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지 못하는 역사는 반복된다




꽃피는 봄이 왔다.

오늘은 2018년 4월 3일, 4.3사건 70주기다.





이렇게 예쁜 유채꽃이 마구 피어나던 그 때의 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꽃피는 봄만 오면 제주도민으로써 4.3을 꽃꽃하게 기억하려 애쓰는 노총각이다.



내가 겪지 않은 역사여도 공감되고 내 일처럼 아프다.

4.3을 폭동이라 부르는 세력이 있으면 내 일처럼 분노하고.


4.19혁명, 5.18민주화운동에서 작은 교통사고까지.

이 땅에 억울한 일이 없었으면 참 좋겠다.

그래서 한 때는 대통령되는 게 꿈이었는데, 이젠 그냥 평화가 꿈이다.


퇴근 후 집에와서 슬픈 노래 하나 틀어놓고 4.3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김윤아 야상곡)



요즘 주말마다 귤밭에서 일하느라 온몸이 쑤신다.


열심히 일했더니 엄마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랬다.

딸기우유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만들어주셨다.


"역시 맛있어"


설탕을 넣지 않아도 맛있었다.


요즘들어 왜 그렇게 딸기우유가 먹고 싶었던지.

오늘은 직접 만들어 먹기로하고 마트로 가던 길이었다.


횡단보도 신호 대기 중 대학생으로 보이는 예쁜 여학생 둘이 4.3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빨갱이 하나 잡으려고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게 말도 안되지"


이런 얘기였다.


'빨갱이 잡으려고 죄없는 도민들을 학살한 게 아니다' 라고 참견하고 싶었지만 용기 없는 노총각이라 패스.

빨갱이 색출 논리는 온전히 가해자 입장일뿐.


이명박 박근혜 시절이 시작되면서 젊은애들은 정치,사회문제에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틀린 생각이었다.

시대가 바뀐다는 걸 느낀다. 바람직하다. 미래가 밝다.






마트에서 사온 빨간 딸기를 믹서기에 넣었다.

믹서기에 갈려지는 빨간 딸기를 보니 70년전 제주에는 얼마나 많은 빨간 피가 흙 위에 뿌려졌을지 또 생각해본다.








벚꽃 처럼 예쁜 분홍색으로 잘 갈린 딸기.

올해도 벚꽃은 상상으로 구경했다.








딸기우유 한 잔할 노처녀 빨리 구해야 할텐데..흠흠.


아무튼 잘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설민석 강의에도 없는 이야기들 몇가지.


4.3 사건은 자세히 알면 알 수록 더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노처녀는 자세히 볼 수록 예쁘지만.






우선 빨갱이 논리는 완벽히 가해자 논리다.

범죄에도 비슷한 논리가 많다.


'술 먹으면 그럴 수도 있지, 아니냐!'


뭐 이런 것 말이다. 음주범죄 후에!


그럼 빨갱이가 대체 뭐지?

그저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함에 방해가되면 빨갱이로 몰아 죽이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세월호 촛볼 시위를 빨갱이 집단이라 칭하는 세력처럼 말이다.

한반도에 전쟁대신 평화를 원하는 마음을 빨갱이라 칭하는 집단처럼 말이다.


이런 집단이 4.3사건 가해자의 후예들이란 점도 기억해야할 현실이다.


아이들을 물론 임산부, 노인까지 닥치는대로 죽였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되는 신생아에서 뱃 속의 태아까지.


갓 태어난 신생아가 빨갱이일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보나?

4.3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서북청년단은 유독 임산부와 아이를 더욱 잔인하게 죽였다.







위 사진은 젊은 남자 3명이 총살되기 직전 모습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저 남자들은 군인이라는 점이다.

군인이 군인을 죽여? 군인 중에도 빨갱이가 있었다는 건가?


당시 9연대 장병 100여 명이 군사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처형되었다.


왜? 


제주도 출신이었기 때문에

처형된 군인들 대부분의 고향이 제주도였다.

출신만 보고 같은 빨갱이로 몰아서 죽여버린 것이다.

군인을 보내 제주도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여야하는데 제주도 출신 군인들은 믿을 수가 없으니 미리 누명씌워 죽여버린 것이다.


위 사진 속에서 처형되는 남자들이 9연대 장병인지는 모르겠다.

짧은 머리 젊은 나이 등을 볼 때 맞는 거 같다.


이렇게 빨갱이 색출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낙인 찍는 수단이었을 뿐.

반대세력을 깔끔히 제거하기 위한 살인 자체가 목적이었다.

히틀러도 이런 저열한 수단은 쓰지 않았다.


중세 유럽 종교전쟁, 마녀사냥 때도 이런 얘긴 없는 거 같다.


더 놀라운 사실은 언론인도 총살되었다는 점이다.

제주도 유일의 지역 언론사였던 '제주신보' 사장과 전무 등 책임자들이 다수 체포되었다.

그 중에서 편집국장은 총살되었다고한다.

제주도에 주재 기자를 두고 있던 '경향신문'과 '서울신문' 지사장도 총살되었다.


누구든 자신들에게 충성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아 죽였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죽였을 뿐, 인가다움은 없었다.




* 주의 *
이제부터는 더욱 끔찍한 이야기다.
비위 약한 분은 대충 넘기셔도 좋다.


두개골에 크게 부서진 4.3 피해자 유골





역시 대부분 두개골이 부숴진 희생자들의 유골 모습이다.
(지금은 구속된 이명박이 대통령되면서 4.3 유해 발굴 사업이 전면 중단)
(4.3 뿐만 아니라 6.25 희생자 유해발굴도 마찬가지)

사진 속 유골들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두개골에 큰 구멍이 났거나 박살난 상태다.

