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뉴스2005-11-14 22:22 18
<특집> 독일 통합의학 암치료 현장을 가다

(프랑크푸르트.슈투트가르트=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독일 서남부에 위치한 최대도시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으로도 유명한 이곳에서 기차로 약 2시간을 남쪽으로 달려 도착한 바드 베르크자베른. 전원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이 시골도시에는 아주 특별한 시설이 있다.



언뜻 보면 휴양지에 있는 듯한 분위기가 나는 한 호텔. 이곳 사람들 역시 휴가를 즐기러 온 휴양객들처럼 밝은 표정이다. 그렇지만 이곳은 뜻밖에도 병원이다. 그것도 일반병원이 아닌 암환자들이 치료를 받는 암전문병원. 병원에는 상식적으로 생각했던 암환자의 생활과 너무도 다른 모습이 목격돼 몹시 낯설게 느껴진다.



암환자의 '삶의 질'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는 만들었다는 병실 내부. 이 곳에 있는 의료진은 환자를 최대한 편하게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환자와 의사는 마치 친구 같은 사이다.



암환자를 위한 통합치료프로그램 중 하나인 기공체조는 이 병원의 특별한 치료법이다. 심리학자의 지도로 명상과 기공을 함께 하는 시간. 어느 순간 자연 속의 일부가 된 환자들의 얼굴에선 암환자들에게 흔한 우울한 표정은 찾아볼 수 없다.



다음날 이른 아침. 이 병원 원장 하거 박사와 동료 베링마이어 박사는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두 사람이 함께 도착한 곳은 명상 치료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암치료 방법이다. 누워있는 사람들은 모두 암환자들. 평온한 모습으로 명상치료를 기다린다.



육신보다도 마음의 치료를 먼저 하는 암환자 병원. 이들은 여기서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치료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런데 이들을 보면서 한국의 암환자들의 모습이 불현듯 뇌리를 스친다. 우리나라 암환자들의 모습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몸의 치료만을 통해서 병을 고치려는 상황에 힘든 한국의 암환자들. 그러나 암치료의 첫걸음을 정신치료로 생각하는 독일의 병원은 '건강한 육체는 건강한 정신에서 나온다'는 고전적 진리를 새삼 느끼게 한다. 치료를 받는 환자의 얼굴에는 오직 평온함만 보일 뿐이다.



하거 박사 병원의 통합 암치료 프로그램은 이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보여준 곳은 미술치료실. 이 곳에서도 명상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과연 암치료와 명상은 어떤 관계일까. 또 미술치료는 암치료에 어떤 효능이 있을까. 그림 그리기가 시작되면 환자들은 다들 자신의 작품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다. 미술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고 할 정도로 삼매경에 빠져 있는 사람들.



하트, 버드나무 등이 그려진 그림들은 자신의 내면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짐작된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그림 한편을 완성한 환자는 자신의 작품을 놓고 심리학자와 토론을 벌이며 현재 자신의 내면세계에 관해 설명한다 .



그렇지만 이 병원은 꼭 정신치료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피지컬 세라피'(Physical Theraphy)라고 불리는 종양부위를 직접 마사지하는 치료도 있다. 또한 한국에는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암세포에 고온의 광선을 투과시켜 암세포의 활동을 저지하는 온열치료 요법도 병행하고 있다.



온열치료를 통해 줄어든 암세포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 이 병원이 자랑하는 통합 암치료프로그램의 핵심기술 중 하나다.



<하거 박사 인터뷰>



"이런 치료를 시행하는 데에 밑받침이 되는 철학은 전통적인 치료와 보완적인 치료를 함께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보완치료는 전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개발된 것입니다. 그것은 암을 치료할 때 면역 요법, 심리요법, 물리치료 등을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전통적인 화학요법과 방사선 치료를 함께 받을 경우 그 부작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생존 기간을 연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전통적 치료를 받는 경우에 암 환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통합 암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또 다른 병원을 찾아갔다. 독일 남부 슈투트가르트 근교에 있는 베라메드 병원. 언뜻 봐도 생소한 검사를 하고 있다. 환자의 각 신체부위에 각종 기기를 달고 꼼꼼하게 검사하고 있는 이 모습은 암환자를 위한 통상의 검사와는 사뭇 다르다.



<호츠하워 베라메드 병원장 인터뷰>



"여기에서 우리는 영양학적인 진단을 합니다. 신체의 구성을 측정하는 것입니다. 영양분의 구성 성분을 알아둠으로써 암환자가 식사를 하지 못해 죽는 경우가 없도록 합니다. 또 면역기능 향상을 위한 별도의 항산화제를 투여하며 이것은 다른 병원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요법으로 매우 새롭고 혁신적인 방법입니다. 이 장비가 있으면 영양결핍 상태를 쉽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 병원에서 이 장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 병원에서는 또 모든 항암치료 때 셀레늄이라는 성분을 사용한다. 국내에선 아직 사용기준이 정해지지 않은 특별한 광물질. 이 병원은 환자에게 이를 투여해 면역기능을 높인다고 소개한다.



뿐만 아니다. 면역기능을 높여 식생활 또한 개선시킨다. 환자의 모든 것을 꼼꼼하게 챙기며 이들을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의료진의 태도는 진정한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독일의 통합의학 암치료 프로그램을 도입한 병원은 인간생명의 고귀한 존엄성과 '네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성경말씀을 실천하기라도 하는 듯하다. 환자와 혼연일체가 돼 암이라는 무서운 질병과 함께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병원.



이곳의 환자와 의료진은 때로는 가족으로, 때로는 친구처럼 서로 의지하며 생활한다. 이들은 오늘도 이렇게 사소한 것 하나까지 함께하며 암을 이기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seva@yna.co.kr

제작지원 = 한독 생의학학회 (www.kgbms.org)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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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응급의료②] 일반인도 심장마비 환자 살린다
메디컬투데이 2009-03-18 07:40:34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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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성 갖춘 자동제세동기 보급 확대
[메디컬투데이 권선미 기자] 기차역, 공항, 종합운동장 등 다중이용시설에서 일초가 급한 상황에서 지인이 심장마비 등으로 쓰러진다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화기를 꺼내 119에 연락해 구급차를 불러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답일 것이다.

주목할만한 점은 심장마비 등 급성심정지 응급환자는 초기 응급 상황 발생 이후 1분마다 생존율이 7~10%씩 줄며 10분이 지나면 생존율이 불과 최대 5%를 넘지 않는다고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 응급의학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심장이 정지되는 등 응급 상황이 발생 뒤에는 가급적 빠른 시간내 제세동기 등을 이용한 심폐소생술 등 응급처치를 시도하는 것이 환자의 생존율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 한국인 1/4 심혈관 질환으로 사망

그러나 한국의 응급의료 현실은 일분 일초가 급한 상황과 상이한 결과를 보이고 있다.

지난 2003년 행정자치부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119 구급차가 응급현장에서 병원으로 이송하는 시간 중 '5분 이내는 23%', '5분~10분 3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이같은 결과는 구급차가 응급현장으로 출동하는 시간은 제외한 것이어서 신속한 조치를 필요로한 환자의 생명을 효과적으로 구하는 것에는 한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아산병원 응급의학과 임경수 교수는 "한국은 전체 국민의 1/4이 심장마비 등 심혈관질환으로 인한 사망한다"며 "그러나 이들의 정상적인 사회복귀를 위한 자동제세동기 구비 등은 미흡해 선진국은 심장마비가 일어나도 약 30%가량은 정상적으로 복귀가 가능한데 반해 한국은 이의 1/10 수준인 3%만 정상생활로 복귀한다"고 지적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난해 말 국회에서 응급의료법이 시행되면서 공항, 역사, 공공기관 등 다중이용시설을 중심으로 자동제세동기의 설치가 의무화 되면서 이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법률로 지정하는 다중이용시설이란 2000㎡ 이상의 철도역사 및 여객자동차터미널 대합실, 중앙행정기관 및 지방자치단체 일부 청사, 경마장, 교도소, 총 관람석 5000석 이상의 운동장 및 종합운동장 등이지만 실제 설치된 다중이용시설은 극히 제한적이다.

응급의학회 등 관련 기관에서는 한국의 경우 약 15만대 가량의 자동제세동기의 설치가 필요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필요량의 4%에 불과한 6000대 가량만 보급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관련업계에서는 지난해 말 시행된 응급의료법 발효로 관공서 등을 중심으로 자동제세동기의 보급이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 의료기기 회사 관계자는 "보건소 등 관공서에서 자동제세동기에 대한 관심이 높다"며 "향후 자동제세동기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지면 학교나 KTX, 호텔 등에서도 설치가 일반화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안전성 갖춘 자동제세동기 보급 '확대중'

이렇듯 괄목할만한 성장이 주목받는 자동제세동기 시장을 차지하기 위한 관련 기업들의 움직임 역시 활발하다.

자동제세동기를 판매하는 한 의료기기 회사는 자동제세동기에 대한 낮은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자동제세동기의 사용법과 심폐소생술 등을 알리기 위한 캠페인 등을 진행하고 있다.

다른 의료기기 회사는 외견상 비슷비슷한 자동제세동기에 한국의 최정상급 IT기술을 도입하는 등 차별화를 시도했다.

실제로 GE헬스케어는 응급상황시 환자 이송을 위한 시간을 줄이기 위해 KTF와 MOU를 체결해 자동제세동기를 이용할 때 자동제세동기를 외함에서 꺼내자마자 즉시 가장 가까운 응급의료정보센터(1339)에 위치 등 관련 정보를 전송해 신속하게 응급구조원이 현장에 출동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자동제세동기를 선보였다.

