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⑤ “오를 산을 정하라, 인생의 반이 결정된다”

[중앙일보] 입력 2011.09.22 00:01 / 수정 2011.09.22 10:39

직원 2명 앞에서 “30년 뒤 1조엔 매출” 연설했더니 … 두달 뒤 “미친 놈”하며 떠나

소프트뱅크 창업 초기, 손정의 회장이 임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직원 두 명으로 시작한 소프트뱅크는 한때 부도위기까지 몰렸다가 손 회장의 도박과 같은 마케팅에 힘입어 기사회생했다. 첫 고객을 잡은 지 한 달 만에 직원수가 15명으로 늘었고, 또 한 달 뒤에는 100명 규모의 회사가 됐다. 1년 뒤 소프트뱅크는 매출 35억 엔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 매스컴은 손 회장에게 ‘괴물 실업가’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소프트뱅크 제공]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써 보내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1980년 3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현지에서 운영하던 소프트웨어(SW) 업체 ‘유니슨 월드’는 친구이자 동업자인 홍 루에게 넘겼다. 그는 훗날 중국의 대표적 통신기기 제조업체인 UT스타컴을 창업했다. 귀국 뒤 1년6개월 동안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으리라. 친척들은 수군거렸다. “마사요시가 미국에서 뭘 배워왔다는 거야?” 정작 내 머리와 가슴속엔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한 번뿐인 인생이다. 부모가 시켜서, 갑작스러운 인연으로, 돈이나 벌겠다는 욕심에 뭔가를 시작하고 싶진 않았다. 길을 한번 정하면 바꾸기 힘들다. 우왕좌왕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오르고 싶은 산을 정하라. 그러면 인생의 반은 결정된다’. 이 한 생각을 돛대 삼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내 꿈은 사업가다. 일생을 걸 만한 사업이 뭘까. 남이 안 하는 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 최고가 될 수 있는 일. 또한 절로 열의가 샘솟으며, 호기심을 유지할 수 있고, 기술 혁신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야여야 했다. 결론은 ‘디지털 정보혁명’. 그것으로 세상의 지혜와 지식을 공유케 해 인류에 공헌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태어난 이유, 스물세 살 청년이 마침내 찾은 큰 뜻이었다.

# 디지털혁명의 도구, 소프트웨어 유통 

 누군가는 허황되다고 비웃을지 모른다. 물론 작은 목표부터 차근차근 이뤄가는 것도 좋다. 세상 99%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그리고 작은 성공을 거둔다. 하나 정말 큰 꿈,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다면 접근방식부터 달라야 한다. 먼저 큰 비전을 세운 뒤 그 실현을 위한 시간표를 미래에서부터 현재를 향해 거꾸로 돌린다. 오늘 아닌 내일의 트렌드를 파악하고, 대기업 못지않은 배포로 승부하며, 그에 걸맞은 투명성과 경영 시스템을 추구해야 한다. 어쨌거나 난 자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혁명의 도구’로 택한 건 SW 유통. 치밀한 분석의 결과였다.

 창업 전 나는 40여 개의 아이템을 검토했다. 80년대 초 일본은 PC 대중화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PC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려면 우수한 SW가 있어야 한다. 미래는 SW 세상이 될 게 분명했다. 직접 SW 개발에 뛰어들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승률이 너무 낮았다. 운영체제(OS) 분야는 세계 표준을 주도하는 미국 기업이 선점해 버렸다. 남은 건 응용 SW 분야인데, 이건 마치 모든 신곡이 히트칠 수 없듯 톱10 안에 들어가는 것만 대박을 치는 구조였다. 그래서 난 개별 상품 대신 인프라를 택하기로 했다. 이익은 적을지 모르나 생명력은 확실히 길다. 또한 압도적 지위를 획득할 경우 업계 성장에 정비례해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 승률 70%. 나는 100여 개의 경영 포인트를 검토한 뒤 그렇게 결론 내렸다.

# 선풍기는 도는데, 직원은 둘뿐인데 

노다 가즈오
 81년 9월, 고향 가까운 후쿠오카현 오도시로시에서 소프트뱅크를 창업했다. 에어컨도 없는 허름한 건물 2층. 직원 두 명을 구했다. 첫날 그들을 앞에 놓고 귤 상자에 올라 한 시간가량 열변을 토했다. 곁에선 낡은 선풍기가 윙윙 돌았다.

