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m a korean.
정유사 담합… 소비자돈 2400억 털어갔다

SK 등 국내 4개 정유사 "원유 20원 오를 때 휘발유 40원 올리자" 담합




SK(주)와 GS칼텍스 등 국내 4개 정유업체가 휘발유와 등유 경유 등 석유류 제품 가격을 담합해오다 수백억원의 과징금을 물게됐다.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권오승)는 이달 21일 전원회의를 열고, SK(주)와 GS칼텍스(주), 현대오일뱅크(주), S-Oil(주) 등 국내 4개 정유사들이 2004년에 휘발유와 등유, 경유의 판매가격을 공동으로 인상한 사실을 확인했다.

공정위는 이들 업체에 대해 모두 526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는 한편, 4개 법인을 검찰 고발하기로 의결했다. 업체별로는 SK가 192억원, GS칼텍스 162억원, 현대오일뱅크 93억원, S-Oil 78억원 등이다.

이들 업체들은 2004년 4월~2004년 6월 휘발유와 등유(실내등유·보일러등유), 경유 등 석유류 제품 가격을 담합해왔다.

군납유류의 입찰담합에 대해 2000년 5개 정유사에 1,211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된 적이 있으나, 정유사가 소매유류 가격담합으로 과징금이 부과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정유사들, 공익모임 통해 가격정보 교환하며 담합

이들 4개 업체는 2004년 4월경 가격결정에 관한 긴밀한 공조체제를 구축하고, 대리점과 주유소에 공급하는 휘발유와 등유·경유의 판매가격을 공동으로 인상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이들 업체는 업계 1위인 SK(주)가 고시하는 공장도가격에서 일정액수를 할인한 금액을 시장의 유종별 목표가격으로 설정했다. 이후에는 목표가격을 실질적인 시장가격으로 고착시키기 위해 공익모임을 운영하고, 가격정보를 서로 교환하며 이행여부를 상호 감시해왔다.

따라서 SK의 공장도 가격만 인상시키면 실거래가격이 자동 인상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해당 업체들은 당초 합의내용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업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합의이행을 촉구하기도 했다.

실제 가격담합기간(2004년 4월~2004년 6월) 중 원유가 인상은 20원에 그친 반면, 국내 정유사가 공급하는 휘발유는 40원, 등유는 70원, 경유는 60원 인상됐다.

담합기간중 이들 4개 정유사의 3개 석유류 제품의 국내매출액은 1조 6천억원이었으며, 소비자 피해액은 2천 4백억원으로 추산됐다. 정유사들은 카르텔 기간이 포함된 2004년에 사상 최대의 영업이익을 냈다. 4개 정유사의 2004년 석유제품 사업부문 영업이익은 2조 2730억원으로 2003년에 비해 무려 188%나 증가했다.

▲ 2004년 석유수입사 퇴출로 과점체제 형성되자 담합거행

2003년 국내 정유사의 경쟁상대인 석유수입사들이 영업여건 악화로 시장경쟁력을 상실하고 2004년 이후에는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됐다. 실제 2003년 11월 국내 최대 석유수입사인 페타코가 부도처리됐다. 국내 정유사들의 과점체제가 어느 때보다 견고해져 가격담합이 가능했던 것이다.

석유수입사의 시장점유율은 휘발유의 경우 2002년 6.5%에서 2004년 1.6%로 등유와 경유는 각각 6.5%와 9.0%에서 3.4%와 3.5%로 뚝 떨어졌다. 석유수입사들이 사실상 퇴출된 국내시장에서 정유사간 가격이나 시장점유율 경쟁은 결국 상호간 손실만 초래할 뿐이라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특히 2003년 이후 원유가는 완만하게 상승한 반면 석유제품의 국제제품가격은 급상승해 정유사들은 수익구조가 개선돼 가격인하 여력이 추가적으로 발생했다. 정유사들은 그러나 내수판매가격을 무조건 국제제품가 이상으로 설정하는 아주 경직적인 가격결정방식을 공동으로 채택 운용했다.

▲ 공정위, 국제제품 가격과 무관하게 움직인 단서 포착

공정위는 정유업종의 특성상 조사와 입증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2년여에 걸친 조사와 분석을 통해 담합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공정위는 국제제품가격(싱가포르 국제현물시장가격)이 하락하던 2004년 5월말부터 6월초까지도 국내 정유사들이 3개 석유류 제품에 대해 인상된 가격을 계속 유지한 정황을 포착하고 2004년 8월에 4개 정유사에 대한 첫 현장조사를 실시했다.

공정위는 석유제품 담합관련 내부자료를 확보해 자료분석을 벌이면서 정유사와 주유소 등 관련업종 종사자들을 통해 상당 기간 시장동향을 탐문해 정유사 카르텔의 윤곽을 포착했다. 공정위는 2년 뒤인 2006년 7월 정유사에 대한 2차 현장조사를 벌여 담합행위를 직접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했다.

공정위는 2003년 작성된 일부 문건에서 담합이 의심되는 기간이 있었으나 구체적인 증거수준이 불충분해서 이번 시정조치 대상에서 제외했다. 공정위는 그러나 가격담합의 의심이 가지만 이번 시정조치의 대상에서 제외된 기간의 담합여부에 대해서도 검찰과의 협조 등을 통해 계속 감시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CBS경제부 박종환 기자
cbs2000@cbs.co.kr

노컷뉴스 펌 --->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442942

두고 보자고...

곧 항소? 하면 벌금이 삭감 되든지, 아예 증거 부족으로 무협의 되든지...

정유사의 로비는 세계 1위! 그 누구도 건드릴수 없는 오일 달러의 힘이지!

국민들은 지금 또 열 받더라도 곧 망각의 세월과 힘겨운 세파에 밀려

잊어버린다.

계속 잊어버리고, 한잔 먹고 또 잊어버리고...

왜? 아무런 힘이 없걸랑! 국민은 또 그걸 알걸랑!

체념하며 사는 세상! 돈이 돈먹는 더러운 세상!

누구 슈퍼맨 될인물 없나?

없수?

작년 10월달에 또 하드니...

!

정유사 허위고시, 담합으로 '폭리' 질타

[스포츠서울 2006-10-17 18:36]

SK㈜.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3사가 공장도가격을 부풀려 폭리를 취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17일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와 산업자원위원회의국정감사에서 여야 의원들은 정유사들이 국민들을 속여 폭리를 취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진수희 한나라당 의원은 정무위의 공정거래위원회 국감에서 “에쓰-오일을 제외한 정유 3사가 공장도가격을 부풀린 사실이 드러났다”며 “정유사는 그동안 이런 행위를 통해 폭리를 취했다”고 따졌다.

진 의원에 따르면 지난 11일 기준으로 정유 4사가 한국석유공사에 보고한 세후공장도가격은 휘발유의 경우 ℓ당 SK㈜가 1355원. GS칼텍스가 1367원. 현대오일뱅크가 1353원. 에쓰-오일은 1304원으로 에쓰-오일이 다른 정유사들에 비해 ℓ당 50원 안팎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진 의원은 이를 토대로 “SK.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등 3사는 이른바 ‘기준가격’이라는 이름으로 실제가격보다 부풀려 책정한 가격을 석유공사에 보고해 왔으며 이를 통해 국민들로 하여금 ‘가격 착시 현상’을 유도해 엄청난 폭리를 취해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증인으로 출석한 신헌철 SK㈜ 사장은 “고시가격은 기준가격을 말하는 것”이라며 “사후적 판매가격을 사전적으로 예측해서 얼마에 판매하겠다고 할 수 없다”고 해명했다.

앞서 진 의원은 지난 2005년에 5대 정유사가 한국석유공사에 보고한 가격과 실제판매가격은 휘발유. 실내등유. 경유. 벙커-C유 등 석유제품에서 평균 ℓ당 55.7원이 차가 난다며 이 가격차 만큼 정유사와 주유소가 폭리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진 의원은 1997년 유가 자율화 이후 국민이 추가로 부담한 기름값 규모가 무려 19조원대에 달한다고 덧붙였다. 백상현기자 shbaek@

911 테러에 대한 상당히 개념있는 동영상

일기장 2006/06/30 17:19

이것이 미국의 본질이다!!



분류 : 국제정치논평 등록 : 영성(Guest) 조회 : 5,178 점수 : 859 날짜 : 2004년 05월 16일 (22시 52분)

대미외교, 탈사대주의 개막 전야

사례1

맥아더 회고록에는 심상치 않은 두개의 문장이 나온다. "나는 1931년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나는 1948년 프리메이슨의 가장 높은 계급에 올랐다."


