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22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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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행적을 찾아서

수녀님은 1910년 알바니아의 스코페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8살이 되는 해에 수녀원에 들어가서 수련을 쌓은 후

인연으로 인도의 꼴까따(켈커타)에 도달하여 성모마리아 여학교에서 20여년동안을 교사로 학생들을 가러쳤다

그리고 두번째의 소임을 위해수녀원을 탈퇴하고 나와 더욱더 어려운 빈민들을 위하여 완전히 맨몸으로 자신을 희생하였으며 결국 교황청은 그들의 단체 "사랑의 선교회" 를 인정하게되었다

그러나 결코 교황청으로 부터 물질적 도움을 받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빈민들과 같은 생활을 원했기에 필요한 물질은 별로 없었다

그들의 일들이 알려지면서 어디에서던지 후원자가 나타났고 모든 물질은 빈민들을 위해 쓰여졌고 그들의 손길이 필요한 나라마다 사랑의 선교회 를 확장시켜 나가는데 쓰여졌다

항상 그녀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 쓰시는 몽당연필에 불과한 존재라고 한다

그녀는 죽어가는 사람들 굶어서 쓰러져가는 사람들 속에서 고통 받으면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보았고 그 예수님을 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 앉으려는 울새가 예수님이 쓰신 가시면류관 때문에 앉지를 못하자

울새는 가시를 뽑기 시작한다 하나를 뽑다가 가시에 찔린다

자기자신은 가시에 찔리는 울새가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무심아가 몇년 전에 회사일로 인도에 몇달을 채류한적이 있었다

우연히도 꼴까따지방의 주변인 첸나이에서 머물었다

데레사수녀의 자서전을 읽기 전이라

꼴까따지방이 수녀님이 20여년을 봉사한 지방이라는 것을 까맣게몰랐기에

수녀님의 행적을 여행하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 정말 아까운 기회였다

조그만 더 일찍 책을 읽을 수 있었다면......

수녀님은 평생을 수녀복 두벌로 사셧지만 그에게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합니다 당신에게 줄 것이 하나도없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또 어느날 인도의 요직에 있는 사람이 찾아와서 인도를 가난에서 해방 시킬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요? 하고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기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법을 배울 때에만 가능할겄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지 않다면 우리의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하지 않다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눌수없을 것입니다"

그는 또한 기부자에게 항상 말한다

남는것을 내게 주지 맙십시오

나는 여러분 양심의 진정제가 되고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장 아끼고 소중한 것을 주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할수있는 의지와 마음을 달라는겄입니다 라고

수녀님은 항상 헌신하고 가장 낮은곳에서 봉사를 하고 있음에도 자기보다도 더 헌신적인 사랑을 보고 감동하고 배운다고 한다

하루는 한 남자가 찾아와 가까운 곳에 8명의 아이들이 있는 흰두교 가정이있다면서 도움을 요청해 그날밤 바로 쌀 한줌을 들고 갔다

아이들과 엄마는 허기진 흔적이 역역해 보였다

쌀을 주면서 어서 밥을 해먹어라고 하였더니

그 어머니는 쌀을 반으로 나누어서 반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기에 물었다

어디갔다 오시냐고?

그녀는 간결하고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옆집 회교도 가정도 끼니를 굶고 있어 나누어 주고 온다고"

데레사수녀의 마음을 감동시킨 일은 이뿐이 아니라면서 자신은 아직 부족하고배워야 한다고 늘 말한다

우린 어떻게 하란말인가 처다보지도 못할 일들만 하고 다니셨으니

이 책을 읽으며서 또 하나의 감동을 받는것은

인도에서의 25년 동안 빈민을 보살피면서 자기의 손에서 죽어간 사람이 25000명이라는사실에 충격이 아닐수 없다

무심아는 첸나이 숙소 입구에서 살고 있던 5명의 가족빈민들을 매일 만난다

그들 역시 바닥에 깔 모포한장과 밥그릇 몇개 정도이며

씻지도 않고 애들은 옷도 없이 지낸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빈민들이기에 꼭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육신을 움직일 수만 있어면 도움의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데레사수녀님이 만나는사람들은 빈민중에서도 아주 빈민들

동물들보다 못하게 버려지고 죽어갈때는 벌래가 생살을 파먹어 들어가 거의 시체같은 사람들만 구제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노인들 점심식사 봉사활동도 정말 칭찬을 받을 일이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봉사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한다(봉사자들에게는 죄송)

그녀의 희생적인 삶에 감동을 받은 요한 바오로2세는 친히 인도 꼴까따를 방문하여 빈민시설을 둘러보고는 제안을 한다

교황청이 이 빈민과 수녀에게 무엇을 해주었으면 좋겠나고?

