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나는 죄가 없던 사람 아닌가"…전과자 낙인 속 40년

[JTBC] 입력 2020-05-20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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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JTBC는 이렇게 억울한 옥살이를 하며 일상을 빼앗겼던 사람들을 직접 만나 봤습니다. 재심에서 무죄를 받기까지 40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오효정 기자입니다.

[기자]

"정해동. 포고령 위반 징역 10월"

광주와 함께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전주에 사는 대학생은 전단을 뿌리고 시위에 나섰습니다.

[정해동/5·18 유공자 (당시 전북대 학생) : '광주의 사건을 전주를 통해서, 또 전주가 받으면 대전이나 서울이 받을 수 있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평범한 일상은 다시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정해동/5·18 유공자 (당시 전북대 학생) : 기말고사도 봐야 하고. 군 복무는 어떻게 할 건지 그런 고민하고 있었고. 이 엄중한 시국에 아무 생각 없이 군대 갈 수는 없다… (군대를) 미뤄놓은 상태였거든요.]

하지만 스물둘 생일은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정해동/5·18 유공자 (당시 전북대 학생) : 불러내서 몽둥이로 보는 앞에서, 몇 대를 때려도 정말 무섭게 때리죠. '너 같은 놈 맞아 죽어도 언론에도 안 나고 아무도 모르고…]

학교에선 제적되고 전과도 남아 삶의 궤적은 완전히 바뀌었지만,

[정해동/5·18 유공자 (당시 전북대 학생) : 그 당시에 참여했던 걸 후회하거나 그런 생각은 흔히 하는 말로 1도 없고요]

목숨을 잃은 동지들에게 미안해 재심도 망설였습니다.

"윤석루. 내란음모죄 무기징역"

시신을 실은 리어카가 금남로를 돌아다니자, 아들은 집을 뛰쳐나갔고 어머니는 시내에서 시신 더미를 뒤졌습니다.

[윤석루/5·18 유공자 (당시 시민군 기동타격대장) : 하나하나 가족 못 찾은 사체들을 가마니에 덮여 있는 것을 열어서 확인하고 울고불고]

억울한 옥살이가 끝나도 꼬리표는 남았습니다.

[윤석루/5·18 유공자 (당시 시민군 기동타격대장) : 다 죄가 없는 사람이고 양심적인 사람이라 할지언정, 서류상으로는, 기록에는 죄인이에요.]

2019년, 재심

[비록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이 무모해 보였던 한 청년의 행동이었지만 이 일을 법적으로 재평가하고 역사적으로 한번 정리하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라 생각하여 이 재심을 청구하는 바입니다.]

담담하게 다시 선 피고인석.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준 건 재판장의 사과였습니다.

[정해동/5·18 유공자 (당시 전북대 학생) : (재판장이) 사법부의 일원으로서 사과를 하고 개인적으로 있었던 고통과 피해에 대해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윤석루/5·18 유공자 (당시 시민군 기동타격대장) : 이제 그래도 참 모든 것이 제자리에 갖다 놔졌다, 제자리에 갖다 놔졌다… 원래 나는 죄가 없던 사람 아닌가.]

(영상그래픽 : 김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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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기록한 최초의 책 "5·18 증언하는 가장 강력한 답변"

[인터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공동저자 이재의 "지금도 싸우고 있다"

20.05.16 19:53l최종 업데이트 20.05.16 23:26l

5.18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판본 10종.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編), 황석영 기록'으로 저자가 표기된 출판사 '풀빛'의 1985년 최초 판본으로부터 공동저자 이재의씨, 전용호씨가 포함된 2017년 전면개정판, 2019년 나온 개정판 양장본을 포함한 10개 판본이다. ⓒ 이희훈
ⓒ 이희훈
 
"1985년 내가 광주항쟁에 대한 보고서를 써야겠다고 결심했을 당시 전두환 군사 정권은 아직도 서슬이 시퍼런 때였다. 모든 정치적 회합은 금지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잡혀갔다가 나중에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는 어떠한 출판 행위도 철저히 금지당했다. 당연히 '광주항쟁에 대한 진실'은 불완전하고 왜곡된 형태로 이야기되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광주항쟁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일과 같았다."
-이재의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서문 중

행여 타자기 소리가 새어 나갈까 담요로 창문을 가렸다. 동료들과 자료를 수집하고 글 쓰는 작업을 시작한 뒤로는 집필 장소를 수차례 옮겨야 했다. 심지어 가족들 사이에 암호까지 마련해뒀다. 혹시 모를 전두환 정권의 급습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5·18민주화운동(아래 5·18)의 진실을 기록한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아래 넘어넘어)의 공동저자 이재의(64)씨는 그렇게 이 책을 완성시켰다.

변화의 기폭제가 된 한 권의 책
 
ⓒ 이희훈
 
< 넘어넘어>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세상에 나왔다. 1985년 5월, 아직 제본조차 안 된 책들은 전두환 정권에 모조리 빼앗겼다. 당시 이 책을 인쇄한 출판사 대표와 대표 작가로 이름을 올린 이는 체포됐다. 책이 완성된 것은 1985년이었지만, 시중판매는 1987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 넘어넘어>의 집필진들은 오랫동안 본인의 이름을 책에 올리지 못했다. 2017년 개정판이 나오기 전까지 저자는 황석영 작가 한 사람이었다. 정부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고, 황석영 작가의 이름을 빌려 보다 많은 사람에게 읽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씨와 공동저자 전용호(62)씨가 책에 이름을 올리게 되기까지, 꼬박 32년이 걸렸다. (관련기사 : "황석영이라면 이름을 빌려줄 것 같았다... 5.18 진실 알린 그책, 전두환 몰래 우리가 썼다")

오는 18일, <넘어넘어> 초판본을 비롯한 10종이 서울기록원에서 전시된다. 출판사부터 책 표지까지 바뀐 10종의 판본은 <넘어넘어> 책이 지나온 굴곡진 세월을 증명한다. 이번 전시회의 제목도 이 책의 이름을 빌렸다. '넘어 넘어 : 진실을 말하는 용기'다.

12일 <넘어넘어>의 공동저자 이재의씨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서울기록원에서 전시되는 기록물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이 책을 "항쟁에 참여했던 주체들의 기록"이라고 소개했다.

80년 5월, 당사자들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공동저자 이재의씨의 취재노트 원본의 전시 모습. ⓒ 이희훈
ⓒ 이희훈
 
"우리(공동저자들)의 첫 번째 목표는 '항쟁의 주체가 됐던 광주시민들의 입장에서 쓰자'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진실들을 다루기 위해서다. 우리는 5·18 당시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켰던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죽을 위험이 높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던 시민들. 자기 삶과 맞바꾸면서까지 이런 선택을 내린 시민들의 행동을 알리고자 했다. 이것이 어떠한 철학적 설명보다도 5·18이 광주 시민들에게 미친 영향을 사실적으로 보여줄 거라 생각했다."

