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⑬ “불평할 시간에 목숨 걸고 덤벼라, 그래야 파문이 일어난다”
[중앙일보] 입력 2011.10.20 00:32 / 수정 2011.10.20 10:37
소프트뱅크를 알려라 … 100억엔 들여 프로야구단 인수 결단
손정의(왼쪽) 소프트뱅크 회장이 2005년 초 소프트뱅크 호크스 왕정치 당시 감독(오른쪽), 소속 선수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손 회장은 왕 감독을 부사장으로 승진시켜 구단 운영의 전권을 맡겼다. [소프트뱅크 제공]
경쟁의 힘은 놀라웠다. 2003년 드디어 일본의 초고속인터넷 요금이 한국보다 싸졌다. ‘작지만 매운 고추’ 소프트뱅크와 일본 최대 통신업체 NTT가 치열하게 겨룬 결과다. 물론 고비도 있었다. 2004년 2월 가입자 정보 425만 건이 유출됐다. 나는 단호히 대응했다. 범인의 협박전화를 받자마자 경찰에 알렸다. 용의자 체포 뒤 피해 규모를 파악하곤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초고속인터넷 사업이 막 본궤도에 오른 참이었다. 임원들은 내가 전면에 나서는 걸 말렸다. 이를 뿌리치고 카메라 앞에 섰다. “보안 시스템이 허술했다. 고객정보 취급 부서가 비정규직 위주로 짜여 있었다”고 곧이곧대로 알렸다. 비난이 쏟아졌지만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누구도 토 달기 힘든 과감한 대책들을 잇따라 내놨다. 그중엔 고객정보 담당 정규직 3000명 채용 계획도 있었다. 그대로 시행했음은 물론이다.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그러니까 세상이 문제네, 정치가가 잘못이네, 경기가 나쁘네, 그런 푸념 따위 해본들 소용 없다.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불평은 결국 본인의 그릇을 작게 만드는 거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목숨 던질 각오로 덤벼라. 그래야 파문이 일어난다.”
왕정치 … 소년 시절 우상을 만나다
2004년 12월 나는 소프트뱅크 직원들도 깜짝 놀랄 만한 뉴스를 발표했다. 다이에 호크스 구단을 인수키로 한 것이다. 호크스 구단의 근거지는 후쿠오카. 내가 태어나고 또 처음 사업을 시작한 곳이다. 거기서 보낸 어린 시절 나는 정말 야구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내겐 하늘 같은 우상이 있었으니 바로 왕정치(王貞治·오 사다하루) 선수였다. 마침 매물로 나왔을 당시 다이에 호크스 감독은 왕정치였다. 그와 함께 팀워크를 맞춰볼 수 있다니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총 100억 엔에 이르는 딜에 뛰어들 순 없는 일이었다. 사업적 필요도 분명했다.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하기 전까지 소프트뱅크는 일반에 널리 알려진 회사가 아니었다. 야후재팬이 일본 사이버 스페이스를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었지만 유명한 건 ‘야후’이지 ‘소프트뱅크’가 아니었다. 초고속인터넷 브랜드를 소프트뱅크BB가 아닌 야후BB로 지은 연유다. 소프트뱅크가 대중과 보다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또한 일본프로야구협회의 새 구단주 영입 심사는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다. 3개월간 기업의 재무상태는 물론 오너의 도덕성, 주요 납품처가 어디인지까지 따진다. 그런 만큼 일본에서 프로야구 구단주가 된다는 건 그만큼 깨끗하고 믿을 만한 기업이란 뜻이다.
“드라마 ‘겨울연가’처럼 운영하겠다”
2004년 11월 30일 구단 인수를 공식 발표하며 나는 드라마 ‘겨울연가’ 얘기를 꺼냈다. 당시 일본에선 한창 한류 바람이 일고 있었다. 그 중심에 겨울연가와 ‘욘사마(연기자 배용준)’가 있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 시절의 왕정치.
