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Aura)는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님(Oneness)의 빛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빛을 발하는 에너지 장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오라(Aura)라고 한다.

오라는 일반적인 광학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며,

광속의 제한을 받지 않으면서 공간을 전파하는 성질이 있다.

즉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라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오라의 빛깔을 통해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한 때, 스미소니언 연구소의

고문으로 있던 G. 해리 스타인 박사는 서기 2000년 이내에 오라의 정체가 해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아직까지 학계의 공식발표는 없었다. 과연 오라의 정체는 무엇일까?

소수의 특수한 영적차원을 가진 영시(靈視)능력자에 의해서만 보여지던 오라가 처음으로 관찰된 것은 1911년 런던의 성(聖) 토마스 병원의 윌터 킬너 박사에 의해서 였다.

그는 색유리로 된 스크린을

통해서 인간의 신체 주위에서 16센티 넓이의 광채나는 테두리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당시 그는 이 오라가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 형태와 색깔이 변한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의학적인 진단에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1939년 소련의 전기기사이자 아마추어 사진기사인 세미온 키일리언(Semyon Kirlian)에 의해 최초로 촬영되었다.

그는 한 병원에서 전기의료기를

수리하다가 의료기에 가까이 닿은 피부에서 희미한 빛이 발생하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 뒤 직접

촬영장치를 만들어 많은 실험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모든 생명체는 고주파 고전압 저전류의 상태에서 각 생명체의 성질에 따라 독특한 빛이 발견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키일리언은 레닌그라드에 사는 외과의사인 미하일 가이킨의 도움으로 오라가 방출되는 부위가 정확히 한방에서 말하는 ‘경혈’과 일치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동양의학에서는 기(氣)가 이동하는 통로를 ‘경락’이라고 하며 그 경락 중간 중간에 있는 인체 외부와의 교류 장소를 ‘경혈’이라 한다.

하지만 그 실체를 증명해내는 것이

쉽지 않아서 서양의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동양의학이 오랫동안 미신으로 치부되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이 기와 경락의 실체를 증명해낸

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북한 한의사 김봉한이다.

그의 의학적인 성과는 먼저 베일에 싸여 있던 경락의 존재를 현미경으로 확인했다는 것, 그리고 모든 생명체의 발생시

‘경락’이 가장 먼저 형성되는

것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락이야말로 우주 탄생과 모든 생명현상의 근원이라는 것을 규명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경락은 혈관 속에도 있고 혈관 밖에도 있으며

그 속을 흐르는 생명에너지가 모든 세포 형성, 재생, 치유에 관여하고 있다고 한다. 즉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궁극적인 열쇠는 경락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락을 따라 흐르는 생명에너지에 대해서는 근대 전기생물학의 토대를 정립한 해롤드 S. 버어 박사도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식물 묘목의 싹에서 성장한 묘목의 모양을 하고 있는 전자기장을 발견해 학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임이 발견되었다.

즉 인간의 태아에게서 그가 성숙한

상태의 전자기장이 방출된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있는 오라의 특성을 고려해볼 때,

식물 묘목의 싹에서 발생된

전자기장이나 태아에게서 방출된 전자기장은 모두 오라이다.

요약하면 동양에서의 기(氣)가 과학적인 용어로는 전자기적 생체에너지요, 유럽이나 남미에서는 오라(Aura) 혹은 오르곤(Orgon)으로, 힌두나 요가에서는 프라나(Prana) 등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방의 고전 『황제내경(皇帝內經)』에는 “경락이 의(意)를 간직한다”고 되어 있다. 이는 경락을 따라 흐르는 것이 기(氣) 즉 ‘마음’이라는 것을 말한다.

김봉한에 따르면 혈관 안팎에 경락이 있음이 확인된 바, 그러므로 혈관 속 경락을 따라 흐르는 마음의 작용이 혈액의 작용과 무관하지 않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혈액은 인체를 구성하고 신진대사를

촉진하며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물질이다. 사실 사람의 몸은 100% 혈액으로써 조성되므로 혈액은 곧 인간의 생명 그 자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성경에서도 이와 관련된 구절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창세기 9:4, 레위기 17:11, 신명기 12:23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요점은 ‘피가 곧 생명’이라는 것인데 사실 피는 생명 일 뿐 아니라 동시에 ‘마음’이기도 하다.

