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플러스] 검증도 없이…공공장소 묻지도 않고 '방향제 분사'

[JTBC] 입력 2016-05-18 22:06 수정 2016-05-18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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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안방의 세월호'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희생자를 낸, 가습기 살균제 참사. 지금까지 집계된 사망자만 239명입니다. 그렇다면 집 밖으로 나오면 이런 물질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매일 거치는 동선을 저희 취재진이 점검해 본 결과,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지하철과 직장, 대형마트와 음식점, 그리고 어린이집과 키즈카페 등 곳곳에서 검증되지 않은 화학제품이 쓰이고 있었습니다. 폐를 손상시킬 가능성이 있는 살균제 성분이 포함된 제품도 있었습니다.

김혜미 기자입니다.

 
[기자]

아침 출근길의 지하철, 지하철 화장실마다 방향제가 설치돼 있습니다.

[박선영/회사원 : 여러 곳에서 칙칙 소리 나면서 뿌려지는데 신경 쓰이고 방향제도 너무 많이 붙어있는데…]

서울 지하철 한 여자화장실입니다. 입구로 들어오시면,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눈앞에 스프레이형 방향제가 설치돼 있습니다.

양변기 끝에도 한 개 설치돼 있고요, 일부는 이렇게 기저귀 교환대 바로 옆 위치에 있어서 아이들이 스프레이형 화학제품에 쉽게 노출될 우려가 있습니다.

서울 지하철 1~8호선에 설치돼 있는 이같은 방향제는 1000여 개, 화장실 1곳당 평균 2개꼴입니다. 보통 10분 간격으로 공기 중으로 뿌려집니다.

점심시간,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 식당에 한 번 나와봤습니다. 여기 이렇게 화장실이 있는데요, 화장실에 방향제가 설치돼 있는지 제가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33제곱미터 남짓의 작은 공간에도 방향제가 설치돼 있습니다.

마트나 백화점은 물론, 영화관에도 화장실마다 어김없이 방향제가 있습니다.

냄새를 잡고, 향기를 낸다며 곳곳에 설치해 놓긴 했지만 어떤 화학물질이 들어 있는지 설치한 기관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울메트로 관계자 : 방향제에 대해서는 어떤 성분을 검사하라는 게 없나 봐요. 검사항목이 정해져야 하는 게 아닌가…]

[도시철도공사 관계자 : (성분표를) 계약 업체에서 받아야 해요. (업체에서) 성분별 함유량은 제조비법이라고…]

해당 업체에서 자료로 제출한 방향제의 성분 일부 내역을 확인해 봤습니다.

호흡기를 자극할 수 있는 성분인 벤즈알데히드나 피부 알러지를 유발할 수 있는 프로필렌글리콜 성분이 포함돼 있습니다.

대다수에게 유해한 성분은 아니지만, 호흡기가 약하거나, 알러지가 있는 사람에겐 함유량이나 노출 정도에 따라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한영자/서울 이촌1동 : 집에서는 전혀 (방향제)를 안 쓰고 있는데, 바깥에선 화학적인 냄새나는 건 안 했으면 좋겠어요. 역겨울 때가 많아서…]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향을 새로운 유형의 공기질 오염으로 분류하고 공공장소에서는 최대한 사용을 제한하는 방법으로 정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고금숙 팀장/여성환경연대 환경건강 : 내가 코로 마시는 생활 화학제품에 어떤 성분이 들어있는지를 정부도 모르고, 정부가 모르기 때문에 소비자도 모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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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리의 향기는 오래 '못' 가요~ 그렇게 오래갈 수 없어요~

찰칵, 전국 각지에서 '옥시 불매 선언 인증샷'을 찍고 있습니다. 
이 사진들을 모아 5월 16일 언론사 광고에도 싣는다고 합니다.

공식 카페 '옥시불매인증샷 올리기' 게시판에 올리거나
#옥시불매인증샷 해시태그와 함께 페이스북에 올리면 된답니다.

#옥시불매인증샷 #모이 모이라!

* 가습기 살균제 옥시 불매 공식 카페 ☞ http://cafe.naver.com/oxyout
* 가습기 살균제 옥시 불매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oxyrb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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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사회단체 "옥시 제품 불매운동에 동참해 주세요"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모임, 환경보건시민센터, 환경운동연합, 민변환경보건위원회는 지난 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사건에 대해 옥시 레킷벤키저의 이사진 8명 전원을 살인죄, 살인교사죄, 증거은닉죄 등으로 처벌해 달라고 고발장을 제출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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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의 제품과 관련한 사망 사건에도 무성의한 대처로 일을 키워왔다는 비판을 받는 옥시레킷벤키저(아래 옥시)에 대한 소비자 불매운동이 탄력을 받고 있다. 누리꾼들은 옥시가 생산한 제품의 리스트를 정리하고 대체품까지 찾아 나서며 불매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옥시크린'만 있는 게 아니에요

흔히 옥시의 제품 하면 "빨래 끝"이라는 광고 문구로 널리 알려진 옥시크린 정도를 떠올리지만 이 회사의 제품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옥시의 공식 홈페이지를 살펴보면 세탁용품으로만 '파워크린'(세제), '오투액션'(표백제), '옥시크린'(표백제), '쉐리'(섬유유연제) 등의 브랜드로 23개 제품이 출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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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윅'으로 대표되는 옥시의 방향제는 액체형과 고체형 등 17개 다른 제품이 선을 보이고 있다. '물먹는 하마'와 '냄새먹는 하마'로 유명한 이른바 '하마 브랜드'는 제습제와 탈취제를 아우르는 옥시의 대표 상품이다. 옷장과 냉장고, 신발장, 이불장, 화장실 등 31개 제품의 용도를 보자면 집 안 구석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옥시의 청소용 제품을 찾기 위해서는 '이지오프 뱅'과 '옥시싹싹'을 기억하면 된다. 11개 제품군이 나열된 이지오프 뱅은 옥시의 욕실 청소 전용 제품군이 사용하는 브랜드다. 17개 제품이 사용하는 옥시싹싹은 욕실과 주방청소 외에도 세탁조 청소, 곰팡이제거 등을 위해 사용하게끔 만들어졌다. 옥시는 '하픽 변기 세정제'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변기 전용세제도 출시하고 있다.

100개도 넘는 옥시 제품 "많기도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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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습기살균제 사태와 관련 아타 샤프달 옥시레킷벤키저 대표이사가 지난 2일 오후 영등포구 콘래드호텔에서 대국민사과 기자회견을 하는 가운데, 산소호흡기 없이 생활이 불가능한 피해자(만성폐질환) 임성준(13)군과 가족 및 피해자들이 기자회견장을 찾아 항의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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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시'는 옥시의 식기세척기 전용 세제 제품이다. 모두 3개의 제품이 있다. 항균 기능을 강조하는 '데톨'은 손세정제와 소독제, 바디워시, 스프레이 등 7개 각기 다른 제품이 판매되고 있다. 

여성들이 주로 제모를 위해 사용하는 '비트'는 5개 제품이 크림과 왁스 스트립 형태로 출시되고 있다. 건전지를 이용해 각질을 제거하는 전동 발각질 관리기도 '숄'이라는 브랜드로 1개 제품이 한국 시장에 나왔다. 콘돔 브랜드인 듀렉스도 옥시의 제품이다.  

옥시가 생활용품을 주로 생산하는 업체이기는 하지만 제약 부분도 무시할 수는 없다. 대표적인 제품은 속 쓰림과 소화불량 증상 개선을 위해 먹는 '개비스콘'과 인후염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소비자들이 찾는 '스트렙실'이다. 관절건강기능 식품인 '무브프리' 역시의 옥시의 제품이다. 