 “우리 회사는 세계 디지털 혁명을 이끌 거다. 30년 후엔 두부가게에서 두부를 세듯 매출을 1조(엔), 2조(엔) 단위로 세게 될 거다. 사업을 하겠다는 자가 1000억이니 5000억이니 하는 걸 숫자라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두부가게 운운한 건 일본에서는 두부 한 모를 ‘1조’라 발음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둘 다 완전히 기가 질린 듯했다. 그들은 결국 두 달을 못 채우고 나가버렸다. “저 인간 제정신이야?” “미친 놈!” 하면서.

 그렇게 파리만 날리고 있을 때 샤프사의 사사키 다다시 전무가 소중한 조언을 해주었다. “SW 사업은 정보 밀도가 높은 곳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3년 전 내가 미국에서 발명한 다국어 번역기 기술을 거액에 선뜻 구매해 준 이였다. 나는 충고를 받아들였다. 도쿄 고지마치 4번가에 있는 ㈜경영종합연구소의 방 한 칸을 빌렸다. 이어 연구소의 노다 가즈오 회장을 찾았다. 명함을 건네며 “손 마사요시입니다. 재일 한국인입니다”하고 인사했다. 나는 미국 유학 이후 ‘야스모토’란 일본식 가짜 성(姓) 대신 진짜 성을 쓰기 시작한 터였다. 노다 회장은 내 구상을 듣더니 “장래성이 있다”고 칭찬했다. 그는 세계적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이론을 일본에 소개한 장본인이다. 그런 인물이 격려해 주다니, 뛸 듯이 기뻤다. 이후 그는 사사키 전무와 함께 경험 없고 인맥 부족한 나의 귀한 멘토가 돼주었다.

# ‘괴물 실업가’ 태어나다

 도쿄로 옮긴 얼마 뒤 나는 도박에 가까운 승부수를 던졌다. 창업자금 1000만 엔 중 800만 엔을 털어 전자전시회인 ‘일렉트로닉쇼’에 참가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뜯어말렸다. 회사라곤 달랑 이름뿐, 제품도 실적도 없었다. 난 못 들은 척 행사장에서 가장 큰 부스를 빌렸다. 거길 화려하게 꾸민 뒤 부스 없는 SW업체들에 무료로 대여했다. 대중의 눈길을 끌면 광고 효과가 크리라 봤다. ‘PC 시대엔 SW가 중요하다, 그 SW를 나 손정의가 판매한다’는 사실을 열심히 알렸다. 흔한 카탈로그 대신 아예 잡지를 만들어 돌렸다. 전시회가 끝나자 회사는 파산 지경이 됐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조신전기입니다. 일렉트로닉쇼에서 귀사의 부스를 인상 깊게 봤습니다. 오사카에 일본 최대 컴퓨터 매장을 내는데 거기에서 쓸 SW를 납품해 주시겠습니까.”

 일면식도 없는 회사였다. 유통업은 신뢰가 중요한데, 거래 실적 하나 없는 우리를 믿고 연락해 준 것이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었다. 물건을 떼 오려면 큰돈이 필요하다. 소프트뱅크는 당시 무일푼이었다. 나는 조신전기 사장을 찾아갔다. 내 비전과 아이디어를 설명하며 선수금을 청했다. 그 의지, 열정이 통한 걸까. 상대는 쾌히 지원을 약속했다. 사사키 전무의 도움도 컸다. 그가 집까지 담보로 넣어가며 보증을 선 덕분에 다이이치칸교은행으로부터 무려 1억 엔을 빌릴 수 있었다.

 나는 한발 더 나아갔다. 5000만 엔을 들여 일본 최대 SW업체이던 허드슨과 독점 판매 계약을 맺은 것이다. 유통의 힘은 제품 수급력에서 나온다. 당장은 5000만 엔이 큰돈이지만 그 투자로 인해 더 큰 기회가 올 것을 확신했다. 계산은 맞아떨어졌다. 첫 매출을 올린 지 1년 만에 소프트뱅크는 매출 35억 엔의 중견 기업이 됐다. 83년 ‘주간 아사히’는 나를 ‘괴물 실업가’로 소개했다. ‘컴퓨터로 거부를 쌓은 신데렐라 보이’. 난 신이 났다. 곧 닥쳐올 불행은 꿈에도 모른 채.