피가 곧 마음이라고 하면 생소하게 들릴 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얘기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동양에서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알고 일상에 적용해왔으며 기독교의 세계관이 지배적이었던 서양에서도 심심찮게 논의된 내용이다.

17C 생리학자인 갈레노스는 피 속에 영(靈)이 가득차 있음을 말했고 <피의 순환이론>을 제창한 윌리엄 하비 역시 피를 영적인 액체이며 생명의 원리라고 하였다.

사실 피가 모이는 장소를 ‘피주머니(血臟)’라고 하지 않고 ‘마음 주머니(心臟)’라 부르는 것도 우연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피’자체가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우리나라 말뿐만 아니라 영어에 있어서도 ‘heart’ 라는 단어는 ‘심장’과 ‘마음’이라는 뜻으로 동시에 쓰이고 있지 않은가.

또 사고로 인해 많은 피를 수혈받은 사람이 갑자기

성격이 변하거나 분명히 동일한 혈액형의 피를 수혈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쇼크로 죽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모두 피가 마음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같은 혈액형이라 하더라도 그 피의 혼탁함의 정도에 따라 즉 서로 차원이 다른 혈액(마음)이 갑자기 섞일 경우 충돌을 일으키며 혈구들이 파괴되어 얼마든지 쇼크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피가 곧 마음’이라는 전제는 ‘물질이 곧 신’이요,

‘육이 곧 영’이라는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얼음과 수증기가 H2O로서 동일하듯이 밀도에 따른 상태가 틀릴 뿐 구성물질 자체는 정확히 같다.

그러므로 밀도에 따른 상태를 무시하면 ‘100% 피로 조성된 인간은 100% 마음 그 자체’이다. 현대 양자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사람’이란 존재는 에너지가 육안으로 보기 좋을 만큼 혹은 접촉하기 쉬울만큼 치밀한 간격으로 모여있는 것일 뿐이다.

다만 마음은 물질과는 달리

자유로운 에너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물질은 마음이며, 모든 마음 또한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물질이다. 그러므로 요즘 흔히 거론되고 있는 심신상관의학은 조금 모자란(?) 학문이다. 왜냐하면 몸과 마음은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몸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물질이나 마음이 모두

에너지의 한 형태임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빛에너지인 ‘오라’는 과연 무엇일까? 쇠의 냄새를 맡아 보면 쇠 특유의 냄새가 나고,

고무에서는 고무 냄새가 나며, 흙에서는 흙냄새가 난다. 이는 다름아닌 물질 자체의 원소가 붕괴되어 떨어져 나오면서 그 입자가 후각에 와 닿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갓난 아이에겐 젖내가

나고 중병에 걸린 사람에겐 썩은 피로 말미암아 썩은 냄새가 난다. 또한 화를 내는 사람 입에서는 단내가 나며 노인들에게서는 노인 특유의 냄새가 난다. 이것도 물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생각의 물질이 방출되어 후각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이 냄새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떤 마음을 아주 강하게 품었을 때 뿐이며 대개의 경우는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좀더 영적 차원이 올라간 사람의 경우에는 냄새로 상대방의 미묘한 마음까지도 알아차릴 수 있다.

◀◀ 한쪽이 잘려진 장미꽃잎이 여전히 전체적인 오라를 발산하고 있다. 이러한 팬텀오라(Fantom aura)는 약 15분간 지속된다.

◀ 오라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각기 다양한 색깔로 나타나며 마음이 바뀌면 오라의 색깔도 바뀐다.

흰색_영적 행로확대, 육체에서 벗어남
황금색_용서, 기쁨, 자유, 자비
빨강_정열, 생명력, 육체적 활동
주황_창조적, 예술적, 명랑, 감각적
노랑_햇빛, 유연성, 낙천적, 독창적


녹색_치유, 카운셀링, 인내, 조화, 자긍심
파랑_통일, 평화, 은총, 교감, 영적인 사랑
남색_깨달음, 통찰력, 투시력, 영적인 계시
보라_신비, 깊은 영적 통찰, 영적지도자

구세주 조희성님의 말씀을 예로 들면,

도둑질할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시커먼 장마구름 같은 것이 뭉게 뭉게 피어나면서

구린내 같은 고약한 냄새가 풍긴다고 하시며 그리고 음란한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서는 노르스름한 안개와 같은 물질이 나오는데, 그 몸에서는 뱀냄새 같은 비린내가 난다고 하신다.