또 KTF가 제공하는 모바일서비스의 GPS 위치추적시스템으로 환자가 발생한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자동제세동기 설치 장소를 조회할 수 있어 급성 심정지 환자 발생 시 보다 빨리 심폐소생을 시도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외에도 응급처치방법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일반인을 위해 동영상 등을 통해서 사용법을 알려주고 있어 지시에 따라 버튼을 작동시키면 제세동이 이뤄진다.

특히 정상 심박박동인 사람을 대상으로 제세동을 시도할 경우에는 버튼을 눌러도 제세동이 가해지지 않아 일반인들 사용시 안전성을 높이는 등 자동제세동기 보급을 위한 관련 업계의 노력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동제세동기에 설치에 대한 응급의료법이 발효된 지금까지 자동제세동기의 보급은 해당 지자체 등에서 예산 문제 등을 이유로 약 300 만원 가량인 자동제세동기의 보급이 크게 확대되고 있지는 않는 실정이다.

심장마비 발생 시 초기 4분의 대응으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자동 제세동기 보급을 위한 기업 등의 노력이 눈길을 끄는 가운데 이들 시장 쟁탈을 위한 기업들의 행보가 주목된다.
메디컬투데이 권선미 기자 (sun3005@mdtoday.co.kr)
동작을 통한 명상 선무(禪舞)
* History

 

한자로는 ‘禪舞' , 영어로는 ‘Zen Dance'라고 하는 선무는 사실 우리에게 그리 친숙한 단어는 아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바자) 독자들 가운데는 선무라는 말을 생소하게 느끼거나 처음 접하는 경우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그 뿌리인 선무가, 이 땅에서보다는 미국이나 유럽 등 다른 국가에서 먼저 알려졌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선무가 우리 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
지난 1995년과 1996년 서울과 부산에서 개최되었던 선무 워크숍을 통해 소개되기 시작, 작년 2월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선무가: 바라밀타 Ⅱ' 작품의 공연으로 좀더 가깝게 다가왔다.
그러나 예술작품으로서가 아닌
건강 무용으로서의 선무 를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특히, 올해들어
문화센터 강좌 선무용건강센터 를 통해 일반인들의 선무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Bazzar. 1998. 4.


* 선무 명상 치료 요법
 


일반인들을 위한 예방차원의 건강요법에서 더 나아가 선무는 치료요법으로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 .
앞서 설명한 것처럼 스트레스가 심화되면 병이 된다.
특히 한방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기의 흐름이 막히고 울화가 발생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잃고 불안해지며 신경질적이 되거나 몸이 나른하고 피곤해진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이 막혀 있는 기를 소통시켜 주는 것이 한방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다.


선무는 기를 단전에서 온몸으로 전달함으로써 기의 흐름을 원활히 해주고 명상의 결과를 동작으로 표현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심층적 무의식의 우울증이나 울화병 같은 심리 치료에 매우 효과적이다. 또한 단전호흡과 목,척추, 골반 등의 유연성을 도와주는 동작을 통해 척추의 건강을 증진시켜 준다. 디스크 환자들의 경우 90퍼센트 이상이 적절한 운동으로 치유가 가능하고, 그 외 7퍼센트에 해당하는 환자들만이 수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선무를 이용한 치료요법은 목, 척추, 골반 등의 전신운동을 통해 척추 수술 후 재활운동이 필요한 환자들의 회복을 도울 뿐 아니라 경미한 환자나 허리가 약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척추를 강화시켜 줌으로써 디스크나 요통 등의 질병을 예방, 혹은 교정할 수 있다.

지난 3월 16일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우리들병원 부설 척추건강연구센터에서는 선무용건강센터(Zen Dance Therapy Center)를 개설했다.
여기서는 재활의학 전문의와 선무의 창시자인 이선옥 교수가 함께 허리 환자를 대상으로 척추 강화운동을 실행하면서 얻은 임상경험을 토대로 보다 다양한 형태의 움직임과 음악적 리듬을 가미하여 허리 환자는 물론 일반인들에도 유익한 선무를 이용한 건강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복근운동과 전신운동을 통한 허리 주변 근력강화와 유연성 증가, 심폐기능의 강화로 허리 환자의 요통을 감소시킬 뿐 아니라 운동이 부족한 현대인들에게는 튼튼한 허리와 유연한 몸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동작을 통한 명상으로 허약한 척추뿐 아니라 마음까지 진정한 건강을 찾을 수 있다.

 

선(禪) 무용가 이선옥

춤을 통해 깨달음으로 가는 길

1997년 2월 예술의 전당 토월 극장에서는 바라밀타 2 - 1997 이라는 공연이 화제
를 모았다. 목탁, 바라, 염불 등 사찰 소품들이 등장하고, 무용수가 걸친 종이옷
에 붓으로 글씨를 쓰고… 사물놀이패의 현란한 연주와 함께 어우러진 무용수들의
춤사위는 사뭇 이채로웠다. 당시 “뉴욕 선무용단”을 이끌고 왔던 재미 무용가
이선옥 박사. 28년의 오랜 뉴욕 생활을 접고 97년 10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8세 때부터 무용을 시작한 그는 김백초, 이매방, 김소희 선생으로부터 현대 무용,
한국 무용, 가야금 등을 사사했고,1969년 도미하여 마사 그레이엄,에릭 호킨로부
터 테크닉을 사사했다.1984년 뉴욕대학 무용과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동대학
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동양의 선철학을 바탕으로1972년 선무(禪舞, Zen dancing)를 창안하여 그는 국내
보다 미주 유럽 쪽에서 명성을 쌓아 왔다. “반야 심경에 나오는 저 언덕이 피안
의 언덕…. 열반에 매력을 느껴 선무를 만들게 됐다. 열반을 예술로 표현하고 싶
은 마음에서 출발된 것이다.”


1971년 미국에서 숭산스님으로부터 선을 사사한 그는 1978년 인천 용화사 송담스
님에게서 ‘이뭐꼬(깨달은 자, 즉 불타가 되기 위한 수행 방법인 1,800개의 공안
을 원점으로 돌리는 공안.윤회를 끊고 더러워진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위치로 되
돌아가고자 하는 작업)를 받아 단전 호흡, 수인법(手引法)을 조화시켜 선무를
완성시켰다. 참선의 원리인 좌선의 원리가 행선의 원리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춤 선의 원리로 확장된 것이다. 선무는 춤추는 선을 통해 깨달음으로 가는길을 찾는 작업이다.

1986년부터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그의 선무는 1994년 프랑스 르 롱 포엥 원형
극장에서 선무가:바라밀타 I 을 발표하면서 8차례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세계적
인 주목을 받게 됐다. 1996년 아시아 소사이어티의 부원장직을 역임하면서 뉴욕
다니케이 극장에서 아시아 현대 무용제를 감독하기도 하고, 선무에 관한 책들을
저술하기도 했다. 현재 링컨센터 내 공연 예술 도서관에는 그의 선무에 관련된
비디오 테이프, 논문, 책 등이 모두 소장되어 있다.

“선무는 ‘순수하다’ ‘동양적이다’라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서양인들은 의외
로 동양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들에겐 동양의 명상이 첫사랑일 테니까. 그
만큼 열렬하다. 그들이 선무를 배우려는 자세는 진지하다. 그들은 열심히 알고자
노력하고, 또 그것을 활용하는 일에도 적극적이다.배워서 자기네 것으로 만들 줄
안다.”불교에서의 이상적 상태를 표현하고자한 작년 바라밀타 2-1997의 한국 공
연이 그에겐 귀국의 계기가 됐다.“뉴욕 생활은 이제 계속되풀이에 불과할 것 같
았다”라는 이유. 1969년 도미한 이후 공연순회 강연 등 수많은 활동으로 주목받
아 온 그는 28년의 오랜 외국 생활을 뒤로 하고 이제 고국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
했다. “고향을 떠나야 고향이 보인다.다행히도 한국 무용을 외국에 소개하는 활
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우리 것의 좋은 점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아, 한국이
참 좋구나. 새삼 느끼게 됐다.”


그는 요즘 포천중문의대 보건복지대학원 교수로,그리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선
무 강의를 하고 있다. 배우는 일에 열의를 보였던 외국인들과 달리 강의를 쉽게 빠지고, 과제물을 제때 해오지 않는 한국인들을 보면서, 그는 당혹스러움을 감추 지 않았다. “나는 나름대로 강의에 대한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얼마의 시 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의 성과는 얻어지겠지. 그런데 그 계획대로 학생들이 충분 히 노력하지 않으니… 우리 것인데, 더욱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 닌가.”오랜 외국 생활에서 돌아와 마주친 한국의 모습은 그에겐 낯선 것이었다. 처음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그는 실력보다 인맥이 우선되는 한국 풍토에 당황 했고, 세계를 향해 닫혀진 시야에 또한 당황했다. “흔한 말로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는 것 아닌가. 이제는 모든 것이 국제적인 체계로 돌아간다. 외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합리성, 기술적인 노하우를 배워야 한다.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에 적용하는 일이다.”