"못 믿겠다" 직접 만들어 쓰겠다는 소비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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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습기살균제피해자·시민단체, 옥시 상품 불매운동 선언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모임, 환경보건시민센터, 소비자단체, 환경단체,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가습기살균제 제조 기업들의 처벌을 촉구하며 다국적기업 옥시레킷벤키저(이하 옥시) 상품의 불매를 선언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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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꾼들은 이러한 옥시의 제품군을 소개하는 한편 이 상품을 대체할 제품들까지 함께 알려 나가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이참에 직접 대체제를 만들어 쓰겠다는 소비자까지 생겨나고 있다. 예를 들어 세탁할 때 쓰는 표백제인 옥시크린 대신 과탄산나트륨이나 베이킹소다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베이킹소다는 식품 원료로도 쓰이는 만큼 인체에 무해한 것으로 알려졌고, 식기나 과일 세척에도 사용할 수 있어 주목받고 있다. 섬유 유연제를 쓰지 않고 구연산을 사용해 섬유 유연 효과와 살균 효과까지 얻는 방법도 대안으로 떠올랐다. 

제습제인 '물먹는 하마'는 염화칼슘을 활용해 손쉽게 만들 수 있다. 수분(습기)을 끌어당겨 액체로 변하는 염화칼슘의 특성을 이용한 것으로 시판되는 제습제가 주로 사용하는 방식과 같다. 베이킹소다와 구연산을 섞어 욕실과 주방 청소 등에 활용하는 방법도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불매운동은 실제 시장에서도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한 대형마트에서는 지난달 18일부터 1일까지 옥시의 제습제 매출이 전년 같은 기간 대비 53%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옥시의 대표 상품인 표백제도 매출이 38% 곤두박질쳤고, 섬유유연제는 7% 매출이 줄어들었다.  

소비자들의 반응이 차갑게 돌아서면서 일부 마트는 옥시 제품을 철수하기 시작했다. 롯데마트의 경우 이번 사태가 마무리될 때까지 옥시 제품을 최소 수준으로만 진열하기로 했다. 옥시 제품에 대한 신규 발주도 중단했다. 일부 약국에서도 옥시 제품인 개비스콘과 스트렙실 등을 진열대에서 치운 것으로 전해졌다.

조각난 진실 맞추며 잔인한 봄을 마주한 그들이 있기에

<세월호, 그날의 기록> 펴낸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박수빈·박다영씨…영화 1000편 이상 분량, A4용지 15만 쪽 자료에 10개월간 파묻혀 꼼꼼하게 ‘그날’ 복기

제1107호
2016.04.12
등록 : 2016-04-12 14:59 수정 : 2016-04-14 14:42
계절은 잔인하게 찾아왔다. 초록이 무심하게 찬란할 때 이들은 처음 만났다. 세월호 참사 1년이 지난 2015년 봄이었다.

아이를 잃고 밤마다 몸을 뒤척이던 아버지가 있었다. 세월호 희생자 박수현 학생의 아버지 박종대씨는 갈대라도 잡는 심정으로 세월호 기록을 모으고 있었다. 아들의 책상 위에 기록이 산더미처럼 쌓여갔지만 평범한 개인이, 익숙하지 않은 자료를 바탕으로 흩어진 진실의 조각들을 하나로 모으기란 쉽지 않았다. 종이 꾸러미를 들고 헤매는 그에게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2014년 세월호 순례길을 함께 걸었던 <한겨레21> 정은주 기자였다.

정은주 기자는 박종대씨의 기록을 들고 재단법인 ‘진실의 힘’을 만났다. 진실의 힘은 1970~90년대 간첩으로 조작돼 고문당한 국가 폭력 피해자들의 진실 규명을 위해 꾸려진 단체다. 이들은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막막한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단체이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년이 지났지만 당시까지 세월호 기록을 모두 정리해 진실의 조각을 맞춘 곳은 없었다. 진실의 힘은 그 일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2015년 5월, ‘세월호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됐다.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가운데 박수빈 변호사, 박다영 작가를 만났다. 4월6일 서울대학교 인권센터의 초청으로 열린 ‘세월호, 진실과 기억’ 세미나를 마친 직후였다. 기록팀의 여정을 두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들었다.

뜻있는 변호사·기자·활동가 뭉치다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에 참여한 박수빈 변호사(왼쪽)와 박다영 작가는 단어를 한참 골라 말했다. 길고 고단한 작업을 마침내 털어낸 해방감보다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의 첫 단추를 꿴 사람으로서의 신중함과 책무가 더 크다고 말했다.

“영화 같은 일이었다.” 박수빈 변호사는 지난해 5월부터 올 3월까지, 10개월의 여정을 이렇게 요약했다. 프로젝트의 발단이 된 자료를 확보한 정은주 기자, 로스쿨을 갓 졸업한 박수빈 변호사,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던 박다영 작가, 학업 중이던 박현진씨 등 <세월호, 그날의 기록>의 저자 모두 자기 역할을 묵묵히 하며 다 함께 일궈낸 결과라는 뜻이다.

이들은 각각 자기 앞에 닥친 일을 모두 접고 심해로 들어가는 막막한 탐사에 뛰어들었다. 진실의 힘의 조용환 변호사와 송소연 이사, 이사랑 간사는 이 일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을 맡았다. 진실의 힘 이사인 조용환 변호사는 조작 간첩 재심 사건에서 첫 무죄를 이끄는 등 실력과 명망을 두루 갖춘 법률가다. 세월호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도록 뜻있는 변호사와 후원자들의 도움을 모은 것도 조 변호사였다. 이 마중물이 없었다면 책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처음에는 기록물을 정리해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게 정리해두면 누군가 진실의 조각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록을 읽을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료에 바탕을 둔 단행본 출판을 기획하게 됐다.

긴 호흡의 책을 써본 경험이 없었던 저자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기록을 읽는 것도 고된 일이었지만, 그 기록을 대중이 읽을 만한 문장으로 만드는 일은 번역과 다름없었다. 세월호 현장의 처음과 끝, 구조 세력의 무능함, 무책임한 정부, 무지하고 부실한 선박회사 등 책임자들을 입체적으로 엮기 위해 저자들은 여러 날을 뒤척였다.

글이 한 조각, 한 조각 태어날 때마다 조용환 변호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꼼꼼하게 데스킹을 봤다. 초교, 2교, 3교, 수없이 반복되는 글쓰기 작업에 지칠 때면 송소연 이사가 다독이며 끝까지 마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책이 드디어 제 꼴을 갖추는 동안에도 새 단서와 자료가 나오면 고쳐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라도 더 진실의 조각을 더하겠다는 집념이었다.

그렇게 <세월호, 그날의 기록>을 펴냈다.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이 살펴본 자료는 15만 쪽의 재판 수사 기록과 3테라바이트(TB)의 음성·동영상 파일 등이다. 각각 분담한 분야가 있었지만 결국 모든 사람이 모든 기록을 다 봤다고 할 수 있다. 부족한 조각들을 서로 이어붙이고 엮어야만 했다. 저자들은 매일 자신이 읽은 자료를 바탕으로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고 교차 확인했다.

‘놓친 게 없을까?’ 밤낮을 뒤척여

<세월호, 그날의 기록>은 15만 쪽의 재판·수사 기록과 3테라바이트의 음성·동영상 파일 등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세월호 ‘그날’을 복기하고, 왜 구조하지 못했는지 규명했다.

이들이 읽어야 했던 15만 쪽의 기록이란 과연 얼마만큼일까. A4용지 500장이 든 상자 300개 분량이다. 눈에 그린 듯이 4월16일 사고가 있었던 날을 복원하고 해경과 선원,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진두지휘해야 했을 청와대의 실수와 착오를 찾아내기까지 300상자의 자료를 보고 또 봐야만 했다.

