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전은 16만 명의 PMC 용병이 투입된 전쟁이었다. 2013년 8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자살 폭탄 테러 발생 직후 용병들이 현장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사진 대테러국제용병협회]
판문점 DMZ 지하 30m에 위치한 비밀벙커. 각종 화기로 중무장한 12명의 남성들이 숨죽인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미국의 글로벌 민간군사기업(PMC·Private Military Corporation) 블랙리저드의 캡틴인 주인공 에이헵(하정우 분)은 용병들을 이끌고 CIA로부터 의뢰받은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벙커에 투입됐다.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북한의 ‘킹’(최고지도자)을 납치하고 또 다른 군사기업(PMC)이 ‘킹’을 탈취하기 위해 기습한다. 지하 벙커는 용병들의 총격전, 폭발 등으로 아수라장이 된다. 지난해 12월 말 개봉해 최근까지 극장가에 걸린 영화 ‘PMC: 더 벙커’의 줄거리다. 정부를 대신해 비밀임무를 수행하는 민간군사기업 소속 용병들의 사투와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음모·배신, 용병들의 심리적 갈등을 생생하게 그렸다.
영화 ‘더 벙커’ 같은 용병의 세계
이라크전 때 300곳서 용병 16만
미 국방예산 씀씀이 중 25% 차지
“비용 아끼려 전쟁의 외주·민영화”
용병 되려면 영어에 능통해야
신참 월 800만원, 베테랑 연봉 8억
PMC는 군사마니아들에게는 익숙하지만 일반인에게는 다소 낯선 용어다. 세계 각지의 전쟁·분쟁이 벌어지는 지역에 용병을 파견하는 민간회사 정도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실제 PMC가 수행하는 업무는 훨씬 광범위하다. 대테러 정보 분야와 경호전문가로서 2012년 ‘대테러국제용병협회’(IMACT)를 창설한 김진용(41)씨는 “용병 운용 외에도 전략 기획, 교육 훈련, 첩보 수집, 물품 및 용역 지원, 기지 건설 등 군사·안보 분야 전반을 PMC가 수행한다”며 “특히 해외 위험지역에 진출하는 기업을 대신해 위험요소 사전 평가와 대응은 물론 개인과 가정의 보안 솔루션 서비스 분야에까지 업무 영역을 대폭 확장했다”고 덧붙였다. 이밖에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멸종위기 동물에 대한 밀렵 대응, 중남미에서는 마약확산 방지 활동을 국제기구나 해당 정부로부터 의뢰받아 수행한다.
‘블랙워터’ 요인 경호 중 민간인 오인 사살
김씨는 “최근 PMC들은 현지인 보호와 난민 구호 활동으로까지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고 했다. PMC의 활동 영역은 다양해졌지만 ‘피 묻은 돈’으로 운영되는 회사라는 이미지를 당장 떨쳐내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PMC 소속 용병들이 임무 수행 과정에서 민간인을 테러리스트로 오인해 사살한 흑역사가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 PMC ‘블랙워터’(Black water)는 미 해군 특수부대 네이비실 출신인 에릭 프린스가 1997년에 창설했다. 2004년 제2차 걸프전(이라크전쟁) 직후 미 정부와 경호, 병참 등 각종 군사 용역계약을 맺고 막대한 수익을 챙기며 이름을 떨쳤다. 잘나가던 블랙워터가 악명을 떨친 것은 2007년 9월 16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있었던 민간인 사살 사건 때문이다.
블랙워터 소속 용병들은 미국 외교 차량을 경호하며 이동하던 중 흰색 차량이 빠르게 다가오자 자살 폭탄 테러 시도로 판단해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하지만 비무장 민간인 차량이었고 애꿎은 이라크 민간인 14명이 숨졌다. 이 사건으로 관련자들이 기소돼 미 연방 법원에서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블랙워터는 아카데미(Academi)로 이름을 바꾸고 군사 교육 훈련 분야 일만 맡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사건 이후에도 미 정부의 PMC 의존도는 줄지 않았다.
하정우 주연 영화 ‘PMC: 더 벙커’의 한 장면.
2011년 미 중부사령부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이라크에 투입된 민간계약자 수와 정부 소속 군인의 비율은 1.25대 1로 PMC 직원이 현역 군인보다 많았다. 이라크전을 거쳐간 PMC는 300여 개로 고용된 인원만 16만 명이었다. 김진용씨는 “블랙워터 한 회사가 이라크에 보낸 요원들만 한때 2만 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미 국방 예산의 4분의 1이 PMC에 지출될 정도로 의존도가 높다”고 했다.
부정적 시각이 적지 않은데도 세계 PMC 시장규모는 날로 커지는 추세다. 대테러국제용병협회에 따르면 2005년 1000억 달러 규모였던 것이 2012년엔 2700억 달러, 지난해 말 기준으로는 3500억 달러로 크게 늘었다. 군사·안보 분야 전문가 이성철 박사는 “세계 여러 정부가 국방과 안보 분야에서 PMC와 계약을 맺는 이유는 비용 절감 때문”이라며 “전쟁의 외주화·민영화라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PMC를 ‘전쟁 청부업자’라고 비판한다.
