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 난징 !

문화바람과나그네 (mllb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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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6.23 18:12
개봉된 지 한 달된 영화 한 편이 전 중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열에너지는 발전기를 거쳐 자연스레 감동도 선사한다
영화 <난징! 난징!(南京! 南京!)>이다.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1937년 12월 13일 난징 침공에 이은 '대학살(大屠杀)'이 배경이다
이전 '난징' 영화와 확실히 구분되는 <南京! 南京!>이 2009년 4월 22일 개봉했다. 중국대륙에 다시 한번 광풍을 몰고 온 주인공은 바로 루촨(陆川) 감독이다
루촨은 <커커시리> 이후 무려 6년여 기간의 준비 끝에 <난징! 난징!>을 대륙에 뿌렸다. 4월 19일 현재 제작비(8천만RMB)의 2배가 넘는 티켓을 판매(1억6천만RMB)했으니 순수익만으로도 곧 200억 원을 넘어설 것이다. 펑샤오강(冯小刚), 장이머우(张艺谋), 첸카이거(陈凯歌), 닝하오(宁浩)에 이어 개봉 10일 만에 1억RMB를 넘긴 감독이 된 것이다. 정말 하늘이 뿌린 돈을 줍고 다닌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박이다
영화를 보노라면 전투나 강탈, 강간 장면들에서 카메라는 마구 흔들리고 건너뛰며 다급하다. 흑백 화면 속에 흐르는 이 흔들림은 당시의 긴박한 현장을 그대로 따라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영화를 보고난후 흥행대박을 터뜨렸단 기사를 봤다
감독의 재능이나 배우의 열연은 비평에 맡기고
하루종일 우울함에 시달렸다 그리고 이런 영화가 만들어진 중국의 힘이 놀라웠다
흑백의 아름다움,사실적인 학살의 묘사 주인공도 없는 전체배우가 주인공인
이영화가 너무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요즘 우리의 현실,친일의 기운이 꿈틀거리며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때
뉴라이트의 역사비틀기,천황에게 3배를 올리는 일국의 수장
할애비,애비의 친일을 등에 업고 사회의 중심으로 올라오는 친일의 후예들
국회의원,교수,검찰,법원,지식인,기업인 이 한편의 영화가 그들이
이땅에서 겸손하게 조용히 속죄하는 마음으로 사는 세상이 다시 오길 바란다
36년의 점령이 난징대학살의 물리적인 만행과 비교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정신이 썩고 민족성이 파괴된우리의 역사가 중국인에 대한 일본의 만행과
비교되는것은 현재도 우리나라에 중심이 되는 세력이 친일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더 불행하다
그리고 이영화가 그런 우리의 불행을 잊지않는 영화가 되길 바란다
과연 이영화가 우리나라에서 상영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볼것이며
무엇을 느낄까 궁금해진다
빨리 영화관에서 상영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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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에 몰아놓고 검으로 찔러죽이고 파묻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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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놓고 기관총으로 학살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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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에 흙을 덮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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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에 흙을 덮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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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여자들 모아놓고 위안부 여성을 차출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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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병사들의 중국처녀 집단강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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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위안부여성이 일본군상대로 위안부노릇후 죽은 여성을싣고가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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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중 군인들의 마쓰리(축제)행사를 통해 전투심을 고취시키는 장면 







"과거를 잊지 않으면 훗날의 교훈이 된다"

박경훈 gakgak@empal.com  2012년 08월 28일 화요일 12:16   0면
    

<박경훈의 제주담론> 中 난징대도살기념관 현장방문기

   
▲ 난징기념관 진입부 전경. 배와 검 형상의 건축물과 조형물 <가파인망>이 어우러져 난징대학살의 아픔과 슬픔을 한 공간에 조형해내고 있다.

난징기념관의 정식 명칭은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胞纪念馆)>, 우리식으로 옮기면 <중국침략일본군남경대학살참사동포기념관>이다. 이 명칭은 중국의 지도자 등소평이 친히 지었다고 한다.

   
▲ <가파인망(家破人亡)>. 집안은 파괴되고 사람은 죽어 나간다는 사자성어가 제목인 이 작품은 중국 조각원 원장이며, 세계적인 조각가인 우웨이산(吳爲山)  난징(南京)대 교수가 제작했다. 높이 10여 미터에 이르는 이 청동조소는 난징대학살 당시 죽은 자식을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의 형상을 묘사한 작품으로 난징기념관 전체의 테마를 상징한다.

이 기념관은 1985년 8월에 정식으로 세워졌으며, 1994~1995년, 2005~2007년 두 번에 걸쳐 확장 개축이 이루어졌는데, 2007년의 개축은 기념관을 완전히 새로 건립한 수준이었다. 기념관의 부지면적은 7만 4천㎡이며, 건축면적이 2만 5천㎡, 전시면적만 9천800㎡에 달하는 기념관이다. 기념관은 전람집회 구역, 유적추모 구역, 평화공원 구역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2007년 12월 13일 대학살 70주년에 맞추어 개관했다. 전시관의 외관은 <평화의 배>로서 하늘로 치솟은 뱃머리를 조형화했다. 측면에서 볼 때에는 끊어진 군도(軍刀)와 같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검과 쟁기의 입체적인 모습처럼 보인다.(주성산 관장의 해설) 이 새 전시관의 설계는 화남 이공대의 하경당 교수가 담당했다고 한다.

기념관은 <가파인망(家破人亡)>이라는 10m가 넘는 대형 청동상을 지나, 기념관 진입부의 기다란 벽을 이루는 기념관 외벽을 따라 물이 담긴 수조공간과 수면 위에 설치된 <시민피난>이라는 조소군(彫塑群)을 지나야 정문으로 진입하게 되어 있다. 이 부분은 필자가 이 기념관에서 가장 칭찬해주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기념관 정문에 들어서기 이전의 전이공간으로서 이 공간은 지극히 서정적이다. 처참한 조소상들을 보면서 진입해 들어가는 동안, 방문객들에게 관람을 위한 마음의 준비가 자연스레 이루어지게 하는 공간적 장치이기도 하다.

 

 

   
▲ 난징기념관 정문의 <시민피난> 행렬. 난징대학살에 대한 깊은 감성적 해석과 개성 있는 조형적 완결성은 <가파인망>과 함께 이 작품 하나로 기념관 전체를 대표한다는 느낌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 공간을 지나 정문을 들어서면, 두 개의 틈이 벌어진 <원혼의 외침>이라는 테마조형물을 만나게 되며, 탁 트인 자갈이 깔린 넓은 추모집회광장을 만나게 된다. 그 광장의 건너편에는 <재난의 벽>이 있는데, 검은색 화강암에 중국어, 한국어, 영어 등 12개 국어로 <참사자 300,000>을 새겨 넣었으며, 그 좌우의 앞에는 십자가 형상의 <표지비석>과 <평화의 종>이 놓여 있다. 표지비석에는 ‘1937.12.13-1938.1’을 새겨 넣었는대, 이는남경대학살이 벌어진 6주간의 기간이다.  <평화의 종>은 일본에 거주하는 화교들의 기부로 만들어져 66주년에 기증된 종으로 매년 12월 13일 기념일에 타종된다.

   
▲ 하늘에서 본 기념관 전경. <평화의 배>라고 이름 붙여진 기념관 신관의 전체 모습이다. 끊어진 칼과 평화를 실은 배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매우 세련된 건축물이다.(기념관 도록 수록 사진)

기념관의 전시는 크게 2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지하층과 1층의 전시인 <인류적 대참사(人類的 浩劫)-중국침략일본군의 남경대학살역사진실전(侵华日军南京大屠杀史实展)>과 2층의 전시인 <승리 1945 테마전(胜利 1945专題展)>으로 이루어져 있다.

   
▲ <집화광장>과 <재난의 벽>, 그 좌우에 <표지비석>과 <평화의 종>이 위치해 있다.

기념관으로 들어서면,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전체 주변으로 거대한 난징성의 폐허가 조성되어 있다. <전화 속의 남경> 부분이다. 그리고 이 공간을 나서면, 갑자기 깜깜한 추모공간이 나타나는데, 바로 <서정(序厅)-참사자 300,000>의 공간이다. 천장에 고딕의 굵은 글씨로 숫자가 박혀 있다. 우리가 ‘4·3’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에 매달리듯 난징대학살은 300,000이라는 숫자로 표상되는 듯하다. 이 숫자는 기념관과 평화공원 곳곳에 새겨져 있다. 마치 우리의 시각에 각인시키려는 듯 말이다. 사실, 주성산 관장의 말처럼, 일본인들이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강박의 숫자’일 수도 있다.

   
▲ 기념관의 초입 로비와 계단을 지나 맨 처음 만나는 공간인 <서정-참사자 300,000>. 천장에 난징성의 무너진 성벽과 당시의 남경의 지도를 새겨 넣었다. 전면 벽의 중앙에 있는 화환에는 참사자들의 사진이 번갈아 비춰진다.

전시관은 수많은 수집자료들로 이루어진 전시벽면들이 이어지고, 전시실의 중간에 <강동문 유적 참사자 유해> 공간을 만나게 된다. 이 유해는 2007년 기념관 확장 당시 새롭게 발굴된 참사자 유해로서 제3차 유해다. 원래 그 모습 그대로 노출된 채 전시되어 있다.

왜 유해들을 완전히 수습하지 않았느냐는 우리들의 질문에 기념관의 주관장은 손사래를 치면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란다. 왜냐하면, 10여 년 전에 희생자 유골이 다량으로 발굴되어 완전히 발굴을 마치고 유골을 들어내 봉안했는데, 일본의 ‘난징대학살부정파들’은 그 유골이 난징이 아닌 지역에서 발굴된 것을 가져다 난징대학살 희생자 유골이라고 우긴다고 공격했다는 것이다.