수녀님은 절대 실수하지않는 하나님의 답을 믿으시고는 서슴없이 대답하기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바티칸 교황청건물 일부를주십시오"

황당한 대답에 교황은 어떻게 하였을까?

2년을 고민하다1988년(우리나라올림픽의해)5월에 바티칸의 일부를 데레사수녀에게 넘겼다

수녀님은 그곳을 버려진 여성들이 사는 곳으로 리모델링하여 사용하고있다

교황청을 여행하는 관광객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곳을 알거나 그곳을 찾아오는 관광객은 드물다고 한다

바티칸시국 중에서 가장 쓸모있고 성스러운 곳은 바로 수녀님이 개조하여 만든 빈민촌 뿐이다

그는 자기자신을 들어내고 싶어 하지않는다 그렇다고 억지로 숨지도 않는다

들어내는 기술도 없거니와 그러한 자체를 아예 알지를 못한다

그는 자서전도 어록집도 선문답지도 설교적인 책 한권도 남기지 않았다

또한 그분은 영원한 삶의 천국도 바라지도 않았다구원하지도 않았다

오르지 사랑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성녀였다 (세계의모든 언론과 기관들은 그녀를 성녀로 추대해야 한다고 했지만 정치적으로나 어떤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교황청은 성녀 한단계 아래인 복녀로만 추대되었음)

우리나라에도 사랑의 선교회가 설립되어있다

도움이 필요하신분 도움을 주고자 하시는분

또는 봉사를 원하시는 분들은 사랑의 선교회 문을 똑~똑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 그녀의 기도문 하나를 소개 해본다

<나를 해방시켜주소서>

존경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사랑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칭찬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명예로워 질려는 욕망으로부터

찬양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인정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모멸받는 두려움으로부터

잊혀지는 두려움으로부터

오류를 범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의심받는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

오 주여 우리의 마음도 당신처름 되게 하시옵소서

나보다 다른사람이 사랑받게 하시옵소서

나보다 다른사람이 더 존경받게 하시옵소서

주여| 이런 욕망에서 벗어나도록 저에게 은총을 내리소서

나를 젖히시고 다른사람이 선택받게 하시옵소서

나는 눈에 뛰지 않고 다른사람들이 받게 하시옵소서

모든일에서 다른사람이 택함을 받게하시옵소서

내가 성스러워지려고 하는 많큼 다른사람이 더 성스러워지게 하옵소서

[출처] 테레사수녀님|작성자 무심아

"길"의 성현 경허선사 (2) 마음수행의 스승들 / 깨달음-마음다스림--

2009/07/25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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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성현 경허선사(2)

학철대오한 경허는 유유자적하며 천장암에서

낮에는 맑은 바람과 사귀고 밤에는 밝은 달과 벗하면서

때로는 구멍없는 피리를 불고 때로는 줄 없는 거문고를 타면서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들어 일 없는 사람이었으며

행함이 없는 참사람이며 모든 배움을 끊고일하는 것이없는 한가로운 도인였다

확철히 깨쳐서 장부의 일을 마친 경허의 대범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여기 있다

어느날 밤 만공스님이 큰 방에 볼 일이 있어 호롱불을 들고 들어가 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와 누워 있는 경허의 배 위에서 놀고 있었다

"스님 배 위에 뱀이 걸쳐 있습니다"

경허는 놀라지도 쫓지도 않고 그대로 누운 채 말했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라 실컷 나와 놀다 가도록 내버려두어라"

장부의 일을 마치고 일 없이 법의 기쁨과 세상 밖의 무궁한 즐거움을 누리던 경허가 처음으로 법회를 열어 중생들을 깨치고자 하는 날에 그의 어머니 박씨도 아들이 자기를 위해 법문을 설 한다는 기쁨으로 옷을 갈아입고 맨 앞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법상에 앉아 주장자를 잡고 한동안 묵묵히 있던 경허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옷을 벗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전한 벌거숭이가 되자 숨 죽이고 있던 신도들은 소리를 지르고 처녀들은 황망히 법당을 뛰쳐 나갔다

완전히 벌거벗은 알몸이 된 경허는 어머니 박씨에게 말 하였다

"어머니 저를 보십시오'

어머니는 크게 놀라고 화가나서 "무슨 법문이 이렇단 말인가?" 하고는 박차고 나가버리자

경허는 껄껄 소리를 내어 웃으면서 벗었던 옷을 하나씩 다시 입고는 주장자를 세번 내리치고는 법상을 내려왔다 이것으로 설법은 끝이다

경허의 첫 설법은 무엇을 의미 하는걸까?

