 생겨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그 근원으로 되돌아감을 본다. 만물이란 번성하고 있지만 제각기 그 근원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고도 하였다.

이것은 도가의 무위와 자연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노자가
'근원으로 되돌아감을 고요함이라 표현한 것인데, 고요하이란 운명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하고, 운명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일정한 법칙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고 설명을 덧붙인 것은 이러한 변화의 법칙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모두가 <무위>한 것이어서 그것을 <고요함>이라 표현한 것이며, 또 그것이 <자연>이기 때문에 그것을 <일정한 법칙>이라 표현한 것이다. <도>의 움직임은 되돌아가기 마련이기 때문에 <무위>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올바른 도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노자에게 있어서는 <유>보다는 <무>가 본원적인 것이며, <유위>보다는 <무위>가 더 소중한 것이다. 모든 변화는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현상의 평가에 있어서는 <움직임>보다는 <고요함>이 중시되고, 빠른 것보다는 느린 것, 앞서는 것보다는 뒤서는 것, 교묘한 것보다는 졸렬한 것, 화려한 것보다는 소박한 것 등을 중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약한 것>에 대한 주장일 것이다. 노자는
'약한 것도 도의 작용이다.'고 말하고 있다. 약한 것이란 물론 강한 것 또는 억센 것의 반대되는 것이다. 본시 도가 황홀한 혼돈상태에 있을 적에는 전혀 아무런 분별도 없었을 것이니, 자연히 강하고 약한 것의 구별도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가 혼돈상태를 벗어난 뒤에는 약하고 강한 것을 비롯한 모든 상대적인 분별이 생겨난 것이다. 강하고 약한 것을 비롯하여 모든 상대적인 분별, 곧 억센 것과 부드러운 것, 긴 것과 짧은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등이 생겨난 뒤로 모든 사람들은 보통 이중의 강한 것·긴 것·좋은 것 같은 적극적인 편의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높이 평가한다. 만약 우주가 완전히 정지상태에 있다면 이러한 사람들의 평가는 옳은 것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와 만물은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하고 있고, 그 변화는 언제나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상대적인 분별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 분별은 언제나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대적인 분별에 따른 평가란 절대적인 것이 될 수가 없다. 우주가 혼돈상태로부터 변화를 시작하였다면 우주는 모두 혼돈상태로 되돌아가기 마련이다. 혼돈상태에는 상대적인 분별이 없다.

따라서 상대적인 분별이란 변화과정 중에 들어나는 일시적인 구별일 따름이다. 언제나 강하다거나 영원히 아름다운 것 같은 것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인 분별 중에서도 강한 것·좋은 것 같은 적극적인 편의 것드은, 약한 것·나쁜 것 같은 소극적인 편의 것들보다 더 들어나고 두드러진 것들이다.

변화과정에 있어서 적극적인 편은 극점에 가까운 것들이고, 소극적인 편의 것들은 변화의 시작에 가까운 것들이다. 노자가
'하늘의 도는 활줄을 잡아당기는거나 같은 것이다. 높은 것은 억누르고, 낮은 것은 끌어올리고, 여유가 있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충해준다.'고 말한 것도 우주의 변화원칙을 설명한 것이다. 특히 이 상대적인 분별 중에서도 적극적으로 두드러지게 들어난 것들은 더욱 쉽게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노자는 이러한 사실을 무척 강조하고 있다.


'굳으면 깨어지고, 날카로우면 무디어진다.'
'군대가 강하면 멸명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이어진다.'
'억센 자들은 제 명에 죽지를 못한다.'
반대로 소숙적인 편의 약한 것·나쁜 것 같은 것은 낮고 숨기어져 있는 지위의 것들이며 언제나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적극적인 편의 것들이 일시적이고 위험한 상태인데 비하여 소극적인 것들이 오히려 안정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른바
'비뚜러진 것은 온전히 되고만다. 구부러진 것은 곧게 되고만다.

움푹한 곳은 가득 차게 되고만다. 낡은 것은 새롭게 되고만다. 적은 것은 더 보태어지고만다. 많은 것은 미혹되어 잃게 되고만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는 강한 것 같은 적극적인 편의 것들은 결국 좋은 것이 되지 못한다.

알고보면 그것은 소극적인 것들보다도 더욱 일시적이고 불안한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노자가 약한 것을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상대적인 분별 중세서 그것이 가장 <무>나 <자연>의 상태에 가까운 것을 대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노자는
'부드럽고 약한 것이 억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고도 하였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고 역설적인 설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노자는 약하면서도 실제로는 강한 본보기로 물을 들기도 하였다.


'천하에는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다. 그러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데 있어서도 그것을 당해내는 것은 없다.'
그리고 더욱 적극적으로 그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상징이고, 억세고 강한 것은 죽음의 상징이라고까지 하였다.
'사람이 살아있을 적에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굳고 강해진다. 만물이나 초목도 살아있을 적에는 부드럽고 갸냘프지만, 죽으면 마르고 뻣뻣해진다.'


약한 것이야말로 생명이 있으며 발전하는 것을 뜻하지만 강한 것은 죽음과 멸망을 뜻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강약에 있어서 노자의 이상은 약한 것보다도 더 나아가 아무런 힘도 없는 <무력>에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도의작용 곧 만물의 변화에 있어서 중시해야 할 것이 강한 것이 아닌 약한 것이라는 말이다.

4.노자의 가치관

앞에서 노자는 상대적인 분별에 있어 약한 것 또는 부드러운 것 같은 소극적인 편의 것을 강한 것 또는 억센 것보다 높히 평가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만물의 변화과정 중에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으로서 상대적인 분별이 나타날 때의 이야기에 불과하ㄷ. 노자는 원칙적으로 모든 상대적인 분별에서 오는 가치관판을 부정한다. 높고 낮은 것, 길고 짧은 것, 강하고 약한 것, 좋고 나쁜 것같은 판단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들은 모두 만물의 변화과정 중에 들어나는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지, 사물의 참된 성질이나 가치가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높고 낮은 곳, 길고 짧은 것, 강하고 약한 것, 좋고 나쁜 것같은 판단은 모두가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그 추상적인 개념에는 이러한 판단을 뒷바침해줄 확실한 기준이 있을 수가 없다.

아무리 높은 것이라도 그것을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낮은 것이 될 수가 있고, 아무리 긴 것이라 하더라도 더 긴 것과 견줄 적에는 짧은 것이 된다. 모든 상대적인 판단은 때와 장소 또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입자에 따라 언제나 변화한다. 그래서 노자는
'네 하는 대답과 어 하는 대답에 차이가 얼마나 있는가? 선한 것과 악한 것의 차이는 얼마나 되는가?'고 말하고 있다.


실상 여러가지 상대적인 분별들을 자세히 따져보면 모든 사물의 상대적인 것들은 아울러 함께 존재하고 서로 상대방에 힘입어 그 존재가 가능한 것이다. 높고 긴 것들은 언제나 높고 긴 한편만이 존재할 수는 없다. 반드시 다른 한편에 낮고 짧은 것이 있기 때문에 높고 긴 것들이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유와 무는 서로를 낳고,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은 서로를 이룩해주며, 긴 것과 짧은 것은 서로 그런 형체를 만들어주고, 높은 것과 낮은 것은 서로 그렇게 만들어주며, 음악과 소리는 서로 조화하여 그렇게 해주고, 앞과 뒤는 서로 위치에 따라 그러헤 보이게 하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 상대적인 분별은 결국 <유>와 <무>에게까지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상대적인 가치를 중히 여기고 이에 따라 행동한다. 이것이 인간들이 불행해지고 부자유스럽게 되는 가장 큰 이유인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행복을 추구하지만 절대적인 행복이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불행이 있기 때문에 행복이 있고, 똑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화에는 복이 깃들여져 있고, 복에는 화가 숨기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모든 근원으로 되돌아간다>로 하였지만, 이 되돌아가는 만물의 변화는 결국 상대적인 것들이 서로 변화함을 뜻하기도 한다. 긴 것은 짧아지게 마련이고, 아름다운 것은 추해지게 마련이다. <높은 것은 억누르고, 낮은 것은 들어올리는 것>이 도의 원리인 것이다. 사애ㄷ적인 분별은 어느 한편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것이나 반드시 그 상대적인 상태로 되돌아가게 마련인 것이다.


