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글은 김주성님이 1998년 '월간 개벽지'에 총 8회에 걸쳐 연재한 강의 내용입니다. '주문의 원리'에 대해 소상히 밝혀 놓은 매우 좋은 글입니다. 가능하다면 전부 읽으시길 바랍니다.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봅니다. (참고로 제목은 제가 붙인 것입니다)
< 강의 목차 >
1. 소리는 에너지다
삼라만상(森羅萬象)에는 온갖 법음(法音, Dharma sound)들로 가득 차 있다. 즉, 법상(法像)에서 발산되는 소리 그 자체가 곧 생명의 소리요, 존재의 소리인 법음이라는 것이다. 사념을 잠시 접어두고 귀를 기울여 한 번쯤 그 소리를 들어 보라.
아마 그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은 매우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그는 '소리에 눈뜬 자’, '귀 밝은 자(聰)’이기 때문이다. 그 소리엔 보이지 않는 힘과 권능이 서려있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우리의 존재 안에 확립시킬 수 있다.
인간은 참으로 뛰어난 영물(靈物)이어서 일찍부터 그런 대자연의 힘들을 삶속에 투영시켜 왔다. 자신 속에 내재된 진정한 힘을 일깨워 보다 근원적인 세계에 접근하기 위해서. 때로는 마음보가 안 좋은 사람들이 그것을 곡해시켜 방자형태로 사용해 오기도 했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은 이런 법음들을 독특한 형태의 문자들로 정형화시켰다. 그것은 일종에 ‘소리의 장정(章程)’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소리의 힘과 에너지를 문자(언어) 속에 집어 넣었기 때문이다.
마치 제우스(Zeus)가 판도라(Pandora)상자를 만들어 그 속에 모든 신들의 권능을 집어넣었 듯, 인간은 문자(언어) 속에 모든 대자연의 에너지와 신들의 에너지를 응축시켰다. 그 결과 문자(언어)는 특이한 힘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 힘을 이용해 대자연의 분산력(分散力)을 극복하기 위해 싸웠다. 또한 보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창조와 변화를 꾀했다. 인간의 이성이 더 이상 ‘소리의 카오스(Chaos, 혼돈)’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들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이젠 소리를 보고 느끼고 쓰는 구체적인 형태의 코스모스(Cosmos, 질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방법은 매우 유효했다. 일정한 질서의 형태를 갖춘 정형화된 소리는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거침없이 해냈다. 그리고 급속도로 삶속에 투입됐다.
어떤 부류는 그 힘을 신과 좀더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교두보로 사용했다. 옛 슈메르인들은 이런 문자를 ‘신통력이 깃든 단어들’이라 말했고 또 이런 단어들은 인간들속에 일어나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철저히 주관해 나갔으며 종교형식의 ‘자이언트’로 군림하였다.(예로 이집트 파피루스에 기록된 「死者의 書」에선 문자(주문)가 마법적인 힘을 갖고 있어 死者의 환생을 보장한다고 믿었는데, 기원전 2,500년경 사하라의 피라미드에서, 죽은 파라오가 내세에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장례서, 즉 주문, 찬송, 제문이 적힌 상형문자가 발견되었다. 또한 이슬람교도들도 문자를 대단히 신성한 것으로 여겨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언어의 개벽과 새로운 깨달음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힘의 단어’들은 점차 퇴색해 갔다. 왜냐 하면 인간의 정신이 물질의 왕국(王國)에 지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물질의 메카니즘들이 정신세계의 소산을 대체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힘의 성언(聖言)’이 아닌 먼 기억속 저편에 ‘잃어버린 말씀’정도로 치부해 버렸다.
이것은 인간의 많은 정신적 창의와 의지를 꺾어 놓았다. 그러나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언제까지 ‘신의 단어’에만 종속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어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즉 ‘신의 단어’에서 ‘인간의 언어’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언어의 개벽’이었다.
하지만, 그 중엔 ‘힘의 단어’들을 저 깊숙한 산중 어디엔가 묻어두고 비밀리에 전수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인간의 언어와 단어 속에 이미 다른 존재의 모습으로 우화(羽化)하여 예전의 그 광영을 재건해 가고 있었다.
