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⑨ 지분 34% 인수로 한 때 고전

[중앙일보] 입력 2011.10.06 00:03 / 수정 2011.10.09 14:15

적자 200만 달러 야후에 1억 달러 투자 … “일본 거품남” 비아냥 쏟아졌다

지난해 1월 손정의 회장이 중국 최대 인터넷상거래 사이트인 ‘알리바바’ 창업자 잭 마와 일본 도쿄의 한 행사장에서 자리를 함께했다. 손 회장은 2000년 1월 이후 알리바바에 8000만 달러를 투자해 지분 33.3%를 획득했다. 알리바바의 현재 시가총액은 나스닥 기준으로 191억 달러에 이른다. 잭 마는 최근 “야후의 인수에 관심 있다”는 의사를 밝혀 세계 정보기술(IT) 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블룸버그]

1994년 7월 소프트뱅크의 주식 공개 뒤 1년6개월간 나는 미국에서 총 31억 달러 규모의 인수합병(M&A)을 진행했다. 덕분에 세계 최대 IT 전시·출판 그룹의 수장이 됐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이제 겨우 인터넷 세상을 헤쳐갈 보물지도와 나침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95년 가을, 막 인수한 지프 데이비스 출판 부문의 에릭 히포 사장에게 주문했다. “인터넷 시대가 본격화하면 없어서는 안 될 회사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지프 데이비스의 정보력을 동원해 물색해 주세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 한 회사를 추천했다. “야후라는 벤처가 있습니다. 창업한 지 반년밖에 안 됐지만 아주 유망해요. 실리콘밸리의 가장 믿을 만한 벤처투자사인 세콰이어캐피털이 이미 200만 달러를 집어넣었답니다.”

야후. 드디어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나는 지체하지 않고 야후가 있는 캘리포니아로 날아갔다. 공동 창업자 제리 양과 데이비드 파일로, 직원 여남은 명이 늦도록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리는 콜라와 피자를 시켜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열 살 때 대만에서 미국으로 이민왔다는 제리 양과 특히 뜻이 잘 맞았다. 나는 곧 투자를 결정했다. 우선 5% 지분을 확보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야후의 대주주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걸림돌이 많았다. 창업자들도, 기존 주주들도 내가 거액을 투자해 대주주로 올라서는 걸 원하지 않았다. 주도권을 내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기로 했다. 다음해 1월 다시 제리 양을 만나 간곡하게 말했다.

 “인터넷 비즈니스는 선점이 중요합니다. 라이코스, AOL 같은 경쟁사들이 속속 치고 올라오고 있어요. 하루빨리 더 큰 자본으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해야 해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또 컴덱스와 지프 데이비스를 통해 전방위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어요.”

 5시간의 지루한 협상 끝에 결국 내 뜻을 관철할 수 있었다. 1억 달러를 더 투자해 야후 지분 29%를 추가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거래를 완료하기 전 나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 넷스케이프의 짐 클락, 시스코의 존 챔버스,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스콧 매닐리 최고경영자(CEO)에게 e-메일을 보냈다. ‘야후의 대주주가 되려 한다. 하지만 당신들 중 누구라도 적극 반대한다면 포기하겠다. 의견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IT업계 생리를 잘 알았다. 이후의 여러 비즈니스를 위해 이런 거물들과 척지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모두 내 투자에 오케이 사인을 보내줬다. 당시 야후는 연 매출 100만 달러에 적자가 200만 달러인 보잘것없는 회사였다. 그런 야후가 불과 한두 해 뒤 세계 인터넷 시장을 석권하리라는 걸 이들 중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투자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언론들은 나를 ‘일본에서 온 거품남’이라며 대놓고 비웃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외려 서둘러 일본에 야후재팬을 설립했다. 소프트뱅크가 지분 51%, 야후 본사가 49%를 보유한 합작 회사였다. 나는 야후재팬을 아시아 최대 인터넷 포털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야후재팬은 서비스를 시작하자마자 돌풍을 일으켰다.