인터넷 시대에 발맞춰 구단과 팬 사이에도 양방향 의견 교환이 실시간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을 밝힌 것이다. 그 바탕엔 ‘야구 팬도 고객’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구단주 회의 내용을 언론에 투명하게 알리겠다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다음 날 ‘스포츠닛폰’ 신문은 이런 논평을 내놨다. ‘욘사마는 수일 전 폭풍처럼 일본에 왔다 곧 돌아갔지만 손사마(손정의)의 개혁은 일본 야구계에 새 바람을 일으킬 게 틀림없다”고.
인수 한 달 뒤 나는 주주총회를 열고 구단 이름을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바꿨다. 이어 왕정치 감독을 부사장 겸 제너럴 매니저로 승격시켰다. 현역 프로야구 감독으론 일본에서 두 번째로 임원이 된 것이다. 나는 그에게 “오 간도쿠(왕 감독), 뭐든 당신이 다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구단 운영의 전권을 넘긴 것이다. 2006년 왕 감독이 위암 투병을 시작했을 때도 나는 흔들림 없는 지지를 보냈다. 소프트뱅크 직원들도 자발적으로 나서 쾌유를 비는 종이학을 접어 전달했다. 위의 90%를 잘라내고도 그는 초인처럼 다시 일어섰다. 2008년 퇴임할 때까지 팀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대만 국적으로 온갖 차별과 역경을 딛고 일본 야구의 살아있는 신이 된 왕정치. 내가 그에게 품은 마음은 단지 존경심이 아닌 어떤 동류의식일지 모른다. 왕 감독의 피와 땀이 스민 호크스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일본 퍼시픽리그에서 우승했다. 후쿠오카인의 구단 사랑 또한 대단하다. 500만 주민 중 절반이 소프트뱅크 모바일 가입자일 정도다. 소프트뱅크 모바일은 2006년 설립한 이동통신기업이다. 이제 일본 역사상 최대 빅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꼴찌’ 이통사, 일본 역사상 최대액 인수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인수하던 해 나는 마흔일곱 살이었다. 곧 해가 바뀌었고 50대가 2년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또 한 번의 결전을 준비했다. 일본 ‘꼴찌’ 이동통신사인 보다폰재팬을 인수하기로 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이동성이다.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어야 한다. 이동통신은 피할 수 없는 승부처였다.
2005년 말 초고속인터넷 가입자가 500만 명을 넘어서자 나는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이번에도 단번에 전 재산을 던져야 할까 숙고했다. 답은 “그렇다”였다. 당시 소프트뱅크 시가총액은 2조 엔으로 회복돼 있었다. 야후BB 시작 때 2000만 엔까지 떨어졌던 것이 5년여 만에 열 배로 불어난 것이다. 그 모든 역량을 쏟아붓기로 했다. 11개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2006년 3월 인수를 마무리 지었다. 가격은 1조7500억 엔. 당시까지 일본 역사상 최고액의 인수합병 프로젝트였다. 여기저기서 “손정의가 이번엔 정말 미쳤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렇든 말든 나는 직접 새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맡기로 했다. 다시 백척간두의 사투가 시작됐다.
정리=이나리 기자 <windy@joongang.co.kr>
◆왕정치(王貞治) =일본 이름 ‘오 사다하루’, 중국 이름 ‘왕전즈’. 대만 국적을 가진 일본 최고의 홈런왕이다. 1940년 중국계 부친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이란성 쌍둥이 중 동생으로 태어났다. 쌍둥이 누나는 출생 1년3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도 몸이 약해 세 살 때까진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학교 입학 뒤 야구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 몸담았던 와세다실업고를 고시엔(선발 고교 야구) 정상에 올려놓았다. 최고 몸값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나 처음 3년간은 성적이 나빠 ‘왕은 왕인데 3진왕’이란 비아냥에 시달려야 했다. 초인적 노력으로 슬럼프를 극복, 통산 홈런 868개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이로 인해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국민영예상의 첫 수상자가 된다. 이후 지도자로 변신, 요미우리 구단에 이어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으로서 명장의 반열에 오른다. 소프트뱅크가 호크스를 인수한 뒤엔 손정의 회장의 절대적 신임하에 구단 전체의 경영까지 책임진다. 2006년 위암 발병으로 2008년 결국 현역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여전히 소프트뱅크 호크스 이사회 회장이자 일본 야구의 ‘살아있는 전설’로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⑭ “회사 살 수 있을까” 대신 “협력할 수 있을까”를 묻다
[중앙일보] 입력 2011.10.25 00:34 / 수정 2011.10.25 10:45
아이폰 나오기 7개월 전, 잡스 만나 “그 사업 나와 합시다”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사진 내 글자)
2006년 4월 일본 3위 이동통신업체인 보다폰재팬을 인수했다. 1조7500억 엔. 일본 인수합병(M&A) 사상 최고가 거래였다. 나는 이 딜을 1년 이상 치밀하게 준비했다. 2005년 초 보다폰재팬 새 사장으로 빌 모로스가 부임했다. 바로 연락을 취해 사업 제휴를 이슈로 서서히 친분을 쌓았다. 그에게 인수 제안을 할 때도 “회사를 살 수 있을까요?”가 아니라 “우리가 협력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는 훗날 “손 회장의 민첩함과 정중함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말했단다.