또한 노자는 <약한 것>을 존중하였다고 설명했지만, 약한 것 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두가지편 중에서 길고 높고 좋고 강하고 아름다운 것 같은 적극적인 편보다는 짧고 낮고 나쁘고 약하고 추한 것같은 소극적인 편을 더 소중히 여긴다. 그것은 적극적인 편의 것일수록 소극적인 방향으로 반드시 변화해야만 하는 불안하고 일시적인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미 소극적인 편에 있는 것은 언제나 적극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적인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소극적인 편의 궁극이라 할 수 있는 <무>를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 주장하는 것이다. 상대적인 분별에서 오는 가치평가에 있어 일반 사람들은 판단을 크게 그릇되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5.윤리관

노자는 사람의 존재도 우주 속의 자연의 한가지 현상으로서 파악한다.

사람도, 봄에 돋아났다 가을에 서드는 풀이나 산에 솟아있는 바윗돌과 조금도 다름없는 자연의 한 요소라는 기본입장이다. 따라서 사람이 나서 자란 다음 늙고 다시 죽는 것은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도의 변화>소그이 한가지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욕망과 평가를 쫓아 자연변화의 도를 어기고 자기의 행복과 안녕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자기의 존재가 자연의 한가지 현상에 불과하며, 자기의 욕방이나 가치판단이 모두 헛되고 그릇된 것이을 깨닫지 못한다. 여기에서 사회의 혼란이 일어나고 사람들의 불행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자기> 또는 <아집>을 버릴 것을 주장하다. 사람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기>의 입장에서 <아집>을 가지고 남을 대하여 사물을 본다. 따라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들어내려 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노자는
'스스로 들어내고자 하는 자는 밝게 되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들어나지 않고, 스스로 뽑내는 자는 공로가 없게 되며,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우두머리가 되지 못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약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사상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들어내어 남보다 두드러지는 자는 언제고 외부의 공격을 받아 큰 손해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또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려면 남과 다투어서도 안된다. 노자는
'성인의 도는 일을 이루기는 하되 다투지는 않는다'고도 하였다.

남과 다툰다는 것은 자기를 들어내고 자기의 <강함>을 행사하려는 뜻이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에서는 그와 더불어 다툴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고도 하였다. 다툰다는 것은 이기게 되더라도 결국 도의 변화법칙에 따라 자기를 멸망의 길로 이끄는 것이 된다. 그뿐 아니라 이미 다툰다는 자체가 자연의 도를 어기는 자기를 해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남과 다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에 앞서려는 마음까지도 없애버려야 한다. 노자는 사람의 세가지 보배 중의 하나로서
'감히 천하에 앞서는 입장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감히 천하에 앞서는 입장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능한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고도 설명을 붙이고 있다. 뒤에 <장자>에서도 '남들은 앞서려 들지마는 자기는 홀로 뒤서려 든다'고 하였다.

이것은 약한 것을 지키고 남보다 얕고 못하게 처신하는 것을 뜻한다. 앞서고 강하며 들어나는 것같은 것은 도의 변화원칙으로 보아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회오리바람은 하루 아핌 내내 불지를 못하고, 소낙비는 하루 종일 계속하여 내리지 못한다. 누가 이렇게 만드는가?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조차도 오래가게 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에게 잇어서랴!'고 말하고 있다. 여기의 <하늘과 땅>이란 바로 자연을 뜻하며, 그것은 또 도의 변화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노자는 이러한 도의 변화원리를 따른 올바른 사람들의 몸가짐을 가르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므라들게 하려면 반드시 잠시 그것을 불어나게 한다.

약하게 만들려면 반드시 잠시 그것을 강하게 한다. 피폐케 하려면 반드시 잠시 흥성케 한다. 뺏어버리려 한다면 반드시 잠시 더 보태 준다.'
곧 자기가 잘 살고 싶다면 남과 다투지도 말고 남보다 앞서려 들지도 말며, 언제나 약하고 겸손하게 처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그래서 성인은 그의 몸을 뒤로 미루지만 자신이 앞서게 되고, 그의 몸을 소외하지만 자신이 잘 보존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의 사사로움이 이룩될 수가 있는

▶ 도가사상의 발전

1.도가의 사상
춘추시대(BC722-BC467)에 발생한 노자의 사상은 전국시대(BC466-BC221)에 이르러 장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상가들이 나와 그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이른바 도가가 형성되었다. 전국시대 말엽에 이르러 도가사상은 유가사상 다음 가는 가장 유력하고도 보편적인 한 학파로 발전한다.

반고의 <한서> 예문지만 보더라도 도가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삼십가가의 수많은 저술들이 재록되어 있다. 이들의 저서를 읽어보면 이들의 사상에는 상당한 차이가 생기기도 하였으나 원칙적으로는 모두 노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사람의 내심의 수양을 통하여 인간의 안녕과 행복을 얻으려 한다. 그들은 인위적인 일체의 행위를 반대하며, 그러한 인위에 의하여 발전한 모든 문화제도를 무시한다. 이러한 문화제도는 모두가 허망한 실속없는 것들이어서 사람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모두 <무위>함으로써 완전한 <자연>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자연이야말로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상태이며, 바로 <도>의 작용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자연>은 완전하고도 전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사람의 힘이란 도의 변화원리만을 어길 수 있을 뿐이지 <자연>에는 도저히 대항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개인의 몸가짐이나 일을 하는데 있어 언제나 <자연>의 방법에 따를 것을 주장한다. <자연>의 방법에 따른다는 것은 일체의 인위적인 행동을 배격하고 <무위>함을 뜻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무> 또는 <무위>와 <자연>의 개념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도가라면 원칙적으로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사상가들인 것이다.

2. 도교의 발전
그러나 한대에 이르러 노자의 영향아래 도가와는 전혀 다른 도교가 발생한다. 도교는 후한 말엽에 장도릉이란 사람에 의하여 창립되었는데, 도교의 성립에는 노자의 사상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두가지가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다.


첫째 중국에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던 민속신앙이다. 그중에도 여러가지 무술과 점술 및 잡신들의 신앙같은 것이 그 중요한 것들이다. 반고의 <한서> 예문지에는 전부터 전해내려오던 술수로서 천문·역보·오행·시귀·잡점·형상의 여섯가지를 들고 있는데, 이러한 미신적인 술수들이 뒤에는 모두 도교의 영역 안으로 숨어들어오게 된다.


