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안선에서 5km 밖, 청·소년 집단사망 사건
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 생존과 꿈의 경계에 섰다. 같은 경계선을 무난히 혹은 우여곡절을 거쳐 넘은, 같은 시대에 던져진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그는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세계의 폭력에 의해서든,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못한 불운에 의해서든 그의 죽음은 역사의 기록이자 시대의 고발이다. 해방을 앞두고 이역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부터 2020년의 어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지속가능바람 저널리스트들은 청죽통한사(청년의 죽음으로 통찰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청년의 죽음을 취재했다. 청년의 시각에서 새롭게 작성한 '청년의 죽음'은, 그 죽음의 애도이자 더 나은 세상의 모색이다. [기자말] |
▲ 시위 행렬이 있었던 관덕정 | |
ⓒ 제주4·3아카이브 |
1947년 3월 1일 허두용이 죽었다.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대회장인 제주북초등학교에는 제주읍뿐 아니라 애월면‧조천면 등 주변 지역 주민들이 모여들었으며 학생들도 대거 참여했다. 허두용(15)은 이 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행사에서는 3‧1 정신을 계승하여 자주독립을 전취(戰取)하자는 식의 연설이 이어졌다.
오후 2시 기념행사를 마친 군중이 군정 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45분 뒤 시위 행렬이 관덕정 광장을 벗어날 즈음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일어났다. 기마경찰이 응급조치를 취하지 않고 다친 아이를 그대로 둔 채 가버리자 시위대는 분노한다.
"저놈 잡아라!"
사람들이 돌멩이를 던지며 기마경찰을 쫓아갔다. 쫓아오는 군중의 기세에 당황한 기마경관은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아 달아났고 분노한 시위대는 계속해서 그를 쫓았다. 무장한 채 경찰서를 경비 중이던 경찰은 이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러 몰려오는 것으로 오인하고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다.
허두용이 경찰이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두용은 광장 언저리에서 시위를 구경하다가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현장에서 몸을 피하려고 했다. 경찰이 발포하자 몸을 돌려 위험 지역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총탄이 그의 몸을 꿰뚫었다. 이날 두용을 포함해 6명이 목숨을 잃었다. 6명 중 두용을 포함한 5명이 등 뒤에 총알을 맞았다. 경찰의 발포가 도주하는 군중을 향한 것이었다는 방증이다. 경찰은 발포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며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제주 4·3의 도화선이라 불리는 '3·1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민·관 총파업
3월 10일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관공서뿐만 아니라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노동자, 심지어는 미군정청 통역단까지 공무원과 회사원, 노동자, 교사, 학생 등을 망라한 대규모 파업이었다.
제주도민의 총파업에 대해 미군정청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지목하며 강경대응으로 맞섰다. 본토의 '육지' 경찰이 대거 제주도로 파견되었고 극우 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했다. 그들은 '빨갱이 사냥'이란 표현을 썼다.
당시 한반도에는 1945년 미국, 소련 두 강대국에 의한 분할 점령 이후 냉전 분위기에 편승한 미소의 대립이 날로 격화하고 있었다. 여기에 민족 내부의 분열이 겹쳐지면서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이란 한민족의 염원은 요원해지고 남북 분단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두 차례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한국 문제는 미국의 제안으로 국제연합(UN)에 상정됐다. UN 총회는 UN 감시하에 한국에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한 뒤 'UN 한국임시위원단'을 발족했다. 위원단은 1948년 초부터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나, 소련의 입국 거부로 북한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UN 소총회는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결정한다. 남한 단독 선거를 의미했다.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은 단독 선거를 저지하려고 1948년 2월 7일을 기해 전국에서 총파업을 단행했다. '2·7사건'으로 불리는 총파업에 철도‧전신‧전화‧체신‧공장‧광산 등 전 산업이 참여했다.
무장봉기의 시작
5·10 단독선거를 한 달가량 앞둔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주도하에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외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무장봉기는 이후 6년 6개월이나 이어지며 제주도민에게 씻지 못할 상흔을 남겼다.
이날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붉은 봉화가 타올랐다. 무장대의 선전포고였다. 350명의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선‧단정 반대와 조국의 통일 독립, 반미 구국 투쟁을 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 그들은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와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단원들의 집을 습격했다.