소프트뱅크는 이 거래에 그룹 자산의 대부분을 걸었다. 그런 만큼 최고경영자(CEO)가 돼 직접 지휘봉을 잡기로 했다. 그리고 서둘러 애플의 스티브 잡스 CEO를 만났다. 그 무렵 미국 실리콘밸리엔 “애플이 MP3P인 ‘아이팟’ 내장 휴대전화기를 내놓을 것”이란 소문이 조금씩 퍼져가고 있었다. 나는 잡스와 만나 “그 사업을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아이폰이 세상에 나오기 7개월 전, 이미 나와 잡스 사이엔 ‘아주 특별한 대화’가 오간 것이다. 그 두 달 뒤 나는 회사 이름을 소프트뱅크 모바일로 바꿨다. 이어 모종의 ‘혁명’을 준비했다.
2006년 10월 일본에 번호이동제가 실시됐다. 자기 전화번호 그대로 가입 이동통신사를 바꿀 수 있는 제도다. 사람들은 “이제 소프트뱅크 모바일은 시장 1, 2위 업체인 NTT도코모와 KDDI에 가입자를 모두 빼앗기게 됐다”고 수군댔다. 난 속으로 ‘그럴 리가…!’ 하고 생각했다. 우리 비밀무기는 일본인들이 이제껏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파격적 할인요금제였다. 나는 여기 ‘화이트 플랜’이란 이름을 붙였다.
#‘폭탄할인제’ 정체된 시장을 뒤흔들다
화이트 플랜의 핵심은 오전 1시부터 저녁9시까지 가입자 간 통화는 몽땅 무료라는 것이다. 2007년 1월 이 요금제를 출시하면서 나는 “경쟁업체들이 요금을 내릴 경우 24시간 안에 추가 할인제를 내놓겠다”고 큰소리쳤다. 업계에선 나를 숫제 상대도 않으려 했다. 그래서야 적자만 쌓일 뿐이라는 거였다. 내 생각은 달랐다. 당시 나는 이미 음성통화만으로는 지속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참이었다. 미래 핵심 수익원은 콘텐트 판매와 데이터 통신이 될 것이었다. 이를 위해선 가입자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또 모든 사업이 그렇듯 이동통신 또한 일정 수 이상의 가입자를 확보해야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었다.
화이트 플랜에 대한 소비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수년간 꼼짝도 않던 가입자 수 추이 그래프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번호이동제 와중에서 고객을 잃기는커녕 외려 성장의 전기를 마련했다. 1년 새 전체 가입자 수가 400만 명 가까이 늘었다. 그해 일본 이통시장 순증 가입자의 50%가 소프트뱅크 모바일로 몰렸다. 덕분에 모회사인 소프트뱅크는 2007년 상반기 사상 최대 순익을 기록했다. 언론도, 경쟁사도, 심지어 직원들조차 상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경사는 또 있었다. 소프트뱅크가 33%의 지분을 보유한 중국 인터넷경매업체 알리바바닷컴이 홍콩 증시에 상장한 것이다. 알리바바닷컴에 투자한 돈은 20억 엔, 상장 뒤 33% 지분 평가액은 1조 엔이 넘었다. 당시 주가로 투자 대비 500배 이상의 수익을 거둔 거였다. 나는 전해에 이어 2년 연속으로 포브스 선정 일본 최대 갑부가 됐다. 2007년 5월 내 재산은 6960억 엔. 당시 환율로 약 5조5000억 원이었다.