부모로 부터 받은 육신으로 부모로 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법신을 보이려는 뜻이 아닐까

눈 감은 범부는 경허의 육신을 볼 뿐이지만 눈뜬 부처는 경허의 법신을 보는 것이다

드디어 주장자를 꺽어 문 밖으로 던져버리고 훌훌 털고 산을 나서서 빈 배처름 떠돌면서 인연 따라 교화를 배푸니 상투적인 데서 벗어나고 격식을 두지 않았다

53세 때인 1898년도에 부석사에서 금정산 범어사로 가서 영남 최초의 선원을 개설하고 하안거를 지도하는 등 선풍을 진작한다

어느 한때 갈산 김씨의 49재가 있는날 주지인 태허 스님이 장을 보아 법당에 떡과 과일을 푸짐하게 잘 차려 놓았다 법당 앞에는 벌써부터 김씨의 49재가 있다는 소문으로 마을 사람들이 주린배를 움켜지고 웅성거리고 서있었다

태허 스님이 촛불을 밝히고 향을 피워 막 제사를 올리려는 때에 벌써부터 경허는 차려놓은 떡과 과일을 전부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법당 앞에 모여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에게 남김없이 나누어 주었다

경허의 돌연한 행동에 화가 난 태허 스님은 "왜 제사가 끝나기도 전에 재공양물을 나누어 주느냐?"

경허는 차분하게 대답하였다

"이렇게 49재를 지내야 바르게 지내는 49재 입니다"

죽어서 굶주린 산사람들에게 먼저 보시하는게 죽은 사람의 영가를 천도한다는 것이려라

오대산 월정사를 거쳐 금강산에 도착한 경허는 금강산을 유람하며 무려 175편의 연작시 "금강산유산가' 등 주옥같은 시를 남긴다

경허는 함경도 안변의 석왕사까지 올라간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홀연히 석왕사를 떠난 경허는 호를 난주라 하고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옷차림을 하고서 서민대중 속으로 들어가 교화하는 일에 손을 드리운다

일찍이 이 나라 불교 정신을 찬란하게 꽃피운 신라의 혜숙과 혜공,대안,원효가 그러했듯이 민중 속에서의 거침없는 행동과 무소유 무집착의 삶의 맥을 이어간다

60세때의 경허는 강계에서 서당을 개설하여 김탁,김소산,오화천,최문화,이여성,김유근,강봉헌,한학순,장사윤,김수장 등 수십명의 선비들과 우국지사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미 경허는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뭇사람들은 아무런 역사의식도 없이 홀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는 불법의 오묘하고 깊은 이치를 알지 못하는 편협한 생각이다

경허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묻어나는 시 한편이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다 귀밑 털이 더욱 희어졌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 늙을수록 붉어지네

병들고 술 취해서 나라 걱정 잊는가 했더니

신선 찾던 이곳도 또한 나라일세

조촐한 도시락과 담박한 나물로 위안 삼으며

서울을 잊고자 하는 옛 마음 그대로일세

흉년 생각에 맛난 음식도 삼키기 어렵고

나라 걱정에 등나무로 만든 평상에 누워도 편치 않구나

1912년 4월 24일 방랑길의 한 글방에서 울 밑에 앉아 학동들이 풀 뽑는 것을 구경하다가

길에서 열반의 세계로 입적한다

정(精), 기(氣), 신(神), 이 3요소는 기수련이나 단전호흡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도에 반비례하여 정기신(精氣神)의 개념을 명확히 설명해주는 참고 자료를 얻기는 결코 쉽지 않으며, 구한다 하여도 이론마다 제각각의 개념 정의를 내리는지라 오히려 더욱 혼란스러워지게 된다. 이 글에서는 태극선법의 이론체계를 근간으로 정기신(精氣神)의 개념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해보고자 한다.

