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정을 시작하면서 저에게는 소속 정당도 손잡은 정치세력도 없지만, 제주도민만 바라보고, 담대하게 나아가겠습니다."
2018년 재선에 성공한 원희룡 제주도지사의 취임사입니다. 재선에 도전할 때부터 당선 이후까지 원 지사가 줄곧 강조해 온 건 바로 '도민'이었습니다.
원 지사는 당시 "제주도민들 속에서 제주도민의 삶을 실제로 바꾸는 것이 제 정치의 처음이고 끝"이라고 밝히며 "그 과정에서 중앙정치를 돌아보거나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고 도정에 전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4·15총선을 앞둔 지난 2월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에 입당해 최고위원을 맡으면서 제주를 떠나 있는 날이 부쩍 늘었습니다. 코로나19가 한창인 지난 4월에는 이틀에 한 번꼴로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연관기사: 한 달 만에 “도정 전념” 말 뒤집은 원희룡 지사…이틀에 하루꼴 ‘출장’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459544&ref=A)]
물론, 제주도 현안 협의를 위해 정부와 국회를 찾는 거라면 문제 될 게 없을 겁니다. 하지만 원 지사는 지난 5월 한 중앙지와의 인터뷰에서 '대권 도전' 의사를 밝히는 등 개인적인 정치 행보에 주력하는 모양새입니다. 이런 가운데 제주도민들에게는 어떠한 양해도 구하지 않으면서, '지사님의 출장'이 과연 제주도를 위한 일인지 의구심을 표하는 시선도 늘었습니다.
KBS제주 탐사K가 '제주도 서울본부(이하 서울본부)' 취재에 착수하게 된 배경입니다. 서울본부는 제주 현안 등과 관련해 정부나 국회와의 업무협조가 주요 업무지만, 도지사 의전도 담당합니다. 원 지사의 중앙정치 행보로 본연의 업무에 지장은 없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혹시 원 지사 개인적인 정치 일정도 수행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증이 들었던 겁니다.
■ 제주도민에겐 '깜깜이' 서울본부…본연의 역할은?
서울본부는 원 지사 취임 이후 줄곧 '사조직' 아니냐는 눈총을 받았습니다. 원 지사 취임 이후 조직 규모가 확대됐는데, 초대와 후임 본부장에 최측근을 앉힌 데 이어 최근 취임한 본부장은 원 지사 선거를 도운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어쩌다 공무원'인 임기제 비율도 전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탐사K는 서울본부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지 않은 서울과 세종을 제외하고 전국 15개 시·도의 서울본부 현원 대비 임기제공무원 비율을 분석했는데요. 울산이 가장 높았고 제주 66%, 경기 33% 등이었는데, 임기제가 1명이거나 아예 없는 지자체도 5곳에 달했습니다. 특히 제주도 서울본부의 임기제 공무원들은 6·13 지방선거를 앞둔 2018년 4월, 6명이 한꺼번에 그만뒀다가 원 지사 재선 뒤 5명이 복귀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서울본부는 본연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을까요? 현 서울본부장은 서울본부가 지원 부서이기 때문에 정량적 성과를 도출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KBS제주 탐사K가 주목한 건 서울본부가 직접 작성한 '지역 현안 대국회 업무협조 현황'입니다. 서울본부는 원 지사 취임 이후 중앙절충을 명분으로 여의도로 자리를 옮기고 인원도 크게 늘렸는데, 정부는 몰라도 대국회 업무만큼은 성과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원 지사가 취임하기 전인 '2013년' 현황과 가장 최근인 '2019년' 현황을 들여다봤습니다.
확인 결과 '대국회 업무협조' 추진 건수는 조직 확대 전보다 줄었습니다. 단순한 연락사무소에서 벗어나 '국회협력팀'이라는 별도의 부서까지 만들었는데, 오히려 성과가 줄어든 겁니다. 특히 국비나 법률 관련 내용으로 좁혀보면 차이는 더 컸습니다. 취재 결과 '국회협력팀'에 배치됐던 건 줄곧 '어쩌다 공무원'인 임기제 공무원들이었습니다. 서울본부 확대 개편에 따른 추가 인건비로 들어간 제주도 예산만 5억 원을 넘습니다.