#잡스와 나, 벚나무 아래서 맺은 우정
그해 10월, 소프트뱅크 모바일의 모든 휴대전화에 야후 검색 버튼이 탑재됐다. 이어 열린 실적 발표회장에서 나는 정식으로 천명했다. “이제 휴대전화는 음성 머신이 아닌 인터넷 머신이 될 겁니다. 인터넷에 강한 소프트뱅크가 이동통신 시장도 장악할 것입니다!”
2008년, 하얗고 귀여운 개 ‘오토상’을 내세운 TV 광고가 대히트 하면서 회사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고객도 크게 늘었다. 사실 이동통신 시장에서 특정 회사 가입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한국만 해도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의 시장 점유율엔 수년째 큰 변화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소프트뱅크 모바일의 가입자 수는 단 1분기도 정체되거나 뒷걸음질 없이 계속 증가했다. 그 해 6월, 우리는 또 하나의 ‘혁신 폭탄’을 준비했다. 애플 아이폰이었다.
내가 스티브 잡스와 서로 마음 터놓는 사이가 된 건 1980년대 후반의 일이다. 잡스는 85년 자신이 창업한 애플에서 쫓겨났다. 이듬해 그는 심기일전해 PC제조사 넥스트를 설립하고 3D그래픽업체 픽사까지 인수했지만 마음의 상처까지 모두 아문 건 아니었다. 그 무렵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오라클 CEO 래리 앨리슨의 집에서 그와 만났다. 우리 셋은 벚꽃 만개한 뜰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앨리슨은 잡스를 가리키며 “이러다 애플이 도산할 것 같다. 부활할 방법은 단 하나, 저 천재를 귀환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삶과 비즈니스, 상실과 상처, 목표와 열정에 대한 대화와 공감 속에서 우리는 친구가 되어갔다.
#아이폰은 내 꿈과 비전의 메신저
앞서 밝혔듯 나와 잡스는 아이폰 출시 훨씬 전부터 ‘콘텐트와 휴대전화의 결합’이란 주제에 몰두해 있었다. 2007년 1월 애플의 첫 아이폰이 공개됐다. 난 기필코 그 제품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보다폰재팬을 인수할 때처럼 치밀하고 끈질긴 공략이 시작됐다. 잡스와의 친분은 기본, 난 우리가 열정과 비전을 공유하는 사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에 더해 필요한 건 역시 결단. 경쟁사인 NTT도코모는 애플이 통화료 수입의 일부를 요구하자 난색을 표했다. 난 여봐란 듯 흔쾌히 응했다.
아이폰은 그냥 휴대전화가 아니었다. 신세계를 향한 관문이었다. ‘손 안의 PC 세상’이란 내 꿈을 이뤄줄 최고의 파트너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폰 효과는 대단했다. 2008년 6월 아이폰을 출시하자 경쟁사 가입자들이 속속 옮겨왔다. 고객 수만 늘어난 게 아니다. 1인당 사용료도 증가했다. 내가 예상한 대로 사람들이 아이폰을 통해 데이터를 본격 소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9년 상반기, 소프트뱅크는 다시 사상 최대 실적을 갱신했다. 전해 같은 기간에 비해 영업이익은 8%, 순이익은 무려 72%가 증가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담담히 말했다. “그럭저럭 40대의 마지막 승부도 무사히 끝나 가는군.”
정리=이나리 기자 <windy@joongang.co.kr>
◆화이트 플랜=소프트뱅크 모바일이 2007년 1월 내놓은 파격적 할인요금제. 기본료(98엔)가 기존의 3분의 1 수준으로, 일부 시간대를 빼고는 가입자 간 통화가 무료다. 6개월 만에 600만 가입자를 돌파하는 빅 히트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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