그것은 신들의 ‘힘의 언어’에 대한 총합(總合)이 우리가 보고, 쓰고, 소리내어 말하는 언어들 속에 그래픽 기호로 점점 집결(集結)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 징조로 인간은 단어와 말씀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기 시작했다. 매우 작고 미세한 소리라 할지라도 그 안에 분명한 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구태여 마이크로(micro)세계를 볼 수 있는 전자현미경이나 매크로(macro)세계를 볼 수 있는 허블망원경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보이는 것만이 절대적이란 사고는 이미 고루한 상식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다.
80년대 들어 신과학운동(新科學運動)이 일어났으며, 90년대 들어서는 뉴에이지운동(New Age Movement)의 일환으로 뉴에이지 엑스포(New Age EXPO)와 그 부속인 홀라이프 엑스포(Whole Life EXPO)행사가 세계각국에서 개최 중이다. 결국 동양의 심오한 정신문화, 즉 명상(Meditation)이나 기공(氣功), 요가(Yoga) 그리고 금세기 최대 미스테리인 UFO와 외계 우주인들에 대한 정보 등을 인정하고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두 우리가 눈으로 검증할 수 없는 초감각적인 세계, 무형의 세계를 다루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그 관심도나 정보 보유 면에서 뒤떨어져 있지만 서구에선 21세기를 이끌어 나갈 차세대 대체이념으로 정신문화를 주목하고 있다.
얼마전 미국 CNN의 INSIDE EDITION에서 뉴에이지 회원들이 이집트 대피라밋을 방문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는데, 거대한 돌에 기대거나 눕고 쓸어안는 등 마치 어린아이의 호기심 어린 눈빛처럼 돌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와 교감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 사람 같았으면 사진 찍느라 카메라에 불이 났겠지만, 그들은 눈요기 보다는 느낌과 교감을 더 중요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과연 모진 비바람에 깎이고 쓸려 흉한 몰골로 남아있는 피라미드에서 무엇을 느끼고 찾으려는 것일까? 아마 보이진 않지만 사방에 충만해 있는 에너지의 흐름, 즉 고대인의 숨결을 느끼고 감지하려는 것은 아닐까?
80년대 들어 신과학운동(新科學運動)이 일어났으며, 90년대 들어서는 뉴에이지운동(New Age Movement)의 일환으로 뉴에이지 엑스포(New Age EXPO)와 그 부속인 홀라이프 엑스포(Whole Life EXPO)행사가 세계각국에서 개최 중이다. 결국 동양의 심오한 정신문화, 즉 명상(Meditation)이나 기공(氣功), 요가(Yoga) 그리고 금세기 최대 미스테리인 UFO와 외계 우주인들에 대한 정보 등을 인정하고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두 우리가 눈으로 검증할 수 없는 초감각적인 세계, 무형의 세계를 다루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그 관심도나 정보 보유 면에서 뒤떨어져 있지만 서구에선 21세기를 이끌어 나갈 차세대 대체이념으로 정신문화를 주목하고 있다.
얼마전 미국 CNN의 INSIDE EDITION에서 뉴에이지 회원들이 이집트 대피라밋을 방문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는데, 거대한 돌에 기대거나 눕고 쓸어안는 등 마치 어린아이의 호기심 어린 눈빛처럼 돌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와 교감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 사람 같았으면 사진 찍느라 카메라에 불이 났겠지만, 그들은 눈요기 보다는 느낌과 교감을 더 중요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과연 모진 비바람에 깎이고 쓸려 흉한 몰골로 남아있는 피라미드에서 무엇을 느끼고 찾으려는 것일까? 아마 보이진 않지만 사방에 충만해 있는 에너지의 흐름, 즉 고대인의 숨결을 느끼고 감지하려는 것은 아닐까?
뉴에이지 회원들은 생명체건 무생물체건 모든 것은 생명자장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파동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파동은 아무렇게나 주름진 웨이브(wave)가 아니라, 인격성과 틀을 갖춘 형성체의 웨이브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삼라만상은 살아 숨쉬는 파동의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흉측한 돌이나 체내의 세포 하나하나에도 파동의 신성을 부여한다. 그 파동은 시공을 굽이치고 에너지와 상호 연결되어 나름대로 생명을 존속시키고 있으므로 교감을 통해 얼마든지 그 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주문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완성문
* 태을주(太乙呪)는 심령(心靈)과 혼백(魂魄)을 안정케 하여 성령을 접하게 하고 신도(神道)를 통하게 하며 천하창생을 건지는 주문이니라. [도전 11련 161:4]
태을주에는 이런 권능이 담겨 있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에는 주문을 고루한 미신 정도로 생각하는 잘못된 인식이 많이 있다. 이에 주문의 참뜻을 바로 밝히고자 한다.