정리=이나리 기자 <windy@joongang.co.kr>


◆100번의 노크(100 Knocks)=손정의 회장이 창업 전부터 구상한 경영 진단 시스템. 특정 사업에 대한 100가지 지표를 그래프화해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도록 했다. 검토 항목을 1만 개까지 늘릴 수 있다. “무엇이든 골이 빠개지게 생각한다”는 손 회장의 치밀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⑥ 병상에서 다시 만난 료마

[중앙일보] 입력 2011.09.27 00:06

스물여섯에 5년 시한부 절망 … 책 4000권에서 평생 먹고살 25자를 건지다

소프트뱅크 창업 초기의 손정의 회장. 그는 투병 중이던 20대 후반 특유의 경영전략을 완성했다. 손자병법에 자신의 생각을 곱했다는 뜻에서 ‘제곱병법’이라 이름 지었다. 손 회장은 기업 인수합병이나 중장기 사업 전략을 고민할 때 반드시 이 25자의 뜻과 일치하는지 자문한다고 한다. [소프트뱅크 제공]

초기 소프트뱅크의 성장세는 눈부셨다. 창업 8개월 뒤인 1982년 5월에는 출판사업도 시작했다. 기존 소프트웨어(SW) 유통업에 이어 또 하나의 인프라 비즈니스에 발을 들인 것이다. 이 사업을 시작한 데엔 사연이 있다. 당시 한 유명 PC잡지에 소프트뱅크 광고를 내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잡지는 SW 유통사업도 하는 ‘아스키’라는 기업 소유였다. 한마디로 ‘경쟁사 광고를 내줄 순 없다’는 거였다.

 나는 직접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오! PC’와 ‘오! MZ’라는 정보기술(IT) 전문지를 창간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창간호의 80%가량이 반품됐다. 한 잡지에 매달 1000만 엔씩 적자가 났다. 주력 사업에서 이 정도의 대적자라니, 결단이 필요했다. 나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출판부장이다. 1억 엔 정도를 과감히 투자해 잡지를 일신해 보자. 3개월 뒤에도 흑자가 안 나면 손 떼는 거다. 1억 엔을 투자했다 날리는 거나, 매달 2000만 엔씩 적자를 보며 질질 끌다 반 년 뒤 물러나는 거나 손해보긴 매한가지 아닌가.”

 우선 독자의 요구를 정확히 알아야 했다. 수만 장의 독자 카드를 일일이 분석해 지면에 반영했다. 매주 편집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정가를 680엔에서 580엔으로 내렸다. TV 광고까지 했다. 효과가 곧 나타났다. 5만 부에서 10만 부로 증쇄를 했음에도 판매 3일 만에 매진이 됐다. 이후 출판사업은 계속 성장해 3년 뒤에는 9종의 잡지를 매달 60만 부씩 발행하게 됐다.


#"료마도 나도 5년이다”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그렇게 한시름 놨을 즈음 뜻밖의 재앙과 맞닥뜨렸다. 83년 봄 회사 건강검진에서 만성 간염 판정을 받은 것이다. 상태가 위중했다. 의료진은 “길게 잡아도 5년이다. 그 이상은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졌다.

 미친 듯 공부했다. 펄펄 끓는 열의로 회사를 세운 지 이제 1년 반이다. 딸은 겨우 갓난쟁이다. 해야 할 일이 산처럼 많다. 빚도 잔뜩 있다. 무엇보다 나를 믿는 고객은? 동료는? 직원들은?

 진단받은 다음 날 바로 입원했다. 병상에서 울었다. 그저 살고 싶었다. 가족과 함께할 수 있다면, 딸아이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볼 수 있다면. 사실이 알려지면 은행에서 당장 융자금을 회수할까 봐 병원에서 몰래 빠져나가 회의에 참석했다. 그 와중에도 회사 걱정을 하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그때 료마를 다시 만났다. 시바 료타로 소설 『료마가 간다』를 정독했다. 열여섯 시절 내가 큰 뜻을 품게 해준 바로 그 책이다. 부끄러웠다. 료마는 33세에 죽었다. 마지막 5년 동안 엄청난 일을 했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 나도 5년이다. 그동안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그것을 하자, 목숨 바쳐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스스로를 불태웠는가가 중요하다. 내가 왜 사업을 시작하는지, 무엇을 하려 했는지도 되새겼다. 결국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였다. 딸의 미소, 가족의 미소, 직원들의 미소. 그런데 누구보다 고객들이 웃어주면 좋겠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오지, 얼굴에 흙 묻힌 꼬마가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 본다. 누구한테인지 모르지만 그저 “고맙습니다”라고 중얼거리며….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론은 역시 ‘자기만족’이었다. 멋진 말, 어려운 말 다 필요 없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 그것은 역시 디지털 정보 혁명을 일으켜 수많은 이가 지혜와 지식을 공유하게 하는 것. 오늘날 트위터처럼 말이다.  

