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같은 실력 없거든 공부나 해라”
  • 조현성 기자
  • 승인 2012.11.2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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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문관 수행 창시자 제선 스님 행적 최초 소개

한국불교 수행문화를 대표하는 ‘무문관(無門關)’은 본래 도봉산 천축사의 건물이름이었다.
무문관이 수행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은 1964년 정영ㆍ제선 스님이 천축사에 참선수행도량 무문관을 세우면서 부터이다.

천축사는 부처님의 6년 설산 수행을 본받아 무문관을 운영했다. 1965~1979년까지 매회 6년간 스님들은 밥이 드나드는 구멍 외에는 출입문을 막은 공간에서 면벽수행을 했다.

천축사 무문관에서는 관응 구암 제선 현구 지효 경산 도천 관묵 천장 도영 석영 무불 원공 등 100여 수좌스님이 방부를 들였다. 이 가운데 기한을 제대로 채운 스님은 손가락에 꼽힌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제선 스님(1912~?)이다. 한국 무문관 수행의 창시자인 스님은 천축사 무문관 6년 결사 후 홀연히 사라져 수좌들 사이에 입소문으로만 행적이 전해져 왔다.

스님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스님의 삶과 행적을 정리한 <무문관 수행의 전설 석영당 제선선사>가 발간됐다. 책은 박부영 기자(불교신문)가 여러 수행현장을 찾아 스님들을 만나 증언을 채록ㆍ정리한 것이다.

▲ 관촉사 주지 시절 제선 스님(가운데)


자식 만나려는 일념에 죽음도 미뤘던 아버지
제선 스님은 1912년 제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린 시절, 일본에 있던 스님은 부친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늦게 받아 부친의 임종을 놓친 줄 알았다. 그러나 염(殮)만 미뤘던 부친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난 것을 목격하고는 인간의 정신력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생겼다.

부친상을 치루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스님은 기르다 내다버린 개가 요절한 아들로 환생한 것에서 업보를 경험했다. 금강산 천 길 낭떠러지에 몸을 던져 두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던 스님은 구사일생(九死一生)을 몸소 겪고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스님은 열 개의 쪽지에 ‘죽는다(死)’ 9장, ‘산다(生)’ 한 장을 써 제비뽑기를 해 ‘산다(生)’를 뽑아 구사일생했다.

▲ 제선 스님이 백련암에 주석하던 시절 사진.


호랑이 등 어루만지며 “발보리심 하라”
이 같은 출가 전 경험은 스님이 목숨을 기꺼이 내던지며 용맹정진 하는 바탕이 됐다. 포산 선사를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백련암 등에서 치열하게 정진했다.

1942년 늦가을이었다. 백련암에 안거ㆍ정진했던 스님은 밤늦게 절로 돌아오다 호랑이와 마주쳤다.
스님은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생각했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가야산 주인이 너인가, 나인가!”

한참 뒤 살펴보니 앞다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잡아먹을 듯 무섭게 앉았던 호랑이가 참회하듯 앞다리를 꾸부리고 꿇어 앉아 있었다. 스님은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호랑이 등을 어루만지며 “발보리심(發菩提心) 하라”는 설법을 하고는 유유히 백련암에 도착했다. <해인사지(海印寺誌)〉에 전하는 발보리심 설화이다.

▲ 한국불교 최초로 무문관을 연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지금은 시민선방으로 운영되고 있다.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했으니
스님의 기행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1954년 오대산으로 자리를 옮긴 스님은 그곳에서 자화장(自火葬)을 결심했다. 자화장은 스스로 장작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올라가 다비를 하는 것이다. 스님은 깊은 삼매에 들어가면 불에 타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 자화장을 시도했다.

스님을 결심케 한 것은 부처님의 한 마디였다.
“물에 들어가도 물에 빠지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부처님 말씀처럼 불은 타올랐지만 스님을 태우지 못했다. 그러나 “불구덩이에 앉아 있는데 내가 왜 뜨겁지 않은가”하고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불길이 스님을 휘감았다. 놀라 뛰쳐나온 스님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불길로 뛰어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화상을 크게 입은 스님은 “이왕 살기로 한 것 깨끗한 몸으로 살자”며 치료에 최선을 다했다. 스님은 화상이 아물 때 아무리 가려워도 긁지 않았다. 바위석 같은 결심이 가려움을 앞서다 보니 손 입술 발끝에만 작은 흔적을 남겼을 뿐 스님의 화상은 깨끗하게 회복됐다.