주문이란 무엇일까? 영화 천녀유혼에 등장하는 영환도사처럼 악령을 물리치고 술법을 부릴 때 쓰는 주술(呪術)일까? 아니면 모 개그맨이 도포입고 긴 수염을 휘날리며 외우는 '숭구리 당당 숭당당'같은 신주(神呪)일까? 아니면 우리 귀에도 익숙한 '수리수리 마하수리' 같은 비밀스런 밀주(密呪)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멕베드'에 등장하는 세 마녀가 남에게 재앙을 끼치기 위해 외는 저주(저呪)같은 것일까? 또 샤먼들이 신과의 대화에서 쓰는 무주(巫呪)라는 것일까?
도대체 주문의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음양가(陰陽家)나 술가(術家)에서 술법을 부릴 때 외우는 글귀 또는 일정한 절차에 따라 외우면 자연력 또는 신이나 인간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통어(通語)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주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의 글귀'로 나와 있다. 또 백과대사전에는 '무당들의 신직자(神職者)가 신의 힘이나 또는 재액을 물리치려고 비는 법'으로 나와 있다. 말하자면 주문은 샤먼들이 신과의 통어(通語)를 통해 신탁(神託)을 하거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파동문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에게 비춰졌던 주문의 이미지는 거의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주문을 대단히 나쁜 걸로 이해하는 사람들조차 있다. 이는 서양의 문물만을 세련된 것으로 존중하고 동양의 정신문화를 미신 정도로 밖에 치부하지 않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또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주문이 구전(口傳)이나 비전(秘傳)으로 내려오다시피 하여 주문의 참된 면목을 오해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좀더 객관적이고 진지하게 주문의 참뜻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주문이 단순히 잡술이나 부리고 악귀나 쫓는 술법 따위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 가까이 가기 위해 깨달음과 오나성을 추구하는 '수련법'이자 '완성문'임을 밝혀 보고자 한다.
주문의 어원(語源)
주문은 산스크리트어로 '만트라(MANTRA)'라고 한다. 글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마음을 뜻하는 '만(MAN)'과 보호 도구의 의미가 담겨있는 '트라(TRA)'로 이루어져 있다. 즉 만트라는 '마음이 그릇된 망상에 빠지는 것을 보호해 주는 도구 수단'이란 뜻으로 한역(漢譯)하면 주(呪)가 된다. 보통은 만트라라고 하지만 총지(叢持)나 능차를 뜻하는 '다라니(dharani)'와 명주(명呪)를 뜻하는 '비트야(Vidya)'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두가 비밀어(秘密語)이자 진실어(眞實語)의 동어(同語)로 언어수행을 통해 본원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언어수행이란 신의 명호(名號)나 어떤 에너지가 응축된 글귀를 연속적으로 반복해 부름으로써 차크라를 각성시키거나 영(靈)적인 계발을 하여 큰다리니, 즉 완성자(完成者)가 되려는 도법(道法)을 말한다. (나중에 이것이 종교적으로 확대되면서 불보살이 등장함과 함께 신앙의 형태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다. 팔상록에 보면 석가모니와 관음보살 사이에 대비주가 재생되는 대목이 나온다.)
한자 속에 나타난 주문의 뜻을 살펴보면 주(呪)자는 빨주 자이다. 빨 주(呪)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입구(口) 자에 '부르다, 크다'라는 뜻을 지닌 황(兄)자로 이루어져 있다. 즉 주란 글자 속에 '보이지 않는 힘과 권능과 신의 가호를 부른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문이라 함은 우주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글, 신의 권능과 영성과 힘을 빨아들이는 글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주문을 읽다라는 말을 영어로는 'invoke'라고 한다. 이 말은 '간구하다, 간절히 구하다, 소원을 빌다' 그리고 '주문을 읽다'라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 원래 인보크라는 단어는 라틴어 'invokara'에서 나온 말이다. 즉 in과 vokare라는 두 낱말이 합성되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in과 on과 같은 뜻의 접두사이고 vokare는 '부른다, 간구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서양의 언어 속에 나타난 주문의 뜻은 어떤 신이나 우주의 절대자에게 소원을 간구하며 그 힘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반복 기도행위이며 신의 권능과 영성을 자기 영혼 속에 받아들여 조화와 생명을 창조하려는 것이다. 이 밖에 철자를 뜻하는 'spelling'의 spell도 원래는 주문을 뜻하고 있다.