왜 가입했는지, 가입해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프리메이슨과 관련해서는 딱 이 두 문장뿐이다. 프리메이슨 규율상 가입을 위해서는 세번에 걸쳐 기존회원을 찾아가서 가입을 간청해야 하는데 1920년대에 40대의 나이로 이미 참모총장직에 올랐던 그가 무엇이 아쉬워서 프리메이슨의 하위계급이 되기 위한 간청을 했을까. 이름 모르는 상급자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게 그 조직의 엄한 규율인데 그는 무슨 명령을 받았고 그 명령을 어떻게 수행했을까. 이에 대한 나름대로 근거 있는 설명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사례2

부쉬알콜중독자였으며 무직자였다. 마음을 잡기위해 어느 여인과 약혼했으나 그의 행실을 사후에야 알게 된 여인의 부모들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 길이 없었다. 결국 파혼 당했다.

장가를 간 후 나이 40이 넘어 술을 끊고 아버지에게 돈을 받아 여러 장사를 해보았으나 하는 장사마다 모두 실패했다. 그러다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에 3%를 투자하고 애비의 후광에 힘입어 텍사스주정부의 돈으로 구장을 짓게 하는데 성공한다. 이 로비의 공로로 다른 주주들에게서 많은 공로주를 받아 1,500만불의 주식매매차익을 남긴다.(즉, 아버지 빽으로 돈을 번 것이지 자신의 능력으로 돈 번 게 아니다.)

우쭐해진 그는 텍사스주의 회의원으로 출마할 뜻임을 공개적으로 밝히나 그의 됨됨이를 잘알고 있는 엄마 바바라는 그가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언론에 발표해버린다.(서로간에 사전상의가 없었다. 또 무슨 말썽을 부릴지 우려했던 탓으로 보이며 엄마는 아빠와는 상의했을 것으로 본다)

주의회의원감도 못된다고 공개적으로, 그것도 자신의 부모로부터 판정받은 인간이 그로부터 대통령이 되는 데는 5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공식해설로는 "사상처음으로 텍사스레인저스 야구장을 건설토록한 그의 능력"이 주지사가 된 이유이며 주지사로서 특별한 잘못이 없었던 바람에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다고하나 그것만으로는 납득하기에 부족하다. 부쉬의 케이스는 미스테리로 가득 찬 미국현대사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미스테리이다.

위의 사례들을 두고 맥아더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후 아무런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으며, 부쉬는 운이 좋아 대통령이 되었다고 믿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키에는 어째 석연치 않다. 옐친도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이후에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클린턴의 섹스행각을 이미 알고 있었다. 섹스 행각 그 자체는 우리에게 별 의미 없는 일이었다. 우리?주목했던 것은 그와 같은 스캔들이 터져 나오도록 만든 배후가 어떤 세력이냐는 문제였다." (놀랍게도 그의 이 발언은 언론에 보도 되었었다.)

드러난 표면의 뒤에 그 무엇인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시각이 음모론이란 이름으로 무조건 배척되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시각에서 미국과 미국이 개재되었던 전쟁의 숨겨진 면모를 한 번 살펴보자. 나날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라크문제, 더 나아가서 북핵문제의 현재상황을 이해하고 그 미래상황을 예측하는데 있어서 과거에 대한 조명은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1. 미국이라는 나라

전 국민의 22%가 문맹 또는 문맹과 같은 상태이며 14%만이 정기적으로 신문을 읽고 있다. 이라크 전쟁 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50%가 911은 후세인의 소행인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언론의 90%가 유태인에 의해 장악되어 있으며 정계, 재계, 법조계, 영화계를 위시한 문화계등도 그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네오콘, 즉 신보수주의자들의 핵심은 모두 유태인이며 20세기 들어와 미국이 유태인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은 적이 없으나 지금처럼 아예 가면을 벗어던지고 노골적으로 세를 과시한 적은 없었다. 전 분야에 걸쳐 평정이 이루어져 굳이 숨어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듯하다. 그린스펀, 월포위츠, 리차드 펄, 볼튼...등 그 리스트는 길기만하다.

그 중 리차드 펄은 얼마전 보도에서 미국외교를 막후에서 움직이는 큰손이라는 보도를 본적이 있는데 그는 극우파인 헨리 잭슨의원의 보좌관 출신으로서 공무원재직시 이스라엘의 간첩혐의로 체포된적이 있는 인물이다. 그가 큰손일리는 없으며 그역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본다.

핵심인물 중 콘돌리사 라이스는 유태인이 아닌데 1963년 버밍햄방화사건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고, 앨라배마에서 자라면서 인종차별을 처절하게 경험한 그녀가 인종차별을 묵시적으로 지지하는 극우보수파에 가담되어 있는 것은 이채롭다.(1963년 앨라배마의 주도인 버밍햄에서 백인 극우보수파들이 흑인교회를 방화하여 흑인소녀 4명이 불에 타 죽었고, 그것도 모자라 범인들은 죽은 소녀들의 팔다리를 칼로 찢어 놓았다. 이 "영웅적인 의거"에 감동한 앨라배마 경찰은 수사하는 흉내조차 내지 않았고 보다 못한 FBI가 수사에 나섰으나 FBI국장 에드가 후버는 "어치피 잡아봤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무죄로 평결할 것"이라는 기상천외의 이유로 수사중단을 지시하여 범인들은 끝내 잡히지 않았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양성된 인물이 아닌가싶다.

무자본특수법인인 우리나라의 한국은행과는 달리 미국의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oard, 화폐를 찍어내는 곳)은 민간회사이며 엄연히 개인주주들이 있다.(주주는 모두 유태인이라고 한다.) 상식에 어긋나는 부조리인데도 불구하고 그 어느 누구도 입도 벙긋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가끔 부쉬가 미운 나머지 민주당을 선호하는 글을 보는데 그같은 환상을 깨는 데는 "Stupid White Males(어리석은 백인 남성들. 번역본이 나와 있다.)" 라는 책이 특효약이다. 그 책을 보면 민주당이 공화당의 2중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우칠수 있으며 클린턴 시대에 북한폭격이 심각히 검토된 것, IMF가 터진 것, 임기말기에 그토록 MD법안관철을 위해 힘쓴 것, 민주당이 반대하는 척하다가 이락전쟁에 찬성한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표면상 완벽한 자유민주주의국가로 보이나 실제로는 극소수의 엘리트층(그것이 유태인이든 아니든)에 의해 움직여지는 나라. 소위 국민의 여론은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엘리트들에 의해 조작될 가능성이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그 엘리트들은 이해관계의 계산에 있어 냉정하고 그 추구에 있어 냉혹하다.

2. 미국의 전쟁

1차대전 당시 미국은 독일계 미국인들의 견제도 원인이었지만 무엇보다 참전의 명분을 찾기가 어려웠다. 참다못해 미국은 Sussex호 피격사건을 조작해낸다. 미국함정 Sussex호가 독일에 의해 피격, 침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차대전 종전 후 Sussex 호는 피격은커녕 총알한방 맞은 적이 없었음이 밝혀진다. 그 후 그들은 역사교과서에 미국의 민간여객선인 루시타니아호의 피격, 침몰이 참전원인이었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루시타니아호는 미국국적선이 아니었으며 2천여명의 사망자중 미국인은 2백여명에 불과했고 피격사건은 참전하기 2년 전에 일어났으며 무엇보다도 피격당시는 참전과 관련한 고려와 여론이 전혀 없었다.

1차대전 후 미국은 영국을 제치고 세계1위의 산업국가로 올라선다.

2차대전 당시 루즈벨트와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참전을 열망하였으나 1차대전 때와 같은 딜레마에 빠져있었다. 그리하여 일본에의 석유금수조치로 일본을 자극하였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암호해독을 통해 진주만습격을 미리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벤트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하와이 주둔군에 대한 어떠한 안전조치도 그들은 취하지 않았다. (항공모함은 딴 곳에 옮겨 놓았다)

1944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후보(이름을 잊어버렸음)는 이같은 사실에 대한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였고 이를 유세에서 터뜨릴 예정이었다.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같이 생긴 루즈벨트의 진면목이 드러날 순간이었다. 이때에 육참총장 마샬은 그 후보를 은밀히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그 사실을 터뜨리면 일본이 우리의 암호해독능력을 알게 되고 이에 따라 안 죽어도 될 우리 장병 수십만이 당신의 말 한마디 때문에 죽게 된다." 마샬의 말로 인해 그 후보는 폭로를 포기한다.(이상 "100 Men in World War 2" 에서)

2차 대전 후 미국의 GNP는 전 세계의 60%를 차지하게 되고 이스라엘이 건국된다.
1950년 미국국무장관 애치슨은 이른바 애치슨선언을 발표한다.

미국의 아시아태평양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이 제외되어있다는 내용이었다.(이 방위선을 애치슨라인이라고 하는데 남방한계선은 없다. 즉, 한국과 대만을 뺀 나머지국가들은 모두 지킨다는 뜻이다.)