■ 지사님 휴가 날도 의전…코리아비전포럼과의 접점
지난 15일 휴가를 내고 서울 마포구에서 열린 ‘더 좋은 세상으로 포럼(마포포럼)’에 참석한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포럼이 끝난 뒤 제주도 서울본부 직원의 수행을 받으며 관용차로 향하고 있다. 취재 과정에서 원 지사의 서울 마포포럼 참석 소식을 접했습니다. 김무성 전 의원이 주도하는 마포포럼은 야권 전·현직 의원들의 주요 모임으로, 원 지사는 포럼 강연에 나서 대선 관련 메시지를 전할 것으로 관측됐는데요. 미리 예고된 개인 일정인 만큼, 서울본부가 지사의 개인적인 일정을 수행하는지 확인해볼 수 있는 자리라고 판단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개인적인 일정에도 의전을 수행하는 서울본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마포포럼이 공개 행사였던 만큼 기자들의 출입도 자유로웠기 때문에 가까운 거리에서 원 지사를 수행하는 서울본부 직원과 관용차를 확인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주에 와 확인한 더 큰 문제는 당시 원 지사는 휴가였지만, 서울본부 직원들은 모두 정상 근무였다는 겁니다. 공무원 행동강령을 위반한 셈입니다.
KBS제주 탐사K는 서울을 방문한 김에 원 지사가 주축으로 활동하는 '코리아비전포럼'도 방문해보기로 했습니다. 원 지사가 2007년 당시 한나라당 경선 출마 때 지지자들이 결성했는데, 제주도에선 원 지사의 싱크탱크라는 평가가 암암리에 나오는 조직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코리아비전포럼' 사무실은 서울본부의 바로 건너편 건물이었고, 두 곳이 여의도로 이전한 시기도 반년밖에 차이 나지 않았습니다.
또 전직 서울본부장 2명이 '코리아비전포럼' 출신이고, 직전 제주도 정무특보는 '코리아비전포럼' 사무총장을 맡고 있습니다. 게다가 서울본부의 유일한 정책자문위원은 '코리아비전포럼'의 정책실장인 것으로 취재 결과 확인됐습니다. 포럼 관계자들은 우연이라고 선을 긋고, 서울본부장은 무관하다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접점을 과연 '우연'으로만 볼 수 있을까요?
■ "제주도 서울본부는 제주도민 위해 운영돼야!"취재 과정에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제주도민의 시각에서 서울본부를 바라보고자 했지만, 원 지사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야당 정치인에 대한 공격이라는 정치적 프레임이 우려됐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고민에서 만난 국민의힘 김황국 제주도의원은 서울본부에 대해 "여야를 막론한 행정부, 국회의원을 만나는 업무이기 때문에 오히려 정무적인 감각이 뛰어난 분들이 들어가야 된다고 본다"고 의견을 밝혔습니다. 서울본부에 원 지사의 이른바 측근들이 배치된다고 해서 큰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김 의원은 "지사가 대권 도전을 명확히 하셨기 때문에 그 업무 자체가 왜곡될 소지가 있어 보인다"며 "앞으로 대선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 서울본부가 운영되는지에 대해서는 지켜보겠다"고 말했습니다.
변치 않는 사실은, 제주도 서울본부는 제주도민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겁니다. 양덕순 제주대 행정학과 교수는 "예산적 지원뿐 아니라 법률적 지원을 중앙정부로부터 받아야 하는데 국회의원들만으로는 사실 어렵다"면서 "중앙정부와 국회를 계속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노력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서울본부의 역할이자 기능"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원 지사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제주도민에게 좋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울본부가 원 지사 위주로 운영되는 것이 큰 문제가 없다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원 지사가 제주도민에게 '제주도민만 바라보겠다', '중앙정치를 돌아보거나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고 도정에 전념하겠다.'라고 약속했던 만큼, 중앙무대에서의 행보에 대한 어떠한 설명이라도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요?
대권 도전이 기정사실이 된 마포포럼 이후인 지난 21일, 제주도청 기자실을 찾은 원 지사는 "아직 공식 선언한 게 없다"며 "기다리는 맛이 있어야 한다"고 답변했습니다. 또, 휴가 중 서울본부의 관용차를 이용했다는 KBS제주 탐사K 지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어떠한 해명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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