둘째 신선사상과 방사이다. 신선사상은 전국시대에 생겨났다. <사기> 천관서 봉선서 및 <한서> 교사지 등을 보면 연나라와 제나라 지방(지금의 하북·북동 지방) 사람들이 발해에 생겨나는 신기루를 보고서 일종의 신선사상을 발전시켰다 한다. 그들은 발해 속에는 봉래·방장·영주라 불리우는 세개의 신산이 있는데, 거기에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공중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신선들이 살고 있고, 먹으면 늙지도 죽지도 않는 선약들이 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제나라 위왕과 선왕, 연나라 소왕 등이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진시황이 서복으로 하여금 동남동녀 오백명을 거느리고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동해로 나가게 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전한다.
이러한 여건 아래 직업적으로 신선과 선약을 구하는 방사들이 생겨났다.

방사들은 보통사람들보다도 신선의 성격이나 신선의 세계를 잘 알고 있어 신선을 부를 수도 있었으며, 또 여러가지 술법으로 먹으면 죽지않고 신선이 된다는 선단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하였고, 어떤 자는 신체와 마음을 단련하여 오래 살고 신선이 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신선을 좋아하는 여러 임금들의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진시황 대의 서복, 한무제때의 이소군, 공손경 등이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예이다.

이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임금으로 하여금 신선을 구하도록 만들어, 그사이 자기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었다. 이러한 풍습은 위진남북조시대로 이어지면서 더욱 유행하여, 뒤에는 방사들이 여러가지 부록과 주술로서 귀신을 쫓기도 하고 병을 고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선사상과 방삳르의 도술이 직접 도교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언제나 <노자도덕경>을 그들의 이론근거로 삼았다. 다만 여기에 더욱 현묘한 이론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일찌기 도가에서 황제를 끌어들이어 도학을 흔히 <황로지학>이라 부르기도 하였지만, 보통 도교에서는 노자를 교조로 받들어 모신다. 특히 동진때 <포박자>를 지은 갈홍이 나왔고, 북위에는 태무제의 신임을 받은 구겸지 같은 사람들이 나와 도교에 이론적인 체계를 세우는 한편 열심히 이를 선전하여 도교는 중국에서 가장 강대한 종교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뒤에 당나라 때에는 왕실이 노자의 후손으로 자처하면서 노자를 숭상하였으므로 도교는 더욱 성행하였다.


도교에서는 노자를 교조로 받들면서 노자를 신선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노자 아래로도 수많은 신선이 있는데, 이를 사이에는 일정한 계급과 각기 분장하는 직무가 있고 각기 맡고 잇는 지역이 따로 있다. 이것은 마치 이 세상 나라들의 정부조직과 비슷하다. 다만 이들과 노자와의 관계나 이들 신선 사이의 관계는 이야기하는 사람들마다 달라서 종잡기 어렵게 되어있다. 그것은 도교가 기독교와 같은 성실하고 경건한 신앙이 없이, 각기 개인의 이익을 기구하고 자기가 늙어 죽지 않는 신선이 되기를 바라는게 그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교의 활동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종류로 크게 분류할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늙어 주지 않고 오래 사는 신선이 되는 것이고, 둘째는 신선이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권능을 습득하는 것이다. 신선의 권능으로는 귀신들을 쫓겨나 형체를 변화시키는 등 여러가지 초인적인 능력들이 있다. 이러한 능력의 습득을 위하여는 부록·주술·무술·요술 등 여러가지 신묘한 방법을 익힌다.

그리고 신선이 되기 위하여 마음과 몸의 수양을 쌓아야만 하는데, 도교의 수양에는 내단의 수련과 외단의 수련의 두가지가 있다. 내단과 외단의 수련방법은 무척 복잡하고도 신묘하여 간단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내단의 수련이란 자기 신체 내부의 기능들을 수련하여 신선이 되는 것이고, 외단의 수련이란 자기 신체 이외의 물건의 힘을 빌어 신선이 되는 것이다. 곧 먹으면 신선이 된다는 선단을 만드는 연단술이나 선약의 제조 같은 것이 외단의 방법인 것이다.


이상 설명한 바와 같이 <도가>와 <도교>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들은 다같이 노자를 받들기는 하지만 도교에서는 노자를 신선으로 알기만 했지 그의 시오한 철학을 중히 여기지는 않는다. 도교에서도 <노자도덕경>을 경전으로 받들기는 하지만, 이들은 <도덕경>의 사상적인 연구는 하지 않고 도를 닦고 신선술을 구하는 이론적인 근거로 삼을 따름이다.

이러한 도가와 도교의 구별은 근래에까지도 혼동됨이 없이 중국사회에 계승되었다. 따라서 후세까지도 도교는 미신적인 일종의 민간신앙이라 할 수 있고, 도가는 중국사상의 한 유파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을 가리킨다는 구별은 변함없이 지속된 것이다.

▶ 노자의 현대적 의의

노자는 도가(道家)의 창시자이다. 따라서 그의 저서 <노자>는 후세에 와서 <도덕경(道德經)>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도가의 가장 중요한 경전의 하나이다. 그의 뒤를 이어 장자(莊子)라는 사상가가 나와 도학(道學)을 발전시켰으므로, 도학은 흔히 <노장학(老莊學)>이라고도 불리어졌고, 도가에 있어서의 노자와 장자는 마치 유가(儒家)에 있어서의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처럼 여겨지고 있다.


유가사상이 중국의 북방(황하 유역)기질을 대표한 사상이라면, 노자의 도가사상은 남방(장강유역) 기질을 대표한 사상이다. 중국에 있어서의 북방과 남방의 차이는 기후와 자연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학술·문학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두드러진 성격의 차이를 보여준다.

북방은 기후가 차고 자연조건이 거칠며 매말라 사람들은 생존(生存)을 위하여 외부조건들과 투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었던데 비하여, 남방은 기후가 온화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아무런 걱정없이 생활을 영위(營爲)할 수 있었다는데서 생겨난 성격의 차이인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북방 사람들억세고 투쟁적이며 현실적인 데 비하여, 남방 사람들은 부드럽고 평화적이며 낭만적이다.

<중용(中庸)>에서도 공자가 강(强)함을 설명하며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으로써 가르치고 무도(無道)함에 대하여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방의 강함인데, 군자(君子)가 그렇게 처신하는 것이다. 무기와 갑옷 위에 넘어져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것은 북방의 강함인데 강자(强者)가 그렇게 처신하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북방과 남방의 기질적인 차이는 옛부터 뚜렷했던 것같다.


아뭏든 유가사상이 현실적이라면 노자의 도가사상은 초현실적(超現實的)이다. 공자는 어지러운 현실사회를 인의(仁義)와 같은 훌륭한 덕(德)과 올바른 예의제도(禮儀制度)로서 다스려보려고 애썼는데 비하여, 노자는 그와 정반대로 도(道)라는 절대적인 원리를 추구하면서 현실사회가 어지러운 것은 사람들이 그릇된 자기 위주의 가치판단 아래 세상을 그릇된 판단으로서 다스리려들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노자는, 공자를 비롯한 일반 사람들이 훌륭하다 또는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절대적인 훌륭한 것이나 올바른 것이 아니라 하였다.