그때 이후로 이 지역의 발굴 유해들은 완전히 발굴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냥 보존처리만 해서 전시하고 있다고 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현장에서 발굴된 유골마저 가짜라고 우기는 일본의 극우파들은 여전히 괴물인 채로 21세기를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결국, 1937년에 희생당한 희생자들은 난징의 진실을 위해 죽어서도 저렇게 학살의 증거품을 보여주기 위해서 남아 있어야 했다. 반성 없는 일본정부와 난징대학살 부정파들에 대한 분노와 인간에 대한 허망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 전시동선 중간에 만나게 되는 전시관 내부의 노출 공간인 <강동문 유적 참사자 유해>. 기념관 건물 자체가 유적지 위에 세워진 것으로, 노출된 유해들은 반쯤 발굴된 상태로 전시되어 있다.

<가파인망(家破人亡)>은 이 전시관의 중요한 키워드 중의 하나다. ‘가옥(정)은 파괴되고 인명은 멸실되어 간다’는 이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문화혁명 당시를 대표하는 표현이기도 한데, 이번 난징기념관에서는 대도살의 전체이미지를 상징하는 용어로 활용하고 있는 듯했다. 전시관 진입부의 거대한 어머니조상이 그렇고 이 전시관 내부에도 몇 개의 가파인망의 사례를 입체모형으로 재현해 놓고 있으며, 천장에는 사인보드판으로 <가파인망>의 사례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 가파인망의 다양한 사례들을 게시한 사인보드가 천장에 매달려 있다.

 

<선간후살(先奸後殺)> 역시 난징대도살의 역사를 상징하는 키워드 중의 하나다.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은 남경을 점령한 처음 4주 동안 2만 여 차례의 강간·윤간·강간살인을 행했다. 이곳에 전시된, 일본군이 여성을 강간하는 사진들은 모두 일본군 포로들의 몸에서 나온 것들이다. 또한 일본군은 대도살 기간 동안 두 곳에 위안소를 설치하여 운영했는데, 다수의 남경 여성들이 희생되었다.

이 코너들을 넘어서면 일본군이 자행한 전면적인 약탈, 방화, 도시파괴에 관한 자료들과 이미지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쯤에서 관람객들은 이미지의 포화와 정보의 과잉접촉에 따른현기증과 무감각증을 느끼게 된다. 끔찍한 장면과 패널들이 가득 채워진 전시관의 각 코너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오히려 무감각 증세를 조장한다.

마치 살인에 익숙해졌던 당시의 일본군들처럼, 살인과 강간의 비인간적인 아카이브공간이 결국, 무감각 증세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드는데, 정작 전시관람을 방해하는 것은 너무 많은 사람들의 인파다.

무료로 개방되어 마치 국민교육장처럼 운용되고 있는 탓에 남경을 방문한 외국인 방문객은 물론이고, 다른 도시에서 찾아온 중국인들로 넘쳐난다. 또한 간체중국어와 영어, 일본어로 이루어진 패널들의 설명들은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것이어서 3개 언어 중 하나가 능통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설령 안다고 해도 사전에 정보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관람하는 일이 불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성산 관장과의 면담 중 한국어로도 병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다시 이동해보자. 야만의 시간 속에 난징사람들에게 다른 인종, 국가의 고마움을 느끼게 해준 있던 몇 안 되는 외국의 착한 ‘인간’들이 등장하는 코너다. 앞에서 언급했던 욘 라베, 미니 비트린, 존 마길을 중심으로 당시 국제안전지대를 운영하면서 20만 명의 난징시민을 구했던 국제위원회 멤버들의 사진과 활동상, 그 당시 자료들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욘 라베와 미니 비트린의 경우 특별하게 조소상과 청동상을 만들어 전시해놓고 있다. 난징사람들이 그들에게 느끼는 존재감의 정도를 짐작케 하는 코너였다.

 

   
▲ 중국인들과 난징시민들은 난징안전국제위원회의 은인들을 잊지 않고 있다. 특히 욘 라베와 미니 비트린 그리고 존 마길 선교사는 각별히 입체조소상을 세워 전시해 놓고 있다. 난징사람들이 이들을 얼마나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욘 라베와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 사실 그는 완전히 잊혀졌다. 아이리스 장이 그를 추적하여 그의 일기를 세상에 내놓을 때까지. 욘 라베는 1938년 2월 난징을 떠나 아내와 함께 4월 15일 독일로 돌아왔다. 독일인들은 그의 용기에 갈채를 보냈다. 독일 국무장관은 라베의 일을 언급하며 칭찬했고, 라베는 붉은 십자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라베는 곧바로 베를린 전역을 돌며, 존 마기의 필름을 상영하고 난징의 실상을 강연으로 알렸다. 심지어 1938년 6월 8일, 그는 마기의 필름 복사본과 난징학살에 관해 작성한 보고서를 히틀러에게 보냈다. 그러나 라베는 자신이 생각했던 나치의 실상을 몰랐다. 며칠 후 들이닥친 두 명의 게슈타포가 그를 체포하고 본부로 끌고 갔다. 그리고 라베는 지멘스의 상관이 보증을 서고, 난징의 이야기에 대해 함구하겠다는 서약을 하고서야 석방되었다.

그 후 그의 삶은 악몽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지멘스사에서 작은 일감을 받았으나, 적은 임금으로는 가족 부양이 힘들었다. 전쟁이 끝나자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밤낮으로 조사를 받았고, 그 다음에는 영국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러야 했다. 나중에는 나치 당원으로 고발되어 오랫동안 고통받아야 했다.

조금 모은 저축은 변호사비로 탕진하고, 노동허가까지 상실한 그는 집안의 물건들을 하나둘 팔아가며 연명해야 했다. 그녀의 아내는 몸무게가 44kg으로 떨어졌다. 패전국 독일의 생활은 고통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라베는 결국 중국에서의 인도주의적 행위를 감안해 ‘비(非) 나치’로 승인을 받아 나치 당원의 이력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렇다고 경제적인 상황까지 나아진 것은 아니었기에 들판에서 뽑은 잡초로 수프를 끓여 먹고 딱딱한 빵조각으로 연명해야 했다. 1948년경 라베의 어려운 상황이 중국에 알려졌다. 난징시 정부는 시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로부터 단 며칠 만에 난징시민들과 생존자들은 당시로서는 꽤 큰 금액인 2천 달러를 모아 시장에게 전달했고, 난징시장은 스위스로 가서 식료품을 산 후 이를 라베에게 보냈다. 그 당시 패전국 독일은 돈이 있어도 식량을 살 길이 없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1948년 6월부터 그해 가을까지 난징시민들은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식량을 보냈다.

국민당 정부는 중국으로 돌아온다면 주택과 평생연금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라베는 난징시민들의 호의에 크게 감사하며 삶의 신념을 되찾았고, 1950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기까지 난징대도살에 관한 2천 쪽 이상의 기록을 남겼다.(《난징에서의 강간》)

   
▲ <12초>. 12초에 한 명씩 사라져간 난징의 대도살을 건축적으로 그리고 예술적 상징성으로 연출해내고 있다.

그의 이 기록이 빛을 보게 된 것은 아이리스 장에 의해서다. 라베의 흔적을 추적하던 그녀에 의해 라베의 손녀딸인 우르슐라 라인하르트가 간직하고 있던 것을 알아냈고, 발표를 주저하던 그녀를 ‘아이리스 장’과 난징희생자협회장인 ‘샤오 즈핑’이 설득해 비로소 일기가 공개된 것이다.(이 일기는 나중에 독자적인 책으로 출간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존 라베, 난징의 굿맨》으로 2009년에 번역 출판되었다.)

다시 전시관으로 돌아오자. 여전히 사람 많은 중국을 실감하면서 전시의 끝부분을 향할 즈음, 눈에 들어오는 공간이 하나 있는데, 깜깜하다. 자세히 눈을 뜨고 보아도 보일 듯 말 듯한, 실 같거나 칼날 같은 외줄기 빛이 벽을 수직으로 가르는 공간이다. <12초>다. 12초, 슬픈 시간의 간격. 난징대학살 당시 6주의 시간, 그 기간 동안 평균 12초당 1명의 생명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 공간의 제목이 <12초>인 것이다. 3층 높이의 수직공간에서 12초마다 생명을 상징하는 물줄기가 한 번씩 떨어지고, 그와 동시에 양쪽 벽에 부착된 참사자의 이미지들에도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한다. 이곳에서 관람객들은 비로소 12초의 의미를 깨닫고 놀라고 만다. 12초당 한 명의 생명이 사라져야 했다니. 필자는 그 허공을 수직으로 가른 빛의 날이 마치 일본도의 날 같고, 떨어지는 물줄기는 목이 잘려 나갈 때의 핏줄기 같다는 느낌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 유화작품인 <학살·생명·보살-남경대학살>. 미국의 화교화가인 리자건의 작품으로, 왼쪽의 일본군은 학살을, 가운데 상단부의 어린아이는 생명을, 오른쪽 시신을 매장하는 스님은 부처의 화신을 보여준다.(전시도록 사진)

 

이제 전시실을 나서면 거대한 벽면의 글씨와 그 앞에 전시된 대형 서고를 만나게 된다.

난징대학살 희생자들의 조사카드를 모아 놓은 압도적인 스케일의 당안장(档案墙/Archive-Wall/문서보존벽)이다. 12,000여 개의 자료케이스가 놓여 벽을 이루고 있다. 난징에서의 죽음의 실감은 스케일에서 오는 것인지, 이 벽 역시 300,000이라는 숫자의 반복되는 이미지처럼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케이스는 세 종류인데, 검은색은 희생자들의 개인 문서파일이고, 파란색 케이스는 생존자의 개인문서파일이다. 또한 회색 케이스는 해외 증인들의 개인문서파일이다. 아마도 결국에는 모두 검은색 파일로 바뀔 것이다. 상세한 증언자료는 이 서류함들이나 컴퓨터검색을 통해 찾을 수 있다고 한다.

   
▲ 12~24mm의 광각렌즈로도 담을 수 없는 규모의 문서보존벽.

