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월드컵 영웅들] '컴퓨터 링커' 조광래의 끝나지 않은 월드컵 도전
미디어다음 | 입력 2010.04.19 09:10
[숨겨진 월드컵 영웅들] '컴퓨터 링커' 조광래의 끝나지 않은 월드컵 도전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은 앞선 첫 회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나라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대회로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월드컵 본선 7회 연속 진출의 시발점이 된 대회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대회였다.
그런 만큼 멕시코 대회에 참가했던 우리나라 선수들에 관한 이야기 소재는 다른 대회에 출전해 이미 많이 알려진 다른 선수들의 이야기보다 소개할 것이 많은 편이다.
이번에 소개할 숨겨진 월드컵 영웅은 현재 프로축구 경남FC 사령탑을 맡고 있으면서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했던 조광래 감독.
1986년 당시 조광래는 허정무와 함께 한국 프로축구를 대표하는 미드필더였다. 얼마전 한 언론에서 한국 축구 역대 베스트 11을 뽑는 보도에서 조광래는 현 대표팀 감독인 허정무와 함께 나란히 중앙 미드필더로서 베스트 11 명단에 포함됐다.
조광래의 별명은 '컴퓨터 링커'였다. '링커'라는 포지션 이름은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용어이지만 공수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플레이 메이커에 해당하는 포지션으로 1990년대 천재 플레이 메이커로 이름을 날렸던 윤정환을 연상하면 이해가 쉬울듯하다.
그렇다. 1990년대에 윤정환이라는 플레이 메이커가 있었다면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아우르는 한국 축구의 대표적 플레이 메이커는 조광래였다.
뛰어난 축구지능과 그라운드 전체를 머리 속에 집어 넣은 듯한 폭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상대 수비가 예측할 수 없는 공간으로 날카롭게 찔러주는 조광래의 패스는 가히 일품이었다. 그러나 조광래는 공격적인 부분에서만 장점을 지닌 선수가 아니었다. 그의 뛰어난 축구지능은 상대 공격수들과의 수싸움에도 능해 수비적인 부분에서도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공수 양면에 모두 능했던 진정한 '링커'였던 셈이다.
그렇게 뛰어난 기량을 지닌 그였기에 프로축구가 출범한 이후 그는 항상 허정무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두 선수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링커'였다는 점 외에 허정무가 PSV 에인트호벤에서 선수생활을 하다 1984년 프로축구 현대의 창단 멤버로 국내 프로무대에 뛰어들어 이른바 '해외파'였던 반면 조광래는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해외 무대를 경험하지 않고 곧바로 대우로열즈의 선수로 활약한 순수 '토종'이라는 점에서 대비가 됐다.
또한 조광래의 고향이 경상남도 진주였고, 허정무의 고향이 전라남도 진도였던 탓에 미묘한 지역감정 차원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뛰어난 기량을 지닌 그였지만 월드컵과의 인연은 그의 나이 32살에 가서야 맺을 수 있었다.
한국이 최초로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았던 해인 1954년에 태어난 조광래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모두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지만 탈락의 고배를 들었고, 생애 마지막 월드컵 무대 도전이었던 멕시코 대회에 가서야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지금이야 30대 선수가 그라운드를 누비는 것이 어느 정도 일반화 되어 있지만 그때만 해도 30대 선수가 최고의 기량을 유지하며 그라운드를 누비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광래는 차범근, 허정무 등과 함께 원숙한 기량을 지닌 30대 선수로서 월드컵 무대를 누빌 기회를 얻게 됐다.
하지만 본선 조별예선 첫 경기였던 아르헨티나전 선발 베스트 11 명단에 조광래의 이름은 들어있지 않았다.
불세출의 축구 천재 디에고 마라도나를 위시해 세계 축구를 호령하는 공격수들이 즐비했던 아르헨티나를 상대하기 위해 평소 때 보다 수비수의 숫자를 두 명 더 늘리게 되면서 조광래는 벤치에서 자신의 월드컵 본선 첫 경기를 맞이하게 됐다.
기껏해야 후반전에 교체투입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 조광래에게 월드컵의 피치를 밟을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마라도나의 전담 마크맨으로 선발 기용된 '족쇄맨' 김평석이 마라도나를 막는데 실패, 전반 18분만에 한국이 허무하게 두 골을 내주며 대량 실점의 위기에 몰리자 조광래는 김평석을 대신해 마라도나를 마크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고 전반 22분경 그라운드에 투입됐다.