#자금 압박·직원 배신, 독서로 이겼다 

 강렬한 삶의 의지가 되살아났다.

 첫째, 병을 이긴다. 둘째, 사업을 지킨다.

 말처럼 쉽진 않았다. 나는 이후 3년 반가량 입·퇴원을 반복했다. 일상적 최고경영자(CEO) 역할을 할 수 없어 새 사장을 영입했다. 일본경비보장(지금의 세콤) 부사장이던 오모리 야스히코였다. 나는 회장으로 물러앉았다. 그렇더라도 회사 일에서 손 뗄 생각은 없었다. 병실에 PC와 팩시밀리·전화기를 설치했다. 의사에게 혼나가며 원격 경영을 시작했다. 새 사업도 열심히 구상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위기가 이어졌다. 84년 자회사를 통해 시작한 상품 가격 데이터베이스화 사업이 실패했다. 타격이 컸다. 은행 융자로 급한 불을 끄는 나날이었다. 86년엔 이른바 ‘소프트뱅크 사건’이 터졌다. 신뢰해 온 유능한 임직원 스무 명이 한꺼번에 사표를 냈다. 독립해 회사를 차린다고 했다. 배신이었다. 나는 굴욕감을 누르며 끝까지 매달렸다. 그러나 잡지 못했다. 그들이 만든 회사는 결국 얼마 못 가 사라졌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듯 배신한 사람은 절대 성공 못한다. 그들 외에도 여러 명이 경쟁사로 빠져나갔다. 고객들의 불만도 컸다. “그 사람 요즘 안 보이네. 의리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반응이었다.

#쇼크 요법으로 병 이기고 복귀

소프트뱅크가 창업 초기 발간한 잡지들.
 수렁에 빠진 느낌이 들 때마다 책을 폈다. 그렇게 읽은 책이 4000여 권. 평생 먹고살 지식을 얻은 셈이다. 소프트뱅크 특유의 경영 전략인 ‘제곱병법’도 이때 창안했다. 손자병법을 깊이 읽고 내 식대로 소화한 결과다. 핵심은 간단하다.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이길 싸움에서 이기는 거다. 전투는 도박이 아니다. 과학이며 이론이다. 또 하나. ‘싸우지 않고 이긴다’. 인수합병(M&A)이 바로 그렇다. 일본의 경영자나 언론 관계자들은 대부분 그런 내 전략을 이해 못하는 것 같다. 종종 ‘모험’이니 ‘차익’이니 하는 용어를 쓰는 걸로 봐서 말이다. 각각의 딜이 얼마나 큰 비전에 따라, 과학적 분석하에, 긴 미래를 보고 이루어진 것인지는 차차 얘기하게 될 터이다.

 그 와중에도 내 병세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84년 새 치료법을 만났다. 도라노몬병원의 구마다 히로미쓰 박사가 창안한 ‘스테로이드 이탈요법’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만성간염을 급성간염으로 변화시켜 인체 내부의 저항력을 일거에 끌어냄으로써 치료를 도모하는 일종의 쇼크 요법이다. 지금은 훨씬 나은 치료법이 많겠지만 당시로선 길이 별로 없었다. 결과는 다행히 성공. 바이러스 수치가 크게 떨어지면서 나는 86년 5월 일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에서 날 기다리는 건 10억 엔의 빚, 그리고 핵심 임원과의 고통스러운 갈등이었다.