음성·영상 파일 3테라바이트는 3072기가바이트다. 컴퓨터에 저장하는 영화 한 편의 용량이 2~3기가바이트라고 하면, 2시간짜리 영화 1000편 이상 분량이다. 휴대전화로 촬영한 동영상, 폐회로텔레비전(CCTV), 음성 녹취 파일은 화질이나 음질이 떨어지므로 이들이 보고 들은 영상과 음성은 영화 1000편 분량을 훨씬 넘어선다.

확인해야 할 자료가 눈덩이처럼 몸을 불려갈 때도 포기하거나 도망가려는 생각은 없었다. 변호사 시험을 갓 통과한 박 변호사에겐 이 일은 사회생활의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빨리 이걸 다 보고 다시 한번 더 봐야겠다며 의욕적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막상 들여다보니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어떤 사실이 있고 없는지 확인하고, 없는 자료를 찾아내 확보하고, 새로운 사실을 발굴할 수 있을지 검토하기 위해 다시 기존 자료를 훑는 과정이 이어졌다. 수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여러 명의 사람이 힘을 합쳐 하나의 생물처럼 움직였던 프로젝트인데, 너무 만만하게 도전했던 거다.”

박다영 작가는 처음에는 막막함과 두려움이, 뒤로 갈수록 불안함이 자신을 추동했다고 밝혔다. “박 변호사로선 비교적 눈에 익숙한 법정 기록이었겠지만 나는 이런 기록물의 형태 자체를 처음 접했다. 두려운 마음이 컸다. 제대로 잘 읽어내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배 모형이 뒤집히는 순간, 구토감 들었다”

자료가 눈에 익자, 이번에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새로운 자료가 추가로 발굴됐을 때, 찾았다는 기쁨보다는 우리가 놓친 게 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면 볼수록 새로운 게 계속 보였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새로운 팩트라기보다는 여러 자료를 입체적으로 조합했을 때 찾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박다영 작가를 비롯해 세월호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저자들이 밤낮을 잊고 자료 읽기에 몰입했던 이유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호 기록팀 사람들은 기록의 무게에 압도되기 시작했다. 서울 종로구 창덕궁이 아름답게 내려다보이는 진실의 힘 사무실에서 이들은 사계절을 모두 보냈다. 눈을 사로잡는 풍경이 시시때때로 창밖으로 펼쳐졌지만 그런 걸 붙들고 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누군가 먼저 퇴근해 집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돌아오면, 다른 이들이 같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기록을 밤새 읽는 모습을 목격해야 했다.

어떤 일과를 보냈느냐는 질문에 저자들은 ‘오늘은 반드시 일찍 퇴근하겠다’는 일념으로 오전 9시에 출근해 자료를 보기 시작하면 어느덧 밤이 깊어 있었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하나만 더 확인하고 그만 덮어야겠다고 생각할 때마다 새로 확인해야 할 진실의 조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네 사람은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다시피 하며 몰두했다. 동상처럼 한자리에 앉아 자료를 봤다. 누군가 먼저 퇴근해 집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돌아오면, 다른 이들이 같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기록을 밤새 읽는 모습을 목격해야 했다.

왜 그렇게까지 몰입하나, 주변의 의아한 시선도 있었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는 ‘내가 놓친 자료가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면서 계속 ‘하나라도 더 봐야겠다’는 압박감이 생겼다.” 박다영 작가의 말이다.

구조 당국의 무능한 맨얼굴이 처절하게 드러날 때마다 분통을 터트릴 일이 많을 법도 했지만 이들은 최대한 감정을 이입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고 밝혔다. 그러지 않으면 이 일을 끝까지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때때로, 가슴 치고 싶은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 진짜…’. 이런 말을 절로 내뱉던 적이 몇 번 있었다”고 박수빈 변호사가 말했다. 처음 학생들의 진술을 읽을 때는 평면적으로 이해했는데, 책을 써가는 과정에서 전후 사정과 맥락이 잡히기 시작하니까 견디기 힘들었다. “배가 가라앉기 직전 이미 물에 잠긴 창문이 보이는 동영상, 창문이 깨져 물이 들어오는 순간, 이런 것들이 진술과 겹치면서 자꾸만 그림을 그려보게 되는 거다. 배 모형을 만들어 기울기를 확인하면서 동료들과 토론했는데, 전복 과정을 복기하면서 배가 완전히 뒤집혔을 때, 구토감이 들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인데, 모든 작업 과정 중에 그날이 제일 힘들었다.”

진실 규명을 위한 ‘첫 단추’

세월호 기록팀이 일궈낸 결과물이 모든 진실을 다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곳곳에서 자료의 구멍을 확인하고, 의문점을 지적하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하지만 진실 규명을 위한 중요하고 묵직한 첫 단추인 것은 분명하다.

이명수 ‘치유공간 이웃’ 대표는 온 국민을 지배한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 진실과 기억’ 세미나에서 여전히 심리 치유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종자 가족 얘기를 했다. 가족의 주검을 수습해서 따뜻한 흙 한 줌 덮어주지도 못했는데, 감히 어떻게 내 마음 편하자고 상담하고 치유하냐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진상 규명이 가장 첫 번째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부모, 형제들이 이 책을 읽기는 너무 힘들 것이다. 대신 시민들이 읽어야 한다. 우리는 같이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잊혀서는 안 된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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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2년 동안 세월호 취재에 매달렸나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들과 함께 38일간 도보순례, 관련 기록·자료 집대성 등 앞장선 정은주 기자가 말하는 <한겨레21>과 세월호의 ‘특별한 동행’ 뒷이야기

제1107호
2016.04.13
등록 : 2016-04-13 18:22 수정 : 2016-04-14 19:21
<한겨레21>은 세월호 참사 1주기인 2015년 4월부터 1년 동안 세월호 탐사보도를 시작했다. 2주기를 맞으며 탐사보도 4부를 마무리짓는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위해 고군분투해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싣는다. 2년간 온몸으로 싸워온 정은주 기자의 에필로그와 <세월호, 그날의 기록>을 쓴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의 10개월간의 여정을 담았다. 앞으로 밝혀내야 할 4가지 문제점도 제기한다. <한겨레21>의 세월호 탐사보도는 앞으로도 계속 된다. 다른 기자가 다른 방식으로 더 깊은 진실을 길어낼 계획이다. _편집자

2014년 7월9일 밤 10시30분, 남편은 나와 인턴기자를 데리러 경기도 화성시에 왔다. 세월호 참사 때 아들을 잃고 경기도 안산 단원고에서 전남 진도 팽목항을 거쳐 대전 월드컵경기장으로 800km 도보순례에 나선 두 아빠, 그리고 20대 누나와의 1박2일 동행취재를 마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누나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나를 꼭 껴안았다. 두 아빠도 아쉬워했다. 도보순례는 예상보다 훨씬 힘겹고 외로웠기 때문이다.

남편을 보내고 유가족과 남았다

전문 길잡이도, 의료 지원자도 없는 세월호 유가족 순례단의 앞길은 캄캄해 보였다.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다. 두 아빠와 누나만을 내버려두고 떠나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먼 길을 달려온 남편에게 하루만 더 머물겠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턴기자만 그의 차에 태워 보냈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한겨레21>과 세월호의 특별한 동행은 그날 시작됐다.

1.

<한겨레21> 기사 마감을 끝내고 2014년 4월19일 진도행 첫 아침 버스를 탈 때만 해도 나는 피해자 가족들을 당연히 취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닷새 만에 기자는 이미 ‘기레기’(기자+쓰레기)로 낙인찍혀 있었다. 기자 명함을 내미는 순간 부모들의 시선은 싸늘하게 변했다.