바로 이 <문서보존벽>의 반대편 10여 미터에 달하는 전면 벽에 글자 폭이 1m는 됨직한 큼지막한 고딕체의 간체문장이 박혀 있다. 前事不忘, 后事之師, ‘과거 일을 잊지 않으면, 훗날의 교훈이 된다’는 이 문구는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유향이 편찬한, 전국시대(戰國時代) 전략가들의 책략을 편집한 책인《전국책(戰國策)》〈조책(趙策)〉에 나오는 성어(成語)다. 뼈아픈 역사와 관련하여 이만한 명문장이 따로 있을까?

이 문구는 중국의 항일시기를 테마로 한 모든 역사기념관에 반드시 등장하는 것으로,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 때 주은래가 일본에 던진 문구다. 이 말이 곧 이 기념관의 모토이다. ‘망각은 파멸에 이르고 기억은 구원에 이른다(이스라엘 야드바셈 기념관의 모토)’는 말처럼, “잔혹한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에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이 기념관이 존재하는 것이다.” 주성산 관장은 이것이 난징기념관의 이념이자, 설립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난징기념관 해설서)

이제 지하층에서 1층에 이르는 <인류적 대참사-중국침략일본군의 남경대학살역사진실전>은 끝났다. 다음은 2층의 전시인 <승리 1945-테마전>인데, 필자는 이 전시까지 다 보았다. 그 내용은 일본군의 만주침략에서부터 시작된 중국과 일본과의 전쟁에 대한 것인데, 평화인권의 주제라기보다는 다분히 현대사전 같은 테마전시였다.

즉, 이 기념관은 총론으로서의 중-일 간의 전쟁기념관이면서 주축은 난징대학살사건을 테마로 하는 전시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필자의 주요관심은 난징대학살에 있었으므로, 기념관의 소개는 여기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다만, 부기할 것은 확장개축 이전에 있었던 기념관도 현재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내부의 전시가 없어지고, 추념공간으로 새단장을 했고, 특히 심금을 울리는 <묘지광장>과 <어머니의 회침 석상>, <만인갱>, <부조상-재난, 학살, 제사>, <1만여 명의 명단-통곡의 벽>, 각 학살지별 위령비들은 여전히 예전 공간에 남아 있다.

 

   
▲ 이전 기념공간에 남아 있는 조형물들. 높이 4m의 입체(화강석) 작품인 <어머니의 외침>. 바닥의 조약돌들은 30만의 죽음을 상징한다. 오른쪽은 담을 따라 설치된 <부조-재난>의 부분.

한때 이 기념관도 부침이 많았다. 이 기념관은 미국과 일본 등 서방의 인권공세에 대응하는 정치적 의미도 컸었다. 개혁개방 초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또한 과거 마오시대의 공산당 정부는 이 사건이 국민당정부 시절 일어났다는 이유로 그동안 기념사업에 있어서나, 이 사건을 국가적 아젠다로 올리는 데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그러한 역사적 배경이 <난징대도살>을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비해 덜 알려지게 한 원인 중의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동안 지속적인 발굴과 확장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중국정부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평화인권의 상징적인 기념관들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이 기념관의 연간 방문객 수는 550만 명으로 베이징의 <자금성>을 제외하고는 단일 시설 중 최고의 방문지로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내외국인 할 것 없이 말이다.

그 와중에 불현듯 한국정부가 떠올랐다. 4·3평화공원이 총 3단계 사업 중 현재 2단계에서 멈칫거리고 있는데, 국민의 정부 시절 시작된 사업이 아직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중앙정부의 관료라는 것들이 지방의 뼈아픈 역사를 알아서 해결해 주리라고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 핑계 저 핑계 걸면서 아직도 주지 않는 예산을 축소시키고 용역결과까지 나온 사업을 변형시키는 작태를 보면서 한심하고 쪼잔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통령까지 공식사과한 도민 3만의 죽음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금인 1천억이 그리 아까운지, 4대강엔 들입다 쏟아 부으면서도 미집행 3단계 사업비 400억 중 280억 원을 삭감했다. 이전 정부들과는 연속성이 없는 정부라서인지, 정권이 바뀌어도 관료들은 다 그 자리에 앉아서 결재판을 돌리고 있을 텐데, 그들은 국민이 낸 세금을 제 것인 양, 어떤 경우는 주고 어떤 경우는 빼고, 어떤 경우에는 아주 피곤하게 주기도 하는데, 4·3의 경우라고 예외 없다. 난징기념관을 나서면서 우리의 처지가 한심하기 그지없고 우리 정부가 치졸하기 그지없다는 섭한 마음에 분노마저 생긴다. 참 거 머시기하게 말이다.

사실 이번 방문 중 주성산 기념관장이 마련한 4·3평화재단 방문단과의 저녁식사자리에서, 주 관장은 기념관을 보고 난 우리들의 소감과 칭찬에 대해 “난징기념관은 국가 외부의 침략에 대한 것으로서 이렇게 기념관을 세우고 기억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자기 나라 정부가 스스로 나서 과거사의 잘못을 인정하고, 희생자들에게 국가수반이 사과하고, 이를 기록·기념하는 기념관을 만들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이를 실현했다는 것은 우리보다 더욱 훌륭한 일”이라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꼭 한번 방문하고 싶다고 우리들에게 말했다.

   
▲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의소리
4.3기념관의 가치를 정확히 평가하는 통찰력 있는 발언이었다. 국가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다는 것, 그렇게 인정된 국가폭력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것, 그것은 실로 쉽지 않다는 것, 그렇기에 4.3평화공원과 기념관의 가치가 더욱 의미 있다는 것을 과연 우리 정부와 중앙정부의 관료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외국인인 주관장만큼 인식하고 있을까?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면, 그렇게 쉽게 예산 자르고 사업 미루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졸속으로 치닫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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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난징 여행 南京] 2015.01.11~14 :: 난징대학살 기념관

출처 - http://blog.naver.com/wjddmswo0827/220253251711

 

 

난징대학살 기념관

남경/난징 (南京)>> 소주/쑤저우

 

내가 난징을 간 이유!!

난징에 간다면 꼭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곳!!

바로 난징대학살 기념관이다.

 

대학교 강의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진링의 13 소녀 (The Flower Of War) 이다.

 

 

우리도 같은 상황을 겪었기에, 더 공감되고 가슴 아픈 영화랄까.

정말 시간이 있다면  이 영화를  꼭 보길 바란다!!

 

무튼 이 영화에 너무 감명받아서 찾아간 곳이 난징대학살 기념관인데, 입구에 가자마자 울ㅠ컥ㅠ

 

 

1937년 12월 13일 난징대학살 사건이 벌어졌던 날.

 

 

 

 

 

유난히 슬프게 느껴졌던 작품.

 

 

 

 

 

역사는 거울이며,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http://blog.daum.net/gmania65/483

 

1937 12 13,

인간이길 거부한 난징대학살(Nanjing Massacre)

 

1937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 중국인들을 상대로 저지른 대학살 사건으로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국민당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1937 12 13일부터 1938 2월까지 6주 동안 중국인들을 무차별 도륙한 사건이다. 이에 더하여 1939 4월에는 1644부대가 신설되어 생체실험 등이 자행되었다.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불명확하지만, 전후에 일부 유골 매립지를 근거로 든 연구 결과가 수만명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적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최소가 12만 명이며 최대 추정숫자는 약 35만 명 정도가 학살당했다.

  

1. 배경

 

1937 7루거우차오 사건(마르코 폴로 다리, 노구교 사건)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무력충돌이 터지면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베이징, 톈진 등 북부 주요도시들을 손쉽게 점령하고,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면서 일본군 수뇌부는 " 3개월 안에 중국대륙을 점령하겠다"고 큰소리 쳤을 만큼 기세등등했었다.

 

노구교 사건

 

그러나 상하이 전투가 국민당군의 거센 저항으로 예상보다 길어지고, 나아가 오송 전투에서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고서야 힘겹게 승리를 거두게 되자, 일본군은 중국군과 중국인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하게 된다. 또한 10 9일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는 과정에서도 2개월이라는 많은 시간과 함께 일본군의 물리적 피해도 상당하였다. 상하이를 점령 후 일본군은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으로 진군한다.

 

 

2. 일본군의 난징 진격과 중국군의 대항

 

한편 상해를 빼앗긴 중국의 장제스는 일본에 대항하는 길은 중국의 넓은 대류과 인구릉 이용한 장기전이라고 생각하고 난징이 위협 받자 이곳을 포기하고 대륙 깊숙한 충칭(중경)으로 천도를 선언하고, 11 15일에 충칭으로 퇴각한다.

 

이 때 유일하게 탕셩즈(唐生智) 장군만이 "난징을 필사적으로 지켜 생사를 함께하겠다."고 방어전을 주장해 난징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남는다. 그러나 난징을 삼면에서 좁혀들어오는 일본군의 포위속에 중국 국민당 주요관리와 부유층들은 재빨리 손을 써서 도시를 빠져나갔고, 중일전쟁 이전에 약 110만 명에 육박했던 난징은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시민들과 일본군을 피해 도시로 피난들어오는 피난민 등이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12 10, 일본군은 중국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피의 양쯔강을 만들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중국군은 끝까지 투항을 거부했고,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간다. 12 12일까지 중국군은 난징을 그런대로 잘 방어했지만 탕셩즈가 처음부터 방어 전략을 잘못 수립했는데다가 화력과 병력의 질적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장기적인 사수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결국 12 12일 일본군은 독가스를 뿌려 중국군 방어선을 무력화시켰고 탕셩즈는 그날 오후 8시 전군에 퇴각명령을 내린 다음에 참모들과 함께 우한으로 퇴각했다.