이어 이씨는 "이 책의 중요성은 80년 5월, 광주가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5·18이 폭동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으로 정착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항쟁의 주체들을 기록한 이 책도 일부 기여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5·18에서 중요한 건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피해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극복해 왔는지도 핵심이다. 이 책은 그 과정을 담는다. 5·18의 전 과정을 담는 만큼, 이 책이 한국의 민주주의 뿌리를 성찰하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오는 서울기록원 전시회에서는 이씨의 '취재노트'도 전시된다. <넘어넘어>를 집필할 때 작성했던, 책 제작의 핵심이 담긴 노트다. 광주 외 지역에서 전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5·18에 대한 역사 재료들은 많이 흩어져 있지만, 그 자체가 역사는 아니다. 인과관계, 전후관계를 보여줬을 때 역사의 맥락이 완성된다. 이 맥락을 어떻게 보여주고, 어떤 각도에서 5·18이라는 방대한 사건을 기술할 것이고, 어떤 관점에서 취재할 것인지에 대한 굵직한 구상이 이 취재 노트에 다 들어 있다고 보면 된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굉장히 편향적인 자료일 수도 있다. 우리가 당시 상황을 어떻게 판단했고 이것을 어떤 시각에서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발간된 <넘어넘어>는 오늘날 정사로 자리 잡았다. 이것이 현재 이 책이 국민적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진실이 가려지는 순간마다 펜을 잡았다
 
ⓒ 이희훈
ⓒ 이희훈
 
지난 2014년, 이재의씨와 전용호씨, 황석영 작가는 1985년 첫 집필 이후 19년 만에 다시 펜을 들었다. 5·18에 대한 역사 왜곡이 극심해졌을 무렵으로, 극우인사 지만원씨를 비롯해 일부 집단이 5·18을 북한의 소행으로 몰았다. <넘어넘어>도 왜곡 대상이 됐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일부 극우인사들이) 5·18을 왜곡하는 동시에 이 책도 비방하기 시작했는데,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정도가 정말 극심해졌다. 이 책이 북한의 자료를 근거로 쓴 책이라느니, 필자도 간첩 혐의가 있다느니, 왜곡된 주장들이 잇따라 나왔다. 더이상 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박근혜 정권과 한판 대결을 붙는다고 생각하면서 쓴 책이다."

2017년 개정판에는 초판본에 담기지 못했던 상당수의 자료가 포함됐다. 1988년 국회 청문회자료,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회 보고서 등이다. 1800여 명의 증언자도 새롭게 확보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외신 기자, 광주 현장을 일상에서 목격한 시민들 등도 포함됐다. 

"책이 개정되면서 내용도 훨씬 풍부해졌다. 시기적으로도 이미 37년이나(2017년 기준) 지났을 무렵이니까, 보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다룰 수 있었다. 그동안 5·18에 대한 증거 자료들도 많이 나왔다. 1985년 당시에는 그런 내용이나 자료가 없어서 포함시킬 수 없었던지라 이런 구체적인 근거들을 개정판에 추가했다. 내외신 기자들의 시각도 다뤘다. 이 책은 왜곡을 일삼는 사람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답변이자, 왜곡을 격파할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근거다. 1980년에도, 지금 2020년에도 우리는 이렇게 5·18을 왜곡하려는 자들과 싸우고 있다."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드러난 진실도 있지만, 처벌받지 못한 진실도 여전히 남았다. 이씨가 5·18을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이슈"라 말한 이유다. 5·18을 둘러싼 근본적인 문제들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 이희훈
ⓒ 이희훈
 
"5·18은 아직도 기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살아 있는 이슈고, 현장성 또한 갖고 있다는 의미다. 예컨대 집권자들이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들, 이 과정에서 국가의 그릇된 정당성을 강조하는 행위 등이다. 1980년이나 지금 2020년이나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변화하지 않았다."

이씨는 "5·18은 굉장히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이런 비극을 통해 역사는 성장하고 변화한다"고 덧붙였다.

"5·18의 핵심은 당시 현장에서 광주 시민들이 보여줬던 민주의식이다. 인류 역사상 대단히 높은 도덕성을 보여준 현장이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끝까지 전남도청을 지킨 사람들, 죽어가는 와중에도 (타인을 위해) 헌혈했던 사람들, 극한의 상황에도 은행을 털거나 금품을 훔치지 않았던 사람들. 4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민주화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5·18의 정신이 여러 사람들에게 기억됐으면 한다."
 
ⓒ 이희훈
 
서울기록원 5·18 40주년 전시회
'넘어 넘어 : 진실을 말하는 용기'


서울시 산하 서울기록원(원장 조영삼)은 오는 18일 5·18 40주년을 맞아 '넘어 넘어 : 진실을 말하는 용기' 특별전을 연다. 전시는 내년 3월 28일까지 개최된다. 서울특별시와 광주광역시가 공동주최하는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사업인 '오월 평화 페스티벌'의 일부다.

이번 전시에서는 5·18 광주의 시민기록집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판본 10종이 공개된다. '풀빛'의 1985년 최초 판본부터 2017년 창비에서 나온 전면 개정판, 2019년 나온 개정판 양장본 등이 포함된다.

< 넘어넘어>의 공동저자 이재의씨의 취재노트 원본도 약 3개월간 전시된다. 광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원본이 전시되는 것은 이번이 최초다.

이전까지 국내에서 구할 수 없었던 기록물도 최초로 공개된다. 1980년 당시엔 검열돼 국내에서 볼 수 없었던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1980년 6월 2일자 국제면 기사 'Insurrection in South Korea'(남한에서의 봉기)다. 40년간 공개되지 못했던 외신 기사문의 내용은 무엇인지, 외신의 눈에 비친 5·18 현장의 모습은 어땠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 5·18을 기억하기 위해 각종 아카이빙 활동을 펼치는 광주의 청년세대 4팀의 작품들도 각각 소개될 예정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광주 5월 민주항쟁의 기록, 전면개정판

황석영.이재의.전용호 기록,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창비(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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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5·18 사전 기획설, 軍기록 통해 최초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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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CBS 기획 '국민이 기억해야 할 5·18의 진실'
③신군부, 1980년 5월 10일 이전에 5·18 기획
軍 우발 사건 주장하지만 치밀한 사전 준비 작업 거쳐
육군참모총장 근무일지·계엄회의록 통해 계엄·휴교령 검토 확인
계엄령 선포 당일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육군본부·보안사령부와 논의
5·18 조기 진압 계획…미군 지원 등 고려해 5월 27일로 연기

5·18 40주년을 맞아 광주CBS는 5·18 진실 찾기 차원에서 '국민이 기억해야 할 5·18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기획보도를 마련했다. 광주CBS는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단독 입수한 자료를 토대로 관련 기획보도를 준비했다.[편집자주]

16일은 세 번째 순서로 5·18 민주화운동이 신군부의 12·12 군사 쿠데타 이후 시국을 수습하기 위한 철저한 사전 준비를 토대로 기획된 정황이 군 기록으로 확인된 사실에 대해 보도한다.

5·18 당시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하고 있는 계엄군(사진=5·18기념재단 제공)
◇신군부, 5·18 사전 준비…1980년 5월 12일보다 이틀 앞선 5월 10일 준비

5·18 민주화운동이 기존 검찰 수사에서 드러난 1980년 5월 12일보다 이틀 앞선 5월 10일부터 준비된 정황이 군 기록을 통해 새롭게 확인됐다. 신군부는 "5·18 당시 군의 발포 명령이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이뤄졌다", "마지막까지 인내심을 발휘해 선량한 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반박하는 근거가 드러난 것이다.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가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5월 10일 이전부터 5·18를 준비했다는 정황이 군 기록을 통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광주CBS가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를 통해 입수한 '5·18 민주화운동 타임라인과 관련한 선행조사에 대한 연구용역 결과 보고서'에 나온 계엄군 회의록과 육군참모총장 근무일지를 토대로 5·18이 1980년 5월 10일부터 준비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앞서 검찰은 보안사 정보처장을 지낸 권정달 등 보안사 관계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5·18을 포함한 신군부의 시국수습방안이 1980년 5월 12일부터 준비됐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번 결과보고서를 통해 계엄사 합수부가 5월 10일부터 시국을 수습하기 위한 단계적 조치를 시작했고 휴교령과 비상계엄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한 정황이 확인된 것이다. 특히 이 같은 사실은 계엄 회의에 참석한 계엄사 합수부 관계자의 발언으로도 나타났다.

