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BK 의혹'과 관련해,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실형이 확정된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이 26일 검찰 출두에 앞서 BBK 진상조사위원장 자격으로 민주통합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뒤 동료의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교도소엔 고양이가 없어서 쥐가 많다. 내가 고양이 역할을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 ⓒ 남소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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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옛날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항상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왜 기괴하고 어리석고 사악한 일들은 항상 옛날에만 일어났을까 하는 점이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운 것도 과거고(끊었기 망정이지, 요즘 같으면 길에서 피우다 벌금을 물 뻔했다),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던 변사또의 악행 역시 갓 쓰고 짚신 신던 때의 일이며, 이발사의 입을 틀어막아 병들게 만든 '당나귀 귀 임금' 이야기도 왕권시대의 유물 아닌가. 나는 어처구니없는 옛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비웃으며 현실과 현재에 대한 장밋빛 환상을 키워갔다. 그러나 자라며 깨닫게 된 것은, 현재의 아둔함과 어리석음은 옛날이야기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장자연 사건에서 보듯, 현실에서는 권력자들이 여인을 능욕해 죽음으로 몰고 가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 이제 왕권국가가 아닌데도, 정치지도자에 대한 의혹 제기는 당나귀 귀 시대만큼 위험하다. 과거에는 갈대라도 나서서 진실을 외쳐주었으나, 오늘의 갈대에 해당할 언론은 진실은커녕, 왕의 귀를 덮고 미화하기 바쁘다. 한국, 무늬만 민주국가 하지만 '현실'이나 '현재'의 문제로 일반화하지 말자. 이런 일은 '민주국가'라는 표현을 장식으로나 사용하는 전제국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니까. 한국에서 국민들이 누리는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다. 그래서 현 정부가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대신 쓰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제멋대로 정한 민주주의'라는 뜻에서 말이다. 내기를 해도 좋다.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라고 칭하는 곳 가운데 어느 나라가 '정당이나 입후보예정자에 대한 지지·반대를 하거나 권유'한다는 이유로 처벌하고, '선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신문기사를 퍼 나른다고 처벌하는지 말이다. '특정 정당과 후보자를 연상시키는' 모양과 색의 옷차림만으로도 범법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예 논외로 하자(검은색을 쓰는 정당이 등장하지 않은 건 감사한 일이다. 안 그러면 검은 옷을 즐겨 입는 국민들이 '투표복' 선택에 애를 먹을 뿐 아니라, 선거 때마다 삭발하는 수고를 면치 못할 테니 말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특정 유권자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두피를 드러내서는 안 되겠지만). 선관위의 규정이 얼마나 모호하고 복잡한지 선관위 자신들조차 매번 다른 설명을 내놓는다. 이러니 유권자의 안전한 선택은 두 가지뿐이다. 투표를 안 하거나, 후보에 대한 아무런 판단 없이 연필을 굴려 후보를 고르는 것이다(투표소에 연필 반입이 가능한지는 선관위에 문의하는 게 좋겠다. 가능하면 가져갈 연필의 모양이나 색깔도 미리 상의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낙심할 필요는 없다. 선관위의 의도는 생각보다 명료해서 쉽게 요약할 수 있다. '선거는 하되, 선거결과에 영향을 끼치지는 마라.' '허위사실공표' 조항의 모순 정말 기가 막힌 건 공직자 선거법의 '허위사실공표' 조항이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런 체계나 논리도 찾을 수 없다. 최근 대법원은 정봉주 전 의원에게 1년 징역형을 확정했다. 근거가 된 공직선거법 제250조 제2항을 보자. '언론의 자유' 부분 먼저 보도록 하자. "민주주의 정치 제도 하에서 언론의 자유는 가장 기초적인 기본권인바 그것은 선거과정에서도 충분히 보장되어야 하고, 공직선거에 있어서 후보자를 검증하는 것은 필요하고도 중요한 일이므로 후보자의 공직 적격성을 의심케 하는 사정이 있는 경우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쉽게 봉쇄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후보자에 관한 의혹 제기가 진실인 것으로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근거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경우에는 비록 사후에 그 의혹이 진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표현의 자유 보장을 위하여 이를 벌할 수 없다." 아름답고 상식적인 말이다. 대한민국을 무늬나마 민주국가로 만들어주는 규정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에 선행하는 조항을 보자. "당선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연설·방송·신문·통신·잡지·벽보·선전문서 기타의 방법으로 후보자에게 불리하도록 후보자, 그의 배우자 또는 직계존·비속이나 형제자매에 관하여 허위의 사실을 공표하거나 공표하게 한 자와 허위의 사실을 게재한 선전문서를 배포할 목적으로 소지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상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이제 이해가 되실 것이다.