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도 '패키지 돌봄' 시대

[중앙일보] 입력 2013.08.14 01:10 / 수정 2013.08.14 09:06

안심하고 애 키울 수 있는 나라 ④ 갈 곳 없는 초등 1~3학년 <3> 진화하는 사설학원
사교육의 변신 … 태권도+미술+피아노에 점심까지 원스톱 해결
나홀로 아동 학교서 픽업
아프면 병원까지 데려가
"장시간 학습 부작용 우려"

 “○○○, 줄 맞춰 뒤에 서.”

 한 아이가 헐레벌떡 교문 밖으로 뛰어나오자 태권도장 사범이 소리친다. 사범은 “차렷, 줄 똑바로 맞추고. 다 왔는지 확인해 봐”라고 말한다. 10여 명의 아이들(초등 1~2학년) 인원 점검이 끝나자 두 줄로 잘 서라고 채근한 뒤 골목길로 인솔한다. 학교 안 운동장에서 흙장난을 하던 아이들은 “다른 사범님이야”라며 놀이에 열중한다.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 관악구의 한 초등학교 앞 풍경이다. 5분 정도 줄지어 걸어가면 태권도장이 나온다. 부모 대신 학원이 아이를 안전하게 데려간다. 이 학교 정문 근처 4~5개의 태권도장이 비슷한 역할을 한다.

 초등학교 1~3학년 나홀로 아동은 32만7300명이다(여성가족부 추정). 하루에 3~5시간 어른(부모·조부모 등) 없이 지내는 아이를 말한다. 이들 가운데 절반가량은 학교 돌봄교실이나 지역아동센터의 보호를 받는다. 절반은 학원을 돌거나 집에 혼자 있는다. 돌봄교실에 다니던 아이가 만족하지 못해 민간 학원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초등 저학년 방과후 돌봄의 빈 공간을 학원들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학원들은 고유 기능만 해서는 학부모의 선택을 받기 어렵다. 다양한 돌봄 관련 서비스를 내놓고 있다. 서울 성동구의 한 태권도미술음악학원은 세 종류의 예체능 교실을 운영한다. 아이들은 부모 퇴근 시간(오후 6~7시)까지 같은 층에서 교실을 오간다. 이 학원 원장은 “수업이 빨리 끝나더라도 부모 퇴근까지 30분 정도 더 봐준다”고 말했다.

 어떤 학원은 건물 내 다른 학원과 연계해 아이를 오래 맡아준다. 지난 7일 방문한 서울 구로구의 한 태권도학원은 같은 건물에 있는 영어학원과 짝을 이루고 있었다. 태권도학원 강사는 “아이가 한 빌딩에서 ‘원스톱’으로 하루를 마칠 수 있어 훨씬 안전하다”고 말했다.

 돌봄 기능의 중심에는 태권도학원이 있다. 차량으로 아이를 데려오고 귀가시키고, 아이가 다른 학원을 오갈 때 ‘베이스 캠프’ 역할을 한다. 초등학교 1·3학년 아들 둘을 둔 직장맘 김정숙(44·서울 성북구)씨는 “사교육을 안 하고 싶어도 수업이 끝난 아이를 안전하게 픽업해주기 때문에 (태권도) 학원을 보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기도 수원시 매여울 경희대태권도 이신제(35) 관장은 “음악·미술학원은 여자 원장이 많아 큰 차량을 운행하는 데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나홀로 아동 부모는 아이가 아플 때 가장 괴롭다. 서울 노원구 A초등보습전문학원 관계자는 “근처 소아과 병원과 협력관계를 유지한다. 학원 아이가 아프면 언제든지 그 병원으로 애를 데려가면 기다리지 않고 진료를 받는다”고 말했다. 많은 학원들이 방학 땐 점심까지 해결해 준다. 본지가 서울 구로구의 한 초등학교 주변 예체능·보습학원 7곳을 확인했더니 6곳이 다양한 형태로 아이들 식사를 해결해 줬다. 서울 성북구의 한 보습학원은 위층 원장 집에서 점심을 주고 애들 낮잠을 재우며 쉬게 한다. 서울 성동구의 한 미술학원은 피아노를 가르치고 학과 공부를 봐준다. 방학 때는 학원 부엌에서 점심을 준다. 이 학원 원장은 “미술만 가르치면 애들이 다른 데로 옮길 것 같아 이렇게 바꿨다”고 말했다.

 경기도 분당에는 영어·수학·미술·논술·피아노 수업은 기본이고 휴게실·도서관·피아노연습실을 갖춘 고급형 방과후학원이 등장했다. 휴게실에는 침대가 준비돼 있고 영화를 볼 수 있게 대형TV를 설치했다. 인근 식당과 제휴해 점심을 제공한다. 한 달 이용료가 일반 학원의 두세 배인 58만원이다. 직장맘 김지윤(43)씨는 “도우미를 쓸 때보다 저렴하고 아이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학원의 변신은 공적 돌봄 기능이 취약하고 일·가정 양립이 어려운 상황에서 자연스레 생긴 현상이다.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이모(37·여)씨는 “아이가 하루 종일 학원에 있는 걸 너무 싫어하지만 애를 봐줄 사람이 없으니 학원에서라도 시간을 때우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어린아이들이 길게는 7~8시간을 학원에서 보내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경인교대 이경민(유아교육학) 교수는 “초등 저학년이 학교를 마치고 바로 학원에 갈 경우 학습 시간이 너무 길다. 충분히 쉬고 놀아야 정신건강이나 신체 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김영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여성근로자의 월 수입이 적기 때문에 학원의 돌봄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들 경우 결국 퇴직을 초래할 수 있다”며 “학원은 돌봄의 대안이 될 수 없는 만큼 공적 돌봄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 선임기자, 이지영·장주영·김혜미·이서준 기자, 민경진(부산대 국어국문학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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