훌륭한 것은 나쁜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고, 올바른 것은 그릇된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불생에 빠지게 되고 사회적으로는 혼란과 싸움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노자의 무위(無爲)·무지(無知)·무욕(無欲) 등 무(無)의 사상과 자연(自然)의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무>나 <자연>은 <도>의 현상이며, 이것은 사람들을 불행케 하는 모든 가치판단이나 사회적인 구속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뜻한다. 그것은 말을 바꾸면, 자연의 한 구성요소로서의 인간의 인간 본연(本然)으로서의 회복 또는 인간의 절대적인 자유의 추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 있어 한대(漢代) 이후 이천 여년의 역사를 통하여 유교(儒敎)가 그 정치와 사회의 윤리의 바탕이 되어왔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유교는 현실주의적인 학문이어서 언제나 정치적으로는 군주(君主)의 봉건전제(封建專制)를 지나치게 형식화시키고, 사회생활을 판에 박은 듯한 예교(禮敎)로서 무미건조(無味乾燥)하게 만들고 마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막바지에 이르면 언제나 초현실적인 도가사상이 끼어들어 지나친 정치의 형식화나 사회의 예교화를 막아, 정치나 사회를 조화시켜주었다. 그들은 늘 빈큼없는 예의제도를 내세우면서도 도가에서 그것이 참된 인간 본연의 것인가를 반성할 여유를 얻었던 것이다. 예술·문화도 유가의 실용적(實用的)이고 공용적(功用的)인 사상만을 따른다면 결국은 지나치게 형식화하여 발전하지 못하고 고사(枯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도가사상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술이나 문화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추구할 여지를 갖게 되어, 중국의 예술과 문화는 언제나 새로운 생각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의 역대 예술 비평가들이 즐겨 사용한 질박(質樸)이나 고박(古樸)의 표현이 그 일면인 것이다. 개인생활에 있어서도 올바로 살고 큰일을 해보려고 노력해도 뜻대로 안될 때, 도가사상은 그 현실을 초극(超克)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 속에 묻혀 유유히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따라서 중국 역사를 보면 각 왕조의 멸망이나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처럼 혼란했던 시기에는 언제나 도가적인 사상들이 유가사상 이상으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가적인 경향은 중국 문화의 영향이 미쳤던 동양 여러나라에도 영향을 주어, 그것은 일반적으로 대표적인 동양사상의 일면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흔히 동양사상의 소극적(消極的)인 일면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불완전한 가치판단 또는 인류가 지양(止揚)해야 할 동류(同類) 사이의 경쟁 또는 투쟁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그릇된 판단으로 말미암은 불행의 완전 해소(完全解消)를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사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논리(論理)의 필연(必然)>을 추구해온 서양의 과학문명을 흔히 위기(危機)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논리>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며, 더우기 자기의 가치판단을 바탕으로 한 자기 욕망 추구의 경쟁은 지금 인류를 멸망 직전으로까지 몰고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문명이나 현대적인 우리의 가치관에 대하여 냉정한 반성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우리는 와있는 것이다.


노자의 <도>는, 이러한 현대인의 반성을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훌륭한 경전의 하나가 될 줄로 믿는다. 인류의 행복은 <나>의 입장보다도 인간 본연의 추구를 통해서 비로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자>는 현대 세계가 혼란해질수록 더욱 인간의 예지(叡智)가 담긴 위대한 저술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동양인으로서는 올바른 동양인으로서의 자아(自我)를 되찾기 위해서도 꼭 읽어보아야만 할 책이라고 믿는다.

▶ 노자[책]의 전래와 그 연구

<노자>란 책은 이미 전국시대부터 상당히 세상에 알려졌었다. <순자><여씨춘추>에 이미 노자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 보이고, <한비자>에는 해로편 유로편 같은 <노자도덕경>의 중요한 내용을 강설한 부분이 있다. 같은 <한비자> 현학편에서 '세상의 두드러진 학파는 유가와 묵가이다.'고 말하고 있으니, 도가의 세력이 유가나 묵가만은 못했던 것같이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유가와 묵가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며는 세상을 올바로 다스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 곧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비하여, 도가들은 일체의 사람들의 의식적인 작위를 부정하고 물러나 자신을 세상에 들어내지 않으려고 했던 학파이므로, 자연히 유가나 묵가처럼 세상에 두들어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이미 전국시대에 유가나 묵가 못지 않은 중대한 영향을 세상에 미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한비자>는 황제와 노자의 학문에 근본을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거니와, 그 밖에 양주·신도·전변·접자·환연 등이 노자의 사상에 직접 간접으로 양향받고 있고, 심지어 병가인 <손자>에까지도 그의 영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리고 노자와 함께 도가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알려진 장자의 저서 <장자>를 보면 여러 군데에 노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으며, 천하편에서는 노자를 중요한 학파의 하나로 들고 있다. 그뿐 아니라 장자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노자>의 사상을 부연 발전시킨 것이다.

근인 임어당이 영역한 <노자>를 보면 매 장마다 그 아래 <장자>에 보이는 같은 성질의 문장을 참고로 인용하고 있어 <노자>와 <장자>의 관계를 알아보기에 편하다. 이 책에 의하면 <노자>의 거의 모든 장 아래 같은 성질의 <장자>의 말이 인용되고 있어, <노자>의 각 장에 보이는 사상은 거의 모두 <장자>에도 보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한대로 들어와서는 초기에는 황제나 황후 및 고관들 중에 노자의 술법을 좋아하는 이들이 무척 많았다. 고조 때에는 조참이 황노의 술법으로 제나라를 다스리어 명성을 크게 떨친 뒤, 다시 한나라의 상국으로서도 훌륭한 정치를 했었다. 그리고 황제 중에서는 문제와 경제가 도학을 좋아했고, 경제의 어미니 두태후는 열렬한 도학의 옹호자였다.

따라서 한나라 초기 경제시대에 도학은 극성을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노자>의 권위도 이 무렵에는 대단히 높아졌을 것이다. 청대의 초횡도 <초씨필승> 권삼에서 '<노자>는 본시 자서였는데 한나라 경제 때에 비로서 경으로 바뀌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근거로 한 것이 삼국시대 오나라 학자의 말이어서 확실한 증거는 될 수 없는 것이지만, 그와 같은 사실은 역사적인 여건들로서 볼 때 틀림없는 얘기일 것같다.

고조와 혜제시대에는 조참 이외에도 진평과 육가, 문제와 경제시대에는 등장·왕생·전숙·직불의·사마담, 무제때에는 급암과 정당시 등이 모두 도학을 좋아했었다. 따라서 무제 이후로는 유학이 한대정치의 이론적 근거로 확립되었다고 하지마는, 실상 음으로는 도학의 영향도 크게 작용하였고, 유학 자체도 형이상학적인 이론과 사유에 있어 도학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지금 전하는 하상공본 <노자>는 한나라 문제때의 하상에 숨어살던 이가 주를 단 책이라 한다. 그러나 근래, 모두 이것은 유조시대에 씌어진 책이어서 왕필본보다도 오히려 뒤늦게 나온 것이라 보는 학자들이 많다. 다만 전한 초기에 <노자>의 연구가들이 이미 나왔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없는 사실이다.


후한으로 들어와 환제 같은 노자의 존숭자가 나왔던 것도 전한의 앞에서 얘기한 기풍이 은연 중 계승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제는 노자를 고현의 사당에 모셨고, 변소라는 학자에게 명하여 노자를 칭송하는 비명까지 짓게 하였다.
후한의 정치가 어지러워지면서 도학을 좋아하는 경향은 지식인들 간에 더욱 심하여졌고, 위진남북조를 거쳐 당송명청으로 이어지기까지 황실중에서도 노자를 떠받드는 습속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사대부들을 비롯한 일반사회에는 더욱 그 학문이 유행했었다.

중국사회는 겉으로는 유교가 그 윤리의 바탕이 되어 왔지만 사회 생활 속 깊숙한 곳에는 도가의 사상이 크게 퍼졌던 것이다. 그중에도 전한때의 사마담의 도학 존숭을 비롯하여, 한말 오두미도를 내세웠던 장로가 그의 전 신도들에게 <노자> 오천문을 외우게 했던 일, 진나라 시대 죽림칠현이 나와 도가의 사상을 받들어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살았던 일 같은 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사건들이다.


