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1991년 중엽 유엔 가입 결정으로 시작해서 개방정책을 꾸준히 추진했다. 남한과 미국이 남한 배치 핵무기 철수, 팀스피릿훈련 중단 등 이에 호응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얼마 동안 북한의 국제사회 진입이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다가 1992년 중엽 IAEA 사찰을 계기로 역풍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IAEA의 특별사찰 요구, 팀스피릿훈련 재개방침 발표, 남한의 훈령 조작 사건 등 북한의 개방에 불리한 일이 이어지다가 1993년 3월 북한의 NPT 탈퇴선언에 이르렀다.
북한의 개방을 미국이 반가워하지 않는 기색은 1992년 1월 뉴욕회담에서부터 나타났다. 미국 정부에서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1992년 중에 공식적으로 결정한 것 같지는 않다. 오랜 기간의 적대관계에서 오는 관성 등 지엽적 요소들이 북한의 개방정책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데 소소한 장애를 일으키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행정부 교체 시점에서 각 부서의 업무 확보 노력도 '북핵위기' 양성에 한몫했다. 1992년 말에서 1993년 초에 걸친 워싱턴 상황을 퀴노네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국무부에서는 거의 매일 소그룹 회의가 열렸지만, 북한 문제는 서서히 동아태국의 관할을 벗어나고 있었다. 북한의 비협조와 국제원자력기구의 강경한 입장은 핵문제를 국제화시켰고 자연히 북한 문제는 핵확산금지 전문가들의 수중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핵전문가들은 북한이 필요했다. 소련이 붕괴하자, 군축국과 군사정치국, 핵문제담당 특별보좌관실 그리고 국방부와 중앙정보국이 북한 문제를 수중에 넣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했다.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1993년 1월, 북한이라는 작은 나라가 소비에트 연방을 대신하여 미국 정부의 광대한 핵확산금지체제의 관심의 초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새 정부가 출범했다. 외교보다 국내문제를 우선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클린턴 정부는 연방정부의 대폭 축소를 요구했다. 국무부의 구조조정, 국방부의 대폭 축소 등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국무부 부서들도 자신의 존속이 미국 정부의 성공적 국가 운영에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을 새 정부에 설득시키기 위해 '당면 최대 이슈'를 잡는 데 여념이 없었다.
(…) 1993년 1월 하순이 되자 북한 및 핵문제 관련 외교 전문과 뉴스 브리핑을 심사하는 부서가 20개가 넘었다. (<한반도 운명> 113-114쪽)
기원전 109년에 한나라 군대가 고조선을 침공한 일이 있다. 그에 앞서 기원전 113년에 한나라는 남월(南越)을 정복했다. 고조선과 남월이 무슨 일을 일으킨 것도 아닌데 왜 한나라는 그 시점에 연거푸 원정군을 일으켰을까?
키워놓은 군사력을 쓸 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나라에게 최대의 강적은 북방의 흉노였다. 기원전 202년 고조가 흉노 정벌에 실패하고 곤욕을 치른 이래 한나라는 '돈으로 평화를 사는' 정책을 오랫동안 취했는데 무제(기원전 141~87)가 대결정책으로 나섰다. 기원전 119년의 정벌에는 전마 20만 필을 동원할 정도였다. 기세가 꺾인 흉노는 서쪽으로 달아나 일부가 훈족(Huns)이란 이름으로 유럽인을 공포에 떨게 만들기도 했다.
흉노 주력이 달아난 후 한나라는 키워놓은 군사력을 쓸 곳을 찾아 남쪽의 남월과 동쪽의 고조선을 정벌한 것이다. 정벌당하는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이번에는 소련 상대로 키워놓은 미국정부의 기관과 인력을 쓸 곳을 찾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니, 한반도는 2000여 년 만에 다시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1993년 초까지 미국정부 내에서 밥그릇 놓고 옥신각신하는 상황이었다는 데서 거시적 차원의 적대정책이 결정되지 않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북정책의 한-미 공조에서 한국 입장이 크게 작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대북정책에 대한 미국 측의 압박이 없었던 덕분으로 볼 수 있겠다.
1993년 초에 들어선 클린턴 정부는 대외정책 전반, 특히 대북정책에 있어서 전임 정부의 기조를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퀴노네스는 말한다(위 책 115-116쪽). 한-미 공조에서 미국이 강한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된 것이다. 남한 입장이 미국의 대북정책에도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남한 정부는 어떤 입장을 보였던가?
