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세계에 있어서의 꿈과 해몽

요셉과 꿈은 깊은 관련이 있다. 요셉의 운명은 그의 꿈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그는 꿈의 사람이었다. 요셉 이야기는 그의 꿈이 어떻게 이루어져 나가

고 있는가를 축으로 해서 그려지고 있다. 요셉은 꿈을 꾸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꿈을 잘 해몽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해몽이었다. 바로의 꿈을 해몽하여 결국은 그의 꿈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요셉 이야기 가운데는 꿈이 모두 6가지가 나온다.


1) 요셉이 처음으로 꾼 꿈(창 37:6-7)
2) 요셉이 두 번째 꾼 꿈(창 37:9-10)
3) 바로에게 술잔을 올리는 시종장의 꿈(창 40:9-11)
4) 바로에게 빵을 구워올리는 시종장의 꿈(창 40:16-17)
5) 바로의 첫 번째 꿈(창 41:1-4)


6) 바로의 두 번째 꿈(창 41:5-7)
요셉 이야기 가운데는 이러한 꿈들에 대한 해몽이 다 나오고 있다.
1) 요셉의 꿈에 대한 해몽(창 37:8, 10)
2) 술잔을 올리는 시종장의 꿈에 대한 해몽(창 40:12-14)
3) 빵을 구워올리는 시종장의 꿈에 대한 해몽(창 40:18-19)
4) 바로의 꿈에 대한 해몽(창 41:25-32)

이 외에도 우리는 성서에서 많은 꿈들을 발견하게 된다. 아비멜렉이 꿈을 통해서 하갈이 아브라함의 아내인 줄 알게 되었다. 야곱이 베델에서 노숙하는 가운데 사닥다리의 꿈을 꾸었다. 라반도 꿈을 통해서 야곱에게 좋은 말이든지 나쁜 말이든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창 31:24).

이들이 꾼 꿈의 내용은 의미가 분명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해몽을 가지고 씨름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니, 꿈속에서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꿈은 하나님의 컴뮤니케이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셉의 꿈은 그들의 꿈과는 달랐다. 하나님이 꿈속에 직접 나타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꿈속에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꿈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상징을 해석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누가 들어도 금방 그 의미를 알아챌 수 있는 꿈들이었다. 그러나 시종장의 꿈과 바로의 꿈은 해몽이 어려웠다. 상징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해몽이 난해한 이 꿈들을 요셉이 잘 풀어서 요셉이 높임을 받게 된다. 이집트의 해몽가들도 풀지 못한 것을 요셉이 풀었던 것이다. 이집트에는 꿈을 해몽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고대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꿈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해몽에 대한 많은 저술물들이 나왔다. 주전 13세기에 이집트인들이 기록한 해몽서가 발굴되었는데(본래는 주전 18세기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갖가지 상징물들과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체계적으로 나와 있다. 예를 들면, 꿈속에서 큰 고양이를 보면 좋다고 한다

. 왜냐하면 그것은 대풍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깊은 물 속을 들여다보는 꿈은 흉몽이라고 한다. 그것은 옥에 갇히게 되는 꿈이라고 한다. 깊은 물 속에 빠지면 나오기 어려운 데서 이런 해석이 나온 것같다. 이처럼 고대인들, 특별히 메소포타미아인들과 이집트인들은 꿈과 해몽에 대한 관심이 높았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도 꿈을 하나님의 컴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여기긴 했지만, 랍비들은 꿈의 가치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했다. "꿈은 1/60의 예언이다." 즉 꿈의 가치는 예언의 1/60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꿈은 미래에 대하여 예언과 비교해 볼 때, 1/60밖에 말해주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랍비들은 1/60이라는 표현을 많이 하였다. 예를 들면, "잠은 1/60의 죽음이다." "환자를 방문할 때 1/60씩 병이 낫는다.") 꿈의 해몽에 대한 관심은 그리 많지 않았었다. 대부분 성서에 나오는 꿈은 해몽이 필요하지 않은, 의미가 분명한 꿈들이었다. 히브리인들은 해몽을 하는 전문가가 있지도 않았고, 또 해몽을 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예언자들이나 현자들도 해몽과는 관계가 멀었던 사람들이다. 성서 전체에서 해몽한 사람은 단 두 사람밖에 나오지 않는다. 요셉과 다니엘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이 둘의 공통점은, 그들 모두 다른 나라 사람들의 꿈을 해몽해주었다는 것이다. 해몽 전문가들도 풀지 못하는 그러한 꿈을 해몽하였다는 점과, 둘 다 그로 말미암아 높임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고대인들이 모든 꿈을 다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요셉이 꾼 두 개의 꿈은 짝을 이루고 있다. 둘 다 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꿈이었다.

술잔을 올리는 시종장과 빵을 굽는 시종장이 각각 꾼 두 개의 꿈도 사실은 같은 것이었다(창 40장). 바로도 두 개의 꿈을 연이어서 꾸었으나, 의미가 같은 꿈이었다(창 41장). 이렇게 요셉과 시종장들, 그리고 바로가 짝을 이루는 꿈들을 꾸었다고 하는 것은, 그 꿈들이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꿈은 그 꿈을 꾼 사람의 본성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꿈은 무의식 세계에 있는 의식의 표출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요셉이 모든 형들에게 절을 받는다는 꿈은 그의 자의식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꿈속에 요셉의 야망과 그의 성품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요셉의 형제들은 그의 꿈 이야기를 듣고는 그를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었던 것이고, 결국은 그
를 팔아 넘기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한편, 바로가 꾼 꿈을 이집트의 모든 해몽가들이 풀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은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인 요셉에게까지 해몽을 의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집트의 유명한 해몽가들이 바로의 꿈을 해몽하지 못했을까? 그들은 해몽의 전문가들이 아니었는가? 실상, 요셉도 해몽했듯이, 바로의 꿈은 해몽이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해몽하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풀 수 있는 꿈이었다. 그러면 왜 그들은 풀 수 없었던 것일까? 성서 해석가들은, 사실은 이집트의 해몽가들은 그 꿈의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그 꿈이 길몽이 아니라 흉몽인 까닭에 감히 바로에게 사실대로 보고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것을 두려워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아웃 사이더"(outsider)로서, 두려울 것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대로 바로에게 꿈을 풀어줄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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