살인을 게임하듯이 즐기던 그때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본다.
(사진 속 유골은 사후 훼손일 수도 있음)


'총으로 죽이면 멍청이'
'총으로 죽이면 너무 쉽고 재미도 없고 총알도 아깝고'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산채로 불태우는 등 살인 방법도 다양했다.
그 중심에는 서북청년단이 있었다.

"그 사람이 아일 맡아가지고 애기를 돌에 내부쳐서 죽여버렸어. 

그러니깐 그 꼴을 보면서 이젠 나와가지고 어멍이(엄마가) 꼭 달라붙은 것 같애. 

그러니깐 어멍을 개머리판으로 부숴버린 것 닮아. 이 해골 박세기가 바싹 부숴져버렸어. 

거 내 추측인데. 애기는 순경이 내부쳐서 죽인 것 맞아. 

돌에. 세상에 애기를 돌에 내부쳐서 죽였던 거라, 글쎄, 일곱 달 된 애기라. 참 애기도 잘 났데. 

지금 살았시민 육십일 거여. 그 애기를 돌로 내부쳐서 죽여버렸어." 

<빌레못굴, 그 끝없는 어둠 속에서 (40쪽)>

위는 신생아의 다리를 잡고 머리를 돌에 내리쳐 죽이고, 울부짖는 엄마의 머리를 총으로 바싹 부숴버렸다는 생존자 증언이다.

서귀포 시골 출신이라 어렸을 때 늘 산으로 밭으로 놀러다녔다.
그 당시 무덤가는 공포의 존재였는데.
낮에도 말이다.
특히 무서웠던 것이 바로 아기무덤이었다.

동네마다 아기무덤이 있었다.
보통 무덤보다 작은 봉문으로 만들어진 무덤이 여러개 같이 있는.
지금은 개발이다 흉물이다 뭐다 없애버린 것 같다.

애기들이 집단으로 죽어 묻혔다는 사실이 생각 없던 초딩시절인데도 어찌나 소름 돋았던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서북청년단은 아기엄마와 아기도 예외 없이, 아니 왜 더욱 잔인하게 죽였을까?
내가 횡단보도에서 4.3사건 이야기를 나누던 젊은 여학생들을 보고 흐뭇함을 느꼈던 것과 비슷할 것 같다.
자신들의 죄를 뼈속깊이 기억하며 자랄 아이들이 무서웠을 테니까.


이승만을 등에 업은 서북청년단은 종교인에서 경찰이되어 제주도민들을 더욱 잔인하게 학살했다.
4.3사건이 끝난 뒤에는 요즘 청년들이 그렇게 꿈꾸는 군인, 경찰, 공무원, 정치인 등으로 이곳저곳 기용되었다.
촛불을 빨갱이라 부르는 지금의 기득권이 바로 그들의 후예다.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난동 부리는 집단이 바로 그들의 후예다.




서북청년단에게 살인은 그저 오락이었다.
죽음의 공포를 바탕으로 상상도 못할 짓을 벌였다.

손자와 할아버지에게 서로 뺨을 때리는 게임을 시키며 매우 즐거워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죽였다.

자식 앞에서 부모를 죽이고 자식들에게 박수를 치게 하고 껄껄댔다.
장모와 사위에게는 옷을 벗겨 성행위를 시키며 웃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한 일들이 아주 많았다.

<출처 불분명>

일제시대 학살 뺨치는 잔혹한 일들이 제주도에서 일어났다.
일본군도 혀를 내두를 끔찍한 일을 서북청년단이 자행했다.
서북청년단에게 살인은 목적이 아니고 그저 오락이었다.
현대의 IS도 혀를 내두를 살인쇼였다.





또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 미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이란 책에서 서북청년단의 만행을 자기혐오, 그리고 극단적 여성혐오 범죄라고 규정했다. 


"미군정의 내부 기밀 보고서에서 이 집단은 흔히 남한 전역에서 테러를 자행한 파시스트 청년단으로 묘사되었다. 단원들은 주로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출신이었고, '청년'은 10대부터 중년까지 고르게 분포한 악한들이었다.

(중략)

예를 들면 하귀리 마을에서는 남편이 반란자로 추정되는 스물한 살 된 임신부 문씨는 집에서 우익 청년단에게 끌려가 창으로 열세 번 찔려 유산했다. 

그리고 아이가 반쯤 나온 상태의 그녀를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다른 여인들은 흔히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윤간한 뒤 질 안에 수류탄을 집어 넣어 폭발시켰다. 

이 병리 현상은 아마도 이전에 일본에 복종했고 이제는 다른 외세(미국-글쓴이)를 위해 활동하는 자들의 자기혐오, 그리고 가부장적 한국 사회의 극단적인 여성 혐오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 '한국전쟁의 기원' 저자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 -


'일제시대를 겪었던 사람들이 그대로 일본군의 저질렀던 잔혹한 짓을 따라했고 가부장적 사고는 극단적 여성혐오로 변질되었다' 뭐 이런 내용으로 보인다.

유독 임신부 살해와 군중을 앞에둔 윤간(집단성폭행)이 다반사로 벌어졌던 것을 보면 단순히 여성혐오로 결론내리기는 어렵다. 현대의 지식으론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집단 광기였다.

이래도 단순히 빨갱이 색출에서 발생한 피해라고 말할 수 있나?
폭도 색출이라 말하기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관련기사]
임신부 찌르고, 윤간... 기억해야 할 서북청년단 4.3 만행








생존자 증언 찾다보면 유독 임산부와 아기들을 골라 죽였다 이야기가 많다.
서북청년회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돌격대였다.
대신 손에 피 묻혀주는 합법적 살인집단이자 테러리스트였다.