 
나는 미디어산업에도 진출하기로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세계 최대 미디어재벌은 호주의 루퍼트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이었다. 96년 4월 미국 할리우드에 있는 머독 회장의 사무실을 찾았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일본에 오면 같이 식사라도 하자”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2개월 뒤 정말 머독에게서 “도쿄에서 파티를 열려 하는데 인사말을 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파티 전날 저녁, 도쿄 긴자의 한 고급 일식당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머독은 일본에서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기회를 낚아챘다.

 “나와 함께합시다. 일본엔 강력한 경쟁자가 많아요. 이들과 싸우려면 최소 2000억 엔은 필요합니다. 내가 1000억 엔을 대지요.”

 머독은 내 제안을 즉석에서 받아들였다. 만남이 있은 지 열흘 만에 합병회사를 설립했다. 머독과 나는 417억 엔을 투입해 오분샤 미디어가 보유한 테레비아사히 지분 21%도 매입했다.

그러나 이 거래는 “소프트뱅크가 외국 자본과 손잡고 일본 미디어를 장악하려 한다”는 비난에 부닥쳤다. 다음해 나는 지분을 미련 없이 재매각했다. 대신 머독과 함께 설립한 위성방송 J스카이B 운영에 매진했다. 97년엔 또 다른 일본 내 위성방송 퍼펙트TV와 합병을 실현했다. 이로써 나는 유통·인터넷·미디어·전시회에 이르는 주요 디지털 인프라를 손에 쥐게 됐다. MS·시스코와의 합작, 미국 메모리보드 시장의 60%를 장악한 킹스턴테크놀로지 인수 등으로 네트워크와 테크놀로지 인프라 부문에서도 세계적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이처럼 숨가쁜 투자와 M&A의 결과는 곧 ‘돈’으로 나타났다. 96년 5월 30일 야후 본사가 미국 나스닥에 상장됐다. 97년에는 야후재팬이 일본 자스닥에 상장됐다. 두 회사 주가는 그야말로 고공 행진을 계속했다. 99년 말 소프트뱅크가 보유한 야후 주식 총액은 1조4586억 엔에 이르렀다. 초기 투자액의 360배였다. 같은 시기 야후재팬 주식도 주당 1050만 엔까지 올랐다. 나는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E트레이드·지오시티즈 같은 실리콘밸리 유망 벤처에 잇따라 투자했다. 재산은 점점 불어나 99년 가을에서 2000년 2월까지는 “손정의의 재산이 또 10억 달러 늘었다”는 기사가 세계 언론에 종종 보도됐다. 단 사흘이지만 빌 게이츠를 누르고 IT업계 제1 부자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돈에 대한 감각이 없어졌다. 백화점에 가도 ‘이 건물을 통째로 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쇼핑할 재미가 나지 않았다. 97년엔 지금껏 살던 임대주택에서 나와 40억 엔을 들여 새로 지은 3층 집으로 이사도 했다. 세계 주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부와 명성의 절정을 누렸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2000년 3월, 이른바 ‘닷컴 버블’ 붕괴가 시작됐다. 소프트뱅크 주가는 100분의 1 토막이 났고, 나는 사기꾼이란 오명을 쓰게 됐다. 세상과의, 나 자신과의 진짜 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정리=이나리 기자 <windy@joongang.co.kr>

◆야후(Yahoo!)=1995년 4월 미국 스탠퍼드대 대학원생이던 제리 양, 데이비드 파일로가 창업한 포털. ‘야후’는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종족 이름이다. 9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 세계 1위 검색 포털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이후 구글에 밀려 현재 미국 검색 시장 점유율은 16% 안팎이다. 소프트뱅크는 시장 점유율이 하락하기 전인 2001년 야후 주식 대부분을 매각했다. 이 자금으로 일본 최초의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다.

