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피터 프로젝트에 사용되는 주한미군의 분석장비. '탄저균'(ANTHRAX)을 분석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지난 22일 미 국방부 산하 병기 시험장에서 살아있는 탄저균을 미국내 실험실에 보낸 사실이 밝혀지면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살아있는 탄저균은 치사율 80%에 이르는 탄저병의 원인균인만큼 이만저만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미 국방부와 질병통제센터가 나서 살아있는 탄저균이 배송된 곳을 파악했다. 탄저균은 문제의 '더그웨이' 병기시험장이 있는 유타주에서 캘리포니아주와 텍사스, 위스콘신,테네시,뉴저지,뉴욕,매릴랜드,버지니아,델라웨어 등 9개 주에 보내졌다. 그리고 또 한 곳. 한국의 오산 미군기지였다. 활성화된 탄저균이 보내진 유일한 '외국'이었다.
◇주피터 프로젝트의 실험대상, 한국 미군은 왜 수많은 해외 주둔지 가운데 유독 한국에만 탄저균을 보냈을까? 바로 '주피터' 프로젝트 때문이다. 주피터 프로젝트는 '합동주한미군포털 및 통합위협인식'(Joint USFK Portal and Integrated Threat Recognition)'이라는 프로그램의 머릿글자(JUPITR)를 따서 부르는 말이다. 주피터 프로젝트는 한마디로 생화학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병원균이나 독성을 조기에 탐지하고 종류를 확인하며 관계기관과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주한미군의 전투력을 보호하기 위한 일련의 프로그램이다.
냉전해체 이후 미국은 비교적 싼 값에 대량살상이 가능한 생화학 무기가 적성국가나 테러세력들의손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극도로 우려해왔다.
이에 따라 지난 2009년 '생물학적 위협에 대비한 신전략'을 세워 생화학 공격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전략을 수행할 대표적인 곳으로 한국을 선택했다.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폭탄'을 끊임없이 만들고 있는 북한과 맞닿은데다 2만여명의 미군이 주둔해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중시전략'도 한국을 선택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2013년 주피터 프로젝트의 전모가 공개됐다. 생화학 감시포털을 구성하고 생화학 물질을 판별하는 장비를 도입하고 주한미군 기지 주변에 생화학 물질 감지기를 설치하는 한편 조기경보 체제를 갖추는 내용이었다.
주목할 점은 생화학 물질 분석 대목이다. 별다른 전문지식이 없는 군인들이 생화학 독성물질이나 병원균 샘플을 채취해 야전에서 단시간안에 종류를 알아내도록 하는 것이 핵심목표다. 과거처럼 소수의 전문인력이 샘플을 채취한 뒤 미국 본토로 보내 독성물질의 실체를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하려면 며칠이 걸리는데, 그 기간 동안 미군의 전투력은 상당부분 훼손될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막기 위해서다. 주피터 프로젝트에 따르면 독성물질 발견 4~6시간 내에 분석을 마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주한미군은 'JBAIDS' 등과 같은 분석장비를 도입했다. 이 장비가 설치된 곳은 용산과 오산 등 3곳이다.
특이하게도 미 국방부는 지난 2013년 이 장비를 소개하면서 주요분석 대상으로 탄저균과 보톡스 균을 들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이 장비의 사용법과 샘플 처리법 등을 교육하기 위해 생화학 전문가 그룹이 오산과 용산을 방문하기도 했다. 주피터 프로젝트의 계획서상으로는 총 3번에 걸쳐 한국방문 교육을 하도록 돼 있다. 2014년에 집중적인 테스트를 거쳐 올해안에 시연을 한다는 계획도 있다. 미군 당국이 한국에 탄저균을 보낸 시기와 공교롭게도 일치한다.
계획서로 판단할 때 미군 당국이 과거에도 탄저균을 주한미군에 지속적으로 보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미 국방부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고로 탄저균에 노출된 26명 가운데 무려 22명이 주한미군인 점을 감안한다면 주피터 프로젝트의 규모와 지속성을 어느 정도 추정해볼 수 있다.
주피터 프로젝트는 지금도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다. 미군 당국은 지난달 더그웨이 병기시험장에서 생화학 물질 센서 시험을 했다. 이 센서장치는 곧바로 평택 미군 기지로 보내져 시험평가에 들어간다. 경기도 평택의 캠프 험프리에 설치돼 센서종류별 장단점 등을 파악하게 된다.
신상철 전 민군합조단 민간조사위원(서프라이즈 대표)이 각종 천안함 의혹을 제기했다가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기소돼 재판을 받은지 5년이 다 돼간다.
2010년 5월 19일 김태영 당시 국방부 장관을 비롯해 김태호 국방부 중령 등 현직 장성과 장교들이 고소한지 19일로 만 5년이 됐다. 검찰은 그해 8월 27일 공소장을 법원에 접수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는 그 때부터 1년간 재판 준비(공판 준비기일)를 한 뒤 2011년 8월 22일 첫 증인 신문으로 본격적인 공판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형사36부 재판장만 5명 째(유상재-박순관-최규현-유남근-이흥권)이며, 검찰도 5번 째(정영학-최창호-이성규-이건령-최행관) 공판 주심 검사가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아직 증인 신문과 현장 검증 및 변론 절차가 완료되려면 올해를 넘길 가능성도 나온다. 여전히 신문하지 않은 증인만 해도 20명 가까이 남아있을 뿐 아니라 천안함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도 상당수 재판부에 제출되지 않았다. 대부분 변호인단이 오래 전부터 요구했으나 검찰이 국방부와 감사원 등의 거부로 제출하는 데 난색을 표해왔기 때문이다.
증인 신문의 경우 2011년 신 대표의 변호인단과 검찰이 합의한 ‘잠정’ 증인 수만 58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현재 47명의 증인신문을 마쳤으나 신문하지 않고 넘어가거나 뒤로 미뤄진 증인도 상당수에 달한다.
원태제 전 국방부 대변인(천안함 침몰 당시 역임).
이치열 기자 truth710@
제3의 부표 작업의 실체를 입증하기 위해 재판장이 이헌규 UDT동지회 간부를 증인으로 부르라고 제안한 것이 2011년 9월 19일이었다. 그러나 소재파악부터 출두요구까지 여러차례 미뤄오다가 오는 8일에 출석이 예정돼 있다. 증인 출석하기까지 4년 가까이가 걸린 것이다.
또한 천안함 함미 인양시기가 애초 2010년 4월 12일이었으나 갑자기 사흘 뒤로 미뤄진 이유와 그 사흘간 천안함과 작업 실상을 규명하기 위해 당시 작업을 지휘한 정성철 88수중개발 대표를 증인으로 불렀지만 그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정 대표는 2011년 11월 14일이 출석 예정일이었다. 정 대표 대신 당시 함께 천안함 함미 체인설치 작업을 한 권만식씨가 그로부터 두달 뒤 출석했으나 당시 상황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검찰측 증인인 원태제 전 국방부 대변인의 경우 검찰이 일방적으로 증인을 교체하기도 했다.