나는 진도 실내체육관 2층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밤은 눈부시게 환했다. 앞쪽 무대에 놓인 대형 모니터는 컴컴한 바다를 비추지만 체육관은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형광등이 밝았다.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을 기다리는 엄마, 아빠가 어떻게 불을 끌 수 있겠는가. 그 환한 불빛 아래에서 울다 쓰러지다 소리치기를 반복하며 부모들은 아침을 맞았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단 한 명도 인터뷰하지 못하고 나는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5월19일 세월호 유가족 31명을 태운 버스가 안산에서 진도 실내체육관으로 향했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해경 해체)에 대한 가족들의 공식 입장을 물으려 했다. 유경근 대변인의 동의를 받아 그 버스에 동승했다. 버스에 오른 가족들은 오랜 친구처럼 다정했다. 빈자리가 많은데도 엄마는 엄마끼리, 아빠는 아빠끼리 같이 앉았다. 손을 꼭 잡고 귀엣말을 속삭였다.

그러나 나는 또 혼자였다. 버스가 충남 홍성군 홍성휴게소에 들르자 가족들이 우르르 내렸다. 창밖을 바라보며 무력함을 곱씹는데 한 아빠가 호두과자 한 봉지를 건넸다. 외로운 나를 외면할 수 없는 그 아빠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다음날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이 기자회견을 할 때도 그랬다. 오전에 비가 내린 팽목항은 쌀쌀했다. 급하게 내려오느라 겉옷을 챙기지 못한 나는 일회용 우비만 입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우비 속으로 파고들면서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저기요.”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뒤돌아보니 초췌한 얼굴에 쓰러질 듯이 가냘픈 40대 여자였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배에 갇혀 있는 아이를 찾지 못한 실종자 가족 같았다. 나 때문에 앞쪽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알아듣고 한발 옆으로 비켰다. 엄마는 자신이 입고 있던 검정색 겉옷을 벗어 내게 건넸다. 자원봉사자들이 피해자 가족을 위해 준비한 바람막이 옷이었다.

“입으세요.” 나는 당황했다. “아까부터 많이 추워 보이더라고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데 엄마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추우면 안 돼요. 춥지 마요.” 그 말에 나는 두말없이 옷을 받아 입었다. 엄마는 나를 보며 차가운 바다에 잠겨서 추위에 떨고 있을 아이를 고통스럽게 떠올렸을 것이다.

2.

2014년 7월5일 강기갑 전 의원을 인터뷰하고 경남 사천 버스터미널에 있을 때 당시 <한겨레21> 최우성 편집장이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세월호 유가족이 도보순례에 나선다고 한다.” 유가족의 연락처를 받아 다음날 안산으로 찾아갔다.

승현 누나 아름씨가 골목을 헤매던 나를 발견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한 빌라의 반지하층으로 내려갔다. 아빠와 삼남매가 살기에는 비좁아 보이는 집이었다. 그 집에는 길이 130cm, 무게 5kg짜리 나무 십자가와 ‘하루속히 가족 품으로’라는 깃발이 놓여 있었다.

승현 아빠 이호진씨와 누나 아름씨는 웅기 아빠 김학일씨와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고 38일간 도보순례에 나서겠다고 했다. 304명의 죽음 앞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이 답답해 무작정 십자가를 짊어지고 길 위에 나설 계획이었다.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빠는 오히려 고행을 바랐다. “우리 아이들이 겪었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다.”

‘길치’ 기자, 순례단의 ‘로드매니저’로

정은주 기자 등 <한겨레21> 기자들은 2014년 여름 세월호 유가족들이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염원하며 도보순례 하는 길에 38일간 동행했다. 박승화 기자

아이를 낳아보지도, 잃어보지도 않은 나는 아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가늠하는 척, 이해하는 척하지 않았다. 그 마음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도보순례 출발지인 안산 단원고에서 많은 기자들이 두 아빠에게 질문을 던질 때도 침묵했다. 한두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0분 만에 다른 기자들이 다 떠나고 유가족 3명과 <한겨레21> 기자 2명(나와 인턴기자), 페이스북을 보고 배웅 나온 이상길씨만 남았다.

<한겨레21>과 ‘진실의 힘’을 오가며 밤낮없이 일했다. 일주일에 2~3일밖에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집에서 목놓아 몇 시간을 울었다. 내 무능함을 한탄하고 그런 내 손에 세월호, 그날의 기록이 들려 있어 가슴이 미어졌다.

첫날 목적지인 경기도 화성시 면목면사무소는 스마트폰 지도 앱을 보며 찾아가야 했다. 유가족이 스마트폰 작동법에 익숙하지 않아 내가 길잡이로 나섰다. 동서남북을 구분하지 못하는 타고난 ‘길치’인 탓에 길을 헤매며 되돌아 나오기를 반복했다.

한두 번 웃어넘기던 두 아빠가 슬슬 짜증이 날 무렵, 첫 도착지에 다다랐다. 밤 10시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는데 잘 곳을 구하지 못했다. 성당은 멀고 교회는 잠들어 있었다. 두 아빠는 짊어진 십자가를 모텔로 모시는 게 탐탁지 않은 듯했지만, 신의 노여움은 다 내가 받겠다고 우기며 무작정 모텔을 잡았다.

그 이후 이야기는 다 알려진 대로다. 7월9일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나는 하루 더 머물며 두 아빠와 누나 이야기를 <한겨레21>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 순간부터 함께 걷겠다고, 함께 먹겠다고, 함께 자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연락했다. 나는 순례단의 ‘로드매니저’가 됐다. 동행취재는 38일간으로 연장됐다.

고비도 있었다. 7월28일 순례단이 진도 팽목항에 도착했을 때 <한겨레21>은 동행취재를 중단하려 했다. 두 아빠가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과,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 의미가 다르다고 나는 판단했다.

길 위에서 처음으로 희망을 품었다

서울로 돌아왔는데 두 아빠와 누나가 ‘정 사장님’을 계속 찾았다. ‘정 사장님’은 내 별명이다. 내가 기사를 써야 한다며 순례단에서 빠지니까 동행자들이 “기자 말고 <한겨레> 사장 시켜줄 테니 함께 걷자”고 붙잡았다. 난감했다. <한겨레21> 박현정 기자와 이정연 기자가 로드매니저를 자청했다. 순례단을 대신 맡아 전남과 전북을 가로질렀다.

길 위에서 나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 새벽 5시, 해 뜨기 직전 깜깜한 어둠 속에서 새 동행자를 매일 만나는 일은 설렘 그 자체였다. 함께 걸으려고 전국에서 몰려든 동행자들은 묵상하듯 순례했다.

각 지역 시민들은 세끼 식사와 간식거리를 풍성하게 내놓았다. 그 먹을거리를 남기지 않도록 골고루 나눠주는 게 내 몫이었다. “살 빼려고 도보순례 왔다가 살쪄서 돌아간다”고들 우스갯소리 했다. 영화 <명량>을 보며 나는 그들을 떠올렸다. 작은 나룻배를 탄 민초들이 판옥선에 갈고리를 걸어 죽을 힘으로 끌어당기는 모습, 그래서 결국 회오리에서 이순신 장군을 구출하는 장면 말이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에 희망을 품었다.

3.

2014년 12월 단원고 창현 아빠 이남석씨, 엄마 최순화씨와 5박6일간 일본 도쿄와 오사카를 다녀왔다. 세월호 유가족은 짧게는 3년, 길게는 29년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켜온 일본 참사 유가족들과 손을 맞잡았다.