 

탕셩즈 난징 총사령관, 난징 주민들을 버리고 혼자 도주

 

12 13일 드디어 일본군은 난징성 안으로 진격하게 되고, 전날 난징성 시민들을 뒤로한 채 도망간 탕셩즈로 인해 피난가지 못하고 남아 있던 50~60만의 난징 시민들과 군인들은 공황 상태속에서 6주간 일본군에 의해 처참한 학살을 당한다. 바로 난징대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난징에 입성하는 일본군

 

 

3. 6주간의 난징 대학살

 

일본군은 백기를 들며 항복한 중국군 포로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하여 닥치는 대로 끌고가 성외곽 밖이나 양쯔강 하구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이나 되는 단위로,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남자들은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으로 되거나 목 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파묻혀서 생매장 당하거나 칼로 난도질당했다. 전후에 학살에 참가한 한 군인의 일기가 발굴되었는데,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참수하는 일본군


참수한 머리를 가지고 장날질 치는 일본군, 참수당한 머리에 담배를 물려놓고 있다

한 일본군이 중국인들의 머리를 쌓아두고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고 있다.

난징대학살 당시 무더기로 살해된 아기들


산채로 매장당하고 있는 중국인들

어린아이의 눈을 가린 채 참수하는 일본군()와 지켜주지 못한 손자의 죽음을 비통해 하는 노인들()

버려진 아이

학살의 정도를 간음할 수 있는 발굴 유해들

포로가 된 중국군 조만간 모두 학살당한다.

 

 

. 무푸산 대학살

 

난징 대학살에 있어 단일 규모로 가장 큰 학살은 무푸 산 근처에서 일어났다. 난징의 북쪽, 곧 난징과 양쯔 강의 남쪽 둑 사이에 있는 이 산에서는 5 7,000명의 민간인과 중국의 전직 군인들이 살해되었다. 수많은 중국군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은 일본군에게 또 다른 문제였다. 난징과 그 주변에서 학살당한 전체 중국군 가운데 일부만이 무푸 산에서 처형되었는데, 이 일부 시체 처리에만 며칠이 걸렸다.

 

시체를 매장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7천에서 8천구의 시체를 묻을 수 있는 커다란 구덩이를 팔 수 있는 곳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시체를 소각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일본군에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양의 연료가 없었다. 예를 들어 무푸산 학살 , 일본군은 시체에 휘발유를 드럼통으로 부어 시체를 태우려고 했지만 불길이 시체를 재로 만들기 전에 연료가 바닥나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결국 대부분의 시체는 양쯔 강에 내던져졌다.

 

난징 외곽 양자강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일본군. 일본군은 백기를 들고 항복한 중국군은 물론, "패잔병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모자를 오래 쓴 흔적이 있거나 손에 굳은살이 박힌 젊은 남자' 모두를 닥치는대로 끌어모아 기관총으로 양쯔강에 쓸어넣었다.

양쯔강 강변에 쌓여 있는 시신들

 

 

. 집단 윤간 및 선간후살(先姦後殺)

 

일본군은 여성을 성노리개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다. 그 대상은 10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어린이부터 60, 70대 노파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은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하여 난징의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능욕했다.

 

당시 강간을 당한 여성의 수는 80,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숫자만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 산채로 창자를 꺼내거나 유방을 도려내거나 벽에 못박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도 모자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딸을, 아들이 어머니를 강간하게 했다. 또한 아무 집이나 찾아가 어머니를 강간한 다음 울부짖는 딸과 함께 우물 속에 던져버리고 그 안에 수류탄을 던져 살해했다는 증언도 있다. 집단윤간도 비일비재하였다.

 

임신 중인 여성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고, 임신 중이거나 막 출산한 여성도 강간의 희생자가 되었다. 임신 9개월의 한 여성은 강간을 당한 후 건강은 물론 정신마저도 이상해졌으며, 임신을 한 여성을 발로 걷어차 죽이는 일도 일어났다. 임신한 여성을 강간한 후 재미로 그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는 경우도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여자뿐만 아니라 어린 소년들도 닥치는대로 강간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이 중국에서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에도 일본군들이 민가에 들이닥쳐 소년을 집단강간하는 묘사가 등장한다. 난징 대학살 동안 일어난 강간은 1971년 벵골 지역에서 파키스탄 병사들이 저지른 조직적인 강간을 제외하곤 역사상 유례없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최악의 강간이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강간에 대한 보스니아의 통계 자료가 정확하지 않아서 비교하기가 힘들지만 보스니아 전쟁 당시의 집단 강간보다 난징 대학살에서 저질러진 강간은 그 정도가 훨씬 더 심각하다고 추정한다.

 

『주씨 할아버지 집에 일본군이 들이닥쳐 40세의 주씨 며느리를 강간했다. 그녀의 시아버지, 남편, 아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이 끝난 후 일본군은 60여세의 주씨에게 며느리를 강간하라 했다. 주씨 할아버지는 며느리 몸에 엎드려 그 짓을 하는 체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그를 마구 때리며 진짜로 하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자기 며느리를 강간했다. 다음, 그들은 17세 된 아들에게 어머니를 강간하라 명령했다. 아들도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 박옥상, '남경대학살' 중에서 -

 

집단으로 끌려 가는 여성들

강간 후 집단학살 당한 여성들

젊은 여성을 강간하는 일본군들

강간 후 살해하고 여성의 성기에 칼을 꽂는 만행을 저지름

강간 후 여성을 벗겨놓고 놀이개로 삼았고(), 더 이상 팔요가 없으면 칼로 배를 잘라 처첨하게 살해하거나(,) 목을 잘라 죽였다(,)


좌측 사진은 일본군이 집단 윤간 후 아이와 함께 참수하는 모습이다. 아이라도 살리기 위해 엄마는 가슴으로 아이를 보호하지만 일본인들은 아이도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우측은 집단 강간 후 살해한 시신들. 도저히 같은 인간이라고 믿기가 어렵다.

 

 

. 100인 참수 경쟁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인 포로나 민간인들이 일본군의 총검술 연습이나 목베기 시합에 사용된 것이다. 여기서 일본 장교였던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와 노다 쓰요시(野田毅)100명의 목을 누가 빨리 베나 재는 시합, 다시말해 100 참수 경쟁을 한 사실이 있었다.

 

1937 11월 30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12월 13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수 시키는지를 겨뤘다고 보도되었다.

 

패전 이후 이들은 중국 난징에서 열린 난징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총살형을 당했다. 그리고 최후까지 자신들은 결코 민간인을 학살한 적이 없으며, 신문 보도도 단순한 창작 기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무카이 소위의 딸과 노다 소위의 아내, 손녀가 아사히 신문마이니치 신문을 상대로 명예 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해 우익 단체들의 재정적인 지원도 받으며 대법원에서 재판을 했으나 패소했다.

 

100인 목베기 경쟁 외에도 300목베기를 달성한 다나카 군키치 육군 대위의 이야기도 1940 2월에 도쿄에서 월간 황군이라는 잡지에 소개되었는데, 다나카 군키치 대위 또한 무카이, 노다 두 소위와 함께 난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 역시 최후까지 자신도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谷寿夫)와 무카이, 노다 소위와 함께 총살되었다.

 

1937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서 보도 된 100인 참수경쟁 기사.

인간이길 포기한 어쩌면 다른 일본인들도 마찬가지였고, 이고, 일 것이다.

 

 

. 기타 증언 및 기록들

 

『 첫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번째 줄의 포로들은 자신의 목이 잘리기 전에 앞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져 넣어야 했다. 살육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2,000명밖에 처리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이런 방식의 처형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 ! ! 방아쇠가 당겨졌다. 포로들은 강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강 건너편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 종군 특파원, 유키오 오마타의 기록 중에서 -

 

『살아있는 사람에게 가솔린을 붓고 총을 쏘아 불을 붙이거나,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연못에 밀어 넣어 얼어죽게 만들고 일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총을 쏘기도 했으며, 이유없이 어린아이를 전깃줄에 목을 매달았다, 또한 장작더미위의 나무 기둥에 묶고 사람이 완전히 익을 정도까지 불로 태웠으며 소년에게 염산을 부어서 죽여버리거나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어 가지고 놀았으며, 100여명의 사람을 묶고 코와 귀를 잘라내었다.

- 관련 증언 중에서 -

 

『난징 밖에 있는 연못은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컬러 사진으로 찍었으면 더욱 섬뜩했을 것이다. 포로들에게 자기가 묻힐 구덩이를 파게하고, 포로는 그 구덩이 앞에 꿇어앉아 머리가 잘리었다. 많은 일본군은 칼 솜씨가 아주 좋아 칼이 내리치는 순간 머리가 떨어지고 몸은 저절로 구덩이로 떨어진다. 상해에서 난징까지의 도처에서 여자 음부에 대나무 작대기를 쑤셔 넣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상관은 우리에게 여자를 강간한 후 죽여야 한다. 되도록 때려 죽여라. 총과 총검으로 죽이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 일본 종군 사진기자의 증언 -

 

 

4. 난징 안전지대

 

독일 나치스당원이자 지멘스의 직원으로 난징에 근무하던 라베는 외교관, 사업가 등 난징에 있던 다른 외국인들과 힘을 합쳐 '국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자신의 자택과 대사관 부지 등을 중심으로 일본군이 들어올 수 없도록 '난징 안전지대를 설정해 이곳에서, 피난하는 중국인들에게 음식과 머물 곳을 제공했었다. '난징 안전지대'에 전체 약 2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일본군들로부터 대피할 수 있는 은신처 및 음식을 제공받았다.