광주CBS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로 부터 받은 연구용역 결과보고서에 신군부가 사전에 5·18를 준비했다는 정황이 군 기록을 통해 확인됐다(사진=박요진 기자)
◇군 투입 전 광주서 발생할 사건 예언한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은 1980년 5월 18일 오후 3시 11공수특전여단을 광주에 추가로 투입한다고 밝히면서 "지금 광주에서는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로 사태 수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실제 광주에 군 병력이 투입되기 시작한 시각은 5월 18일 오후 4시였다. 광주에 군 병력이 투입되기도 전에 사태 수습에 어려움을 있어 추가 병력을 투입한다고 언급한 것이다. 이 때문에 미래를 예언하는 듯한 정 전 특전사령관의 발언은 5·18이 사전에 준비됐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 육군 군사 정보관을 지낸 김용장씨는 지난 2019년 5월 광주를 찾아 "5·18은 전두환 신군부가 기획한 계획된 시나리오였다"고 진술했다. 김씨는 "계엄군의 광주 진압은 전두환 신군부의 정권찬탈이라는 목표 아래 이뤄졌으며 광주는 크기와 위치 등에서 신군부의 적당한 목표물이 됐다"며 "대구나 부산은 지역이 넓고 신군부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타깃이 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밖에 1980년 5월 17일 육군 참모총장의 근무일지에는 1980년 5월 17일 오전에 주요 지휘관 회의와 특전사령관 보고가 진행됐고 이후 국방부 주요 지휘관 회의와 보안사령관 방문, 청와대 보고가 이뤄졌다고 기록돼 있다. 5월 17일 밤 9시 40분쯤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가 의결됐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사전에 국방부와 육군본부, 보안사령부 등과의 치밀한 준비를 토대로 대통령에게 보고한 후 국무회의 안건으로 상정된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5월 27일 이뤄진 '충정작전' 본래 22일 계획…미국 일정 등 고려해 연기

계엄군 회의록에서 계엄사령부 부사령관은 "광주 난동은 금일 조기 일대소탕전(일망타진) 코저 하였으나 미군의 지원과 타이밍을 조정하기 위해 연기했다"고 언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앞선 군의 대부분 기록에서 "군은 마지막까지 인내심을 발휘했고 선량한 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폭도와 분리되는 시점을 기다렸다"고 주장한 것과 상충된다. 계엄사령부가 1980년 5월 21일 오후 광주시내에서 퇴각한 다음날 진압작전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군 문서를 통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음날인 1980년 5월 23일 계엄사령부 회의록에서도 육군참모총장이 "금일, 2군 사령관이 진압계획을 가지고 온다"고 발언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계엄군은 5월 27일 진행한 충정작전을 애초에는 5월 21일 퇴각 직후에 실행하려는 의지가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설립준비단은 지난 2019년 5·18민주화운동 타임라인과 관련한 선행조사에 대한 연구용역을 진행했다. 연구용역 결과보고서 내용(사진=박요진 기자)
◇5·18 사전 계획설 입증은 5·18 민주화운동 의의 격하?

신군부에 의해 5·18이 사전에 계획됐다는 사실이 군 기록을 통해 확인되면서 5·18민주화운동의 의의를 격하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5·18에 참여한 광주시민들이 주체적으로 항쟁을 이끌어 나간 것이 아니라 신군부의 의도에 말려들어 그들의 의도대로 끌려갔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5·18 민주화운동 전문가들은 5·18이 신군부의 사전계획에 의해 시작됐다고 하더라도 그 의의는 퇴색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무엇보다 1980년 5월 이전에 5·18민주화운동과 같은 규모와 강도로 저항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5·18 기념재단 조진태 상임이사는 "신군부가 5·18을 사전에 준비했다는 정황은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며 "신군부의 계획을 토대로 5·18이 시작됐을지 모르지만 시민들은 주체적으로 대응하면서 광주를 해방된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대구MBC보도특집]KAL858기 실종사건 1부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 1987년 전두환 정권 당시 일어났던 미스터리한 사건의 1년 여 추적기

 

 

지난 1월 23일 MBC뉴스데스크는 대구MBC 특별취재단이 “1년 가까운 추적 끝에 미얀마 안다만의 50미터 해저에서 KAL 858기로 추정되는 동체를 발견했다”며 수중카메라에 촬영된 비행기의 엔진과 날개 모습을 단독 보도한 바 있다. 1부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에서는 추정동체를 찾기 위한 3차례의 미얀마 현지 수색 과정을 자세히 공개한다.

 

천안함과 세월호 참사 당시 수색작업에 참여한 해난구조전문가 이종인 씨가 대구MBC 특별취재단의 수색단장으로 참여했다. 2019년 11월부터 시작된 대구MBC의 'KAL 858기 실종사건' 관련 보도는 지역언론의 취재범위를 넘어서 1년간의 끈질긴 취재로 이뤄냈다.

 

특히 2006년 국정원 발전위원회가 2차례에 걸쳐 20일간 수색한 뒤로 13년 만에 언론사 최초로 KAL 858기 동체 수색 작업이 진행했고, 철저한 검증 작업을 거쳐 추정동체를 발견한 것이다. 본 방송은 KAL 858기 동체 인양과 사건 진상규명의 불씨를 당기고, 나아가 30여 년간 이어진 실종자 가족의 아픔과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풀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KAL 858기 실종사건*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여객기 KAL 858기가 미안마 해역 상공에서 추락해 실종된 사건. 승객 대부분 중동에서 귀국 중이던 노동자였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제대로 된 현장 수사 없이 김현희 등 북한 공작원의 공중 폭발테러였다고 단정하고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비행기 동체와 탑승자 115명의 시신은 한 구도 찾지 못한 채, 실종자 가족들은 현재까지 사건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진실을 향해 깊이있게 접근하는 대구MBC NEWS 공식 유튜브 채널입니다.

 

 

 

 

 

 

 

 

 

[대구MBC보도특집]KAL858기 실종사건 2부 바다에 묻힌 진실 | 1987년 사건 하루 전 KAL858기 부기장이 만난 사람은? | 또 다른 동체 근접 촬영 과정 공개

 

 

 

 

[스브스뉴스] 1987년 대통령 선거 하루 전 일어났던 일

 

 

뉴스타파 - "대선 전에 김현희 압송"...비밀 외교문서로 본 '무지개 공작'

 

 

 

[87년의 경고] KAL858기 사건의 묻혀진 진실

 

 

 

 

 

 

 

 

 

 

55만 명이 본 뉴스의 실체... 어느 학생의 촌철살인

[아이들은 나의 스승 190] '가짜 뉴스'를 '진짜 뉴스'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20.05.05 20:44l최종 업데이트 20.05.05 20:44l

 유튜브는 어쩌다 가짜뉴스의 온상지가 됐을까
 유튜브는 어쩌다 가짜뉴스의 온상지가 됐을까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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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가짜 뉴스를 '진짜 뉴스'로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한 아이의 말에 무릎을 쳤다. 우리 사회에는 '팩트 체크'가 통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미 '확증 편향'에 길들여져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이들 또한 적지 않다는 걸 어린 그도 깨달은 거다. 유튜브가 가짜 뉴스의 온상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는 나이가 어릴수록 가짜 뉴스가 끼치는 해악이 크다고 잘라 말했다. 고등학생인 제 또래들 중에도 황당무계한 가짜 뉴스를 마치 사실처럼 믿는 경우가 있단다. 하긴 요즘엔 유튜브가 검색 엔진을 대체하고 있고, 토론할 때 유튜브의 내용을 논거로 제시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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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노소 누구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할 수 있는 시대다. 게다가 조회 수를 늘리면 돈도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어린 아이들조차 가짜 뉴스 생산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게임보다 채널을 운영하며 '좋아요' 수를 확인하는 게 더 즐겁다고 말하는 아이가 많아졌단다.