기독교의 주기도문이나 카톨릭의 성모송, 대영광송, 불교의 반야심경, 천수경, 능엄경, 천도교의 시천주 등 그밖에 도교나 탄트라에서 송주하는 수많은 주문들은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추구하는 수행법의 일종이다. 따라서 주문이란 의미 속엔 신의 권능과 영성을 받아들여 깨달음과 완성을 추구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는 동서양의 공통된 인식이다. 동양과 셔양 모두 주문의 쓰임새 또한 언어나 생활 속에 광범위하게 베어 있으며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주문은 곧 진리의 말씀(眞言)
진언은 곧 진리의 말씀이며 진리로 부터 온 성구(聖句)이다. 또 신들이 인간에게 들려 준 생명의 언어이자 깨달음의 언어이다. 신비주의적인 술어가 아니라 진리와 지혜가 농축된 모든 소리에 대한 총지(叢持)이다. 주문은 진언의 두루 갖춤을 의미하며 지혜를 얻기 위한 총지문이기도 하다.
주문에 크게 3가지 뜻이 있다.
첫째, 일체 악을 일어나지 않게 한다.
둘째, 선을 사라지지 않게 한다.
셋째, 선을 잡아 일체의 악을 없애고 청정한 진리의 세계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므로 주문은 진리의 세계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므로 주문은 진리의 세계를 열어내는 참된 말이자 도언(道言)인 것이다.
예를 들어 불가(佛家)의 팔만사천법문이 진언으로 되어 있어 부처님의 본심을 드러내듯 진언(주문)은 헤아릴 수 없는 가르침의 백미이다. 왜냐하면 '소리' 그것은 진리의 음성(voice of truth)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것만이 우리를 완전하게 해줄 수 있듯 진언(주문)은 완전한 언어이며 우리를 모순 없는 세계로 안내해 주는 훌륭한 반려자이다.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주문은 쉽게 접할 수 없는 미묘한 글자들로 이루어진 매우 특별한 언어이다. 비코(Giambattista Vico)는 그런 언어들을 '신성한 글자'라 말했으며 옛 수메르인이나 바빌로니아 인들은 주문을 '신통력을 가진 단어들'이라 칭했다. 또 고대 신비주의학파들은 '잃어버린 말씀', '잃어버린 화음'이라 했으며 베다에선 'holy nad' 이슬람 현자들은 '카르마(karma)'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정의는 주문은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바꾼 매우 특별한 힘을 보유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즉 형이상학(비물질계)을 형이하학(물질계)으로 끄러내린 중간자라 할 수 있다. 신들의 성언(聖言)을 인간의 성언(聖言)으로 정립시킨 것이다.
* 주문은 위대한 성자들에 의해 깊은 명상상태에서 발견된 음절이나 단어 또는 단어들의 집합체들이다.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런 언어들이 아니다. 깊은 초의식 상태에서 내부로부터 수신된 만트라의 음(音)들은 구도자들을 점점 더 깊이 이끌어 완전한 고요의 상태에 도달하게 만든다. (히말라야 성자들 중)
이렇게 초의식 상태에서 재건된 주문은 특별한 힘을 보유하게 된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같힌 요정처럼 신(神)은 주문에 응감하며 누군가가 마음을 한데 모아 부르기만 하면 그 즉시 모습을 현실계에 드러내 보인다. 단순히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현화(顯化)할 수 있는 것이다. 이토록 쉽게 신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일찍이 없었다.
신과의 만남은 곧 자기 자신과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곧 육체를 가진 신명(神明)이며 또한 신성(神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의 언어는 자기 자신안에 또다른 신의 이미지가 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특별한 소리, 만트라
현재 서구에서는 파동이나 사운드(sound)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과 연구를 기울이고 있다. 현재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파동경영, 파동건강, 파동음악이니 하는 것도 그렇고 소리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의학적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디팍 쵸프라(Deepak Chopra)박사는 『양자치료법(Quantum Healing)』이란 책에서 어떤 특별한 소리가 병 치유에 탁월한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의학적 소견으로 밝히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일은 시험관에 암세포와 보통 세포를 넣고 ‘훔(HUM)’이란 소리를 쏘아 준 결과 암세포는 죽어 버렸으나, 보통 세포는 더욱 건강하게 잘 자랐다고 한다.