▲ 연미마을(오라리 방화사건 현장) | |
ⓒ 제주4·3아카이브 |
4월 28일 잠시 평화협상이 추진됐지만 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우익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오라리 사건'이 벌어졌다. 우익청년단원들이 마을에서 좌익으로 지목된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5세대 12채의 민가를 불태웠는데 미군정과 경찰은 이를 무장대의 행위로 조작해 강경 진압의 명분으로 삼았다. 5월 3일에는 미군이 경비대에게 무장대에 대한 총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협상이 결렬됐다.
5·10 선거 거부
평화협정이 깨진 뒤 선거일이 다가오자 무장대는 5·10 선거를 무산시키는 데에 투쟁 역량을 집중했다. 선거관리사무소를 습격하거나 선관위원들을 공격하는 한편, 선거인 명부를 탈취했다. 선거 관련 업무 종사자에 대한 습격사건이 그치지 않자 선관위원이 대거 사퇴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5월 3일에는 조천면 조천리의 모든 선거관리위원이 사퇴했다.
다수의 주민이 무장대에 동조하여 산으로 올라가 선거를 거부했다. 주민들의 산행은 5월 5일 시작됐다. 그들은 마을 인근의 오름이나 숲으로 가서 머물다 선거가 끝난 후에 마을로 돌아왔다.
그 결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유일하게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미군정은 6월 23일 재선거를 추진했지만 선거위원들이 살해당하거나 후환이 두려워 피신했고, 선거인 명부가 탈취 혹은 방화되어 사라져 이마저도 무산됐다. 미군정은 이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저해하는 불순세력의 음모로 판단했으며 국회의원 재선거는 꼭 1년 후인 1949년 5월 10일에 실시됐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됐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된 뒤 정부는 '제주도 사태'를 종식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였다. 극우 세력만 참여한 이승만 정권에 제주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단독선거를 저지해 가뜩이나 취약한 정권의 정통성에 결정적 일격을 가한 존재였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군 병력을 제주에 추가 배치했다.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창설한 지 6일 만인 10월 17일 해안선으로부터 5㎞ 밖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 결정은 중산간 마을 거주민들에게 거주 자체를 금지하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의 포고문
본도의 치안을 파괴하고 양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 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분자에 대하여 군은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奉持)하여 차등(此等) 매국적 행동에 단호 철추를 가하여 본도의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의 영화와 안전의 대업을 수행할 임무를 가지고 군은 극렬자를 철저 숙청코자 하니 도민의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협조를 요망하는 바이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포고문은 본격적으로 강경진압 작전을 벌인다는 신호탄이었다.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간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이 기간에 가장 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됐고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초토화됐다.
일부 마을에는 소개령이 전달되지 않았다. 토벌대가 이장에게 소개령 통보(문)를 전해주어야 하는데, 무장대의 활동지역이어서 제대로 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장대의 근거지와 가까웠던 중산간 주민들 대부분을 무장대 동조자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혹은 통보가 채 전달되기 전에 토벌대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주민들이 집단희생을 당했다.
고원룡이 죽었다
고원룡(29)이 살던 애월면 하가리는 160호가량이 사는 작고 평범한 마을이었다. 해변 마을은 아니지만 해변을 따라 조성된 일주도로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중산간 마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마을이다. 이 때문에 하가리에는 소개령이 내려지지 않았다.
1948년 11월 13일 새벽 1시 제주읍에 주둔 중이던 9연대가 마을에 들이닥쳤다. 그 시각 어떤 집에서는 제사를 끝낸 후 음식을 나누어 먹었고, 또 다른 집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돼지고기를 안주로 술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진압군은 불이 켜진 집과 이웃집에 들이닥쳐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내고는 14채의 가옥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인근 밭에 모았다.
원룡은 잠을 자다 끌려나갔다. 두려움에 떨던 원룡과 마을 사람들은 곧이어 영문도 모른 채 총살당했다. 총성과 비명이 뒤섞이는 아비규환의 장이었다. 원룡의 몸에도 총탄이 박혔다. 군인들이 떠나자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시신을 수습했다. 원룡은 고통 속에서도 목숨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틀 후 숨졌다.