노자의 <도덕경>은 위나라 왕필에 의하여 지금 전해지는 판본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주석이 씌어졌었다. 그리고 앞에 얘기한 것같은 도학의 성행으로 말미암아 그 뒤로는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노자>의 주석서들이 나왔다. 근인 마서륜의 <노자핵고>같은 것은 이 방면 연구의 좋은 참고서라 할 것이다. 마서륜을 비롯한 근래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노자>에는 수많은 판본들이 있지마는 그중의 근본적인 이본은 크게 다음과 같은 네가지라고 할 수 있다.


1.왕필 <노자도덕경주>
2.하상공<도덕진경주>
3.부혁 <교정고본노자>
4.당 현종 <도덕경주>
이중 왕필본과 하상공본에 대하여는 이미 앞에서 설명을 하였다.

특히 하상공본은 한나라 문제때의 은사인 하상공이 쓴 것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왕필본보다도 늦은 육조무렵의 작품인 듯 하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돈황에서 나온 당초본들과 일본에 전해진 고초본들 및 당대의 <도덕경> 경비와 경당이 여러 곳에 남아 있는데, 이들을 종합해 볼 때 하상공본의 체재가 왕필본보다는 고형인 것으로 생각된다. 세째 부혁본은 당나라 초기의 도사 부혁이 왕필본과 하상공본을 비롯한 몇가지 다른 판본의 <도덕경>을 비교하여 심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맨 끝의 당나라 현종주본은 임금 스스로가 <노자도덕경>의 원문에 많은 이동이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을 통일하고 또 그때 왕필본과 하상공본의 두가지 판본에 대한 우열의 문제가 시끄러웠으므로 이것을 귀일시키기 위하여 개원이십년 임금 자신이 쓴 것이라 하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은 왕필본과 하상공본을 기초로 한 주석서이다.

그리고 직례의 역주에는 개원 이십육년 시월에 세운 <개원어주도덕경비>와 <개원어주도덕경당>이 있고, 같은 직례 형대에는 그 다음 해인 개원 이십칠년에 세운 <개원어주도덕경비>와 <개원어주도덕경당>이 전한다. 이미 위진남북조시대부터 당송원명청에 이르는 각 시대마다 수많은 <노자>의 주해서들이 쏟아져 나왔었지만 모두 크게는 이 네가지 주해서의 기본적인 입장을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청대에 고증학이 크게 성행한 뒤로 노자의 생애와 그의 저서인 <노자도덕경>에 대한 고증학적 연구업적이 두드러지게 나왔다는 것도 특기할 일이다.

그중에도 명대 초횡의 <노자익>과 <노자고이>를 비롯해 청대의 위원의 <노자본의>, 손이양의 <노자찰이>, 왕념손의 <노자잡지>, 혜동의 <노자집해>, 필원의 <노자고이>, 유월의 <노자평의>, 노문소의 <노자음의고증>, 유사배의 <노자핵고>, 마기창의 <노자고>, 우성오의 <노자신증>, 나진옥의 <노자고이>, 고형의 <노자정고> 및 그 <보정>, 양수달의 <노자고의>, 전목의 <노자변>, 양가락의 <선진노학문헌고>·<노자년보>·<노자서목>·<의로문헌변정> 등의 저서와 함께 후외려의 <중국고대사회여노자>, 양가락의 <선진노학문헌급노자서전본원류신설>, 장백잠의 <노자인물고 및 노자저술고>, 호적의 <노자기인기서적년대문제> 등이 두들어진 연구 업적들이다.

이 밖에도 수많은 일본학자들의 노자 번역과 노자연구논문들이 있고, 유럽 여러나라에 소도 우수한 번역서와 연구업적이 나와 있다. 근래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으로는 고 김경탁교수의 <노자>(한국자유교육협회 간행)가 가장 우수한 번역서라 할 것이다.

▶ 노자와 공자

노자는 주나라 수도 낙읍에서 몰락해가는 주왕실 서고를 지키는 기록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남아있는 주대의 귀중한 책들을 밤낮으로 접할 수 있었다.

노자는 공자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공자가 익히 알고 있는 예의 규범에 관해서도 노자가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의(葬儀) 때 일식(日食)에 부딫치면 어떻게 하는가? 자식이 죽었을 때 묘소를 가까이 할 것인가 멀리할 것인가? 나라에 상사(喪事)가 있을 때 전쟁을 피할 것이냐 어찌할 것이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죽은 국왕의 위패를 딴 곳으로 옮길 것이냐 그만둘 것이냐? 등등의 문의에 노자는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며 명확하게 답을 주었다.

공자는 낙양에 수일 동안 머물다가 귀로에 올랐다. 노자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전송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듣자하니 사람들이 전송을 할 때,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주고, 돈이 없는 사람은 충고나 격려의 말을 남긴다고 합니다. 나는 돈도 없는 데다 잠시나마 도덕과 학문이 있는 척하고 있으니, 당신께 몇 마디 남기고자 합니다. 첫째, 그대가 옛 성현이라고 우러러보던 이들은 이미 육체와 뼈마저 썩어 버리고 남은 것이라고는 그들이 남긴 헛소리분이외다.

그러니 옛 것을 익히되 새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어 언뜻 봐선 점포가 빈 것 같고 군자는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인다고 했소. 그러니 제발 그 교만과 욕심 그리고 잘난 체하는 병과 잡념을 내버리는 게 좋을 것이오. 이런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오. 내가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외다."

면박을 당한 공자는 노나라에 돌아와 제자들에게 노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새가 잘 날고 물고기가 헤험을 잘 치며 짐승이 잘 달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달리는 놈이라면 그믈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험치는 놈이라면 낚싯줄로 낚을 수 있으며 나는 놈은 화살로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라면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 내가 오늘 만나 본 노자는 마치 용과 같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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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갈등을 해결하는 4가지 키워드 [부부로 사는 특별한 행복]


Want … 바람

부부 갈등은 대부분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상대방이 들어주지 않았을 때

시작된다. 서로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면서 상대에게 바라는

점이 생기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무엇을 왜 원하는지 차분히 이야기하지 않고 “왜 내 마음을 몰라줄까”,

“그 정도는 척척 알아서 해줘야지”, “사람이 정말 이해심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어” 하고 혼자 생각하면서 발생한다. 일단 생각이 앞서서 나가

버리면, 상대를 향한 말도 곱지가 않고 결국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청소를 한 날 저녁, 아내는 ‘오늘같이 내가 힘든 날은 남편이

설거지를 좀 해주겠지’ 하는 기대를 한다. 하지만 남편이 무심히 식탁에서

일어나면 갑자기 화가 나고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런 날 설거지

좀 해주면 좀 좋아? 나는 하루 종일 쓸고 닦고 허리가 빠지는데, 자기는

앉아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고…’ 하는 생각이 들면 이미 아내의 마음은

화가 화를 부르는 상황. 급기야 남편에게 가서 “당신은 왜 설거지 한번 안 해? 내가 이 집 파출부로 보여?”

하며 화를 내게 된다.