여기에서 시커먼 장마 구름이라든지

노르스름한 안개와 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마음을 먹고 있을 때 방출되는 일종의 ‘오라’이다. 즉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와 달리 오라는

생각이라는 물질이 빛에너지 형태로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품고 있는 생각이 바뀌면 냄새 뿐 아니라 오라도 바뀐다.

피가 곧 마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흔히 혈액형에 따라 일정한 성격이 있음은 인정한다.

사실 피의 성향이 마음의 성향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동일한 혈액에 유사한 성격경향이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이것은 오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용서와 자비의 마음을 강하게 품고 있으면 황금색의 오라가 나온다든지, 스트레스를 받으면 적갈색의 오라가 나온다든지 하는 것이 그러하다.

성경이건 불경이건 모든 종교의 경전은

서로 다른 두 신(神) 혹은 두 마음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하나는 어둠의 신이며 분열과 죽음의 신인 마귀(마군)며, 다른 하나는 빛의 신이요,

통일과 질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신인 하나님(부처님)이다. 그렇다면 죽음과는 완전히 별개인 빛에너지인 오라는 무엇일까? 당연히 하나님의 신이다.

여기서 하느님이 아니라 ‘하나님(Oneness)’이라는 용어를 쓴 이유는 하나님이야말로 ‘오라’를 표현하는데 가장 적절한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학문과 종교를 초월한 단어이다. 말 그대로 인류 전체, 나아가 온 우주 만물 속에 공통적으로 깃들어 있는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존재를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얼음과 수증기를 비교해봤을 때, 하나는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볼 수 없지만 동일한 원소 H2O로 이루어져 있듯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 또한 하나님의 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컨대 오라는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존재하는, 온 우주 전체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는 하나님의 빛인 것이다.* 구미숙 기자

<관계맺기가 점점 두려워진다면?>

대인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합니다.

이들은 타인과 관계 맺기를 회피하거나 심지어는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를 호소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소심하고 우유부단한데, 이들의 성장과정을 추적해 보면, 형제가 없었거나 형제간 나이터울이 많이 나거나 부모로부터 과잉보호를 받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 형제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경쟁도 하고 다투기도 하면서 좌절도 해보고,

자기주장도 강하게 내세워도 보고,

타협도 하는 등의 경험을 통하여 삶의 기술을 익혀야 하는데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데다가 대부분이 왕따를 당한 경험까지 있어 타인을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의 내담자를

상담할 때면 이들에게 권투나 격투기

등의 무술을 배워보라고 권합니다.

그 이유는 맞고

때리는 격렬한 운동을 체험하면

우선 육체적인 자신감을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체험이 아니더라도

지금껏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해보라고 일러주는데 어떤 것에서든지 자신감이

생기면 도미노현상을 불러일으켜 점차 자신감이 확대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타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가족만큼 풍요로운 관계는 없다>

가정은 가장 안전한

곳이어야 하는데, 의외로 가족으로부터

상처받은 것이 원인이 되어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회피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부모의 이혼, 가족 간의 갈등,

차별대우 등으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충분한

사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가족을 신뢰하지 못하고 이 마음이 일반화되어 모든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아래와 같은 저의 경험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몇 년 전 중학생이었던

제 친구의 아들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비보를 들은 새벽녘에

바로 장례식장으로 갔더니 이미 많은 친구들이 와 있었습니다.

보통의 상갓집이라면

잔칫집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왁자지껄하고 의례히 한 쪽 구석엔 고스톱을

치는 사람들이 자리 잡기 마련입니다만,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은

모두가 죄인인양 침묵 속에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그 다음 날은 화장을 하러 갔습니다. 화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비명을 지르듯 울부짖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큰 슬픔에 빠진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까?’하고

그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내 친구의 아내,

즉 아들을 잃은 어미인 것을 알았습니다. 존재의 상실이 그렇게 큰 슬픔을 안겨주는 것이란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느 때부턴가

존재로서의 가치를 존중하기보다는

그의 능력이나 역할에 가치를 두게 됩니다만,

가족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절대적인 존재이며 축복입니다.


