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바바 완전 해부 2편] 야후를 걷어찬 불굴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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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차이나 이주호 기자]

━ 인터넷과 첫만남, 마윈의 인생을 바꾼 분기점

━ 중국황예 실패, 알리바바 탄생의 밑거름이 되다 

 

창업의 길을 선택한 마윈과 하이보(海博) 번역소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인터넷, 마윈은 그 속에서 무한한 기회를 발견하게 된다.

 

마윈, 인터넷과 운명적인 만남

1995년, 항저우시가 항저우와 안후이(安徽)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했다. 당시 미국의 한 투자회사가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투자 의사를 밝혔고, 항저우시는 투자 제안을 받아드렸다. 하지만 1년 후, 투자를 약속했던 미국 회사가 돌연 입장을 바꾸어 투자하기를 미루고 있었다. 급히 자금이 필요했던 항저우시는 서둘러 미국 투자회사를 찾아가 설득할 적임자를 찾아 나섰고, 마윈이 적임자로 지목됐다.

 

미국 출장길에 오른 마윈, 막중한 책임을 안고 미국에 갔지만, 미국 물정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그는 미국 투자회사의 농간에 놀아나게 되고 급기야 위험에 빠지게 된다.

 

미국 투자회사는 마윈에게 별장과 고급 자동차 제공하며 마윈을 환대하는 시늉을 했고, 그의 관심을 항저우 고속도로가 아닌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마윈을 라스베가스까지 데리고 갔다. 라스베가스에서 정신없이 놀던 마윈, 순간 정신을 차리자 항저우 건설 현장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고, 후회하며 투자회사 책임자를 찾아갔지만 큰 소득이 없었다. 오히려 미국 투자회사는 되려 마윈을 납치 감금하며 신변을 위협했다.

 

다행히 현장을 빠져나와 서둘러 귀국길에 오른 마윈, 하지만 단돈 25센트 밖에 없어 비행기 표를 구할 수 없었다. 마윈은 마지막 모험으로 25센트를 슬롯머신에 넣었고, 천운으로 잭팟이 터져 600달러를 손에 넣게 되었다. 집에 갈 돈을 마련해 안심하고 있을 때 마윈의 머릿속에 이전에 같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빌(Bill) 교수가 마윈에게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사위가 시애틀에서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한 기억이 떠올랐다. 인터넷에 대해 궁금했던 마윈은 빌의 사위 샘(Sam)을 만나기 위해 시애틀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다행히도 샘을 만난 마윈은 그를 따라 작업실에 들어갔고 작은 공간에 5대의 컴퓨터가 놓여 있는 모습을 본 마윈은 알지 못하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마윈은 맨 먼저 ‘Beer’를 검색했다. 일본, 미국, 영국 수많은 국가의 맥주가 소개되는 가운데 중국 맥주에 대한 소개가 없는 보고 다시 ‘China’라고 검색한 결과는 ‘No Date’. 전세계 인구의 약 1/6이 살고 있는 중국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것에 충격을 느낀 마윈은 하이보 번역사가 전세계에 중국을 알리는 역할을 해야겠다 마음 먹었다.

 

마윈은 샘에게 하이보번역소 웹사이트와 이메일을 만들어 달라 요청했고, 그의 열정을 높게 산 샘과 친구들은 웹사이트와 이메일을 만들어 주었다. 마윈은 전세계에 하이보 번역소를 알릴 수 있다는 점에 매우 흥분했고, VBN(visitor-based networking, 방문자 기반 네트워킹) 업체에 “우리가 중국에서 고객과 보급을 담당하겠다. 당신들은 기술적인 부분을 책임져 달라”고 요청했고, VBN업체는 그 요구를 받아들여 합작이 성사됐다. 


베이징 실패, 항저우 원점

1995년 4월 마윈은 시애틀에서 돌아온 후, 자신과 같이 동고동락했던 24명의 하이보번역소 직원들을 모아 만찬을 열었다. 마윈은 사람들에게 라스베가스부터 납치 사건, 잭팟 그리고 시애틀까지 자신의 미국 무용담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마윈은 미국에서 구매해 온 386 노트북을 사람들에게 공개한 후 “미국에서는 벌써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다. 중국에도 이러한 시대가 곧 올 것이다.”라고 말하며 인터넷 사업을 시작하자고 설득했다.

 

인터넷을 확신했던 마윈은 직원들도 자신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24명 중 1명만 빼고 모두 인터넷 사업을 반대했다. 한 동료는 “이 사업은 정부도 시작하지 않은 것인데 우리가 어떻게 시작하는가. 불가능한 이야기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한 사람, 마윈과 같이 교수로 있었던 허이빙(何一兵)이 마윈을 지지했고, 고민 끝에 마윈은 다시 창업하기로 결심했다.

중국황예 창업자 마윈과 허이빙

 

1995년 5월, 마윈은 하이보네트워크기술유한공사(海博网络技术有限公司)를 설립하고 중국에 첫 비즈니스 성격의 웹페이지인 중국황예(中国黄页, www.chinapages.com)를 오픈했다. 중국황예는 지금의 웹페이지 제작 사이트로, 기업 자료를 영어로 번역해 우편으로 미국 VBN에 전달하면, VBN은 웹페이지 제작 후 웹페이지를 프린트하여 중국으로 보내오는 비즈니스다.