조광래가 투입된 이후 한국 대표팀은 차차 안정을 찾아나가기 시작했고, 계속 밀리는 경기를 펼치면서도 더 이상의 실점 없이 전반전을 마칠 수 있었다.
조광래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마라도나가 움직일 때마다 일방적인 성원이 쏠리니까 선수들도 상당히 위축이 많이 됐다. 그렇게 정신 없이 전반 초반에 두 골을 먹고 나서 하프타임이 되니까 '이왕 질꺼면 우리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고나 지자'는 오기가 생기더라. 그래서 후반전에는 월드컵 본선 첫 골도 넣고 전반 보다 훨씬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
실제로 아르헨티나전 후반전에 한국 대표팀은 전반전의 그 수세적이고 무기력한 팀이 아니었다. 실점 위기도 여러 차례 맞이했고, 쐐기골도 허용했지만 아르헨티나 문전을 휘저으며 박창선이 한국 월드컵 출전 역사상 첫 골을 터뜨리는 등 선전을 펼쳤고, 세계의 축구팬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와의 첫 경기가 끝나고 조광래는 몇몇 고참 선수들과 함께 김정남 감독, 김호곤 코치와 차를 마시면서 미팅을 하는 자리에서 중대한 제안을 했다.
그느 제안은 후배들을 위해, 그리고 다음 월드컵을 위해서라도 한국 대표팀이 그동안 해왔던 정상적인 플레이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54년 월드컵 때 워낙 많은 골을 먹었다는 기억 때문에 모두 위축된 나머지 수비 중심의 경기를 했는데 한국이 앞으로 이 대회에서 몇 골을 먹을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의 축구를 정상적으로 펼쳐 제대로 맞붙어서 우리 실력을 평가 받자는 말이었다.
결국 조광래의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예선 두 번째 상대였던 유럽의 강호 불가리아를 만났을 때 한국 대표팀은 그야말로 투지 넘치고 공격적인 본연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경기를 펼쳐 마침내 안국 월드컵 출전 사상 두 번째 골과 첫 승점을 따냈다.
전반전에 골키퍼 오연교의 펀칭 실수로 다소 허무하게 선제골을 내주지 않았다면 첫 승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경기였다. 그만큼 당시 한국 대표팀은 불가리아를 상대로 우세한 경기를 펼쳤다
특히 조광래는 이날 한국이 0-1로 뒤지고 있던 후반 24분 김종부의 동점골을 어시스트,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홈페이지에는 조광래의 어시스트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당시 조광래가 김종부에게 연결한 패스는 명백한 어시스트였다.
월드컵 첫 승점을 따낸 한국 대표팀은 고무됐다. 결과적으로 조광래의 제안과 이를 받아들인 코칭 스태프의 선택은 옳았던 셈이다.
한국의 다음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였다. 세계적인 공격수들이 즐비하고 빗장수비로 정평이 나 있는 이탈리아였지만 이탈리아와의 맞대결을 준비하는 한국 대표팀은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를 준비하던 그 팀이 아니었다.
그리고 1986년 6월 10일 푸에블라 콰테모크 스타디움에서 이탈리아를 상대한 한국 대표팀은 전반 17분만에 이탈리아의 알토베리(1982년 스페인월드컵 결승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세 번째 골을 뽑아냈던 이탈리아 대표 스크라이커)에게 선제골을 내줬지만 후반 17분 최순호가 그림과 같은 중거리 슈팅으로 동점골을 뽑아냈다. (이 골은 최근 영국 < 타임스 > 가 선정한 '역대 월드컵 골 톱50'에서 26위에 올랐다.) 이 골의 시발이 된 크로스를 연결한 주인공이 바로 조광래였다.
하지만 조광래는 이날 한국이 이탈리아에게 1-2로 뒤고 있던 후반 37분 상대의 크로스를 수비하다 자책골을 기록하고 말았다. 기록상으로는 자책골이지만 조광래가 자책골을 기록하지 않았어도 이탈리아의 공격수 발에 맞고 들어가는 공이었다.
이후 후반 종료 직전 허정무의 만회골이 터져나오며 조광래의 자책골을 더욱 더 진한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조광래는 이날 풀타임을 사력을 다해 뛰었다. 그리고 이 경기는 조광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풀타임 활약한 월드컵 경기가 됐다.
