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예불을 소홀히 하는 승려를 이 염주로 때려 일곱 바늘 꿰맸다지. 목탁으로도 두들기고. 내 근처에는 아예 안 오려는 승려들도 있지."
고산(79) 스님은 씩 웃었다. 어린애 주먹만 한 염주알을 굴리면서.
"계율을 안 지키면 수행자 자격이 없지. 부처님 열반하기 직전 아난존자가 제일 먼저 물은 게 그것이다. '스승님께서 열반하시고 나면 이제 누구를 스승으로 삼으리까' 물으니, '계(戒)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했다."
한낮의 햇볕이 쨍쨍했다. 부산 연산동의 혜원정사에는 분홍색 연등이 머리 위로 한가득이었다. 뜰에 비친 그림자까지 불그레했다.
그는 쌍계사의 조실(절에서 최고 어른)이고, 승려들의 '면허'인 비구계를 수여하는 조계종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이다. '룰만 따지는 사람치고 재미있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 나는 뭔가 대변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시작했다.
―내가 아는 승려들 중에는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는다. 이들은 "계율은 작은 것이다. 계율에 매여선 안 된다. 이를 뛰어넘어야 깨달음과 무애(無碍)의 경지에 이른다"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이치는 금방 깨달으나, 다생습기(多生習氣·오랜 생에 걸쳐 몸에 밴 습관)는 금방 없앨 수 없다'고 했다. 설사 계율을 안 지키는 처사도 금방 깨닫고, 소 잡는 백정도 소 잡는 칼을 들고도 부처님 법문 한마디에 깨닫는다. 깨닫는 이치는 그렇다 해도, 다생습기는 남아 있다. 바람이 그쳤지만 물결이 계속 출렁이는 것과 같은 이치지. 이런 고로 서서히 없애는 것이다."
―깨달음은 찰나에 얻을 수 있어도 몸에 밴 습성은 계율을 지키는 수행을 통해 없앨 수 있다는 뜻인가?
"계율은 그릇과 같다. 그릇이 똑발라야 물이 바로 담긴다. 물이 흔들리지 않고 고요히 머물러 있는 것이 '선정(禪定)'이다. 그래야 물 위에 그림자가 담긴다. 그림자는 바른 지혜를 비유한 거지. 이처럼 계율은 수행자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계율은 속세의 욕망을 절제하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집, 결혼 잘 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욕망에 매이면 수행을 할 수가 없다. 수행자는 세속을 뛰어넘는(出世間) 공부를 하는 것이다."
―요즘 승려들을 보면 머리 깎은 것 외에는 나 같은 속세 대중과 무엇이 다른지를 모르겠다.
"수행을 원만히 이룬 사람이면 성불(成佛)한 것이다. 하지만 수행 과정에 있으면 아직 '사람'이다. 다생습기에 여전히 끌려갈 수밖에 없다."
―호텔에서 웃통 벗고 도박하던 승려들도 그런 과정에 있다고 봐줘야 하나?
"수행 과정인데 아직 초월하지 못해 자연히 습기에 끌려간 것이지."
―내가 좋아했던 불교가 전체적으로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세속의 습성이 남아 있는 몇 사람이 그렇지, 그걸로 전체를 평가하면 안 된다.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팔만대장경을 열람해 봐도 모순된 점은 없지만, 부처님 제자들이 하는 짓을 보면 아니꼬워 나는 불교에 귀의를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 자로는 승(僧), 두 자로는 화상(和尙), 초상난 집에 쭈그리고 앉아 만날 염불하니 세 자로는 수시귀(守尸鬼), 기생집에 가면 땡추들이 먼저 딱 차지하고 있으니 네 자로는 색중아귀(色中餓鬼)'라고 놀렸다. 그러자 한유(韓愈)가 '이 철없는 친구야, 부처님의 도가 내려온 지 오래이고 수천명의 제자가 있는데 그까짓 몇몇 못된 놈으로 그러느냐'고 했다. 대부분 스님들은 수행의 근본을 망각하지 않는다."
―어느 절에 가니 초입부터 '축(祝) 신임주지 ○○○○' 현수막이 쭉 걸려 있더라. 요즘은 주지나 종단 자리를 놓고 정치판처럼 다툰다.