대만과 대치한 중공은 1949년 대륙은 통일하였으나 해,공군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대만침공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미국은 장개석이 되지도 않을 본토수복작전을 벌이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달랐다. 북침의 가능성, 아니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 당시 2차대전종전후 5년밖에 되지 않아 아직 재건되지 못한 소련은 미국과 3차대전을 일으킬 가능성이 전무했다. 애치슨라인안에 한국이 들어있을 경우 소련이 3차대전 발발의 위험을 무릅쓰고 김일성을 앞세워 미국과 대결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반면, 무주공산(한국)에 와서 거저 가져가라는 것을 사양할 이유도 없었다. 애치슨이 한국을 방문하여서까지 애치슨라인을 확인하는 것을 보고 스탈린은 미국의 불개입을 확신했고 김일성의 전쟁건의를 재가했다. 교활했던 스탈린도 남침하자마자 미국이 기다렸다는 듯이 태도를 돌변하여 참전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애치슨선언, 그것은 바로 한국전쟁에로의 초대장이었다.

2차대전 종전 후의 미국군산복합체의 어려움은 625로 인해 말끔히 해소될 수 있었다.

월남전을 일으킨 통킹만 사건이 미국의 조작이라는 것은 지금은 미국조차도 부인하지 않고 있으니 생략하겠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의 불경기는 월남전을 통해 해결되고도 남았다.

80년대는 레이건이 폭발적인 군비확장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던 시대였다. "굳이" 전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던 때였다.

이라크의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기 전 미국대사 April Glaspie 를 불러 침공의 뜻을 밝혔을 때 Glaspie는 "중동국가간의 분쟁에 대해 미국은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그 후의 스토리는 생략한다. 다만 후세인의 "오해"를 불러일으킨 Glaspie에 대해 어떠한 문책도 없었음을 첨언한다.

위에서 언급한 사항들은 미국이라는 코끼리의 어느 한 면에 불과하다. 부분적인 지식만으로 미국을 과소평가 해서도, 과대평가 해서도 안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미국 국무부의 북한담당관을 장기간 역임하며 미국과 한반도의 관계와 관련한 실무에 오래 종사했던 케네스 퀴노네스 박사가 2002년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외교의 가장 큰 문제는 사대주의"라고 언명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한미관계에서의 탈사대주의 시대가 마땅히 개막되어야 하며, 실제로 개막되기 시작했든가 아니면 곧 개막 될 현재상황이라고 본다.
from www1.seoprise.com

영성 <서프라이즈 독자논설위원>

http://kr.blog.yahoo.com/tkwn100

미국은 달에 가지 않았다

"테러 대처 요령 배웠어요"
전쟁기념관 '비상대비 체험관'
한 달 만에 1만여 명 다녀가
[중앙일보] 2007-10-20 오전 4:52:53 입력 / 2007-10-20 오전 6:34:53 수정
어린이들이 18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비상 대비 체험실에서 방독면을 써 보며 화생방 체험을 하고 있다. [사진=김상선 기자]
가스실에 주황색 방독면을 들고 서있는 관람객들의 눈빛은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도 잠깐. 화생방 체험실인 가스실의 한쪽 벽에서 하얀 연기가 "슉슉" 소리를 내며 뿜어나오자 주위는 삽시간에 어두컴컴해졌다. 중학생 유연수(13.충남 당진 호서중 2년)군은 10여 명의 관람객과 함께 방독면을 재빨리 착용했다. 방독면을 쓰고 있는 30초는 답답하고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가스실의 하얀 연기는 독가스나 눈물을 흘리게 하는 메캐한 최루가스가 아니었다. 무해무독의 화생방을 체험하기 위한 연습용 가스였다.

국무총리실 소속 국가비상기획위원회(비기위.위원장 안광찬)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테러 예방훈련에 나섰다. 밀폐된 공간에서 테러범의 독가스가 터졌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북한군의 남침으로 비상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익히기 위해 비기위가 '비상 대비 체험관'을 지난달 18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2층에 개관했다. 화생방체험실은 비상대비 체험관의 여행 코스 중 하나다. 한 달 만에 1만 명이 다녀가는 기록을 세웠다. 하루 300여 명꼴이다.

체험관의 첫 번째 코너는 이라크전쟁 및 각종 테러 등 현대전을 소개하는 '안보 영상물실'이다.

비상 대비 체험 여행은 ▶전쟁.테러에 의한 피해와 정부 대비책 코너 ▶신고 요령 ▶민방공 경보 때 행동방법 ▶전쟁 또는 화생방 공격 때 자신을 지키는 방법 ▶집에 갖춰야 할 각종 비상물품 익히기로 이어진다.

핵무기가 터졌을 때 방사능에 의한 피해가 가장 큰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오해와 진실'도 보여준다. 핵폭발 때 나오는 에너지 가운데 폭풍(55%)이 가장 많고 열(30%)이 그 다음이며 방사선(15%)에 의한 피해가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아홉 번째 여행 코너에서는 비상상황에 관해 우리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즉석에서 테스트한다. 10개의 질문에 9개의 정답을 맞히면 '우수'라는 인증서를 프린터로 바로 출력해준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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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커에세이] 축구장에 등장한 날달걀 '만약 벽돌조각이었다면'
마이데일리 | 기사입력 2007-09-23 14:30 | 최종수정 2007-09-23 16:18 기사원문보기

[마이데일리 = 조건호 기자] 퍽! 오른쪽 뺨에서 불꽃이 번쩍였다. 손을 올려 뺨을 만져 보니 얼굴과 머리가 온통 날달걀로 뒤덮여있었다. 순간 내 앞에 있던 다른 한 기자는 피가 흥건한 코를 붙잡고 그라운드에 나뒹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에서는 마치 폭탄처럼 물병과 각종 이물질이 그라운드로 날아들고 있었다. 인터뷰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몸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수단의 벤치를 엄폐물로 삼아 대피하려는 순간 이번엔 녹음기를 들고 있는 왼손에 무언가 날아와 터져버렸다. 또 다시 달걀이었다. 옆에서는 인천의 푸카 체력 담당 코치가 머리에 물병을 맞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몸을 피해 녹음기에 묻은 달걀을 급하게 닦아 낸 뒤 재생 버튼을 눌러 보았다. 날달걀의 비린내가 나는 녹음기의 스피커에서 방금 전 인터뷰한 데얀의 흥분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Referee killed Incheon!” (심판이 인천을 죽였다!)

잠시 진정을 하고 있으니 2004년 잉글랜드 포츠머스에서 겪었던 일이 일어났다. 당시 필자는 포츠머스와 사우스햄튼의 지역 라이벌전을 관람하기 위해 경기장까지 갔지만 벽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와 같은 분위기에 일찌감치 경기장 진입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날 프라튼파크 주변에서는 훌리건들의 난동에 경찰마와 경찰견 수 마리가 부상당했고,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 심각한 모습이 전개됐다. 양 팀의 팬들은 미리 조각 내온 벽돌을 던지며 경기장 주변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얼마 뒤 지역 신문 The News는 그날 난장판을 벌인 사람들을 축구팬이 아닌 '훌리건'이라고 칭했고, 햄프셔주 경찰 당국은 난동의 주동자와 심한 폭력을 휘두른 이들에게 구속과 함께 장기간의 경기장 출입 금지를 내렸다. 말 그대로 '훌리건'들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그들은 정작 축구 경기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소동 혹은 싸움 자체를 미리 계획하고 실행했던 축구장 주변의 '건달'들일 뿐이다.

물론 22일 인천 문학구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팬들은 축구 경기를 보고 나서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었다. 대부분은 홈 팀의 패배를 너무도 안타까워하는 열혈 축구팬들이다. 이러한 팬들이 있을 때 축구장의 분위기는 뜨거워질 수 있으며, 선수들도 지역 팬들과의 일체감을 갖고 혼신의 힘을 다해 뛰게 된다.

그러나 심판진을 향해 날아든 물건에 날달걀이 포함돼있다는 것은 분명히 심각한 문제였다. 축구장의 매점에서는 삶은 달걀은 팔아도 날달걀을 판매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던지기 위해 미리 준비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물론 달걀은 흉기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로 어떤 물건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잠재된 '훌리거니즘'을 보여주는 증거다. 시간이 흘러 이들이 준비해오는 물건이 달걀이 아닌 조각난 벽돌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팬들이 마음을 함께 하면서 축구에 대해 울고 웃는 것은 축구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하지만 특정한 상황을 대비(?)해 던질 물건을 준비하는 것은 이미 충분히 폭력적인 발상이다.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발전할 잠재력을 갖고 있는 위험한 아이디어다.