어떤 뉴스에서도 설민석 특강에서도 이런 끔찍한 증언을 다루는 걸 본 적이 없다.
교과서 적인 얘기만 줄줄.

피해자 증언을 중심으로 4.3을 바라봐야 한다.









이렇게 사망한 희생자 수가 정확히 파악된 게 만오천명정도.
가족 전체가 몰살당한 경우가 많고, 시체를 찾을 수 없는 경우, 육지로 끌려가서 살해당한 경우 포함하면 2만명 넘을 것으로 예상한다.
부상자 수와 피해 유족 수까지 합하면 10만을 넘을것으로 개인적으로 추정해본다.

당시 제주도 인구는 20만이었다.

제주도민 절반이 직적 간접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럼 이 광기의 살인자 집단 서북청년회는 대체 누구일까?

1946년 11월 30일 서울 YMCA강당에서 대한혁신청년회, 북선(北鮮)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 청년부, 양호단, 평안청년회 등 이북 각 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여러 청년단이 통합하여 서북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서북청년회는 이북에서 월남해 남한에서 아무 연고도 없는 청년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해 합숙소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그들의 적대감을 활용해 좌익공격에 앞장서게 했다. 

서북청년회는 좌우갈등이 심해지는 가운데 우익 정치인과 친일 기업가들에게서 자금을 받으면서 좌익 계열 단체의 사무실이나 신문사에 대한 습격을 비롯해 좌익계열 노동운동이 활발한 회사에 회원을 입사시켜 노동운동을 파괴하기도 했다


북에서 내려온 연고 없는 청년들 위주로 결성됐고, 미군과 친일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돌격대로 이용했다고 한다.

특히 영락교회 출신을 중심으로 구성됐다고 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교회 이름 아닌가?

제주도에도 있다.
제주도민들도 많이 다닌다.
흠흠..

[관련기사]
'서북청년'에 뿌리 둔 한국 개신교의 주류




미국인을 신으로 모시던 당시 미국의 기독교는 대유행이었다.
그렇게 기독교는 힘을 얻고 권력이되었다.
그러면서 일부 기독교는 여러 민간인 학살을 주도하기도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영상에서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님의 인터뷰다.

강추한다.


일부 기독교에서 민간인학살을 주도했던 역사를 쉽게 설명해주신다.

서북청년단에 대한 내용도.



그럼 현재는 어떨까?


우선 20년 전 이야기다.

4.3사건을 다룬 다큐를 만들었을 뿐인데 구속 당했다.


1997년 인권영화제에서 4.3 사건을 다룬 '레드 헌트'를 상영했던 영화제 집행위원장 서준식씨가 구속됐다.

감독인 조성봉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영장이 기각돼 간신히 구속을 면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가 시작되기까지 4.3은 금기였다.

모두가 잊고 있었다.

이 끔찍한 일을.



[관련 기사]

"4·3을 폭도의 역사로 되돌린다고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68733

 





그렇다면 최근이라고 다를까?


2014년 이야기다.

박근혜 정부 당시 새누리당은 '4.3희생자 재심의'를 주장했다.
희생자나 생존자 모두 무고한 도민이 아니라 빨갱이라서 죽고 다쳤다는 게 요지다.

하지만 제주도민들은 그런 이명박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줬다.







왜 그들은 끔찍하게 학살당한 제주도민들을 아직도 폭도, 빨갱이라고 주장할까.
그 집단의 뿌리를 보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자유당 이승만 → 민주공화당 박정희 → 민주정의당 전두환 → 민주자유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이렇게 뿌리를 보면 왜 저런 주장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4.3 사건 주범 중 하나가 바로 이승만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보다 더 크게 잘못됀 아픈 역사다.


또한 최근 서북청년단이 부활했다



해골을 그려넣은 마크가 섬뜩하다.
아직 바뀐 게 없다.
바뀐 게 없기에 해결된 것도 없다.
역사를 잊었기에 역사는 다시 반복되려 한다






여기서 왜 4.3 사건 원인을 짚어보면 첫번째 원흉이자 주범은 바로 미국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일제를 쫓아낸 미국이 그대로 우리나라 통치했다.
여기서 문제는 미국이 친일파로 악명 높던 군인과 경찰들을 그대로 재등용하면서 벌어진다.

악명 높던 일본 순사가 해방 후 경찰이 되었다고 사람이 바뀌겠는가?
일제 때 하던 짓을 그대로 자행하기 시작했고 도민들은 이에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미군은 제주도민들에게 상상 이상의 식량을 상납 받았다.
미군의 강도짓과 친일파 출신 군인 경찰에 불만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첫 번째 계기는 1947년 3.1절 행사 때였다.







수 많은 도민들이 관덕정 앞 광장에서 3.1절을 기념하고 있었다.
그러다 경찰이 탄 말에 어린아이 치여 크게 다친다.

일본 순사 출신에게 이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일.
그냥 무시하고 가버리는 모습에 군중은 분노했다.

사람들이 경찰에 항의하기 시작하자 경찰들은 총을 발사해 죄 없는 도민들을 사살했다.




경찰은 닥치는대로 발포했다.

15세 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어린 엄마에서 나이든 농부 등이 사망했다.


일제 순사들이 경찰이 되었으니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것이고 민중은 더욱 분노했다.






민주 경찰을 위해 총기무장과 고문을 폐지할 것


발포책임자와 발포 경관을 처벌할 것


경찰 수뇌부는 사임할 것


희생자 유가족과 부상자에 대한 정상생활을 보장할 것


3.1절 행사 사건에 대한 애국 인사들을 체포, 고문하지 말 것


일제 순사 시절의 악행을 그만둘 것


도민 95%가 위 내용을 조건으로 총파업을 시작했다.

