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갑사 대자암 무문관
  • 승인 2006.03.1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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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없는 마음의 관문’ 뚫는 천혜의 정진처
사진설명: 묵언만이 흐르는 무문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수좌들의 용맹정진 열기가 가득한 대자암 모습.
정해진 기간동안 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수행하는 선원인 무문관(無門關). 그곳에 갈 때는 정말 긴장된다. 무문관이란 말 자체가 주는 위압감에 먼저 압도된다. ‘문 없는 관문’이라니 도대체 그게 무엇일까. 특히 철저한 수행에 오금이 저려온다. 단 하루도 마음 먹은 대로 살아보지 못한 속인이 보기에 무문관 생활은 참 힘들어 보인다. 무엇보다 문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이 무문관에 가는 걸음을 묶는다.

그래도 용기를 낸 건, 남송의 무문혜개(1183∼1260) 스님이 편찬한 〈무문관〉이란 책 덕분이다. 문자를 통해서나마 ‘무문관’에 대한 어렴풋한 생각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 가운데 핵심은 마음(佛語心爲宗). 그 진리로 통하는 입구에는 그러나 문이 없다(無門爲法門). 문이 없는데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 옛 현자가 하는 이런 소릴 듣지 못했는가. ‘문을 통해 들고나는 것은 잡스런 것들이요. 인연을 통해 얻은 것은 마침내 부서지고 말 것이다.’ 기실 이런 이야기도 평지에 괜히 일으킨 풍파요, 멀쩡한 살갗에 종기 짜는 칼을 들이댄 것. 하물며 언어 문자에 매달려 지혜를 구하는 깃이야 말해 무엇 하리오. 이는 몽둥이를 휘둘러 달을 쳐내는 것과 같고, 근지러운 발을 구두 위에서 긁어대는 것과 같으니 진리와 무슨 절실한 교섭이 있겠는가.”

무문혜개스님이 〈무문관〉 서문에 쓴 글을 생각하며 지난 10일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12번지에 위치한 갑사 대자암(大慈庵) 무문관에 올랐다. 꽃샘추위를 앞둔 계룡산의 3월은 따뜻했다. 대자암에서 본 계룡산은 여전히 겨울이다. 나무에 싹은 나오지 않았고, 계곡에 물도 적다. 그래도 며칠만 더 지나면 ‘자고새 우는 3월의 봄’이 계룡산을 덮을 것 같다.

산모퉁이를 굽이굽이 돌고 돌아 대자암에 도착하니 목탁소리가 고요한 산사에 가득하다. 목탁소리를 들으며 무문관 - 건물 이름은 삼매당(三昧堂) - 부근에 도착하니 공기가 다르다. 3월의 햇볕이 비추는 따스함은 없고, 차가운 기운이 감돈다. 3층의 - 1층은 요사. 2층(방 5개)과 3층(방 7개)이 무문관으로 사용됨 - 위용을 자랑하는 무문관은 예상대로 밖에서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신발은 댓돌 위에 가지런하다. 공양이 들어가는 급식구가 눈에 띈다. 그것뿐이다. 더 이상 무엇도 없다. 묵언과 정진, 그리고 침묵이 무문관을 감싸고 있다.

‘출입금지’란 팻말을 지나 무문관에 성큼 다가갔다. 무엇인가 물으려 해도 닿을 수 없고, 무엇인가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다. “을유년(2005) 동안거 때를 기점으로 3년 결사에 들어갔습니다. 2층엔 비구니 스님 5분, 3층엔 비구스님 7분이 정진하고 있습니다. 폐교를 인수해 만든, 부여에 있는 대자암 제2 무문관에도 15명의 수행자가 정진하고 있습니다. 이곳이나 부여 무문관이나 하루에 한번 공양이 들어가는 것 이외에는 일체 외부와 단절돼 있습니다.” 대자암 혜산(慧山)스님이 현황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왜 하필 무문관을 만들었습니까.” 긁어 부스럼 만들고자 혜산스님에게 질문을 던졌다. “결제.해제에 신경을 쓰지 않으며, 수행 이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정진만 할 수 있게 하고자 만들었습니다.” “큰 길에는 문이 없다고 하는데 무문관을 만든다고 수행이 더 잘되나요.” 사뭇 도발적인 질문을 계속했다. “큰 길에는 문이 없지만 길은 또한 어디에나 있지요. 이 문 없는 마음의 관문을 뚫고 나가면 온 천하를 당당히 걸을 수 있습니다.” 혜산스님의 지적에 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비구스님 7명.비구니스님 5명 수행중

하루 한번 공양만 들어가고 일체 단절

묵언과 정진, 그리고 침묵만 흐를 뿐…


대자암 무문관은 1979년경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정영(瀞暎)스님이 폐허화 된 대자암에 들어가 선원을 건립한 것이 계기였다. 그러다 1983년엔 선의 대중화를 위해 재가자들이 하안거.동안거 3개월 동안 정진할 수 있는 ‘시방당(十方堂)’을 건립했다. 시방당은 지금도 재가자 정진처로 유명하다.

정영스님은 무엇 때문에 대자암에 무문관을 세웠을까. 현대 들어 무문관을 처음으로 세웠던 원력과 인연 때문이다. ‘대한불교’(불교신문 전신) 1966년 1월2일자(제125호) 기사 등에 의하면 1965년 12월27일 낙성된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은 “부처님의 6년 고행을 본받아 6년 동안 면벽 정진할 수 있는 올바른 수도원을 세우고, 위대한 본분납자를 배출해 교계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신문화를 개발해야 된다”는 정영스님의 원력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2년여에 걸친 공사와 370여 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무문관을 건립했다. 천축사 무문관엔 관촉사의 제선(濟禪)스님, 김용사의 홍근(鴻根)스님, 수위를 자처한 관촉사의 혜원(慧元)스님 등 6년 정진 입방자(入房者) 3명, 백일정진 끝에 입방이 허락된 관응(觀應)스님 등 19명이 들어갔다.