혹시 가족에게 미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시간을 내어 화장터에 한번 가보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상심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가족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게 됩니다.





<묻어두었던 상처들을 이제 새롭게 해석해보자>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여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한 두 번의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는 ‘모두가 그럴 것이다.

언제나 그럴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을 만들어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립니다.


세상일이란 우리의 바람대로만 일어나지 않고

, 불행한 일들은 청하지 않았는데도 예고도 없이 찾아오곤 합니다.

이런 경우라면 우선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그 일들에 대해서 예전과는 다르게 해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는 달라지지

않지만 과거에 대한 해석은 자신의

성장과 더불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과거에 대한 해석을 다르게 할 수 있다면 의식의 폭이 넓어지고 대범해 질 것입니다. 달라진 의식으로 타인을 바라보면 타인들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그로써 타인들도 자신을 다르게 볼 것입니다.



<‘희생양’이 되지 말고 당당히 저항하라>

어느 조직이건 희생양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매우 고통스럽게 지냅니다.

이들에겐 조물주와 뱀에 대한 우화를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그 내용은 여러분도 이미 잘 알고 있듯, 뭇 짐승과 사람들에게

밟힘을 당하던 뱀이 그 억울함을 조물주에게 하소연을 하자.

조물주는 뱀의 입속에

독을 넣어주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두가 뱀을 두려워하고 조심스럽게 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희생양과 같은 위치에

놓인 사람이라면, 기회를 마련하여 한 번쯤은

강하게 되받아 쳐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누구든지 상대방의 강한 저항을 받게 되면 신경이 쓰입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자신의 행동에 조심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려고 하면 우선 저항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키우고 기회를 엿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방법은 위험한 방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모습들도 너그럽게 볼 수 있다면>

파충류인 거북은 바닷가

모래 속에 알을 낳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다로 유유히 사라집니다.

그로부터 한 두 달이

지나면 그 모래더미 속에서

부화된 새끼 거북이가 기어 나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바다로 들어가고, 제 어미와 똑같은 방법으로 성장하고 다시 또 그 바닷가로 올라와 모래 속에 알을 낳습니다. 그들은 중생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2억년 이상을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거북이와 같이

모두가 똑같은 삶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끔직한 일이겠습니까?

조물주는 인간을 맨 나중에

만들면서 아주 오래 오래 고심한 결과로

모든 사람을 서로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다른 나는 축복받은

존재이며 단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장점이 그 무엇이라도 존재합니다. 단점에만 초점을 맞추어두지 말고,

그 장점을 찾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남과 다른 나, 나와 다른 남에 대해서 조금 더 너그러워지고 당당해 져, 대인관계가 더 아름답고 더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더 아름다워지고 더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세상이 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 보라.

붉게 물든 석양을 바라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지는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어라.

가던 길을 멈추고 노을진 석양을 바라보며 감탄하기에 가장 적당한 순간은,

그럴 시간이 없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때이다.


언제든 즉흥적으로 이삼일 동안 짧은 휴가를 떠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는다.

지체하지 말고 미리 가방을 꾸려놓아라.

자전거를 타고 동네나 공원을 한바퀴 돌아보아라.

아름드리 나무와 새들, 푸른잔디 그리고 예쁜 꽃들과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즐겨라.


한 무명의 현자가 이런 말을 했다.

"어제는 역사, 내일은 미스터리, 그리고 오늘은 선물이다.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ystery, and today is a gift)

그래서 '오늘'을 영어로 프레즌트(present)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어제를 기념하며 축하할 수도 없고,

내일을 기념하며 축하할 수도 없으니, 오늘을 기념하며 축하해야 하지 않을까?


석양뿐만 아니라, 이따금 일출도 보도록 한다.

그렇게 할 마음이 있다면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라.

하루중 가장 어두운 때는 해가 뜨기 직전이라고 한다.

몹시 힘들고 우울할 때는 이렇게 생각하자.

지금이 바로 해가 뜨기 직전이라고,

이제 곧 해가 떠올라 모든 것이 환하고 따사로워질 것이라고 말이다.


인생은 짧다.

그러니 자질구레한 일들로 삶을 채우며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인생에는 중요한 일들도 많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일들도 있다.

따라서 그 차이를 포착해 낼 줄 알아야 한다.