그저 살기위한 항쟁이고 민주적인 제주도를 만들기위한 저항이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남로당 강경파가 경찰서를 습격한다.
이후 군경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이 시작됐다.

당시 제주도를 통치하던 미군정은 이런 제주도민 70%를 좌익 동조자라 칭하고 제주도를 '빨갱이섬(Red Island)'이라 낙인찍었고 무자비학 학살을 부추기고 지원했다.






미군정 제주 사령관 브라운 대령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


'어떻게 시작되었든 상관 없이 내 임무는 진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무고한 도민들을 체포 고문, 총살하기 시작했다.


서북청년단을 제주도로 데려온 것도 미군이다.
그들의 잔인함을 알아본 미군정이 서북청년단을 돌격대로 이용했다.

이렇게 미국은 한반도를 반으로 가르고 남쪽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반도의 통일과 미군정의 횡포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친일파에 의해
서북청년단에 의해
6.25에 의해
한반도에 동족상잔의 끔찍한 비극의 역사가 시작됐다.




요즘 태어난 게 행운이라는 생각은 아주 무책임하다.


몇년 전 가족행사 때 4.3을 겪은 친척 어르신에게 당시 상황을 물어본 적이 있다.

학살이 어땠는지 우리 동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없었는지.


대답은 충격이었다.

그냥 폭도들이 죽었을 뿐이라는 것.

4.3은 폭동이라는 자유한국당 세력과 같은 생각이었다.


또한 당시는 워낙 무법천지라 마음에 안 드는 사람있으면 경찰에게 '쟤 빨갱이' 한 마디면 그냥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따라서 4.3을 입에 올릴 수 없는 과거를 살아온 어르신 입장에선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빨갱이로 몰려 죽을 수도 있었던 시대를 살아오셨으니.

4.3을 입에 올리게된 것도 노무현 정부 부터다.


얼마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인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아직도 4.3은 끝나지 않았다.

또 언제 유사한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특히 강정마을 해군기지 갈등도 4.3과 매우 비슷하다.

군사시설 건설에 반대하면 빨갱이로 몰아 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구속됐다.


근데 왜 강정에 해군기지를 짓지? 

북한의 공격에 대비하려면 가까운 변산반도 쪽이나 울산 쪽이 좋을텐데?





경찰의 도민 폭행은 무죄

도민은 구속과 벌금


4.3 당시 제주도민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9연대에서 제주도 출신 군인들을 총살한 것처럼

강정마을 갈등 당시 강정마을 주민을 진압하기 위해 육지 군인이 파견됐다.


역사를 잊었기에 외지 군경에 의한 폭력은 이렇게 또 벌어지고 말았다.








여기서 일본이 왜 제주도를 군사요새화했는지 살펴보면.

제주도의 위치는 동북아시아에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 러시아 등을 공략하기에 제주도는 최고의 군사요충지였다.


지금도 제주도는 그 위치 그대로다.

일본도 그랬듯이 미국에게도 중국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최고의 요충지일 것이다.


아직 우리 군은 육군 중심의 앉은뱅이 한반도 전용 군대다.

따라서 왜 해군기지가 최남단 강정마을에 지어야 하는지 더 자세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해군기지라는 설이 있다.

천안함이 미국 잠수함과 충돌했다는 이야기도 왜 자꾸 나오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이 이야기들이 사실이라 가정하면 미국의 군사작전에 의해 언제라도 한반도가 다시 전쟁터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특히 제주도.

일본군의 중심전력은 대부분 제주도에 있었다.

송악산 진지동굴, 모슬포 격납고 등 어렸을 때부터 뛰어놀던 곳이라 잘 안다.







공군기지로 활용됐던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









송악산 진지동굴.


또 다시 제주도가 군사요새가 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


자주국방을 바탕으로 강한 군사력을 갖춰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북한과의 대치가 끝나야 하고.








4.3 70주년 추념식에 등장한 원희룡 도지사.

얼굴에 칠해진 분은 아이돌 출신 이효리보다 훨씬 두꺼웠다.



12년간 단 한 번도 ‘4.3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제주 지사

By 아이엠피터

http://theimpeter.com/42853


제주 출신이 핸디캡이라는 원희룡

http://www.mediajeju.com/news/articleView.html?idxno=159474


어쩌면 화장보다 얼굴이 더 두꺼울지도 모르겠다.







반면 엑세사리 하나 없이 민낯에 가까운 가벼운 화장으로 등장한 이효리.







서울시민이 되버린 제주 출신보다 제주도를 사랑하는 서울 출신이 더 낫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정치인 중에선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말고는 아무도 4.3 사건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투표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다.


초중고 시절에는 4.3이 어떤 일이었는지 왜 발생했는지 제대로 가르쳐주는 선생이 없었다.

대부분 제주도 출신임에도 말이다.

정부에서 교육청에서 교육하지 못하도록 압박한 원인도 있다.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학교 시절 도덕 선생님이 도덕 시간에 몰래몰래 4.3을 가르쳐주기도 했었다.

마치 자신이 겪은 일처럼 열정적으로 눈물까지 흘리며 가르쳐주셨었다.

지금은 교육청 장학사?가 되셨다고 들었다.

예쁘고 친절해서 인기가 많은 여선생님이셨는데.

노처녀로 좀 계시다가 최근 몇년 전에서야 결혼하셨다고..


아무튼 학창시절 4.3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이렇게 나이들어 이것저것 찾아가며 혼자 배웠다.

이제야 슬슬 제주 교육계에서도 4.3을 가르치려는 움직임이 있는 거 같다.

아직도 제주엔 봄이 오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다.