아이들은 유튜브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공부하며, 소통한다. 그들에게 TV는 낡은 물건이 됐고, 공중파 방송은 유튜브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한다. 영화관조차 손 안으로 들어온 마당에, 이제 그들에게 유튜브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가짜뉴스는 어떻게 퍼지나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사실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두환씨가 27일 오후 전남 광주지방법원에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을 마치고 부인 이순자씨와 경호를 받으며 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사실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두환씨가 4월 27일 오후 전남 광주지방법원에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을 마치고 부인 이순자씨와 경호를 받으며 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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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대화는 5.18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한 유튜브 영상에서 시작됐다. 중학생 동생의 소개로 보게 됐다는데, 5.18을 마치 북한군이 침투해 일으킨 폭동으로 묘사하고 있다며 발끈했다. 5.18은 시민들이 불의한 권력에 맞선 민주화운동으로서, 이미 역사적 평가가 끝난 사건이다.

가히 10여 분짜리 해당 영상은 죄다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삼겠다는 듯, 10대 유행어와 이른바 '급식체' 등을 섞어가며 5.18을 한껏 조롱했다. 진행자도 말쑥한 정장 차림의 젊은 남성과 여성으로, 스스로를 카메라 앞에서 '샘'으로 호칭하고 있었다.

기존의 국방부의 보고서 내용조차 부정하는 내용으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허튼 주장이었다. 일일이 반박하는 것조차 민망할 만큼 어처구니없는 막말들이 쏟아졌다. 결국 마지막은 5.18 유가족의 명단을 공개하라는, 태극기 부대와 야당 일부 의원들의 패륜적 요구였다.

기실 그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지난해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구성은 집요하게 방해한 모순된 행동을 보였다. 가해자 격인 국방부의 공식적인 발표를 넘어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모습을 영상에 담은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유튜브는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됐다.

그는 영상 속 '홍어'라는 조롱이 가장 불쾌하다고 했다. 이어 명백히 사실을 왜곡한 가짜 뉴스인데도 정부가 버젓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두는 이유를 궁금해 했다.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교과서적 답변을 했다.

교사랍시고 그렇게 답했지만, 실은 내가 정부에 먼저 묻고 싶은 바다. 유신 독재정권에 억눌려온 시민들이 민주주의 수호를 외쳤고,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가 그들을 총칼로 대량 학살했다는 건 불변의 사실이다. 이를 왜곡하고 폄훼하는 건 명백한 범죄 행위 아닌가.

이미 전두환과 노태우 등 당시 신군부의 수괴들은 대통령의 특별 사면을 받았을지언정 내란죄로 대법원의 확정 판결을 받았다. 또, 줄곧 북한군 잠입설을 흘리며 5.18을 왜곡해온 지만원 등 극우세력의 주장도 명백한 허위라며 실형을 선고받았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거듭 강조하건대, 5.18은 이미 역사적 평가가 끝난 사건이다. 잇따른 왜곡과 폄훼 행위를 단죄하는 대법원의 판결도 나왔다. 앞으로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을 통해 당시 발포명령자를 밝히고, 성폭력 등 인권침해 사례를 조사하며, 암매장과 행방불명자를 찾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5.18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여전히 장마철 음습한 곳의 곰팡이처럼 피어나고 있다.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명명한 것도 모자라, 유가족을 세금 축내는 '괴물 집단'으로 규정한 정치인까지 나왔다. 다행히도 우리 국민은 지난 총선 때 그들을 응징했다.
  
"허위는 반박하지 않으면 진실이 된다."

물론 백 번 지당한 말씀이다. 다만 인터넷 포털조차 무릎 꿇린 '유튜브 천하'에서는 공자 왈 맹자 왈일 뿐이다. 아이들조차 '팩트 체크'를 통한 자정 작용은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고 말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토머스 그레셤의 법칙이 가장 잘 들어맞는 곳이 바로 유튜브다.

강력한 처벌만이 가짜 뉴스 차단하는 유일한 해법
 
 조회 수 늘리기 경쟁이라면, '진짜 뉴스'는 가짜 뉴스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
 조회 수 늘리기 경쟁이라면, "진짜 뉴스"는 가짜 뉴스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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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유튜브의 최고 덕목은 재미다. 아무리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내용이라도 재미가 없으면 안 본다. 가짜 뉴스를 반박한 유튜브를 만들어 업로드 한다 한들 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더욱이 가짜 뉴스와의 재미 경쟁에서 이기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모든 가짜 뉴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자극적이라는 점에서다. 어차피 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가 거짓인 마당에 진행자의 웬만한 욕설쯤은 문제될 것 없다는 식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내용이 폭력적이고 선정적일수록 조회 수가 치솟는다는 건 유튜브 세계의 불문율이다.

앞서 말한 5.18 왜곡 유튜브 영상의 조회 수도 55만여 회(5월 2일 현재)였다. 우리나라 사람들로 한정한다면, 적어도 100명 중 한 명 이상이 시청한 셈이다. 참고로 그 영상의 내용을 논박하기 위해 5.18 기념재단에서 만든 유튜브의 조회 수는 1만5천회 남짓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그 두 영상을 함께 시청할 수도 없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전혀 상반된 주장을 담은 두 영상을 연이어 보도록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맞춤 동영상'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성향의 채널을 소개하며, 무심한 시청자들의 확증 편향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일례로, 지인 중에 과거 '노사모'의 열혈 회원으로 활동하셨던 어르신이 한 분 계신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 그 해 주말마다 천릿길 마다 않고 봉하마을을 찾았던, 자칭 '실버좌파'시다. 나이가 들면 '꼰대'가 되고 정치적으로 보수화된다는 말이 가장 싫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은퇴 이후 요즘 그는 유튜브 보는 게 낙이라고 하셨다. 문제는 그가 볼 만하다고 말하는 영상 중엔 가짜 뉴스로 의심되는 자극적인 것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그의 '맞춤 동영상'을 따라가 보니, 죄다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종편 채널에 닿아 있었다.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을 시청한 뒤, 연이어 해당 종편의 뉴스를 듣고, 비슷한 성향의 유튜브 채널로 옮겨가며 여가를 즐기고 계셨다. 그렇다고 그가 노무현을 조리돌린 보수 언론을 두둔하고 보수 정당에 투표할 리는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을까 두렵기는 하다.

하물며 어린 아이들은 유튜브 알고리즘에 더욱 휘둘릴 수밖에 없다. 5.18을 책으로 배운 아이들조차 가짜 뉴스에 쉽게 현혹되는데, 유튜브로 처음 접한 경우라면 자칫 위험할 수 있다. 오로지 조회 수 늘리기 경쟁이라면, '진짜 뉴스'는 가짜 뉴스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

"글이든 영상이든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면 분명하게 책임을 묻는 강력한 처벌법이 제정되는 것, 그것만이 가짜 뉴스를 차단하는 가장 확실하고도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해요."