그 차이를 구별해 내지 못한다면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온갖 환멸과 낭비를 초래할 수 있다.

당신이 갖고 있는 유머감각과 삶에 대한 열정을 발휘해

찌부드한 아침을 산뜻한 아침으로 바꾸어라.


주변환경을 바라보는 당신 자신의 눈을 바꾸면 인생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아무리 우울한 일이라 하더라도 긍정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도록 하자.

밑에 누워 한두 시간 정도 소설책을 읽을 수 있을 만한 나무를 찾아봐라.

건강 전문가들은 최적의 건강을 누리는 데는 깊은 심호흡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아침에 밖으로 나가 걸음을 멈추고 깊게 심호흡을 다섯 번 정도 해보아라.

뭉개구름, 새털구름, 양털구름...구름이 만들어내는 각양각색의 형태들은 참으로 매혹적이다.


어린 시절 이후로 팔베개를 하고 누워 구름을 올려다 본 일이 있었는가?

지금이라고 못 할 것도 없다.

잔디가 아니라면 벤치에라도 누워 지금 당장 한 번 해보자.

어떻게 하면 삶을 더욱 잘 이끌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효과적인 이야기가 있다.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의 가치를 계산하고 싶다면,

당신의 친구들을 세어 보라."

직장동료가 아닌 옛 친구나 일상의 친구들이야 말로

인생과 세계에 대해 더욱 폭 넓은 정보들을 주고받을 수 있다.


지나치게 목표지향적인 태도나 매사를 전적으로 일과 관련짓거나,

물질적인 성취만으로 스스로를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루 해가 저물 무렵엔,

하루를 얼마나 잘 보냈느냐는 것 만큼이나 얼마나 많이 긴장을 풀고, 웃고 즐겼는지도 판단하자.

세상과 더불어 행복하고 느긋하며 평온한 기분을 느끼려면,
팔짱끼고 뒤로 물러 앉아 삶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가도록 관망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 흐름을 따라가는 방법을 좀 더 배우자.

때로는 뭔가 일이 되도록 애쓰지 말고

차라리 일이 되는대로 일어나도록 놔둬 보는 것도 좋다.


[느리게 사는 즐거움]에서



간혹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그럴때는 바로 내면의 영혼이 뭔가를 속삭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속삭임을 듣지 못하거나 응하지 않을때에는 문제가 더욱 커진다.


어린시절 어두워질때까지 시간 가는줄 모르고 친구들과 놀곤 했다.
그럴때면 어머니께서 내 이름을 부르시면서 집으로 불러 들이곤했다.
이렇듯이 나의 영혼도 시간이 되면 나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삶은 때때로 원치 않는 질병과 고독,침체기를 가져다준다.대개는 그것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우며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한다.그러나 나의 영혼은
나를 안으로 불러들여 다시 시작하게 하고,일의 순서를 다시 정하게 하며
새로운 선택을 하게 한다.


그러면서 삶의 계획과 패턴을 재검토 할수 있는 시간을 준다.
이 시간 동안 명상을 하고 치유의 눈물을 흘리며 지금까지 이루어 온
성과를 평가하고, 내안에서 신의 성소를 발견한다.


진정한 노력의 시간이 있어야 해답을 들을수 있고,그때 비로소 마음의
안정과 힘을 회복할수 있게 된다.내면의 영혼이 부를때는 그 부름에
응해야 한다. 그 부름을 거부하고 밖에서 해답과 치유의 손길을 찾는다면
성스러운 영혼의 보호와 안내를 놓치게 된다.


신이 당신을 안으로 불러들일 때만을 기다리지 말자.
규칙적인 명상과 단식,휴식을 통해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또한 규칙적으로 자연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런 시간 속에서 아픔을 치유하고 영혼의 부름에 거부하려는 고통을 줄일수 있다.

귀를 기울여라.당신의 영혼이 안으로 들어오라고 속삭이는지
아니면 밖으로 나가라고 하고 있는지를 귀 기울여라.


바깥 세상으로 나가라고 할 경우,새로운 시작과 경험에 두려움이
일수도 있다.다시 시작할수 있는 기회, 새로운것을 경험하고
새로운 곳에 갈수 있는 기회,새로운 사람을 만날수 있는 기회,당신에겐
이 선물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고 그에 따를 용기가 있는가?