아직도 죽음을 생각하는 의미의 '추념식', 단순히 '사건'으로 치부되는 '4.3'이 민주항쟁으로 인정받고 제대로 보상받으려면 갈 길이 멀다. 무엇보다 역사의 반복을 막으려면 까마득한 길이다.


또한 제주도에 이승만의 후예들을 추종하는 어르신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리 젊은세대가 짊어져야할 숙제가 많다.


마지막으로 4.3의 완전한 해결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4.3의 완전한 예방이다.

다시는 절대 평화의 섬에 아픔이 없어야한다.







추천하는 4.3 동영상



5분으로 배우는 4.3 사건 - 시리얼






제주 4.3 70주년 설민석의 역사특강




결론

4.3의 원인은 미국이다

4.3사건 대학살의 주범은 미국과 이승만 정부, 서북청년단, 군인과 경찰이다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국방 완성하자

무관심도 공범이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바탕으로 서북청년단이 부활했다

4.3과 같은 역사를 완벽히 예방하자

투표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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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oflove.tistory.com/341 [돌코롬헌 세상 만들기]

12년간 단 한 번도 ‘4.3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제주 지사

2018년 4월 3일

12년간 단 한 번도 ‘4.3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제주 지사

오늘은 제주 4.3사건 70주년입니다. 제주를 비롯한 전국에서는 그동안  4.3사건을 알리기 위한 문화 공연과 동백꽃 배지 달기, 릴레이 인터뷰 등 다채로운 행사가 벌어졌습니다.

특히 그동안 제주 4.3사건 알리기에 소극적이었던 제주도민들도 적극 나서서 아픈 역사를 알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주 도민들의 노력에 제주 지사가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원희룡, ‘문재인 대통령에 공식 사과 요청’

지난 3월 28일 원희룡 제주지사는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도민과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원 지사는 담화문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4.3수형인’에 대해 명시적인 공식 사과를 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원 지사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합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제주도민에게 4.3사건에 대한 사과를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후보 시절에 “내년 ‘70주년 4.3 추념식’에는 저 문재인이 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하겠다, 그 약속 반드시 지키겠다”며 “다시는 4.3이 폄훼되고, 모욕받지 않도록 저 문재인이 책임지겠다”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원희룡 지사가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에는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던 점과 비교하면, 그저 문재인 대통령을 끌어들여 정치적 홍보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희룡, ‘역사상 첫 현직 대통령이 참석’

<MBC 라디오, 양지열의 시선집중>

진행자 > 그러게요. 말씀하신 것처럼 억눌린 역사라고 하셨는데 사실 이명박,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에 4.3 희생자 추념식 참석을 안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일 이제 70주년 추념식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을 할 거라고 전망하는데 이뤄진다면 9년 만에 현직 대통령이 참석을 하는 거네요?

원희룡 > (이뤄진다면) 9년 만이 아니고 역사상 처음으로 오시는 겁니다.

진행자 >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인가요?

원희룡 > 네, 그렇습니다. 그런 만큼 의미가 크고요. 노무현 대통령님은 4.3추념식에는 아니었지만 제주방문 당시에 국가원수로서 공식사과를 하셨죠.

원희룡 제주지사는 4월 2일 ‘MBC 라디오, 양지열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4.3 추념식 참석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역사상 처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원 지사는 노무현 대통령은 공식 사과만 했지, 추념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58주기 4.3위령제’에 참석했습니다.

제주도 관계자는 원 지사의 발언이 문제가 되자, 추념식과 위령제의 명칭 때문이었다고 변명했습니다. 하지만 2014년 ‘4.3 희생자 국가 추념일’이 공표되기 이전이라도 대통령이 참석한 공식 행사였기에 역사상 처음이라는 말은 틀렸습니다.

#12년 동안 4.3 위령제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던 원희룡

원희룡 제주 지사는 제주 4.3사건 위령제나 추념식 등에 대한 역사를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제주 도지사로 당선되기 이전에는 단 한 번도  ‘4.3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 지사는 2014년 새누리당 후보로 도지사에 출마했을 때야 비로소 “지난 세월 사정이 있고 없고를 떠나 위령제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도 미안한 마음”이라고 사과를 했습니다.

지난 10년간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단 한 번도 ‘4.3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주 도민들은 갈수록 격이 떨어지는 4.3국가 추념일 행사로 분노했지만, 원 지사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 4.3 위원회 폐지 법안에 찬성했던 원희룡

2008년 1월 21일, 한나라당은 제주도민의 아픔과 4.3사건의 진상규명 등을 노력했던 ‘4.3위원회’를 폐지하는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당시 제주에서는 17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4.3위원회 폐지 반대 도민대책위원회’가 구성됐고, 한나라당 심판 운동이 전개됐습니다. 오죽하면 한나라당 제주도당조차 개정안 발의를 철회하라며 중앙당에 건의문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제주4.3위원회 폐지를 골자로 한 ‘제주4.3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 공동 발의자 명단을 보면 원희룡도 있었습니다. 제주 출신이 오히려 제주 도민을 괴롭히는 법안에 서명한 셈입니다.

제주 4.3사건을 말하면서 화해와 치유, 평화를 말합니다. 그러나 진실이 규명되지 않은 사건에서 도대체 누구와 화해하고, 누가 치유받아야 할까요?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리고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평화’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아무 일도 없었듯이 지나간다면 똑같은 일이 되풀이됩니다.