이 뿐 아니라 북한 어뢰의 공격이라는 천안함 침몰원인 설명의 핵심 증거인 ‘1번 어뢰’와 관련해서도 북한산이라는 설계도 원본에 대해 검찰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아직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피고 신상철 대표는 지난 2012년 12월 직장암 3기 판정을 받아 수술후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 재판이 사실상 ‘휴정’했다. 신 대표는 병원측으로부터 많이 나아졌다는 판단을 듣고 2013년 11월부터 다시 재판을 받고 있다.
신 대표는 18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예정됐던 증인들이 출석하지 못하니 재판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며 “핵심 증인의 출석 기피와 자료공개 거부에 따른 의문해소의 한계 때문에 재판의 진전이 이뤄지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고 밝혔다. 그는 “앞으로 더 핵심적인 증인이 더 나오게 할 수 있도록 변호인단과 상의해 재판부에 요청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으로 말미암아 북한 권력 내부에서 대대적인 조사와 특별 검열이 이뤄지고 있다고 정부 관계자가 15일 익명으로 말했다. 북한 소식에 정통한 이 관계자는 “이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재임 당시의 남북한 비밀 접촉 등을 기술한 것과 관련해 북한 당국이 대대적인 조사를 했다”며 “대남사업의 총수 격인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 비서, 그리고 원동연 제1부부장과 맹경일 부부장 등 통일전선부 소속 고위 인사들이 조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실무진들은 현재도 검열을 받고 있는 중”이라며 “책에 있는 내용과 비교해 실제 그런 일들이 있었는지를 조사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전 대통령은 지난 2월 재임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회고록 형태로 정리한 『대통령의 시간』을 발간했다. 이 전 대통령은 책에서 “북한이 … 정상회담을 하는 조건으로 우리 측이 옥수수 10만t, 쌀 40만t, 비료 30만t과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 1억 달러어치를 제공하고, 북 측의 국가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100억 달러를 우리 정부가 제공하는… ”(335페이지)이라고 썼다. 또 정상회담 추진 비사를 설명하면서 "임(태희) 장관을 불러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합의서를 써 준 적은 없습니다… 김양건이 그대로 가면 죽는다고 해서…’”라고 적었다. 또 “2011년 5월 중국을 방문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예정돼 있던 공연 관람을) 취소하고 평양으로 돌아갔다”며 “중국에 투자와 지원을 요청했으나 중국 측으로부터 원하는 답변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닌가”라고 썼다.
정부 당국자들은 이런 대목들이 북한 입장에서 한국에 지원을 구걸하거나, 김정일과 관련한 정보가 새어 나갔다고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전했다.
특히 북한 당국은 회고록 중 남북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 북한 측이 경제 지원을 요구한 일과 김정일 국방위원장(2011년 12월 사망)의 중국 방문 내용 부분 등을 문제 삼고 있다고 복수의 정부 소식통들이 전했다. 강도 높은 조사를 받은 뒤 김양건 비서는 의혹을 벗고 업무에 복귀했지만 상당수 인사들은 좌천 또는 숙청됐거나 혁명화 교육(사상 교육)을 받고 있다고도 전했다.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 시절 (김양건) 통전부장을 대행할 정도로 남북관계 업무를 총괄했던 원 제1부부장이 지금은 해외동포담당 부부장으로 좌천됐다”며 “해외동포 업무를 담당했던 맹경일 부부장은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숙청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통일전선부가 집중 조사 대상이 됨에 따라 대남 업무 상당 부분을 인민무력부 산하 정찰총국이 챙기고 있다고 한다. 정보 수집 업무를 담당하는 당국자는 “최근 통일전선부 업무 일부를 군 출신에다 천안함 사건을 주도한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관여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다”고 전했다. 회고록 여파로 통전부의 위상이 축소됐다는 뜻이다.
[아시아경제 온라인이슈팀] 4·29 재보선에 출마한 정동영 무소속 후보가 16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세월호 1주기 관련 성명을 발표했다.
세월호 참사 1주년인 이날 정동영 후보는 전남 진도군 팽목항을 방문한 후 자신의 홈페이지에 '세월호 1주기 성명-누가 침몰한 시대를 구출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정동영은 "국민 여러분. 세월호 1년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이 나라 전체가 세월호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출마한 이유입니다. 365일 동안 하루도 안 빼고 4.16이었습니다. 제가 출마한 이유입니다"고 운을 뗐다.
이어 "민주주의는 침몰했습니다. 한국 정치도 침몰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모두 무능했습니다. 제가 출마한 이유입니다"고 전했다.
그는 세월호로 인한 아픔을 치유하고 진실을 인양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전진 할 수 없다며 "관악에서 출마해 한국 사회를 바꾸고자 합니다"고 밝혔다.
정동영은 또 "저는 정치적으로 어떤 영광을 누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는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여러분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정치적으로 더 호사를 누리고자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받은 관심과 사랑을 이제라도 작게 돌려드리고 싶습니다"고 덧붙였다.
그는 "세월호의 진실을 인양하는 일은 민주주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관악 시민 여러분. 일어서 주십시오. 세월호를 구해 주십시오. 대한민국을 구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하며 글을 맺었다.
다음은 정동영 후보가 게재한 세월호 1주기 성명 전문이다.
국민 여러분. 세월호 1년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이 나라 전체가 세월호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출마한 이유입니다.
365일 동안 하루도 안 빼고 4.16이었습니다. 제가 출마한 이유입니다.
민주주의는 침몰했습니다. 한국 정치도 침몰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모두 무능했습니다. 제가 출마한 이유입니다.
저는 4.17로 가기 위해 팽목항, 안산, 광화문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저는 고통이 있는 곳에 함께 있고자 했습니다. 저를 정치적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저는 정치인이니까요. 저는 고통이 있는 곳에 있고자 하는 정치인이니까요.
세월호를 치유하지 않는 한 세월호의 진실을 인양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전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출마한 이유입니다.
저는 관악에서 출마해 한국사회를 바꾸고자 합니다.
세월호의 기해자들 직무유기한 자들 미필적 고의로 집단적 살인을 초래케 한 자들을 누가 징벌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출마한 이유입니다.
저는 정치적으로 어떤 영광을 누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는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여러분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정치적으로 더 호사를 누리고자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받은 관심과 사랑을 이제라도 작게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이 제가 출마한 이유입니다.
신음하고 있는 민주주의 아래에서 꽃이 피어도 죄를 짓는 것 같은 세월호의 고통을 어떻게 해야 치유할 수 있을까요.
저는 부산 영도에서 87호 골리앗 크레인 위 김진숙을 살려내기 위해 1년 동안 매달렸습니다. 김진숙을 살려내지 못한다면 한국사회의 미래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때 제가 외쳤던 말은 한 마디였습니다. "내가 김진숙이다."
세월호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우리 모두가 유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유가족 숫자만큼씩 전진해 왔습니다.
저는 오늘도 앞으로도 고통받는 자의 편에 서서 늘 현지와 현장에 살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것이 제가 출마한 이유입니다.
