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5·18 사전 기획설, 軍기록 통해 최초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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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CBS 기획 '국민이 기억해야 할 5·18의 진실'
③신군부, 1980년 5월 10일 이전에 5·18 기획
軍 우발 사건 주장하지만 치밀한 사전 준비 작업 거쳐
육군참모총장 근무일지·계엄회의록 통해 계엄·휴교령 검토 확인
계엄령 선포 당일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육군본부·보안사령부와 논의
5·18 조기 진압 계획…미군 지원 등 고려해 5월 27일로 연기

5·18 40주년을 맞아 광주CBS는 5·18 진실 찾기 차원에서 '국민이 기억해야 할 5·18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기획보도를 마련했다. 광주CBS는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단독 입수한 자료를 토대로 관련 기획보도를 준비했다.[편집자주]

16일은 세 번째 순서로 5·18 민주화운동이 신군부의 12·12 군사 쿠데타 이후 시국을 수습하기 위한 철저한 사전 준비를 토대로 기획된 정황이 군 기록으로 확인된 사실에 대해 보도한다.

5·18 당시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하고 있는 계엄군(사진=5·18기념재단 제공)
◇신군부, 5·18 사전 준비…1980년 5월 12일보다 이틀 앞선 5월 10일 준비

5·18 민주화운동이 기존 검찰 수사에서 드러난 1980년 5월 12일보다 이틀 앞선 5월 10일부터 준비된 정황이 군 기록을 통해 새롭게 확인됐다. 신군부는 "5·18 당시 군의 발포 명령이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이뤄졌다", "마지막까지 인내심을 발휘해 선량한 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반박하는 근거가 드러난 것이다.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가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5월 10일 이전부터 5·18를 준비했다는 정황이 군 기록을 통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광주CBS가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를 통해 입수한 '5·18 민주화운동 타임라인과 관련한 선행조사에 대한 연구용역 결과 보고서'에 나온 계엄군 회의록과 육군참모총장 근무일지를 토대로 5·18이 1980년 5월 10일부터 준비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앞서 검찰은 보안사 정보처장을 지낸 권정달 등 보안사 관계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5·18을 포함한 신군부의 시국수습방안이 1980년 5월 12일부터 준비됐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번 결과보고서를 통해 계엄사 합수부가 5월 10일부터 시국을 수습하기 위한 단계적 조치를 시작했고 휴교령과 비상계엄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한 정황이 확인된 것이다. 특히 이 같은 사실은 계엄 회의에 참석한 계엄사 합수부 관계자의 발언으로도 나타났다.

광주CBS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로 부터 받은 연구용역 결과보고서에 신군부가 사전에 5·18를 준비했다는 정황이 군 기록을 통해 확인됐다(사진=박요진 기자)
◇군 투입 전 광주서 발생할 사건 예언한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은 1980년 5월 18일 오후 3시 11공수특전여단을 광주에 추가로 투입한다고 밝히면서 "지금 광주에서는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로 사태 수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실제 광주에 군 병력이 투입되기 시작한 시각은 5월 18일 오후 4시였다. 광주에 군 병력이 투입되기도 전에 사태 수습에 어려움을 있어 추가 병력을 투입한다고 언급한 것이다. 이 때문에 미래를 예언하는 듯한 정 전 특전사령관의 발언은 5·18이 사전에 준비됐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 육군 군사 정보관을 지낸 김용장씨는 지난 2019년 5월 광주를 찾아 "5·18은 전두환 신군부가 기획한 계획된 시나리오였다"고 진술했다. 김씨는 "계엄군의 광주 진압은 전두환 신군부의 정권찬탈이라는 목표 아래 이뤄졌으며 광주는 크기와 위치 등에서 신군부의 적당한 목표물이 됐다"며 "대구나 부산은 지역이 넓고 신군부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타깃이 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밖에 1980년 5월 17일 육군 참모총장의 근무일지에는 1980년 5월 17일 오전에 주요 지휘관 회의와 특전사령관 보고가 진행됐고 이후 국방부 주요 지휘관 회의와 보안사령관 방문, 청와대 보고가 이뤄졌다고 기록돼 있다. 5월 17일 밤 9시 40분쯤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가 의결됐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사전에 국방부와 육군본부, 보안사령부 등과의 치밀한 준비를 토대로 대통령에게 보고한 후 국무회의 안건으로 상정된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5월 27일 이뤄진 '충정작전' 본래 22일 계획…미국 일정 등 고려해 연기

계엄군 회의록에서 계엄사령부 부사령관은 "광주 난동은 금일 조기 일대소탕전(일망타진) 코저 하였으나 미군의 지원과 타이밍을 조정하기 위해 연기했다"고 언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앞선 군의 대부분 기록에서 "군은 마지막까지 인내심을 발휘했고 선량한 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폭도와 분리되는 시점을 기다렸다"고 주장한 것과 상충된다. 계엄사령부가 1980년 5월 21일 오후 광주시내에서 퇴각한 다음날 진압작전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군 문서를 통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음날인 1980년 5월 23일 계엄사령부 회의록에서도 육군참모총장이 "금일, 2군 사령관이 진압계획을 가지고 온다"고 발언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계엄군은 5월 27일 진행한 충정작전을 애초에는 5월 21일 퇴각 직후에 실행하려는 의지가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설립준비단은 지난 2019년 5·18민주화운동 타임라인과 관련한 선행조사에 대한 연구용역을 진행했다. 연구용역 결과보고서 내용(사진=박요진 기자)
◇5·18 사전 계획설 입증은 5·18 민주화운동 의의 격하?

신군부에 의해 5·18이 사전에 계획됐다는 사실이 군 기록을 통해 확인되면서 5·18민주화운동의 의의를 격하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5·18에 참여한 광주시민들이 주체적으로 항쟁을 이끌어 나간 것이 아니라 신군부의 의도에 말려들어 그들의 의도대로 끌려갔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5·18 민주화운동 전문가들은 5·18이 신군부의 사전계획에 의해 시작됐다고 하더라도 그 의의는 퇴색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무엇보다 1980년 5월 이전에 5·18민주화운동과 같은 규모와 강도로 저항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5·18 기념재단 조진태 상임이사는 "신군부가 5·18을 사전에 준비했다는 정황은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며 "신군부의 계획을 토대로 5·18이 시작됐을지 모르지만 시민들은 주체적으로 대응하면서 광주를 해방된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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