 

 

주가 100분의 1 토막 ‘성난 주총’ … 6시간 경청이 주주를 감동시키다

[중앙일보] 입력 2011.10.11 00:09 / 수정 2011.10.11 17:52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⑩ “배 앞을 보면 멀미 나지만, 몇백㎞ 앞을 보면 바다는 잔잔하다”

손정의 회장이 2004년 10월 도쿄 증권거래소에서 초고속 인터넷 사업 자회사인 ‘야후BB’의 상반기 실적을 발표하고 있다. [블룸버그]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내 40대 초반은 화려했다. 19세 때 계획한 ‘1조 엔, 2조 엔 규모의 큰 승부를 한다’는 목표를 조기 달성한 셈이었다. 내 포부를 몽상가의 헛소리쯤으로 치부했던 이들도 그때쯤엔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쳐주었다. 1999년 소프트뱅크는 10여 개 자회사와 120개 이상의 손자회사를 둔 대그룹이 됐다. 야후를 비롯해 클릭 수가 세계 1, 4, 9, 12위인 사이트가 우리 소유였다.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50%가 여기서 발생했다. 매달 130종, 900만 부의 잡지를 찍어냈다. 한창 주가가 오를 땐 재산이 일주일에 1조원씩 불어나곤 했다. 그해 타임과 뉴스위크는 각각 나를 ‘올해의 아시아 인물’로 뽑았다. 그런데 이듬해 3월 ‘하늘’이 무너졌다. ‘닷컴 버블’이 한순간에 꺼져버린 것이다.

주당 1200만 엔(약 1억2000만원)을 넘나들던 소프트뱅크 주가는 100분의 1 토막이 났다. 내 재산 또한 700억 달러에서 10억 달러 미만으로 내려앉았다. IT기업가들은 졸지에 범죄자 취급을 당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야후의 제리 양,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창업자의 처지도 비슷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돈이 귀찮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빚이 재산보다 더 많았다. ‘아차’ 싶었지만 또 그럴수록 전투력이 치솟았다. 

 나는 99년 이미 주주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앞으로는 인터넷 사업에 올인할 거다. 그 외 사업은 모두 정리하겠다. 전화·컴퓨터가 그랬듯 등장 5, 6년 만에 흑자를 내는 신사업은 없다. 우리도 한동안 적자를 각오해야 할 거다.”

# 디지털 정보혁명, 꿈을 버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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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그랬다지만 2000년의 버블 붕괴는 치명적이었다. 그렇더라도 인터넷은 결국 부활할 거란 내 믿음엔 변함이 없었다. 외려 기업 가치가 터무니없이 떨어진 이때야말로 투자의 적기라 판단했다. 2000년 한 해에만 투자사를 600여 개로 늘렸다. 나는 이전부터 “예측 못할 앞날은 없다”고 믿어왔다. 배를 타고 가며 바로 앞을 보면 멀미가 나지만, 몇백㎞ 앞을 내다보면 바다는 잔잔하고 뱃속도 편안해진다. 같은 이치 아니겠는가.

 아울러 나는 진짜 큰 승부, 그때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에 초고속 인터넷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일본 인터넷은 속도가 느리고 요금도 매우 비쌌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물론 이 사업을 처음 구상한 건 인터넷 주가가 한창 고공행진을 할 때였다. 돈이 없다고 지레 포기하긴 싫었다.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밀어붙이자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돈도 없다, 욕도 먹을 대로 먹었다, 겁날 게 뭔가.

 계획을 밝히자 주위의 반대가 대단했다.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한다는 건 곧 일본 최대 IT기업인 NTT에 정면 도전함을 의미했다. 임원들은 여기 덧붙여 “경쟁사 좋을 일을 왜 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맞다. 이 사업은 잘되면 나 하나 덕 보는 게 아니다. 야후재팬(소프트뱅크 자회사)의 경쟁자인 다른 인터넷 기업들도 톡톡히 혜택을 보게 돼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바보 같은 소리! 배포가 그리 작아서 어찌할 건가. 야후재팬이 잘되면 그만인 거지, 경쟁사 잘되는 것까지 왜 걱정이야? 야후재팬 이용자만 싸게 주자고? 이런 멍청한 놈들!”

# “당신을 믿는다” 주주 눈물에 이 악물어

2001년 야후BB 직원들이 도쿄 지하철역에서 초고속 인터넷 판촉전을 벌이고 있다. [소프트뱅크 제공]


 내 뜻은 정말 그랬다. 소프트뱅크를 왜 만들었나. 디지털 정보혁명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서다. 싸고 빠른 인터넷을 제공하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있을까. 혹자는 “그렇게 애써봤자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누구 덕분이었는지 얼마 안 가 다 잊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나는 대꾸했다.