오늘 관악을 시민들은 침몰하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를 구원해줄 용기있는 민주주의의 구원자가 되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세월호가 되어버린 대한민국을 구출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관악은 서울에서 가장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명예로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관악은 서울에서 언제나 가장 높은 깃발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관악의 시민들과 함께 행동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Tine Thing Helseth - Mitt lille land / Laleh - Some Die Young (12.7.22)
<나의 작은 조국> (트럼펫 티네 팅 헬세트, 2012 노르웨이 우토야섬 총기사건 추도 음악회 중)
노르웨이의 젊은 트럼펫 연주자 헬세트가 오슬로 시청 옥상에서 <나의 작은 조국>을 유장하게 연주한다. 광장에 모인 5만명의 시민들은 숙연한 감회에 젖는다. 2012년 7월 22일 노르웨이 TV로 생중계된 이 연주회는 바로 1년 전 일어난 ‘우토야섬 총기학살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도하는 자리였다.
2011년 7월 22일, 한 극우 청년이 우토야섬에서 열린 노르웨이 노동당 청소년 캠프 참가자 69명을 총기로 살해했다. 노르웨이는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분히 이성적으로 대응했다. 언론, 정당, 시민단체는 피해자와 유족들을 지지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심리치료 전문가들은 생존 청소년과 유족들의 애도 작업을 돕고, 지속적인 심리 상담을 진행하고, 가해자에 대한 소송에 증인으로 참가했다.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어요. 숨지 말고 함께 괴로움을 나눠요!”피해자와 유족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하여 이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었다.
지난해 4월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 잠수사들이 배 안의 생존자와 교신했다”는 등의 언론 인터뷰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가 1심 무죄 판결을 받은 홍가혜 씨(27·여·사진)가 자신을 비방하는 댓글을 올린 인터넷 이용자 800여 명을 모욕 혐의로 고소한 것으로 24일 확인됐다. 피고소인 상당수는 홍 씨의 고소 대리인 최모 변호사 측과 200만∼500만 원을 건네고 합의하고 있어 검찰이 경위 파악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24일 검찰에 따르면 지난해 10월부터 12월까지 홍 씨가 인터넷 이용자를 고소해 검찰 전산망에 등록된 고소 사건만 총 839건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고소장이 대거 접수되면서 댓글 작성자를 특정하기 위해 인터넷주소(IP주소)와 포털사이트 이용자를 일일이 확인하느라 전국 일선 경찰서와 검찰청이 일상 업무에 차질을 빚을 정도였다. 검찰 관계자는 “경찰에서 진행 중인 사건을 포함하면 전체 규모는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홍 씨 측 전체 고소 사건 수와 합의 경위 파악에 나섰다. 검찰과 피고소인들은 “고소장에는 ‘합의를 원하는 사람에게 고소 대리인 측 연락처를 알려줘도 좋다’는 취지의 문구도 담겨 있다”고 말했다. 피고소인들은 “합의를 하면 처벌받지 않는다”는 경찰의 안내에 따라 고소 대리인 측 사무실로 연락했다고 밝혔다.
합의 사례를 보면 욕설 정도에 따라 통상 200만∼500만 원 선에서 협상이 이뤄졌다. 모욕죄로 유죄가 선고되면 별도로 민사소송까지 낼 수 있다는 최 변호사 측의 설명도 이어졌다. 20대 대학생 딸을 대신해 합의를 한 어머니는 “변호사 측이 ‘따님 욕설이 심해 250만 원은 주셔야겠다. 주기 싫으면 합의하지 마라’라고 얘기해 딸의 장래를 생각해 합의했다”고 말했다.
일부 피고소인은 “홍 씨에게 심각한 성적 비하 발언이 담긴 악성 댓글을 단 사람도 있겠지만 그가 올린 허위 사실을 지적하면서 단순한 욕설 한마디 한 사람들도 고소를 당했다. 당시 홍 씨의 행동이 옳았던 것도 아니지 않으냐”라고 주장했다. 형편에 따라 최 변호사 측 계좌로 일단 200만∼300만 원을 건넨 뒤 1년 안에 추가 금액을 더 내는 분할 약정 형태도 있었다. 피고소인 대부분은 처벌받은 전력이 없고, 향후 취업 불이익 등을 우려해 입건 자체를 두려워한 것으로 전해졌다.
홍 씨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먼저 합의를 하라고 종용한 적이 없다. 피고소인들이 합의하겠다며 울고불고 빌어서 합의해 주는 것”이라며 “악성 댓글로 심각한 모멸감을 받아 고소를 한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최 변호사는 전화를 받지 않고 “통화를 사양하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 왔다.
지난달 26일 후쿠시마 시내의 한 보육원에서 4년 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설명하고 있는 간노 유미 씨. 그는 원전에서 일하던 남편에게서 긴급 전화를 받고 사고 바로 다음 날 피난을 떠났다. 후쿠시마=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여보, 빨리 짐을 싸서 후쿠시마(福島) 밖으로 떠나.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아예 일본을 떠나.”
후쿠시마 현 소마(相馬) 군 이타테(飯관) 촌에 살던 주부 간노 유미(菅野友美·29) 씨가 남편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때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당일인 2011년 3월 11일이다. 남편은 사고가 일어난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일하고 있었다.
간노 씨는 당시 한 살이던 아들 레온(麗央)을 데리고 친정 부모가 있는 후쿠시마 현 니혼마쓰(二本松) 시로 급히 피난했다. 이타테 촌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곳이다. 그나마 그녀는 운이 좋았다. 피난을 가지 않은 이웃들은 고스란히 방사성 물질에 피폭당했다.
이타테 촌은 후쿠시마 원전에서 30∼50km 떨어져 있다. 일본 정부는 30km 이내 지역에 대해서만 피난 혹은 옥내 대피 지시를 내렸으나 방사성 물질은 바람을 타고 이타테 촌을 지나갔다. 약 한 달이 지나서야 일본 정부는 이타테 촌을 계획적 피난 구역으로 지정했다.
11일로 동일본 대지진 및 원전 사고가 일어난 지 4주년이 된다. 사망 및 실종자는 1만8483명. 지금도 피난민이 22만9000여 명에 이른다. 일본 전역에서 이뤄지는 재기를 위한 노력이 눈물겹지만 아직도 상처는 깊다. 이타테 촌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25일 후쿠시마 역에서 동쪽으로 약 50분 동안 차를 타고 달리니 완만한 구릉지가 나왔다. 집은 드문드문 보였고 산과 논밭만 펼쳐져 있었다. 이타테 촌이었다. 농업과 축산업 종사자가 많은 이곳은 지진이 나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가정이 3대가 함께 살면서 ‘가난하지만 마음은 부자’인 곳이었다. 2010년 기준 촌민들의 1인당 연간 소득은 168만 엔(약 1550만 원). 후쿠시마 현 평균(259만 엔)보다 훨씬 적지만 촌민들의 삶엔 항상 여유가 있었다. 쌀과 채소를 직접 재배하는 자급자족이 많아 돈 들어갈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공기가 깨끗해 마을 한중간에 마라톤 코스가 설치돼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검정 비닐백’ 천지 후쿠시마 현 이타테 촌에서 인부들이 굴착기로 오염토가 담긴 검정 비닐백을 옮기고 있다. 비닐백은 이타테 촌의 논밭에 놓여 있는데, 전체 농지 800ha(1ha는 1만 m²) 중 약 3분의 1을 덮고 있다. 후쿠시마=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이날 기자의 방문을 가장 처음 반긴 것은 논밭에 쌓인 검은색 대형 비닐백이었다. 백 안에는 오염토가 담겨 있다. 저장할 장소를 찾지 못해 논밭에 쌓여 있는 것이다.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자 절반 정도 깎인 산이 흉측하게 서 있었다. 오염토를 파낸 자리를 산을 깎아 낸 흙으로 덮었기 때문이다.