그는 우리 것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우리의 산이 좋아 평창동 산 밑
에 집을 마련했고, 그 집에서 그는 늘 우리 무용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일에 골몰 한다. 문화 예술도 상품인 시대 아닌가. 아름답고, 싸고, 좋고…. 우리 무용을 누구나 환영할 만한 상품으로 만들어 세계에 수출하고 싶은 바람이다. 그는 젊은 이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했다. 배우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인터넷등 못 하는게 없는 앞선 모습도, 든든해 보인다.다만 숙제는 제때 해왔으면 좋겠다 하 하. 우리젊은이들에겐 무엇보다 책임감이 필요한 것 같다. 프로 의식 같은 것이 요구 된다. 마음부터 닫지 말고, 많은 것을 공부해야 한다.”


그는 내내 한국 사회에 대해 신랄한 평가를 놓치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습관 처럼 이미 무감각해져 있는 부분들이 그에겐 새삼스레 느껴지고 또 답답한 모 양이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은 묻는다. 그럼 한국 사회의 좋은 점은 없는가? “안 되는 것도 없더라. 밤낮 해 부치는 정신…. 자신감도 있고, 이젠 배고프지 않으니 낭만의 아름다움도 있고.”


그는 한국에서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한국 무용을 외국어로 번역 해 세계에 소개하는 작업을 중요하게 꼽는다. 우리 나라 최고의 대형 서점에서도 외국어로 씌어진 한국 무용에 관한 책을 찾을 수 없었다. 많아야 3~4권 정도.
세계화 시대에 무엇보다 계속되어야 할 중요한 작업이 아닐까.
그에겐 가장 한국적인 무용을 추구하면서도 세계를 향해 열려진 국제적인 면모가
엿보였다. 자신의 무용 철학을 한국의 전통 속에서 찾아 그것을 국제적인 차원의
예술로 승화시켜 내는 그의 활동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치 있게 여겨지는 요즘
아닌가. “그릇은 비어 있을 때, 물을 담을 수 있다. 빈 마음에서 창작의 욕구는 생겨난다. 이런 철학은 다분히 동양적인 참다운 우리의 모습이다.”

 

 
 
출처 부드러운 질서 | 지현
원문 http://blog.naver.com/krshna/30004149242

Asia Pacific Performing Arts Network 아시아 태평양 공연예술 네트워크


7th APPAN International Festival-Symposium 2006 :

"Meditation and Healing in Asia Pacific Performing Arts"

서울2006, 7회 아태생명예술 : 명상치유공연예술 축제와 심포지움

May 1-4, 2006, Seoul

1. 개요

○ 행사명 : 서울 2006, 7회 아태 생명예술 - 명상치유 공연예술 축제와 심포지움

○ 일 시 : 5월 1일(월)~4일(목) / AM9:00 ~ AM21:00

○ 장 소 :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

○ 주 최 : APPAN 한국본부,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 후 원 :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여성개발원,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문화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환경방송, 포천중문의과대학 대체의학대학원, 군인공제회, 원불교 특별교구


2. 행사 내용(예정)

가. 공연(2회공연) ○일시:5월2일(화)~5월3일(수) 시간: 3:00~5:00PM & 7:00~9:00PM

국가명

공연내용

공연자

기타

인도

구티야탐

Kutiyattam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재 지정

일본

노(Noh)

Fusao Okamoto,

Tetsuhisa Tanabe

일본 ‘노‘ 인간문화재

티벳

명상음악

Nawang Khechog

세계적 명상음악가

캄보디아

업샬라

Ouk S Olichmnit

궁중의식무용

네팔

의식무

Cham 공연단

전통 제식무용과음악

중국

군슈

Ke Jun

중국 유명 경극배우

인도네시아

전통의식무

Didik Nin Thowok

다재다능한 전통,현대 무용가

한국

선무도와 선무

범패작법

가야금병창-법성게

승무

설위설경

비나리

이선옥과 선무용단

동희스님과 제자들

지순자, 지미자

이매방

조부언과 제자들

이광수와 제자들

세계적인 Zendance Company

무형문화재 전수자

중요무형문화재 23호 전수자

중요무형문화재 97호

태안설위설경,무형문화재 전수자

사물놀이의 원조



출처 . | 나주인공
원문 http://blog.naver.com/km10002002/60020177825
[이 사람의 삶]

‘禪舞’ 창시자 이선옥 “난 기생이다, 황진이다, 혁명적 예술가다”
어릴 적부터 못 말리는 춤꾼이었던 현대무용가 이선옥은 저 멀리 뉴욕 땅에서 선무를 창조했다.
선무는 춤으로 명상하고 춤으로 번뇌를 해소하는 참선의 일종.
3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이선옥은 선무의 역사를 새로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나는 또 누구인가. 이모꼬. 이것이 무엇인가. what is this? 이 한 생각만을 골똘히 되풀이한다. 다른 모든 생각은 잘라버린다.

호흡은 단전에 모은다. 숨을 내쉬면서 단전·회음부·항문(이를 ‘단회항’이라 부른다)을 수축하고 숨을 들이쉬면서 단회항을 이완시킨다. 이모꼬와 단회항 수축을 병행한다. 손과 발은 천천히 움직인다. 동작의 교본은 전혀 없다. 제 몸이 원하는 대로, 팔다리가 가고 싶은 대로 완전히 내맡긴다. 오직 이모꼬와 단회항 수축에만 정신을 집중한다.

이것이 선무(禪舞)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선무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단전호흡, 이모꼬, 그리고 수인. ‘수인’이란 열 손가락을 서로 얽거나 당겨 무드라를 만드는 동작이다. 수인을 위아래 좌우로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머리로는 이모꼬, 손은 수인, 단회항은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그러면서 줄곧 움직이는 제 몸을 보아야 한다. 느리고 단순한 동작, 골똘히 한 생각에 잠긴 머리, 우주의 기(氣)를 들이쉬고 내뱉는 호흡. 명상과 해탈과 참선이 따로 있지 않고 건강과 쾌락과 예술이 둘로 나뉘지 않는다. 이것이 지난 몇 달 내가 지켜본 선무의 이론과 실제다.

이선옥은 ‘선무’라는 새로운 춤을 만든 무용가다. 춤으로 명상하며 춤으로 마음속 번뇌와 즐거움을 풀어내는 동작을 만들었다. 몸은 마음을 끌고 다니고 마음은 몸 안에 있으니 춤으로 몸이 풀리면 마음에 맺힌 번뇌도 덩달아 풀린다. 반대로 마음에 쌓인 울화가 풀리면 몸에 맺힌 울혈도 함께 풀려나간다. 선무는 춤이되 약이다. 예술이되 의학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에 똑같이 작용해 맺힌 의식을 해방한다.

동양여자의 美는 어깨와 목 선

현대무용과 한국무용의 전과정을 마스터하고 세계의 온갖 예술이 모여 용광로처럼 들끓는 뉴욕 한가운데에 던져진 이선옥은 온갖 공연예술을 몸으로 느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선무라는 낯선 장르의 춤이 제 마음속에 이글이글 고이고 발효하고 숙성하여 그는 선무의 숙주가 되었다. 결코 ‘저절로’라고 말할 순 없다. 그는 탐구하고 고민했다. 세계무대에서 동양여자의 몸을 가진 내가 찾아내야 할 동작은? 세계인을 매료시킬 춤의 에센스는? 그게 무엇일까. 그는 엄청난 열정으로 궁구(窮究)했다.

“뉴욕에서 춤추는 서양애들 보니까 하나같이 쭉쭉빵빵이야. 동작을 할 필요도 없는 거예요. 보고 있는 것만으로 너무나 아름다우니까. 보시다시피 나는 키가 작잖아. 다리도 짧지. 가슴은 크지만, 하하. 서양애들에 비해 섹스어필이 없잖아. 춤이란 결국 얼마나 섹시하냐가 관건이거든. 섹시하게 관객을 사로잡아야 하거든. 걔들하고 같은 무대에 서면 도무지 게임이 안 돼. 어떻게 쟤들을 따라잡나? 어떻게 오버컴할까? 그게 내 화두였어. 자나깨나 그것만 생각했어요.”

전람회나 연극, 연주회를 빠지지 않고 찾아 다녔다. 그러면서 마음속 화두를 풀어낼 감각을 곤두세웠다. 물론 춤을 추면서.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이매방 선생에게 배운 살풀이와 한영숙 선생에게 배운 승무를 췄다.

“한국에 있을 때도 나만큼 살풀이를 추는 사람이 없다고 했거든. 살풀이는 팔 한번 크게 펴지 못하고 애끊는 한으로 엉겨 있다가 나중에 그걸 훨훨 풀어내는 춤이거든. 춤 중에서 단연 최고의 춤이지.”

어느 날 피카소의 그림을 감상하다가 ‘에로틱 아트’라는 장르를 알게 됐다. 동양여자들이 그려진 춘화집을 구했다. 그는 중국과 일본의 여자들이 주로 등장하는 ‘운우(雲雨)’라는 춘화집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

“옛 그림에 나오는 동양여자들 몸의 선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거야. 그 포인트는 목과 손과 어깨의 선이더라고. 서양여자처럼 다리와 가슴과 엉덩이가 아니더란 말이지. 아하, 동양여자의 아름다움은 아랫도리가 아니라 어깨 위에 있구나! 이걸 발견한 거지. 미국여자는 섹스어필을 다리에서 얻어요. 프랑스 여자는 가슴이고 이탈리아여자는 엉덩이죠. 그런데 일본여자는 목선이에요. 게이샤들이 기모노를 뒤로 한껏 젖혀 입는 걸 보라구! 중국여자도 어깨와 목이야. 아랫도리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발이거든. 우리 풍속화 속의 여자들도 반달 같은 눈썹에 크게 틀어 올린 머리 아래로 가늘고 염염한 어깨와 목선을 드러내잖아. 그게 엉덩이와 다리를 덜렁 드러내놓는 것보다 훨씬 섹시하다는 걸 깨닫게 된 거지.”