 

난징안전지대 구역은 모두 난징 주재 외국대사관과 난징대학교 주변에 설치되었다. 또한, 이러한 안전지대를 주도한 욘 라베는 자신의 소유지를 650명이 넘는 피난자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개방하였으며, 안전구역 내의 행정 책임자들은 끔찍한 학살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안타깝게도, 나치 부역 혐의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욘 라베 외에도 안전지대를 지킨 외국인들 중 상당수는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 진링 여자대학에서 여성들을 지키고 기록을 남긴 미국인 윌헬미나 보트린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건강을 크게 해쳤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 끝내 1941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일한 외과의사로 부상자들을 치료한 로버트 윌슨은 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평생 시력 저하와 발작, 악몽을 겪었다. 그 외의 사람들 중에도 발작 및 일시적인 기억 상실 등 정신질환 증상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흑역사에 가깝지만 냉전으로 서방 국가와 대립할 당시, 중국에선 라베를 제외한 서방 국가 인물들의 공로를 무시하고 오히려 미국인들이 난징 학살을 묵인, 방조했다는 등의 반서방 프로파간다를 퍼뜨리기도 했다. 다행히 냉전이 끝나고, 아이리스 장 등 난징 학살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들의 공로가 알려져서 현대에는 중국에서도 안전지대를 지킨 외국인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의인 John Robe

 

 

5. 대학살 이후, 1644부대

 

난징 대학살 이후 일본군은 1939 4월에 의학 연구 기관을 설치하고 난징에 있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마루타(통나무)'라는 실험 대상을 모아 연구했다. 일본군은 양쯔강 인근의 동중산대로에 있는 6층짜리 병원을 개조해 실험실로 꾸민 다음 'Ei 1644 부대'라고 이름 붙이고 유행성 질환을 연구한 것으로 시작했다. 이 건물은 군용 비행장, 일본 게이샤 구역, 영화관 등을 비롯해 일본군 헌병 본부, 난징 점령군 지휘본부등과 가까웠지만, 늘 일본군 헌병들이 배치되어 경기가 삼엄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어 비밀로 남아있었다.

 

1644 부대원들은 중국인 죄수나 포로들에게 독극물, 세균, 독가스를 주입하면서 생체실험을 자행했으며, 아세톤, 비소, 시안, 질산, 청산가리를 비롯해 코브라 등 독사에서 추출한 독도 사용해서 생체 실험 연구 등에 행해왔다. 매주 10여명의 사람들이 생체 실험에 의해 희생당하고, 그 사체는 'Ei 1644부대'의 소각로에서 처리되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Ei 1644부대는 중국군이 난징에 입성하기전 모든 실험도구와 데이터를 파괴하고 실험실을 폭파한뒤 도주했다. 이곳에서 일한 1644부대원 출신들이 뒷날 미국 심문관들에게 이 실험실의 존재를 알리면서 그곳에서 있었던 일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시이의 건의에 따라 1935년과 36년 히로히토 일왕의 칙령으로 창설된 세균부대는 4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얼빈 관동군 방역급수부로 불린 731부대를 비롯해 창춘 인근 멍자둔의 관동군 ‘군마방역국’으로 불린 ‘100부대’, 일명 ‘에이’라는 난징의 ‘1644부대’, 나미라는 광둥의 ‘8605부대’ 등이었다.

 






6. 계속되는 일본인들의 대학살

 

2004 11 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클라라 카운티의 인적 드문 고속도로변. 한 중국계 여성 저널리스트가 자신의 차 안에서 권총으로 자살,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이름은 아이리스 장(Iris Shun-Ru Chang, 중국명 장춘루).

당시 37살이었던 아이리스 장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그의 저서 <난징의 강간, 2차 세계대전의 잊힌 홀로코스트(The Rape of Nanking :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 아래 '난징의 강간')>는 한국에도 번역 출판되어 다수의 열혈 독자를 확보한 상태였다.


 

일본군이 저지른 잔학 행위를 폭로한 <난징의 강간>은 서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만 해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일으킨 유대인 대학살은 서적·영화·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매체에 의해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아시아에서 일으킨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피해국인 중국조차 침묵하고 있던 난징대학살은 그렇게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됐다. <난징의 강간>은 출간된 첫 해부터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60만부가 팔려나갔다. 책과 더불어 출간 당시 30살의 아이리스 장도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중국계 언론인으로 손꼽히면서,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작가와 역사 연구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난징의 강간>이 난징대학살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렸지만, 정작 그 진상을 알아야 할 일본에서는 출판조차 되지 못했다. 1999년 일본 카시와쇼보출판사는 <난징의 강간> 일본어판을 출판하려고 했지만, 일본 우익세력은 출판사에 몰려와 압력을 넣었다.

선전차를 이용한 고성방가에다 잇따른 협박 전화·편지·팩스까지 우익의 집요한 압력이 지속되자, 출판사는 책의 적지 않은 내용과 표현을 수정하여 출판하려 했다. 이에 아이리스 장 측은 반대했고, 결국 책은 일본에서 출판되지 못했다.

 

일본 우익세력의 난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난징의 강간>을 반일위서(反日僞書)라 규정지으며 대규모 규탄집회를 개최했다. 일본 우익은 난징대학살을 '20세기 최대의 거짓말', 아이리스 장을 '역사를 조작하는 마녀'로 비난하면서 난징대학살을 부정·왜곡했다.

 

일본 우익세력의 마각은 일본 내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아이리스 장의 자살에는 일본 우익의 압력이 작용했다. <난징의 강간> 출간 이후 아이리스 장은 줄곧 공포와 협박 속에서 지냈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아이리스 장은 가까운 친구들과조차 전화 대신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고 친척들에게도 남편과 아들의 근황을 말하지 않았다.

 

아이리스 장이 사망한 해 11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크리스틴 추이 뉴욕대학 영화과 교수는 "아이리스 장은 <난징의 강간> 출간 후 줄곧 일본 우익세력의 끊임없는 협박 편지와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아이리스 장을 여러 번 인터뷰했던 추이는 "아이리스 장은 일본 우익의 계속된 협박으로 우울증에 빠졌고 이에 정신과 진료를 받다가 자살까지 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마이뉴스, 2007. 12. 18.)

 

일본 우익의 살인행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 일본학살만행 - 난징대학살 + view 발행 | ┃다큐멘터리
+안전모+ 2009.07.02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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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에 로봇에 빅데이터에… 진화하는 중국의 택배

등록 : 2017.06.25 15:32
수정 : 2017.06.25 15:32

징둥의 물품 배송 드론. 바이두

지난 18일 중국 장쑤(江蘇)성 쑤첸(宿迁)시 하늘에는 온종일 택배상자를 배달하는 드론(무인조작비행장치)들이 날아다녔다.

지난해부터 택배 드론을 시범 운용해온 중국 제2의 전자상거래 업체 징둥(京東)이 ‘6ㆍ18 쇼핑데이’를 맞아 본격 운용에 들어간 것이다. 징동 측은 이날 드론들이 고객들과 약속한 시간ㆍ장소에 택배를 100% 정확하게 배달했다고 밝혔다.

같은 날 베이징(北京)의 칭화(淸華)대와 항저우(杭州) 저장(浙江)대 등에선 택배 배송에 나선 로봇들이 캠퍼스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택배를 실은 로봇은 목적지 도착 100m 앞에서 학생들에게 5분간 기다리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고, 학생들은 스마트폰을 이용해 인증번호를 입력한 뒤 자신의 택배를 찾아갔다.

중국은 가히 ‘택배 천국’이라고 부를 만하다. 정보통신(IT) 기술이 발전하고 스마트폰이 대중화하면서 인터넷쇼핑을 위시한 전자상거래가 활성화됐고 택배 물량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1년간 택배 건수는 무려 220억건에 달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접착테이프 길이만 해도 지구를 400번 이상 감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치열한 경쟁에 직면한 인터넷쇼핑 및 전자상거래 업체들의 최대 고민은 유통 비용의 축소다. 재고 관리와 물류 비용을 전반적으로 절감해야 소비자들을 계속 유인할 수 있는 것이다. 드론과 로봇을 이용한 택배 배달이 점차 본격화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류창둥(劉强東) 징둥 회장은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시골 지역 등에 드론 배송을 적용하면 물류 비용을 최대 70%까지 절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징둥이 보유한 드론은 5~30㎏의 짐을 싣고 최대시속 100㎞로 비행할 수 있으며, 최근엔 쓰촨(四川)성 등지의 오지마을에 1톤 무게 택배 시험비행을 진행 중이다.

실제 이달 초부터 시작된 6ㆍ18 쇼핑데이 기간 중 징둥은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 등 9개 지역에서 아시아 최초로 스마트 물류센터를 가동했다. 이들 물류센터에서는 상품 자동분류 로봇들이 시간당 3,600개 이상의 상품을 정밀하게 분류함으로써 기존 물류센터에 비해 5배 이상의 효율을 보였다.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도 이번 행사를 위해 40여개의 클라우드 물류창고를 투입했다. 이 창고는 고객들의 주문 빅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수요를 예측하면서 재고와 배송 우선순위를 조정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시에서 가동된 클라우드 창고는 평균 3분 이내에 제품을 출고했고 분류 정확도도 100%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베이징=양정대 특파원 torch@hankookilbo.com

한 대학 캠퍼스에서 로봇이 배달한 택배를 한 학생이 찾아가는 모습. 중신망

 

중국 스자좡에 건설된 공중 경전철, 무서울 수도 있을 걸?

인민망 한국어판 kr@people.cn
09:14, May 22, 2017
중국 스자좡에 건설된 공중 경전철, 무서울 수도 있을 걸?
에어 트렉 열차

[인민망 한국어판 5월 22일] <하북일보(河北日報)> 보도, 허베이(河北, 하북)성 스자좡(石家莊, 석가장)시 지하철 2호선과 맞물려 있는 롼청(欒城)구 방향의 경전철은 스자좡 중차궤도교통장비유한공사(中車軌道交通裝備有限公司)에서 건설한 레인에 열차가 매달려 있는 에어 트랙 열차이다.