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한국사회가 둘로 쪼개진 까닭을 말이다. 난 상반되는 두 조항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하다가 머리가 둘로 쪼개지는 줄 알았다. 판단주체에 따라 완전히 다른 판결을 내릴 수 있는 모순적 조항이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사실로 믿을 근거가 있다면 허위로 밝혀져도 처벌할 수 없다고 말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문서를 소지하기만 해도 처벌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같은 법을 근거로 하늘과 땅만큼 다른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이 '비비케이(BBK)'의 실소유주인지 아닌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뒤에서 밝히겠지만, 나름의 판단은 하고 있다. 나도 머리를 가졌으니 말이다. 가정이지만, 명백히 소유관계가 밝혀졌다고 하자. 이 경우, 정봉주 전 의원은 무사했을까? 그렇게 믿는다면 순진한 독자다. 이런 경우를 위해 한국 법은 명예훼손죄를 준비해 놓고 있다. 한국에서는 공표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비방에 초점을 두는 경우' 명예훼손이 성립한다. '발언내용이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도 그렇다. 이제 독자들은 머리가 넷으로 쪼개지는 경험을 하실 것이다. 이게 표현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나라의 법률이다. 결국 공직자 선거법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는 표현의 자유가 있다. 유력한 권력자만 안 건드리면.' | ▲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 대통령의 BBK 주가조작 연루 의혹을 제기한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의 대법원 최종 선고심이 열린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정 전 의원의 지지자들이 무죄를 주장하며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 ⓒ 유성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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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의 사실입증 책임의 차이 이제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자. 일단 멀쩡한 나라치고 '허위사실 유포'를 구실로 국민을 형사처벌하는 나라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두자. 특정인이 허위사실로 인해 손해를 입게 될 때 명예훼손 민사소송을 거쳐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의 공직자선거법과 명예훼손법은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에게 사실입증 책임을 지운다. 하지만 의혹은 언제나 일부의 사실에서 출발하는 법이다. 정봉주의 사례가 보여주듯, 100퍼센트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은 한 모든 의혹 제기는 '허위사실공표'의 위험을 무릅쓰게 되는 것이다. 이는 모순일 수밖에 없는데, 100퍼센트 확실한 것은 '의혹'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사실로 입증한다는 건 동어반복이니, 결국 의혹 자체를 제기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된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한국의 '허위사실공표' 조항과 비교할 대상이 없으므로, 이와 비슷한 명예훼손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미국은 1960년대 '뉴욕타임스 대 설리반(New York Times v. Sullivan)' 판결로 표현의 자유와 명예훼손의 기준을 확립한다. 명예훼손이 성립하려면 공표 내용이 허위여야 하는데, 이때 허위의 입증 책임은 소를 제기한 원고에게 있다. 한국과 정반대로, 의혹을 받는 사람이 의혹 내용이 사실이 아님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한국처럼 의혹 제기자가 사실입증을 해야 한다면, 비판 자체가 차단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치인 등 공인에게는 명예훼손 성립조건을 훨씬 더 까다롭게 만들어 놓았다. 이들은 일반인보다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기에, 쉽게 문제제기를 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공공의 이익을 지킬 수 있게 된다. 본인이 입증해야 하는 미국의 명예훼손 공인이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려면 피고가 '실제 악의(actual malice)'를 가지고 발언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피고의 의도를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피고가 발언할 당시 그 내용이 허위임을 알고 있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이 경우, 공인이 자신의 명예훼손을 입증하기란 대단히 어려워진다. 정봉주가 의혹을 제기했던 사람은 대통령 후보였다. 가혹하리만큼 엄밀한 검증과 비판이 필요한 '공인 중의 공인'에게 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미국이라면, 이명박 대통령이 정봉주 전 의원에게 민사소송이라도 걸려면(미 연방정부는 형사 명예훼손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봉주 전 의원의 말이 허위임을 입증해야 할 뿐 아니라, 의혹 제기 당시 그 내용이 허위임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입증해야 한다. 하긴, 한국이 어떤 나란가. 정운천 전 장관이 보도프로그램 '피디수첩'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국정원이 개인 박원순을 '국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기막힌 나라가 아닌가. 