그리고 손가락의 선, 고요하게 정교하게 움직이는 하얀 손가락의 신비. 그는 그걸 느끼면서 매혹적인 선무의 기본동작들을 머릿속에 좌르륵 저장했다. 직관으로, 어쩌면 자신조차 구체적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불교는 선험(先驗)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자장가를 독송(讀誦)으로 불러줬다. 늦게 얻은 막내인 그를 신묘장구대라니 같은 주력(呪力)으로 재웠다. “세상 천지에 독송만한 자장가가 어디 또 있겠어요.” 무의식, 혹은 전생에 이미 불교와의 인연이 밀접했다. 그는 할 얘기가 무진장한 사람이다. 제 인생의 비밀과 깨달음을 꽁하고 가슴속에 묶어두지 않는다. 자유자재, 무장무애하게 털어낸다. 드러난 제 삶에 애착하지도, 항변하지도 않는다. 저만치 떠밀어내고 하하 웃으며 바라볼 줄 안다. 그는 춤추는 사람이다. 춤 안에 참선과 명상을 버무려놓은 사람이다. 버무린다, 이것은 혼합물을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춤이 곧 선(禪)이었다. 춤으로써 그 어렵다는 참선에 드는 디딤돌을 놓은 것이다.

이선옥의 이야기는 듣고 또 들어도 새롭다. 제 삶을 치열하게 살고 난 뒤 그걸 윤색도 포장도 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열어두는 사람만이 갖는 풍요라며 나는 감탄했다.

“사람들은 감정을 돌에 새겨요. ‘I hate you’라고. 집착이죠. 그러니 크게 얽매일 수밖에 없어요. 수행을 한 사람은 모래 위에 글씨를 써요. 파도가 밀려오면 글씨는 곧 쓸려나갑니다. 그만큼 자유로워지는 거지요. 도인은 물 위에 글씨를 씁니다. 쓰는 순간 지워지죠. 부처요? 부처는 허공에 씁니다. 부처라도 아예 쓰지 않는 것은 아니죠. 쓰더라도 아무런 자취가 남지 않는 것일 뿐.”

인간의 마음 안에 떠도는 희로애락애오욕과 탐진치를 이토록 탁월한 메타포에 담아내다니.

그의 어머니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전생을 읽고 미래를 예견하는 힘을 가진 분이셨다. 그는 그런 어머니가 나이 마흔여섯에 얻은 늦둥이였다.

“며느리 볼 나이에 아이를 가진 게 남부끄럽다고 날 떼어내려 모진 한약을 꽤나 들이켰답니다. 그런데도 안 떨어졌으니 내가 더 지독했던 거지. 출산할 때 다리가 먼저 나왔대. 그래서 ‘서있다’고 선옥이라 이름지은 거래요, 하하. 그렇게 낳은 지 1년 동안 사경을 헤맸대요. 어머니가 날 안고 백일기도를 했답니다. 백일째 되니까 드디어 미음을 먹더래요.”

이선옥은 개성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한국전쟁이 터졌다. 아버지는 전쟁중에 지병이던 천식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날, 어머니는 “내일 11시에 너희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이라며 침착하게 수의를 지으셨다.

피난처 부산에서 이매방 만나

아버지를 개성에 묻고 부산으로 내려간 건 1·4후퇴 때였다. 그의 말투를 가만히 들어보면 서울말씨에 이북말투와 경상도 억양이 살짝살짝 묻어난다. 한때 살았던 땅의 기억은 발음의 습관으로 남아 혀끝을 끝끝내 질기게 휘감는구나. 우리를 훑고 지나간 모든 감각이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듯.

삶은 우연이 아니라 엄연한 법칙에 의해 운행되는 철저한 질서인지도 모르겠다. 피난살이를 하던 부산집 2층에 이매방 춤연구소가 있었다는 것은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매방은 살풀이에 일가를 이룬 춤꾼이었다.

아이 이선옥은 매일 창문 너머 춤연구소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제 집으로 내려와 춤을 흉내냈다. 엄마 치마저고리를 뒤집어쓰고 춤동작을 따라했다. 그에겐 오빠가 셋 있었다. 오빠들은 막내동생이 춤추는 것에 질색했다. 종아리를 걷어 회초리를 들었다. “기생이 되려고 그러냐, 무당이 되려고 그러냐”며 오빠들은 그를 꾸짖었다. 그러나 이선옥은 항복하지 않았다. 매를 맞은 후 다시 춤을 흉내냈다.

“어머니만은 말리지 않았어요. 얘는 이런 걸 해야할 아이이니 그냥 놔두라고 오빠들을 막아줬어요. 하긴, 그때 춤추는 사람은 기생 아니면 무당이었으니까. 어머니는 내가 나중에 먼 나라에 가서 여러 사람의 박수를 받으면서 섬에서 살 것이라고 예견하셨지요.”

“섬이라고요?”

“맨해튼이 섬이잖아요.”

4학년 때 서울로 올라온 이선옥은 을지로에 있는 김백초 무용연구소에 다녔다. 어린애가 선생을 찾아가 당차게 협상했다. “나는 돈이 없다. 대신 최고로 열심히 하겠다.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는 걸로 교습비를 대신하겠다”고.

10원 한 장 내지 않고 김백초 선생에게 현대무용과 한국무용을 고루 배웠다. 김백초 선생은 최승희의 제자로 1953년 미국에 건너가 마사 그레이엄에게 현대무용을 배운 이였다. “너무 아까운 분이야. 1963년에 집안문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거든.”

그는 인복을 타고났다. 늘 최고의 스승이 인생 길목에서 우연한 듯 서 있곤 했다. 김백초 선생이 그랬고, 나중에 다시 만나 살풀이춤을 전수해준 이매방 선생이 그랬다. 창을 가르쳐준 김소희 선생, 승무를 가르쳐준 한영숙 선생도 그랬다. 남들이 도시락을 싸서 찾아다닐 만한 대스승들이었다.

초립동춤을 추는 귀여운 용산초등학교 여학생을 눈여겨본 사람은 상명학교의 배상명 교장이었다. 그는 이선옥을 유난히 예뻐했다. 당시 이화여고가 무용으로 가장 유명했지만 이선옥은 배상명 선생이 계시는 상명학교에 장학생으로 뽑혀갔다.

중학생 때 이미 안무를 직접 했다. 촛불을 켜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어린 나이에 가당찮게도 죽음을 명상했다. 죽음을 주제로 한 안무로 이선옥은 서라벌예대 콩쿠르에서 특등상을 탔다.

1985년 딸과 함께 미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모습.

중학교 2학년 때 한 무용 콩쿠르에서 한 아이가 추는 살풀이춤을 봤다. 처음 보는 춤이었다. 한승서라는, 그 이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며칠동안 그 춤동작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승서의 선생을 알아내기 위해 수소문을 했다. 그 옛날 부산 피난시절, 무작정 시늉하던 바로 그 이매방 선생이 한승서의 선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매방 선생에게 절을 하고 살풀이춤을 배웠다. 열댓 살의 이선옥은 이미 프로 춤꾼이었다.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춤을 췄고 용돈을 벌었다. 동년배 소녀들은 단발머리를 해도 이선옥만은 긴 머리를 구불구불하게 땋아 정수리에 말아올린 헤어스타일을 하는 특별대우를 받았다. 춤 외에는 아무것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탤런트 박주아와 선우용녀 언니가 우리 무용반 선배였어요. 선우용녀 언니는 정말 예뻤어. 난 춤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어. 해가 어두워질 때까지 무용반에서 춤만 췄으니까. 가끔 한강에 스케이트 타러 가는 게 유일한 외출이었어. 동화백화점 뒤편 극장에서 외국영화를 엄청 봤지. 그때 본 영화들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는 당차고 진취적이었다. 매사를 완벽하게 처리했고, 끊임없이 상승의욕에 불타는 인간형이었다. 그가 대학을 옮겨다닌 내력을 보면 그 기질을 짐작할 만하다. 아니 한자리에 뿌리내리는 것을 못 견뎌하는, 방랑벽의 소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애초에 숙명여대 보건체육과에 입학했다. 전액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도중에 어떤 이유로 틀어져버렸다. 그는 얼른 수도사대 체육학과로 옮긴다. 그러나 체육학과에는 무용보다 원반던지기나 기계체조 같은 커리큘럼이 많았다. 미국유학을 꿈꾸던 이선옥은 ‘이럴 바에야 영문학을 하자’는 생각에 숭실대 영문학과로 다시 학교를 옮겼다.

숭실대에서 이선옥은 영어웅변대회, 영시낭송대회 등을 휩쓸어 지도교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 지도교수가 건국대로 자리를 옮기자 이선옥은 지도교수를 따라가 결국 건국대에서 졸업을 했다.

“국립무용단이나 국악원이 생기기 전이었기 때문에 나라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춤추러 불려다녔어요. 이생강, 서용석 선생이 우리 같은 어린 계집애들을 위해 연주해줬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대학생 때 약수동에 집 한 채를 샀지요.”