 “그럼 어떤가. 이름도 필요 없다, 돈도 필요 없다, 지위도 명예도 목숨도 필요 없다는 남자가 제일 상대하기 힘들다. 바로 그런 사람이라야 큰 일을 이룰 수 있다.”

 이는 일본 개화기 정치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한 말이다. 그렇듯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인간은 아무리 누르려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시작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주주들을 설득해야 했다. 안 그래도 주가 폭락으로 주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총일, 나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주주들 앞에 서서 그들의 비난과 타박, 호소를 마음으로 들었다. 시간을 이유로 말을 끊지도 않았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했다. 그렇게 여섯 시간이 지나자 주주들의 표정이 한결 담담해졌다. 한 할머님이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남편 퇴직금을 몽땅 털어 소프트뱅크 주식을 샀어요. 그게 99% 하락해 1000만 엔이 10만 엔이 돼버렸어요. 절망스러웠는데 오늘 얘기를 듣고 보니 당신 꿈에 투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믿을게요. 부디 열심히 해주세요.”

 주주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박수로 나를 격려해주었다. 깊이 감사의 절을 올리며 나는 이를 물었다. ‘저 마음, 저 믿음을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 반드시 성공하겠다. 결과로 돌려드리겠다’.

정리=이나리 기자 <windy@joongang.co.kr>

◆닷컴 버블(dot-com bubble)=인터넷을 중심으로 IT 분야에서 1995부터 2000년 초까지 이어진 거품 경제 현상. 2000년 3월 10일 미국 나스닥에서 절정을 이룬 버블(거품)은 그 다음 날부터 붕괴하기 시작해 단 6일 만에 주식가치의 9%가 사라졌다. 이후 2004년까지 살아남은 닷컴기업은 절반에 불과했다.


손정의·저커버그·베조스

WSJ ‘제2의 잡스’ 꼽아

마크 저커버그(左), 제프 베조스(右)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사장이 ‘포스트 잡스’ 시대를 이끌 혁신가로 지목됐다. 9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헨리 포드와 토머스 에디슨의 뒤를 이었듯 혜안을 지닌 또 다른 혁신가가 나타날 것이라며 손 사장을 주요 후보 중 한 명으로 꼽았다. 그의 끊임없는 기업가 정신과 도전이 잡스를 닮았다며, 2008년 애플을 설득해 일본의 대형 통신사 NTT도코모를 제치고 소프트뱅크의 아이폰 출시를 따낸 것을 한 예로 들었다. 중국 알리바바의 잭 마 사장도 ‘아시아의 잡스’로 주목받았다.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는 걸어온 길이 잡스를 닮은 ‘리틀 잡스’로 꼽혔다. 그도 잡스처럼 대학을 중퇴하고 창업가의 길을 택했다.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는 ‘잡스에 가장 가까우며 애플에 가장 위협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인터넷 서점 아마존을 전자제품, 가구뿐 아니라 영화·음악 콘텐트를 유통하는 거대 온라인 업체로 키웠다.

 WSJ는 ‘새로운 잡스’의 깜짝 등장 무대로는 에너지와 건강 진료시스템 분야를 주목했다.

심서현 기자 <shshim@joongang.co.kr>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⑪ “난 내 방식대로 세상을 본다”