조광래는 이탈리아전에 대해 "지긴 했지만 내용면에서는 그렇게 밀리지 않았다. 단지 우리보다 무언가 한 수 뛰어나다는 건 느꼈다. 정신없이 뛰긴 했지만 조금 벅찼다. 아무래도 템포가 빠르다 보니 그 템포를 70분 정도까지는 따라 갈 수 있는데 마지막 20분 동안은 따라가지를 못하겠더라. 사전에 경험이 있어서 피부로 느끼며 경기를 해왔더라면 커버가 가능할 텐데 몸에 배어있지가 않으니 많이 힘들었다."고 술회했다.
그렇게 '선수' 조광래의 월드컵 도전은 끝을 맺었다.
이후 지도자로 변신한 조광래 감독는 김호 감독을 도와 수원삼성의 창단 초기 돌풍에 일조했고, 유럽과 남미를 도는 축구유학 이후에는 FC서울의 전신인 안양LG의 감독으로서 지난 2000년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특히 조 감독은 안양LG 시절인 1999년부터 FC서울의 창단 첫 해인 2004년까지 기성용, 정조국, 김치곤, 한동원, 고요한, 고명진, 박용호, 최원권, 이청용 등 중고등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어린 선수들을 프로팀에 합류시켜 능력 있는 프로선수로 키워냈다. 그렇게 키워진 선수들을 '조광래의 아이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광래의 아이들' 가운데 기성용과 이청용은 각각 유럽 축구의 명문 셀틱과 볼튼에서 주축 선수로 활약하며 2010 남아공 월드컵을 통해 한국 축구에 '용의 시대'가 도래 했음을 선포할 준비를 하고 있다.
조광래 감독은 박지성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현 소속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 리버풀 등의 팀들 사이에서 고민할 때 맨유에 입단할 것을 권했고, 맨유에 입단하고 난 이후 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도 박지성의 플레이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지성이 맨유에 입단한 이후 팀에 합류한지 얼마 안되어 극동 투어를 돌던 시절, 박지성의 곁에 조광래 감독이 늘 붙어 있었던 데는 바로 그런 이유가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 조광래 감독은 선수시절 최고의 기량을 지니고서도 월드컵과의 인연은 무척이나 짧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드러나는 월드컵 영웅 대신 이렇게 숨겨진 월드컵 영웅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그는 지도자로서 월드컵 월드컵 영웅들을 키워내는 중심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숨겨진 월드컵 영웅 '조광래 선수'의 월드컵 도전은 '감독 조광래'로 변신한 지금 훨씬 더 두드러지고 화려하게 진행 중에 있는 셈이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은 앞선 첫 회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나라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대회로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월드컵 본선 7회 연속 진출의 시발점이 된 대회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대회였다.
그런 만큼 멕시코 대회에 참가했던 우리나라 선수들에 관한 이야기 소재는 다른 대회에 출전해 이미 많이 알려진 다른 선수들의 이야기보다 소개할 것이 많은 편이다.
이번에 소개할 숨겨진 월드컵 영웅은 현재 프로축구 경남FC 사령탑을 맡고 있으면서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했던 조광래 감독.
조광래의 별명은 '컴퓨터 링커'였다. '링커'라는 포지션 이름은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용어이지만 공수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플레이 메이커에 해당하는 포지션으로 1990년대 천재 플레이 메이커로 이름을 날렸던 윤정환을 연상하면 이해가 쉬울듯하다.
그렇다. 1990년대에 윤정환이라는 플레이 메이커가 있었다면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아우르는 한국 축구의 대표적 플레이 메이커는 조광래였다.
뛰어난 축구지능과 그라운드 전체를 머리 속에 집어 넣은 듯한 폭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상대 수비가 예측할 수 없는 공간으로 날카롭게 찔러주는 조광래의 패스는 가히 일품이었다. 그러나 조광래는 공격적인 부분에서만 장점을 지닌 선수가 아니었다. 그의 뛰어난 축구지능은 상대 공격수들과의 수싸움에도 능해 수비적인 부분에서도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공수 양면에 모두 능했던 진정한 '링커'였던 셈이다.
그렇게 뛰어난 기량을 지닌 그였기에 프로축구가 출범한 이후 그는 항상 허정무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두 선수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링커'였다는 점 외에 허정무가 PSV 에인트호벤에서 선수생활을 하다 1984년 프로축구 현대의 창단 멤버로 국내 프로무대에 뛰어들어 이른바 '해외파'였던 반면 조광래는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해외 무대를 경험하지 않고 곧바로 대우로열즈의 선수로 활약한 순수 '토종'이라는 점에서 대비가 됐다.