스님은 제자들에게 자화장에 대해 말했다.
“장작을 쌓으면서 중간에 좌선 자리를 마련했다. 누더기 옷을 입고 있어 누더기도 타고 살도 타게 된다. 살은 타지만 혈관은 타지 않는다. 아무리 더운데도 찬 기운이 나온다. 뭘 해도 힘이 있다. 그런데 이는 마장(魔障)이다. 너희들도 마장을 조심해라.”

▲ 천축사 무문관 개원식 법회에서 내외빈들이 테이프를 컷팅하는 모습.


부처님대로 사는 것이 불사
스님은 관촉사에서 주지 소임을 살고, 조계종 초대중앙종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주지소임은 상좌 혜원 스님이 대신했고, 중앙종회의원은 도반 정영 스님의 청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스님은 남해 보리암을 거쳐 도봉산 천축사에 주석했다.

스님은 천축사에서 정영 스님과 뜻을 모아 무문관을 개설했다.
두 스님이 무문관을 건립한 이유는 부처님대로 사는 것이 불사(佛事)라는 생각에서였다.

제선 스님이 무문관에 입방하자 수좌들 사이에 신망 높던 두 선사가 합류했다.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서암ㆍ서옹 스님이었다.

1965년 12월 27일 무문관 개원식과 함께 결제에 들어갔다.
제선과 서암 스님은 독방에 들었다. 대중방에서는 19명의 수좌가 100일 정진을 시작해 관응 도정 자안 스님 3명만이 무문관 정진을 허락받았다.

약속한 기일을 마치고 떠난 스님들 외에 관응 스님은 산문을 벗어나지 않는 동구불출(洞口不出)을 했다. 그러나 제선 스님은 끝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는 무문관 수행을 고집했다.

스님은 늘 제자에게 부처님처럼 실제 힘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말 아닌 몸으로 실제체험을 해서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님은 그 힘을 기르기 위해 자화장을 하고, 부소대ㆍ무문관에서 정진한다고 말했다.

▲ 천축사 무문관 개원법회


왜 독방서 6년을?…실력 기르려고
1972년 4월 28일 무문관 6년 정진 수행이 회향하는 날, 관응 현구 지효 경산 스님이 좁은 방에서 나왔다. 그러나 가장 먼저 입방했던 제선 스님은 없었다. 스님은 1년 전인 1971년 5월 회향하고 조용히 천축사를 떠났다. 그 날은 스님이 약속했던 6년에서 하루도 어기지 않은 날이었다.

“왜 작은 독방에 6년간 계시려고 했습니까?”
제자의 물음에 스님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
스님이 말하는 실력은 부처님 같은 자유자애한 경지였다.

스님은 늘 말했다.
“부처님과 같은 실력을 갖추기 전에는 아니다. 오늘날 혹세무민하는 선지식은 모두 업을 짓는 것이다. 어떤 선지식도 죽은 우리 아버지만도 못한 놈들이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정진했던 스님의 행방은 부산에서 여수행 배에 오른 것을 끝으로 묘연해지고 만다. 그리고 스님의 생사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까닭에 스님의 행적은 전설로만 회자돼 왔다.

저자 박부영 기자는 “올해 탄신 100주년을 맞아 제선 선사의 삶과 행적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이는 선사의 삶을 문자로 남김으로써 공부인들에게 귀감이 되고자 하는 바람에서”라고 밝혔다.

이어 “오늘날 한국불교의 발전은 수많은 고승들의 생사를 건 공부와 끝없는 정진 덕분이다.  제선 선사의 수행력은 추종을 불허하고 동서고금에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극적이며 인간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정진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수좌들에게 희망과 등불을 밝혀준다”고 설명했다.

한편, 책에서는 원철 스님(前 조계종 불학연구소장)이 무문관(無門關) 수행의 의미와 역사를, 김성우 비움과소통 대표가 갑사 대자암 등 국내 무문관 수행의 현장을 답사한 내용이 함께 수록됐다.

무문관수행의 전설 석영당 제선 선사┃박부영ㆍ원철ㆍ김성우 공저┃비움과소통┃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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