현재 이타테 촌은 ‘주거 제한 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낮에만 출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직도 매일 7000명의 인부들이 오염 제거 작업을 하고 있다.
주민센터 앞에 설치된 방사선량 측정기는 시간당 0.40μSv(마이크로시버트)를 나타내고 있었다. 같은 날 도쿄(東京) 신주쿠(新宿) 구는 0.04μSv였으니 10배나 높고 일반인의 인공 방사선 피폭 한계(연간 1000μSv)를 시간당으로 계산한 0.19μSv보다도 배 이상 높은 수치였다. 산등성이 낙엽 더미에 측정기를 댔더니 6.49μSv까지 치솟았다. 시민단체인 ‘후쿠시마 재생 모임’의 다오 요이치(田尾陽一) 이사장은 “바람이 불면 산에 내려앉은 방사성 물질이 흘러내려와 갑자기 수치가 높아지곤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사고 전 이곳 주민은 약 6000명이었다. 90% 주민들이 승용차로 1시간 이내 거리인 후쿠시마 현 내에 피난해 있고 나머지는 현 이외 지역으로 떠났다. 미무라 사토루(三村悟) 후쿠시마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사고 후 예전 가족 구성원이 다 함께 사는 가정은 44.7%에 그쳤다.
앞에서 언급한 간노 씨 가족도 사고 전 6명이 함께 살았지만 지금은 3곳으로 흩어졌다. 자신과 남편, 아들은 후쿠시마 시 임대주택에서, 시어머니는 혼자 가설 주택에서, 시할머니와 시할아버지 부부는 또 다른 가설 주택에서 살고 있다. 간노 씨는 “과거가 그립다. 이제 그런 시절이 다시는 올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후쿠시마 현의 경우 동일본 대지진으로 1608명이 죽었다. 그 후 대지진의 간접 피해로 인한 희생자도 있어 총 1793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무라 교수는 “열악한 피난 환경, 심리적 상실감, 인간관계 붕괴 등 대지진의 2차 피해로 죽은 사람이 후쿠시마에 유독 많다”고 설명했다.
평화롭던 이타테 마을을 한꺼번에 무너뜨린 대지진의 악몽은 4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5일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위) 상임위원들에게 임명장이 수여되면서 특위가 첫발을 떼게 됐다. 이는 당초 예상된 1월 중순보다 한 달 반가량 늦어진 것이다. 새누리당 추천 위원들이 특위 설립준비단의 활동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의견을 밝히면서 갈등이 생긴 탓이다. 특위는 앞으로 1년간 세월호 침몰 진상 규명을 위한 조사활동을 하게 된다.
이완구 국무총리는 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특위 상임위원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로써 특위는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게 됐다. 이 총리는 “정부는 앞으로 고귀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잘못된 관행과 법제도를 개혁해 나가겠다”며 “특별조사위가 중립적이고 공정하게 맡은 역할을 수행해달라”고 위원들에게 당부했다.
특위는 상임위원 5명, 비상임위원 12명으로 구성되며 상임위원은 이석태 변호사(유가족 추천), 조대환 변호사(여당 추천), 권영빈 변호사(야당 추천), 박종운 변호사(대한변협 추천), 김선혜 전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대법원 추천) 교수다. 여야가 입법 과정에서 합의한 대로 유가족이 추천한 이석태 상임위원이 위원장으로, 여당이 추천한 조대환 상임위원이 부위원장을 맡게 된다.
▲ 세월호 참사는 한국 언론의 민낯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실종자 9명은 현재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진도 팽목항의 모습. ⓒ 연합뉴스
그러나 이는 애초 예상보다 한달 반가량 늦어진 것이다. 애초 특위는 1월 중순 늦어도 2월께에 공식 일정을 시작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새누리당 추천 위원들과 다른 위원들 간의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면서 논란이 됐다. 가령 황전원 비상임위원은 세월호 설립준비단 해체를 요구했고 조대환 부위원장(내정자)이 특위 설립준비단에 파견된 공무원들을 원래 정부 부처로 돌려보내는 일까지 벌어졌다.
특위 활동은 진상규명, 안전사회, 지원 등 3개 소위원회를 중심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 중 특히 주목받는 것이 진상규명 소위원회이다. 특위 설립준비단의 대변인을 맡았던 박종운 상임위원은 지난 2월 미디어오늘에 “검찰조사나 재판에서는 범죄 여부를 가렸지만 진상규명 소위원회에서는 세월호와 관련된 온갖 유언비어와 의혹을 모두 털고 가겠다”고 말한 바 있다.
가량 대표적인 것이 국정원 세월호 실소유 의혹이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은 지난 해 7월 세월호 업무용 노트북을 복원한 결과 '국정원 지적 사항'이라는 문건을 발표했다며 이 같이 주장했다. 그 외에도 사고 당일 대통령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사고 이후 에어포켓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 것인지, 사고가 발생한 정확한 시간은 언제인지, 실제 다이빙벨의 투입을 일부러 막은 것인지 등에 대한 의혹 등이 있다.
특위는 앞으로 1년간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조사활동을 하게 되며 6개월 범위에서 활동기한을 한 번 연장해 최대 18개월간 활동할 수 있다. 특위는 첫 공식 일정으로 안산합동분향소와 팽목항을 방문할 예정이라며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9명의 실종자와 그 가족들이 이번 참사로부터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어서 사회의 관심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촉구하게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편집자 모두 첨언~장유근님의 글 가운데 연계 이미지가 이미지 네임이 한글로 되어있어 연동이 안되는지, 아니면 어떠한 다른 이유로 링크가 안되는지는 모르지만, 네이버 상에서 자료를 게시하는 경우 이미지가 액막이(X) 형태로 보이는 경우가 있어 부득이 하게 이미지를 다운 받아 재- 업로드 방식으로 게시함에 진실의 길 측 과 저작권자에게 지면을 통하여 정중히 양해말씀 올립니다. 모든 저작권은 장유근님과 진실의 길에 있음을 밝혀둡니다.<벙어리 구름 아운 배상>]
“19박 20일의 도보행진 끄트머리는 어떤 모습일까…?”
지난 14일 오후 3시 35분경, 진도 팽목항은 행사 준비에 바빳다. 한쪽에서는 짜장스님(남원 선원사 주지, 운천스님)의 저녁 공양 준비가 한창이었고, 또 한쪽에서는 ‘팽목항 문화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동시에 팽목항이 빤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로 19박 20일의 대장정을 마무리 하는 도보행진단이 모습을 드러낼 때쯤이었다. (첫번째, 두번째 영상을 꼭 열어보시길 권유해 드립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도보행진단은 잠시 후에 펼쳐질 행사를 까마득히 몰랐다. 그런 사정은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필자까지 상상 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진도 팽목항에서는 유사이래 처음 개최된 대규모 행사가 있었는데 19박 20일의 도보행진 끄트머리에 기다린 것은 ‘팽목항 문화제’였다. 수 많은 문화제를 목격해 왔지만 팽목항 문화제는 그 어떤 문화제에서 조차 찾아볼 수 없는 한 어머니의 피 맺힌 절규가 있었다.