중학생 동생에게도 그대로 들려주었다는 아이의 이 말은, 빼거나 보탤 것 하나 없는 모범정답이다. 5.18은 더 이상 '팩트 체크'의 대상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 운운하며 합리적 근거도 없이 거짓말을 일삼는 건, 희생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유가족을 능멸하는 명백한 범죄 행위다.

사족 하나. 일부 정치인들과 학자들은 낡은 학교교육을 탓하며, 이른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훈계한다. 유튜브 등에 범람하는 수많은 정보들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며 취사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다. 백 번 지당한 말씀이긴 하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미디어 환경은 학교교육의 영향력을 훌쩍 뛰어넘은 지 이미 오래다. 옳고 그름보다 재미의 유무에 집착하는 요즘 아이들의 세태를 부실한 학교교육 탓으로 돌릴 수 없다. 단 10분의 지루함도 못 견뎌하는 아이들에게 최악의 교사는 수업이 재미없는 교사다.

이미 우리 사회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조차 예능 프로그램에 목매단 '예능지상주의' 사회다. 적지 않은 아이들이 장래 유튜버를 꿈꾸고, '예능감 있다'는 말을 최고의 칭찬으로 여긴다. 예능 프로그램으로 뒤덮인 미디어 환경이 횡행하는 가짜 뉴스의 숙주라고 여긴다면 과연 억측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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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 추돌사고

 

 

 

 

 

 

뉴스타파 - ① 세월호 화물칸 차량 블랙박스 영상 최초 공개

 

 

 

 

 

 

 

 

 

 

 

SEWOLX 세월엑스 (ENG CC) 정체 모를 괴물체 괴물체는 컨테이너일 수가 없다.

 

 

장 번호
영상 시간 지점
장 제목
결론
챕터1
진짜 사고 원인
원인은 '외력'
챕터2
평형수의 진실
침몰에 별 영향이 없다.
챕터3
철근 400톤의 진실
세월호 무게중심에 미세한 영향만 준다.[5]
챕터4
외력의 흔적
생존자들의 공통된 충돌 증언(기울기 전에 들은 충격음)
챕터5
정체 모를 괴물체
괴물체는 컨테이너일 수가 없다.
챕터6
잠수함 충돌 가능성
해군이 레이더 영상 공개해야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챕터7
세월호를 인양하라
현재까지의 인양 과정은 증거인멸 및 훼손 우려가 크다.
챕터8
세월호 닻의 진실
닻 포함 고의침몰설의 요소들은 말이 안 된다.
챕터9
AIS 조작설의 진실
AIS는 조작되지 않았다. 기계적-시스템적 결함이 있을 뿐.
챕터10
VTS 관제영상 조작설의 진실
VTS 관제영상은 조작되지 않았다. 다른 배들도 같은 오류 현상이 있었다.
챕터11
CCTV 조작설의 진실
CCTV는 조작되지 않았다. 조작되었다면 그건 이미 세계 최고 전문가 수준.
챕터12
한쪽 엔진 정지설의 진실
엔진은 둘 다 같은 속도로 작동되고 있었다.
챕터13
지그재그의 진실
세월호는 조류에 조금씩 흔들리며 방향을 잡았던 것 뿐.
챕터14
예슬이 사진의 진실
AIS가 꺼지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
챕터15
전자등대의 진실
여러 기계적 오류 때문. VTS 관제영상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흔한 증상이다.
챕터16
서우 사진의 진실
AIS 항적은 조작되지 않았다는 결정적 증거
챕터17
프락치의 정체
경력 12년 일등항해사와 김관묵 교수 등이었다.[6]
챕터18
가장 시급한 일
강력한 세월호 특조위를 만들어야 한다.
챕터19
다큐를 만든 이유
아이의 기일 다음 날 참사가 터져 유가족들을 돕는 게 내 아이 빚을 갚는 것.
챕터20
17살의 버킷리스트
수현이 사진은 세월호에 이상 현상이 없다는 걸 증명. 평화로운 아침을 의미

 

 

 

 

 

https://namu.wiki/w/SEWOLX

 

 

 

 

[영상 타임라인] '세월호 구조 참사' 110분의 기록 - 뉴스타파

 

 

세월호 레이더 영상 공개... 급변침 이유는 잠수함 또는 스텔스 군함? (2014.6.26)

 

 

 

 

[인터뷰] 자로 “해군이 레이더 영상만 공개하면 끝난다"

 

 

 

뉴스타파 세월호 보도, 핵심은 이거였썸!

 

 

 

 

 

 

 

"세월호 침몰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열려있던 수밀문 [뉴스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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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단원고 학생들의 마지막 15분(전체 영상)

해군함정이 세월호 사고 인지하기 전에 사고 현장에 있었다고 증언했네요

 

http://m.ppomppu.co.kr/new/bbs_view.php?id=freeboard&no=5539201

세월호 참사 당일 본험 리처드 함에서 출동하고 있는 MH-60 헬기. 하지만 이 구조 헬기는 사고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고 이날 다시 함정으로 귀항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본험 리처드 함에서 출동하고 있는 MH-60 헬기. 하지만 이 구조 헬기는 사고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고 이날 다시 함정으로 귀항했다.ⓒ미 해군

2년 전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서서히 침몰하고 있던 그 시각, 인근 공해상에 공교롭게도 당시 이른바 쌍용훈련을 마치고 모항인 일본 사세보 항으로 귀환 중이던 미 해군 7함대 소속 본험 리처드함이 있었다. 4만 톤이 넘는 이 막강한 상륙강습함에는 수송용 대형 헬기인 '시 나이트(CH-46, Sea Knight)' 42대를 비롯해 해상 수색 능력이 뛰어난 대잠헬기(MH-60R) 6대를 탑재하고 있었다. 3천 명이 넘는 미 31해병대 병력을 태우고 있던 이 함정은 의료 시설 또한 웬만한 병원을 능가하는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던 당일 저녁, 이 본험 리처드함의 조 타인츠 사령관은 함대 공식 페이스북에 급박했던 세월호 침몰 당시의 상황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공지를 남겼다.

"우리는 구조 요청을 받고 즉시 침몰하는 배를 향해 전속력으로 방향을 바뀌었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무슨 일을 하던 즉각 중지하고 구조활동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이 비극의 급박함을 알고 최고의 프로페셔널 정신으로 대응했습니다. 우리 수색팀은 즉각 한국 당국과 통신을 했고, 항해팀은 현장 접근의 안정한 코스를 파악했습니다. 엔지니어들은 최고의 속력(RPM)을 올렸고 선상 승무원을 비행기(헬기) 출발을 준비했으며, 우리 대원들은 신속하게 20인용 구명보트를 장착해 출발을 준비했습니다. 메디컬팀도 즉각적인 준비 상태를 갖추었으며 우리 대원들은 만일의 필요에 의해 조그마한 보트도 대기시켰습니다. 정말 진정한 팀의 정신(effort)이었고 필요한 순간에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을 함께 바라보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본험 리처드'함의 블루팀과 그린팀은 비극에 빠진 친구를 돕기 위해 어깨를 맞대며 일했습니다.(중략)"

4월17일 새벽 본험 리처드 사령관이 함대 페이스북에 공지한 내용.
4월17일 새벽 본험 리처드 사령관이 함대 페이스북에 공지한 내용.ⓒ본험 리처드 페북 캡처

타인츠 사령관이 이처럼 즉각 비상(alert)을 발령하고 긴급 구조에 나섰지만, 결론적으로 세월호 구조를 위해 가장 먼저 사고 해역으로 급파한 MH-60 헬기 두 대는 한국 정부의 사고 해역 진입 불허 방침으로 세월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회항하고 말았다. 이에 관해 미 해군도 16일(한국 시각 17일), 발표한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미 수륙양용 11함대 헤이디 에글 제독의 말을 인용해 "우리는 사고 사실을 통보받았을 때, 즉각적인 도움을 위해 항로를 변경했다"며 "그러나 한국의 대응(미숙)은 우리 (구조) 자산의 즉각적인 이용을 덮혀버리고(eclipsed) 말았다"며 이례적으로 당시 한국 정부의 초기 대응 문제점을 지적했다.