에어 트렉 열차

에어 트랙 열차는 레인이 위에 달려 있고 그 밑에 열차가 매달려 운행되는 형태의 대중교통 수단이다. 해당 열차는 하늘에서 지상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번역: 은진호)

에어 트렉 열차

에어 트렉 열차

원문 출처: 인민망(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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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조선] 100% 개인 맞춤형에 가입자 6억명…대형 언론사 쓰러트린 중국 뉴스앱

  • 베이징=오광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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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7.05.12 07:00

    오광진의 중국 기업 열전 <3>
    모바일 뉴스앱 ‘진르터우탸
    하루 7800만명이 구독… 3년 새 200배 성장
    인공지능 활용해 개인별 맞춤형 콘텐츠 제공

     진르터우탸오의 웹사이트 PC화면과 모바일 사이트./사진=오광진 특파원
    진르터우탸오의 웹사이트 PC화면과 모바일 사이트./사진=오광진 특파원
    진르터우탸오(今日頭條·이하 터우탸오)는 출시 5년밖에 안 된 모바일 뉴스앱이지만 지난해 중국 시장 1위(치타 글로벌랩 기준 주간 사용자 침투율 13%)를 차지했다. 대형 언론사는 물론이고 바이두·텐센트·신랑 등 대형 인터넷 기업들을 모두 제쳤다. 가입자는지난해 6억명을 넘어섰다. 매달 1억5000만명, 하루 7800만명이 터우탸오를 통해 뉴스를 접한다. 퀘스트모바일에 따르면 중국에서 월 방문자수가 1억명이 넘는 중국뉴스 앱은 터우탸오와 텐센트신문 2곳뿐이다.

    ◆ 기자·편집자·사설 없는 ‘3無 뉴스 플랫폼’
    지난해 말 기준 터우탸오 가입자 평균 하루 사용시간은 76분에 달했다. 2015년 말 53분에서 43% 늘어났다. 뉴스앱 중 가장 길다.


    [이코노미조선] 100% 개인 맞춤형에 가입자 6억명…대형 언론사 쓰러트린 중국 뉴스앱
    광고가 대부분인 매출은 지난해 목표치 60억위안(약 1조200억원)을 뛰어넘어 100억위안(약 1조7000억원)에 달한 것으로 예상됐다. 2015년 10억위안(약 1700억원)대의 10배 수준이다. 폭발적인 성장은 기업가치의 빠른 상승을 동반했다. 지난해 말 4번째 투자유치를 하면서 평가받은 기업가치는 120억달러로 추정된다. 2013년 두번째 투자유치할 때 6000만달러로 평가받은 것을 감안하면 3년 새 기업가치가 200배 성장한 것이다.

    터우탸오는 2012년 3월 설립된 베이징즈제탸오둥커지(北京字節跳動科技)유한공사가 5개월 뒤 출시한 모바일 뉴스 플랫폼이다. 90일 만에 1000만명이 내려받았다. 5번째 창업에서 성공의 끈을 잡은 장이밍(張一鳴∙34) 최고경영자(CEO)는 자사를 “미디어 회사가 아니다”며 “미디어의 속성을 가진 기술회사”로 소개한다.

    터우탸오는 기자·편집자·주장(사설 등)이 없는, 이른바 ‘3무(無) 뉴스 플랫폼’이다. 개인의 취향만을 고려해 콘텐츠를 분배하는 큐레이션(상품 선별∙추천) 서비스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회사의 가치관 개입은 절대 불허한다.

    [이코노미조선] 100% 개인 맞춤형에 가입자 6억명…대형 언론사 쓰러트린 중국 뉴스앱
    ◆ 어떤 콘텐츠 전달할지 회사가 개입 안해
    터우탸오는 중국에서 인터넷 업계를 대표하는 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가 구축한 ‘BAT’ 구도를 깨는 모바일 인터넷 시대 다크호스 3인방 TMD(터우탸오·메이퇀·디디추싱) 중 하나다. 지난해 7월엔 텐센트의 80억달러 인수 제의를 거절해 유명세를 탔다. 텐센트가 막대한 위챗 가입자수를 무기로 2015년 뉴스앱 텐텐콰이바오(天天快報)를 내놓는 등 다른 인터넷 업체들도 터우탸오 따라하기에 나섰다.

    터우탸오 스토리를 중국 산업계의 ‘헤드라인’으로 만든 요인은 △철저한 개인 맞춤형 서비스 △이를 뒷받침한 인공지능(AI) 기술 △협업에 기반한 쇼트클립(short clip·짧은 영상) 강화 △인재를 비용이 아닌 효율로 보는 인사관리 등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저속한 콘텐츠를 걸러내고, 불법 복제를 근절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장이밍 CEO는 터우탸오를 우체국에 비유한다. 우체국이 자기와 가치관이 맞는 신문만 배달하지는 않듯이 어떤 콘텐츠를 분배할지 회사의 가치관을 개입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신문 배달이 우체국을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장 CEO의 ‘우체국론’은 한국의 네이버 등 보통의 뉴스포털이 편집 개입 논란을 빚는 것과 대비된다. 회사가 콘텐츠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어떤 콘텐츠가 배달될까. 수요가 공급을 결정하도록 한다는 게 장 CEO의 접근법이다. 독자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고 독자가 원하는 뉴스를 분배한다는 것이다.

    사회·재경 등 콘텐츠 분야는 구분하지만 전통 매체의 기사와 블로거나 1인 미디어가 올린 글을 구분없이 배치하는 이유다. 전통매체 기사를 우위로 치는 종전의 뉴스앱과는 다르다.

    여기서 독자는 집단이 아닌 개성화된 독자다. ‘오늘의 헤드라인’을 의미하는 진르터우탸오가 ‘당신이 관심을 둔 게 비로소 헤드라인’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게 이를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것을 표출시키는 게 아니다. 남들의 취향보다는 개별 독자만을 위한 맞춤형 뉴스서비스인 셈이다.

    아마존·타오바오 같은 전자상거래업체가 먼저 사용한 가입자별 적합 상품 추천 기능을 콘텐츠에 적용한 것이다.

    터우탸오의 한 직원이 삼성전자가 발표한 스마트폰 신제품 소식을 올린 적이 있다. 장 CEO는 이 직원에게 이유를 물었고, “그렇게 중요한 뉴스를 안 내보낼 수 있나요”라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지 아닌지는 독자가 판단할 일”이라는 게 장 CEO의 생각이다. 터우탸오의 독자 맞춤형 콘텐츠 서비스는 선택권 과잉의 시대에 큐레이션이 유행인 흐름을 올라탄 덕이 크다. 미국에서도 쿼츠나 버즈피드처럼 큐레이션으로 승부를 건 미디어가 선보인 지 오래다.

    ◆ 편집국장을 대체한 AI 로봇
    터우탸오가 편집국장이 아닌 고객에게 정보 취합 선택권을 넘긴 건 AI 기술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학습능력을 가진 로봇이 독자가 자주 찾았던 읽을거리를 분석해 관심이 있을 만한 것을 추정해 보여주는 식이다. 독자가 앱을 많이 사용할수록 독자 취향에 더욱 정확히 접근할 수 있는 구조다. 작동 후 10초 내 표출 화면을 갱신하며 독자에게 적합한 콘텐츠를 보여준다.

    터우탸오는 독자의 정보 취향을 SNS를 통해서도 접근했다. SNS에서 친구 추천 글을 읽는 추세가 확산되는 흐름을 간파한 것이다. 위챗이나 웨이보 같은 SNS 계정으로 등록할 경우 해당 계정에서의 활동을 기초로 5초 내 사용자의 흥미 DNA를 분석해 정보취향을 추정해낸다. 올 2월 마이크로소프트(MS) 아시아 연구원에서 옮겨온 AI 전문가 마웨이잉(马维英) 부총재는 “동영상·사진·문자를 모두 디지털화한뒤, 이를 언어화해서 로봇이 효율적으로 콘텐츠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한다”고 말했다. 독자가 사는 지역에 맞춰 현지 뉴스를 보여주고 연령·성별·직업 등의 정보 취향과 관련, 특징도 반영한다.

    PC 인터넷 시대 뉴스 검색 1인자였던 바이두의 위기감이 크다. 리옌훙(李彦宏) 바이두 창업자는 올 1월 내부 회의에서 “모바일 인터넷시대로 넘어오면서 콘텐츠 창작자들이 위챗·웨이보·터우탸오를 선택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바이두 플랫폼으로 콘텐츠를 되돌아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장이밍 진르터우탸오 CEO(왼쪽)가 지난해 3월 보아오포럼에서 리커창 중국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사진=진르터우탸오
    장이밍 진르터우탸오 CEO(왼쪽)가 지난해 3월 보아오포럼에서 리커창 중국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사진=진르터우탸오
    터우탸오의 서비스는 문자형 뉴스에 머물지 않는다. 음악·영화·게임·전자상거래 상품은 물론 영상도 포함된다. 2016년 터우탸오의 영상 시청 횟수는 하루 평균 12억6900만회에 달했다. 2015년 1억8000회보다 605% 급증했다. 터우탸오의 영상 콘텐츠 승부수는 쇼트클립이다.

    세계 레슬링 연맹(WWE), 중국 축구협회 프리미어리그,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에 강한 망궈(芒果) TV 등과 쇼트클립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올 2월엔 미국의 모바일 영상 플랫폼업체인 플리파그램(Flipagram)을 인수했다. 2013년 미국에서 시작된 플리파그램은 가입자 자신의 사진과 영상을 배합해 쇼트클립 영상을 만들어 올릴 수 있는 동영상 창작 애플리케이션 업체다. 인수가는 플리파그램의 부채가 7000만달러에 이르는 만큼 5000만달러를 넘기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터우탸오는 앞서 지난해 9월 쇼트클립 제작 스타트업에 총 10억위안(약 1700억원)을 투자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스타트업 지원은 회사가 창작을 직접 하지는 않지만 협업을 통해 우량 콘텐츠를 많이 발굴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3월 2억위안(약 340억원) 규모의 콘텐츠 창업투자기금을 만들고 동시에 ‘터우탸오 창작공간’이라는 창업보육센터 문을 연 것도 같은 까닭에서다.

    콘텐츠 창업 프로젝트마다 30만~100만위안(약 5100만~1억7000만원)을 투자하고 있다.1기에 690개 팀의 경쟁을 뚫은 즈스펀즈(知識分子) 등 30개 콘텐츠 창업팀이 입주했다. 이들은 터우탸오가 주는 투자와 사무공간은 물론 업종 교류회와 창업 멤버 교육 등의 지원도 받는다.

    2년여 전부터 첸런완위안(千人萬元)계획을 통해 우수 콘텐츠 창작자 1000명에게 매달 1만위안(약 170만원)을 보조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매달 4000만위안(약 68억원)이 콘텐츠 창작자들에게 배분되고 있다.