그러면 남편은 가만히 잘 있다가 난데없이 왜 이러나 하는 얼굴로 쳐다보는 경우가 대부분. 설거지를 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으면서 갑자기 화를 내는 아내가 당황스럽고 짜증스러워지기도 한다.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아내가 느닷없이 화를 낸 적이 있었다면 아마 남편은 ‘또 시작이구나’ 하면서 아예 아내

말을 무시할 수도 있다. 만약 아내가 “아, 오늘 하루 종일 청소했더니 진짜 힘들다. 오늘은 자기가 설거지

좀 해주면 안돼?” 하고 바라는 바를 명확하게 말했다면 상황은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고, 불평을 하기 전에 부탁을 하는 습관을 들이면 부부 갈등은

크게 줄어든다.

원하는 것을 말할 때 지켜야 하는 수칙


1_직접적인 대화 ∥ 알아주겠거니 기대하지 말고 무엇을 바라는지 먼저 이야기를 한다. 아무도 내

마음을 들여다본 듯이 알아줄 수는 없다.

2_비교하지 않는 말투 ∥ 어려서 부모가 친구와 비교하면 기분이 나빴던 것처럼 배우자가 나를

남과 비교해서 평가하면 누구나 기분이 상한다. “누구네는 주말마다 놀러간다는데, 우리는 맨날

이게 뭐야? 가까운 공원에라도 좀 가요!”보다 “오늘 날씨도 좋은데 공원에 한번 나가요. 당신 팔짱

끼고 좀 걷고 싶네”가 훨씬 효과적이다.

3_부탁의 문장 ∥바라는 점이 있을 땐 명령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부탁을 하는 것이 기본. 남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남편, 혹은 아내와 있을 때는 쉽지 않다. 부탁이 아니라 당연한 요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령과 부탁은 듣는 사람의 자세부터 달라지게 한다. “청소기 좀 돌려요!”와 “나 설거지 하는

동안 청소기 좀 돌려줄래요?”, 어느 쪽이 더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는 명확하다.

4_적당한 수준의 포기 ∥ 같은 주제로 수없이 말하고 다투는 것이 있다면 혹시 내가 무리한 바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먼저 뒤돌아본다. 내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상대가 도저히

바꾸기 어려워 보인다면, 내가 먼저 그 부분은 체념을 하는 것이 좋다.


Doing … 행동

인간 관계는 항상 상대적이다. 부부 갈등도 어느 한 사람의 잘못

때문에 심각한 상황으로 번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갈등이 심각한

상황일수록 혹시 내 행동에는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먼저

고민해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부부 갈등을 줄이는 생활법, 행동

노하우를 알아보자.

1_정기적으로 각자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부부는 일심동체라지만 각각의 인격체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기만의

공간, 자기만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 매일 정신없이 살다 보면 일상의

스트레스와 짜증을 아내, 혹은 남편에게 해소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두 번이라도 짬을 내어 책을 읽고 주변 이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일기를 쓰면서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을 가져보자.

2_불만이 있으면 차라리 싸움을 하고서라도 풀어 버린다

가끔 “불만이 있어도 꾹 참고 산다”는 부부들이 있는데, 그것 또한 어리석은 일이다. 자기 딴에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고 하겠지만,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불만은 얼굴 표정과 은연중에 튀어 나오는 말

한마디로 모두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무조건 참고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냉냉한 말투, 굳어

있는 표정,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보다, 때로는 큰 싸움이 되더라도 서로의

불만을 이야기하고 감정을 털어 버리는 방법이 필요할 때가 있다.

3_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쁘다

부부가 서로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을 때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그 사람이…” 하고 말문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나는 잘못이 없는데 그 사람이 먼저 잘못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부 생활을

하는데 내가 상대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 자체가 상대를 서운하게 하고, 공격적이거나

비뚤어진 행동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남편이 가정을 등한시하고 자꾸 밖으로만 도는 것은 남편이

들어오거나 말거나 아이들 뒤에 매달려 있는 아내의 태도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상대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보여주도록 한다.

4_각자의 취향을 존중한다

서로의 취향에 길들어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자기의 취향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부부가 오붓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 한 사람은 소주가 마시고 싶고 한 사람은 와인을 좋아한다면,

각자 서로가 원하는 술을 마시는 것도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부부가 함께 나누는 분위기와 대화이지,

서로 어떤 술을 마시느냐는 부차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사소한 취향의 문제로 다툼을 만들지 않도록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는 필수이다.


Evaluation … 평가


여기에서 말하는 평가란 상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에 대한

나의 행동을 평가하는 것이다. 배우자에게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스스로 평가하다 보면 갈등의 원인이 어디인지를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도 자연히 깨닫게 된다.

평가의 점검 기준은 비난하기, 탓하기, 불평하기, 잔소리하기,

위협하기, 매수하기 등 배우자와의 관계를 해치는 행동과 경청하기,

수용하기, 신뢰하기, 격려하기, 타협하기 등 상대를 존중하는 행동

으로 나누어 만든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이번 주에는 내가 배우자

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하나씩 헤아리며 체크를 하는 것이다.

부부 갈등이 심한 부부일수록 단정적이고 거칠게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많은데 매주 체크를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말을 조심하게 되고 상대를 긍정적이고

존중하는 방향으로 말투가 바뀐다.


부정적인 행동 평가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예

<아내의 경우>

1 남편이 술을 마시고 휴대 전화를 잃어버렸을 때

“그렇게 술을 먹었는데 핸드폰을 안 잃어버리는 게 이상하지!” 하고 비난한다.
“유실물 센터에 먼저 연락을 해보자. 찾을 수 있을 거야” 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2 남편이 교통 위반 ‘딱지’를 여러 번 떼였을 때

“벌써 얼마야? 아예 차를 팔자. 운전도 못하면서 차만 가지고 다니면 뭘 해?” 하고 위협한다.
“이제 좀 조심해야 할 것 같아. 예상치 않았던 돈이 자꾸 나가니까, 좀 힘드네” 하고 상황을 차분히

설명한다.

3 남편이 휴일에 종일 컴퓨터 게임만 하고 있을 때

“게임이 그렇게 좋으면 게임하고 살지. 난 왜 데리고 와서 이 고생이야?” 하고 날카롭게 공격한다.
“그렇게 모니터 보고 있으면 눈 안 아파? 게임은 이번 판까지만 하고 나와. 내가 밀크 티 맛있게

타줄게. 비디오 빌리러 갈까?” 하고 새로운 할 거리를 함께 찾는다.

<남편의 경우>

1 퇴근하여 집에 들어 왔는제 집안이 지저분할 때

“아니 집이 왜 이렇게 더러워? 당신 하루 종일 집에서 뭐 했어” 하고 불평한다
“당신 오늘 어디 아팠어? 내가 좀 도와 줄까?” 하고 아내의 상황을 살피며 이야기를 듣는다.

2 아내가 동창 모임에 나갔다가 귀가가 늦었을 때

“살림하는 여자가 이 시간까지 뭘 하고 다닌 거야?” 하고 화를 낸다.
“친구들이랑 오랜만에 만나 재미있었어? 그래도 전화는 좀 해주지. 애들이 엄마를 많이 찾더라구”

하며 집에서 걱정하고 있었다고 말해준다.

3 아내가 드라마만 보려고 할 때
“무식하게 드라마만 종일 보냐? 누가 아줌마 아니랄까봐. 뉴스 좀 보자 뉴스 좀!” 하고 면박을 준다.
“9시 뉴스만 보고 얼른 채널 돌리자. 뉴스도 자꾸 보면 재밌어. 자꾸 그러면 진짜 아줌마 된다” 하며

아내가 뉴스를 보도록 설득한다


Plan … 계획


계획하기는 자기가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실천 방법을 계획한다는

의미이다. 전문가들은 내가 즐거우면 부부 갈등은 자연히 사라진다고

말한다. 자기 삶이 윤택한 사람은 남에게도 여유로워지고 부부 관계에

있어서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해 자신감이

없는 사람일수록 부부 관계에 있어서도 불평과 불만이 많다. 결국 문제는

내 안에 있으므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스스로 찾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 즐거워지는 계획은 매우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짜야 한다.