문화제의 절정은 한 어머니의 절규로 인해 진도 팽목항은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 이유를 보여준 사진 한 장이 풍선에 쓰여진 외마디였다. 19박 20일 동안 그 먼길을 걸어왔던 사람들과 행사 참여자들 모두가 울어버린 19박 20일의 도보행진 끄트머리를 돌아본다.
#1 1,800개의 의자가 펼쳐진 진도 팽목항
지난 2월 14일 오후, 진도 팽목항에는 유사 이래 최대 인파가 몰려든 하루였다. 세월호 안산 분향소를 출발한 도보행진단이 19박 20일의 대장정을 끝마치고 팽목항에서 시민들과 조우하게 되는 것. 이날 팽목항에 마련된 의자 수는 모두 1,800개였지만 대부분의 행사 참가자들은 선채로 팽목항 문화제를 지켜봐야 했다.
아직 도보행진단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때 팽목항은 문화제 행사로 바쁘게 움직였다.
한쪽에서는 짜장스님이 열심히 저녁 공양을 준비하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행사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것.
그곳에 한 시민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난 14일 오후 3시 39분경이었다.
팽목항 방파제 앞에 특설된 무대 위에서는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19박 20일 동안 450km나 되는 그 먼 길을 걸어온 도보행진단을 맞이하려는 아름다운 사람들.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힘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우리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때 대한민국은 빛나고 있었지만, 지난해 4월 16일 하루 만큼은 예외였다. 300여 명의 우리 국민이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정부는 7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다.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19박 20일동안 쉬지 않고 걸었던 도보행진단과 국민들의 가슴 한 곳을 텅비게 만든 세월호 참극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2 팽목항 적신 어머니의 절규
(영상을 통해 한 어머니의 절규를 들으셨나요?) 우리가 1800개의 빈 의자를 채우는 것 보다, 하늘로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을 기다리는 어미의 텅빈 가슴을 채우는 일이 더 절실했던 지난 세월들. 그게 어느덧 해를 넘기고 1주기를 코 앞에 두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의 한 어머니의 절규는 이랬지…!
“...아이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이곳… 팽목항… 앞 바다가 보입니다. 왜 우리 아이가…… 우리 이쁜 내 아들이 저 가득찬 바닷속에서… 엄마를 불러가면서 하늘에 별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나라가 이 정부가 우리 아이를… 무슨 짓을 했는 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진영이가 보고 싶습니다. 내 곁에 있어야 할 아이가 제 곁에 없습니다…… 여러분, 세월호가 인양되고 실종자 분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가고 진실이 인양될 때까지 함께 해 주십시오. 그리고 자식을 잃은 부모 마음도… 국민 여러분들께서 도와 주십시오. 우리 재강이가 왜… 하늘로 가야 했는지 부모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아니 엄마의 마음이죠. 다시는 대한민국, 이 나라 이 땅에서 아이들을 수장시키는 일이 없도록 국민 여러분들께서 꼭 도와 주십시오.”
(관련 포스트에서 언급했지만) 생전 이렇게 운 적도 흔치않았다. 취재하는 동안 내내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포스트를 작성하면서 무시로 흐른 눈물들… 하지만, 그 눈물이 제아무리 뜨겁다 한들 자식을 잃어버린 어미의 마음 같을까…!
팽목항 문화제 리허설을 잠시 지켜보는 동안 도보행진단이 19박 20일의 대장정을 마무리 하며 팽목항에 다가섰다.
그리고 이어진 짜장스님의 가슴 뭉클했던 저녁 공양…!
저녁 공양을 끝마친 시간은 대략 오후 6시 30분경, 도보행진단에 참여한 시민들과 행사 참가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한 작은 아이를 이곳까지 데려온 엄마의 마음이 궁금할 이유도 없다.
#3 팽목항 문화제에 참가한 사람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장차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까마득히 몰랐을 것. 준비된 의자 1800개가 다 채워지고 사람들은 바닥에 퍼질러 앉거나 서서 행사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땅끝 진도 팽목항까지 한걸음에 달려와 주신 분들. 19박 20일 동안 세월호 실종자. 유가족과 함께 동행해 주신 분들. 수 많은 분들을 위해 기꺼이 자원봉사를 해 주신 참 고마운 분들. 그 분들 때문에 대한민국은 그나마 살만하지 않았을까.
세월호 실종자. 유가족들은 행사장 맨 앞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세월호 실종자. 유가족들이 마치 중죄를 짓고 법원에서 선고를 기다리는 듯한 긴장된 풍경. 우리 이웃들이 왜 이렇게 초라해졌을까.
지난해 4월 16일 이후부터 대한민국의 언론 대다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난해 4월 16일 이후부터 대한민국 정부는 세월호 참극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말았다. 지난해 4월 16일 이후부터 몇 안 되는 정치인을 빼고 남은 정치인들은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지난해 4월 16일 이후부터 대한민국의 정부와 정치도 동시에 침몰했던가. 입만 열면 ‘국민의 행복’을 말하던 사람들이 300여 명의 자국민이 참극을 당한 현실로부터 저만치 멀어져 있었던 것. 그들로 인해 자식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다시피한 나라…!
하지만 5천만 (반쪽짜리)민족을 대표해 진도 팽목항에 모여든 아름다운 이웃들 때문에 세월호 실종자. 유가족들은 잠시나마 위로를 받은 현장.
이날 진도 팽목항 문화제 현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유사 이래 최대 인파가 몰렸다.
그 감동의 물결을 가슴에 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팽목항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19박 20일 동안 팽목항만 바라보고 걸어왔던 세월호 실종자. 유가족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고개를 떨구었다.
고개를 들고 세상을 향해 당당히 떳떳하게 당신들의 간절한 바람을 말해도 시원찮을 분들이 고개를 숙이고 하소연을 하는 기막힌 현장.
그 역사적 현장을 수첩에 기록하고 있는 한 기자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이 분들이 왜 19박 20일 동안 450km를 걸어 안산에서부터 진도 팽목항까지 걸어왔는지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대신 조용히 흐느끼며 눈물로 말하는 사람들. 이날 진도 팽목항은 눈물바다로 변했다.
권력 앞에서 당당하고 떳떳한, 그러나 힘 없고 가난한 이웃들이 기꺼이 이웃의 아픔에 동참한 현장. 그곳엔 ‘진실이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아픔을 나누고 있었다. 팽목항을 눈물로 적신 한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자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아닐까.
우리 이웃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면 그건 차마 ‘사람 사는 세상’이라 말 할 수 없는 생지옥 같은 것. 그래도… 그 먼 길을 달려와 주신 분들 때문에 더 없이 행복했던 2박 3일간의 진도 여행이었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감동의 현장’이었음은 두말할 나위없다.