    ◆ 최고 인재에 급여 100개월치 연말 상여금
    직원을 비용으로 보지 않고 업무 효율을 중시하는 인사관리도 터우탸오의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요인이다. 장이밍 CEO는 인건비를 통제하는 건 인재 확보를 위한 정확한 해결방안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기업의 경쟁력은 비용수준이 아니라 인재에 대한 투입 대비 수익률이라는 것이다. 그가 직원들에게 약속하는 3가지 중 하나가 효과적인 보수다. 터우탸오는 실적이 특별히 뛰어난 인재가 연말 최고 상여금으로 급여 100개월치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장이밍 CEO의 나머지 약속 두 가지는 즐겁게 일하고 회사와 본인이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직원들이 임대료를 아끼기 위해 시 외곽에 살지 않고 회사 인근 시내서 거주할 수 있도록 월 1500위안의 주택 보조금도 준다. ‘출퇴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영화를 보든지 헬스를 하든지 즐기라’는 것이다. 인재 채용 사이트인 ‘보스(Boss)즈핀(直聘)’이 컴퓨터 공학 전공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터우탸오가 ‘BAT’를 제치고 최고의 직장으로 꼽힌 것도 이 때문이다.

    터우탸오의 성공모델은 해외에도 통할까. 지난해 말 터우탸오 해외 가입자수는 1200만명에 달했다. 북미는 물론 브라질·인도·인도네시아·일본 등에 이미 진출했다. 지난해 10월엔 인도 최대 뉴스 영상포털 데일리헌트를 2500만달러에 인수했다. 북미판 영어 뉴스앱 톱버즈(Topbuzz)도 만들었다. “모바일 인터넷 시대에 제지술이나 인쇄술처럼 정보의 전파를 변혁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장 CEO의 광오한(?) 도전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진르터우탸오 홈페이지
    진르터우탸오 홈페이지
    ◆ Plus Point
    유해 콘텐츠·불법복제 근절은 과제
    진르터우탸오는 지난 4월 베이징 시 정부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시청 회의실에 나온 인터넷 신문 판공실과 공안국 관계자들은 저급한 황색 콘텐츠 제공을 중단하라는 시정명령을 내렸다. 4월 중순엔 의료 광고가 터우탸오에 노출됐다는 네티즌의 폭로가 나왔다. 의료광고는 내보내지 않고 있다는 터우탸오 측의 그동안의 입장 표명과 달라 논란이 일었다. 지난해 바이두의 과장 의료 광고 탓에 환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의료 광고 윤리가 도마에 오른 상태다. 중국 당국은 지난해 9월부터 인터넷 의료 광고도 정부 비준을 거치도록 했다.

    터우탸오의 회사 가치관 불개입 정책이 오히려 불량 콘텐츠를 걸러내지 못하는 구멍을 만든 사례들이다. 터우탸오의 콘텐츠 분배를 책임지는 인공지능을 속이는 기법을 활용해 감시망을 뚫은 불량 콘텐츠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장이밍 CEO는 유량(流量)도 중요하지만 유량의 신뢰도 역시 중요하다며 저속한 콘텐츠나 광고 탓에 신뢰도가 떨어지면 상업화가 힘들어진다는 점을 인정한다.

    1인 미디어를 적극 수용한 대가로 불거진 불법 복제 문제도 터우탸오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텐센트와 소후는 4월에 베이징의 하이뎬법원에 터우탸오를 지식재산권 침해 이유로 제소하면서 관련 콘텐츠를 모두 내리라고 요구했다. 터우탸오는 2013년부터 신징바오(新京報)·광저우르바오(廣州日報) 등 전통매체들과 지재권 분쟁을 겪어왔다. 장 CEO는 고등학교 때 매일 20개가 넘는 신문을 정독할 만큼 정보를 중시하는 신문 구독광이었지만 지재권 분쟁의 단골 피소자가 된 것이다.

     진르터우탸오에 등록돼 있는 쇼트클립.
    진르터우탸오에 등록돼 있는 쇼트클립.
    ◆ 중국 쇼트클립 대유행 속 히트 치는 영상 4대 비결
    진르터우탸오에서 28억회에 이르는 하루 평균 콘텐츠 이용량 가운데 절반 가까이는 쇼트클립 시청이 차지한다. 터우탸오만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지난해 초부터 올 3월까지 쇼트클립 스타트업에 투자된 자본규모가 53억7000만달러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대박을 기대하며 쇼트클립을 만드는 창업기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터우탸오의 자오톈(赵添) 부총재는 최근 올 1 분기 ‘동영상 부문 우수 작품’ 1만166개를 분석한 결과를 기반으로 동영상 성공 비결로 4가지를 꼽았다.

    1. 동영상 재생시간은 ‘4분’이 최적
    터우탸오의 올 1분기 동영상 부문 우수 작품의 평균 재생 시간은 247초로 나타났다. 100만회 이상 재생 횟수를 기록한 동영상의 평균 재생 시간은 238.4초였다. 콘텐츠 이용자들의 만족도가 높은 동영상의 최적 재생 시간이 ‘4분’이라는 얘기다.

    2. 맛집, 유행, 라이프 스타일 관련 콘텐츠가 주류
    맛집, 유행, 라이프 스타일 관련 분야의 동영상 콘텐츠가 전체의 29%를 차지했다. 자오 부총재는 과학 지식 보급과 관련한 동영상 콘텐츠 분야에 24개 팀이 참여했고, 각 동영상의 평균 재생 횟수는 약 22만7000회에 달했다고 전했다. 과학 지식과 금융 등 전문 분야에 대한 동영상 콘텐츠가 향후 동영상의 블루오션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3. 동영상 제목 길수록 재생 횟수 높아
    동영상 우수 작품의 평균적인 제목 글자 수는 20.8개(한자 기준)로 제목 길이와 재생 횟수 간에 높은 상관 관계가 나타났다고 자오 부총재가 전했다. 평균 재생 횟수가 가장 높은 동영상의 제목 글자 수는 25~30개에 형성돼 있다. 터우탸오는 이를 감안해 ‘이중 제목’과 ‘이중 홈페이지’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콘텐츠 제공 업체들이 더 많은 추천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4. ‘공유 횟수’와 ‘답글’ 및 ‘좋아요 클릭 횟수’가 중요
    재생 횟수 10만회 이상 동영상은 평균 4200회 공유된 것으로 나타났다. 사용자의 답글이나 ‘좋아요’ 클릭 수 같은 피드백 수준이 많을수록 재생 횟수도 많아진다. 보다 많이 재생되려면 제목 작성 단계부터 수요자와의 상호 피드백을 염두에 둬야 한다.



    원문보기: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10/2017051001161.html?main_hot3#csidxc4e7ebd03bac70187310183f56781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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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봉은 쥐꼬리인데 야근은 기본, 휴일 출근도 잦습니다. 절대 가지 마세요.”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에 있는 한 중소기업은 지난달 한 기업 평판조회 사이트에 올라온 글 때문에 발칵 뒤집혔다. 근무 조건, 연봉 등 재직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이 수두룩했다. 인사담당 하모씨(37)는 “사장이 크게 화를 내고 글 쓴 사람 색출을 지시했다”며 “이 때문인지 상반기 공채 지원자가 작년보다 30% 넘게 줄었다”고 하소연했다.

    ◆월 조회 수 5700만건 넘기도 

    기업 평판조회 사이트가 인기를 끌면서 상반기 공채를 진행 중인 기업들에 비상이 걸렸다. 검증되지 않은 사내 정보가 외부로 유출돼 이미지가 손상되고 인재 확보에 차질을 빚을 위험이 커졌다. 평판조회 사이트를 찾는 취업준비생은 해마다 급증세다. 국내 대표 기업 평판조회 사이트인 잡플래닛의 지난달 게시물 조회 수는 5700만여건에 달했다. 전년 동기(3936만여건)보다 45% 급증했다.

    김한석 잡플래닛 매니저는 “연봉 정보나 회사 내부 분위기를 파악하려는 취업준비생이 주로 찾고 있다”며 “사이트 월 순방문자가 300만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잡플래닛은 익명으로 기업 평가를 올린다. 승진 기회, 복지나 급여 조건, 업무 강도, 사내 문화, 경영진 평가 등을 별점으로 표시한다. 회사가 내는 국민연금 납부액을 바탕으로 42만곳의 연봉 정보를 제공하는 크레딧잡도 인기다. 연봉은 물론이고 입·퇴사자 현황 등을 통해 회사의 성장성이나 고용 안정성도 가늠해볼 수 있다.

    취업준비생은 구직에 큰 도움이 된다고 입을 모은다. 취업준비생 김동욱 씨(28)는 “취업 전 검색이 필수”라고 말했다. 최근 중소기업에 입사한 임성준 씨(27)는 “두 곳에서 합격 통보를 받아 고민했는데 평판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분위기나 연봉 등이 ‘극과 극’이었다”며 “덕분에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고 했다.

    ◆허위 정보도 적잖아 

    기업들은 불쾌함을 호소한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중소기업은 최근 직원들에게 ‘잡플래닛 금지령’을 내렸다. 한 직원이 근무시간이 너무 길고 연봉 상승률이 낮다는 식의 글을 올려 회사 이미지가 실추됐다는 판단에서다.

    소송전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경기 안산의 한 중소기업 사장 김모씨(53)는 “능력 부족으로 퇴사한 직원들이 회사를 탓하는 글을 올려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며 “별생각 없이 올리는 글이 기업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김씨는 포털 사이트에 ‘잡플래닛 집단 소송 카페’를 열고 소송 참여 기업을 모집하고 있다.

    허위 정보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은 해당 사이트에서도 인정한다. 잡플래닛 관계자는 “허위 정보가 올라올 때도 있지만 걸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허위 정보 신고가 들어오면 신원 확인 등을 거쳐 글을 블라인드 처리한다”고 밝혔다.