[중앙일보] 입력 2011.10.13 00:01 / 수정 2011.10.13 13:21

사업 막혀 “분신하겠다”는 내게 … 공무원 “여기선 하지 말게”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미지의 분야에 신규 투자할 때 작게 시작할까, 아니면 크게 밀어붙여야 할까. 열 중 아홉은 ‘작게 간다’가 답일 것이다. 하지만 한두 번쯤은 큰 승부를 걸어야 한다. 소프트뱅크로 보자면 2001년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시작할 때가 그랬다. 일본 최초로 전국 규모의, 기존보다 5~10배 빠른 서비스를 선뵈는 일이다. 일본 최대 IT기업 NTT의 텃세를 이겨야 한다. 정부 정책도, 네트워크도 미비하다. 경험은 없고 시장도 아직 활성화돼 있지 않다. 누군가는 “그럴수록 반찬 간 보듯 조심스레 가야 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른다. 내 생각은 달랐다. 진입장벽이 높다는 건 그만큼 경쟁자가 적다는 뜻이다. 당장의 시장은 작지만 곧 미래 산업의 핵심 인프라가 될 터이다. 압도적 공세로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 나는 폭풍처럼 몰아쳐 해일처럼 집어삼키기로 했다. 손정의가 아니면, 소프트뱅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리라 마음먹었다.

주가 폭락에도 소프트뱅크 주주들은 ‘일본 최초 초고속인터넷 사업’이란 도전에 박수를 쳐주었다. 2000년 여름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었다. 사장실을 뛰쳐나가 사흘 만에 100여 명의 인재를 끌어모았다. 통신 분야 엔지니어라면 무조건 데려다 놨다. 회사 조례 중 “거기 서 있으니 자네가 이 일을 하게” 하며 차출하기도 했다. 초고속인터넷 전문 통신업체 ‘야후BB’의 시작이었다(BB는 초고속인터넷을 뜻하는 ‘브로드밴드’의 약자다).

# 2000년 포브스 선정 ‘올해의 비즈니스맨’

 이때 한국의 도움이 컸다. 나는 “디지털 사업에서 한국이 나의 스승”이란 말을 종종 한다. 당시 한국은 이미 ADSL 방식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전면 도입한 상황이었다. 네트워크 설계부터 장비 구매, 서비스 운용까지 한국 기업과 전문가들로부터 많이 배웠다.

새 사업 준비로 바쁘던 2000년 말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나를 ‘올해의 비즈니스맨’으로 선정했다. 이유는 이랬다. ‘일본의 경기 회복 지연 속에서도 회사를 의욕적으로 키웠다. 파산한 일본채권은행(현 아조라은행)을 인수해 벤처·중소기업에 적극적으로 투·융자를 해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신규 사업에 힘을 쏟았다. 네트워크 비즈니스를 하려면 NTT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법에 따라 NTT는 신규 업체에 기지국을 임대해주고 네트워크 구축도 대행해줘야 했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은 힘들었고 이런저런 기술적 난관 또한 적지 않았다.

 2001년 6월, 드디어 도쿄 시내에서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다. 나는 처음부터 전국 서비스를 하고 싶었다. 임원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NTT와의 협상이 어려운 데다 기술적 검증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서비스 출시 행사 전날, 나는 야후BB의 모회사이자 서비스 신청 접수를 대행할 야후재팬으로 달려갔다. ADSL 접수 홈페이지 담당자를 직접 찾아 도쿄에서만 서비스 신청을 하게 돼 있는 공지 내용을 전국에서 가능한 것으로 고쳐버렸다. 큰 승부를 위해, ‘규모의 경제’ 실현을 위해 대형 사고를 쳐버린 것이다.

 다음 날인 2001년 6월 19일, 출시 행사가 열리는 도쿄 오쿠라호텔 연회장은 1000여 명의 기자와 증권사 애널리스트들로 붐볐다. 나는 분홍색 셔츠와 흰 바지 차림으로 당당히 무대에 올랐다. 나는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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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TT의 IDSN보다 5배 빠른 초고속인터넷을 NTT 요금의 8분의 1인 월 990엔에 서비스하겠습니다. 초기 설치비는 무료, 프로모션 기간 중엔 가정용 모뎀을 무료로 드리겠습니다!”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엄청난 선언을 했건만 박수 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나는 아랑곳 않고 외쳤다.

 “다들 저보고 미쳤다고 합니다. 많은 애널리스트들이 소프트뱅크는 곧 파산할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전 제 방식대로 세상을 봅니다. 이 사업은 성공합니다!”

