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조현우 "쫄지마! 흥민이 외침에 11명 눈빛 달라져"
박진만 입력 2018.07.03. 04:44 수정 2018.07.03. 09:12
‘월드컵 스타’ 조현우에게 듣는 뒷이야기
스웨덴 경기 3시간 전 선발 발표
1번 김승규가 나갈 줄 알았는데
스크린에 내 이름이… 꿈 같았죠
90분 내내 골 막을 준비
페널티킥 아니면 실점 않겠다는
동료들과 약속 지켜내 뿌듯
“봐! 우리보다 독일이 지금 더 긴장했어. 쫄지 마.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국가대표 수문장 조현우(27ㆍ대구FC)는 이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맴돈다고 털어놨다.
지난 달 27일(한국시간) 한국과 독일의 러시아월드컵 F조 마지막 경기가 벌어진 카잔 아레나. 전반을 득점 없이 마친 상황에서 기성용(29ㆍ스완지시티) 대신 주장 완장을 찬 손흥민(26ㆍ토트넘)이 라커룸에서 이같이 외쳤다. 그 전까지 다소 긴장해있던 동료들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조현우는 “그 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손흥민이 그렇게 말하니 자신감이 확 들었다. 저 뿐 아니라 나머지 선수들도 모두 그랬다”고 말했다. 조현우는 선수들에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위험지역에서 파울만 주지 말자. 할 수 있어!”
그 다음 장면은 꿈만 같다. 조현우는 독일 레온 고레츠카의 헤딩 슈팅을 몸을 날려 막아냈다. 모두가 실점이라고 고개를 감싸 쥐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페널티킥만 안 주면 실점하지 않겠다’던 동료들과 약속을 지켰다. 비디오판독까지 가는 우여곡절 끝에 김영권(28ㆍ광저우)의 득점이 나왔고 대지를 가르는 주세종(28ㆍ아산경찰청)의 패스에 이어 손흥민의 추가골이 터졌다. 세계 랭킹 1위를 잡는 기적은 그렇게 탄생했다.
국가대표팀이 러시아월드컵을 마치고 귀국한 지난 29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조현우를 만나 대회 뒷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월드컵 예비 명단 28인에 드는 순간부터 스웨덴전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린 순간까지 모두 꿈만 같다”고 6월 한 달을 돌아봤다.
그 말처럼 조현우의 인생은 한 달 만에 180도 바뀌었다. 지난 달 1일 전주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평가전을 치를 때까지만 해도 그는 여전히 무명에 가까웠다.
경기 다음날 전주역에서 열차를 타고 서울에 갈 때도 혼자 여유로웠다.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히 26일 뒤 돌아오자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대표팀이 귀국한 인천공항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조현우가 포항 자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열차를 탔는데 사인을 요청하는 팬들이 너무 많아 “정말 죄송하지만, 다른 승객 분들이 불편해할 수 있으니 양해 부탁드린다”고 연신 허리를 굽혔다. ‘즐거운 곤혹’은 포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그는 ‘슈퍼스타’가 돼 있었다.
조현우의 월드컵은 시작부터 드라마였다. 지난 5월 14일 신태용(49) 감독이 28인의 예비 명단을 발표했는데, 이 소식도 그는 언론사 기사를 통해 접했다. 조현우는 “(명단에 들 것으로) 예상하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명단에 든 것도 뉴스를 보고 알았다. K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면 갈 거라는 가능성을 믿고 준비를 열심히 했지만, 소속팀 대구의 성적이 좋은 편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걱정도 많이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신태용호의 최종 23인 명단에도 들었고 러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러시아로 간다고 해서 반드시 월드컵에 나선다는 보장이 있는 건 아니었다. 골키퍼는 3명이 1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한다. 그가 받은 유니폼에 새겨진 등번호는 23번. 2002 한일월드컵 대표 최은성, 2014 브라질월드컵 대표 이범영이 달았다가 한 차례도 뛰지 못한, ‘3번째 골키퍼’의 상징이었다. 1차전 스웨덴 전을 앞두고 대부분의 언론이 등 번호 1번 김승규(28ㆍ빗셀고베)의 선발 출전을 예상한 건 어쩌면 당연했다.
조현우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전 자리를 차지할 줄은 전혀 생각 못했다. 스웨덴 전에 나서기 약 3시간 전 숙소에서 팀 미팅을 했는데, 스크린에 제일 먼저 내 이름이 뜨는 걸 보고 ‘아 오늘 내가 뛰는구나’하고 알았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어 “지금 생각해보면 꿈만 같다, 명단 나왔을 때 그 느낌은…”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말끝을 흐렸다.
조현우에게 드디어 펼쳐진 무대. 스웨덴과 1차전 격전지인 러시아 니즈니노브고로드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카카오톡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자신에게 주전을 빼앗긴 선배 김승규였다. “현우야, 정말 멋지다. 멋지게 해낼 수 있다. 유럽에서도 한국 골키퍼가 통할 수 있다는 걸 네가 보여줘.”
그 메시지에 조현우는 정말 큰 힘을 받았다고 한다. 뿐만이 아니었다. 조현우는 “경기 끝나고도 승규 형이 가장 먼저 저에게 달려와서 ‘멋지다, 고생했다’고 말해줘서 정말 힘이 났다”고 말했다.
전 세계 축구 팬들을 홀린 선방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대표팀 김해운 골키퍼 코치가 강조했던 “항상 준비된 상태로 있으라”란 말만 끊임없이 되새겼다고 한다. 그는 “한국보다 유럽이 공도 빠르고 선수들도 스피드가 있으니까 항상 준비하지 않고는 실점한다는 이야기를 코치님이 강조하셨다. 상대방이 공을 가지고 하프라인을 넘는 순간 항상 방어 준비를 했다. 90분 간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고 밝혔다.
월드컵 공인구 ‘텔스타 18’을 K리그에서 미리 경험해 본 것도 큰 도움이 됐다. 그는 “골키퍼 입장에선 힘든 공이 맞지만, 탄력성이 워낙 좋은 공이라 득이 될 때도 있다. 찰 때 힘이 덜 들어가고 편하다. K리그 공인구가 ‘텔스타 18’이라 편했다”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멕시코와 2차전 때는 페널티킥 선제 실점 후 흔들리는 수비수들에게 조현우가 “포기하지마”라고 외치는 장면이 화제가 됐다. 그는 “그런 말을 자주하는 건 아닌데 정말 힘든 순간이라 나온 것 같다”며 “그게 화면에 잡혀서 끝나고 깜짝 놀랐다”고 쑥스러워 했다.
한국대표팀은 경기를 거듭할수록 더 강해진 모습을 보였다. 월드컵을 다녀온 지금, 이제는 해외 강팀들과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팬들은 SNS에 조현우를 박지성, 김연아 등 한국을 대표하는 슈퍼스타와 어깨를 나란히 한 합성 사진을 올리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는 “여러 유명한 선수들과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면서도 “저도 더 열심히 해서 흥민이처럼 유럽에 가서 더 유명한 선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한국 축구에서 아직 골키퍼가 유럽에 진출한 적은 없다.
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m 박순엽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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