강조순이 죽었다
진압군은 소개령에 따라 중산간 마을에서 해변 마을로 내려온 사람이어도 가족 중 청년이 한 명이라도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총살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을 모은 가운데 호적과 대조하며 도피자 가족을 찾아냈다. 주민들은 이를 '대살(代殺)'이라고 불렀다. '살인한 자를 사형에 처함'이 대살의 사전적 의미이지만, 주민들은 '가족 대신 죽는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강조순(18)은 하귀리 개수동에서 예쁘다고 소문이 난 아이였다. 그러나 오라버니가 사라진 이후 경찰에 붙잡혀 그의 소재를 대라며 매일 전기 고문을 받았다. 조순은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서 도망쳐 바닷가에 숨었지만 며칠 후 다시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우익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리로 조순을 끌고 갔다. 조순은 이미 초주검 상태였다. 경찰은 그를 알몸으로 만든 뒤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서 철창으로 찌르라"라고 명령했다. 여자대원들이 기겁을 하며 망설이자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몇 차례의 자상을 입고 조순은 숨을 거두었다.
보복 살상
진압군은 주둔지가 습격당하거나 혹은 이동 시에 기습을 받아 사상자가 발생하면 즉시 보복에 나섰다. 북촌리는 당시 학살로 인해 가장 큰 인명 피해를 입은 마을이다.
1949년 1월 17일 제주 세화리에 주둔한 제2연대 3대대 중대 일부 병력이 북촌리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이 숨졌다. 당황한 마을 원로들은 숙의 끝에 군인 시신을 들것에 담아 대대 본부로 찾아갔다. 흥분한 군인들은 본부에 찾아간 10명의 연로자 가운데 경찰 가족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살했다. 그리고 장교의 인솔 아래 2개 소대쯤 되는 병력이 북촌리를 덮쳤다.
오전 11시 무장 군인들이 북촌리를 포위했다. 집마다 들이닥쳐 총부리를 겨누며 남녀노소, 병약자 할 것 없이 전부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내몰고는 온 마을을 불태웠다. 400여 채의 가옥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 북촌 초등학교 | |
ⓒ 제주4·3아카이브 |
운동장에 모인 1000명가량의 마을 사람 중에서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려던 군인들은 이 일이 여의치 않자 주민을 몇십 명씩 끌고 나가 학교 인근 밭에서 사살했다. 이 주민 학살극은 오후 5시 대대장의 중지 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날 희생된 주민이 대략 300명에 이른다고 증언한다.
총성이 멈췄다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창설됐다. 5월 10일에 열릴 재선거를 무사히 치르기 위해서였다. 사령관으로 임명된 유재홍 대령은 강경 작전과 함께 선무공작을 펼쳤다. 그는 "하산을 하면 과거의 죄를 묻지 않고 생명을 보장해 주겠다"는 말로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주민들을 해안가로 끌어냈다. 백기를 들고 하산한 주민들은 임시수용소에 가두어졌고 일부는 석방되었지만 상당수는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1949년 군법회의'는 한라산에 피신해 있다가 하산해 제주도 내 각지 수용소에 감금된 민간인을 대상으로 열렸다. 이 군법회의는 민간인 1659명에 대해 한 사람도 어김없이 국방경비법 제32‧33조 위반 '적에 대한 구원통신연락 및 간첩죄'를 이유로 유죄 판결을 선고했다. 이들 중 사형으로 기록된 345명 가운데 249명이 총살됐다. 총살된 249명을 제외한 군법회의 대상자들은 각각 마포‧대구‧대전‧목포‧인천‧전주형무소에 분산 수감됐다.
▲ 토벌대를 피하는 중산간 주민들 | |
ⓒ 영화 <지슬> 스틸컷 |
군경토벌대의 강경진압작전과 선무공작의 결과 무장대는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르게 됐다. 무장대 핵심간부 다수도 귀순 행렬을 따라 하산하거나 강경진압작전 도중 사살 혹은 생포됐다. 6월 7일에는 무장대 총책 이덕구가 사살됐다. 그의 죽음은 무장대의 실질적인 몰락을 의미했다.
1957년 4월 2일 최후의 무장대원 오원권이 구좌면 송당지역에서 생포되면서 한라산에 총성이 멈췄다.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2만 5000~3만 명의 희생자를 뒤로 한 채 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4·3의 여파는 컸다. 4·3봉기 과정에서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사법 처리를 받은 희생자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 활동에 심한 불이익을 겪었다. 공무원 임용이나 사관학교 입시 등 각종 시험에서 제약을 받은 것은 물론 희생자에 대한 공개적인 추모가 불가능했다.