    기업들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과도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취업준비생 이우진 씨(27)는 “높은 급여와 좋은 복지를 자랑하는 게시물도 적지 않다”며 “내부 단속에 앞서 근무 환경 개선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박민우 씨(28)도 “기업이 지원자를 평가하듯 지원자도 기업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WEEKLY BIZ] 4년 동안 매출액 57배 껑충…세계 장악한 중국 '드론 괴물' DJI

  • 오광진 조선비즈 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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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7.04.01 08:00

    창업 10년 만에 민간용 드론 70% 점유… 네 가지 '굴기 비밀'

    드론
    창업 10년 만에 세계시장 점유율 70% 달성, 최근 2년 매출액 증가율 200%, 지난해까지 4년 만에 총매출액은 57배, 기업 가치와 종사자 인원은 각각 222배, 24배로 급증….

    경영학 교재에 '가상 사례'로 등장하는 기업 얘기가 아니다. 2006년 중국 남부 광둥성 선전(深)의 한 잡지사 창고에서 왕타오(汪滔·37) 최고경영자(CEO)를 포함한 20대 젊은이 4명이 세운 DJI가 이런 수직 상승을 하고 있다.

    민간용 드론(drone·무인항공기)만 제조·판매하며 승승장구하는 DJI는 여러모로 주목된다. 먼저 중국 기업이 선진 기업 추종자(follower)가 아니라 특정 업종의 선도자(first mover)로서 글로벌 표준을 확실히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내수 시장에서 덩치를 키운 뒤 해외로 나선 중국 기업 성장 모델과 정반대라는 측면이다. 지난해 DJI의 해외 매출액 비중은 전체의 80%에 달했다. 화웨이·텐센트·알리바바 같은 중국 글로벌 기업이 창업 1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해외 매출 비중이 절반을 넘지 못했던 것과 대비된다. 마지막으로 DJI는 군수용에 국한되던 협소한 드론 시장을 개인·산업·공공(公共) 등 민수(民需)용품으로 확장시킨 주역이다. DJI 굴기(崛起)의 비밀을 WEEKLY BIZ가 해부했다.

    DJI
    액션 영화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 두 명이 DJI의 최신형 드론 ‘매트리스 600(M600)’ 기체를 날리고 있다. M600은 항공 촬영이나 여러 산업 분야에 응용할 수 있는 전문가용 드론으로 작년에 출시됐다./DJI
    1. 반년마다 신제품 쏟아내는 '스피드 혁신'

    DJI는 설립 초기 완제품보다는 무인 비행체와 카메라를 연결하는 기구인 '짐벌(gimbal)' 등 각종 부품 개발에 주력했다. 짐벌은 비행체의 흔들림과 무관하게 카메라의 기울기를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를 바탕으로 2008년 드론을 내놓았으나 매출은 부진했다. 영상 송수신기와 카메라 등을 따로 구해 조립해야 하는 등 전문가 영역에 머무른 탓이다. 기체(機體) 하단부에 카메라를 장착한 '팬텀 시리즈'를 내놓으며 성장 궤도에 진입했다.

    질주의 원동력은 기술력이다. "공중촬영을 하려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팬텀은 정지 비행 시 오차 범위가 플러스마이너스(±) 40cm로 경쟁사 드론들의 3분의 1 미만이다. 짐벌 기술도 최고 수준이다."(박석종·한국드론산업협회 회장) 비행체와 카메라를 융합하는 핵심 기술에서 세계 1위 실력이라는 뜻이다.

    평균 5~6개월마다 신제품을 내놓는 '혁신 속도'는 5~6년 만에 신제품을 출시하는 경쟁사를 압도한다. 첫 팬텀 이후 1년도 안 돼 탄생한 '팬텀2'는 충돌 방지 장치와 3축(軸) 짐벌을 탑재해 공중촬영의 정밀도를 높였다. 2015년 나온 '팬텀3' 3개 모델은 비행 안정성 향상에 성공했고 작년 3월 등장한 '팬텀4'에선 전방 장애물 회피 기능과 대상을 뒤에서 추격하는 기능까지 넣었다. 작년 10월 접이식 드론으로 출시된 '매빅 프로'는 접었을 때 드론 크기를 500㎖ 생수병 수준으로 줄이면서 대상의 좌우 양측과 전방까지 추격 기능을 확대했다. 동시에 빅데이터를 기초로 대상을 스스로 식별하는 정보 처리 기능까지 탑재했다. 이어 작년 11월 출시된 '팬텀4프로'는 전·후방과 좌우 측면 추격 기능에 장애물 회피 기능까지 장착했다.


    그래픽
    2. 인력 3명 중 1명이 R&D 연구원

    "3년 만에 간신히 공중촬영을 하던 수준의 드론을 인공지능(AI) 기능까지 탑재해 자체 정보 처리까지 가능토록 한 것은 연구개발(R&D) 노력의 승리다."(이토 아세이·伊藤亞聖· 일본 도쿄대사회과학연구소 강사)

    R&D 총력전의 배후엔 2600여 명 전문 인력이 있다. 전체 8000명 종업원의 33%다. '덩치가 커져도 연구 인력 비중 3분의 1을 유지한다'는 왕타오 CEO의 철학에 따른 것이다. 석·박사급 인력을 주력으로 삼는 다른 중국 기업과 달리 DJI는 학사급 연구 인력을 선호한다. "혁신 인재는 실습을 통해서 길러질 수 있는데 중국의 이공계 대학원 교육은 그렇지 못하다"는 판단에서다. 2015년부터 중국 대학생 로봇 대회인 '로보 마스터즈'를 DJI가 후원하는 것도 실전에 강한 연구 인력 저변을 확대하려는 포석에서다.

    해외 유명 기업·연구소와 글로벌 연구 네트워크 구축에도 열심이다. 2015년 스웨덴의 명품 카메라 기업인 하셀블라드의 일부 지분을 인수하고 공동 연구에 들어가 올 2월 1억 화소급 하셀블라드 카메라를 장착한 드론을 발표하고 시판 시기를 저울질 중이다. 기체 충돌 회피 기능 보강을 위해 세계 최고 화상(畵像)인식 전문 반도체 회사인 미국 모비디우스와 1년 넘게 공동 연구를 진행, 팬텀4에 반영됐다

    DJI는 미국 캔자스주립대와 함께 밭의 영양과 수분 상태를 드론으로 모니터링해 비료와 물 사용 비용을 줄이고 수확량을 늘리는 기술도 개발 중이다. 미국 실리콘밸리 R&D 거점에 이어 2015년 10월 도쿄 시나가와(品川)역 주변에 일본 R&D 센터를 열었다. 캐논·니콘·소니 등 세계적 카메라 기업의 엔지니어 스카우트가 주요 목적이다.



    3. 선진국 直攻… 애플式 제품 생태계 주력

    해외 전략도 차별화된다. 신흥 시장에서 제품력을 인정받은 후 선진국으로 나가는 기존 중국 방식과 달리, DJI는 선진국을 먼저 직접 공략하는 방식을 구사한다. 2012년 미국 LA에 첫 해외 지사를 세운 후 현재 15개 해외 지사 중 개발도상국이나 신흥 시장에 있는 지사는 전무하다. "본사 마케팅 직원의 절반이 외국인 직원이며 본사의 모든 공문은 영어로 작성한다. 왕타오 CEO 본인부터 영문 이름인 '프랭크 왕'으로 불리길 좋아한다."(왕판·王帆·DJI 홍보부문장)

    미국 애플사를 연상시키는 제품 생태계 조성도 돋보인다. 출발점은 2015년 개발자 전용 드론인 M100을 내놓으며 공개한 소프트웨어 개발자 도구(SDK)이다. 드론의 기본 기능을 갖춘 M100에 세계 각지 고객이 SDK를 활용해 원하는 기능을 추가, 맞춤형 개인 드론을 만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SDK를 전 세계 기술 개발자들에게 공개해 자기 플랫폼에서 다양한 수요를 창출토록 한 점에서 애플과 DJI는 닮은꼴이다. 개인이나 기업이 드론의 사용처를 영화 촬영·농업·시설 검측·토지 측정·수색 구조 등 다양한 분야로 확산시킬 수 있다. 하늘은 물론 지상에서도 DJI가 자체 생태계를 만들고 있다."(고영화·미래창조과학부 산하 KIC중국센터장)

    DJI
    ‘아시아의 실리콘밸리’ 선전에 있는 DJI 플래그십 매장. /DJI

    4. 中 드론 기업의 75% 밀집 '深圳 효과'

    "DJI의 가격 경쟁력 뒤편에는 선전의 하드웨어 산업 사슬이 만든 비용 경쟁력이 있다."(위자닝·於佳寧·중국 공업정보화부 산하 공업경제연구소장) 첫 팬텀 드론의 가격(679달러)은 당시 소비자들이 조립해 만드는 비용보다 300달러 정도 쌌다. 아시아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선전에선 디자인을 보내면 그날 늦게라도 시제품을 받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인재가 넘치고 제품 설계·제조가 신속하다. 이런 매력으로 선전에는 중국 전체 드론 업체(400여 개사)의 75%인 300여 개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DJI 같은 성공 사례가 속출하면서 창업이 더 활발해져 선전이 창업 메카로 성장하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됐다."(정준규 KOTRA 선전무역관장)

    DJI는 출신 지역이나 학벌 대신 실력으로만 평가하는 '선전 특유의 스타트업 문화'를 적극 수용한다. 2012년 대학생 인턴이던 천이치(陳逸奇)가 공중에서 360도 회전 촬영이 가능한 방안을 제시하자, 왕타오 CEO는 그에게 수천만위안 연구비와 100여 명 연구팀의 지휘권을 넘겼다.

    *이 기사 전문은 3월4일자 조선일보 WEEKLY BIZ에서 볼 수 있습니다. WEELLY BIZ 구독 및 배달 신청은 조선일보 홈페이지 ( https://members.chosun.com/subscription/appendweeklybiz.jsp ) 에서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독자는 온라인으로 신청하면 무료로 배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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