한 참 정진 중이던 1968년 2월27일 당시 총무원장 경산스님이 종단 일을 중단하고 무문관에 들어갔으며, 같은 해 4월12일엔 전강스님이 무문관 조실로 취임했다. 6년 뒤인 1972년 4월28일 관응(觀應)스님, 석영(夕影)스님, 현구(玄球)스님 3분과 4년 정진을 마친 지효(智曉)스님 경산(慶山)스님이 수행을 회향했다. 1972년 11월16일에는 성운(聖雲)스님, 무불(無佛)스님, 법경(法鏡)스님, 일원(一圓)스님, 상현스님 등 5분이 제2차 입방 정진에 들어갔으며 이 가운데 무불스님과 원공(圓空)스님 두 분이 1978년 11월10일 6년간 정진을 마치고 회향했다. “천축사에 무문관을 처음으로 세운 정영스님의 원력이 대자암에도 무문관을 건립하게 만들었다”고 혜산스님은 덧붙였다.

무문관에 들어가 홀로 수행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어지간한 근기(根器.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나 소질)의 소유자가 아니면 몸과 정신이 황폐화된다고 한다. 둘러봐도 벽뿐이고, 오로지 자기 자신과의 대화와 나태해지려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만 있을 뿐이다. 1978년 천축사 무문관에서 6년 정진을 회향한 무불스님은 ‘햇살에 잠시 눈을 뜨지 못하고’ “부처님도 6년간 고행하지 않았습니까. 자고 나면 ‘오늘이 시작이구나’ 여기며 세월을 생각하지 않고,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이외에는 면벽참선했다”는 말을 했다고 ‘대한불교’ 767호(1978.11.20)는 기록하고 있다.

가지런한 신발, 공양을 넣어주는 급식구(給食口), 밖에 채운 자물쇠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보는 순간 무문관은 정말 냉정한 곳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수행인은 냉정하지 않으면 영원한 자유를 성취할 수 없고, 정진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존재가 수행자다. “공부인은 세상에서 아무 쓸 곳도 없는 대(大)낙오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영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희생하고, 세상을 아주 등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버림받는 사람, 어느 곳에서나 멸시 당하는 사람, 살아나가는 길이란 공부하는 길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불법(佛法) 가운데서도 버림받은 사람, 쓸데없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영원한 자유를 성취할 수 없다.” 전 조계종 종정 성철스님(1912∼1993)이 자주 한 말로, 쓸모없는 인간이 도인된다는 이야기다. 참으로 가혹하고 철저한 말이다.

사진설명: 갑사 대자암 무문관 전경.
가지런한 신발을 눈에 담고 무문관을 빠져 나왔다. 산바람은 한층 따뜻해져 있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비로소 새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무문관 모퉁이를 돌아 내려가는데 갑자기 〈무문관〉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선을 공부하자면 조사가 세워놓은 관문을 뚫어야 하고, 깨달음을 얻자면 모든 생각의 길목을 차단해야 한다. 조사의 관문이 뚫리지 않고 생각의 길목이 차단되지 않으면, 너는 풀잎이나 덤불에 기생하는 허깨비나 다름없다. 대체 조사의 관문이란 무엇인가. 다름 아닌 ‘없다’ 이 한 마디가 바로 선의 제일 관문이다. 이 문을 뚫고 나가면 조주를 직접 만나 보는 것은 물론, 역대의 여러 조사들과 손에 손잡고 한 자리에 어울려, 그들이 보는 것을 너도 보고, 그들이 듣는 것을 너도 들을 것이다. 이 어찌 즐겁고 신나는 일이 아니랴. 이 관문을 뚫고 싶지 않은가. 360 혼신의 뼈마디와 84000 혼신의 털구멍을 의문의 덩어리로 뭉쳐 ‘없다’ 이 한 마디에 매달려라. 밤낮을 가리지 말고 성성(惺惺)히 여일하게 매달려라.”

3년간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오로지 깨달음을 위한 정진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것이 가능할까. 무문관에 와서도 여전히 사량분별이 앞선다. 생각과 말과 언어가 머릿속에 가득하다. 언제쯤 이 놈의 ‘이로(理路)’가 차단될까.

공주=조병활 기자

‘무문관’은 어떤 책인가

南宋 무문혜개스님이 편찬

벽암록.종용록과 禪門 대표


〈무문관〉은 어떤 책인가. 당나라(618∼906)와 오대(10세기 초중반)를 거치며 중국 천하를 쥐락펴락 하던 선은 북송 대에도 여전히 성세(盛勢)를 구가했다. 그러다 남송의 주희가 나타나 유교를 재발견하자 사상적으로 밀리기 시작한다. 이 즈음 난만했던 선을 정리하고 문자화하는 노력이 나타난다. 북송 초인 1004년에 등장한 〈경덕전등록〉을 필두로 〈광등록〉(1036), 〈속등록〉(1101)이 지어졌다. 그러다 1136년 ‘종문(宗門) 제일의 책’이라는 〈벽암록〉이 등장했다. 여러 선어록들이 편찬되던 와중인 1228년 당시 46세의 무문혜개스님이 공안 48칙에 나름의 해석을 붙여 만든 책이 〈무문관〉이다. 예부터 〈벽암록〉 〈종용록〉과 함께 선문을 대표해온 책으로, 〈선종무문관〉이라고도 한다. 공안 수가 적고 내용도 간단해 널리 읽혀졌다. 1236년에 정청지(鄭淸之)가 제49칙을 첨가했다.

조병활 기자

[불교신문 2212호/ 3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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