# 모건스탠리 “아무리 노력해도 적자” 전망

2007년 5월 한 일본 남성이 소프트뱅크 통신 서비스에 대한 광고 이미지로 감싸여 있는 기둥에 기대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있다. 소프트뱅크는 2001년 출시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조기 안착시키면서 단번에 일본의 주요 통신업체로 부상했다. NTT와 경쟁하며 초고속인터넷 2위 업체가 됐고, 2004년 6월에는 일본 국토의 80%를 커버하는 유선전화 네트워크사 일본텔레콤을 인수했다. 2006년에는 보다폰재팬 인수로 이동통신 사업에까지 진출했다. [블룸버그]
 매스컴의 반응은 과연 비판 일색이었다. 모건스탠리는 “소프트뱅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최소 1억2000만 달러의 영업손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소비자 반응은 달랐다. 도쿄는 물론 전국 여기저기서 서비스 신청이 빗발쳤다. 두 달여 만에 신청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문제는 네트워크였다. 8월 시작하기로 한 정식 서비스를 9월로 미뤘으나 답을 찾기 어려웠다. 신청자들의 항의가 쏟아져 정상 업무를 보기 힘들 정도였다. 가장 큰 이유는 NTT의 지극히 비협조적인 자세였다. 나는 총무성(한국의 행정안전부에 해당)으로 달려갔다. 담당 과장을 찾아 책상을 내리치며 피 토하듯 소리쳤다.

 “여기서 내 몸에 석유를 끼얹고 내 손으로 불을 지르겠소! 총무성 당신들이 NTT에 똑바로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독점적 네트워크를 무기로 이런 불법 행위를 일삼는 걸 묵인한다면 100만 고객을 볼 면목이 없는 나는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소!”

 총무성 관료는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주게. 제발 여기서만은 일을 벌이지 말아주게!”

 나는 더더욱 악에 받쳤다. 그럼 여기 말고 다른 데 가서 죽으면 된단 말인가?

 “무슨 소리요? 지금 그게 문제요? 당신들이 책상이나 차지하고 앉아 책임을 회피할 때 우리는 피가 마른단 말이오!”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우고서야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 담당 과장은 지친 목소리로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물었다. 나는 “댁들이 대단한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인허가권이 있지 않나. NTT 사장에게 전화해 공정하게, 법대로 하라고 한마디만 해달라”고 요청했다. 과장은 그대로 했고, 덕분에 간신히 파국을 면할 수 있었다.

정리=이나리 기자<windy@joongang.co.kr>

◆손정의의 ‘늑대론’=손정의 회장은 벅찬 목표에 도전하는 임직원들에게종종 ‘늑대론’을 강조한다. “호랑이나 버펄로가 왜 늑대를 두려워하는지 아는가? 늑대는 한 마리로 안 되면 떼로 덤비고, 그래도 안 되면 그룹으로 에워싸 상대가 지칠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 여러분이 경영하는 회사는 늑대 한 마리가 될 수도, 늑대 떼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덤비다 아예 죽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가 똘똘 뭉쳐 열정과 비전으로 몰아붙이면 언젠가 반드시 승리한다. 가족, 친구, 동료에게 존경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늑대의 정신을 본받아 열정을 다해 일하라.

◆ADSL과 ISDN=2000년 당시 일본 최대 통신사인 NTT는 인터넷 전송방식으로 ISDN을 채택하고 있었다. 전화 모뎀보다 속도가 4배가량 빨랐다. 소프트뱅크가 이에 맞서 내놓은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가 바로 ADSL이다. 진화한 ADSL은 전화 모뎀보다 속도가 100배 이상 빠르다. 손정의 회장은 “한국이 1990년대 말 ADSL를 적극 도입해 인터넷 강국으로 발돋움한 것에 큰 자극을 받았다”고 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⑫ “내가 3시에 보자고 하면 그건 새벽일 수도 오후일 수도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2011.10.18 00:39 / 수정 2011.10.18 10:45

