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리더십을 말한다]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회주 우학 스님
  • 조동섭 기자
  • 승인 2011.06.2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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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세50만원 포교당이 15만 불자의 수행처가 되다

 

인류 최초의 종합대학인 인도 나란타대학(那蘭陀大學). 굽타왕조의 왕 쿠마라굽타 1세(415~454)를 시작으로 여섯 군주가 수백년 동안 불사를 이어갔던 곳이다. 오래전 석가모니 부처가 전법교화를 펼치기도 했던 곳은 대학이 들어선 후 많은 승려·학자가 했다. 당나라 삼장법사 현장 스님도 이곳에서 유학하며 불교를 배웠다. 나란타대학은 1915년 발굴된 규모만 남북 500m, 동서 250m에 이른다. 대규모의 사역(寺域)에서는 사각형의 수행처와 5동의 사찰, 10동의 승방(僧房)터가 발굴됐다.

 

 

한국에도 나란타대학 같은 곳이 있다. 대구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한국불교대학(舊 영남불교대학) 대관음사가 그곳이다. 대구시 남구 봉덕3동 대로변에 자리한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는 연건평이 5000여 평에 이르는 매머드급 도심사찰이다. 지하2층 지상7층 건물에는 법당과 강원, 선방, 출판사, 스튜디오, 박물관, 도서관, 서점, 꽃집, 용품점, 어린이집과 유치원, 노인전문병원, 납골당 등 없는 시설이 없다.

회주 우학 스님은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를 20여 년 전인 1992년 5월부터 신도들과 한마음으로 일궈왔다. 2012년 5월 15일이면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가 창건한 지 20년이 된다. 우학 스님 만의 비전과 리더십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교대학’ 플랭카드만으로 140명 모아
스님이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를 창건한 것은 우연, 아니 운명이었다. 삼촌의 죽음을 통해 생사일대사에 큰 의문을 품기 시작했던 스님. 우학 스님은 행자시절부터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꿰고 있었다. 출가를 반대했던 식구?친구를 피해 양산 통도사에서 남양주 봉선사까지 갔지만, 큰그릇을 알아본 월운 스님은 우학 스님을 다시 통도사로 돌려보냈다. 스님은 생명에 대한 고민을 풀고 싶어 선방을 전전했다. 선방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우학 스님의 고민은 풀리지 않았다. ‘한국 간화선은 막무가내로 체계가 없다’는 생각에 동국대 선학과도 가고 강원에도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를 지나는데 포교당 한 곳이 운영이 안돼 교회로 넘어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부처님이 앉았던 곳에 십자가가 서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은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50만원의 포교당 살림을 시작했다. 신도 몇몇이 참기름을 팔며 포교당의 보증금이며 월세를 도왔다.

 

“당시 해제비로 125만원을 받아 갖고 있었습니다. 100만원은 중고 복사기를 한 대 사고, 나머지 돈으로는 플랭카드 10장을 만들었습니다. 일일이 전봇대에 올라가 걸었습니다.”


플랭카드에는 불교대학 모집 내용이 실렸다. 순식간에 1기생 140여 명이 모였다. 영남불교대학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처음 포교당을 인수했을 때 신도수 16명이 한달 후 불교대학 간판을 붙이자마자 10배수 가까이 불어난 것이다. 지금은 신도수가 15만명에 이른다.

 

우학 스님은 직접 강의했다. 교재도 시중의 책이 아닌 자신이 직접 만든 교재를 신도들에게 나눠줬다. 1시간을 가르치기 위해 10시간 이상 연구하고 준비하며 강의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한국불교대학의 가장 큰 특징은 교리와 수행이 함께 하는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경전을 가르쳐 신도들의 의식이 깨어도 수행이 뒤따르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경전을 공부해 길을 알았다면 그 길을 직접 걸으며 수행의 참맛, 참선의 재미를 느껴야 합니다. 한국불교대학과 대관음사가 둘인 듯 둘 아닌 것은 이 때문입니다.”