"저런, 수행하면 그런 데 허비할 시간이 없다. 내가 어려서 해인사에 있을 때 '차기 주지(住持)를 누가 맡느냐' 논의가 있었다. 한 스님이 '이번에 주지는 자네가 맡게' 하니까, 당사자가 귀싸대기를 패더라고. 뺨 맞은 스님이 '와 이러노?' 하니, '아무리 내가 승려생활 못하지만 나보고 주지하라는 거냐'며 화내더라. 옛날에는 그랬다."
―스님도 쌍계사와 조계사 주지를 했지 않는가?
"맡겨주니 할 수 없이 대중을 시봉하는 마음으로 했지, 오래 할 게 못 된다. 나는 주지를 해도 내 손으로 불전함을 털어 돈을 세어본 적이 없다. 태국·미얀마·스리랑카에 가보니, 스님이 직접 돈을 못 만지게 한다. 스님이 호주머니가 달린 가죽부채를 내밀면 신도가 그 속에 시줏돈을 넣어준다. 버스를 탈 때도 스님이 부채를 내밀면 차장이 그 속에서 차비만 꺼내고 다시 잠가 주더라."
―스님은 과거에 총무원장을 맡고서 열 달 만에 물러난 적 있다.
"상대 후보 측에서 선거 규칙에 어긋났다며 소송까지 냈다. 그런 시비에 말리면서 '하고 싶은 사람 실컷 해라'고 한 뒤 바랑을 메고 내려와 버렸지."
―절집 풍토가 바뀌어야 하지 않겠나?
"환경이 뭐가 문제인가. 옛날 큰스님은 여기저기 시골 장터를 찾아다니며 가장 요란한 곳에 앉아서 수행했다. 귀에 시끄러운 소리가 안 들리면 '오늘 장 잘 봤다'고 했다."
―스님은 계율을 어긴 적이 없나?
"…마음속으로는 계율을 어기려고 한 적은 없다. 가르침을 지켜 나왔다."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인가?
"싸우지 말라고 했는데, 절 생활 25년쯤 됐을 때 오만한 후배 승려를 한 대 쳐버렸다. 그게 살인 미수로 고발돼 '폭력승'이 됐고, 결국 산문출송(山門黜送·승적 박탈)이 됐다. 그 뒤에 다른 스님들의 탄원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생습기로 나도 모르게 울컥 성질이 일어나니까."
―절에서 25년이나 수행했으면….
"그걸로는 안 되지, 다생습기는 남아 있지. 견성오도해야 그게 없어지지."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출가했던 이유는?
"입산하면 돌아가신 모친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지. 당시 범어사에 계시던 동산(東山·1890~1965) 스님이 은사였다. 나는 출가하기 전에 이미 명심보감과 동몽선습 등을 읽었고, 절에 들어가서는 모든 경전을 다 열람하고 일대 강사(講師)가 된 거지."
―승려들에게는 계율에 능한 율사, 경전에 능한 강사, 포교에 능한 법사, 참선에 능한 선사가 있다. 스님은 이 모든 것을 고루 갖췄다고 들었다.
"어려서는 놀기를 좋아하고 낭만적이었다. 영화 구경을 가거나 부산의 용두산 공원에서 뛰어놀았지. 열일곱 살인가, 암자에 들어와 살 때였지. 내게 고추밭 일을 잠깐 맡겼는데 비료를 잘못 줘서 농사를 망친 적이 있었어. 호된 책망을 들었지. 그때 나는 '사람으로서 하는 일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라도 다 배워야겠다'고 서원했다. 모내기, 쟁기길 같은 농사일은 말할 것도 없고, 부엌에 들어가면 일류 요리사요, 법당에 들어가면 목탁 치고 염불 하는 게 예식종장의 소리를 듣고, 강원에서는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보고도 읽을 수 있는 일대 강사가 된 거야. 다만 못하는 게 인터넷과 자동차 운전이다. 그건 수행하는 데 필요 없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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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스님은“소 잡는 칼을 들고도 깨달을 수 있지만 몸에 밴 습관은 금방 못 없앤다”고 말했다. /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
―절집에서도 그렇게 부지런해야 하나?