제주 4.3사건은 진실을 규명해야 할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제주4.3 당시 50명 이상 '집단학살' 26곳서 자행 확인
  • 홍창빈 기자 headlinejeju@headlinejeju.co.kr
  • 승인 2020.03.16 10:16
  • 댓글 0

정부 4.3보고서 발표 17년만에 '제주4.3 추가진상보고서' 발간
165개 마을 피해실태 규명...행불‧수형인‧예비검속 피해도 수록
사진=제주4.3평화재단
사진=제주4.3평화재단

제주4.3당시 한 장소에서 50명 이상의 양민이 희생당한 집단적 학살은 26곳에서 자행된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은 지난 2003년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발표된 후 17년 만에 추가진상조사의 첫 결실인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이번 추가진상조사보고서는 △마을별 피해실태 △집단학살 사건 △수형인 행방불명 피해실태 △예비검속 피해실태 △행방불명 희생자 유해 발굴 △교육계 피해실태 △군인‧경찰‧우익단체 피해실태 등을 다룬 770쪽의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4‧3 당시 기준으로 12개 읍면 165개 마을(리)의 피해상황에 대한 전수조사를 벌여 지난해 12월 기준 희생자로 확정된 1만4442명에 대해 가해자 구분, 피해 형태, 재판유형, 유해수습 여부 등에 따라 모두 18개 유형으로 분류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추가조사과정에서 확인된 미신고 희생자도 1200여명에 이른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마을별 피해 확인과정에서 한 장소에서 50명 이상 피해를 당한 '집단학살 사건'은 전도에서 26건이나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보고서에 기술된 토벌대에 의한 집단학살의 장소와 피해규모를 보면 △북촌초등학교에서 자행된 북촌리 주민 학살(299명) △함덕백사장·서우봉 학살터(281명) △정방폭포 학살터(235명) △표선백사장 학살터(234명) △성산포 터진목 학살터(213명) △도두리 동박곶홈 집단학살(183명) △봉개리.용강리 대토벌(151명) △조천지서앞 집단학살(126명) 등이다.

또 △조천면 자수사건('박성내' 학살사건, 96명) △표선면 버들못 집단학살(92명) △모슬봉 탄약고터(대정고등학교 옆 밭) 집단학살(78명) △신엄리 자운당 집단학살(76명) △구좌면 연두망 집단학살(74명) △동명리 신갱이서들(마모루동산) 집단학살(72명) △중문리 신사터(현 중문성당) 집단학살(71명) △외도지서 서쪽 밭 집단학살(71명) △도령모루 집단학살(69명) △도두리 궤동산 집단학살(65명) △대림리 붉은굴(봉근굴) 집단학살(58명) △고산리 천주교회 인근 밭 집단학살(56명) 등의 사건실체 및 피해상황 등도 확인됐다.

북촌초 주민학살 등은 이미 4.3진상규명 과정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사건들인데, 조천면 자수사건 등에서도 당시 잔혹했던 양민 학살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1948년 12월21일 조천면 자수 사건에서는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토벌대의 말을 믿고 군 주둔지인 함덕초등학교로 찾아온 청년 96명을 제주시 아라동 하천 '박성내'로 끌고가 총살한 뒤 휘발유를 뿌려 불태우는 만행이 자행된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진압군은 "과거 조금이라도 잘못한 사람은 자수하라. 자수하면 살려주지만 나중에 발각되면 총살을 면하지 못한다"고 협박했고, 겁에 질린 많은 주민들이 자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로 해방직후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에서 활동, 1947년 3.1절 발포사건에 항의해 시위를 한 사실 등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49년 12월 발생한 도두리 동박곶홈 집단학살 사건은 소개 온 노형리 주민 21명을 동박곶홈으로 끌고가 총살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도두지서 경찰들은 소개민들 중 가족이 한 명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끌고 가 동박곶홈에서 총살시켰는데, 이들은 총살 현장을  쥔들에게 공개시키고 총살 당시 박수를 치도록 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행방불명 희생자 피해 조사결과 4‧3 행불 희생자는 현재 4‧3위원회가 확정한 3610명 보다 645명이 많은 4255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추가진상보고서는 이에 대해 '다수의 유해수습을 하지 못한 희생자가 사망 희생자로 신고돼 처리된 사례가 많았다'고 기술했다.

재단은 이번 조사에서 집단학살 사건 피해자의 신원을 일일이 밝혀냈고, 단일사건 피해자가 50명 미만인 경우에도 동일한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학살극이 벌어졌다면 이 범주에 포함시켰다고 설명했다.

또 이번 추가진상조사에서 2261명에 이르는 수형인 행방불명 피해실태도 중점적으로 규명됐는데, 특히 경인지역, 호남지역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수형인 행방불명 희생자들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 발생된 예비검속 피해 조사에서 희생자 566명의 신원을 확인했고, 이 가운데 유해발굴 과정에서 40명, 구금중이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희생된 13명 등 모두 53명의 행적만 확인됐을 뿐 513명의 신원과 행적은 여전히 알 수 없다고 밝혔다.

교육계 4.3 피해는 교원 271명, 학생 429명 등 총 700명의 인적피해와 93개 학교의 교육시설 및 학교운영 손실 등의 물적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군.경.우익단체 4.3 피해는 군인 162명, 경찰 289명, 우익단체원 640명 등 모두 1,091명으로 파악됐는데, 이는 2003년의 보고서에서 밝힌 1,051명(군인 180명, 경찰 232명, 우익단체 639명)에 비해 군인은 줄어든 반면 경찰 피해자는 다소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추가진상보고서에는 피해유형을 세밀하게 분석한 198개에 이르는 많은 도표가 선보였다. 또 집단학살 사건을 포함한 5550명의 피해자 실명을 일일이 싣고 있는데 책 말미에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찾아보기'(색인)를 새겨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특히 4‧3위원회가 현재까지 확정한 4‧3희생자 1만4442명의 통계는 본적지 중심으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번 전수조사를 통해 사건 당시 거주지 중심으로 재분류했다. 본적지로 분류했을 때, 피해지역과 사건 희생자가 서로 갈리는 등 피해실태 파악에 오류가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서 가장 피해가 많았던 노형리 희생자는 종전 544명에서 538명으로, 북촌리는 419명에서 446명으로, 가시리는 407명에서 421명으로 재분류됐다. 그동안 본적지 별로 만들어졌던 '제주도 마을별 4‧3희생자 분포지도'도 추가진상보고서에선 거주지 중심으로 새롭게 작성, 수록됐다.