추상적인 계획은 실행 가능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을증을 극복하자”

라는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계획보다는 “집 주위를 20분씩 산책하자”

혹은 “이웃과 만나면 꼭 웃으면서 인사를 하자” 등 구체적이고 바로바로

실천할 수 있는 계획을 짠다.

계획이 구체적이기는 하지만 당장 실천할 수 없다면 그것 또한 실현 가능성이 낮다. “올 겨울에는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 하는 계획은 차일피일 실행을 미루다 한 해가 다 가기 십상이다. “연락을 못한

친구들에게 매일 한 통씩 전화를 건다”는 계획은 당장 지금부터 실천할 수 있으므로 실현 가능성도

더 높다.

스스로 충분히 밝고 즐거워졌다고 생각한다면 배우자에게 좀더 너그러워지는 단계로 넘어간다. 작은

일이지만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내용으로 계획을 짜고 매일 하나씩 실천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부부가 함께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하여 계획을 세워 본다. 공동의 꿈이 생기면 대화도

많아지고 생활에 활력이 넘친다.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실천 세부 계획도 함께 만든다.

1_내가 즐거워 지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운다

①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꼭 상을 다 차리고 먹는다.

② 매일 30분씩 동네를 걸으며 운동을 한다.

③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위해 매일 만나는 이웃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다.

④ 하루에 30분씩 책을 읽는다.

⑤ 아이를 하루 3번씩 꼭 안아 준다.

⑥ 일주일에 2번씩 재활용 가게 자원 봉사를 한다.

2_상대방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계획한다

① 남편이 퇴근할 땐 꼭 나가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② 하루에 한 가지씩 칭찬을 해준다.

③ 하루 한 번, 기분 좋은 문자를 보낸다.

④ 누룽지 탕이나 빵이라도 아침을 꼭 챙긴다.

⑤ 오후에 먹을 수 있는 간식을 챙겨 준다.

3_부부가 공동으로 실현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운다

① 날짜를 정해 맛있는 집을 찾아 다니는 식도락 여행을 떠난다.

② 돈을 차곡차곡 모아 해외 여행을 간다.

③ 둘이 함께 10㎏ 빼기 다이어트를 한다.

④ 주말 농장을 분양 받아 농사를 짓는다.

출처 : 박종열2005년09월06일(화요일) 10:52:14
지혜로운 자의 길


    지혜로운 자의 길


    길은 떠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길을 만들기 이전에는
    모든 공간이 길이었다.
    인간은 길을 만들고 자신들이 만든 길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들이 만든 길이 아니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인간은 하나의 길이다.
    하나의 사물도 하나의 길이다.

    선사들은 묻는다.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서 오십니까.
    그러나 대답할 수 있는 자들은 흔치 않다.

    때로 인간은 자신이 실종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길을 간다.

    인간은 대개 길을 가면서
    동반자가 있기를 소망한다.
    어떤 인간은 동반자의 짐을
    자신이 짊어져야만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어떤 인간은 자신의 짐을
    동반자가 짊어져야만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길을 가는 데 가장 불편한 장애물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장애물이다.

    험난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버리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평탄한 일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

    전자는 갈수록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후자는 갈수록 마음이 옹졸해진다.

    지혜로운 자의 길은 마음 안에 있고,
    어리석은 자의 길은 마음 밖에 있다.

    아무리 길이 많아도 종착지는 하나다.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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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 티 벳 명 상 음 악 / 자 경( 慈 經 )
인간은 달성하기 위해 창조 되었고 성공하기위해 설계 되었으며 위대함의 씨앗을 부여받았다. - 지그 지글러
나의 성공의 정의는 이렇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위협하지 않고 인생에서 자신이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얻을 수 있는 힘' - 앤드류 카네기
성공하기 위해서는 결론을 지을 때처럼 기회들을 빨리 포착하라. - 벤자민 프랭크린

목표에 대한 집중과 확신은 성공의 고속도로 통행권이다

- 100m 경주에서 1등과 2등은 종이 한장의 차이로 결정 된다

아주 사소한 행동의 차이가 위대한 성취가와 평범한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올림픽 육상경기 100m에서 1등과 2등은 종이 한 장 차이로 결정된다. 수백만 달러의 계약금을 받으며 메이저 리그에서 뛰는 3할대 이상의 타자는 2할 6푼 5리의 2류 후보선수보다 얼마나 더 잘하는 것일까? 시즌 내내 일주일에 한두 개를 더 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주요 골프 대회에서의 우승자는 차점자에 비해 대개 한 타 차이로 승리한다. 모든 운동경기에서 이러한 예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어떤 분야든 아주 사소한 점수 차에 의해 승자와 패자가 갈라진다.
성공과 실패도 사실은 아주 미세한 차이에서 갈라진다. 기껏해야 1%도 안 되는 작은 차이로 결정된다.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 과녁이 집채만큼 커보여야 화살이 명중 된다

어떤 명궁(名弓)이 두 제자와 함께 숲에 갔다. 두 제자는 화살을 재어 멀리 있는 과녁을 향해 쏠 준비를 했다. 그때, 스승이 그들을 중단시키고 무엇을 보았는가를 물었다.
첫번째 궁수가 대답했다.
“위로 하늘과 구름이 보이고, 밑으로는 들판과 풀밭이 보입니다. 숲에는 나무들, 참나무, 밤나무, 소나무, 포플러, 단풍나무가 있고, 그 나무의 가지도 보입니다. 잎도 보이고요. 과녁의 색깔 있는 테두리 원도 보입니다. 그리고 또……”
스승은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활을 내려놓아라. 너는 오늘 쏠 준비가 되지 않았느니라”
두번째 궁수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이 보이느냐?”
“과녁 중앙에 있는 점밖에는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그러면 화살을 쏘거라”
화살은 과녁의 정중앙에 바로 꽂혔다.
이 두 제자의 심리상태의 차이는 무엇일까? 포커스이다. 어떤 일에 집중하는 능력을 터득하면, 그 일 자체에 완전히 숙달하게 된다. 사고(思考)에 포커스를 맞추고 당신의 마음을 지배해 보라. 감정을 한 군데로 모으고 마음의 주인이 돼라. 창조적인 관심을 한 군데로 집중하고 상상력의 주인이 돼라. 이 모든 것을 성취하게 되면 가능성의 주인이 되고,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집중력은 연습 하고 연습 하고 또 연습해야 기를 수 있다

열쇠는 바로 마음이다. 정신을 집중하면 믿지 못할 만큼 창조적인 힘이 생긴다. 일단 목표와 욕구에 포커스를 맞추게 되면 도중에 만나는 시행착오, 교훈, 시련, 기쁨, 그 모든 과정을 헤치고 마음이 마치 열추적 미사일처럼 움직여 나가는 걸 보게 된다. 결국 당신이 원하는 정확한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포커스를 유지하는 한 이 상태는 계속된다.
부정적인 생각,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이 들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그럴 때는 그냥 마음속에 생각하고 싶은 것에 정신을 집중하라.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해 보라.