우선, 정기신(精氣神)이란 정과 기와 신이 각각 따로따로 존재하는 어떠한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우주와 그 속에 있는 만물이 변화하며 흘러가는 법칙, 원리, 또는 근원적 힘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정기신의 원리'라고 하면 좀 더 이해하기가 수월할지도 모르겠다. 즉, 지구의 인력에 사과가 땅을 향하여 끌려가듯, 우주 전체에 골고루 미치는 근원적인 법칙이 바로 '정기신(精氣神)'의 원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精)이란 무엇인가? 정이란 응집하는 힘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입자성에 비유하면 될 것이다. 맺히는 힘인 정은 주변의 것들을 끌어당겨 덩어리를 이루려 한다. 정은 자꾸 안으로 수렴하여 통일하려는 성질을 가지며 음양의 관점에서는 음에 해당된다.

반면 기(氣)는 정과는 반대되는 힘이다. 기란 바깥으로 퍼져나가려는 힘,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려는 힘이다. 과학에서의 파동성에 비유할 수 있다. 덩어리져 뭉치려고 하는 정의 힘에 반발하여 제멋대로 사방으로 솟구치려는 기의 성질은 음양의 관점에서는 양에 대비된다.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지은 후한(後漢)의 허신은 기를 추미(芻米)로 풀이하였는데, 이는 손님에게 대접하려고 밥을 짓는다는 뜻이다. 밥을 지을 때 솥에서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게 되는데, 여기서 기의 어원이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는 수증기라는 뜻에서 차츰 발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근원적인 에너지라는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神)에 대하여 알아보자. <주역周易>에 "정기는 물질을 만들고 신은 물질을 주재한다(精氣爲物游魂爲變)"라고 하였다. 즉, 신(神)이란 독립적으로 자율 반응을 하는의식, 혹은 의지작용을 말한다.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생물의 자율적인 정신 작용이 신의 의미에 포함된다. 정과 기의 원리에 의하여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한다면, 신은 그것을 보고 감상하는 사유작용의 주체인 것이다.

이렇듯 정기신(精氣神)이란 단순히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현상이나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닌, 그것이 있기 훨씬 이전에 작용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리를 뜻한다. 잡아당기는 힘인 정을 이용하여제멋대로 반발하여 확산하려는 기를 붙잡아 단전에 쌓는다. 그리고 단전의 인력(정의 힘)으로 조절하여 온 몸에 기를 돌리게 되고, 마침내 신(인간의 정신)과 교류하여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와같은 과정을 통하여 단전호흡 또는 기수련에서 정기신의 원리가 적용되며 이러한 과정을 컨트롤하는 진정한 주체가 바로 신, 곧 인간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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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기도 대신 100일 수행하세요”
4달간 호흡 수련회 여는 제따나와선원 일묵 스님

“숨을 쉴 때 ‘무(無)~’하고 내쉴 때 ‘상(常)~’ 해보세요. 숨이 들고 나는 것만 알아차려도 수행이 됩니다. 따로 시간도 정하지 말고 하루 500번씩만 숨 쉬고 나오는 것을 지켜보세요. 지혜가 계발되고 행복해집니다.”

제따나와선원장 일묵 스님은 6월 17일 인사동 모음식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일묵 스님은 1996년 서울대 수학과 박사과정 중 해인사 백련암에서 원택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96~1997년 스님을 비롯해 서울대 재학생ㆍ졸업생 10여 명이 잇따라 출가한 것이 이슈가 돼 2003년 KBS 봉축특집 프로그램 <선객>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일묵 스님은 “현대인은 쉴 새 없이 바깥 세상에 끄달리며 산다. 호흡을 지켜보는 것은 밖으로 향했던 관심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라면서 “호흡을 보는 순간은 아무 분별이 없는 마음[平常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스님은 “연예인에 대해서는 시시콜콜한 것 까지 다 알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맹점”이라면서 “호흡을 지켜보는 것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도 설명했다.

일묵 스님은 최근 쉽게 호흡을 셀 수 있는 휴대용 카운터기와 수행수첩을 만들어 대중에게 보급하고 있다. 수행수첩 표지에는 ‘사소한 실천이 기적을 만든다’라고 쓰여 있어 호흡을 지켜보는 작은 실천만으로도 지혜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스님의 말을 저절로 떠올리게 한다.

“수행의 실천은 어렵지 않습니다. 수행을 따로 할 것이 아니라 쓸데없이 버려지는 시간부터 수행으로 챙겨보십시오. 깨진 바가지에서 물이 새듯 버려지는 시간부터 수행하세요.”

2009년 서울 방배동에 부처님이 머물던 기원정사를 의미하는 제따나와선원을 개원한 스님은 수행공동체 마을인 ‘제따나와 국제 명상마을’ 건립을 추진 중이다.