사람들은 춤을 추는 그에게 혹했다. 어쩜 저렇게 예쁘냐며 감탄했다. 몸놀림과 머리카락이 딱 기생같다고 했다. 기생이라고? 그러나 이선옥은 ‘오우케이!’하며 그 말을 받아들였다. ‘오우케이’는 지금도 여전하다. 낙관과 긍정의 대단한 힘을 가진 ‘오우케이’이다.

“오우케이, 난 기생이다, 황진이다! 황진이가 혁명적인 예술가라는 것을 책을 보고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난 기껏해야 금강산 기행이나 한 황진이와 다르다, 세계를 누비는 혁명적인 예술가가 될거다, 그랬습니다.”

뉴욕에서 부딪친 삶에 대한 질문들

1994년 파리 공연 포스터.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등록을 마친 1969년, 이선옥은 미국으로 떠났다. 처음부터 미국이 목적지는 아니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세계무역박람회 직원으로 한국 땅을 떠났다. 그러니 비행기 값과 숙식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6개월 후 캐나다를 떠나 뉴욕으로 향했다.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세계적인 춤꾼이 되겠다는 목적만 뚜렷했을 뿐.

이선옥은 일단 국제연합(UN)의 안내원이 되었다. 선발기준이 까다로웠지만 영어에 능통하고 얼굴이 고운 그는 쉽게 합격했다. 그는 욕심이 많았다. 디자인스쿨에도 등록하고, 보석디자인학원에도 나갔다. 아예 보석 연마 기계까지 하나 사들였다.

“내가 사치하기를 좋아하거든요. 멋쟁이를 만나면 옷과 보석, 화장을 뜯어봐요. 샛물이 모여 바다로 흘러 들어가듯 그게 다 춤으로 귀결되거든요.”

1972년, 미국에 도착한 지 4년 만에 카네기 리사이틀홀에서 이선옥은 첫 발표회를 가졌다. 연일 공연이 이어졌다. ‘뉴욕타임스’가 그에 대해 호평을 썼다. 성공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미진했다. 환호 속에서 무대를 내려와 빈방으로 돌아오면 ‘너는 누구지?’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생겼다. 거울 앞에 혼자 앉아 ‘지금 뭘 하고 있지? 왜 이렇게 멀리 와 있는 거지?’라는 질문에 매달렸다. 외로웠다. 허망했다. 질문들은 거울 안의 자그맣고 어린 여자에게 벌침처럼 아프게 날아갔다.

“너는 왜 화장했지? 지금 뭘 하는 거지? 너는 누구지?”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삶의 답을 찾고 싶었다. 마침 뉴욕에 ‘원각사’라는 절이 생겼다. 숭산스님이 오셨다. 그는 찾아가 엎드렸다.

“고통 없는 피안의 언덕이란 것이 정말 있습니까?”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스님은 그걸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안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너는 그걸 하면 돌아버릴 거다”라고 했다. 스님이 된다면 나도 안될 리 없지 않느냐고 매달렸다.

“머리를 깎겠다고 했어. 그랬더니 너는 춤을 춰야지 머리를 깎으면 안 된대. 우선 독송을 열심히 하래. 주력을 외기만 하래.”

그래서 그는 앉으나 서나 경(經)을 외고 다녔다. 맨해튼 거리의 모든 간판, 펼치는 책과 신문,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로 보였다. 그는 무섭게 집중하는 스타일의 사람이다. 불경과 다라니 외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땐 정말 미쳤지. 그렇게도 경이 좋았어. 그것만 하고 살면 다른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지.”

한참 후 큰스님을 뵙고 물었다. “참선은 꼭 앉아서만 해야 합니까?” 그는 어릴 적 다리를 다친 적이 있어 가부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님이 답하셨다. “아니지. 선에는 좌선도 있지만 행선도 있다. 걷는 주(走), 말하는 어(語), 눕는 와(臥), 빨리 움직이는 동(動), 입을 다무는 묵(默)이 다 선이 될 수 있다. 떠오르는 생각과 마음자리를 관(觀)할 수 있으면 그게 뭐든 다 행선이다.”

그 대답이 깨달음이었다. ‘그렇다, 춤도 곧 선이 될 수 있다. 춤선!’

선무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진작부터 자신 안에 싹을 틔웠던 동작들에 단전호흡과 명상, 나중에는 손가락을 사용하는 무드라를 도입했다. 1975년에는 뉴욕예술고등학교 학생들에게 한국무용을 가르쳤는데, 그때 학생들을 중심으로 ‘젠 댄스’ 무용단을 만들었다. 소호에 200평짜리 공장건물도 하나 샀다. 국제연합에서 받은 퇴직금 4000달러로 골동품을 사고 팔아 돈을 10배로 늘린 덕분이었다. 공장 터 절반에 아파트를 지어 팔았고 나머지 절반에 선무를 상설공연하는 소극장을 지었다. 1976년의 일이었다.

‘춤도 곧 선이 될 수 있다’

“미국은 내게 행운을 가져다줬어요. 노력했지만 그게 노력인 줄도 모르고 그저 좋아서 했거든요.”

1978년에는 뉴욕대학에서 한국무용을 강의해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뉴욕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1984년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이모꼬 3회 전개, 선무의 안무법’. 혈혈단신 빈손으로 미국에 온 지 15년 만에 그는 박사학위와 뉴욕대학 교수직과 맨해튼에 있는 커다란 집을 가진 부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몹시 바빠졌다. 여기저기 공연이 많았다. 온갖 잡지가 그에 대한 찬사의 글을 썼다. 예술가로서 뉴욕무대에서 뚜렷하게 자리잡았다. 1986년 만든 작품 ‘로터스 1∼6’이 프랑스에서 큰 찬사를 받았고, ‘바라밀다 1∼3’이 객석으로부터 숨죽인 찬탄을 끌어냈다. 이선옥은 2000년부터 현재까지 ‘색즉시공’ 시리즈를 계속 공연하고 있다.

그는 선무를 만들면서도 최고의 스승을 적재적소에서 만났다. 숭산스님에게서 주력을 배웠고, 송담스님에게서 화두에 드는 법과 단전호흡을 배웠다. 범어사 양익스님에게서는 밀교의 수인법을 배웠다.

“이모꼬는 생각이 끊어지는 수행법이에요. 명상하는 주체가 성성적적하게 살아있되 아무 잡념 없이 마음을 텅 비워놓는 거지요. 단전호흡은 우주의 기운을 빨아들이고 몸안의 노폐물과 격한 감정을 바깥으로 내뱉는 것이며 수인법은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척추와 골반, 목의 균형과 유연성을 잡아주는 작용을 합니다. 몸을 비틀어 빨래 짜듯 몸안의 나쁜 기운을 짜버릴 수 있게 도와주죠.”

1995년 뉴욕타임스는 그의 선무 작품 ‘바라밀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선옥은 서양 현대무용과 현대음악, 그리고 참선의 수행법에 새로운 패션감각을 덧입혀 경탄할 만한 창작력, 그녀만의 춤 의류, 춤의 세계를 웨딩마치의 발맞춤처럼 누볐다. 비록 종교무용은 아니지만 그녀의 작품은 단순한 감정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선불교를 향한 사상을 표출한 것이다.

이선옥의 작품세계는 극적이며 실험적인 요소가 함축되어 있다. 선무 무용수들은 안무가와 똑같은 집중력으로 관중을 매료시킨다. 그녀들의 천천히 움직이는 동작들(밑으로 내려가는 동작, 한 발로 서있는 동작, 또는 꺾은 발동작)과 불교 수인법(손가락을 바깥으로 보이게 하고 엄지손가락을 둘째손가락에 붙이는 동작)은 다리와 팔을 쭉 펴는 동작보다 더한 긴장감을 준다.

‘보시’라는 춤에서 이선옥은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소리로 염불을 하며 나타난다. 오보에는 콧소리를 내고, 징과 거문고는 가늘게 울리고, 이선옥은 예식의 진행처럼 천천히 움직인다. ‘지계’에서는 무대 중앙에 횡으로 화선지를 펼쳐두고 임형택이 붓으로 그림을 그린다. 무용수 상체와 옷에도 먹으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인욕’에서는 불교무술 금강승을 익힌 젊은 남자가 합장한 자세로 튀어나오면서 주먹과 손으로 허공을 치고 다리를 꼰 채 생명감 넘치고 신비스런 동작으로 하늘 위로 높이 튀어오른다.’

뉴욕과 파리에서의 성공

선무의 장면 ‘연꽃 2’(1987)

1986년 파리의 ‘롱 포엥’ 극장에서 ‘로터스 1’을 초연할 때 이선옥은 상체를 완전히 벗어젖힌 채 무대에 섰다. 반쯤 돌아선 채로 도톰한 제 젖가슴을 화선지로 내놓았다. 그 가슴 위에 머리를 깎은 젊은 남자가 먹으로 그림을 그렸다. 벗은 어깨의 수줍은 선, 목에서 얼굴로 올라가는 가련하고 슬픈 선, 위로 쳐든 흰 손가락이 그리는 간절한 선…. 그 몇 개의 선만으로도 무대가 꽉 찼다.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거의 있는 듯 마는 듯한 동작이 끊일 듯 이어졌다. 아쟁이 쟁쟁 울었다. 붓이 흰 살 속에 깊이, 강렬하고도 두려운 먹빛을 선연하게 새겼다.