이 일본 방문은 내가 제안했다. 2007년 12월 충남 태안에서 허베이스피리트호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했을 때 나는 비슷한 사고를 겪은 일본과 프랑스, 스페인 피해자들을 취재했다. 그때 태안 사고 피해자가 함께 왔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세월호 특별법이 힘겹게 국회의 문턱을 통과했으니 세월호 유가족이 용기와 지혜를 얻어 진실 규명에 나서길 바랐다. 다행히 그랬다. 창현 엄마는 “10년이 넘도록 재발 방지를 위해 싸우는 일본 유가족이 존경스럽고, 나의 앞날을 보는 듯했다”고 말했다. 나는 여기까지가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2015년 3월 새 편집장이 왔다. 안수찬 편집장은 2015년에는 세월호의 진실에 한발 다가갔으면 한다고 했다. 사건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언론의 책무라고 했다. 나도 동의하지만, 그 책무를 맡는 기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2014년 내내 세월호 선원과 청해진해운 임직원의 재판을 지켜봤다. 구조 실패 책임을 캐묻는 국회 국정조사 현장도 취재했다. 뻔뻔한 거짓말과 모르쇠 변명을 보며 속이 부글부글 들끓고 메스꺼움이 올라왔다. 진실의 조각을 건져올리려면 그 거짓말과 변명을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그래야 허점이 보일 것이다. 그 험난한 작업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참으로 무모한 도전, 세월호 탐사보도

<한겨레21>은 세월호 참사 이후 지난 2년간 세월호 이야기로 모두 9번의 표지를 만들었다. 최우성 전 <한겨레21> 편집장이 세월호 참사 100일째인 2014년 7월24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세월호 특별호’를 나눠주고 있다. 박승화 기자

그런데 왜 결국, 나는 뛰어들었을까. 무지했기 때문이다. 첫째, 힘들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힘들지 몰랐다. 둘째, 내 능력이 부족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형편없을지 몰랐다. 셋째, 6개월이면 끝날 것이라 예상했는데 1년이나 걸렸다.

세월호 프로젝트는 애초 <한겨레21>이 단독으로 기획·진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에서 생산한 자료를 입수해보니 그 분량이 상상을 초월했다. 나 혼자 다 볼 수는 없고, <한겨레21> 인력이 부족해 다른 기자가 힘을 보탤 수도 없었다.

수만 쪽의 자료를 부둥켜안은 채 어쩔 줄 모를 때 ‘진실의 힘’이 손을 내밀었다(60~62쪽 참조). <한겨레21>에 세월호 탐사보도 기사를 쓰면서 진실의 힘과 함께 자료를 분석해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프로젝트도 병행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4.

<한겨레21>과 진실의 힘을 오가며 밤낮없이 일했다. 일주일에 2~3일밖에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남편의 인내는 한계에 다다르고 안수찬 편집장은 냄새가 난다고 놀렸다. 그러나 일은 계획만큼 빨리 진행되지 않았다. 기사와 책을 쓰고 다른 저자들의 초고도 수정해야 하는데 능력도, 시간도 부족했다.

처음 계획과 달리 다른 저자의 초고 수정은 진실의 힘 조용환·송소연 이사에게 넘겼다. 세월호 탐사보도 2부와 3부를 겨우 끝내고 책 쓰기에 집중하는데 이번에는 글쓰기가 어려웠다. 문장마다 출처를 밝히는 주석 작업은 글 쓰는 흐름을 방해하고 집중력을 떨어뜨렸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은 긴데 결과물은 보잘것없었다.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은 나날이었다.

2016년 1월 나는 집에서 목놓아 몇 시간을 울었다. 내 무능함을 한탄하고 그런 내 손에 세월호 기록이 들려 있어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다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49분, 다섯 살 아이 권○○는 세월호 4층 키즈룸에서 오빠와 놀고 있었다. 갑자기 아수라장이 된 배 안에서 부모와 떨어져 울고 있는 ‘애기’를 본 단원고 학생들은 구명조끼를 입혀주고 안아서 달랬다. 점점 기울어지는 컴컴한 배 안에서 자기들도 무서워 울면서 아이를 보듬었다. “울지 마, 괜찮아.” 아이를 잃고 애타 있을 부모를 찾기 위해 소리도 질렀다. “애기, 여기 있어요.”

10시19분, 뒤집어지는 세월호 우현 난간에서 승객 10여 명이 솟구쳐나왔다. 한 남학생이 큰소리로 외쳤다. “애기요, 애기!” 배 안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자 학생들과 승객들이 손을 모아 난간 밖으로 아이를 밀어올려 보낸 것이다. 아이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희미한 손전등 모여 모여 세월호 환하게 비추리

10년 뒤 별이 된 아이들만큼 자란 권○○ 어린이가 ‘그날의 진실’을 알고 싶다고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만 쪽의 자료를 갖고 있으면서도 왜 그날의 진실을 알지 못했느냐고 원망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월호의 진실은 오리무중이지만 나는 다시 짙은 안개 속을 헤매보기로 했다. 그렇게 헤매는 것이 이 안개를 헤쳐나갈 유일한 방법이라 믿기 때문이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은 미완성의 발자취이자 작은 손전등에 지나지 않는다. 최선을 다했지만, 이 책만으로는 새로운 손전등을 하나 더 보태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희미한 불빛에 어렴풋이 보이는 모습만으로는 진실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수십 개, 수백 개의 손전등으로 배 전체를 환하게, 또렷하게 비출 수 있다면, 그때는 우리가 본 것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손전등을 켜려는 사람들을 나는 기다린다.

정은주 <한겨레> 기자 ejung@hani.co.kr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는 ‘진실의 힘’ 응원하기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판사·보호소년 함께 걸은 '티격태격 9일'

한겨레 | 입력 2016.05.01. 23:36

[한겨레]치유의 ‘2인3각 도보여행’

부산가정법원 멘토링 프로그램
정영태 판사 9번째 주자로 참여

제주 도착부터 교통카드 탓 허둥
“서운하다” “힘들다” 투덜대다가도
하루 6시간 걸으며 마음 속 얘기
함께 길 잃고 길 찾는 소통여행

지난 4월18일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용눈이오름’(해발 247.8m). 부산에서 온 두 사람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말없이 오름 능선을 걸었다. 한 번씩 앞선 사람이 뒷사람이 잘 따라오는지 힐끗힐끗 쳐다봤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든 30년 된 부부가 여행 도중 다투고 섭섭한 마음에 말없이 걷는 모습과 닮았다.

길수(가명·뒤쪽 검은색 옷)가 정영태 부산가정법원 판사와 제주 올레길을 걷는 도중 돌을 던지며 장난을 치고 있다.  정영태 판사 제공
길수(가명·뒤쪽 검은색 옷)가 정영태 부산가정법원 판사와 제주 올레길을 걷는 도중 돌을 던지며 장난을 치고 있다. 정영태 판사 제공

앞서 걷는 사람은 40대 현직 판사고 뒤따라가는 사람은 한순간의 일탈행위로 법원의 보호처분을 받고 있는 ‘위기의 고교 1학년’이다. 부자지간도 아닌 두 사람을 제주 여행의 동반자로 묶은 것은 ‘2인3각 도보여행’ 프로그램이다.