[심판 판정에 항의하기 위해 출입구에 모인 흥분한 인천 팬들. 사진=조건호 기자]

(조건호 기자 pompey14@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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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포웰스


전쟁은 생명과 자원의 끔찍한 낭비이며,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전쟁에 반대한다. 다른 한편, 미국 대통령은 전쟁을 사랑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많은 논평가들은 그 대답을 심리적인 요인에서 찾아보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조지 부시 2세는 자신의 부친이 걸프전에서 시작했으나 종결시키지 못한 일을 완수하는 게 자기의 임무라고 여긴다고 설명한다. 다른 사람들은 부시 2세는 백악관에서의 제2기를 보장해줄 단기적이고, 확실한 승리를 기대하고 있었다고 믿는다.

나는 미국 대통령의 태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데를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부시가 전쟁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것은 그의 심리와는 거의 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미국의 경제시스템과 크게 관계되어 있다. 이 시스템―미국식 자본주의―은 무엇보다도 부시네 ‘달러왕조’와 같은 극단적으로 부유한 미국인들을 더욱더 부자로 만들기 위해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냉전이든 열전이든 전쟁이 없다면, 이 시스템은 미국의 저 강력한 힘을 가진 부자들이 자신들의 생득적 권리라고 여기는 끊임없이 증가하는 이윤을 그들에게 더이상 가져다 줄 수 없다.

미국 자본주의의 커다란 강점, 즉 극단적으로 높은 생산성은 또한 커다란 약점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국제 경제시스템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많은 요인들이 엄청난 생산성 증가를 가져다주었다. 예를 들면, 18세기 초 영국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생산의 기계화 같은 것이 그렇다. 그리고, 20세기 초, 미국의 산업가들은 일관공정(assembly line)과 같은 새로운 테크닉에 의한 자동화로써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일관공정은 헨리 포드에 의해 도입된 기술혁신이었으므로, 그러한 기술들은 향후 뭉뚱그려서 ‘포드주의’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국의 대기업들의 생산성은 눈부실 정도로 상승하였다. 예를 들어, 이미 1920년대에 미시간의 자동차 공장 일관공정 라인에서는 셀 수 없는 차들이 매일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자동차를 사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대부분의 미국인은 그 당시 그런 구매행위를 위한 충분한 돈을 갖고 있지 않았다. 또 다른 산업제품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시장에 넘쳐흘렀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갈수록 증가하는 공급과 뒤처지는 수요 사이의 만성적인 부조화 현상의 출현이었다. 그래서 일어난 게 일반적으로 대공황이라고 알려진 경제위기였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과잉생산의 위기였다. 제품창고들은 팔지 못한 상품들로 터져나가고 있었고, 공장에는 해고된 노동자가 흘러넘치고, 실업이 폭발하였다. 그러자, 미국인들의 구매력은 한층더 위축되고, 위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미국에서 대공황이 종결된 것은 오직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이었으며, 또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종결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을 아무리 찬미하는 사람일지라도 엄청나게 선전된 그의 뉴딜정책이 실제로 거의 또는 아무런 구제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유럽에서 시작되고, 1942년 이전에는 미국이 능동적으로 참가하지 않았던 전쟁이지만, 그 전쟁으로 인하여 미국의 기업이 무제한적으로 군수물자를 생산하게 되면서 경제적 수요가 엄청나게 뛰어올랐던 것이다.

1940년에서 1945년 사이에, 미국 국가는 1,850억달러 이상을 그러한 물자에 소비하게 되고, GNP 중 군사용 소비가 점하는 비율은 1939년에서 1945년까지 1.5%에서 거의 40%로 상승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 기업은 엄청난 양의 장비를 영국과 심지어 소련에까지, 렌드-리즈(1941년에 통과된 미국의 연합국에 대한 무기대여법―역주)를 통하여 공급하였다.

(한편, 독일에서는, 포드, GM, ITT 같은 미국 대기업의 자회사들에 의해서 온갖 종류의 비행기와 탱크와 그밖의 전쟁도구들이 나치를 위해, 진주만 이후에도, 생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얘기이다.) 그리하여, 대공황의 핵심 문제―공급과 수요 사이의 불균형―는 거대한 군수품의 주문이라는 수단으로 국가가 경제적 수요를 대규모로 만들어냄으로써 해소된 것이다.

보통의 미국인의 처지에서 본다면, 워싱턴의 군비지출 잔치는 사실상 완전고용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과거 어느때보다도 더 높은 임금을 가져다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대공황으로 인한 광범한 빈곤이 종식되고, 대다수 미국인들은 유례가 없는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전시(戰時) 경제 붐의 가장 큰 수혜자는 이 나라의 사업가들과 기업들이었다.

그들은 엄청난 이윤을 실현하였다. 역사가 스튜어트 브랜디즈에 의하면, 1942년에서 1945년 사이에 미국의 가장 큰 2,000개 기업의 순이익은 1936-1939년 동안의 그것보다 40% 더 높은 것이었다. 그러한 엄청난 이익이 가능했던 것은 국가가 수십억달러의 군수물자를 주문하고, 가격통제에 실패하고, 회사들이 남긴 이익에 과세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이러한 관대함은 일반적으로 미국 기업에 혜택을 주었지만, 특히 ‘대기업’으로 알려진 거대 엘리트회사들에게 큰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전쟁 동안 총 60개 미만의 기업이 수익이 큰 군사 및 그밖의 국가에 의한 발주의 75%를 획득했다. 거대기업―포드, IBM, 기타―들은 자신들이 국가의 군사비라는 ‘풍요로운’ 사료통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전쟁 돼지들’임을 스스로 드러냈다. 예를 들어, IBM은 1940년에서 1945년 사이에 전쟁 관련 주문 덕분에 연간 4,600만달러에서 1억4천만달러로 판매를 신장시켰고, 그에 따라 이윤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미국의 대기업은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서 포드주의적 전문성을 최대한 이용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미국 국가의 전시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충분하지 않았다. 보다 많은 장비와 물자들이 필요했고,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미국은 새로운 공장과 심지어 보다 효율적인 기술을 필요로 했다. 그 결과로, 이 나라의 모든 생산설비의 총가치는 1939년에서 1945년 사이에 400억달러에서 660억달러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새로운 투자를 떠맡은 것은 사적 부문이 아니었다. 30년대 동안의 과잉 생산으로 인한 불유쾌한 경험 때문에 미국의 사업가들은 이러한 투자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가가 2,000개 이상의 국방관련 프로젝트에서 170억달러를 투자함으로써 이 일을 수행했다. 사기업들은 명목상의 임대료만을 지불하고,

이 새로운 공장들을 빌려서 생산을 하고, 그 생산물을 국가에 판매함으로써 돈을 벌도록 허용되었다. 게다가, 전쟁이 끝나, 워싱턴이 이 투자된 것들을 민간기업에 불하하기로 결정했을 때, 미국의 대기업들은 그것을 실제 가격의 절반, 많은 경우에 3분의 1값으로 사들였다.

그런데, 미국은 어떻게 전쟁비용을 감당했는가? 어떻게 워싱턴은 GM이나 ITT, 혹은 그밖의 다른 군수품 공급 기업들이 보내온 엄청난 대금지불 청구서에 응할 수 있었는가? 그 대답은, 부분적으로는 과세라는 수단으로―약 45%―그러나 더 많게는 차금(借金)을 통해서―대략 55%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적 부채는 극적으로 증가하여, 1939년의 30억달러에서 1945년에는 450억달러로 늘어났다.

이론적으로는, 이러한 부채는 전쟁 동안에 미국의 대기업들이 벌어들인 엄청난 이윤에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축소되거나 청산되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언급했듯이, 미국 국가는 미국 기업이 획득한 횡재에 의미있게 과세하지 못하고, 공적 부채를 버섯구름처럼 부풀리게 허용하였다. 그리고 그 부채와 이자는 일반세입금, 즉 직접 및 간접세에 의해 국가가 거두어들이는 소득으로 해결하였다.

특히 1942년에 도입된 역진적인 ‘국세법’ 때문에, 이들 세금은 점점 갈수록 미국의 부호들과 기업, 기업주, 주요 주주들, 혹은 최고 경영자들이 아니라 노동자와 저소득층 미국인들에 의해 납부되었다. “전쟁 비용부담은 사회의 상대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어깨 위에 굳세게 지워졌다”고 미국의 역사가 숀 데니스 캐시먼은 말한다.