이선옥은 허리를 약간 꼰 채 손가락을 더 높이 쳐들었다. 부처와 지옥, 고뇌와 황홀, 인욕과 해탈이 거기에 말없이 담겨 있었다. 객석에서는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종이 한 장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릴 것 같은 긴장된 무대였다. 그는 관객의 마음을 쥐었다 놓았다 자유자재로 요리할 줄 알았다.

당시 이항성 화백이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이 화백은 언제나 선무 공연장으로 찾아왔다. “자네는 손가락 끝으로 우주를 뱅뱅 돌리는구먼.”

“이 선생님이 우리 단원들을 집으로 초대해 고기도 구워주시면서 멋지게 대접해주셨지. 그러면서 현대적인 그림을 그리라고 충고해주셨어.”

‘바라밀다’(1994).

이항성 화백은 자신도 춤판에 낄 수 없느냐고 물어왔다. 대환영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두고 이 화백은 밤을 새워 선무단을 위한 대작을 그려주었다. 이 화백이 그린 그림을 무대에 깔고 ‘연꽃 2’를 공연했다. 그림 한가운데 관세음보살의 자세를 한 이선옥의 사진을 박아넣은, 신비한 분위기를 띠는 먹그림이었다. 이 그림의 캔버스는 당연히 조선의 창호지였다. 이선옥은 창호지를 찢으며 무용수들을 등장시켰다. 창호지는 재생과 해탈을 상징하는 최상의 메타포였다. 대성공이었다.

“내가 조선종이를 무척 좋아하니까 이 선생님이 염색한 조선종이 몇 다발을 내놓으셨어. 그 전까지는 무용수들의 옷을 값싼 중국산 실크로 해입었거든요. 조명에 반사되고 미끈거려서 영 좋지 않았어. 조선종이로 옷을 만들면 어떨까 싶었지. 조선종이를 풀로 붙이고 접고 하니까 훌륭한 의상이 되는 거야. 뉴욕에서 의상 공부한 게 큰 도움이 됐어. 값은 실크보다 훨씬 비쌌지만….”

선무는 이렇게 종이 의상으로 인해 더욱 신비롭고 다채로운 상징의 옷을 입게 된다.

“우리 종이는 질감이 부드럽고 질기죠.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찢을 수도 있잖아. 삶과 죽음의 경계, 집착을 끊는 수행의 표현으로 그만한 상징이 어디 있겠어.”

그때 이항성 선생이 그려준 작품은 현재 서울 평창동 이선옥 선무센터 연습실 벽면에 압도적인 기운을 내뿜으며 걸려 있다.

앞서 말했듯 선무는 춤이면서 명상이고, 예술이면서 치료이다. 동작, 음악, 호흡, 화두를 통해 개인에 잠재해 있는 무한한 힘을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춤동작을 반복하는 중에 절로 심신의 평정을 얻고 삶에 대한 새로운 의욕과 활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결혼하지 않고 아이 낳아

‘바라밀다’(1994).

이쯤에서 그의 파격적인 개인사를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21세기를 사는 독신 여자들이 혹 꿈꿀 수도 있는 모험적인 일을 그는 이미 지난 세기에 이루어냈다. 그는 남편은 싫었지만 아이는 원했다. 마흔의 나이에 가까워지자 아이를 한번 가져보지 못한다는 것은 미숙한 인생 아닐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폐경기가 오기 전에 어머니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사귀는 남자는 없고 친한 미국인과는 도무지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지 않았다. 미국남자와는 함께 식사하고 토론하는 정도는 괜찮은데 더 이상의 접근은 절대사절이었다. 연애가 불가능했다. 그는 김치 먹는 한국남자만 좋았다. 그 무렵 그는 태몽 비슷한 꿈을 자주 꾸었다.

“바닷가를 걸어가는데 저 앞에는 절이 있어. 무지개는 아니지만 뭔가 서기(瑞氣) 같은 것이 내 뱃속으로 쫙 뻗치는 거예요. 꿈을 깨고 나서 이것은 영락없이 태몽이라고 여겼죠. 하루는 공연을 마치고 기진해서 TV를 보고 있는데, 하와이에 있는 절이 나오더군요. 거기에 가고 싶어지더라고. 갔지. 거기서 어떤 남자가 내게 자꾸 말을 걸어요. 수행을 하는 한국남자였지. 그에게 내 고민을 얘기하고 도와달라고 했어.”

한달 후 남자가 뉴욕으로 왔고 사흘을 함께 지냈다. 테스트를 해봤다. 그러나 임신은 아니었다.

“이게 다 망상이구나, 하고 잊어버렸어. 늙어서 주책이다, 하고 말았어. 그런데 한달 후 그 남자가 다시 전화를 했어. ‘천하의 이선옥이 한번 해보고 포기를 하느냐. 삼세번은 시도해봐야지’라고 하더라고. 그 말도 맞다 싶어서 다시 그 남자와 닷새를 같이 지냈어. 이번 테스트는 포지티브였어.”

그는 ‘임신하게 해줘 감사하다. 건강하게 낳아 열심히 기르겠다’고 말하고 남자를 보냈다. 그리고 배가 불러왔다. 뉴욕에서는 미혼 여자의 배가 불러오는 일에 아무도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그 남자, 아기의 아빠만은 처음 약속을 어기고 ‘사랑한다, 같이 살자’고 고백해와 그를 신경 쓰이게 했다.

“남자를 피해 프랑스로 도망갔어. 애 낳을 때쯤 뉴욕으로 돌아왔지.”

관계에 대해 이렇게 담백할 수가.

18시간의 산고 끝에 결국 제왕절개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아이 이름은 그의 영어 이름 ‘써니 리’를 딴 ‘허니 리’.

육아의 경험은 놀라웠다. 무조건적으로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자체가 찬탄이고 경이였다. 젖을 먹이고 똥 냄새를 맡으면서 행복해했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신기했어. 엄마가 된다는 건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지. 예술에 대한 의욕도 더 커지고 삶에 대한 태도도 더욱 진지해졌어요.”

스물넷의 허니는 지금 미국에서 마케팅을 공부하는 중이다. 혼자 가끔 아빠를 만나고 있지만 엄마에게 자신의 출생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은 적은 없다.

링컨센터에 영구 소장된 선무

1996년 드디어 이선옥의 선무 ‘바라밀다’ 시리즈가 링컨센터 라이브러리(공연예술전시관)에 영구 소장되기로 결정됐다. 원하던 목표였다. 그가 만든 춤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공인받은 것이다.

그러자 미친 듯이 한국이 그리워졌다. 눈에 익은 산의 능선들, 입에 익은 양념 맛, 특히 콩나물무침과 마늘쫑의 향기, 거친 듯 훈훈한 사람들의 인정과 수다가 그리웠다. 망설이지 않고 허니를 설득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딸의 까다로운 고양이까지 품에 안고. 그게 1997년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그의 기반이 너무도 빈약했다. 우리 예술계에서는 듣도보도 못한 일이기 때문인지 링컨센터 라이브러리 소장 무용가의 업적에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다. 떠돌이 이선옥에게는 학연도 지연도 신통치 않았다. 뽑아낸 뿌리를 다시 내릴 땅이 마땅치 않았다. 외로웠다. 그렇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우케이!” 그는 불공평이나 억울함을 받아들이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늘 그랬으니까.

얼마 전 집에 도둑이 들어 “담요 뒤집어쓰고 있어”라고 명령했다. 그는 싹싹하게 ‘오우케이’라고 말하고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도둑은 여자 혼자 살면서 보안장치도 달아놓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자기가 들어오면서 뒷문 유리를 깼으니 새로 갈아끼우라는 말까지 해주고는 현관문으로 유유히 나갔다. 도둑은 집안에 있는 불상을 보고는 ‘당신, 뭐하는 사람이오?’라고 묻기까지 했단다.

한국에 돌아온 지 7년째. 선무의 가치와 효용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포천중문의대 보건복지학과와 대체의학과에서 대학원 학생들을 가르치며 환자들을 직접 만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연습장과 공연장도 마련했다. 일반인, 특히 불자(佛子)와 그 아이들에게 선무를 가르치려고 사람들을 모으는 중이다.

“뉴욕에 간 지 7년 만에 맨해튼에서 200평짜리 공연장을 세웠는데, 한국에서는 7년 만에 서울에서 40평짜리 연습장을 만든 셈이죠. 한때는 ‘뉴욕타임스’에 하루걸러 한번씩 공연평이 실리는 아시아아메리칸으로 폼을 잡았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무용하는 사람들도 대체의학하는 사람들도 나를 잘 몰라요. 그러나 좋은 예술은 결국 알려지게 마련이에요. 때아닌 강태공 노릇을 하려니 그게 좀 고생이지 다른 건 아무것도 힘들지 않아요. 치유무용으로서 선무는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선무 동작을 이용해 여성암, 요통, 요실금, 갱년기장애 등을 예방·치료하겠다는 시도는, 자기 안에서 우주의 근원을 발견하는 힘을 기르자는 것이다. 그 힘의 근원을 깨닫고 명상하자는 것이다.

“이건 굳이 불교가 아닙니다. 어느 종교든 명상이 기본이잖아요 미국에서는 가톨릭 신자들도 선무에 전혀 거부감을 갖지 않았는데, 한국에선 배타적이어서 당황스러워요. 그럴 바에야 불교신자들에게라도 적극 알려보고 싶어요.”