원고들도 애초에 소송감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리라 믿는다. 그저 상대를 괴롭혀 '본때'를 보여줌으로써 향후 비판을 차단하려는 '겁주기 효과(chilling effect)' 전략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점이 드러난다. 규제와 소송의 정당성을 떠나, 그게 사회에 어떤 효과를 가져오느냐는 것이다. 만일 규제를 통해 일정한 이익을 얻는다 해도, 부작용이 이익을 상쇄할 만큼 크다면 규제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 ▲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와 박원순 야권연대 후보. | ⓒ 유성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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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의원, 나경원 후보, 김홍도 목사의 '허위사실공표' 미국은 아동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한, 성인물을 규제하지 않는다. 포르노가 좋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서도 아니고, 미국이 한국보다 성적으로 분방해서도 아니다(미국 정치인들은 혼외관계만 드러나도 정계를 떠나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내연관계는커녕 성추행을 해도 정치생명에 별 지장이 없지 않은가. 성추행은 '분방함'의 문제도 아닌 그냥 범죄행위다). 미국정부는 1996년에 '통신품위법(CDA)'을 통해 인터넷 성인물을 규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어떤 것이 무가치한 음란물이고, 어떤 것이 헌법의 보호를 받는 표현의 영역인지 모호하다는 법원판결 때문이다. 규제가 인터넷을 좀 더 '천진한' 세상으로 만들어 줄지는 모르나, 그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성인물이 좋아서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내버려두는 것이다. 다 떠나서, 형평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 후보가 '당선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공표한 나경원과 홍준표 의원은 왜 내버려두느냐는 것이다. 홍준표 전 대표는 선거 전날인 10월 25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박원순 후보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그는 박 후보가 서울시장에 당선될 경우 "서울 행정이 마비되고, 광화문 광장은 반미집회 아지트가 될 것"이며, "휴전선에서 30㎞ 떨어진 서울 안보가 무너지는 계기가 된다"고 주장했었다. 나경원 후보는 이틀 앞선 23일에 박 후보가 당선되면 "서울시의 모든 행사에서 태극기와 애국가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이들에게도 사실입증 책임을 물을 때다. 박원순 후보가 "사탄·마귀"라고 주장한 김홍도 목사의 발언은 어떤가.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박 시장이 '사탄'이나 '마귀'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토록 십자가가 많은 서울에 살며, 마늘 들어간 음식도 잘 먹는 걸로 봐서 말이다. | ▲ 지난 2000년 10월 17일 광운대 최고경영자 과정 특강에서 이명박 후보가 강연한 내용을 담은 동영상 화면. | ⓒ 남소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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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 비디오, 당나귀 귀 자, 이제 고백의 시간이 왔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이 '비비케이(BBK)'의 실소유주라고 믿는다. 물론 '그렇게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 우선 이장춘 전 외무부 대사가 이명박 후보에게 받았다는 명함이 있다. 거기에는 선명한 글씨로 "비비케이 투자자문회사 대표 이명박"이라고 쓰여 있다. 또 다른 근거는 스스로 회사를 설립했다고 말하는 녹화 영상이다. "저는 요즘,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인터넷 금융회사를 창립을 했습니다. 해서, 금년 1월달에 비...비비케이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을 하고..." 나경원 의원에게 또다시 미안하나, 비디오에는 명백히 주어가 등장한다(차라리 '비비케이'와 '비...비비케이'는 다른 회사라고 주장하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 본인이 설립했다고 말하는 영상이 있고, '대표'라고 찍힌 명함이 있는데 그걸 믿지 말라고 한다면, 우리는 현실과 동떨어져 결국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된다. 예컨대 이명박 대통령이 정말 한국의 대통령인지조차 희미해지는 것이다. 나는 대통령 명함을 본 일도, 그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로 시작하는 연설을 들어본 적도 없다. 게다가 설사 그런 게 존재한다 해도 그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지는 않는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 아닌가. 어린 시절, '당나귀 귀 임금' 이야기를 읽으면서 결심한 바가 있다. 어른이 되면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하겠다는 것이다. 이제 그때의 결의를 실천에 옮기려고 한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이 '비비케이'의 실소유주라고 믿는다."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하자. "대통령 귀는 꽉 막힌 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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