영혼이 당신에게 바깥으로 나가라고 할때에는 성공할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올때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것이다.


힘과 안정과 발전을 주는 신이 바로 당신의 마음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영혼이 바깥 세상의 문을 열어줄때를 대비해 자신감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도전하는 것이다. 성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 주얼 테일러-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그리고 행동하지 않으면 창조는 없다.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잘못 길들여진 습관을 바꿀수 있다.

좋은 책을 읽고 좋은 말을 들었다고 금방 훌륭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행동하고 체험한 정보라야 우리 몸 속에 깊숙이 각인되고

그때 뇌의 정보가 바뀌고 내가 바뀐다.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고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다.

낙숫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는 것도

오랜 세월 한 곳에 자신의 모든 힘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몸이 싫어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내 몸이 좋아하고 감정이 좋아하는 것은 별 도움이 안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믿음을 가지고 계속 밀고 나갈 때
비로소 그 일은 자신이 가야 할 길로 이끌어줍니다.

우주 만물은 철저한 거래의 법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마음을 다해 간절히 원하면
온 천지가 그것을 이루어주려고 법석거립니다.
문제는 ‘"입니다.

그것은 바로 정성입니다.
정성은 원래 높고 맑고 넓은 곳을 향해,
신성한 곳을 향해 그리고 중심과 뿌리를 향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성이란 지금 자기가 서 있는 자리보다
더 밝아지고 더 높아지고 더 성장하기 위한 마음가짐입니다.

늘 정성 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가슴 속에는
희망이 사라지는 법이 없지만
정성을 잃어버린 사람은 늘 어둡기 마련입니다.
정성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나태해지고 불평 불만에 빠지게 됩니다.

정성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고
지식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몸에 배인 습관으로
정성을 실천하고 사느냐 아니냐가 다를 뿐입니다.


한문화刊「내 영혼의 푸시업」
출처블로그 : 엘파바의 실험실

젊은 수도자에게

고뇌하는 너의 가슴속에만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모든 마당과

모든 숲

모든 집 속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들 속에서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목적지에서

모든 여행길에서

모든 순례길에서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길에서

모든 철학에서

모든 단체에서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행동에서

모든 동기에서

모든 생각과 감정에서

그리고 모든 말들 속에서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마음속의 광명뿐 아니라

세상의 빛줄기 속에서도

진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온갖 색깔과 어둠조차

궁극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진정으로 진리를 본다면 진정으로 사랑하기 원한다면

그리고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광활한 우주의 어느 구석에서도

진리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스와미 묵타난다(20세기 인도의 성자)



- 빛과 사랑을 -

여기에 그림을 넣으십시오

"무의식을 의식화 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데,

우리는 바로 이런 것을 두고 운명이라고 부른다."

- 칼 융(Carl Jung)

운명이라는 단어 속에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막강한 카리스마가 담겨져 있다.

운명을 긍정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것을 완강히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의 이들이 운명을 이야기하는 점술사의 말에 크게 흔들리고 의존하게

된다. 좋은 운명이라는 말에 귀를 솔깃하고, 나쁜 운이라는 말에는 그것을 믿

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서 조차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것

이 현실이다.

우리는 왜 운명을 두려워하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운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그것을 두려

워한다.

이전의 글에서 자주 반복한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막

연한 두려움을 느끼며 자신없음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반복되는 트레

이닝을 통해 점차 성공적인 경험을 쌓아가면서 자신감을 향상시키고 두려움을

해소해 나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운명에 대해 트레이닝을 통해 반복하여 성공적인 경험을 쌓을 수

는 없지만, 운명의 원리에 대해 추측해 볼 수는 있다.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며 '운명에 휘둘리기' 보다는, 이제 그것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알아보기로 하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그것에 대해 두려울리가 없다. 묘하게도 운명이란 우리 내면에 잠재된 것이라는

기본 가정을 미리 밝혀 둔다면, 운명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나를 알고, 또

나를 알아가는 과정'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기본가정 1

운명이란 우리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무의식을 의식화 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데,

우리는 바로 이런 것을 두고 운명이라고 부른다."

우리 시대의 최고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칼 융의 말이다.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커다란 빙산을 하나 떠올려 보자. 빙산의

일각이라는 표현을 익히 들어 보았을 것이다.