2인3각 도보여행은 두 사람이 각자의 다리 중 한쪽을 끈으로 묶고 함께 달려가는 2인3각 경기처럼, 멘토인 성인과 멘티인 일탈 또는 학업중단위기, 학교폭력 피해자 등의 청소년이 8박9일 일정으로 도보여행을 다녀오는 것이다. 지난해 7월 천종호 부산가정법원 부장판사가 제안했다. 프랑스에서도 ‘쇠유’란 단체가 비행청소년들을 프랑스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낯선 어른과 함께 석 달 동안 2000㎞를 걷게 한 뒤, 여행을 마치면 처벌 대신 귀가조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부산의 사단법인 ‘만사소년’이 2인3각 도보여행을 주관하고 기업체와 독지가 등이 경비를 후원한다. 일정을 8박9일로 정한 이유는 고비를 만날 때 포기하지 않고 견뎌내는 훈련을 하는 데에 있다. 일정이 너무 짧으면 단순 관광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2인3각 도보여행에서 가장 힘든 점은 멘토 구하기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직장인들이 8박9일 일정을 소화하기는 힘들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짝을 이뤄 8박9일 도보여행을 다녀온 1기 여덟 팀의 멘토는 전업주부와 방학을 맞은 교사, 대학생 등이었다.

2기 첫 주자는 정영태(45) 부산가정법원 판사와 부산가정법원의 보호소년 김길수(가명·16·고1)군이었다. 정 판사는 천 부장판사가 “멘토 구하기가 힘들다. 멘토가 돼 달라”고 하자 즉석에서 멘토가 됐다. 10년 이상 근무한 판사들 가운데 여섯 달 동안 출근하지 않고 미리 정한 연구주제와 관련해 논문을 써내는 연구법관이어서 가능했다.

“내가 잘할 수 있을 것인지가 걱정이 돼서 잠을 설쳤습니다.”

정 판사는 총선 사전투표를 하고 지난 11일 오후 4시께 부산 김해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길수와 함께 제주로 향했다. 제주도에 도착하면서부터 좌충우돌이었다. 버스를 탔는데 지급받은 교통카드에 금액이 충전돼 있지 않았다. 버스기사의 배려로 호주머니에 있던 1000원만 냈지만 시작부터 어긋나 정 판사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길수한테 맛있는 돈가스를 사주기 위해 미리 알아봐둔 식당으로 갔으나 공사 중이라 문이 닫혀 있었다.

셋째 날엔 올레길을 걷다가 길을 잃었다. 아침 8시30분부터 제주시 한경면 금등리에서 수월봉을 목표로 걷기 시작했는데 휴대전화 앱이 말썽을 부려 당산봉에서 헤매기 시작했다. 길수가 “살면서 오늘이 제일 힘들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2시간가량 헤매고 오후 1시께 식당에 도착했다. 정 판사가 “잘 버텨줘서 고맙다”고 말하자 길수가 “우린 2인3각이잖아요”라며 씩 웃었다.

“길수가 애벌레를 무서워했어요. 일탈 청소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길 위에서 길수는 영락없는 10대였다.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채소는 입에 대지 않았고 해변에서 죽은 새를 보자 묻어주기도 했다. 길수는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어갔다. 올레길과 해변을 걸으면서 길수는 좋아하는 축구와 여자친구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은 올레길을 걷는 동안 여행자들 사이에서 흔히 벌어지는 갈등도 겪었다. 길수는 하루 평균 15~20㎞씩 걷는 것이 힘들어 투덜거렸다. 길수는 걷는 동안 담배를 피우지 못해 금단 증세로 힘들어했다. 정 판사는 길수가 자신이 사준 모자를 쓰지 않고 여행 도중 산 모자를 쓴 것이 서운했다. 2인3각 프로그램을 후원하는 자원봉사자가 길수가 좋아하는 회를 사줬는데 잘 먹지 않는 것을 보면서 정 판사는 속이 상했다. 둘의 갈등은 여행 6~8일차에 최고조로 올랐다. 거센 빗줄기와 강풍을 맞으며 강행군을 한 탓에 몸과 마음이 더 힘들었다. 둘은 제주시 구좌읍 비자림 등에서는 30여m 떨어진 채로 말없이 걷기만 했다.

갈등 뒤에 하나가 되는 여행의 법칙은 틀리지 않았다. 여행 막바지에 길수는 여행 첫날 정 판사한테 받았으나 쓰지 않던 손수건을 보여주며 “잘 쓸게요”라며 젤리를 줬다. 순간 정 판사의 마음도 풀렸다. 둘은 우도에서 낄낄대며 사진을 찍고 제주시로 돌아가는 버스와 숙소인 게스트하우스 등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길수는 “나도 돈을 많이 벌면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말했다.

“소년 사건의 70%는 부모한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길수한테 즐거운 추억을 주고 싶었어요. 길수가 앞으로 살면서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이번 여행을 떠올리며 잘 이겨냈으면 합니다.”

둘은 지난 19일 8박9일의 일정을 마치고 부산에 도착했다. 이날 길수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면서 한 후원자가 여행을 떠날 때 준 용돈으로 산 볼펜을 정 판사한테 건넸다. 길수는 청소년 보호기관인 쉼터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정 판사는 페이스북에 가입했다. 둘은 페이스북 친구가 됐다.

부산/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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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그것이 알고 싶다', 세월호·국정원 연관 가능성 제기

16일 방송서 "국정원, 납득할 수 있는 설명 해야"연합뉴스 | 입력 2016.04.17. 17:17

16일 방송서 "국정원, 납득할 수 있는 설명 해야"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SBS TV 시사고발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가 세월호 관리와 운영에 국가정보원이 연관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세월호 침몰사고 2주기를 맞은 지난 16일 밤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세타(Θ)의 경고, 경고! 세월호와 205호 그리고 비밀문서' 편을 통해서다. 205호는 선박 회사들이 인천 연안부두에 있는 국정원 분실을 칭하는 단어다.

프로그램은 먼저 사고 해역에서 2014년 6월 인양돼 복원된 노트북 파일과 세월호 기관사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 등을 제시하면서 "뒤늦게 세상에 공개된 문서들은 세월호와 국정원 관계가 일반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말해준다"고 밝혔다.

세월호 직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노트북의 한글 파일 '국정원 지적사항.hwp'에는 세월호 화장실 비품 보충, 직원 휴가 계획 등이 기록돼 있었다.

프로그램은 이어 세월호 운항규정 항목에 첨부된 해상사고 보고 계통도도 제시하면서 "세월호는 사고시 국정원에 가장 먼저 보고해야 하는 배, 이른바 국가보호 선박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목포에서 해경 조사를 받던 세월호 기관사 손모 씨가 아내로 보이는 인물에게 보낸 메시지에도 "오후 또 국정원 취조가 있을 텐데"라는 내용이 포함됐다고 프로그램은 전했다.

이날 방송에서는 사고 직후 청와대 위기관리상황실이 구조 인원수 보고와 현장 영상 전송을 해경본청에 계속 주문했고, 해경본청은 이를 구조 현장에 그대로 전달했음이 통화 녹취를 통해 공개됐다.

MC 김상중은 이에 "상황을 수시로 파악해 보고하는 것이 그들 업무이지만, 결과적으로 그 통화가 이뤄진 시점이 구조에 총력을 다했을 시간이라는 점에 아쉬움이 크다"면서 "문제가 있다면 해경 수뇌부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세월호 침몰 5분 전, 청와대 측이 'VIP(대통령) 메시지'라며 "단 한 명도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 여객선 내 객실 엔진실 포함해서 철저히 확인해서 누락되는 인원이 없도록 하라"고 해경 본청에 전하는 내용의 녹취도 방송에 등장했다.