▲ 1993년 2월 25일 취임식장에 선 김영삼 대통령. ⓒ연합뉴스
북한 문제 놓고 밥그릇 싸움을 한 미국 정부 부처들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사에는 노태우의 북방정책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북한에 대해 포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취임사를 작성한 한완상이 특히 깊은 애착을 보이는 대목을 앞서 소개했는데(28회), 워낙 좋은 글이어서 다시 한 번 옮겨놓는다.
"칠천만 국내외 동포 여러분, 저는 역사와 민족이 저에게 맡겨준 책무를 다하여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전심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상적인 통일지상주의가 아닙니다. 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입니다.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 협력할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계는 대결이 아니라 평화와 협력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과 국가 사이에도 다양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김 주석이 참으로 민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남북한 동포의 진정한 화해와 통일을 원한다면,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한라산 기슭에서도 좋고, 여름날 백두산 천지 못가에서도 좋습니다. 거기서 가슴을 터놓고 민족의 장래를 의논해봅시다. 그때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원점에 서서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김영삼의 명언 중에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몸은 빌릴 수 없다"는 것이 있는데, 인기가 떨어졌을 때는 그로부터 "너무 여러 사람 머리를 빌리다 보니 정신착란증에 빠져 버렸다"는 야유가 나오기도 했다. 위 글은 김영삼이 아니라 한완상의 생각을 담은 것이었고, 김영삼은 내용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쓸모 때문에 '빌려' 쓴 것이었다.
1987년의 민주화운동 때까지 김대중과 김영삼은 같은 '민주화 투사'의 표상으로 국민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1990년 3당 합당 후에도 김영삼에 대한 지지자들의 기대는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는 말이 먹혀들었던 것이다. 철학이 없이(대학에선 철학을 전공했다던데!) 기술에만 의존하는, 성공이 아니라 승리만을 추구하는 그의 한계가 드러난 것은 대통령직에 있으면서였다.
정치가로서 김영삼의 한계를 가장 명확히 드러낸 것은 IMF사태였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킨 것이 남북관계의 파탄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IMF사태처럼 당장 극적인 결과를 보여준 것이 아니지만, 민족사회의 실질적 피해는 훨씬 더 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남북관계의 발전과 한반도의 평화가 김대중에게는 그 자체로 중요한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한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이 글을 볼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해서 마음 놓고 얘기한다.) 반면 김영삼에게는 수단일 뿐이었다. 냉전 해소의 대세를 이용할 생각으로 한완상을 비롯한 화해주의자들을 포섭해서 취임사까지 작성하게 했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 내다버릴 하나의 '옵션'일 뿐이었다.
취임 초의 김영삼은 화해주의자와 대결주의자를 함께 쓰며 경쟁을 시킨 셈이다. 1993년 말 한완상의 퇴진으로 대결주의가 승리하기까지의 과정을 훑어보기 전에 1993년 11월 23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일어난 일을 살펴본다. 김영삼의 심중에서 화해주의가 완전히 퇴치된 상황에서 그의 행동양식을 확인하는 것이다.
대통령 집무실에서의 단독회담은 김영삼 대통령이 볼멘 목소리로 미국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한국에 통보한 일괄타결안을 포함한 북한에 대한 포괄적 접근방식에 대한 반대의사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됐다. (…)
클린턴 대통령, 레이크 안보보좌관,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입을 딱 벌렸다. 일반적으로 우방국과의 정상회담은 사전에 철저하게 조율되고 준비되기 마련이었기 때문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포괄적 접근방식을 옹호했지만 김 대통령은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아예 상대방의 말을 듣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레이크 보좌관과 크리스토퍼 장관이 끼어들려 했으나 김 대통령은 완강했다. 그는 결국 "포괄적"이라는 표현 때문에 언론이 오해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인정했다. 레이크 보좌관은 후일 그때 정종욱 수석을 흘낏 바라보았는데 그렇게 참담한 표정의 얼굴은 처음 보았다고 회고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안보보좌관들에게 다른 표현을 찾아볼 것을 제안하자 두 보좌관은 동의어들을 찾다가 결국 "철저하고 광범위한"(thorough and broad) 접근방식이라는 다소 우회적인 표현을 찾아냈다. (…) 김 대통령은 회의장을 떠나면서 측근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말했다. 회의장 밖에서 소식을 들은 허바드는 몇 주에 결친 힘겨운 외교를 했지만 허를 찔렸다는 생각에 분을 참지 못했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김태현 옮김, 모음북스 펴냄) 135-136쪽)
이 장면에서 김영삼이 말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북핵위기의 해결방안을 봉쇄하는 것이었을까?