정리=이나리 기자 <windy@joongang.co.kr>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⑦ 주식 상장 성공

[중앙일보] 입력 2011.09.29 00:01 / 수정 2011.09.29 10:14

M&A는 모험 아닌 과학 … 2만 페이지 분량 시뮬레이션도 해봤다

1999년 7월 손정의 회장이 인터넷 비즈니스 합작 투자 발표를 위해 영국 런던에서 루퍼드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과 자리를 함께했다. 호주 출신 미디어 재벌 머독과 손 회장은 96년 TV아사히 지분 인수, 97년 일본 위성방송시장 진출을 비롯한 여러 건의 투자 및 인수합병을 공동으로 진행했다. [런던 AFP=연합]

중증 간염을 이겨내고 일선에 복귀했다. 1986년 5월, 스물아홉이 코앞이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투병 중 나 대신 사장으로 일한 이가 애초 약속을 뒤집었다. 자리를 내놓을 수 없다고 했다. 이사회를 통해 ‘임원 40세 정년제’를 일시적으로 도입했다. 40세가 넘은 임원은 재임용이 안 될 경우 퇴사 절차를 밟게 했다. 나는 정이 많은 편이다. 한번 준 맘은 쉬 거두지 않는다. 재능과 인품이 뛰어난 이를 보면 폭 빠진다. 그러다 보니 간혹 이렇게 뒤통수를 맞는다. 아픈 기억들이다.

# 될성부른 벤처에 공을 들여라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조직 문제만큼 골치 아픈 게 빚이었다. 무려 10억 엔. 다시 발명에 매달리기로 했다. 나는 미국 유학 시절 다중어번역기 개발로 사업 밑천을 마련한 경험이 있다.

발명의 요체는 ‘불편과 불합리를 해결하는 것’이다. 마침 당시 막 자유화된 전화 서비스에 주목했다. 고객이 새로 설립된 전기통신회사를 이용하려면 추가 번호를 눌러야 했다. 지역과 회사마다 요금이 다 다른데, 그중 싼 회선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이전과 같은 번호를 쓰면서 자동으로 가장 싼 회선을 찾아주는 시스템을 개발하자.’ 그렇게 결심했다.

 함께할 사람을 찾았다. IT기업 포벌(Forval)의 오쿠보 히데오(57) 창업자와 뜻이 맞았다. 포벌은 현재 일본의 대표적 IT기업이다. 최근에는 한류 스타 원빈씨를 광고모델로 내세워 화제가 됐다. 우승자에게 명품 바이올린인 스트라디바리우스를 2년간 무상 대여하는 ‘포벌 스칼러십 콩쿠르’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오쿠보는 지금 내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이다. 함께 제품을 개발한 게 87년이니 벌써 25년을 쌓아온 우정이다.

 우리가 개발한 NCC BOX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에서 먼저 나온 유사품보다 훨씬 싸고 작은 데다 성능도 우수했다. 이 기기 덕분에 당시 일본의 통신 비용이 크게 줄었다. 회사엔 20억 엔의 로열티 수입이 생겼다. 빚을 갚고도 10억 엔이 남았다. 나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때까지 우리 회사의 정확한 이름은 ‘일본 소프트뱅크’였다. 나는 거기서 ‘일본’이란 단어를 떼어냈다. 이어 미국 IT업체들과 적극적 교류에 나섰다. 당시 내가 열심히 부르짖은 게 ‘타임머신 매니지먼트’다. 거창한 명칭이지만 내용은 단순하다. 당시 미국의 IT산업과 시장 환경은 일본을 한참 앞서가고 있었다. 제대로 된 미국의 제품·기술·서비스를 들여오면 몇 년 뒤 일본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으리라 봤다. 열심히 태평양을 넘나들었다. 미국의 잘나가는 기업, 될성부른 벤처에 공을 들였다. 그렇게 만난 것이 마이크로소프트(MS)와 노벨, 시스코시스템스다.



# MS 업고 일본 컴퓨터 업계 평정

일본 IT기업 ‘포벌’의 오쿠보 히데오 창업자. [현문미디어 제공]
 80년대 후반 일본산(産) 컴퓨터들은 회사마다 운영체제(OS)가 다 달랐다. 나는 언젠가 대부분의 컴퓨터가 같은 OS를 탑재하리라 봤다. MS 윈도가 그중 가장 강력한 후보자였다. 90년을 전후해 나는 MS의 빌 게이츠 창업자를 여러 차례 만났다. 일본 내에서 MS 소프트웨어(SW)의 독점 판매권을 달라고 했다. 빌은 쾌히 응했다. 이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

 92년 MS가 내놓은 윈도3.1이 정말 일본 컴퓨터업계를 평정했다. 윈도상에서 구동하는 엑셀·파워포인트 같은 SW 또한 덩달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일본 SW 시장 규모는 대략 한국의 스무 배다. 인구는 두 배가 좀 넘을 뿐이지만 저작권 의식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MS의 독점 판매권을 가진 우리 회사 매출도 쑥쑥 올랐다. 92년 1000억 엔이 넘었고, 93년엔 더 많이 벌었다. 95년에는 MS와 합작회사인 ‘게임뱅크’를 설립했다. 빌과 나는 1~3개월에 한 번씩은 꼭 만나는 사이가 됐다. 95년 말 그에게서 소포 하나가 왔다. 빌의 첫 저서 『미래로 가는 길(The road ahead)』이었다. 표지 안쪽엔 그의 사인과 함께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마사, 당신은 나와 같은 승부사다(Masa, You are as much risktaker as I am).”