미군의 '국방일보'격인 '성조지(Stars and Stripes)'도 당시 "구명보트(20인승)를 장착한 MH-60 헬리콥터가 초기에 본험 리처드 구조함에서 출발했으나, 이내 회항(recall)했다"고 주한 해군 아브라함슨 대변인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당시 해병대 병력을 비롯한 막강한 구조 자산을 가진 본험 리처드함이 즉각적인 세월호 구조에 투입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일부 언론도 뒤늦게 다음 날(17일) 보도에서 "본험 리처드호를 이용하면 투입된 헬기가 급유 등을 위해 육지로 날아가는 시간을 아낄 수 있어 그만큼 구조에 더 집중할 수 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해군)는 구조 헬기의 사고 해역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국방부 "이미 침몰한 상황"... 다음 날도, "인근 해역 수색하라"

당시(17일) 국방부는 트위터에 올린 해명 자료를 통해 "본험 리처드함은 오전 11시 58분경 우선적으로 MH-60 헬기 2대를 사고해역으로 출동시켜 탐색구조 현장에 도착했으나, 당시 사고 현장에는 이미 사고 선박(세월호)의 선체가 대부분 침몰한 상황에서 한국 공군 C-130 항공기를 비롯한 다수의 구조헬기가 집중 운영되고 있어, 한국 해군은 원활한 구조작전을 위해 출동한 미 헬기를 본험 리처드함으로 복귀시켜 추가 요청에 대기토록 했다"고 밝혔다.

사고 당일 정오 전후 세월호 참사 사고 현장 상공에 미군 구조 헬기도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많은 한국의 구조 항공기나 헬기들이 집중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을까? 하지만 한국 정부의 본험 리처드함의 세월호 구조 투입 거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사고 다음 날(17일) 미 '성조지'는 주한 해군 알로 아브라함슨 대변인의 말을 인용해 "(사고 다음 날에도) 본험 리처드 구조함에서 출발한 MH-60 헬기는 수색 현장 지휘관의 요구에 따라 재난 현장에서 약 5에서 15해리 또는 6에서 17마일(27km) 벗어난 지역을 수색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이어 "아브라함슨 대변인은 왜 그들(한국 관계자)이 이 지역을 수색하라 했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에 관해 당시 4월 21일, 미 '성조지'는 "한국 국방부 대변인은 월요일(21일), 본험 리처드함이 이 지역을 떠날 계획은 없다며 미국의 추가 군사 자산이 수색에 참여할지는 알지 못하며, 한국 인력은 여객선 자체에 (수색의) 초점을 두는 반면 아마 본험 리처드함은 여객선에서 떠내려온 신체(bodies)를 수색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한 마디로 사고 해역 근처에는 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본험 리처드함에 수습되었다는 희생자도 없었다. 결국, 본험 리처드함은 당시 4월 22일, 한국 측이 자체의 수색 자산이 충분하다고 통보해 수색과 구조 임무를 완수했다며 진도 해역에서 출발하여 다시 일상적인 작전 구역으로 원대 복귀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 대변인, 미 국무부 대변인 등은 미국 함정 본험 리처드함의 이름까지 직접 거명하며 사고 현장에 파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진입 거부로 미국 전함의 구조 헬기는 사고 현장에 접근한 적도 없고, 미국 구조함도 인근 지역의 수색만 전담하는 모양새를 냈을 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진행된 여러 한미 합동 해상 군사훈련에서는 전투(combat)뿐만 아니라 재난구조 등을 의미하는 인도적 작전(humanitarian operations)을 중요한 임무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에서는 막강한 구조 자산을 갖춘 미 함정이 세월호 사고 인근 해역에 있었음에도 인도적 구조 활동은 한국 정부의 거부로 하나도 진행되지 못했다.

왜 한국 정부는 단 한 명의 구조 인력이 아쉬운 사고 당일 상황에서 막강한 구조 자산을 겸비한 미군 함정의 구조 손길을 외면한 것일까? 왜 3천여 명의 해병대 특수 요원을 태운 미 전함을 사고 다음 날에도 사고 인근 해역 멀리서 떠내려온 신체만 수색하라고 한 것일까? 왜 미군 전함을 그렇게 세월호 사고 해역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한 것일까? 반드시 밝혀져야 할 세월호 참사 의혹의 또 다른 하나이다.

김원식 전문기자

국제전문 기자입니다. 외교, 안보,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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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기획 창] 침묵의 세월

 

 

세월호의 침몰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세월호는 왜 가라앉게 됐나. 과거 검찰이 내놓았던 수사 결과는 많은 이들에게 상식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복원성 불량, 과적, 고박불량, 조타 실수가 복합적으로 세월호를 가라앉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법원은 검찰과 다른 판단을 했다. 결정적인 침몰 원인 가운데 하나였던 조타수의 조타 실수 부분도 법원에서 인정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의 상식과 달리, 세월호의 침몰 원인은 여전히 미궁 속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왜 의혹들은 풀리지 않았나.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과거 박근혜 정부 시절 만들어졌던,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는 이런 의혹들을 풀기 위해 만들어졌던 국가 기관이었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강제로 해산됐다.

 

해수부와 해경 등 당시 정부부처들은 진상규명에 어느 정도나 도움이 됐나. 특조위의 활동을 방해했던 사람은 누구이고, 특조위 내부에서는 어떤 갈등들이 있었나. KBS는 당시 특조위 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특조위에 강요됐던 침묵을 진단해 보았다. 언론 역시 세월호와 관련된 오랜 침묵의 공범이었다. 세월호 침몰 원인을 밝히기 위한 특조위와 유가족들의 노력은 외면하고, 그 안에서 벌어진 논란들만 부각해 보도했다.

 

KBS는 다른 언론들의 문제를 지적하기는커녕 부적절한 보도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공영방송의 역할을 포기하다시피 했던 KBS. 당시 KBS 내부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살아남은 사람은, 침묵하지 말고 말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말한다. 왜 아직도 세월호냐고. 하지만 침몰 원인도, 구조 방기 의혹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중단할 수는 없다. 외면과 침묵 속에 지속적으로 상처받았지만, 유족들은 지난 4년 동안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세상에 말을 걸어 왔다.

 

누군가는 회사를 그만두고 전문가 수준으로 침몰 원인에 대한 분석 작업에 몰입하고 있고, 누군가는 조금은 어색하지만, 진정성 있는 연극무대를 만들어 세월호를 잃지 말아 달라고 외치고 있다.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살아남은 사람은 침묵하지 말고 말해야 한다고 외치는 이들. 이들이 꿈꾸는 미래는 어떤 세상일까.

 

 

[서프라이즈] 911테러를 정확히 예언했던 게임 카드! 그 정체는?

 

 

 

 

 

 

[썰프라이즈] 일루미나티, 세계를 움직이는 그림자 정부의 음모?