스님은 “부처님 당시의 모습을 한국에 재현해보자는 원력을 갖고 있다. 명상마을이 마련되면 세계 수행자가 어울려 살아가는 계ㆍ정ㆍ혜 삼학이 두루 갖춰진 공간으로 운영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제따나와 선원은 7월 9일~10월 31일 원주 푸른솔 명상센터에서 붓다의 호흡 명상 수련회를 개최한다. 매주 월요일 시작되는 1주간 수행 프로그램과 별도로 직장인을 위해 금~일요일 2박3일간 진행되는 주말 수련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조동섭 기자 | cetana@gmail.com
“밥 짓는 아내도 일하는 남편도 수행자입니다.”
서명원 신부의 '내가 본 성철과 한국불교'는?


법복이 잘어울리는 서명원 신부

강사: 서명원 신부(서강대 종교학과 교수)
주제: 내가 본 성철과 한국불교
일시: 2008년 12월 18일
장소: 한국불교문화역사기념관 국제회의장
주최: 조계종 중앙신도회 불교인재개발원


눈 푸른 가톨릭 신부가 불교를 가르쳐 눈길을 끈다. 서강대에서 종교학 강좌를 통해 불교를 가르치는 서명원 교수(53, 예수회, 본명 Bernard Senecal)는 프랑스인 신부다. 서 신부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예수회 초청으로 방한해 서울 근교의 한 사찰에서 한국불교를 만나 깊이 매료됐다. 1990년 사제품을 받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 파리7대학에서 한국문화를 공부했다. 성철 스님을 접한 것은 1993년 프랑스에서 석사과정 중 송광사 구산 스님의 제자였던 로버트 버스웰 교수가 쓴 〈눈 푸른 납자(The Zen Monastic Experience)〉를 읽고 나서였다. ‘돈오돈수(頓悟頓修)’ 사상을 접하자마자 ‘바로 이것이다’라는 확신을 하게 된 그는 성철사상을 주제로 한 ‘퇴옹 성철의 생애 및 전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400페이지에 걸쳐 성철사상을 조명한 서 교수의 논문은 프랑스 최초이고, 한국불교로서는 두 번째 박사 논문이다.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으로 불어와 영어, 그리고 한국어와 한문이 공존하는 그의 언어세계 만큼 가톨릭과 불교가 공존하는 그의 일심(一心)은 독특하다.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자.


참가한 청중들이 서명원 신부의 말에 귀기울이고 있다


저는 여러분과 인연을 맺으려 합니다. 일단 성철 스님에 대해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곤란함을 느낍니다. 여러분 중에는 성철 스님의 체취를 느낀 분들이 있는 반면 저는 성철 스님을 만나 뵐 기회가 없었습니다.

저를 보는 여러 가지 시선이 있었습니다. 성철 스님을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의 시선, 타종교인의 접근에 대한 학계의 시선, 서양인이 불교를 얼마나 알까하는 선입견 등입니다.

하지만 제가 불교사상, 특히 성철 스님의 사상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프랑스 사람이 한국말을 배울 수도 여러분이 외국어를 배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인도 문명에서 불교가 탄생해 중국문명으로 스며들어 퍼지듯, 현재 불교가 서양문명으로 조금씩 스며들 듯, 불교와 성철 사상도 제 안에 조금씩 들어왔습니다.

깊은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조금 어려웠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깨달음의 세계로, 겸손하게 다룰 수밖에 없는 고차원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그 가르침에 대해 이해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는지 항상 의문을 던집니다. 이에 대해 이해한다고, 또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은 경상도 사투리에다 내용도 어려워 저에게는 한국어가 아닌 또 다른 나라 말로 들렸습니다. 석사논문을 준비하며 접한 송광사 구산 스님의 <석사자(石獅子)>도 불어로 옮길 때 방향감각을 잃을 정도로 매우 어려웠습니다. 연구를 거듭하면서 저는 넓고 넓은 바다에 빠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서양 출신으로 선사를 통해 불교 안으로 들어 갈 때 마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것이 없다는 경험을 자주 겪었습니다.

그때 성철 스님은 전체를 알아가는 실마리를 주셨습니다. 저는 처음 학자로서 성철 스님과 <백일법문>을 접했습니다. 긴 수행의 정수가 담긴 <백일법문>은 어렵게만 느껴졌던 불교를 알아 가는데 큰 힘이 됐습니다. <백일법문>을 통해 복잡다단한 분류가 종합적으로 정리되고 체계가 잡히면서 12연기법과 중도사상이 다가왔습니다. 중도를 말하신 성철 스님의 사상. 한쪽에 치우침 없이, 고정관념도 없이 사는 것. 늘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저를 이끌었습니다. 성철 스님을 통해 저는 불교안으로 들어왔으며, 선수행을 접했고, 한국불교 전체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한국불교는 성철스님을 떼놓고 말할 수 없습니다. 스님이 지눌 스님의 돈오점수를 비판해 일으킨 돈점논쟁은 한국불교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논쟁이 있어야 발전이 있습니다.