그러나, 미국의 대중은 전쟁에 마음을 빼앗기고, 완전고용과 높은 임금에 눈이 멀어,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지 못했다. 다른 한편으로, 풍요로운 미국인들은 전쟁이 자신들을 위해서, 또 그들의 기업을 위해서 돈을 벌어다주는 멋진 방식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더욱이, 워싱턴이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필요한 돈을 빌린 곳은 바로 그들 자신 ―사업가, 은행가, 보험회사, 그리고 그밖의 큰 투자가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미국의 재계는 저 유명한 전쟁채권을 사들여 생겨난 이익을 챙김으로써 다시 한번 전쟁에서 이득을 취한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적어도, 미국의 부자들과 권력층은 이른바 자유기업의 큰 옹호자이며, 그리고 그들은 경제에 대한 여하한 국가의 개입에도 반대한다. 그러나, 전쟁 동안, 그들은 미국 국가가 경제를 관리하고 전비를 충당하는 방식에 대하여 전혀 아무런 반대도 제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유기업 원칙에 대한 이 대규모의 국가 주도의 위반이 없었다면, 그들의 집단적인 부는 그 전쟁 동안만큼 증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거대기업의 부유한 소유자들과 최고 경영자들은 매우 중요한 한가지 교훈을 얻었다. 즉, 전쟁 동안에는 돈, 그것도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윤을 최대화하려는 힘든 노력―자본주의 미국경제의 핵심적 활동―은 평화시보다는 전시에 훨씬더 효율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는 우호적인 국가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배운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부유층과 권력층은 이러한 사실을 줄곧 예리하게 의식해왔다. 그것은 백악관에 있는 그들의 ‘사람’―자신의 부유한 가족, 친구, 재계의 지인들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서 백악관으로 낙하선을 타고 떨어진 ‘돈의 왕조’의 후계자―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봄, 환상적인 돈벌이의 원천인 전쟁이 곧 종식되리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경제전문가들 가운데, 많은 예언가들은 미국의 정치, 재계의 지도자들에게 매우 불유쾌한 시나리오를 그려보여 주었다. 전쟁 동안 워싱턴의 군비 구매로 인해―다른 어떠한 이유도 아닌―경제적 수요가 회복되었고, 따라서 완전고용뿐만 아니라 미증유의 이윤획득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평화의 도래와 더불어, 공급과 수요 사이의 불균형이라는 악령이 미국을 다시 사로잡을 위험이 있고,

그로 인한 위기는 ‘추한’ 30년대의 대공황보다도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았듯이, 전쟁 동안 나라의 생산능력은 현저하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수백만명에 달하는 전쟁참가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민간 일자리를 찾으려 할 바로 그 순간에 해고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로 인한 실업과 구매력의 감퇴는 수요부족을 악화시킬 것이다…

미국의 부유하고 권력있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다가오는 실업이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엄청난 이익을 주던 황금시대가 종결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재앙은 막아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국가의 군사비 지출이 높은 이윤의 원천이었다. 그러므로, 독일과 일본이 패퇴해버린 이제, 이윤창출이 지속되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적들과 새로운 전쟁위협이 시급히 필요하였다. 소련이 존재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전쟁 동안에 소련은 연합군을 위하여 스탈린그라드에서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해주었던 특히 쓸모있는 파트너였지만, 동시에 그 파트너의 공산주의 사상과 실천 때문에 소련은 미합중국의 새로운 악당으로 쉽사리 변신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미국 역사가들은 이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피해가 컸던 나라였던 소련이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훨씬 우월한 미국에 대해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미국정부 자신이 소련을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미국의 역사가들은 또한 소련정부가 전후 미국과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기를 매우 열망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실로 소련정부는 원자탄을 독점한 덕분에 자신감에 넘쳐흐르고 있었던 초강대국 미국과의 갈등으로 얻는 것은 없었고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나 미국은―즉 최부유층의 미국은―전후에도 미국경제의 수레바퀴를 최고 속도로 굴리는 데 필요한 거대한 ‘국방’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긴급하게 새로운 적을 필요로 했다. 미국은 이런 방식으로 필요한―또는 차라리 바라마지 않는―이윤폭을 유지했고 심지어는 이윤폭을 늘리기도 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냉전은 1945년 소련이 아닌 미국의 ‘군산복합체’에 의해 부추겨진 것이다. (‘군산복합체’라는 표현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전쟁 경제’로부터 이윤을 만들어낼 줄 아는 최고의 개인과 기업을 그렇게 불렀던 데에서 연유한다.)

이런 면에서, 냉전은 이들이 예상할 수 있었던 어떤 기대치보다도 능가했다. 점점더 많은 전쟁 장비를 생산해내야 했는데, 그 이유는 사실상 많은 더러운 독재정권을 포함했던 이른바 ‘자유세계’ 내의 동맹국들이 미국의 장비로 철저히 무장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 자체의 군대도 보다 크고 훌륭하며 보다 정교한 탱크, 비행기, 로켓, 그리고 바로 그 생화학 무기와 다른 대량살상 전쟁 도구들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국방성은 이런 상품들에 대해 이렇다 할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언제나 거대한 액수의 돈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방성으로부터의 수주기관은 이번에도 역시 기본적으로 대기업들이었다. 냉전은 전례없는 이윤을 창출했고 이는 대기업의 소유주, 최고 경영자,

그리고/혹은 대주주들인 극단적으로 부유한 개인들의 금고로 흘러들어갔다. (미국에서 보통 군수품 생산과 연관을 갖고 있는 대기업들이 일반적으로 새로 은퇴하는 국방성 장성들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한다거나 이런 기업들과 연결되어 있는 사업가들이 고정적으로 국방성 고위관리,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임명된다는 사실이 놀라운 일인가?)

역시 냉전 기간 중 미국은 채권발행을 통해서 치솟는 군수품 지출비용을 충당했는데, 이 때문에 국가부채가 현기증날 만큼 늘어났다. 1945년 국가부채는 “겨우” 2,580억달러밖에는 안됐지만 냉전이 종식된 1990년에는 무려 3조2천억달러에 이르렀다. 게다가 통화팽창률을 감안해보면 이것은 정말 놀랄 만한 증가이며, 이 때문에 미국은 세계 최대의 부채국가가 되었다.

(부수적으로 덧붙이자면, 2002년 7월, 미국의 국가부채는 6조1천억달러에 달했다.) 미국정부는 군비증강이라는 광란의 잔치에 관련된 기업들이 달성한 엄청난 이윤에 대해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냉전 비용을 충당할 수도 있었고 또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것에 대해서는 어떤 의문도 제기된 바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을 통해 경기의 고삐를 다시 조였던 1945년, 기업에 의한 납세율은 전체 세금납부 중 50%였다. 그러나 냉전이 진행되는 동안 기업의 몫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오늘날에는 약 1%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미국의 대기업들이 대체로 정부가 해도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기업들이 세금부담을 낮추기가 쉬워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업들이 다국적기업이 되어, 어떤 미국인 저자가 국제전신전화 회사(ITT)와 관련하여 기술하였듯이, “모든 곳이 다 자신의 국가이면서 어느 곳도 자신의 국가가 아니므로” 어느 곳에서든 의미있는 세금을 피하기가 쉬워졌기 때문이다. 이들 기업이 최대의 이익을 내고 챙기고 있는 미국 내에서 모든 미국계 다국적기업 중 37%의 기업들, 그리고 모든 외국계 다국적기업 중 70% 이상의 기업들이 1991년 단 1달러도 세금을 내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다국적기업들도 세금으로 자신들의 이익의 1% 미만의 돈을 사회에 환원시켰다.

치솟는 냉전 비용을 감당한 사람들은 냉전으로 인해 이득을 취하는 이들―이들은 우연히도 국채에 지불되는 최고 배당금을 계속 타가는 사람들이기도 하다―이 아니라 미국의 노동자들과 중간층들이다. 중간층과 하층에 속하는 미국인들은 냉전 때문에 흥청망청 생기는 이윤으로부터 단 한푼의 이익도 보지 못했다. 그 대신 이들은 대부분 냉전의 갈등 때문에 생겨난 거대한 국가 부채를 떠맡았다. 그러므로 정말로 냉전의 비용을 떠맡은 것도 이들이고, 자신들의 세금으로 불균형한 공적 부채 부담을 지불한 것도 이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냉전이 발생시킨 이익은 극단적으로 부유한 엘리트들에게 유리하게 ‘사유화’된 반면에, 그 비용은 모든 다른 미국인들에게 해를 입히는 방식으로 가혹하게 ‘사회화’되었다. 냉전 기간 중 미국경제는 거대한 사기극으로 쇠퇴해버렸다. 다시 말해, 미국경제는 부자들에게 유리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계급뿐 아니라 중간층계급에게도 불리하도록―그런데도 중간층 계급은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가 자신들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다는 신화에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국가의 부를 사악한 방식으로 재분배하는 과정이다.