※서프라이즈 PD 뇌피셜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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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PD가 직접 풀어주는

썰프라이즈!


오늘은 서프라이즈 애청자(?) 정형돈님께서 <아는 형님>에서 언급하셨던 일루미나티를 다뤄볼까 합니다.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를 많이들 헷갈려하시는데 정확히는
일루미나티가 프리메이슨 내에서 만들어진 조직이었는데 현재는 전혀 다른 단체가 된 것으로 보시면 되는데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이 단체들이 지금까지도 막후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냐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일루미나티에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1783년 어느 날.

1776년에 만들어진 비밀결사단 일루미나티는 10년 남짓 활동하다가 독일 정부의 탄압을 받고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놀랍게도 이 문서에서는 일루미나티가 비밀리에 활동하는 증거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프랑스혁명인데요

여기까지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일루미나티 신봉자들은 더 나아가 현재까지도 일루미나티가 워싱턴에서 미국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음모론이라고 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일루미나티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증거로 미국 1달러 지폐를 들었는데

여기서 신세계의 질서(New World Order)는 바로 일루미나티의 캐치프레이즈라고 하는데요.

일루미나티가 정확히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때 그 계획의 전모가 담긴 듯 한 게임카드가 공개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1995년에 제작된 게임카드↓

게임 제작사 대표가 한 직원이 일루미나티 사이트를 해킹했고 거기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카드를 만들었다고 고백해 충격을 줬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2001년 발생한 911 테러와 펜타곤 테러사건 등이 있고

이 모든 사건은 결국 일루미나티가 계획해 벌어진 일이라는 뜻?

일루미나티의 학살 예고 또한 담겨 있었습니다.

한편 일루미나티는 그들의 이념에 대항하거나 일루미나티의 존재를 알리려는 시도를 하면 가차 없이 죽여버리기로 유명한데요.

29세의 전도유망한 영화제작자였던 그는 새 영화 <그레이 스테이트>를 제작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영화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데이비드 크롤리는 이것이 일루미나티에 대한 얘기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지 얼마 후,
그와 가족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경찰은 이 사건을 크롤리가 벌인 것으로 결론 지었습니다.

하지만 크롤리의 친구들은 크롤리가 영화 개봉을 앞두고 의욕에 넘쳐 있었을 뿐 아니라
앓고 있었던 우울증 또한 딸을 키우며 진작에 치유됐다며 수사결과에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크롤리가 일루미나티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아니냐고 강하게 추측하는데요...

심지어 크롤리뿐만 아니라

일루미나티의 존재를 폭로한 유명한 영화 제작자 아론 루소, 전 FBI 국장 테드 건더슨 역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여기서부터 혐오주의※

일루미나티의 최상층부에는 렙틸리언이라는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하는데

그러다 한 번씩 방심을 하면 눈이 파충류의 것으로 변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하고,,,

?????

정.말.소.름.돋.네.요
(믿진 못하겠지만..)

일루미나티란 어쩌면 인간들의 막연한 공포가 만들어낸 일종의 현대판 신화가 아닌가 생각해 봤어요,,
물론 신화가 아닌 실화일지도 모를 일이지만요😏

더 궁금하다면 풀영상 클릭~↓↓↓

 

 

 

 

천안함 10년 2심재판서 밝혀진 의혹 8가지

 

항소심 재판 4년 증거·증언들 “(MB에도) 천안함 좌초 보고” 생존자 24명 진술서 원본서 ‘충격’ 인양책임자 “폭발아니다”

천안함 침몰사건이 벌어진지 10년이 흘렀다.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을 잇는 정부는 북한이 어뢰로 공격한 사건이라 발표하고 끝내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 명예훼손 형사재판을 10년째 벌이며 진실규명 노력이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지난 2010년 5월부터 시작된 이 재판은 2016년 1월25일 1심 재판 선고로 마무된 이후 그해 2월부터 현재까지 항소심 재판이 이어져왔다. 지난 4년 여에 걸친 항소심 재판에서 그동안 제기된 의혹이 추가로 규명되거나 밝혀졌다. 당시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최초 보고가 좌초였으며 이명박 대통령에도 그렇게 보고했다고 증언했고, 생존자진술서 원본을 보면 58명 가운데 24명이 ‘충격’이었다고 진술했다. 천안함 선체를 인양한 업체 책임자는 폭발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구조하러갔던 UDT대대장은 최초 수색때부터 선체 절단면 동영상을 촬영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정부 백서에 나온 함수의 수심와 위치에 오류가 밝혀졌다. 천안함 프로펠러가 저절로 부러졌다는 법정에서의 해군 주장은 사실과 달랐다. 절단기로 절단했다고 실토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천안함 침몰원인이 좌초나 외부물체와 충격으로 입증된 것이 아니다. 판정이 내려진 것은 아니다.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최초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의 공개가 여전히 부족한 상태다. 지난 4년 재판 주요 증언을 살펴봤다.

1.김태영 “천안함 사건직후 내게 좌초로 보고했다”

김태영 전 국방부장관은 지난해 5월16일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김형두) 심리로 열린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위원 명예훼손 사건 항소심 재판에 출석해 천안함 침몰사건 직후 처음엔 자신도 어뢰피격이라는 주장을 미심쩍어 했으며, 최초 보고는 좌초였다고 밝혔다. 김 전 장관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도 보고했다고 증언했다. 김 전 장관은 “처음엔 좌초로 비슷하게 보고받았다. 해군이 정확한 사고사실을 몰라 저한테 애매하게 보고됐고, 제가 대통령께도 (좌초라고-기자 주) 말씀드렸더니 이 전 대통령이 ‘이거를 북한의 행동이라고 어떻게 확인할 수도 없는 것이니 정확히 처음부터 객관적으로 조사하라’고 해서 그런 식으로 조사했다”고 밝혔다. 그는 김 전 장관은 최원일 천안함장을 만나 물었더니 울면서 어뢰피격이라고 해 그 때부터 어뢰라고 확인(판단)했다고 밝혔다. 처음엔 북한 공격이라고 생각지 않았다고 했다.

2.생존자 진술서 원본 24명이 ‘충격’ 14명이 ‘폭발’

이 재판에서는 그동안 일부만 공개됐던 생존자진술서 원본 700여쪽 자리가 증거로 제출됐다. 지난 2018년 12월20일 재판에서는 신상철 피고인의 변호인인 심재환 변호사가 이 진술 내용을 분석한 결과 생존자 가운데 24명이 최초 작성한 진술서에서 ‘충격’이라고, 14명이 ‘폭발’이라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나머지 20명은 불확실한 진술이었다. 윤종성 전 민군합조단 과학수사분과장 겸 군측 조사단장(현 성신여대 교수)을 신문하는 과정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날 변호인이 공개한 천안함 절단면 부근인 CPO 침실에 있던 생존자인 조타장 원사 김병남은 “폭발 아님. 외부 부딪치는 소리. 외부충격. 파공”이라고 진술했고, 갑판장 상사 김덕수는 “폭발음은 아니었다, 외부충격”이라고 진술했다. 이 두 사람의 진술은 처음 공개됐다. 전탐장 김수길 상사도 “충격. 상선같은 것이 부딪힌 것. 충돌. 충돌음”이라고 진술했다. 이 진술들은 합조단이 ‘천안함피격사건 합동조사결과 보고서’(합조단 보고서)에 요약 기록한 58명의 생존자 진술에도 빠져있다.