빙산은 해면에 떠올라 드러난 부분

의 6~7배의 질량을 해면 아래에 감추고 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즉,해수면 위로 떠오른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빙산의 윗부분은 우리가 금

방 알아차릴 수 있는 '의식'에 비유할 수 있으며, 해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빙

산의 아랫부분은 우리 마음의 '무의식'에 비유할 수 있다.

빙산의 윗부분은 쉽게 식별이 가능하지면아랫부분은 잘 알기 어렵다.

의식은 (그나마도) 쉽게 알 수 있지만 무의식은 잘 알지 못한다.

무의식(識) 이라는 단어의 無가 의미하는 것은 '없다'가 아니라 '모른다'는

것이다. 분명 우리 마음 속에서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 부분이기는 하되, 어떤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잘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그러한 부분에 대해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기본가정 2

우리의 현실을 좌우하는 것은 바로우리 자신의 마음이다.

'잘되면 내 탓, 안되면 조상 탓' 이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 마음씀의 간교함을 이처

럼 잘 나타내는 말이 또 있을까?

우리는 무언가 일이 잘되어 좋은 결과를 얻을 때 그것을 자신의 능력이라 믿는다.

그래서일까? 자기 자신이 잘해서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이기에 우리는 그리도 쉽게

감사하는 법을 잊어버리는 것일까?

아무튼, 이번엔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해서는?

우습게도 자신의 탓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 외부의 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습관처럼 전제한다. 내가 타고난 환경이, 집안의 경제적 상황이, 사회의 전반적인

부패 때문에, 그리고 또 때로는 잘못된 집안(조상)에서 태어난 탓이라고...

그런데 이 글에서는 우리의 습관화된 이러한 가정을 뒤엎는 가정을 말한다. 잘되

건 잘못되건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일들은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 때문이라고 가

정한다.

혹자는 반박할지도 모른다.

첫째로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마음대로 된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그렇다면 두번

째 가정은 틀린 것이 아니냐고.

둘째로 주위를 아무리 둘러 보아도 그들의 마음대로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그래서 또 두번째 가정은 확연히 틀린 것이 아니냐고.

사실이다.

이 삭막하고 견고해 보이기만하는 현실에서 '마음대로' 되는 일이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 마음대로 되는 세상이라면 왜 이다지도 혹독한 세상이기만 하다는 말인

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결코두번째 가정이 틀렸다고 말할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

는 '의식' 이라는 부분만을 알고 있었을 뿐, '무의식'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의 평소의마음 상태가 얼마나 가볍고, 쉽게 들뜨고, 복잡하고, 산만

하고, 집중력 없으며, 이런 저런 말도 안되는 생각 속에 휩싸이기를 좋아하며,

방향성 없고, 약해빠졌는지를 느껴보라! 마치 다섯살 짜리 아이가 온 집안을

휘저어 놓은 듯한 상태로 마음의 얼마나 깊은 곳 까지 들여다보고 꿰뚫어보아

서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잡은 신념과 욕구들을 인식할 수 있는지를 느껴보라!

어쩌면 끔찍한 일들만 가득한 현실을 경험하는 당신의 무의식 깊은 내면에는 현재

의 그런 끔찍함들을 불러오는 형이상학적인 괴물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것을 증명해 낼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괴물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냐고? 바로 당신이 경험하는 현실

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당신 내면의 증거다!

(표면)의식과 무의식이 함께 어우러진 마음이 가진 에너지의 총합이 우리 삶의 방

향을 결정한다! 표면의식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는 것 만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

다.

마음의 훨씬 더 크나큰 부분(빙산의 아랫부분 처럼)을 차지하고 영향력

을 발휘하고 있는 무의식에 들어있는 것들이 당신의 현실을 좌우할 것이다.

당신이 처한 현실이 너무나도 만족스럽고 미래를 스스로 보장할 수 있다면,

무의식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왜냐면 당신은 좋은 운

명을 타고 났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더 나은 현실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중이라면

운명에 관한 칼 융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

한 사실일 수 밖에 없으리라.

칼 융의 이야기를 뒤집어서 풀어보면 우리 운명을 바꾸는 방법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무의식을 의식화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의식을 의식화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일상 속에서'무의식적으로' 라는 표현을 자주사용한다.