실제로, 부유하고 힘있는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부를 축적한 반면에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다른 미국인들이 달성한 번영은 점차 침식돼 들어갔고, 전반적인 생활수준은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낮아져왔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은 국가의 전체 부(富)가 특권이 적은 계층의 사람들이 유리하도록 재분배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냉전 기간 중 부유한 미국인들은 더욱 부자가 된 반면에 부자가 아닌 사람들―분명히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은 더욱 가난해졌다. 냉전이 소멸된 1989년 빈곤에 대한 공식적인 기준에 따르면, 물론 이것은 명백히 빈곤의 문제를 줄여서 평가한 것이지만, 미국인 전체에서 13% 이상이―대략 3,100만명 정도―가난했다. 거꾸로 말하면, 오늘날 미국인 전체에서 1%가 무려 미국 전체 부의 34%를 소유하고 있다. 어떤 ‘서방’ 국가에서도 부가 이보다 더 불균형하게 분배되어 있는 나라는 없다.

아주 적은 비율의 가장 부유한 미국인들은 이런 식의 발전이 극단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이들은 특권이 적은 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해서 더욱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이미 거대한 자산을 더욱 증가시킨다는 생각을 사랑했다. 이들은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기를 원했고,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 숭고한 계획을 훨씬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모든 좋은 일은 끝나기 마련이다. 1989-1990년에 풍요로운 냉전이 지나가버렸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자신들이 전쟁 비용을 감당해왔다는 것을 알았던 보통의 미국인들은 ‘평화 배당금’을 기대했다. 이들은 국가가 그동안 군비에 지출했던 돈이 이제는 자신들을 위한 이익 ―예를 들어, 대부분의 유럽인들과 비교할 때, 미국인들이 결코 향유해보지 못했던 국민건강보험과 다른 사회적 혜택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익 ―을 창출하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92년 빌 클린턴은 실제로 국민건강계획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려 했지만, 물론 이 계획은 결코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 당시 ‘평화 배당금’은 미국의 부유한 엘리트들에게 결코 이득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국가에 의한 사회복지의 공급은 기업가와 기업에게 이윤을 가져다 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의 군비에 의해 창출되는 어마어마한 이윤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의 군비지출이 없어져버리는 위협적인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도 시급히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국, 아니 미국이라는 기업체는 유용하게 써먹던 소련이라는 적을 잃었고, 높은 수준의 국방비 지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급하게 다른 새로운 적과 새로운 위협을 꾸며낼 필요가 있었다. 1990년에 사담 후세인이 마치 연극에 나오는 임시방편의 신(deus ex machina)처럼 등장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 보잘것없는 독재자는 예전에는 미국인들에게 좋은 친구로서 생각되었고, 그렇게 대접받았으며, 이란과의 더러운 전쟁을 벌일 수 있도록 완전무장되어 있었다. 사담 후세인에게 악명높은 대량살상무기를 처음 공급해준 것은 바로 미국과 독일과 같은 미국의 동맹국들이었다. 그런데 필사적으로 또다른 새로운 적이 필요하자 워싱턴은 난데없이 후세인을 끔찍하게 위험한 ‘제2의 히틀러’로 지목하였다.

그래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협상 해결안이 분명히 전혀 불가능해보이지 않았지만, 워싱턴은 다급하게 후세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필요가 있었다. 조지 부시 1세는 미국에게 유용한 이 새로운 복수대상을 발견하여, 걸프전을 일으킨 배역 책임자였다. 전쟁 동안 바그다드는 폭탄세례를 받았고, 후세인의 불운한 징집병들은 사막에서 학살되었다.

이라크의 수도로 가는 길은 활짝 열렸는데, 갑자기 해병대의 의기양양한 바그다드 입성계획이 폐기되었다. 사담 후세인이 일으킬지도 모를 위협을 다시 상기시킴으로써 미국이 계속해서 무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가 권력을 유지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결국 급작스러운 소련의 몰락은 한 국가가 유용한 적을 잃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를 잘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쟁의 신은 미국경제의 수호성인으로,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쟁으로 작동되는 이 경제를 조작하여 비용은 감수하지 않고 막대한 이익만을 거둬들이는 기업 마피아의 대부로 남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평화 배당금’이라는 멸시받던 프로젝트는 환영받지 못한 채 묻혀버릴 수 있었고, 군비지출 비용은 경제의 활력소이자 충분히 높은 이윤의 원천이 되었다. 이 비용은 1990년대 동안에 가차없이 증가하였다. 예를 들면, 1996년에는 비용이 2,650억달러에 이르렀다. 그러나, 과거 여러 전쟁의 재정지원에 쓴 차금(借金) 이자 같은 비공식적, 혹은 간접 군비지출 비용까지 계산하면 1996년의 총액만도 대략 4,940억달러에 이른다.

하루에 13억달러의 지출을 한 셈이다! 그러나 워싱턴은 상당히 누그러진 사담 후세인을 무시무시한 존재로 부각시키면서 다른 곳에서 새로운 적과 새로운 위협을 찾아보는 것이 여러 모로 편리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소말리아가 일시적으로 전망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적당한 때가 되자 미국은 발칸반도의 세르비아 지도자인 밀로세비치를 또다른 ‘제2의 히틀러’로 지목하였다. 그래서 90년대 상당기간 동안 구(舊) 유고연방의 갈등이 군사개입과 대규모의 폭격작전, 그리고 더 많은 신무기 구입에 필요한 구실을 미국에게 제공하였다.

‘전쟁경제’는 이렇게 해서 걸프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든 실린더를 가동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가끔씩 ‘평화 배당금’ 요구와 같은 대중들의 압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런 체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신문, 잡지, 텔레비전 방송국 등이 모두 대기업의 소유이거나 아니면 대기업에 광고수입을 의존하다보니 미디어는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다.

앞서 밝혔듯이, 미국은 협력해야 하며, 따라서 워싱턴은 기댈 수 있는 남녀 인물들, 가령 대기업 고위급 출신의 개인들과 이미 부자인 미국을 더 부유하게 만들어주는 데 필요한 높은 이익을 제공하고자 군비지출 비용의 수단을 이용하는 데 전적으로 헌신할 개인들이 가급적 필요하다. 이 점에서 빌 클린턴은 기대에 못 미쳤고, 미국이라는 기업은 그의 원죄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클린턴은 국민건강보험이라는 형식의 ‘평화 배당금’을 미국인들에게 약속함으로써 대통령에 선출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2000년 선거에서 클린턴의 복사판인 앨 고어가 아니라 군국주의 강경파들로 구성된 한 팀이 백악관으로 진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체니, 럼스펠드, 라이스, 그리고 물론 걸프전에서 어떻게 전쟁이 수행되어야 되는지를 몸소 보여준 전직 대통령의 아들인 조지 부시와 같이 사실상 모두 예외없이 부유한 ‘기업미국’의 대변자들이었다.

이 부시 내각에는 이른바 평화애호자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또다른 죽음의 사자인 콜린 파월과 같은 인물이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국방성도 있다. 람보가 백악관으로 이동하였고, 그 결과를 보여주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부시 2세가 대통령으로 뛰어오른 뒤 한동안은 중국이 미국의 새로운 복수의 대상으로 선포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거인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다소 위험해 보였다. 게다가 수많은 대기업들이 중화인민공화국과의 무역으로 상당한 돈을 벌고 있었다.

군비지출 비용을 충분히 높은 수준에서 유지하는 데 보다 덜 위험하면서 보다 더 확실한 새로운 위협이 필요하였다. 이런 목적을 위해 부시나 럼스펠드, 그리고 대기업이 2001년 9·11 사태보다 더 편리한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들이 저 끔찍한 공격 준비상황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그러나 이들은 거기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것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미국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무장시키고, 9·11과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에게 폭탄세례를 퍼붓고, 마음에 흡족할 때까지 전쟁을 벌이고, 그래서 선례 없는 판매고를 올리기 위해 국방성과 사업을 벌이는 대기업을 위해 이 기회를 충분히 이용하였다.

부시는 한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테러리즘이라고 하는, 누구도 실제로 상대해서 전쟁을 벌일 수 없고, 따라서 최종적인 승리도 결코 얻을 수 없는 모호한 개념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테러리즘과의 전쟁’이라는 구호는 이제부터 백악관이 테러리스트라고 정한 그 누구와도 영구히,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전쟁을 벌일 권리가 워싱턴에 있음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앞으로도 계속 군비지출 증가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에 냉전종식이 가져온 문제는 분명히 해결되었다. 통계가 스스로 이를 입증한다. 1996년의 2,650억달러의 군비지출 비용도 이미 천문학적인 수치였다.

그러나 2002년 부시 2세 덕분에 국방성은 3,500억달러를 지출하도록 승인받았고, 이어 2003년에는 대통령이 대략 3,900억달러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올해 대략 4,000억달러로 매듭지어질 것이 이제 확실하다. 군비지출이라는 광란의 잔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예를 들면, 가난한 아이들의 무료급식이나 기타 소규모 지원을 취소함으로써 다른 데서는 돈을 아껴야만 한다. 조지 부시가 행복감과 오만한 태도로 거들먹거리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제한된 재능과 지적 능력을 가진 버릇없는 부잣집 아들인 그는 대통령직을 얻는 데 신세를 진 자신의 부유한 가족과 친구들뿐 아니라 ‘기업미국’ 전체의 가장 뻔뻔스러운 기대치도 이미 앞서가고 있기 때문이다.