한국에서 다시 시작

그는 이미 예순의 나이를 넘겼다. 고운 눈매와 야무진 입술선이 전혀 허물어지지 않았어도 스스로를 ‘할머니’라고 칭하는 자격지심을 감추지 못한다. 요즘에 와서야 비로소 외롭다는 걸 느낀다. 혼자인 것이 싫을 때도 있다. 남자, 그토록 천장만장 도망쳤던 남자가 그립기도 하니 별일이긴 별일이다.

그는 집안에 법당을 꾸미고 송산스님이 정식으로 봉안식을 마친 본조불을 모셔뒀다. 그 앞에 향을 피우고 매일 아침 정식 예불을 올린다. 후불탱화와 산신탱화도 오래 묵은 진품들이다. 벽에는 어머니 사진과 함께 그의 정신적 스승인 경허, 만공, 송담, 정강스님의 사진을 나란히 걸어두었다.

한 명의 인간을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품어 기른 자연일까, 지혜를 준 스승일까. 아니면 만나고 사랑하고 다툰 세상 전체일까. 그는 인간의 한 생이 단순히 현생에서 끝나는 건 아니라고 믿는다.

“꿈에 전생을 두 번 봤어. 내가 티베트 어디쯤의 승려더라고. 도반(桃盤)에게 화를 내며 산을 내려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데, 가만 보니 그 성질머리가 딱 지금의 나더라고요. 사람은 본성만은 삼생 동안 그대로 지니고 다녀요. 전생이 없는데 현생에서 내가 이런 짓을 하고 있겠어? 내생에도 아마 춤과 참선과 무관하지는 못할 거예요. 할 줄 아는 짓이 이것뿐인 걸.”

“재물도 명예도 다 소용없다. 삼생을 이어가는 건 그저 저 깊은 본성뿐이니 이승에서 가장 열심히 할 일은 마음자리를 맑디맑게 닦는 것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추상적인 그 일을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그는 스스로 만들어냈다.

金 瑞 鈴
●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 경북대 국문과 졸업
● 중앙중 교사, 매일경제신문·샘이깊은물 객원기자
●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춤. 천천히 숨쉬고 천천히 팔다리를 움직이고 손을 상하좌우로 오르내리며 이모꼬를 거듭하는 동안, 보는 사람에게 아름답고 추는 사람에게 힘을 주는 신비한 춤. 그 젠 댄스를 이선옥은 삼생을 윤회하며 이렇게 우리 앞에 툭, 던져놓았다.

(끝)

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발행일: 2004 년 07 월 01 일 (통권 538 호)
쪽수: 500 ~ 513 쪽

고맙습니다.
뉴시스

'의료영역 넓혀라!' 의료계 VS 기존단체 주도권 충돌

기사입력 2007-03-10 09:13 |최종수정 2007-03-10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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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메디컬투데이/뉴시스】

새로운 의료영역을 개척하려는 의사들과 기존에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온 비의료인들 사이에 주도권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최근 춤을 치료수단으로 연구개발 및 임상치료에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의료인들이 창립한 한국댄스치료학회(회장 장환일)와 무용·동작치료사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댄스테라피협회(회장 류분순)가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

논란은 단체 영문이름에서 시작됐다. 댄스치료학회가 지난 3월 1일 창립총회를 하면서 학회의 영문명을 ‘KDTA(Korea Dance Terapy Association)’로 결정했는데, 문제는 이 이름을 이미 댄스테라피협회가 등록해 놓은 영문명이었다는 점이다.

댄스테라피협회 류분순 회장은 댄스치료학회 관계자에게 보낸 메일에서 “KDTA 명칭은 보건복지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정식 등록돼 있는 한국댄스테라피협회의 공식 영문명”이라며 “국·내외적으로 공인된 단체명을 (댄스치료학회가) 그대로 실행한다면 부득이 언론 및 법적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어 “볼룸이나 댄스스포츠를 한다면 정확히 그런 명칭을 쓰든지, 의사라면 한국임상예술학회로 활동하는 게 맞다는 게 저의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류 회장은 댄스테라피협회의 경우 3~5년 이상의 임상과 이론을 공부한 석·박사 수준의 무용·동작치료사로 구성돼 있다며 협회의 전문성과 역사를 강조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댄스치료학회는 전 대한신경정신과학회장인 경희대 장환일 신경정신과 교수가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의료인 중심으로 꾸려졌다. 학회 운영 목적 역시 궁극적으로 춤과 댄스를 독자적인 의료의 한 형태와 진료 영역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학회 창립 과정에서 간사 역할을 맡아온 김현식 여성의학병원 원장은 댄스테라피협회측의 문제 제기에 대해 “겉으로는 명칭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속내는 결국 10년간 지켜온 댄스치료시장에 왜 의사들이 침범하는가에 대한 불만섞인 반작용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또한 학회 영문명의 경우 'KDTA"를 대신해 ‘KODA’로 변경하는 안이 내부적으로 이미 결정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댄스치료에 의사들이 관심을 갖는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댄스·동작 치료가 정신과를 비롯해 정형외과, 이비인후과, 내과 등에서 기존 약물이나 물리치료를 대체하는 치료법으로 일부 효과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댄스치료학회 창립총회에서 세화 신경정신과 이재현 부원장은 ‘정신분열병 환자를 대상으로 한 서울아산병원 댄스치료 사례’ 발표를 통해 정신질환 치료에도 댄스치료가 일정한 효과를 발휘했다고 밝혔다.

이 부원장은 이날 “정신분열병 환자들을 상대로 한 총 8회 정도의 댄스치료 결과 정신병 증상이 호전됐고, 대인관계의 만족감과 친근감, 개방성 등이 개선됐다”고 강조했다. 다만 대조군 연구가 아니고, 단기치료 및 환자수 부족 등은 한계로 지적했다.

김현식 원장은 “이번 댄스테라피협회와의 명칭 논란은 의사들이 새로운 분야로 의료영역을 확장하면서 앞으로 끊임없이 마주치게 될 현실적인 문제”라며 “안과와 안경사, 방사선과와 방사선사, 정형외과와 물리치료사 등의 역할과 영역 논란과 닮아 있으면서도 다른 측면이 존재한다”고 풀이했다.

이같은 논란에 대해 대한의학회 관계자는 “의료계를 둘러싼 주변 환경이 급변하고, 의사들도 무한경쟁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한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서 기존 영역을 지켜온 비의료인과의 충돌은 불가피할 전망”이라며 “단순히 의료 대 비의료, 합법 대 불법의 시각이 아닌 공생을 위한 합리적인 타협점을 찾는 공동작업이 시급하다”고 충고했다.

김태형 기자 kth@mdtoday.co.kr

본문스크랩 [기사]이선옥 씨 중문의대서 ‘선무명상요법’ 강의 비공개 일백선

2009/03/19 16:19

복사 http://blog.naver.com/kdw70736/70044104937

출처 아나타사원 | 아나타
원문 http://blog.naver.com/asteria0317/100011031050

불기 2545년 11월 14일 343호

이선옥 씨 중문의대서 ‘선무명상요법’ 강의


“禪舞로 질병 치료 돕는다”

스트레스 해소·성인병 관리 효과

◇‘선무(禪舞)’는 무대예술로서 뿐 아니라 질병 치료에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사진은 선무 공연 중인 이선옥 씨.

몸과 마음의 병 치료하는 선무(禪舞)를 아시나요?

단전호흡, 기공, 명상, 선의 요소를 두루 담고 있는 선무는 마음 다스리는 춤이다. 참선의 원리와 동작을 응용해 무용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무를 한 발 더 나아가 질병을 치료하는 데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선무를 개발 보급해 온 무용가 이선옥 씨(상명대 교수)는 차병원 포천중문의대 대체의학대학원 대체의학팀과 함께, 일반인과 선무치료사 양성을 위한 선무명상요법 강좌를 연다.

중문의대 대체의학센터 의료진의 건강진단 및 선무 임상치료 보고서를 바탕으로 개발한 이 프로그램은 동작을 통한 명상, 춤추는 명상으로 몸의 균형을 잡고 동시에 마음의 안정을 통해 각종 질병의 근원 단절과 치료를 돕는 새로운 시도이다.

이 씨는 17일~12월 2일과 2002년 1월 5일~20일 2차에 걸쳐 매주 토·일요일 차병원 중문의대 대체의학대학원에서 ‘선무 치료사 기초과정’을 이끈다.

예술치료분야의 석사과정 이상 재학생과 전문무용수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이 프로그램은 남녀 폐경기 스트레스를 위한 선무프로그램·남녀 직장인과 일반 대중의 스트레스 해소와 생활 건강을 위한 선무프로그램·성인병 관리 및 건강증진 선무프로그램·만성통증환자와 척추디스크 환자 관리를 위한 선무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집중 강의한다.

또한 20일~12월 7일, 2002년 1월 8일~25일 매주 화·금요일에는 일반인을 위한 선무 강좌를 실시한다. 기본 동작과 호흡조절, 이뭐꼬 화두 수행을 통한 마음의 안정을 중심으로 지도한다.

“단전호흡과 함께 이뤄지는 선무는 유연성을 길러주고 근육을 강화시켜 주며 척추와 골반을 바로 잡아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효과는 잠재된 내면의 생각을 동작으로 자유롭게 표현함으로써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이다”고

설명하는 이 씨는 “선무에는 손에 기를 모아 여러 가지 동작으로 표현하는 30가지의 수인법도 포함되어 있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혈액순환과 정신집중을 강화하는 효과를 더 해 궁극적으로는 질병예방과 치료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02)3468-3099

이은자 기자 ejlee@buddhapia.com

“선무 치료예술로 대중화”


‘선무기법…’ 펴낸 이선옥씨

◇선무가 이선옥 씨는 선과 무용을 결합한 선무 치료예술로 현대인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에 나선다.