"세속에 물든 것인지, 요즘 절간에도 놀고먹으려는 사람들이 생겼다. 내 상좌 중 절반가량이 절집 일이 힘들다고 중도에 포기했다. 나는 경전만 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읽은 세속 소설도 다섯 짐은 될 거야. 유교·도교·천주교 경전을 열람 안 한 게 없다. 특히 신약·구약성서는 외우다시피 했다."
―선방 수좌들 중에는 '도(道)를 닦아 깨달음을 얻는 데는 경전 공부가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하는 이도 많다.
"옛날에는 부처님의 행적과 법문을 배우게 한 뒤 강원이나 선방에 보냈다. 하지만 성철스님이나 혜암 스님이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사람 마음에 달렸다는 뜻)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며 머리를 깎으면 바로 선방에 보냈다. 이 때문에 스님들 중에는 선방에 앉아 오로지 '이뭣꼬?'하며 간화선(看話禪)만 하지,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부처의 행적과 가르침)조차 모르는 스님도 있다."
―그래도 선승을 높이 치지 않는가?
"나도 젊은 날 한때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이름도 없다. 앞뒤도 없다. 몸뚱아리를 끌고 다니는 이것은 무엇인가'를 화두로 삼아 참선만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깨달음에 진전을 얻은 것은 경전 공부를 하면서부터였다. 도반(道伴)들은 경전 공부를 하는 나를 보고 '타락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자 내게 경전을 물으러 왔다."
―깨닫는다는 것은 뭔가?
"내 마음의 본바탕이 삼라만상의 근본이고 우주의 근본임을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으면 멀리 떨어진 것도 장중(掌中)의 구슬처럼 보인다."
―스님은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서 있나?
"옛날에 '스님 견성했습니까?' 물으면, 그 경지에 오른 선사는 '육육은 삼십육, 구구는 팔십일, 동지한식(동지에서 한식까지 날 수)은 105일이니라'고 했다. 그 말이 맞다는 뜻이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창천, 창천(답답하구나)'이라고 했다."
―내가 만나본 승려들 중에는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이 좀 있다.
"그 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직 먼 거다."
―깨달음의 경지에 있으면 일상이 어떻게 달라지나?
"스스로 체험해야지,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부처님 오신 날이니, '사는 게 허망하다'는 중생들에게 한 말씀은 해줘야 하지 않나?
"부처님도 인생살이 무상함을 말했다. '아침 풀끝의 이슬과 같고 저녁 연기와 같고 물에 뜬 거품과 같고 먼 산의 아지랑이와 같다'고. 이 몸뚱아리도 무상하고 잡념도 무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 무상함 속에 진심 자리가 있다. 그 자리를 찾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너무 모호하다. 아침 이슬 같은 삶의 허망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몸뚱이는 죽더라도 내 마음자리, 내 본성은 존재한다. 절대 변함이 없다."
―몸이 죽었는데 마음이 존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생사가 본래 없다는 뜻이다. 중생들은 나고 죽는 것을 보지만, 깨달은 이들은 헌옷(몸뚱이)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으로 본다. 원래 주인은 항상 그대로 있다. 헌옷을 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는데 무슨 슬픔이 있고 허망함이 있겠나."
―스님은 헌옷을 버리고 내가 걸치고 있는 옷도 입을 수 있나?
"수행을 참되게 오래 하면 어디에 연연하고 매이는 게 없다. 내가 바꾸고 싶은 데로 바꿔버리면 되지."
―아직은 너무 정정하다.
"세속 나이가 팔십인데 지금도 새벽마다 108배를 한다."
―새벽 4시에 기상하고?
"무슨, 3시 반에 일어나지. 목탁이 치기 전에. 절 내 밭뙈기를 다 내손으로 매지. 아까 말한 대로 농사짓는 데는 신농씨, 법당에는 예식종장, 부엌에는 일류 요리사다."
스님이 직접 가꾼다는 고추·상추밭과 화단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땡볕이 여전해 밭에서 빛이 났다. 길목에서 할머니 신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큰스님을 잠깐 친견하려고…." 수줍게 인사하자, "나를 만나 봐서 뭐 할라꼬"하며 방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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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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