오른팔의 배신
초고속인터넷 올인하자, 믿었던 기타오 회사 살림 걱정하며 떠나

손정의 회장이 14일 일본 도쿄 시부야 거리에 있는 소프트뱅크모바일 매장에서 애플 아이폰4S를 선보이고 있다. 손 회장은 초고속인터넷 사업 성공의 여세를 몰라 2006년 보다폰재팬을 인수했다. [도쿄 로이터=연합뉴스]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2001년 6월 19일, 드디어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다. 일본 최대 통신업체 NTT보다 훨씬 빠른 서비스를, 그 8분의 1 요금에 제공한다고 선언했다. 야심 찬 출발이었지만 곳곳이 지뢰밭이었다. 회선과 기지국을 빌려 줘야 할 NTT는 느리고 비협조적이었다. 가입 과정은 복잡했고 고객들의 인식도 낮았다. 서비스 체계 또한 손볼 곳 투성이였다. 무엇보다 이 모두를 개선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돈이 없었다. 융자를 얻고 싶었지만 은행들이 상대해 주지 않았다. 증자도 여의치 않았다. 나는 가진 걸 팔기로 했다. 전략사업이라 생각해 온 것들까지 내놨다. 미국 야후 본사 주식도 넘겨 버렸다. 야후BB(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위해 설립한 야후재팬 자회사)를 살리는 게 소프트뱅크가 살 길이요, 내가 꿈꾸는 디지털 정보혁명에 성큼 다가서는 방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자산매각 과정에서 나는 예기치 못한 고통과 맞닥뜨렸다. 최고재무책임자(CFO)인 기타오 요시타카(北尾吉孝)와 심각한 갈등에 빠진 것이다. 노무라증권 뉴욕지점장 출신인 기타오는 1990년대 초부터 나와 정말 많은 일을 같이 해온 ‘동지’였다. 수많은 인수합병(M&A) 뒤엔 어김없이 기타오와 그가 이끄는 무적의 재무팀이 있었다. 그런 그가 내게 등을 돌린 것이다. 미래가 불확실한 초고속인터넷에 ‘몰빵’하느라 회사 재무상태를 심각한 상황으로 모는 데 대한 반감이었다.

# 초고속인터넷 ‘몰빵’에 회사 뛰쳐나간 CFO

 2002년 결국 기타오는 이사회멤버로서의 권한을 이용해 소프트뱅크 본사 일부분을 뚝 떼어내 독립했다. SBI홀딩스란 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창업자의 오른팔이자 재무책임자가 회사를 떠나다니, 주가는 떨어지고 뒷소문이 난무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나는 서둘러 새 CFO를 물색했다. 후지은행 부사장으로 은퇴한 65세의 가사이 가즈히코(笠井和彦)를 영입했다. 기존 임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령인 데다 평생을 대형 은행에 몸담았다 명예롭게 퇴임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안정적이고 발도 넓어 기타오가 떠난 후유증을 단기간에 극복할 수 있었다.

 사업하는 이에게 재무책임자의 의견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돈 계산만을 앞세우다가는 도약을 위한 혁신과 모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기타오는 다시 없이 탁월한 인물이지만 내가 무턱대고 그의 의견만 따랐다면 오늘의 소프트뱅크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요즘도 가끔 기타오를 만나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신다. 여전히 그의 고견을 고맙게 듣는다. 하지만 판단을 하고 책임을 지고 미래를 여는 건 결국 내 몫이다.


# 사장실 버리고 회의실서 하루 19시간 집무

 그렇게 돈 마련하랴, NTT로 정부 부처로 뛰어다니랴 새 사업을 시작한 지 6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2001년 말 지금까지 실적을 체크하는 8시간 마라톤 회의를 진행했다. 나는 절망했다. 서비스가 성공적으로 개통된 사용자는 2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사업 시작 1년 안에 100만 가입자를 모으겠다고 큰소리 친 나였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나는 비서에게 “앞으로 1년간은 그 누구와도 골프 일정을 잡지 마라”고 말했다. 또 "내일부터 내 집무실은 야후BB 추진팀이 있는 4층 회의실이다”고 말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지만 나는 골프광이다. 집 지하에 세계 10대 골프장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깔아놓은 개인 연습실까지 마련했을 정도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그 연습실을 보고 반한 나머지 시애틀 집에 똑같은 시설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런 내가 1년 동안 골프채를 잡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회의 참석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다음 날부터 나는 정말 손바닥만 한 4층 소회의실에서 집무를 보기 시작했다. 하루 열다섯 시간, 열아홉 시간…. 내가 누군가에게 “3시에 보지”라고 말하면 그건 꼭 오후 3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새벽 3시에도 회의를 소집했고, 필요하면 언제든 밤을 새웠다. 사무실엔 온통 직원들의 땀 냄새, 며칠 동안 목욕을 못한 나의 시큼한 냄새가 가득했다.