“선무기법은 동양 선(禪)과 서양 예술심리치료의 만남입니다. 육체적 병의 원인 대부분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동작을 통한 명상법을 사용하는 선무기법은 신체뿐 아니라 마음의 건강에도 기여할 건강무용의 새로운 한 형태가 될 겁니다.”

인천 용화사 조실 송담스님께 ‘이뭣꼬’ 화두를 받았고, 미국에서 숭산스님과의 만남을 통해 직접 선방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뉴욕선무단을 이끌며 미국과 유럽 등지서 선무라는 새로운 현대무용의 분야를 개척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 선무가 이선옥씨.

그런 그가 선과 무용을 결합한 선무치료예술로 현대인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에 나선다.

현재 상명대 무용과 겸임교수이자 아시아 태평양지역 공연예술 네트워크 APPAN(Asia-Pacific Performing Arts Network) 사무총장이기도 한 이씨는 최근 <선무기법과 선무치료예술>(집문당)을 발간하고, 수행 방편이자 무대예술로서의 선무에 이어 치료예술로서의 선무를 대중에 확산시켜나갈 계획이다.

이씨는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오는 3월 중순경부터 서울 강남 백상한의원(원장 배오성)에 문을 여는 선무치료예술센터의 소장으로 부임해, 직접 선무치료예술로 임상에 나선다. 주 3회 선무치료예술센터에서 척추환자를 비롯해, 스트레스로 건강을 잃은 현대인들에게 선무와 그림, 음악 등을 통해 심신의 피로를 치료하는 구체적 방법들을 시도하게 된다.

“선무치료법은 단순한 동작들로 이뤄지는데, 단전부위의 수축과 이완 그리고 동시에 수인법과 이뭐꼬 물음이 계속됩니다. 이러한 연습과정은 동작동작의 연결에 완전한 정신집중을 요하게 되고, 완벽한 정신통일로 이뤄져 그 과정 자체가 치료무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씨는 서양예술가들과 심리치료사, 정신과의사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명상기법, 요가 등을 도입해 새로운 장르의 기법을 창출해 내 새로운 예술치료법으로 활용하고 있다면서 선무의 원리에 의학을 접목시켜 국제적인 한 분야로 정착시키겠다고 밝혔다.

더불어 현대 창작무용으로서의 선무의 진면모를 공연을 통해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APPAN 활동을 통해 세계인들과의 교류도 전개할 계획이다. 이씨는 이같은 활동의 하나로 오는 3월 25일 국립민속박물관 실내극장에서 ‘색즉시공 2001’ 선무 공연도 갖는다. 이은자 기자

(ejlee@buddhapia.com)

출처 : 현대불교 http://buddhapia.com/mem/hyundae/auto/newspaper/308/c-10.htm

'의대 신화' 깨졌는데… '의대 신봉' 오히려 강해져
상위 1% 학생들, 의대·치대·한의대 '우울한 쏠림'
전국 의·치·한(醫·齒·韓) 거친 뒤 서울대 다른 과에 지망
부모세대의 환상 큰 탓
취업해도 月收200만원 개업해도 7%는 도산… "그 우수두뇌가 아깝다"
김민철 기자 mckim@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김경화 기자 peace@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유명 D학원이 만든 2009학년 입시 자연계 배치표. 서울대 의예과를 시작으로 59번째까지 모두 의대·치대·한의대가 차지하고 있다. 이름조차 생소한 지방 대학들도 적지 않다. 이렇게 수능 성적 상위 1% 학생들이 전국을 일주하며 이른바 '의·치·한'을 채운 다음, 60번째에야 서울대 수학교육과가 등장한다. 하지만 의·치·한에만 들어가면 장밋빛 인생이 펼쳐지는 것일까.

지난해 2월 D대 한의학과를 졸업한 왕모(여·27)씨. 1년간 인턴까지 마치고 최근 한의원 부원장(한의원에 취직해 일하는 한의사) 자리를 10여 군데 지원했으나 모두 떨어졌다. 서울 지역의 경우 부원장 자리가 하나 나면 70~80명이 지원하기 때문이다. 부원장으로 취직해도 초봉은 월 200만원 정도이고 잘해야 400만원 받는다. '파트타임 한의사' 자리도 알아보고 있지만 이것도 쉽게 자리가 날 것 같지 않다. 왕씨는 "내가 한의대에 입학할 때만 해도 부원장 자리는 쉽게 골라 갈 수 있었는데…"라고 말했다. 개업은 엄두도 못 낸다. 지난해 졸업한 왕씨의 동기 80여명 중 개업한 한의사는 5명뿐이다. 남자들은 군입대가 많다는 것을 고려해도 과거에 비하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왕씨는 고교 3년 내내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은 '상위 1%'였다. 그는 "2002년 대입 때 서울대도 골라갈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IMF 사태 이후 굳어진 '의·치·한 쏠림' 현상은 의사가 돈을 잘 벌고 안정적일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대 공대와 지방대 의대에 동시 합격하면 열에 아홉은 지방 의대로 간다. 현실은 어떨까.

◆망하는 의사들

경기 침체와 치열한 경쟁에 의사들 역시 힘든 시절을 맞고 있다. 의사 수는 매년 3000여명씩 늘어나는데, 의원급 의료기관 폐업 건수는 2006년 1795건에서 지난해 2061건으로 불어났다. 특히 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외과·가정의학과 등은 의원 수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의사들의 꿈이라는 개원(開院)은 엄두조차 못 내는 실정이다. 서울 서문내과의원 김육 원장은 "요즘엔 개원했다는 얘기는 없고 폐업했다는 얘기만 들려오고 있다. 이 근처에서도 3~4곳이 폐업했다"고 말했다.

의사협회 김주경 공보이사는 "의사는 망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깨진 지 오래다. 요즘은 개업의(醫) 중 7%가 도산한다"며 "전에는 환자가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였는데 지금은 먹고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의원에 가면 의사들이 컴퓨터하고 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의료 전문지에는 '파산·회생 전문 변호사' 광고가 늘고 있다. 정영근 변호사는 "파산 상담을 받으려는 의사·한의사가 작년보다 2~3배 늘어났다"며 "하루 1~2명은 찾아오고, 5~6명은 전화 상담을 해온다"고 말했다.

전문의 시험에 합격해도 취직이 쉽지 않고, 몸값도 하락세다. 의료 취업 사이트 '메디컬잡'의 유동욱 이사는 "전공과목과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요즘 일반의 초임은 월 400만원 정도, 전문의 초임은 월 500만원 정도"라고 말했다.

의사의 경우 일반학과 4년, 본과 또는 의학전문대학원 4년, 인턴·전공의 5년, 공중보건의 3년 등 16년을 공부한 것에 비하면 고소득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의학전문대학원이나 치의학전문대학원은 1년 학비만 2000만~3000만원 든다.

의사들의 대출 연체율이 높아지자 은행들은 의사의 신용대출 한도를 축소하고 있다. 하나은행은 개원 예정의에 대한 신용대출 한도를 3억원에서 2억원으로 축소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의사·한의사 중 상당수가 신용불량자"라고 말했다. 빚에 허덕이다 자살하는 의사들도 속출하고 있다.

특히 한의사의 위기감이 높다. 한의원 폐업 건수는 2006년 731건에서 지난해 898건으로 높아졌다. 한의사협회 이상봉 이사는 "최근 몇 달 사이 폐업하는 숫자가 굉장히 늘어났다"며 "일부 잘 나가는 한의사들은 있지만 대체로 3분의 1 정도가 먹고사는 정도이고, 3분의 2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 두뇌로 다른 데 가면…"

취재 과정에서 만난 대부분 의사들은 "상위 1% 학생들이 의·치·한에 몰리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의료계의 엄살이 섞였을 수도 있지만, 경기 침체에 따른 일시적 현상만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가 더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래도 의사들이 안정적이고 수입도 많다는 반론도 있다. 서울 송파에서 개업한 치과의사 이모(35)씨는 "요즘 나에겐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딱 맞다"며 "황금빛 미래를 꿈꾸며 의대에 가지만 앞으로가 더 어렵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주경 이사는 "이런 현상은 10년, 20년 후에도 점점 더 심해질 것"이라며 "한국에선 비전이 없다고 생각해
미국으로 의사 시험을 보러 가는 학생들도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선 여전히 의·치·한에 대한 '장밋빛 환상'이 강하다. 부모나 교사들이 "그래도 전문 자격증이 있는데 다른 분야보다는 아직도 낫다"라는 생각에 의대를 권하고 있다. 부모들 심리에는 "공부를 이렇게 잘하는데 우리 애는 괜찮을 거다"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다고 의료계에선 지적했다.

김육 원장은 "왜 우수한 인재들이 의대에 오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며 "열심히 연구하면 천명, 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우수한 두뇌들이 의대에 몰리는 것은 나라의 불행"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가족부 A간부는 "현실은 달라졌는데, 부모들이 자기 세대의 기준으로 자식들에게 의대를 권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상봉 이사는 "신념이 있다면 모르지만, 한의사는 돈 많이 벌고 안정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오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다"며 "1% 이내 최우수 인력은 기초과학이나 공대를 가고 상위 1~3% 정도가 의료계로 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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