 

교리공부가 수행으로, 수행은 봉사로, 봉사는 포교로 한국불교대학은 확실히 자리매김돼 갔다. 스님은 곧바로 어린이 법회도 시작했다. 순식간에 300여 명이 모여들었다.
“불자라면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대학을 열었지요. 어린이포교도 같은 맥락에서 시작됐습니다.”


우학 스님의 강의를 들은 불자들은 실천했다. 한사람이 3명씩 포교했다. 4년 반이 지나니 월요일부터 일요일 하루 종일 공간을 활용해도 80평 법당이 포화상태가 됐다. 10억원이 넘는 돈을 빌려 불사를 시작했다. 신도들의 힘은 대단했다. 3년 여 만에 부채를 모두 갚았다. 7층 규모의 현재 법당 불사가 진행되는 동안 보훈병원, 영대병원 등 병원은 물론 교도소?군부대 법회도 진행했다. 이웃을 돕는 봉사활동도 체계화해야겠다 싶어 2000년에는 복지법인도 만들었다. 현재 복지법인에서는 수십명의 직원이 100여 어르신을 돌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설 증축도 계획 중이다.

 

우학 스님은 “안거를 지키고 수행에 힘쓴 것이 (지금까지 불사를 이룬)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스님이 안거 중인 동안 신도들은 자율적으로 사찰을 운영했다. 이를 통해 한국불교대학은 저절로 투명하게 운영됐다. 우학 스님은 2004년 백담사 무문관에서도 수행했다. 무문관 수행경험을 살려 단위사찰로는 드물게 감포도량에는 무문관을 열었다.

 

 

한국불교 일류화 위해서는 네트워크 절실

스님은 사찰 규모가 커지자 단일사찰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2000년 미국을 다녀오면서 우학 스님은 크게 깨친 바가 있었다. 세계 무대에 서 보니 한국불교가 전무하더라는 것. 스님은 네트워크와 국제화를 발원했다. 영남불교대학을 한국불교대학으로, 관음사였던 사명을 대관음사로 바꾼 것도 이때이다. 우학 스님은 네트워크를 위해 대구 대관음사를 중심으로 1000개 도량 건립을 발원해 지금 이 순간에도 실천 중이다.

 

“불교가 현대사회에서 자생하려면 단일사찰로는 역부족입니다. 형제사찰을 갖고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합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도량과도 연계돼야 한국불교의 세계화?현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스님은 불교의 현대화?대중화를 위해 불교서적의 보급에도 주력했다. 1993년 출판사를 만들었고, 1996년 <저거는 맨날 고기 묵고>가 대히트를 쳤다. 한국불교대학 초기 시절부터 직접 교재를 만들어 보급한 것을 비롯해 지금까지 스님의 저서는 100여 권, 교리서를 포함하면 200여 종에 이른다.

 

우학 스님은 인터넷 포교도 빼놓지 않았다. 한국불교대학이 운영중인 다음카폐 불교인드라망(cafe.daum.net/indelamang)은 국내 불교커뮤니티를 손꼽았을 때 빠지지 않는다. 인터넷을 통해 스님은 법문을 동시 방송했다. 대구 대관음사를 비롯해 서울 제기동 도량, 미국, 독일 등 전세계에서 동시에 스님의 법문을 듣는다.


이런 불사를 진행하는 동안 스님은 한국 간화선의 병폐를 치료하기 위한 처방도 내놓았다. ‘선관쌍수(禪觀雙修)’가 그것이다. 우학 스님은 이를 위빠사나와 사마타, 명상 수행의 장점을 모으고 간화선 수행차제를 체계화시켜 저서 <완벽한 참선법>에 담아 대중에 소개했다.

 

한국불교대학의 3대지표는 근본불교 세계불교 첨단불교이다. 근본불교를 통해 부처님의 정법을 가르치고 전파하며, 세계불교를 통해 불교의 세계화를 이루며, 첨단 문명을 활용해 불교위 현대화를 이루겠다는 목표이다.

 

미래를 말하기 전 어린이 포교부터
우학 스님은 “불교가 바로 서려면 스님들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린이법회를 예로 들었다. “광역시인 대구에 어린이 청소년 법회를 여는 곳이 9곳이 채 안됩니다. 10개 미만 사찰에서 10~20명씩 어린이 청소년을 포교해봐야 그 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래서는 안됩니다. 산중사찰이라도 어린이 청소년 포교에 신경 써야 합니다.”