 

마윈은 중국황예를 시작하면서 자신과 자신 부인이 8만 위안(한화 약 1,400만 원) 그리고 허이빙,송웨이싱(宋卫星)이 각각 1만 위안(한화 약 180만 원)을 투자해 총 10만 위안의 자본금을 모았다. 하지만 설비구매 및 초기 자금 지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본금이 6,000위안(한화 약 100만 원)도 남지 않게 되었고, 이러한 생활은 이후 달라지지 않았다. 

 

마윈은 중국황예을 알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는 지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구의 친구 그리고 모르는 사람의 사업장에 불시로 방문했고 밤늦은 전화도 불사했다. 마윈의 친구는 당시 마윈을 “학을 뗄 정도로 집요했다.”라고 말했다. 시장 반응이 없자 마윈은 무료체험 서비스를 제공했지만, 인터넷의 개념조차 몰랐던 당시 기업인들에게 마윈은 그저 사기꾼에 불과했다.

 

그 후 1995년 7월 항저우에 44k 인터넷이 설치되자 마윈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중국황예 시연회를 가졌다. 웹페이지 하나 띄우는데 30분, 마윈은 당시 30분이 3시간 같았다고 말할 정도로 간장의 연속이었다. 웹페이지가 완전히 오픈되자 마윈은 물론 기자, 사업자들까지 놀라며 마윈의 비즈니스를 칭찬했다. 이후 마윈은 사기꾼 딱지를 벗음과 동시에 중국황예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인민일보(人民日报)’,  ‘중국무역보(中国贸易报)’ 등 여러 미디어에서 마윈과 중국황예를 특집으로 다루었고, 업계에서도 중국황예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 마윈은 이러한 기세를 이어 IT 중심지라 불리는 베이징(北京)의 중관춘(中关村) 입성했고, 중국의 야후가 되자는 원대한 비전을 꿈꾸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베이징은 마윈과 중국황예에 냉정했다. 업계는 중국의 열악한 인터넷 환경이 중국황예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 평가하며 성공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고, 당시 베이징 보수파들은 중국황예의 웹페이지 해외 제작이 장기적인 측면에서 미래 네트워크 주도권을 해외에 내주는 서비스라 판단해 배척하기 시작했다. 마윈은 업계 모임과 정치인들의 모임에 참석하며 인터넷의 중요성과 곧 올 인터넷 시대에 대해 강조했지만, 정부는 이와 반대로 인터넷 산업은 아직 이르다며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인민일보, 야후 등 몇몇 업체에 웹페이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TV 프로그램에 마윈이 출연해 중국황예를 알리기 등 여러 노력했지만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고, 심지여 중국황예를 카피한 업체가 등장해 경쟁이 더 심화됐다.

 

1998년 추운 겨울 어느 날, 마윈은 동료들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 자신이 항저우로 돌아갈 계획이라 전하며, 직원들에게 야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했으니 가서 편하게 돈 벌고 편하게 일하라고 말했다. 직원들과 술로 이별의 아쉬움을 나눈 마윈,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난 다음에도 인터넷 사업을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인터넷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권토중래

야후의 창립 맴버인 제리 양(Jerry Yang)은 베이징에서 돌아온 마윈을 야후 차이나 COO(업무최고책임자)로 영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마윈과 제리 양은 마윈이 미국 출장 때 우연히 만난 사이로 마윈의 열정과 추진력을 유심히 본 제리 양은 야후가 꼭 데려와야 할 인재라고 생각했다. 베이징에서 실패를 맞본 마윈, 하지만 인터넷과 창업 둘 중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제리 양의 계속되는 제안을 거절하게 된다.

 

마윈은 항저우에서도 어떠한 사업을 새로 시작할지 계속 고민했다. 하지만 새로운 사업의 분야는 언제나 인터넷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전의 경험과 실패를 토대로 미래 중국에 어떠한 인터넷 산업이 발전하게 될지 매일매일 고민했다. 그리고 마윈은 다가오는 미래에 기업과 기업 간에 인터넷 거래를 하는 B2B 시대가 올 것이라 확신하고, 이를 기초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업 구상을 완료한 마윈은 이전 동료에게 연락해 그들은 한군데에 모으고, “하이보번역소부터 중국황예 그리고 베이징 시간은 각자 다르겠지만 우리는 참 긴 시간 힘듦을 나누고 기쁨을 함께하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지금 잠시 휴식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다시 일어나 전진할 것입니다.”라고 운을 띄우며 자신이 생각한 새로운 사업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마윈은 자신의 이전 사업을 돌아보며 “이전에는 기업자금을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쳤다. 이제는 우리의 여윳돈을 조금씩 모아 사업을 시작하자.”라고 말했고, 총 50만 위안(한화 약 9,000만 원)의 자본금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된다. 이것이 전세계 B2B 업계 1위인 알리바바의 첫걸음이다.

 

중국과 전세계 전자상거래 업계에 한 획을 그은 알리바바가 이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번역소부터 웹페이지 제작까지 먼 길을 돌아온듯 하지만 어찌 보면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을 밟았다. 중국 인터넷 업계에서 실패와 성공을 가장 먼저 맞본 마윈과 직원들의 본게임은 이제 시작이다.
(이미지 출처: 알리바바)

 

 이주호기자 joro2100@duduchi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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