 그렇다고 소프트뱅크가 MS만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니다. 90년 MS의 경쟁사인 노벨과 일본 합작법인을 설립했다. 2001년 파산한 노벨은 당시만 해도 MS와 어깨를 견주는 SW기업이었다. 이 회사의 마지막 최고경영자(CEO)가 바로 현재 구글 회장인 에릭 슈미트다. 94년에는 시스코시스템스 일본법인에 투자했다. 지금은 굴지의 글로벌 기업이 됐지만 20년 전엔 벤처 티를 막 벗은 수준이었다.

 이렇게 동분서주하던 중 사업에 일대 전기가 찾아왔다. 94년 7월 주식 공개에 성공한 것이다. 주당 1만8900엔. 당시 최고가였다. 소프트뱅크는 단번에 2000억 엔의 거금을 쥐게 됐다. 쓸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인수합병(M&A)이었다.

# 인터넷 세상 안내할 ‘보물지도’를 찾다

 당시 일본에서 M&A는 생소함을 넘어 부정적인 무엇이었다. 대물림이 전통이요 가업을 생명처럼 여기는 문화다. M&A란 망한 기업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거나, 다른 이가 애써 일군 기업을 ‘빼앗아가는’ 행위일 뿐이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디지털 정보혁명의 원대한 꿈을 이루려면 통상의 방식으론 안 된다. 주류 분야, 주류 시장으로 단번에 치고 나갈 기회를 잡아야 한다. 병법의 최고봉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아닌가. 이 모두를 충족시키는 게 바로 M&A다. 적대적 M&A란 것도 있지만 난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

 요즘도 이런 방식의 사업 확장을 일종의 도박이나 ‘손 안 대고 코 푸는 일’로 여기는 이들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M&A야말로 가장 치열한 숫자 싸움이다. 무엇보다 어떤 기업에 얼마를 투자할지 적정선을 찾아야 한다. 나는 향후 시장을 60% 이상 점유할 가능성이 없는 회사, 이미 너무 많은 투자자가 침을 흘리는 회사, 현금 흐름(cash flow)이 위태로운 회사는 거들떠도 안 봤다. 비용 대비 효과를 가늠하기 위해 1만, 2만 페이지 분량의 시뮬레이션도 마다하지 않았다.

 분야로 치자면 미래 금맥인 IT서비스, 그중에서도 ‘정보의 길목’을 장악하는 데 진력했다. 95년 초 내가 세계 최대 IT미디어그룹 지프 데이비스를 1800억 엔에 사자 다들 “돌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딜이 없었다면 야후 투자도, 야후재팬 설립도, 오늘날의 소프트뱅크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내겐 막 열린 인터넷 세상을 안내해줄 ‘보물지도’가 절실했고, 최신 IT정보의 집산지인 지프 데이비스보다 더 나은 선택은 없었다. 남들에겐 미친 짓이 내게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었던 것이다.

정리=이나리 기자<windy@joongang.co.kr>

◆손정의의 일본 귀화=손정의 회장은 1990년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손’이라는 성(姓)를 그대로 쓰려 하자 정부가 막았다. ‘한 사람만 쓰는 성을 허용할 순 없으니 일본 성을 쓰라’고 했다. 손 회장 부인이 나섰다. 본인이 먼저 성을 ‘손’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덕분에 한국식 성을 지킬 수 있었다. 손 회장은 귀화와 관련해 “두 딸이 생활하는 데 이런저런 불편이 없어졌고, 내 입출국 수속도 간편해졌다”는 식으로 심상하게 대응하는 편이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⑧ 컴덱스, 지프 데이비스 인수에 성공하다