김상중은 "그 어떤 의혹에도 자유롭고 해명해야 할 의무마저 저버릴 수 있는 국가기관은 없다"라면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국정원은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그것이 알고 싶다'는 전국 시청률 7.8%(닐슨코리아)를 기록, MBC TV '마이 리틀 텔레비전'(6.3%)과 KBS 2TV '배틀N트립'(4.5%) 등 타 방송사 예능 프로그램을 누르고 1위를 기록했다. 온라인에서도 다음날까지 방송 내용이 계속 회자하고 있다.

aira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영화 ‘내부자들’을 불편해 하는 어떤 시각들에 대하여

지난 1월 7일 한국영화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보태졌다. 영화 <내부자들>이 ‘디 오리지널’이라는 부제를 단 확장판의 동원 관객수를 합쳐 역대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것이다. 기존의 청불 영화 최고 흥행작은 2001년의 <친구>였으니 무려 15년 만의 기록 경신이다. 관객을 성인으로만 제한하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로서 이 정도로 흥행했다는 것은, 이를테면 12세 이상 관람가나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의 천만 관객 동원에 맞먹는 흥행세라고 할 수 있다.

영화 그 자체에 대한 논평 말고도, 이를테면 이런 흥행 현상에 대해서도 평론가는 분석해야 한다. 무엇이 이토록 많은 관객들이 <내부자들>을 보게 하였는가. 단지 영화의 힘 때문이라고만 단순화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집단 심리적 기제가 <내부자들>의 흥행을 견인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나는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과 지난 8일 대담을 했다. 그는 영화가 처음 만들어져 내부 시사를 가진 결과, “400만 명 이상은 들겠구나”라는 예상이 나왔다고 전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두 배 이상의 흥행 성적을 낸 것이니, 그들의 예측이 빗나간 지점, 그러니까 400만과 820만 명 사이의 지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민호 감독은 이 영화를 ‘정의에 대한 영화’라고 스스로 규정했다. 그 규정이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정의가 구현되는 상황을 목격하고 싶은 관객들의 열망이 영화의 스타 캐스팅과 감독의 준수한 연출이 만들어낼 수 있는 흥행력 이상의 플러스 알파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나는 본다.

감독과의 대담에서 우리는 이 영화에 대한 ‘비호감’ 평론들을 화두로 삼았다. 영화가 처음 나왔을 당시, 적지 않은 평론가들이 <내부자들>을 호의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이동진 평론가는 “적나라하고 자극적인 효과 자체에 사로잡혀 있다”고 평했으며 씨네 21의 김현수 기자는 “내용이 부실하니 자랑할 건 배우들 뿐”이라고 혹평했다. 강유정 평론가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환상이 지나치면 환각이 된다”고 썼다.

요컨대, 영화 <내부자들>은 자극적이고 지나치게 적나라하거나 선정적이며, 영화의 복수극도 단순한 대리 만족 이상의 것을 주지 않는다는 의견들이다. 영화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 이런 의견이 틀렸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내부자들>이 “한국사회 리더 그룹을 모두 파렴치한으로 만든 영화”라고 일축한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불쾌감과, 평단 일각의 불쾌감 사이에 놓인 아주 미묘한 접점을 감지하게 된다.

그것을 최대한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영화를 ‘프로파간다’, 즉 대중 선동의 매체로 보는 관점이다. 역사적으로 영화는 실제로 대중 선동의 매체로 기능했다. 이른바 ‘몽타주 이론’으로 유명한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과 같은 소비에트 감독은 사회주의 혁명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이를테면 <전함 포템킨>(1925) 같은 작품들을 찍었다. 레니 르펜슈탈의 <의지의 승리>(1934) 같은 다큐멘터리는 충실한 나치 선동 영화로 기능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대종상에서 반공영화상을 받으면 외화 수입권을 주는 방식으로 영화를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의 도구로 활용했다.

이런 영화의 역사를 반추해보면, 영화가 대중의 의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며 선동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고 보는 시각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이 시각에서 자칫 간과될 수 있는 것은 영화가 또 한편으로는 창작자가 가진 시대 의식의 투영물이며, 따라서 현실의 투영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는 ‘현실을 비추는 볼록 거울’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현실이 추하거나 잔혹할 때 영화는 그것을 은유하는 표상을 만들어낸다. <내부자들>의 이른바 ‘성기 동맹’ 장면과 손을 자르는 장면은, 감독 우민호가 감지하는 대한민국 사회의 공기를 영화적으로 표상화한 것이다. 그것을 단순히 자극적인 효과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자극’으로 치면 영화 <7번방의 선물>이 갑이다. 그 영화는 관객들에게 감정이 남아 있음을 확인시키기 위해 눈물샘을 쥐어짜는 다양한 자극 기제를 총동원했다. 하지만 그 자극으로 얻은 눈물은 파블로프의 개가 흘린 침 분비물과 다름없었다고 나는 평가한다.

<내부자들>의 정의 구현은 어쩔 수 없이 판타지다. 누차 강조하는바, 대중영화는 관객에게 판타지를 선사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갇혀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판타지가 현실 인식을 강화하는 것이냐, 아니면 강유정 평론가의 우려대로 그저 환각제에 머무는 것이냐이다. 영화 <암살>의 친일파 염석진 처단은 명백한 판타지다. 그러나 대중은 그 영화를 통해 친일파가 실제로는 청산되지 못했다는 현실을 슬쩍 상기할 수도 있다.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내부자들>에서 안상구와 우장훈의 연합작전으로 기득권 카르텔이 붕괴되는 것 역시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은 명백한 판타지다. 그러나 적어도 파렴치한 협잡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현실을 씁쓸하게 상기하며 극장문을 나서는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역시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우민호 감독과의 대담에 참석한 한 관객은 이렇게 말했다. “영화를 보면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신문과 뉴스에서 보았던 것들이었습니다.”

“어차피 대중은 개, 돼지입니다.”라고 말하는 영화 속의 이강희 논설주간은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와중에 한쪽 손이 잘린 상태로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오른손이 없으면 왼손으로 쓰면 되지요.” 결코 쉽게 붕괴되지 않을 철옹성 같은 지배 시스템이 극장문을 나서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고,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려달라고 감독은 관객들에게 슬쩍, 그러나 인상적인 방식으로 부탁한다. 따지고 보면, 현실을 가리는 일등 공신은 이미 정치권력과 자본에 의해 단단히 장악된 언론 매체이다. 따라서 우리에겐 이런 영화가 더 많이 필요하다.

[팩트체크] '선거운동 소음' 효과와 역효과, 알아보니…

[JTBC] 입력 2016-04-04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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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거리에는 요즘 굉장히 흥겨운 소리라고 해야 하나요? 후보들은 흥겨울 수 있는데 듣는 사람들은 좀 괴로울 때도 사실 많이 있습니다. 정말 선거철이 됐구나 느끼게 되죠.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수단이기는 하겠죠, 후보들한테는. 그런데 듣는 분들한테는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소음일 수가 있는데 특히 소음 기준이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선거유세에는 왜 예외냐, 이렇게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오늘(4일) 팩트체크에서 이 문제를 좀 준비해 봤습니다.

김필규 기자, 선거유세에서 나오는 소리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 이게 참 궁금합니다. 저는 이렇게 길가에 지나가다 막 이렇게 떠들면 정말 찍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데 다른 분들도 그런 건지 좀 보죠.

 
[기자]

지난달 31일부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됐죠? 첫날 경찰 112에 유세관련 소음 불만신고가 600건 가까이 접수됐는데, 인터넷 상에도 여러 종류의 불만이 적혔습니다.

'토요일에 늦잠 좀 자려는데 아침 7시부터 깨운다''나도 좀 간곡히 호소하는데 제발 조용히 해달라''누구든 소음 제일 적은 사람 뽑겠다'는 내용인데, '집회할 때는 까다롭게 소음규제 하면서 경찰은 뭐하냐' 이런 원망 섞인 내용도 있었습니다.

[앵커]

이게 정말 불만들이 굉장히 좀 크시군요, 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 틀어야 하는 후보들의 사정은 뭔지 이따가 좀 제가 따로 좀 질문하도록 하고 요즘 집회할 때는 왜 소음규제가 꽤 강화되지 않았습니까?