아울러 4‧3시기 사진과 정부의 진상보고서 발간 이후 진행된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관련 사진을 중심으로 화보를 엮었다.

2003년 발간된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가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총론적 성격의 보고서라면, 이번 추가진상조사보고서는 각론적 성격으로 구체적 피해실태 파악을 통해 4.3의 진상규명을 심화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녔다. 진상조사보고서가 뼈대라면 추가진상조사보고서는 그 뼈대에 살을 붙이는 작업으로 평가될 수 있다.

제주4‧3평화재단은 4‧3특별법에 근거해 추가진상조사의 업무를 맡게 되자 2012년 추가진상조사단(단장 박찬식 박사)을 구성해 2016년까지 마을별 피해실태와 분야별 피해실태 조사활동을 벌였다. 

이어 2018년 10월 재단 내 조사연구실이 신설되자 추가진상조사보고서 집필팀(팀장 양정심 박사)을 구성, 기존의 조사내용에 대한 보완 작업을 거쳐 이번에 추가진상조사보고서 제1권을 발간하게 됐다. 이 보고서를 현대사 전문학자 서중석 교수(성균관대 명예교수)가 감수했다.

재단 조정희 조사연구실장은 "이번에 다루지 못했던 미국의 역할과 책임문제, 중부권과 영남권 형무소의 수형인 문제, 재외동포와 종교계 피해실태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추가진상조사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이런 문제를 담아낼 제2권, 제3권의 보고서를 계속 발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낙연 전 국무총리는 격려사를 통해 "4‧3평화기념관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는 뜻을 담은 비문 없는 비석이 있는데, 이번 추가진상보고서가 그 백비를 채워가는 중요한 과정이 되리라 믿고 싶다"고 밝혔다.

원희룡 도지사도 격려사에서 "이번 추가진상보고서는 4‧3의 진실을 규명하고 역사를 바로세우는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며, 희생자‧유족의 명예회복에도 크게 기여하리라고 믿는다"고 기대감을 표현했다.

추가진상조사보고서는 제1장 추가진상조사 개요, 제2장 마을별 피해실태, 제3장 집단학살 사건, 제4장 수형인 행방불명 피해실태, 제5장 1950년 예비검속 피해실태, 제6장 행방불명 희생자 유해발굴, 제7장 교육계 피해실태, 제8장 군인.경찰.우익단체 피해실태, 제9장 결론으로 구성됐다.

제2장 마을별 피해실태는 4.3 당시 기준 12개 읍면 165개 마을(리)의 4.3피해실태를 구체화하기 위해 보고서 발간 시점인 2019년 12월 기준 4.3위원회로부터 심의.결정된 4.3희생자 총 1만4442명의 희생자 신고자료를 모두 조사해 인명피해 사실을 분석했다. 사망자, 행방불명자, 수형자, 후유장애자의 유형별 분류를 가해자 구분, 재판유형, 피해 형태, 시신수습 여부 등에 따라 18개 유형으로 세분화함으로써 4.3의 피해실태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4.3위원회에 신고되지 않은 미신고 희생자를 함께 조사해 사건 규모 등을 종합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제3장 집단학살 사건에서는 각 사건별 학살일자와 학살장소를 중심으로 50인 이상 주민이 희생된 총 26개 사건을 대규모 집단학살 사건으로 선정해 정리했고, 학살일자와 장소에 따른 희생자의 신원을 함께 밝혀 집단학살사건의 실상과 규모 등 그 실체를 규명하고자 했다.

제4장 수형인 행방불명 피해실태에서는 4,255명의 행방불명 희생자 중 2,261명에 해당하는 수형인 행방불명 피해실태를 중점적으로 규명했다. 특히 진상조사보고서에서 미진했던 경인지역(서대문, 마포, 인천, 부천) 형무소, 호남지역(목포, 광주, 전주)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수형인 행방불명 희생자들의 진상을 규명하고, 수형인 관련 사법적 판단을 추가했다.

제5장 1950년 예비검속 피해실태는 4.3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1만4442명 중 예비검속 희생자 총 549명의 피해실태를 중점적으로 규명했다. 미신고 희생자 17명을 포함해 예비검속 사건의 희생자 총 566명의 신원을 확인했으며, 이 중 제주국제공항 유해발굴 결과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40명, 구금 중 사망하거나 이후 후유증으로 사망한 희생자는 13명이었다. 제주경찰서 및 성산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에 대한 학살장소 및 희생 규모는 추가진상조사의 과제로 남겨졌다.

제6장 행방불명 희생자 유해발굴은 2006년 5월 화북천 인근 밭 발굴부터 2018년 제주국제공항 등에 대한 발굴 결과를 정리했다. 모두 405구의 유해가 발굴됐으며, 2019년 12월 현재 발굴 유해 중 133구의 신원이 확인됐다. 4.3행방불명 희생자 암매장지에 대한 발굴 및 발굴 유해에 대한 지속적인 신원확인 역시 추가진상조사의 과제로 남겨졌다.

제7장 교육계 4.3피해실태는 기존의 교육계 보고서와 마을별 피해실태 조사를 통해 확인된 인적피해를 정리했다. 교원 271명, 학생 429명 총 700명의 인적피해와 총 93개 학교의 교육시설 피해와 학교운영 피해 등 물적피해를 파악, 피해자 실명과 학교 피해실태를 도표로 정리했다.