[중앙일보] 입력 2011.10.04 00:07 / 수정 2011.10.04 11:38

M&A는 전광석화가 기본 … 8억 달러 협상, 단 5분도 안 돼 끝내

1997년 8월 26일 손정의 회장이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컴덱스코리아 97’에서 김종필 당시 자민련 총재에게 신형 노트북PC를 시연해 보이고 있다. 소프트뱅크는 95년 8억 달러를 들여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전시회인 컴덱스를 인수했다. 세계 최대 IT미디어 그룹인 지프 데이비스도 사들였다. 당시 한 해 매출보다 몇 배 더 큰 거래를 성사시킴으로써 손 회장은 단숨에 세계 IT 업계의 거물로 떠올랐다. [중앙포토]

나는 열아홉 살 때 ‘인생 50년 계획’을 세웠다. ‘사업으로 이름을 알린다’는 20대 목표는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30대 계획은 ‘1000억, 2000억 엔 단위의 자금을 모은다’는 것이었다. 1994년 만 36세에 주식 공개로 그 씨알을 마련했다. 남은 4년간 완성을 봐야 했다. 마침 인터넷 시대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폭풍을 뚫고 전진하려면 ‘지도’와 ‘나침반’이 필요했다. 나는 세계 정보기술(IT) 정보의 길목을 잡기로 했다. 아시아인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열기로 했다. 주식 공개로 마련한 돈은 2000억 엔이었다. 그 전부터 마이크로소프트(MS), 시스코 같은 실리콘밸리 기업들과 함께 일하며 미국 시장을 들여다본 터였다. 나는 30대의 승부를 그 땅에서 보기로 했다. 1년 중 8~9개월은 미국에서 살았다. 목표는 이미 정한 터였다. 세계 최대 IT전시회인 컴덱스, 그리고 역시 세계 최대 IT미디어그룹인 지프 데이비스 인수였다.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컴덱스 인수를 처음 마음먹은 건 93년 가을이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컴덱스 쇼에 갔다가 오너인 셜던 G 아델슨 회장이 회사를 팔 거란 소문을 들었다. 나는 곧바로 회장실을 찾았다. 거두절미하고 “컴덱스를 사겠다”고 했다. “돈은 있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지금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회사 이름이 ‘뱅크(bank·은행)’ 아닙니까. 왠지 돈이 무더기로 들어올 것 같지 않나요?”

 이렇게 넉살 좋게 답하자 아델슨 회장은 껄껄 웃었다. 나는 내처 “컴덱스를 사려는 건 단지 돈을 벌고 싶어서가 아니다. 나는 PC업계를 정말 좋아한다. 회사를 인수해 미국뿐 아니라 세계 시장을 개척하겠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와 나 사이에 진심이 통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반전과 집념의 협상 드라마

 1년쯤 뒤 마침내 컴덱스와 본격 협상에 들어갈 즈음 더 솔깃한 뉴스를 접했다. ‘미국의 세계 최대 IT미디어그룹 지프 데이비스가 매각 절차를 밟는다’는 기사가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것이다. 지프 데이비스는 수많은 IT 관련 미디어를 생산하는 ‘정보 큰손’이었다. 여기서 발간하는 잡지 PC위크는 세계 IT 종사자의 필독서였다. 광고 수익이 플레이보이나 포춘보다 많았다. 그에 자극 받아 90년 3월 이미 나는 PC위크의 일본 판권을 확보한 터였다. 나는 감히 지프 데이비스의 핵심인 출판부문을 사기로 했다. 하지만 돈이 부족했다. 주거래처인 고교은행은 물론 일본의 어떤 금융사도 융자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나는 미국에서 팀을 짜기로 했다. 모건스탠리를 고문으로,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를 회계 감사로 기용했다. 이들은 내 무모한 계획을 비웃지 않았다. 신용 담보 융자인 LBO(Leveraged buyout) 방식을 제안했다. 소프트뱅크와 지프 데이비스의 수익을 합하면 ‘1+1=2’가 아닌 ‘1+1=3’의 신용도를 갖출 수 있다는 거였다. 모건스탠리의 주선으로 뱅크 오브 뉴욕·씨티은행·체이스맨해튼은행 관계자들과 저녁을 했다. 일주일 뒤 세 곳 모두에서 OK 사인이 왔다.