팽목항 문화제가 절정에 이를 즈음 저녁 공양을 마친 짜장스님 일행은 짐을 챙기고 있었다. 진도 군청 앞 철마광장에서부터 진도 팽목항까지 이어진 대장정의 대미를 정성스러운 공양으로 기적을 일으켰던 감동의 현장.
이틀 동안 도보행진단을 위한 공양을 지켜본 한 목격자의 기억속에서, 남원의 천년고찰 선원사 주지 운천 스님(‘짜장스님’으로 널리 불리운다)도 오래토록 기억에 남아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우리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절망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게 희망이 아니었던 지. 그 희망을 보여준 아름다운 이웃들에게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PS. 이 글은 저작권자의 전재허락을 득한 후 저작권자의 허락하에 글을 전재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글의 전재를 허락해주신 진실의 길 마진기 기자님께 지면으로 감사인사를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아울러 진실의 길 측에서는 "기사출처 명기와 비영리적인 사용의 블로그와 카페엔 기사전재에 동의한다"라는 답변을 주셨으므로 보다 많은 분들이 진실을 널리 알려 주셨으면 하셨습니다. <벙어리 구름 아운 배상>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2일 온전한 선체 인양을 통한 실종자 수습을 촉구했다. 세월호 참사 발생 321일째를 맞은 이날까지 수습되지 못한 실종자는 단원고 학생 4명을 포함해 총 9명이다.
실종자 가족들과 유족들로 구성된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는 이날 오후 안산 합동분향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아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더 이상 믿고 기다리기엔 실종자를 찾는 방법이 묘연해지기에 다시 한 번 정부에 적극적인 수색의 방법인 인양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 세월호 참사 발생 321일째를 맞은 2일 실종자 가족들이 온전한 선체 인양을 통한 실종자 수습을 촉구하고 나섰다. ⓒ프레시안(서어리)
"산이었으면, 다 파서 옮겼을텐데…"
단원고 실종자인 남현철 학생의 아버지 남경원 씨는 "지금도 꿈이었으면 좋겠다. (바다가 아니라) 산이었으면 다 파서 옮겼을 것"이라며 "정부가 인양도 수색의 한 방향이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인양을) 하는 척 하다가 지금은 무엇을 하는가"라며 목소리를 높다.
단원고 실종자 허다윤 학생의 어머니 박은미 씨는 "우리 아이들이 친구들 옆으로, 미치도록 보고 싶은 가족들 옆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면서 "그 어떤 것보다도 인양을 통한 실종자 수색이 최우선"이라고 울먹였다.
박 씨는 "저희 실종자 가족들이 수색 환경의 어려움과 위험 앞에, 정부의 설득과 믿음 앞에 수색 종료를 했지만 그 뜻에는 가족들을 또 다른 방법으로 찾아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면서 "선체 인양을 통한 실종자 수습은 정부와 우리의 도리이고 의무"라고 했다.
이어 그는 "오늘 저녁에 피해 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시행령 설명회를 한다고 한다"면서 "가슴이 무너지고 또 무너진다. 아직 (아이가) 돌아오지 못했는데 정부는 배·보상이 모든 것을 다 해준다고, 다 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족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달라"면서 "뼈라도 찾아 품에 안고 너무나도 미안하다고 하고 싶다"고 밝혔다.
PS.프레시안 강양구 기자님과 통화한~"프레시안의 기사전재에 대한 공식입장 요약"~"원칙적으로 기사 전재보다는 기사일부를 발췌등록하고 링크 연결하여 프레시안에 접속하여 열람 방식을 권장함, 개인 비영리 블로거에 대해서는 신 저작권법을 적용, 기사전재에 대해 강하게 제재 입장은 아니며, 기사출처 명시의 경우엔 암묵적으로 묵인 상태임"~이 공식입장임을 밝혀드립니다. 성실히 답변해 주신 강양구 기자님께 지면으로 감사인사를 올립니다.<벙어리구름 아운 배상>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이 '세월호 장학재단' 발족에 팔을 걷고 나섰다. 이 교육감은 2일 경기교육청 남부청사 직원을 대상으로 주재한 올해 첫 직원 조회에서 "안산 단원고 장학재단을 4월 14일 발족하겠다"고 밝혔다. 4월 14일은 세월호 사고 1주기를 이틀 앞둔 날이다.
이 교육감은 "이사진 구성을 놓고 유족과 협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학재단 이사진은 최대 15명 규모로 구성되며, 일부 교육계 인사 등이 영입 대상이다. 장학재단이 꾸려지면 경기교육청은 설립 및 운영 과정상 행정지원과 법률자문을 제공하게 된다.
'세월호 장학재단'은 이 교육감이 인수위 때부터 밝혀왔던 구상이다. 이 교육감이 적극 나서면서, 민간 차원의 장학재단 설립 작업이 현재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교육청 관계자는 <프레시안>과 통화에서 "세월호 사건 희생 학생과 선생님들의 꿈을 모아 그것을 이뤄낼 수 있도록 하는 취지의 장학재단이 될 것"이라며 "재단의 설립 목적, 성격 등은 3월에 민간 차원에서 구체화될 것이며, 경기도 교육청은 이를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육감은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글귀를 인용, "자유롭고 올바른 생각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문맥을 벗어나야 하며, 문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며 마을 교육공동체와 꿈의 학교 운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PS.프레시안 강양구 기자님과 통화한~"프레시안의 기사전재에 대한 공식입장 요약"~"원칙적으로 기사 전재보다는 기사일부를 발췌등록하고 링크 연결하여 프레시안에 접속하여 열람 방식을 권장함, 개인 비영리 블로거에 대해서는 신 저작권법을 적용, 기사전재에 대해 강하게 제재 입장은 아니며, 기사출처 명시의 경우엔 암묵적으로 묵인 상태임"~이 공식입장임을 밝혀드립니다. 성실히 답변해 주신 강양구 기자님께 지면으로 감사인사를 올립니다.<벙어리구름 아운 배상>
십삼 년 전 제가 열한 살 때의 기억입니다. 그해 여름 저희 부모님께서는 무남독녀인 저를 또래 친구들과 함께 첫 야영에 보내 주셨습니다. 몇 날 며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까르르대며 뛰놀았던 야영지, 그곳이 제주도였습니다. 환한 아침마다 숙소 창문에 걸터앉아 저는 저 멀리 바다가 뿜어내는 푸른빛을 하염없이 바라봤습니다. 그러곤 공중전화 박스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엄마, 정말 정말 아름다워.
하루는 인솔자와 동반해 모든 아이들이 해변에 놀러 나간 날이었습니다. 형형색색 수영복을 입은 한 떼의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거나 물장구치는 모습은 마치 햇빛이 수놓은 성전의 스테인드글라스 같았습니다. 저는 이향이란 이름의 친구와 손을 맞잡고 얕은 물속을 거닐었습니다. 그러다 키 작은 제가 문득 먼저 알아차렸습니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새에 두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곳까지 밀려왔다는 것을요. 튜브가 없었던 어린 이향이와 저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서로의 손을 구명대처럼 꼭 잡고 열한 살답게 생각했습니다. 괜찮아. 어른이 있으니까. 그치, 이향아.