붉은색 공포증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집계한 희생자 수는 2020년 현재 1만 4532명이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청년이거나 20대가 되지 않은 소년이었다.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 또한 오랫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빨갱이'로 지목될까봐 그날에 대해 침묵하며 참상의 현장에서 생존을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더욱 굳어진 반공이데올로기는 오랜 시간 한국사회를 옥죄었다. 특히 4·3 봉기로 만신창이가 된 제주도는 '붉은색 공포증'을 겪었다. 한국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해병대 3~4기의 대부분은 제주도민으로 구성됐다. 4·3봉기에서 군경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붉은색 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 혈서까지 쓰며 입대했다. 그들은 "조국을 지키려 참전한 사람이 어떻게 빨갱이일 수가 있느냐"고 말했다.
1954년 9월 한라산이 개방된 후 중산간마을 사람들 상당수는 원래 주거지를 찾아 올라갔다. 하지만 폐허가 된 마을의 농토를 개간하고 새로 집을 지어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희생된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어서 복귀를 원하지 않는 주민도 많았다.
4‧3봉기 이후 난민 정착 복구사업의 실시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이 복귀하지 않아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이 제주도 내 각지에 생겨났다. 이른바 '잃어버린 마을'은 4‧3봉기로 집중적인 피해를 본 마을 가운데 주민들이 돌아오지 않아 버려지거나 단순 농경지로 바뀌면서 더는 마을로 존재하지 않고 사라진 곳을 말한다.
▲ 잃어버린 마을, 애월읍 어도 2구 자리왓 마을터 | |
ⓒ 제주4·3아카이브 |
4·3사건 진상규명은 사건 공식 마무리 후 반세기 동안 이뤄지지 않았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면서 논의가 시작되는 듯했으나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중단됐다. 20년 동안 이어진 군사정권 치하에서는 4·3사건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금기였다.
오랜 세월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사건은 1980년대 후반 들어서 진상규명 작업이 진행되며 수면 위로 올라왔다. 특히 80년대 민주화운동은 지난 40여 년을 침묵한 유족들에게 영향을 끼쳐 그들이 목소리를 내게 했다. 그동안 만연한 반공이데올로기 속에서 유족들은 두려움에 떨며 입을 다물고 살았다. 유족들은 1987년 이후에야 4·3을 공식 증언하고 진정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의 조사와 보상은 2000년대가 되어서야 가능했다. 이마저도 개별 소송으로 일부 배상을 받거나 정부의 의료지원금과 생활지원금을 받는 수준에 머물고 있을 뿐 법에 의한 배상·보상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배상과 보상 문제를 포함해 4·3의 완전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기반이 되는 '4·3특별법' 개정안은 20대 국회의 임기 종료와 동시에 자동 폐기됐다.
글
- 신다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졸업. 살아있는 모든 것에 애정이 있지만 요즘은 특히 식물에 빠져 몬스테라 키우기에 열심이다. 글로써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기자 지망생이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이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1.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2. 양정심, 「제주4.3항쟁 연구 (濟州4.3抗爭 硏究)」,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6
3. 장준갑, 「미군정의 제주4·3사건에 대한 대응 -폭력과 학살의 전주곡-」, 『전북사학』 31, 전북사학회, 2007.
4. "4370신문 1월호 - 조천읍 북촌리 '아이고' 사건",
https://blog.naver.com/4370jeju/221196058177, 제주43범국민위원회 공식 블로그
5. 강영훈, "나의 할망은 4.3의 생존자였다", 『오마이뉴스』, 2020년 4월 3일자.
6. 정신영, "제주의 비극 앞에서 난민을 생각하다", 『오마이뉴스』, 2018년 11월 27일자.
7. 곽희양, "[정리뉴스]아이도, 여성도 예외없이 '초토화'··· 70년 전 제주 땅에선 무슨 일이", 『경향신문』, 2018년 4월 2일자.
8. 이정현, "[제주4.3사건]"자슥헌테도 말 못했제.. '빨갱이'라 잡아감서"", 『이데일리』, 2018년 4월 3일자.
9. "제주4.3평화재단", https://jeju43peac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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