또한 조광래의 고향이 경상남도 진주였고, 허정무의 고향이 전라남도 진도였던 탓에 미묘한 지역감정 차원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뛰어난 기량을 지닌 그였지만 월드컵과의 인연은 그의 나이 32살에 가서야 맺을 수 있었다.
한국이 최초로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았던 해인 1954년에 태어난 조광래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모두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지만 탈락의 고배를 들었고, 생애 마지막 월드컵 무대 도전이었던 멕시코 대회에 가서야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지금이야 30대 선수가 그라운드를 누비는 것이 어느 정도 일반화 되어 있지만 그때만 해도 30대 선수가 최고의 기량을 유지하며 그라운드를 누비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광래는 차범근, 허정무 등과 함께 원숙한 기량을 지닌 30대 선수로서 월드컵 무대를 누빌 기회를 얻게 됐다.
하지만 본선 조별예선 첫 경기였던 아르헨티나전 선발 베스트 11 명단에 조광래의 이름은 들어있지 않았다.
불세출의 축구 천재 디에고 마라도나를 위시해 세계 축구를 호령하는 공격수들이 즐비했던 아르헨티나를 상대하기 위해 평소 때 보다 수비수의 숫자를 두 명 더 늘리게 되면서 조광래는 벤치에서 자신의 월드컵 본선 첫 경기를 맞이하게 됐다.
기껏해야 후반전에 교체투입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 조광래에게 월드컵의 피치를 밟을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마라도나의 전담 마크맨으로 선발 기용된 '족쇄맨' 김평석이 마라도나를 막는데 실패, 전반 18분만에 한국이 허무하게 두 골을 내주며 대량 실점의 위기에 몰리자 조광래는 김평석을 대신해 마라도나를 마크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고 전반 22분경 그라운드에 투입됐다.
조광래가 투입된 이후 한국 대표팀은 차차 안정을 찾아나가기 시작했고, 계속 밀리는 경기를 펼치면서도 더 이상의 실점 없이 전반전을 마칠 수 있었다.
조광래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마라도나가 움직일 때마다 일방적인 성원이 쏠리니까 선수들도 상당히 위축이 많이 됐다. 그렇게 정신 없이 전반 초반에 두 골을 먹고 나서 하프타임이 되니까 '이왕 질꺼면 우리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고나 지자'는 오기가 생기더라. 그래서 후반전에는 월드컵 본선 첫 골도 넣고 전반 보다 훨씬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
실제로 아르헨티나전 후반전에 한국 대표팀은 전반전의 그 수세적이고 무기력한 팀이 아니었다. 실점 위기도 여러 차례 맞이했고, 쐐기골도 허용했지만 아르헨티나 문전을 휘저으며 박창선이 한국 월드컵 출전 역사상 첫 골을 터뜨리는 등 선전을 펼쳤고, 세계의 축구팬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와의 첫 경기가 끝나고 조광래는 몇몇 고참 선수들과 함께 김정남 감독, 김호곤 코치와 차를 마시면서 미팅을 하는 자리에서 중대한 제안을 했다.
그느 제안은 후배들을 위해, 그리고 다음 월드컵을 위해서라도 한국 대표팀이 그동안 해왔던 정상적인 플레이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54년 월드컵 때 워낙 많은 골을 먹었다는 기억 때문에 모두 위축된 나머지 수비 중심의 경기를 했는데 한국이 앞으로 이 대회에서 몇 골을 먹을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의 축구를 정상적으로 펼쳐 제대로 맞붙어서 우리 실력을 평가 받자는 말이었다.
결국 조광래의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예선 두 번째 상대였던 유럽의 강호 불가리아를 만났을 때 한국 대표팀은 그야말로 투지 넘치고 공격적인 본연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경기를 펼쳐 마침내 안국 월드컵 출전 사상 두 번째 골과 첫 승점을 따냈다.
전반전에 골키퍼 오연교의 펀칭 실수로 다소 허무하게 선제골을 내주지 않았다면 첫 승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경기였다. 그만큼 당시 한국 대표팀은 불가리아를 상대로 우세한 경기를 펼쳤다
특히 조광래는 이날 한국이 0-1로 뒤지고 있던 후반 24분 김종부의 동점골을 어시스트,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홈페이지에는 조광래의 어시스트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당시 조광래가 김종부에게 연결한 패스는 명백한 어시스트였다.