▲경기도 평택 해군 2함대에 전시중인 천안함 함수 선제. 사진=이우림 기자
▲경기도 평택 해군 2함대에 전시중인 천안함 함수 선제. 사진=이우림 기자

 

3.인양책임자 “천안함 폭발한배 아니다” 주장

사고 직후 침몰한 천안함 함수와 함미 선체를 인양한 책임자들은 천안함 절단부위가 폭발한 배의 모양과 다르다고 의견을 법정에서 내놓았다. 최초의 증언은 재판 7년 만인 지난 2017년 11월15일 공판에서다. 2010년 4월초부터 4월15일 천안함 함미를 인양할때까지 작업을 했던 88수중개발의 부사장인 정호원씨는 천안함 손상상태와 폭발로 인한 선박의 손상상태가 다르다고 밝혔다. 폭발한 배와 천안함이 어떤 면에서 다르냐고 묻자 정 부사장은 “특히 내부폭발해도 (두라3호와 같은) 저정도인데, (외부에서) 미사일 맞았거나 (어뢰가 폭발했다) 하면 선체 일부가 떨어져나갔다고 봐야한다”며 “유류보급함 폐선 전에 (군에서 폭발) 실험을 하는데, 그런 것을 보면. 저런(두라3호 같은) 형태”라고 증언했다.

이어 8주기였던 지난 2018년 3월28일 KBS 추적60분팀은 함수를 인양한 업체 대표인 전중선씨와 인터뷰 내용을 방송했다. 전씨는 “북한에서 어뢰가 와서 쏴요? 십원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라며 “저거는 포맞은 배가 아니다. 폭발한 배가 아니다. 바닥도 스크래치가 있는 것을 선명하게 봤다”고 밝혔다. 그는 “어뢰로 맞았는데 스크래치가 왜 생기냐”며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를 못하는 그런 일”이라고 주장했다.

4.절단면 첫 수색부터 동영상 촬영

해군은 천안함 침몰직후 구조 수색을 하는 과정에서도부터 천안함 선체를 동영상으로 촬영해놓았다는 증언도 나왔다. 당시 해군특수전 여단 1대대 소속 UDT대대장(당시 해군중령)이었던 권영대 현 인천해역 방어사령부 27전대장(해군대령)은 2017년 2월16일 재판에 출석해 당시 잠수사들에게 수중카메라로 동영상을 찍어보라고 지시했으며, 촬영한 영상을 보고 내부폭발은 아닌 것 같다고 판단해 상부에 보고했다고 밝혔다. 구조팀이 사고원인을 알 수 없는데 신상철 피고인이 ‘알고도 은폐했다’고 허위주장했다는 검찰 주장과 거리가 있다는 반론이 나온다. 절단부위 상태를 초기부터 알고 있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5.어뢰에 엉켜붙은 철사 뭉치 왜 펜치로 제거했나

천안함 사건 원인의 결정적 증거로 지목된 이른바 1번 어뢰에 엉켜붙은 철사뭉치가 항소심 재판에서도 미스터리한 쟁점이었다. 특히 최초 어뢰발견 직후 동영상에 철사뭉치가 보였지만, 이를 국방부 이송한 뒤 촬영한 사진을 보면 조사관들이 철사뭉치를 펜치로 제거하고 있었다. 지난 2018년 7월19일 재판에서 국방부가 법원에 제출한 CD에 들어있는 사진이었다. 해군이 함께 어뢰에 뒤엉켜 인양된 철사뭉치를 그대로 두지 않은채 임의로 제거한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 2010년 5월15일 오전 쌍끌이어선이 수거해 올렸다는 이른바 1번어뢰 수거직후 동영상. 추진후부와 프로펠러 사이의 축에 남아있는 녹의 모양이 무언가에 감겼던 흔적처럼 보인다. 사진=검찰의 법원제출 동영상 갈무리
▲지난 2010년 5월15일 오전 쌍끌이어선이 수거해 올렸다는 이른바 1번어뢰 수거직후 동영상. 추진후부와 프로펠러 사이의 축에 남아있는 녹의 모양이 무언가에 감겼던 흔적처럼 보인다. 사진=검찰의 법원제출 동영상 갈무리

 

6.어뢰축의 녹 자국 뭔가, 왜 축 간격을 줄였나

재판부는 지난 2017년 5월18일 재판에서 1번 어뢰 수거직후 촬영 동영상을 상영했다. 이 영상을 보면, 어뢰추진체의 추진후부와 프로펠러 사이의 축에 뚜렷이 남아있는 녹의 형태와 딸려나온 밴드의 형태가 거의 유사했다. 이 영상에서 추진후부와 프로펠러 사이의 축 간격이 이후 사진에서는 크게 좁혀져 있었다. 조사과정에서 이를 좁혀 이 자국을 안보이게 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다.

7.천안함 프로펠러 왜 절단해놓고 부러졌다 거짓말했나

천안함 사고원인과 무관해보이는 해군의 거짓말도 의문을 낳았다. 천안함 함미 우현의 프로펠러의 날개 하나가 잘려 있는 모습을 두고 검찰과 해군측은 2011년 재판에서 늘 부러졌다고 주장해왔다. 해군은 2018년 9월13일에야 플라즈마 절단기로 잘랐다고 실토했다. 천안함 선체 현장검증 과정에서 피고측 심재환 변호사가 “깨진게 아니라 잘라낸 것 아니냐”고 따지자 윤수정 검사는 “보고서 49쪽에 보면 거치대 올라탄 상태에서 바닥에 내려놓다가 잘렸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날 오후 5시가 넘어 재판부가 함미 프로펠러를 다시 보러 갔더니 해군의 김창호 중령은 “선체를 육상에 올릴 때 안착하다 (프로펠러가) 낮아서 플라즈마 절단기로 절단했다”고 밝혔다. 왜 이 같은 사실을 8년 동안 거짓말 해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을 낳았다.

8.함수 위치 표시 오류 밝혀져

정부가 천안함 사건 직후 반파된 함수의 위치를 백서에 잘못 표시한 사실도 재판에서 밝혀졌다. 2017년 10월10일 미디어오늘이 입수한 국립해양조사원의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 제출 사실조회 회신 자료에 따르면, 국립해양조사원은 천안함 함수의 최종 침몰 위치인 백령도 남방 37-54-20N, 124-40-59E 지점의 수심이 24m라고 밝혔다. 국립해양조사원은 이 수심(24m)을 1992년 수로 측량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사건 1년 뒤 발간한 공식 책자인 ‘천안함 피격사건백서’에는 해당 지점의 수심에 대해 표에는 20m로, 해도상에는 5~10m로 기록돼 있었다. 특히 백서의 해도에 표기된 함수최종 침몰위치는 실제 위치보다도 약 800~900m 남쪽이었다. 윤준 서울고법 형사5부 재판장은 그해 9월26일 공판 시작에 앞서 “백서에 있던 함수의 위치 표시가 잘못된 것 같다”며 “국립해양조사원의 사실조회 회신을 보면, 좌표가 37-54-20N, 124-40-59E인 것은 같은데, 그(것을 표시한) 점이 다른 데에 있다”고 밝혔다.

▲ 국립해양조사원이 제출한 함수위치 표시. 사실조회 회신자료
▲ 국립해양조사원이 제출한 함수위치 표시. 사실조회 회신자료
▲ 천안함 피격사건 백서에 나오는 함수 침몰 위치 표시. 사진=천안함피격사건백서
▲ 천안함 피격사건 백서에 나오는 함수 침몰 위치 표시. 사진=천안함피격사건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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