 94년 10월 말 나는 자신만만하게 입찰일을 맞았다. 한데 정오쯤 믿을 수 없는 전화가 왔다. 투자전문사 포스트먼 리틀이 단독 교섭권을 얻어 출판부문을 인수해버렸다는 거였다. 단독 교섭권이란 입찰 전 파격 조건을 제시해 받아들여질 경우 전액 현금을 지불하고 회사를 가져가버리는 것이다. 지프 데이비스 측에서 유력 매수처인 소프트뱅크가 자금이 부족하다는 루머를 듣고 거래를 조기에 타결해버린 거였다.

 나는 우선 팀을 다독였다. “미국식 M&A를 제대로 배웠다” “과정 습득 자체가 재산”이라며 껄껄 웃기까지 했다. 하지만 속은 말이 아니었다. 며칠째 잠을 못 잔 상황이었다. 호텔방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졌다. 얼마나 잤을까. 불현듯 눈을 떴다. 오후 4시55분. 입찰 마감까지 딱 5분이 남은 상태였다. 갑자기 머릿속에 불이 번쩍 했다.

 ‘지프 데이비스엔 출판부문 말고 전시회부문인 ‘인터롭’도 있지 않나. 인터롭은 컴덱스에 이은 미국 2위 전시회다. 그걸 사자!’

 나는 곧바로 모건스탠리에 전화했다.

 “지금 바로 지프 데이비스에 연락해 시간을 더 달라고 하게. 인터롭을 살 테니 입찰액 계산을 위해 자정까지 마감을 미뤄달라고 말이야.”

 컴덱스를 곧 인수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 더해 인터롭까지 사면 미국 IT전시 시장의 70~80%를 잡게 된다. 나는 모건스탠리 사무실로 달려갔다. 그날 자정 인터롭 인수를 확정했다. 값은 2억 달러. 나는 모건스탠리에 10억 엔이 넘는 고문료를 기꺼이 지불했다.

#‘5분 독대’로 끝낸 3조원 빅딜

 다음해 초엔 컴덱스 인수에 나섰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본사로 가
아델슨 회장
회장과 독대했다.

 “받고 싶은 금액을 말씀하십시오. 타당한 수준이면 흥정 없이 지불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상치를 벗어난 값이면 미련 없이 물러나겠어요.”

 나는 이어 “더 높은 값을 쳐 줄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의 꿈을 존중하고 더 큰 성취를 이룰 사람은 바로 나”라고 강조했다. 아델슨 회장이 값을 불렀다.

 “8억 달러.”

 나는 말없이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협상은 5분도 안 돼 끝났다.

 컴덱스 측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빌 게이츠, 에커드 파이퍼 컴팩 회장 같은 거물들과 막역한 사이란 걸 알고 있었다. 시스코 본사의 사외이사이기도 했다. 회사 인수 뒤 나는 기존 멤버를 한 명도 교체하지 않았다.

 얼마 뒤엔 기어코 지프 데이비스 출판부문마저 가져왔다. 포스트먼 리틀의 테드 포스트먼 회장과 역시 ‘단판 승부’를 벌였다. 그는 21억 달러를 요구했다. 나는 두말 않고 받아들였다. 95년 당시 소프트뱅크의 매출은 600억 엔이 좀 넘었다. 그런 회사가 1년6개월 새 무려 3100엔 규모의 국제적 M&A를 성사시킨 것이다.

 혹자는 이처럼 전광석화 같은 빅 딜에 아연실색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결코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소프트뱅크는 M&A 전 온갖 데이터를 동원해 그야말로 가능한 모든 변수를 계산한다. 이를 바탕으로 신속하고 확고한 결정을 내린다. ‘수치(數値) 매니지먼트’와 ‘압도적 속도’는 소프트뱅크 DNA의 원형질이다.

정리=이나리 기자 <windy@joongang.co.kr>

◆소프트뱅크식 팀제=전사 조직을 9명 이하 팀으로 나눈 것. 경영학에서 말하는 관리자 1인의 통제 범위가 5~9명임을 감안했다. 또 팀의 규모가 너무 클 경우 회사보다 조직 자체의 이익에 준해 판단할 수 있음을 고려했다. 이 회사 팀장은 권한이 크다. 사장이나 본사가 모든 권한을 갖는 건 1000m 떨어진 곳에서 권총으로 목표물을 맞히려는 것과 같다고 봐서다. 반면 현장 팀장에게 권한을 위임하면 1m 앞에 서서 과녁을 명중시킬 수 있다. 재량권이 큰 만큼 책임도 막중하다. 팀별 독립채산제 형태로 운영해 실적이 부진할 경우 반드시 책임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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