'무의식적으로 전화벨이 울리자 전화를 받았다.'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대꾸했다.'

'무의식적으로 화를 내고야 말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패턴,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는 패턴의 고리들로 구성되

어 있다. 자기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하면서도 많은 일들이 일종의

'자동 반응 기계' 처럼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정신나간' 사람의 행동을 살펴보자.

그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이 지금 현재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알아차리고 있다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 물속으로 완전히 잠겨버린, 그래서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빙산을 상상

해 보라.

무의식을 의식화 하라!

매 순간 순간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동기에 의해서 지금의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려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無) - 모른다' 라는 특성을 가진 의식적 부분을 최소화하라!

자기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신념과 동기에 대해 파악하라!

이것만이 당신 자신의 마음에 미리주어진 무의식적 부분들인 운명을 바꾸는 길이다.

백날 세상과 환경과 선천적 조건을 탓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그저그렇고 그런 생활의

반복일 뿐.

당신 앞에는 이제두 개의 선택이 주어져 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세상 모든 이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그날을 꿈꾸며...

<실패하는 리더는 어떤 특성 보이나>

[연합뉴스 2004-08-12 10:33]
(서울=연합뉴스) 황정우기자= 실패하는 리더들은 어떤 특성을 보일까?

LG경제연구원 정영철 연구원은 12일 내놓은 '실패하는 리더, 이렇게 행동한다' 는 보고서에서 성공하는 리더와 실패하는 리더의 차이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서 시작된다며 실패하는 리더의 행동 특성을 분석했다.

▲ '시키는 대로 해라'식 리더

구성원들이 아이디어를 내면 이를 무시하며 '시키는 대로나 해라'와 같은 반응 을 보이고 부하가 이견을 제시하면 권위를 내세워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 한다.

반발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지 않고 동조하는 사람들만을 중심으로 일을 추진하고 부하 직원들의 업무 스타일을 인정하기보다 자신의 스타일에 맞추도록 강요한다.

▲ 변화에 둔감한 리더

기존의 업무 체제를 고집할 뿐 다양한 내외부 고객들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현 조직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과거의 성공 경험을 그대로 적용하려 하는 특성을 가 진다.

업무 수행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해 새로운 시도를 꺼리거나 실패에 대한 두 려움으로 새로운 시도보다 현상 유지에 더 중점을 둔다.

▲ 조직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리더

구성원들이 잠시 여유를 갖는 모습을 보면 불안해 하고 실적을 위해 과도한 개인의 희생을 요구한다. 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조직 상황에 따 라 업무부담을 준다. 단기적인 업무 장애를 우려해 부하 직원의 직무 순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해 구성원들의 개인 생활을 배려하지 않는 다.

▲ 필벌(必罰) 중심의 사고를 가진 리더

업무상 난관에 부딪혔을 때 해결 방향을 제시해주기 보다 질타와 책임 추궁만을 하고 책임감과 열의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인정하는데 인색하다.

질책은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고치라는 내용은 없고 사소한 일에도 꼬투리를 잡아 야단을 치는 유형이다.

▲실행력이 부족하다

이런 리더들은 너무 많은 변수를 고려하다 보니 제때에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거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상대방이 강하게 나오면 자신의 주장을 쉽게 굽히는 경향을 드러낸다.

또 구성원들의 합의를 지나치게 중시하다 보니 업무의 실행 속도가 느려지는 경향이 있고 한번 내린 결정에 대해 번복하는 경우가 잦다.

▲ 등잔밑이 어둡다

결정이나 지시를 내려놓고 실제로 실행이 되는지를 챙기지 않거나 평소 현장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 연장 업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신뢰하는 측근의 보고는 사실 여부 확인을 등한시한다.

jungwoo@yna.co.kr


    무 (無) / 바라

    혼돈이 맴도는순간
    어둠까지 무시한채
    자신을 들여다보지만
    형편없는 육신은
    빛나는 눈동자만 남긴다

    더듬거리며 흐느끼는
    욕망과탐욕만이
    현실을 바라보게하고
    방황하는영혼은 갈곳없어
    오직 심장의 온기만을
    그리워하다 지쳐버린다

    부딪쳐 고개들어 살피니
    처음 그눈빛남긴 그자리
    늘 같은곳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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