생각하고 싶은 것, 느끼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라. 집중이야말로 의식을 형성하는 비결이다. 열정적으로 사는 데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집중하지 않는 인생은 정말 험난한 길이며, 또 희망 없는 길이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목표와 꿈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곧 절망’이다.
집중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음악가가 카네기 홀에서 연주회를 개최하는 방법과 같다.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라. 궁수에 관한 이야기처럼 오로지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 긍정적인 표현들도 집중력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당신이 가장 하고 싶은 생각을 카드에 적어 보라. 매일 아침과 잠자기 전에 그것을 읽어보라. 긍정적인 생각, 믿음, 태도, 사고 습관을 녹음해서 테이프로 만들어 그것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어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성공을 위해 긍정적인 표현을 글로 써 놓거나 테이프에 담아 두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 방법은 이미 입증된 강력한 성공도구이다.

- 확언을 했으면, 좋든 싫든 스스로의 약속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닭과 돼지가 토론을 하고 있었다. 닭이 말했다.
“나는 매일 달걀을 하나씩 낳을 거야”
“그건 확언이 아니야. 그건 그냥 옆에서 힘들이지 않고 구경하는 거야. ‘나는 나중에 베이컨이 될 거야’라고 하는 것, 그게 바로 확언이야!” 돼지의 말이다.
간단히 말해, 확언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확언은 모든 성공비결의 비밀 성분이다. 일단 무엇인가를 확언하게 되면, 그 일은 일어나게 된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다른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 그것이 확언의 힘이다. 확언의 힘에는 정말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확신한다. 유일한 문제는 무엇을 확신하느냐이다. 목표 달성보다 편안함을 더 추구한다면, 당신은 편안하게 될 것이다. 목표는 달성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사실 너무나 편안함만을 추구한다면 목표 달성은 힘든다. 그럴 때는 편안함이라는 영역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어떤 일을 확언할 때는 끝까지 무조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성취를 하느냐 못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번 주에 신규 고객을 대상으로 10건의 판매 방문을 하기로 했다 하자. 금요일 오후 현재 9명을 만났다면, 나가서 친구하고 골프를 쳐도 될까? 안 된다. 그 시간에 10번째 고객을 만나야 한다. 확언은 약속을 하고 지키는 것이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확언을 했으면, 좋든 싫든 스스로의 약속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 한명의 100% 노력보다 100명의 1% 노력이 더큰 힘을 발휘한다

케네디 대통령이 10년만에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전 국가를 상대로 공언한 것을 기억하는가? 그 당시 미국은 우주 경쟁에서 러시아보다 뒤쳐져 있었다. 하지만 이글 우주선은 예정대로 인류의 위대한 발자국을 달 표면에 딛게 하고야 말았다.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한 리더는 확신으로 무장된 사람이다. 리더는 거저 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무한한 가능성의 미래를 확신하는 사람들을 따르게 마련이니까.
성공이라는 고속도로에서 급행차선이 있다면 그것은 리더십이다. 왜냐하면 타인을 통한 성취가 바로 성공비결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부를 만들어 내는 비결은 앤드류 카네기가 한 다음의 말로 잘 요약할 수 있다.

“나는 내자신의 100%의 노력보다는 100명으로부터 각 1%의 노력을 갖겠다”
왜 그럴까? 지렛대 효과 때문이다. 모든 일을 혼자 하는 것보다는 여러 명으로 이루어진 팀이나 조직을 통하면 수백배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어떤 인간도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한다. 당신이 하면 그들도 하게 된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만약 당신이 약속을 지키고 확언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은 당신이 말하는 대로 행동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완전한 노력을 요구하기 이전에 당신이 먼저 노력해 보라.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듯 자신의 꿈을 향해 노력해 보라. 아이는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한다. 중도 포기나 편안한 은신처 같은 것은 없다. 오로지 걷는 것뿐이다.

기억하라.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그 대가를 받는다. 또 우리가 ‘누구를 알고 있는가’에 대해 대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아는 사람을 통해 스스로 ‘성취하는 일’에 대하여 그 대가를 받는다. 이러한 ‘실천’과 그밖의 중요한 모든 일들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확언을 하면 돌아오는 최대의 보상이 무엇인지 아는가? 끈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끈기는 목적을 이루는 수단, 하나의 도구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보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끈기를 지녀야 할까? 간단히 말해, 성공을 이루고 꿈을 이룰 때까지는 끈기를 가져야 한다.
포커스, 믿음, 태도, 목적은 확언을 필요로 한다. 그러면 강력한 확신을 만들어 내는 열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열망이다.

- 월간 <다이렉트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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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의 윌리엄 제임스 교수는 아무리 사소한 생각이라도 예외 없이 두뇌의 구조를 변화시켜서 흔적을 남긴다고 말한다. 곧 생각이 적건 크건 간에 두뇌의 구조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특정 생각을 반복적으로 계속하여 뇌 조직에 깊이 새겨놓으면, 그 생각에 따라 성격까지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복수에 대해 집착하거나 증오심을 오래도록 품고 있으면, 아버지의 원수는 갚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심술궂고 불쾌한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늘 마음속에 칼을 품고 사는 사람과 마주 앉아 어찌 물 한 잔도 편히 마실 수 있겠는가. 칼날이 닿지 않은 사정권 밖으로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는 더 외로워질 것이고, 인간에 대해 더 깊은 증오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40세 이후의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생각은 뇌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인 얼굴마저도 뜻대로 바꾸어 놓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긍정적인 생각은 무엇보다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우리는 인간의 힘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기적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기적 같이 큰 것이 아닐 지라도 인생의 작은 성취들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마음이 삶을 움직인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해 지레짐작하지 않는 것이다. ‘ 나는 겁쟁이야, 나는 어리석어, 나는 소심해’ 라고 스스로를 단정지어버린다면 결코 그 틀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인간의 한계는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그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들만을 찾아내서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킨다. 이것 봐, 난 역시 멍청해. 하긴 어쩔 수 없지, 난 소심하니까. 그러면 우리 마음속에서 우려하던 생각들은 산비탈을 구르는 눈 덩이처럼 커져 마침내 산 아래 있는 집의 지붕을 덮치게 되는 것이다. 부정적인 신념은 부정적인 현실을 만들고, 긍정적인 신념은 긍정적인 현실을 구축한다.
우선 일상적으로 자신이 하는 부정적인 말부터 줄이자. 말은 씨가 된다. 난 안 돼. 라는 말만 하는 사람은 안 될 수밖에 없다. 시합에 져도 절대 ‘졌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는 “내가 졌다.”라고 말하는 대신 상대에게 악수를 청하며 “자네가 이겼네. 축하허이.”라고 해서 ‘이겼다’는 말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가 졌다는 결과는 바뀌지 않을지 몰라도, 그 말은 그가 다름에 이기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한 방울씩 떨어지는 잉크가 어느새 욕조 속의 물 색깔을 변화시키듯 하루하루 내가 한 생각은 나를 다른 색깔로 변화시키는데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마인드 컨트롤이란 결국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고, 스스로를 계발 조절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 다스리기란 말만큼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믿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끌어가겠다는 의지가 있어야만 의미 있는 자기발전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삶은 재생되거나, 환불되거나, 반품되지 않는다. 한 번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삶은
소중하다. 자신의 삶을 비극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여겨서도 안
되며 비극적인 대사만 뇌까려서는 안 될 것이다. <자기 암시에 의한 자기지배>란 책을 쓴 에밀
쿠에는 다음과 같이 짧은 자기 암시의 문장을 만들어 스스로에게 힘을 주었다고 한다.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점점 좋아지고 있다.’

믿음은 힘이 세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자신을 변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마음의 나침반을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고정시키자.
글/이승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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