전 세계 용병 30만 명, 국내엔 3만 명
해적 출몰에 대비해 작전 중인 PMC 용병들.
국내에도 PMC가 있다. 대표적 회사는 2010년 설립된 ‘블렛케이(Bullet-K)’다.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지역에서 건설회사 등의 시설과 직원 보호를 위한 무장 경비 용역을 제공하는 국내 첫 PMC였다. 2015년 해상 보안과 시설경비를 목적으로 설립된 트라이셀이라는 회사도 국내 PMC 중 하나다. 해상 보안 담당 PMC는 주로 소말리아 등에서 벌어지는 해적들의 민간 상선 납치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PMC는 여럿 있었지만 경영상의 어려움 때문에 실제 운영되는 회사는 손에 꼽을 정도다.
PMC 소속 용병 숫자는 얼마나 될까. 김씨가 주도하는 대테러국제용병협회에 가입한 용병 숫자만 해도 3만여 명에 이른다. 전 세계 용병 숫자는 3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PMC 소속 용병이 되는 일은 쉽지 않다. 지원자의 대부분이 특수부대 출신들이다 보니 각종 특공무술과 전투 능력은 기본이다. 김씨의 얘기다.
“신체적 능력 외에 무기·통신·특수차량 등 각종 장비 운용과 첩보 수집 능력, 의료·구급 분야에 대한 기본적 지식도 갖춰야 한다. 영어는 기본이고 현지인들과의 교감 능력, 국제법에 대한 소양도 요구된다. 확고한 도덕적 가치관도 최근에는 중요한 자질로 평가한다. 특히 무기를 소지하는 특성 때문에 인성·도덕적 측면을 최근 많이 강조한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 용병 선발 과정에서 심층적인 정신감정분석 프로그램까지 동원한다.”
위험도가 큰 업무를 수행하다 보니 용병이 버는 돈은 적지 않다. 김씨는 “용병 초봉이 월 700만~800만원 수준이며 레드존(위험지역) 호송임무를 맡게되면 고액의 추가 수당이 주어진다”고 했다. 또 영화에서 하정우가 맡은 에이헵과 같은 우수한 매니저급 용병의 연봉은 7억~8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은 계약과 동시에 현장의 위험요소를 치밀하게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전에 진지·기지 구축을 하기 때문에 영화에서처럼 테러리스트 등 현지 적대 세력과 근접 전투를 벌이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또 영화에서는 용병 대부분이 불법 체류자이거나 범법자 출신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현실 세계의 용병들은 전직 특수부대 군인 출신 등 신분이 확실하지 않으면 용병 계약을 정상적으로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영화와 현실 속 용병이 비슷한 점은 극적인 사연을 지닌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가난하고 병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용병이 된 특수부대 출신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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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중순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 당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묵었던 숙소 주변과 회담장 그리고 주요 이동경로에 배치된 경호 인력은 세계 최고의 용병 중 하나로 꼽히는 네팔 구르카족 출신 용병이었다.
현재 싱가포르 경찰에는 구르카족 출신 용병이 1800여 명 일하고 있다.
구르카 용병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대영제국 시절부터다. 당시 영국이 네팔을 침공했지만 ‘쿠크리’라는 단검을 가진 구르카족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영국군은 구르카족의 전투 능력을 눈여겨보고, 평화협정을 맺은 뒤 구르카족 전사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영국군은 인도를 지배할 때도 이들 구르카 용병을 활용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뒤 구르카 용병들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싱가포르로 옮겨 계속 일했다. 싱가포르가 독립한 1965년부터 현재까지 이들은 여전히 싱가포르 치안의 중요한 축이다. 구르카 용병은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참전한 영국군에도 구르카 용병이 있었다. 1951년 2월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전투에서 벌어진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영국군에 속한 구르카 용병 1개 대대가 중공군 1개 사단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용병의 역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스위스 용병이다. ‘스위스 용병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명구가 있을 정도다. 한때 프랑스군 전체 병력(30만 명)의 3분의 1(12만 명)이 스위스 용병이었다. 이들의 용맹성과 충성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1792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루이 16세를 호위하던 스위스 용병들의 스토리다. 분노한 파리의 군중들이 궁으로 몰려갔을 때 프랑스군 근위병들은 다 도망갔지만 끝까지 루이 16세의 곁을 지켰던 이들이 스위스 용병 출신 근위대였다. 스위스 용병들에게 적대감이 덜했던 군중들은 “안전을 보장할 테니 (국왕을 버리고) 돌아가라”고 했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끝까지 왕의 곁을 지켰다. 심지어 루이 16세가 이들에게 “그만 됐으니 물러가라”고 명했지만 이탈자는 없었고 결국 최후를 맞았다. 당시 전사한 스위스 용병의 숫자는 786명이나 됐다. 유명 관광지인 스위스 루체른에는 이때 전사한 용병들을 기리는 기념물이 있다. ‘빈사의 사자상’(사진)이 그것이다. 현재 바티칸 교황청을 수비하는 근위대도 스위스 출신 용병들이다.
」
고성표 기자 muzes@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