남북 화해를 위한 철학, 김영삼에겐 없었다
책략을 좋아하고 승리에 집착하는 김영삼의 성향으로 보아 그럴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당장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 한국이 미국의 눈치만 봐 왔는데, 미국이 결정한 정책을 자기 손으로 뒤집어놓을 수 있었으니. 미국이 자기 눈치를 보게 만들어준 북핵위기가 해결되지 않고 마냥 계속되는 것이 그가 원하는 것이었을까?
정말 그렇게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정치적 득실 때문에 한반도 평화를 해치는 짓을 저지르는, 그런 '폴리티컬 애니멀'을 국민이 대통령으로 뽑았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다. 그러나 IMF사태를 겪어보고, 이명박의 4대강 사업과 천안함 사태를 겪어보고, 또 세월호 사태를 겪고 있는 지금은 한국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없다고 체념하게 되었다.
고려 후기, 원나라의 지배(간섭)를 받던 시기의 일 하나가 생각난다. 당시 고려에서는 노비 신분을 '일천즉천(一賤則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면 자식을 노비로 정하는 제도였다. 이것은 노비의 인구 비율을 늘리는 만큼(노비는 국가가 아니라 주인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므로) 국가 기반을 무너트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전민변정(田民辨整)', 즉 토지와 노비의 소유 집중을 완화하는 것이 언제나 중요한 개혁 과제였지만 기득권층의 반발로 계속 좌절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모처럼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이 1301년에 설치된 전민변정도감이었는데, 정동행성의 원나라 관리 활리길사(闊里吉思)가 추진한 것이었다. 그는 노비 판정에 '일량위량(一良爲良)'의 기준으로 노비 수가 줄어드는 정책을 취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일량위량'이 아니지만 그에 준한 효과를 가져오는 기준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 그의 소환을 원 조정에 주청해(고려 습속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그가 소환되고 개혁정책이 중단되었다. 모처럼 원나라가 고려 자신을 위해 좋은 정책을 추진한 것이 고려 기득권층의 반발로 좌절된 일이다.
김영삼과 클린턴의 정상회담 직전 한국 대표단의 회의 장면에서 대결주의의 승리를 확인할 수 있다.
클린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직전 한국 대표단은 김 대통령이 묵고 있는, 백악관에서 길 하나 건너 있는 영빈관 블레어하우스에 모였다. 이 자리에는 김 대통령과 한승주 외무장관, 정종욱 외교안보수석 및 김 대통령의 측근은 아니었지만 영향력이 커지고 있던 노련한 정치인 박관용 비서실장 등이 참석했다.
놀랍게도 유종하 주유엔대사도 자리를 함께했다. 소신 있는 외교관인 유 대사의 별명은 독일 셰퍼드였다. 그는 종종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기 때문이다. 이전 정권에서 외무부 차관을 지낸 유 대사는 예산문제를 놓고 재무부의 항복을 받은 일로 유명했다. 외무부 장관자리를 놓고 한승주 장관과 다투었던 그는 명목상으로 한 장관의 부하직원이었지만 1993년 동안 북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주장하는 메시지를 비밀리에 청와대에 보내곤 했다. 특히 김 대통령처럼 국내 보수진영의 비판에 예민한 박관용 비서실장과 뜻이 잘 맞았다. 그를 오라고 한 것은 한승주 장관이 아니라 박관용 비서실장이었다. 한 장관은 유 대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블레어하우스에서 짧은 시간 동안 열띤 논쟁이 벌어졌고, 결론이 내려졌다. 한승주 장관은 미국과의 합의에서 합의된 포괄적 접근방식을 설명했다. 그러나 유종하 대사는 북한에 대한 당근은, 특히 팀스피릿 훈련 중단과 같은 큰 당근은 남북한 상호사찰에 연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북강경책을 옹호했다. 박관용 비서실장은 유 대사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의 관심은 김 대통령의 미국 방문이 국내정치에 미칠 영향에만 쏠려 있었다. 김 대통령은 듣기만 했다. 그러나 유 대사의 주장은 한국이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으므로 김 대통령의 마음에 분명 와 닿았을 것이다. (<북핵위기의 전말> 134-135쪽)
미국은 북한의 개방정책에 인색한 태도를 보였고 일부 미국 관리들은 없는 '북핵위기'를 만들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이 국가정책으로 세워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북한이 'NPT 탈퇴' 카드로 미국정책의 모순점을 찌르자 결국 '포괄적 해법'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남한이 끼어들어 판을 엎어버린 것이다.
'포괄적 해법'이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내용을 갖추고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다음 회에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