[기자]

2년 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 낮 집회에선 75㏈, 야간 집회에선 65㏈ 이상의 소음을 낼 수 없게 됐습니다.

이 정도면 사람이 많아 북적대는 카페 수준 소음이라 예전같이 스피커로 빵빵 소리를 낼 수 없게 된 건데, 공직선거법 상으로도 이와 관련한 기준이 있긴 있습니다.

'야간연설 등의 제한' 규정에 따라 스피커 이용한 연설은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할 수 있게 돼 있는데, 시간 규정만 있을 뿐 소리 크기 규정은 없습니다.

그러니 보통 거리 유세장에선 100㏈ 이상 소음이 발생하고 심각하면 이런 일도 생기는데, 지난 주 JTBC 프로그램 썰전의 한 장면 잠시 보시죠.

[유정현/전 국회의원(썰전 3월 31일) : 마이크나 스피커 용량이 굉장히 중요해요. 삼거리나 사거리 같은 데서 당끼리 합의가 안 될 경우에는 . 같은 시간에, 동시에 유세를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때는 스피커 (소리)가 센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앵커]

그냥 흔히 하는 말대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그런 상황이 되는 거군요. 후보들끼리 이렇게 경쟁이 붙었을 경우에 점점 소리가 시끄러워지면 왜 집시법상에 소음크기를 이렇게 규제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왜 안 됩니까?

[기자]

그렇게 생각해 볼 수가 있는데요. 집시법도 그렇고 공직선거법도 그렇고 관련법상 다 따져봐도 선거유세는 집회로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경찰 입장에서도 민원이 들어왔을 때 딱히 강제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민원인이 직접 가서 이렇게 자꾸 시끄럽게 굴면 안 찍겠다 경고하는 게 어쩌면 가장 효과적인 건데요. 그래도 매번 쉬운 방법은 아니겠죠. 게다가 또 선거법에 보면 휴대용 확성장치를 사용할 경우 앞뒤로 1시간 더 유세를 할 수 있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통 들고 다니는 확성기 정도는 좀 늦게까지 써도 괜찮다고 해서 만들어진 규정인데 최근에는 휴대용 스피커 성능이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그러면서 더 오랜 시간 소음공해에 시달리게 됐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앵커]

다 좋은데 시계그림은 헷갈리게 만들어놨네요.

[기자]

초등학교 시간표를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앵커]

오전 7시가 오전 4시처럼 보이네요. 아무튼 알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튼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후보들이 이 방법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수하는 이유 이거는 조금 아까 제가 질문한다고 했잖아요. 왜 그런 거죠?

[기자]

배경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겠는데요. 1990년대까지만 해도 후보들이 한 데 모여 세 과시를 하며 합동연설회를 했는데, 돈 선거 조장한다고 해서 2000년대 초반 폐지됐습니다.

그래도 유권자와 후보자와 만남 자체를 끊을 수는 없다는 취지로 이런 방식의 거리유세가 허용 된 건데, 하지만 왜 이처럼 개사한 노래를 크게 틀고 운동원이 단체로 춤을 추는 방식으로 자리잡았을까, 전문가들 분석은 이렇습니다.

[김일환 교수/성균관대 법학과 : 다른 나라는 이렇게 선거운동을 안 하거든요. 우리나라처럼 정해진 기간에만 선거운동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나라는 사전 선거운동 및 선거운동 기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격렬하게 선거운동을 할 수밖에 없는 점이 있고. 선거법은 거꾸로 되어 있어요.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예외적으로 허용해 주고 있기 때문에.]

[앵커]

선거운동이 기본적으로 기간이 짧게 정해져 있고 그 사이에 집중적으로 자기 자신을 홍보해야만 되기 때문에 결국은 이런 식으로 흘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지적인가 보죠?

[기자]

예, 사실 선관위에도 선거철만 되면 소음 관련한 민원이 많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계속 고민을 하고 있지만 결국 그렇지 않아도 후보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표를 던지는 '깜깜이 선거'라는 비판이 있는 상황에서 이마저 규제하기는 힘들다는 입장이고, 이런 운동 방법에 대한 최종적 판단은 유권자 몫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앵커]

그러면 뭐 확성기로 크게 떠든다고 해서 깜깜이가 밝아지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보면 유세방식이 이런 식의 유세방식이 실제로 표심을 흔드느냐? 다시 말하면 이것이 효과적이냐, 아니면 역효과를 내느냐 하는 부분은 이건 따로 연구를 해 봐야 될 문제이기는 한 것 같습니다.

[기자]

네, 그렇습니다.

[앵커]

아직 그에 대한 명확한 연구결과는 나온 게 없죠?

[기자]

네. 아주 명확하게 그 부분은 없고요. 전문가들에게 이제 물어봤더니 이런 이야기는 있었습니다.

현역 의원의 경우라면 지역에 이제 보통 선거사무실 운영하면서 현수막이라도 내걸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나머지는 이런 식의 유세방법 말고는 내가 선거에 나왔다는 걸 알리기 힘들다는 그런 이야기였는데요.

하지만 2010년에 선관위에서 가장 불편을 준 선거운동이 뭐였는지 유권자들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게 있는데 무분별한 문자공세 때문에 불편했다라는 응답도 있었지만 지금 보시는 것처럼 유세차량의 소음공해가 62%로 압도적인 1위였습니다.

우리 선거제도상 고칠 점은 없는지 또 시민들에게 불편주지 않으면서 제대로 유권자와 접촉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앵커]

팩트체크 김필규 기자였습니다.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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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그날의 기록’ 20일만에 7천부

등록 :2016-03-31 19:04수정 :2016-03-3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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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그날의 기록>
<세월호, 그날의 기록>
진실규명 열망이 ‘백서’ 구매로
출판 불황 속 이례적 주문 쇄도
‘시민이 기록한 세월호 백서’인 <세월호, 그날의 기록>(진실의 힘)이 발간 20일 만에 3쇄를 찍었다. 사상 최악이라는 출판 불황 속에서 발간된 700쪽짜리 묵직한 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반응은 이례적이다.

책을 펴낸 재단법인 ‘진실의 힘’ 송소연 이사는 31일 “지난 10일 첫 쇄를 찍은 뒤 보름 만에 2쇄, 그 뒤 닷새 만인 30일 다시 3쇄, 총 7000부를 찍었다.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 인터넷 서점과 대형 서점은 물론이고 최근엔 지방 서점과 작은 서점 쪽에서도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은 주간지 <한겨레21>이 입수한 15만장 가까운 수사 및 재판기록, 국정조사특위 자료, 3테라바이트(TB)가 넘는 음성·영상 자료를 기록팀이 10개월 동안 분석해 재구성한 것이다.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사건을 취재해온 정은주 <한겨레21> 기자, 박다영·박현진씨, 박수빈 변호사가 분석과 집필에 참여했고 정 기자는 이 취재로 한국기자상과 민주언론상을 받았다.

책을 보면, 극단의 공포 속에서도 약자를 배려하는 승객들의 모습과 구멍 뚫린 한국 사회의 민낯이 대비되어 드러난다.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49분 배가 기울면서 10시30분 침몰하기까지 101분의 상황을 희생자, 생존자들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재현한 것이 핵심이다. 구조된 인원은 총 172명, 이 중 헬기 3대가 승객을 한명씩 끌어올려 35명을 옮겼고 123정이 선원 17명을 포함해 79명을 태웠다. 10시 전후 도착한 어업지도선과 어선이 끝까지 현장에 남아 승객 58명을 구조했다. 304명이 희생됐다.

송 이사는 “독자들의 반응은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이 유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바람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 ‘백서’에 해당하는 이 책이 참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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