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오랜 동안 ‘어두운 소식’만 들려오던 불교계에 모처럼 ‘맑고 향기로운’ 그래서 ‘더욱 반가운’ 뉴스가 전해졌다.
<생명 나눔 운동>을 주창하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활발한 활동을 펼쳐오기도 했던 法長(법장)스님께서 갑작스럽게 圓寂(원적)에 들고 하루가 지난 어제 “장기기증운동단체인 <생명 나눔 실천본부>를 세우신 스님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스님의 法柩(법구)를 동국대 일산병원에 기증키로 결정했다.”는 발표가 있었고, 곧 이어 스님의 법구를 병원으로 옮겨 모셨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한 ‘사후(死後) 장기 기증’과 의학도들을 위한 ‘시신 기증’을 서약하고 실천하는 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장 스님 스스로 이 운동을 앞장서 주창해 오셨으므로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쉽게 넘겨버릴 수 있을까? 우리가 왜 이 순간 법장 스님에게 ‘아름다운 회향’이라는 찬사를 보내는가? 회향이 멋지면 그 동안의 과정도 모두 아름다운 법이다.
둘. 몇 해 전, '현대 中國(중국)의 麒麟兒(기린아),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오뚝이[不倒翁]'라고 불리던 덩샤오핑(鄧少平)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세계가 놀랐다.
투명 棺(관)에 넣어 대중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고이 모시고 ‘대중들의 존경을 요구하던 과거 共産(공산) 세계의 例(예)’와 달리, “내가 죽거든 장례는 소박하게 치르고 시신은 화장을 해서 재를 長江(장강; 양자강)에 뿌려 달라”고 했다던 덩샤오핑의 유언이 발표되고 그 유언대로 집행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1989년 이른바 티엔안먼(天安門) 사태의 유혈(流血) 진압을 명령하여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아온 덩샤오핑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하루아침에 바뀌게 되었다.
“과연 작은 거인이다.”
中國 정세도, “덩샤오핑 없는 中國이 과연 어찌 될까?” 예의주시하던 세상의 눈길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안정을 찾아갔다. 中國이 안정을 찾고, 이제는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까지도 그 발전을 두려워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덩샤오핑처럼 ‘영웅 대접 받기를 스스로 거부한 진짜 영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셋. 僧俗(승속)을 불문하고,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일반 상식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 집단이 오랜 동안 지켜온 법과 규율 · 규정 그리고 불문율(不文律)로 자리 잡은 관습에 이르기까지, 그 집단에서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기는 상식(常識)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야말로 ‘沒常識(몰상식)하다’는 비난을 감수할 자신감 없이 저지를 수 없다.
스님들이 入寂(입적)한 뒤 다비[火葬]를 하고 사리를 수습하여 부도를 모셔드리는 것은, 佛家(불가)의 오랜 전통이며 상식이고 관습이었다. 설사 불교인이 아닌 사람도 이 전통적 관습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경우가 드물고, 다비 장면을 하나의 문화로 이해하기도 한다. 다비는 그 자체가, 어쩌면 말없는 가운데 ‘諸行無常(제행무상)’과 ‘成住壞空(성주괴공)’의 道理(도리)를 보여주는 言外(언외)의 가르침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다비식이 어느 때부터인가 화려한 虛禮(허례)가 되어버렸고,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 상좌들과 문중에서는 그 비용을 마련하는 데에 큰 고통을 겪을 정도였다. 다비를 치르고 나서, 젓가락을 들고 잿더미를 휘저으며 ‘사리’를 찾는 모습도 결코 아름답지 못한 광경이었다. 큰스님들이 원적에 들고 난 뒤에는 “사리 몇 과가 나오셨느냐?”를 가지고 돌아가신 분의 道力(도력)을 평가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지니, 한 편에서는 ‘사리 숫자를 부풀렸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사치스런 喪葬禮(상장례)는 세속에서도 비난을 받는다. 하물며 물질적 욕심을 하찮게 여겨야 하는 승가에서 화려한 다비식을 치르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부도를 세우며, ‘사리’에 집착하는 일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을 어기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는 데에 동감을 하면서도, 그 오래 된 전통과 관습 · 상식을 깨는 일에 용기를 내지 못하고 모두 그 거대한 흐름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법장스님께서 당신의 법구를 내놓으셨으니, 얼마나 큰 용기를 보여주셨는가? <조계종 총무원장>이라는 직함이 주는 무게와 함께 그 분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를 마지막으로 떠나시며 이 세상에 전해주고 가신 선물도 한없이 값지고 무겁다.
넷. 훌륭한 재가 불자 한 분이 1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분도 평소에 “내가 죽고 나면 화장을 하라.”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였고 그 뜻을 遺言(유언)으로 남기기도 했었지만, 결국 화장을 해서 散骨(산골)을 하는 일은 무산되고 집안의 先塋(선영)에 화려한 집[幽宅]을 마련하고 그 속에서 永生(영생)을 꿈꿀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고인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화장을 하지 못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되면 우리들이 죽고 난 뒤에도 화장을 해야 할 것 아닌가?”하는 걱정을 하게 된 아우들이 “형님을 불에 태울 수는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적극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전해오는 소식으로는, 법장 스님 문도에서도 일부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반대가 위에서 말한 재가 불자의 형제들처럼 이기심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잘 안다. “일부의 반대가 있었지만, 돌아가신 큰스님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법구를 동대 병원에 기증키로 하였다”는 발표는 그래서 더욱 마음에 다가온다.
스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 앞장을 섰던 분들도 아름답지만, 스승에 대한 효성심에서 한 때 반대를 했었던 상좌들의 행위 또한 멋지다. 법장 스님과 문중 모두에게 “정말 잘 하셨다”는 찬사를 보낸다.
聖者(성자)의 뜻과 정신을 이을 생각은 없이 그저 그 분의 겉모습에만 집착해서 형식적 모방에만 그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양(洋)의 東西(동서)와 불교 · 기독교를 비롯한 거의 모든 종교를 불문하고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이런 점에서 법장 스님 문도의 이번 결정은 세상 어디에서도 ‘어른을 제대로 모셨다는 찬사’를 받을만한 거룩한 일이다.
다섯. 우리 모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법장 스님의 <아름다운 회향>은 많은 이들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줄 것이다. 전통 · 관습과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옭아매고 있던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여러 전생에 걸쳐 몸을 내던져 굶주린 동물을 살리는 등 숱한 희생을 치르셨다. 『周易』에서는 “나뭇잎이 떨어져 썩어서 뿌리의 거름이 된다.[葉落而糞本]”고 하였다.
제 아무리 호화스런 유택을 짓고 그 안에서 영생을 꿈꾼다고 하여도, 죽고 나면 썩어서 한 줌 흙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아니, 그 길이 가장 자연스런 ‘길의 이치[道理]’이다. 이 자연스런 길의 이치를 모르고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거나 그 이치를 알면서도 감히 앞서나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던 이들이 앞으로 實相(실상)을 제대로 보고, ‘이미 죽은 내 목숨을 내어주어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의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보살행 - 사후 장기와 시신 기증’에 나서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마 이것이 법장 스님이 말없이 전해주고 떠나신 유언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