제8장 군.경.우익단체 4.3피해실태는 군인 162명, 경찰 289명, 우익단체원 640명 등 총 1,091명의 4.3 국가유공자에 대한 희생시기, 희생장소, 희생유형 등 구체적인 피해실태를 파악했고, 기존 보고서와는 다른 통계를 제시했다.

제9장 결론에서는 추가진상조사보고서가 희생자 추가신고에 따라 조사 대상 범위를 2019년 12월 기준 1만4442명 희생자로 확장해 분석한 피해실태 결과를 담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행방불명인 조사, 유해발굴과 신원확인, 미국의 역할 규명에 대한 지속적인 조사를 남은 과제로 제기했다. 또한 진압작전에 대한 지휘체계 규명과 4.3의 정명(正名) 찾기에 대한 문제도 계속 검토돼야 할 과제로 설정했다.<헤드라인제주>

제주4.3사건 추가진상보고서. ⓒ헤드라인제주
제주4.3사건 추가진상보고서. ⓒ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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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의 역사특강] 당신이 몰랐던 제주 이야기 #제주4.3사건

 

 

 

도올 김용옥, 제주 4.3을 말하다 1부 [KBS제주]

 

 

 

 

4.3 제주도민 학살 사건

 

https://www.google.com/search?q=4.3+%EC%A0%9C%EC%A3%BC%ED%95%99%EC%82%B4&sxsrf=ALeKk03WecttP6AUrR2EvcWXx-3K2HxB_A:1586304404139&source=lnms&tbm=isch&sa=X&ved=2ahUKEwjkq460xNfoAhUJQd4KHQlRBBAQ_AUoAXoECBYQAw&biw=702&bih=799&dpr=1.25

 

 

 

제주 4.3 학살사건 - "충격" 동영상은 보지마세요.

 

https://cheoneui23.tistory.com/18917

 

 

 

 

무명천 할머니(고 진아영) / 제주4.3다큐멘터리제작단

 

 

 

 

 

 

 

 

 

 

 

 

 

 



 

 

 

 

 

 

 

 

 

 

 

 

 

 

 

 

 

4·3 항쟁이 일어난 진짜 이유

 

 

 

 

 

 

 

 

文, 천안함 10주기 참석…"싸우지 않고 이겨야"

서해수호의날 기념식

유족 "천안함 누구 소행인가"
文 "北 소행이라는게 정부입장"
文지지율 55%…16개월래 최고

  • 김성훈 기자
  • 입력 : 2020.03.27 17:28:27   수정 : 2020.03.27 23:53:05
  • 댓글 23
문재인 대통령이 27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분향하고 있는 가운데 천안함 용사 46명 중 1명인 고(故)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 씨(76)가
사진설명문재인 대통령이 27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분향하고 있는 가운데 천안함 용사 46명 중 1명인 고(故)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 씨(76)가 "이게 누구 소행인지 말씀해달라"며 대통령에게 질문하고 있다. [이충우 기자]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강력한 안보 태세 구축과 한반도 평화 정착, 코로나19 극복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이날 문 대통령은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하고,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군 장병들의 가슴에 서해수호 영웅들의 애국심이 이어지고, 국민의 기억 속에 애국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한, 우리는 어떠한 위기도 극복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올해가 천안함 폭침 10주기인 점을 감안해 행사 참석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이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것은 취임 이후 처음이다. 다만 이날 기념사에 특별한 대북 메시지는 담기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목숨 바쳐 서해를 지킨 장병들의 애국심을 언급하며 "영웅들이 실천한 애국심은 조국의 자유와 평화가 됐다"고 추모했다. 문 대통령은 천안함 구조 작업을 하다 순직한 고(故) 한주호 준위와 2010년 연평도 포격전에서 전사한 서정우 하사, 문광욱 일병의 이름을 부르며 "꺾이지 않는 용기를 가슴에 새긴다"고 말했다. 이날 문 대통령은 군과 군인 가족이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애국을 실천하는 모습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서해수호의 날을 맞아 불굴의 영웅들을 기억하며, 코로나19 극복의 의지를 더욱 굳게 다진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에는 전사자 유가족, 참전 장병, 정부 주요 인사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정치권에서는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 심상정 정의당 대표, 원유철 미래한국당 대표 등이 자리했다.

기념식에서는 천안함 용사 46명 중 1명인 고 임재엽 중사의 어머니가 울먹이며 아들을 그리는 편지를 낭독해 여러 참석자가 눈시울을 붉혔다. 역시 천안함 전사자인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는 분향하려던 문 대통령에게 다가가 "이게(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인가, 누구 소행인가 말씀 좀 해주세요. 대통령께서 늙은이의 한을 꼭 좀 풀어주세요"라고 말하는 돌발상황이 펼쳐졌다. 당시 생중계됐던 현장 영상을 살펴보면 문 대통령은 민 상사의 어머니에게 "북한 소행이라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라고 답변했다. 고 박성균 중사의 어머니는 기념식 후 천안함 용사 묘역 참배에 나선 문 대통령을 보고는 큰 소리로 울면서 "엄마들이 왜 다 안 온 줄 아나, 아파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문 대통령의 주간 국정수행 지지도가 50% 중반대를 회복하며 1년4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갤럽이 지난 24~26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문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긍정 평가)는 전주보다 6%포인트 오른 55%로 집계됐다. 해당 여론조사의 신뢰수준은 95%이며 표본오차는 ±3.1%포인트다. 반면 부정 평가는 같은 기간 3%포인트 떨어진 39%로 조사됐다. 자세한 여론조사 개요와 결과는 한국갤럽이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김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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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타임라인] '세월호 구조 참사' 110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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