다시 돌이켜봐도 저는 그 순간 세상을 너무 많이 살아버린 기분입니다. 인솔자는 정신없이 바빴고, 물 밖으로 간신히 얼굴만 내밀고 있던 이향이와 저는 비로소 ‘우리의 어른’은 곁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배신감에 차 악착같이 발버둥 쳐야 했습니다. 그때 십일 년의 기력을 한꺼번에 다 써 버린 것 같았습니다. 가까스로 뭍에 도달한 저는 울지도 않고 단 하나의 생각을 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빼앗긴 나의 눈부신 풍경,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로부터 십삼 년이 지났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제 머릿속엔 그 여름의 기억이 핏물처럼 고여 있습니다. 이따금 욕조에 몸을 담그는 일조차 진저리 쳐져 황급히 화장실을 빠져나오기도 합니다. 열한 살의 모래밭으로 돌아가 거칠게 숨을 내쉽니다. 어떤 기억은 왜 늙지도 않는 걸까요. 저는 정수리 한가운데 번개를 맞은 것처럼 고통스러운데, 그것이 결코 자신의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 믿는 사람들로 인해 왜곡된 기억으로 운위됩니다. 타의에 의해 희석되고 잊힙니다. 이제 그만 마음 한편에 덮어야 하는 우연적 일이란 듯이.
실은 지난 1월 23일 아침까지도 저는 팽목항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안산 분향소에 막 이르러서도 불쑥불쑥 발길을 돌리고 싶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맨 정신으로는 남쪽 바다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일 년 가까이 숱한 참혹을 보았고, 부정의에 맞서 부딪치는 지인들을 지켜보면서도 선뜻 목소리를 낼 수 없었습니다. 회오리바람 몰아치는 세상 속에서 스물네 살의 저는 무력하고 무지한 한낱 티끌 같았습니다. 동시에 유년 시절의 편린이 언어를 외마디 비명으로 메웠습니다. 그런데 엄마, 성한 데 하나 없는 진실이 성하다고 하잖아요. 믿을 수 없이….
저는 '진실로' 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눈물의 중심을 찾아 진도로 갔는지 모릅니다. 유가족 분들이 마련한 팽목항의 작은 분향소에서 304명의 숨결과 마주쳤을 때, 눈물이 되레 몸속으로 역류했습니다. 어째서였을까요. 해풍에 흩날리는 샛노랗고 보드라운 리본들을 살결처럼 쓰다듬어 보면서야 저는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우리가 엎어진 곳엔 목 놓아 우는 우리를 일으키고 보듬어 줄 국가라는 어른이 부재했음을 말입니다.
몇 시간째 제 방 책상 앞에 앉아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윤희 삼촌께서 하신 말씀이 귓가에 계속 맴돕니다. 돌아오지 못한 자식 생각에 술 없이 하루도 견딜 수 없어 손을 떨고 계시다는 아버지들, 연신 담배를 피워 무신다는 어머니들. 조금이나마 유가족 분들을 위로하자는 취지에서 이 편지를 쓰고자 했으나 저는 제 슬픔조차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인간임을 깨닫습니다. 하물며 제가 어떻게 그분들의 비참한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요. 좀처럼 펜을 종이에 대기 힘듭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잊지 않겠습니다. 진실로 울겠습니다. 앞으로도 세상은 이향이와 저를 번번이 속이겠죠. 그러나 십삼 년 전 우리는 알았습니다. 눈앞에 진정한 어른이 보이지 않는다면 아이는 제 힘으로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요. 간밤에 찾아 읽은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를 조심스럽게 덧붙입니다. 부디 안녕히 계세요.
고귀한 분노를 모르는 포로를
언제라도 나는 부러워하지 않노라
조롱에서 태어나 여름 숲을 모르는
그런 새를 부러워하지 않노라
마음대로 잔인한
짐승들을 부러워하지 않노라
죄책감을 느낄 줄 모르는
양심이 없는
굳은 맹세를 해보지 않은 마음을
나는 부러워하지 않노라
잡초 속에 고여 있는 물같이
부족을 모르는 안일을 나는 부러워 않노라
무어라 해도 나는 믿노니
내 슬픔이 가장 클 때 깊이 느끼나니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는 것은
사랑을 아니한 것보다 낫다고
(알프레드 테니슨, '인 메모리엄' 中)
2015년 2월 20일
석지연 올림
▲ 팽목항 ⓒ석지연
지난 1월 23일 안산 분향소와 팽목항을 다녀온 작가들이 '팽목항으로 부치는 편지'를 제안해 왔습니다. 여전히 고통과 슬픔에 잠겨 있는 유족들을 위로하고, 아직 차가운 물 속에 있는 실종자들을 찾아내기 위한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자는 취지입니다. 팽목항에는 국민들로부터 온 편지를 수신할 우체통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정우영 시인의 편지를 시작으로 8명의 작가들이 팽목항으로 보내는 편지를 연재합니다. 작가들이 시작하지만 온 국민이 쓴 손편지가 속속 팽목항에 모여들기를 작가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국민들의 따뜻한 편지가 유족들의 시린 마음을 데우고 망각할 수 없는 참사를 되새기는 힘이 될 것입니다.
PS.프레시안 강양구 기자님과 통화한~"프레시안의 기사전재에 대한 공식입장 요약"~"원칙적으로 기사 전재보다는 기사일부를 발췌등록하고 링크 연결하여 프레시안에 접속하여 열람 방식을 권장함, 개인 비영리 블로거에 대해서는 신 저작권법을 적용, 기사전재에 대해 강하게 제재 입장은 아니며, 기사출처 명시의 경우엔 암묵적으로 묵인 상태임"~이 공식입장임을 밝혀드립니다. 성실히 답변해 주신 강양구 기자님께 지면으로 감사인사를 올립니다.<벙어리구름 아운 배상>
강윤선 준오헤어 대표는 여장부다. 사각의 링에 오르는 복싱선수 같은 마음으로 매일매일의 위기와 싸워왔다고 했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에 공감한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아브라카다브라(Abracadabra)’. 판타지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마법의 주문이다. 고대 히브리어로 ‘말한 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뜻이다. 걸그룹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노래로도 유명하다. ‘멋의 동네’ 서울 청담동 애브뉴 주노 강윤선(54) 대표의 사무실 메모판에도 ‘아브라카다브라’가 적혀 있다. “우리 속담 ‘말이 씨가 된다’와 비슷해요. 매일매일 저를 다잡는 주문입니다. 말을 꺼냈다면 반드시 이뤄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마법이 통했을까. 강 대표의 2014년 세밑은 각별하다. 그가 창업한 미용브랜드 ‘준오헤어(Juno Hair)’가 지점 100호 시대를 맞았다. 지난 14일 문을 연 수원 노보텔점이 100호점이다. 가맹비를 받는 여느 체인과 달리 본사에서 투자하고, 경영에도 간여하는 직영점 개념이다. 1982년 서울 돈암동을 시작으로 32년 만에 맺은 결실이자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없는 기록이다. 준오헤어는 2005년 글로벌 미용기업 웰라가 선정하는 ‘세계 10대 헤어브랜드’에 오르기도 했다. 함박눈이 뿌리던 15일 그와 마주 앉았다.