 


우학 스님은 “사찰이 도심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촌 인구가 절반 이상일때는 산중사찰도 문제가 없지만 이농이 심해진 상황에서는 사중살림을 꾸리기조차 어렵다는 설명이 따랐다. 스님은 “무조건 각 동에 분원과 포교당을 내야한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불교대학은 NGO단체인 사단법인 참좋은인연 B.U.D.도 결성했다. 네팔 불가촉천민의 마을에 보육원을 지어주기도 했다. 이는 불자라면 당연히 이웃을 도와야 하고 더 많은 이웃을 돕기 위해 조직이 필요하다는 스님의 비전에서 비롯됐다.

우학 스님은 문화포교도 강조했다. 해외에 한국불교를 알리는 것은 불교문화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보다 앞서 불교의 우수성, 재미를 대중에게 일깨워주기 위해 스님은 문화를 포교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한국불교대학에서는 매일 점심이면 발우공양이 진행된다. 음성공양을 위한 합창단도 8개 조직이 활동 중이다. 사물놀이팀도 있다.

 

우학 스님은 신도교육 만큼이나 승가교육도 중요하다는 생각에 주기적으로 불교계 신문에 행자모집 공고를 낸다. 현재 상좌만 60여 명. 그 중에는 외국인스님도 있다. 우학 스님은 “상좌들이 공부를 원하면 얼마든지 시켜준다”고 말했다.


한국불교대학은 매일 부처님 교리를 배우고, 매일 기도와 수행을 한다. 법당과 강당마다 참선 독경 진언 절 사경 등 자신만의 수행법으로 자신을 찾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 한국불교대학 도반들은 1997~2007년 10년 기도를 회향하고, 2008년부터는 2040년까지 33년 기도를 수행정진 중이다.

 

 

2040년까지 1000개 분원 세운다
우학 스님은 앞으로 국내 500개 해외 500개 모두 1000개의 분원을 세우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온 인류가 불교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는 도량 건립이 스님의 꿈이요 비전이다.
스님은 “불교는 행복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종교”라며 “행복하려면 많은 공부를 해야하고 수행을 게을리하지 말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생활이 곧 불교가 돼야한다”고도 덧붙였다.

 


우학 스님은 생활이 곧 불교가 되는 예로

 

▷매일 30분 좌선

 

▷<금강경> 독경

 

▷1시간의 관음정근

 

▷이웃을 위한 선행 한가지

 

▷1인 두사람 포교하기 등을 꼽았다.

 


스님은 아이와 노인이 같이 어우러져 사는 공동체를 꿈꾼다 했다. 그것을 이룬 곳이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이다. 어린이집, 유치원부터 노인요양센터, 노인병원, 납골당까지 모두 갖춘 이곳은 불교에 관한 원스톱 서비스가 가능한 곳, 새로운 개념의 도심 총림이다.

 

 

우학 스님은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의 성공요인을 열린 사고, 수행력, 대중친화력, 투명운영, 부단한 자기성찰로 꼽았다. 스님은 사찰재정의 투명한 운영과 수행에 기반한 신도와의 교감 외에 스스로 자기점검을 철저히 해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아야한다고 강조했다. 또, 강의와 법문은 쉬울수록 좋다고도 말했다.
“불자라면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한대로 수행해야 합니다. 수행해서 힘을 갖췄다면 그 힘을 이웃을 돕는데 써야합니다.”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우학 스님은 한국불교의 새로운 성공모델을 오늘도 만들어가고 있다.

 

 

 

우학 스님은

경북 경주 출생. 동국대 한의대를 다니다 21세에 통도사에서 출가했다. 은사는 성파 스님. 동국대에서 선학을 전공한 스님은 제방의 선원과 무문관 등에서 수행했다. 1992년 한국불교대학의 전신인 영남불교대학을 열었다. 현재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회주이다.
저서로는 <새로운 불교공부> <저거는 맨날 고기 묵고> <인도성지순례> <우학 스님의 빛깔 있는 법문 시리즈> 등 10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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