깨닫고 나서부터 부처의 수행을 실천하는 오후수행불행(悟後修行佛行)은 너무 높은 경지로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그것을 오히려 높게 삽니다.

20세기 한국불교의 중요한 개혁자로서도 성철 스님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조선시대 억불숭유와 일제강점기의 여러 문제, 이승만 정권당시 정화운동으로 분열된 불교종단과 그에 따른 상처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개혁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성철 스님이 큰 사명감을 갖고 나신 것은 현재도 많은 점을 시사합니다. 한국불교 역사상 원효 스님에 비견됩니다.

저는 성철스님을 알고, 1993년부터 선 수행을 하면서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부처님 없이 못살겠습니다. 제 종교인 기독교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모국어와 마찬가지로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 수행을 하고, 불교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뼈저리게 제 자신에게 들어오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가톨릭 사제로 서강대에서 불교를 가르치면서 대학원 등 공부로 불교를 알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전국 각지의 다양한 사람 200여명이 신부님의 강의를 듣기위해 모였다

다음은 청중과의 1문1답


-가톨릭의 천지창조, 천당, 예수님의 부활 등 중심사상이 불교사상과 내면적 어떻게 양립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제 안에는 모국어인 불어뿐만 아니라, 영어도 있고 한국어도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는 설명할 수 없듯이 종교와 종교의 만남을 지적인 차원에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한국말을 구사하되 모국어체계를 통해서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똑같이 불교를 얘기하지만 기독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살면서 불교와 인연을 맺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일단 저는 우월의식을 버렸습니다. 어느 종교가 우위에 있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불교, 이슬람, 가톨릭으로 나누어 무엇이 우위다, 옳다 하는 것은 그야말로 색(色)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한국불교를 학문차원에서 믿음으로서 어떻게 접근하게 됐습니까.

“전 학자로서 불교를 접하면서도 불교를 단지 학문의 대상으로서 볼 수 없었습니다. 불교 안에 들어가야 불교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불교로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에게 수행을 하라고 강요 할 수 없지만 원문경전으로 읽으면서 교학(敎學)을 통해 수행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불교의 깨달음과 수행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큰 사명을 갖고 출가하는 수행도 있지만 주부가 남편을 위해 밥을 하고, 남편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도 수행입니다. 꼭 선원에서 참선해야 더 깨달을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출가자를 낮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재가자의 생활에 있어서 수행입니다. 저에게는 대학이 저의 선원으로 매시간 저를 일깨워 주는 수행터입니다. 학생들을 비롯해 많은 의견을 서로 나누며 참신한 생각을 접할 때마다 제가 새로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깨달음은 지혜와 함께 헌신적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에게서 발현된다고 봅니다. 남을 위해 온전히 살아가는 사람. 이기심을 완전히 버린 사람이지요. 부처님, 예수님 등 깨달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존중받습니다.”

-신부 신분으로 타종교를 배우기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와 불교가 서로 보완해야 할 점은.

“저는 종교학과이기 때문에 신학교나 신학대학원에 비해 자유롭습니다. 이슬람교에 심취해 가톨릭 신자이면서 이슬람교를 가르치는 분도 있습니다. 종교학은 여러 종교를 알고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전해야 합니다.
한국은 불교와 기독교가 활발히 만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합니다. 서로의 차이점을 찾기보다는 공통점을 찾아야 합니다. 종교적인 종조를 지키면서도 서로를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한국불교에서 가톨릭사제로 불교를 가르치듯 재가자나, 출가자 중 한 분이 신학박사 과정을 마치고 불교대학 등에서 기독교를 가르쳤으면 좋겠습니다. 종교 간 화해의 실마리는 서로를 이해하는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단순한 평가보다, 학문적, 수행적으로 서로를 깊이 알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한국 종교화합의 숙제입니다.
불교는 타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사회참여에 박차를 가하고, 기독교는 단순한 선교차원을 떠나 불교의 보살심, 자비심으로 활동을 가져야 하겠지요.”


노덕현 기자 | Dhavala@buddhap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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