# 승리로 끝난 ‘오케하자마 전투’

 그렇게까지 매달린 이유가 있었다. 나에게 초고속인터넷 사업은 ‘오케하자마(桶狹間) 전투’였다. 일본 전국시대, 오케하자마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단 2000명의 병사로 수만 대군을 물리친 역사적 전투다. 당시 나와 소프트뱅크의 ‘적’은 NTT였다. 규모도, 노하우도, 자금도 비교가 안 되는 회사에 맞서 일본에 진정한 인터넷 시대를 열겠다는 일념으로 싸우고 있었다. 또 우리는 자신이 있었다. NTT는 거인이다. 그래서 무겁고, 느리고, 따져야 할 것도 많다. 우리는 몸이 가볍다. 소수 정예 결사대다. 서로를 동지라 믿고 함께 몸을 던진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듯 죽도록 노력한 결과 정말 11개월 만에 우리는 100만 가입자를 유치했다. 그 사이사이 진행된 강렬한 프로모션들도 효과가 컸다. 지하철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공짜로 가정용 초고속인터넷 셋톱박스를 나눠줬다. 가당치 않게도 “가입 신청 뒤 개설까지 열흘 안에 끝내 드린다”는 ‘10영업일 집중’ 캠페인도 벌였다. ‘규모의 경제’와 혁신의 모습으로 시장과 소비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지려 애썼다.

 그렇게 매년 1000억엔 씩 적자를 보는 사업을 4년간 흔들림 없이 진행했다. 경쟁사들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떻게든 소비자들이 야후BB로 가는 걸 막는 데 치중하던 그들이 본격적 서비스 경쟁에 돌입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적은 적이 아니었다. 소프트뱅크와 NTT는 넓은 의미에서 소비자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일종의 ‘친구’가 된 것이다. 2004년 6월 소프트뱅크는 일본텔레콤 인수에 성공했다. 일본텔레콤은 철도선을 따라 개설된 전화 네트워크를 보유한 일본 내 주요 통신사업자다. 덕분에 야후BB의 서비스는 빠르게 안정화돼 갔다. 2005년에는 드디어 흑자 전환이 이루어졌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정리=이나리 기자 <windy@joongang.co.kr>

◆이베이와 야후재팬의 8년 전쟁=소프트뱅크가 초고속인터넷 분야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데엔 야후재팬의 힘이 컸다. 2000년 초 닷컴버블 붕괴와 시장의 불신 속에서도 야후재팬은 성장을 거듭했다. 1999년 8월 시작한 인터넷경매 사업이 주요 동력이 됐다. 손정의 회장은 애초 일본 진출 예정인 세계 최대 인터넷경매 기업 이베이와 조인트벤처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협상이 여의치 않자 이베이가 일본법인이 설립되기 한 달 전 서둘러 경매사업을 시작했다. 이베이재팬이 본격 영업을 시작할 때쯤엔 이미 야후재팬이 시장을 선점한 뒤였다. 초기 야후재팬은 모든 경매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했다. 직원들은 “서버 운영비라도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손 회장은 ‘공짜’를 고집했다. 적자 상황에서도 뚝심을 발휘해 먼저 시장 키우기에 몰두했다. 사업 시작 2년여 뒤에야 조금씩 유료화를 진행했다. 일본 인터넷경매 시장은 이미 야후재팬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이때부턴 이베이재팬이 “수수료 무료!”를 외치며 대대적 반격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베이는 2002년 3월 결국 일본 사이트를 폐쇄하고 철수했다. 2007년 12월, 야후재팬과 이베이는 “새 시장 창출을 위해 제휴한다”는 발표를 했다. 이베이가 일본 시장 진출을 위해 택한 카드는 결국 야후재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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