월드컵 첫 승점을 따낸 한국 대표팀은 고무됐다. 결과적으로 조광래의 제안과 이를 받아들인 코칭 스태프의 선택은 옳았던 셈이다.
한국의 다음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였다. 세계적인 공격수들이 즐비하고 빗장수비로 정평이 나 있는 이탈리아였지만 이탈리아와의 맞대결을 준비하는 한국 대표팀은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를 준비하던 그 팀이 아니었다.
그리고 1986년 6월 10일 푸에블라 콰테모크 스타디움에서 이탈리아를 상대한 한국 대표팀은 전반 17분만에 이탈리아의 알토베리(1982년 스페인월드컵 결승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세 번째 골을 뽑아냈던 이탈리아 대표 스크라이커)에게 선제골을 내줬지만 후반 17분 최순호가 그림과 같은 중거리 슈팅으로 동점골을 뽑아냈다. (이 골은 최근 영국 < 타임스 > 가 선정한 '역대 월드컵 골 톱50'에서 26위에 올랐다.) 이 골의 시발이 된 크로스를 연결한 주인공이 바로 조광래였다.
하지만 조광래는 이날 한국이 이탈리아에게 1-2로 뒤고 있던 후반 37분 상대의 크로스를 수비하다 자책골을 기록하고 말았다. 기록상으로는 자책골이지만 조광래가 자책골을 기록하지 않았어도 이탈리아의 공격수 발에 맞고 들어가는 공이었다.
이후 후반 종료 직전 허정무의 만회골이 터져나오며 조광래의 자책골을 더욱 더 진한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조광래는 이날 풀타임을 사력을 다해 뛰었다. 그리고 이 경기는 조광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풀타임 활약한 월드컵 경기가 됐다.
조광래는 이탈리아전에 대해 "지긴 했지만 내용면에서는 그렇게 밀리지 않았다. 단지 우리보다 무언가 한 수 뛰어나다는 건 느꼈다. 정신없이 뛰긴 했지만 조금 벅찼다. 아무래도 템포가 빠르다 보니 그 템포를 70분 정도까지는 따라 갈 수 있는데 마지막 20분 동안은 따라가지를 못하겠더라. 사전에 경험이 있어서 피부로 느끼며 경기를 해왔더라면 커버가 가능할 텐데 몸에 배어있지가 않으니 많이 힘들었다."고 술회했다.
그렇게 '선수' 조광래의 월드컵 도전은 끝을 맺었다.
이후 지도자로 변신한 조광래 감독는 김호 감독을 도와 수원삼성의 창단 초기 돌풍에 일조했고, 유럽과 남미를 도는 축구유학 이후에는 FC서울의 전신인 안양LG의 감독으로서 지난 2000년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특히 조 감독은 안양LG 시절인 1999년부터 FC서울의 창단 첫 해인 2004년까지 기성용, 정조국, 김치곤, 한동원, 고요한, 고명진, 박용호, 최원권, 이청용 등 중고등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어린 선수들을 프로팀에 합류시켜 능력 있는 프로선수로 키워냈다. 그렇게 키워진 선수들을 '조광래의 아이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광래의 아이들' 가운데 기성용과 이청용은 각각 유럽 축구의 명문 셀틱과 볼튼에서 주축 선수로 활약하며 2010 남아공 월드컵을 통해 한국 축구에 '용의 시대'가 도래 했음을 선포할 준비를 하고 있다.
조광래 감독은 박지성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현 소속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 리버풀 등의 팀들 사이에서 고민할 때 맨유에 입단할 것을 권했고, 맨유에 입단하고 난 이후 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도 박지성의 플레이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지성이 맨유에 입단한 이후 팀에 합류한지 얼마 안되어 극동 투어를 돌던 시절, 박지성의 곁에 조광래 감독이 늘 붙어 있었던 데는 바로 그런 이유가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 조광래 감독은 선수시절 최고의 기량을 지니고서도 월드컵과의 인연은 무척이나 짧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드러나는 월드컵 영웅 대신 이렇게 숨겨진 월드컵 영웅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그는 지도자로서 월드컵 월드컵 영웅들을 키워내는 중심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숨겨진 월드컵 영웅 '조광래 선수'의 월드컵 도전은 '감독 조광래'로 변신한 지금 훨씬 더 두드러지고 화려하게 진행 중에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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