9·11은 부시에게 어디서든지 자신이 택한 상대는 누구와도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백지위임장을 제공하였다. 이 글에서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듯이, ‘오늘의’ 적으로 누가 지목될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난 해 부시는 아프가니스탄 지도자들이 빈 라덴을 은신시키고 있다는 추측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폭탄세례를 퍼부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빈 라덴은 유행에서 사라지고 이른바 미국을 위협할 인물로 다시 한번 사담 후세인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왜 부시가 이끄는 미국이 북한이라고 하는,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더 위험한 정권이 아닌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의 전쟁을 절대적으로 원하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자세히 다룰 수는 없다.

두명의 부시와 체니와 라이스―한 유조선이 그의 이름을 따서 라이스로 명명되었다―같은 부시 패거리들과 긴밀히 연계된 미국의 석유 트러스트가 거대한 이라크의 유전(油田)들을 탐내고 있다는 점이 ‘이 특별한 전쟁’을 벌이는 중요한 한가지 이유이다. 이라크 전쟁은 워싱턴의 박자에 맞춰 춤을 추지 않는 제3세계 국가들에게는 하나의 교훈으로서, 그리고 미국내의 반대를 약화시키고, 선출되지 않은 대통령의 극우적 프로그램을 미국인들에게 억지로 주입시키는 수단으로서 유용하다.

부와 특권의 미국은 전쟁에 걸려있다.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갈수록 강력한 전쟁이 아니고서는 그것은 더이상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즉, 바라는 이익을 낼 수가 없다. 지금 당장은 이런 중독과 갈망이 이라크와의 갈등을 통해서 충족되고 있고, 이것은 석유귀족들에게도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에 대한 광적 집착이 사담 후세인의 머릿가죽이 탈레반의 터번과 함께 조지 부시의 트로피 진열장에 전시되면 멈출 것이라고 누가 믿겠는가?

대통령은 벌써 다음 차례가 누가 될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악의 축’이라고 이름붙여진 나라들, 즉 이란, 시리아, 리비아, 소말리아, 북한, 그리고 물론 미국 쪽에서 보면 오랜 눈엣가시인 쿠바가 여기에 들어있다. 21세기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조지 부시의 영원한 전쟁의 멋진 신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말해두자. 어떤 전문가들은 전쟁이 실제로는 미국경제에도 나쁘다고 주장한다. 일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이다. 그것은 ‘어떤’ 경제, ‘누구의’ 경제에 대해 말하는가에 달려있다. 대다수 일반 미국인들에게는 이라크전쟁은 명백히 대파국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엄청난 비용을 치르기 때문이다. 이들의 돈과 피로, 모두 가급적이면 남미계나 흑인, 또는 평범한 이들 미국인들이 적의 희생물이 되는 병사들이고, 이미 걸프전에서 드러났듯이,

이들이 오발사고나 발암성 열화우라늄탄과 국방성의 병기고에서 나온 보다 이국적인 무기들을 다루면서 생길 또다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부자나 특권층의 자제들은 집에서 안전하게 머문다. 베트남전쟁 때 젊은 부시 2세가 바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군산복합체와, 부시가(家)와 체니, 라이스, 럼스펠드의 경제를 위해서는,

석유 트러스트와 무기제조상을 위해서는, 또 이런 대기업들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부자 미국인들의 경제를 위해서는 이 전쟁은 다른 일반적인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적어도 멋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닥친 죽음과 파괴의 규모만큼이나 많은, 전쟁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이익을 챙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경제는 전쟁으로 번성한다. 그들의 ‘전쟁경제’는 전쟁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이것이 부시가 끊임없이 미국을 위해 새로운 적을 발견하고, 새로운 위협을 만들어내고, 계속해서 전쟁을 벌이는 이유이다. 만약 이 세계에 평화가 개화한다면, 부시의 미국경제는 바로 대파국에 직면할 것이다.

'지승이는 10일째 돌아오지 않았다'
'집 앞서 불과 10m 사이에서 사라진 소녀'…단 하나의 실마리도 없어
2007년 03월 25일 (일) 16:20:01양김진웅 기자

▲ 지승이가 학원차량에서 내린 지점과 집까지는 불과 10여m 정도 거리다.
"수사생활 20년만에 이처럼 단서가 없는 경우도 매우 드문 일입니다"

지난 16일 오후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서귀포시 서홍동에 사는 양지승 어린이(10.북초등학교 3학년)가 실종된지 10일이 지났다.

과연 어디로 갔을까?

당초 수사당국은 우발 사고와 범죄 가능성 등 모든 경우를 놓고 다각도의 수사를 벌여왔지만 본인에 의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사고 가능성은 일단 접은 상태다.

따라서 일단 경찰은 외적 요인으로 인한 '범죄' 사고의 가능성에 수사의 촛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초기 제보가 신빙성이 떨어진데다 갈수록 제보자가 줄면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종적 감춘지 10일째....단 10m 거리에서 사라진 양지승

<사건 당시 양지승 어린이가 움직인 경로>

빌라(집) → 북초등학교 → 영어학원 → 피아노학원 → 빌라 앞 도로 하차 → 집? →???
300m2km2.1km1.4km 10m 정도

양지승 어린이가 사는 서귀포시 서홍동 소재 S빌라는 A, B동으로 열 다섯 세대가 살고 있다. 바로 옆 오렌지빌라 14세대와 동홍빌라 4가구를 비롯해조금 떨어져 있는 단독 주택까지 포함해도 총 35여 가구를 넘지 않는다.

▲ 지난 16일 사고 당일 양지승 어린이가 움직인 동선.
집 바로 앞과 주변에는 감귤 과수원으로 둘러 쌓여 있다. 또 초등학교까지 가는 길목에는 상점과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을 정도로 평범한 동네다.

지난 16일 사건 당일 지승이가 움직인 거리는 아침 등굣길에 나서 학교→영어학원→피아노학원→집이 전부다.

총 5.8km 정도의 거리지만 집에서 학교까지의 300여m를 제외하곤 대부분 차량으로 이동했다.

▲ 양지승 어린이가 살고 있는 서홍동 소재 S빌라 입구. 빌라 3층에 살고있다.

집 앞 도로 앞을 건너는 과정에서 행방묘연...

B동 3층에 살고 있는 지승이는 이날 피아노학원 차량을 타고 오후 5시 10분경 집 앞 2차선 도로 앞에 내린 후 B동으로 가기 위해 A동으로걸어가는 것까지학원차량 기사와 탑승한 어린이의 진술을 통해 확인됐다.

도로에서 A동을 거쳐 B동 입구까지의 거리는 불과 10여m거리. 이 과정에서 행방이 묘연해진 것으로 경찰을 최종 파악하고 있다.

당시 지승이의 행방을 목격한 사람은 경찰수사 결과 학원 차량기사와 몇몇 학원 어린이가 전부다.

그 외의 신뢰할만한 제보와 단서가 될만한 증거도 없었다는게 25일 현재 경찰 탐문수사의 결과이다.

수사가 적지않게 난항을 겪고 있는 이유가여기에 있다.

수사 10일째인 25일 현재 실종자 관련한 제보 역시 22건이 들어왔지만 사건 발생 3일 후인 19, 20일에야 주로 제보가집중(15건)됐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고작 1~2건의 제보가 들어왔을 뿐이다. 당연히 시간의 흐름상 신빙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 발생 3일 후에야 '제보' 잇따라...대부분 '신빙성' 떨어져

▲ 시시각각 수사상황을 듣고 있는 양순주 수사과장
서귀포경찰서 수사본부 양순주 수사과장은 "제보가 며칠 시간이 지난 후에 이뤄져 상당부분 신빙성이 떨어지고 있다"며 "비교적 인지능력이 높은 성인의 제보가 수사에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아직 신뢰할만한 제보는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 제보내용이 대부분 같은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를 비롯해 성인의 경우도 사건이 공개된 이후 모임이나 술자리 등에서 소문을 들은 '충동' 제보가 대부분인 것으로 나타나사실상 사건의 실마리가 될 만한 단서는 거의 없다는게 경찰의 분석이다.

실종수사 경찰 당국은 "어린이는 물론 제3자나, 성인 경우 사적인 모임자리나 술자리에서 대화 도중 들었던 제보였기 때문에사실상 신빙성이 떨어진다"며 "더욱이 시간(일자)이 지나면서 기억이 희미해질 수 있어 더 이상 당시 사건 현장에 대한제보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강력 사건의 경우 수사의 결정적 단서와활기가 '제보'와 '증거'에 따라서 좌우되는 상황에서 이번 실종 사건은 단 하나의 단서도 남지 않아 수사당국을 적지 않은 곤경에 빠뜨리고 있는 셈이다.