- 가위질 하나로 ‘미의 왕국’을 이뤘다.
“가맹점 형태로 갔다면 더 컸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더라면 고른 품질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용업은 피플 비즈니스, 관계 비즈니스다. 감동을 줘야 한다. 에비앙 생수는 어디에서나 똑 같은 걸 살 수 있지만 머리 손질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단말머리를 예로 들면 길고 짧은 잣대가 없다. 철저히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만의 기준은 있어야 한다. 전국 어디에서나 균질한 서비스를 주려고 한다.”
-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교육시스템 덕분이다. 2년6개월 과정의 아카데미를 두고 있다. 대학에서 미용을 전공했어도 우리 회사에 들어오면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총 100가지의 실습코스가 있다. 교육시간이 1600 시간에 이른다. 한 해 150~200명 정도 배출되는데 이들이 주로 신규 지점에서 일하게 된다. 이후 경력이 쌓이면 지점 원장, 혹은 소사장을 맡게 된다. 100호점 원장도 경기 분당점 출신이다.”
- 브랜드를 빌려 달라는 요청이 많을 텐데.
“욕을 가장 많이 먹는 부분이다. 지인들이 ‘너 정말 안 줄 거야’라며 섭섭해한다. 그런 요청을 거절하기가 매우 힘들다. ‘칼 들고 오겠다’는 이도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기술이 없으면 결국 망하고 만다.”
- 직원 수가 꽤 많겠다.
“2500여 명이다. 억대 연봉 직원이 200명이 넘는다. 처음에는 주먹구구 자체였다. 남의 집에서 일하다가 내 사업을 시작했다. 그간 숨가쁘게 달려왔다. 93년 집을 팔아 직원들과 함께 영국 비달사순 아카데미에 유학을 가기도 했다. ‘세계 최고가 되자’며 서로 북돋웠다. 체계적 교육 없이는 제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아카데미 프로그램도 그때 익힌 게 기초가 됐다. 요즘 비달사순에서 배우려면 1인당 44주 과정에 2400만원을 들여야 한다.”
- 천생 또순이인 모양이다.
“워낙 어렵게 자랐다. 10대 중반부터 돈을 벌어야 했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 중학은 전수학교를 다녔고, 고교 1학년 나이에 1년제 기술학교에서 미용을 배웠다. 아무리 힘들어도 책을 놓지 않은 게 큰 힘이 됐다. 제 DNA에는 포기라는 단어가 없는 것 같다. 고민은 많았지만 좌절은 없었다. ‘해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되지’라며 스스로를 부추겼다. ‘하고 싶은 일에는 방법이 보이고, 하기 싫은 일에는 핑계가 보인다’는 필리핀 속담도 있다.”
강윤선 대표 사무실에 있는 화이트보드 메모판. 온갖 사업 구상과 각오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하면 된다’는 좀 낡은 방식 아닌가.
“무조건 밀어붙이자는 게 아니다. 긍정적 사고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외부 강연을 가면 항상 꺼내는 얘기가 있다. 엄청난 화상을 입고도 작가로 성공한 이지선양과 쌍꺼풀 수술이 잘못됐다고 자살한 여성을 대비시킨다. 누가 더 상처가 크겠는가. 저도 어릴 적에 끓는 물에 빠져 목·팔 등에 흉터가 생겼지만 일에 바빠 콤플렉스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원효 대사가 그랬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 서경대 교수 직함도 있다.
“대학원 예술학과에서 리더십과 마케팅을 가르치고 있다. 학위는 없지만 실전 경험을 인정해준 것 같다. 경북대에도 나가고 있다. 전문대를 포함해 대학 강의를 한 지 15년째다. 가르치면서 배우는 게 더 많다. 검정고시를 거쳐 지난해 늦깎이 대학생이 됐다. 한양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2학년이다. 가톨릭대 경영학과에도 수시 합격했지만 사업과 오프라인 수업을 병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봤다.”
- 왜 상담심리학인가.
“미용은 사람을 상대하는 디자인이다. 심리학을 이해하면 큰 도움이 된다. 학벌 때문만은 아니었다. 생각이 깊어지면 디자인도 깊어질 것이다. 현재 전국의 미용실은 8만7000여 개, 종사 인구는 30만 명에 이른다. 경쟁이 치열하다. 차별화된 무기가 있어야 한다. 우리 직원들에게도 사진·음악 등 다른 분야를 더 파고들라고 권하는 이유다.”
- 나름의 경영원칙이 있다면.
“시간 관리다. 매일 아침 그날 할 일 6개를 적어보라. 그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실행해도 훌륭한 하루가 된다. 빌 게이츠나 일반인이나 하루 24시간 주어진 시간은 동일하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게 아니다. 어떻게 채우느냐가 문제다. 예전에 ‘95세 일본 할아버지의 회고’란 글을 본 적이 있다. 65세에 정년 퇴직해 95세까지 30년을 덤으로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105세 생일날을 위해 어학공부를 시작했다는 사연이었다. 그 글을 집안에 붙여놓고 늘 읽고 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 사람을 대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닌데.
“어떤 고객이 내게 1억원을 벌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를 향한 눈빛·몸짓이 달라질 것이다. 미용업에선 신규 고객 창출보다 기존 고객 유지가 더 중요하다.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고객이 서비스 100가지 중 99가지에 만족해도 마지막 1가지에 불만을 느끼면 다시 그곳을 찾지 않을 수 있다. ‘100-1=99가 아니라 0’이라는 정신으로 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해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을 줄 수 있다. 매일 아침 ‘나는 내가 좋다’를 세 번만 외쳐보라. 멋진 하루가 될 것이다.”
- 멋진 헤어스타일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자연스러운 것, 꾸민 것 같지 않은 스타일이다. 헤어 디자이너를 미켈란젤로 같은 조각가에 비유하곤 한다.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내 아름다움을 빚어내기 때문이다. 컷이든 염색이든 그 사람에게 가장 알맞은 형태를 제공해야 한다. 100세 고령화사회가 화두인데, 나이가 들었다고 흰머리를 없애는 게 능사는 아니다. 젊게 보이게만 꾸밀 이유가 없다. 그만의 품격을 살려야 한다. 만약 귀신이 꼬불꼬불 파마머리에 빨간 리본을 달았다면 무섭게 보이겠나.”
- 올 9월 베트남 하노이점도 열었다.
“이제 시작이지만 미용한류를 꽃피우고 싶다. 필리핀·중국 진출도 구체화하고 있다. 그냥 지점을 내는 게 아니라 현지인에게 우리 기술을 가르치며 함께 성장하려고 한다. 우리의 영원한 먹거리가 될 수 있다. 내년 5월께 8층 규모의 아카데미 건물이 완공된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미용 교육기관으로 키우려 한다. 국내 지점도 250개까지 늘리고 싶다. 우리 브랜드를 딴 미용용품도 출시될 예정이다. ‘최고의 효도는 준오 입사하는 것’이라는 평소의 생각을 실현하려 한다. 미용은 아무래도 가난한 집 아이들이 많이 선택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