▲ 지승양의 아버지 양성호씨(42). 수색 작업에 직접 나서고 전단을 직접 배포하면서도 '딸이 무사히 돌아올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
▲ 애타는 가족과 이웃...속타는 수사...사건 점점 '미궁속으로'

실종 10일째를 맞았지만 사건과 관련한 아무런 실마리도 드러나지 않자 실종자 가족과 친지는 물론 수사당국까지 애를 태우고 있다.

제주지방경찰청은 제주경찰서 병력까지 지원해 수사본부까지꾸리고 정밀수색과 탐문수사에 주력했지만 결과는실적없이 '공전'만 거듭되는 상황이 되풀이 되고 있다.

▲ 새롭게 제작한 수배전단지
사건 초기 직접 집 주변 수색에도 나섰던 지승이의 부모는 며칠째 언론 등의 접근을 차단한 채 집안팎에 머물며 행여 걸려올지 모를 전화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지승양의 아버지 양성호씨(43)는 "더 이상 무슨말이 필요하겠느냐"며 "그져 딸이 무사하게 돌아오기만 바랄 뿐"이라고 말을 아꼈다.

현재 지승이 부모가 사는 빌라 1층 주차장에는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친지.이웃들이 임시로 마련한 '대책본부'가 날마다 지승이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직접 전단지 제작을 돕는가 하면최근 지승양의 모습을 단은 새 전단지를 직접 배포하고 부착하는 등마치 자신의 일처럼 도우며 어려움을 나누고 있다.

형제처럼 지내왔다는 이웃 주민 김상철씨(44)는 "지승이가 바로 옆집에 살아서 5학년인 제 딸에게 '언니'라고 부르며 놀러오곤 했다"며 "늘 집에 와서도 책만보는 아이였는데 열흘째 소식이 없다니 참 난감하고 착잡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다른 이웃 주민 역시"최선을 다하는 경찰당국와 지역민들의 관심과 애정을 보면서 아직도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며 "우리도 답답한데 하물며 부모 입장에서는 말해서 무엇하느냐"고 애통해 했다.

▲ 열흘동안 연 1만여명의 인원이 동원됐다.

▲ 앞으로 수사 어떻게?...최근 모습 및 착용 물품넣은 수배전단지 전역 배포 '희망' 걸어

경찰은 며칠째 수사가 공전을 거듭하자신고포상금을 올리고 대대적인 전단지 배포를 하는 등 부심하고 있다.

수색 7일째부터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이에게 주는 신고포상금을 500만원에서 1천만원으로 올리고, 이미 수색했던 주변 과수원과 주차장, 옥상, 맨홀 등을 중심으로 정밀 재수색에 들어갔다.

이와함께 경찰은 실종 당시 지승이가 착용했던 가방과 안경, 신발 등과 함께 지난 2월 최근 모습이 담긴 사진을 확보해 새로운 수배전단 2만매를 배포하며 모든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서귀포시도 25일 자체 수색 전단 2만매를 제작해 신문 보급소를 통해 각 가정안방에 전달했다.

이에앞서제주도 교육청 역시 '양지승 어린이 찾기 긴급 호소문'을 통해 지난 주말 일선학교를 통해 각 가정에 배달하는 등 전도민의 관심사로 확산되며 '양지승 어린이 찾기' 운동으로 번지는 상황이다.

제주지방경찰청 실종사건 수사본부는 "사건발생 시간이 상당부분 지나면서 계획적인 범죄 여부와 면식범 소행 여부에 대해 수사를 집중하고 있다"며 "탐문수사 범위를 넓히고 신빙성 없는 제보내용까지 포함해일체 제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수사를 통해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밝혔다.

▲ 스스로 '양지승 찾기' 수배전단을 부치고 다니는 서귀포의 한 시민 차량.
▲ 지승이가 다니던 학교 앞은 어느때 처럼 학원차량으로 붐볐다.
▲ 서귀북초등학교 아이들이 '지승양 찾기' 플랜카드 아래서 부모와 학원차량을 기다리고 있다.

해경, 특공대 투입 대대적 수중 수색작업


입력날짜 : 2007. 04.09. 10:51:30

 지난달 16일 발생한 서귀포 양지승 어린이 실종사건에 대한 수색활동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해양경찰이 특공대를 투입한 본격적인 수중 수색활동에 돌입했다.

 지금까지 해녀와 항·포구 소속 다이버 등을 동원해 수색활동을 펼쳐온 제주해양경찰서는 9일 해경 특수기동대와 서귀파출소 직원 등이 참가한 가운데 서귀포시 위미·법환·강정·성천·보목포구 등 소형 항·포구 부근 해상에서 대대적인 수중 수색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 여객선터미널 및 유·도선장에서 관광객 및 주민들과 출·입항 선박 등 어촌계 주민들에게 어린이 실종과 관련한 대대적 홍보활동을 벌이는 한편 유관기관과 협조해 발견시까지 수색활동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방침이다. 이와 함께 낚시어선 부두 및 유람선 부두 등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전단지를 배부하면서 실종 어린이 찾기에 동참하고 있다.

 이에 앞서 해경은 서귀항 포구와 해안가에서 함정과 순찰정 등 33척을 동원하고 파출소 직원 6백80여명과 어촌계 주민, 해녀 등을 총동원해 해상에서 집중 수색활동을 펼친 바 있다.

 특히 지난 7일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항과 대정읍 하모리 모슬포항, 송악산 주변 해상에서 화순리 소재 (주)다이버하우스 대표 박순근씨 등 수중다이버 10여명과 함께 수중수색을 실시한 데 이어 8일에는 서귀항 3부두에서 8부두까지 특공대 및 순찰정, 민간 자율구조대 다이버 등을 동원 수색작업을 벌였다.



/표성준 기자 sjpyo@hallailbo.co.kr표성준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양지승 어린이 찾기 범정부차원 이뤄진다!
경찰청·건교부·서울시 '앰버 경고(AMBER Alert)' 시스템'
9일 첫 사례로 양지승 어린이 전국 도로·지하철 등에 상황전파
2007년 04월 08일 (일) 21:28:07이승록 기자

경찰.건교부.서울시 등이 실종아동 수배시스템인 '앰버 경고(AMBER Alert)' 시스템을 도입키로 한 가운데 정부가 양지승 어린이를 첫 사례로 9일부터 앰버 경고를 내보낸다.

경찰청은 8일 건설교통부ㆍ서울특별시 등과 협의해 실종아동을 공개 수배하는 범정부 차원의 '앰버 경고(AMBER Alert)' 시스템을 도입키로 했다고 밝혔다.

경찰청은 오는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이용섭 건설교통부장관, 오세훈 서울시장, 이택순 경찰청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앰버 경고(AMBER Alert)' 시스템 운영 협약을 한다.

앰버 경고 시스템은 실종아동이 발생하면 고속도로와 국도, 지하철 등의 전광판과 교통방송, 휴대전화 등을 활용해 신속하게 상황을 전파해 실종아동의 조기 발견을 유도하는 체계다.

이 시스템은 1996년 미국 텍사스에서 납치ㆍ살해된 여자 어린이 앰버 해거먼(Amber Hagerman)의 이름을 따 도입된 제도로, 미국은 이후 49개 주에서 이 제도를 도입해 어린이 311명을 구조했다.

협약은 전국의 각종 도로를 관할하는 3개 기관이 실종 아동 발생 시 각각 관리하는 도로 전광판에 실종아동의 인적사항 정보를 신속히 공지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경찰은 전국 50곳의 도로 전광판과 실종아동찾기 홈페이지(www.182.go.kr)에, 서울시는 시내 고속화도로 224곳과 서울메트로ㆍ도시철도공사가 관리하는 지하철 전광판 3천311곳에, 건교부는 전국 고속도로 449곳과 국도 166곳의 도로 전광판에 각각 실종아동 정보를 띄우게 된다.

또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서울교통방송과 경찰청 산하 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이 운영하는 부산ㆍ광주ㆍ대구ㆍ대전ㆍ인천ㆍ강원ㆍ전주교통방송은 라디오를 통해 실종아동 관련 정보를 알린다.

경찰은 지방도와 서울 이외 지역 지하철 전광판에도 해당 자치단체와 협조해 앰버 경고를 내보내는 등 확대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경찰은 이와 함께 실종 어린이 발생 경고를 휴대전화 사용자들에게 전송해 지금까지 14명을 찾는 데 도움을 준 SK텔레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KTF, LG텔레콤과도 협약을 맺어 앰버 경고를 내보내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경찰, 건교부, 서울시는 국내 앰버 경고 대상 1호로 지난달 16일 제주도에서 실종된 9세 여자 어린이 양지승양을 선택하고 9일부터 앰버 경고를 내보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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