종교적으로 볼 때 이런 특별한 소리들을 Invocation(주문, 만트라)이라 정의 내리고 있다. 그 안에서 발생되는 힘은 생명체에 질서를 부여하고 조율하는 종합적 권능을 지니고 있으며,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훌륭한 영적 처방 약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주문 속에 내장된 금선(琴線)을 울리기만 하면 ‘파동의 혁명’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문(呪文)은 ‘소리의 혁명’을 주도하는 매우 민감한 파동체이기 때문이다. 주문은 고집적, 고효율의 파동들의 집합체이자 첨병(尖兵)이며 소리의 고갱이다. 단순한 글자 배열이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과학에서 규명하고 싶었던 소리와 파동에 대한 해답이 고스란히 주문 속에 잠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과학기술(Technology, 기교를 뜻하는 그리스어어 'Techne'와 말씀·언어를 뜻하는 ‘Logos’의 합성어임)의 출발은 소리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소리의 힘
소리가 사람이나 어떤 대상물에 물리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이미 과학적으로 확인 검증되고 있다. 소리의 파장은 하나의 에너지 형태를 띄고 있으므로 일정한 진동을 주는 것만으로도 돌이나 다리가 무너지고, 소리의 종류에 따라 뇌와 혈액순환, 신진대사, 내장활동 등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의 아더 재뇹이란 심리학자는 ‘고함요법’을 만들어 스님들이 고성염불을 하듯 소리를 크게 지속적으로 지를 경우 혈압이나 혈당이 정상치로 되돌아온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소리를 통해 스트레스가 해소됐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가 체내에 불완전한 유해물질을 순화시켰기 때문이다. 또 한 연구소에 따르면 약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만트라(주문)수행을 시켰더니, 83%에 이르는 사람들이 약물사용을 포기했다고 한다.
왜, 소리가 혈당이나 혈압을 정상화하고 암세포를 파괴하고 약물사용을 근절케 하는 것일까? 이것은 소리가 육체나 어떤 대상물에 새로운 형태의 질서와 창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이런 원리는 의외의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군대의 행렬이 아주 긴 다리를 건너갈 때는 행진곡이나 군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는데, 이는 군가나 행진곡, 일률적인 발걸음 등에서 야기되는 규칙적인 소리가 어떤 특수한 소리를 형성시켜 다리를 무너지게 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군인들의 집단적인 무게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다리가 갖고있는 고유한 진동이 행진곡, 군가, 발걸음 등의 진동음과 일치하면서 발생하는 공명(共鳴, Resonance)현상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구약의 여호수아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리고(Jericho)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여호와는 여호수아에게 한가지 계책을 알려준다. 군사들로 하여금 성 주위를 6일 동안 매일 돌게 하고 제사장 7명에겐 각기 양각나팔을 지정된 곳에서 크게 불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7일째 양각나팔 소리가 들릴 때 백성들이 일시에 큰소리로 고함(鼓喊)치면 성벽이 무너져 내리게 되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여리고 성벽은 소리로 무너져 내렸다.
왜,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렸을까? 멀쩡한 성(城)이 운 좋게 때 맞춰 무너질 리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백성들의 집단적인 소리가 성벽의 고유한 진동수와 공명(共鳴)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집단적인 소리에서 발생되는 진동수와 성벽에서 발생되는 고유한 진동수가 리듬편승에 의해 같아지게 되면 상대적으로 강하고 단위가 높은 진동수가 다른 진동을 선도하게 된다.
일단 공명하면 규칙적이고 질서정연한 단일파장을 형성한다. 여기에 한가지 더 의식이 개입되었다. 즉 성을 무너뜨리게 하려는 백성들의 강한 의식이 주입되고 가속화되어 그대로 붕괴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다리가 무너졌던 원인이 비의지적인데 비해 성벽의 붕괴는 다분히 의지적이다. 그래서 그 파워가 더욱 막강했던 것이다.
이처럼 소리가 물리적인 외형에 막대한 영향을 행세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소리와 인체와의 관계도 거의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관해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이나 스탠포드대학에선 소리가 인체의 질병치료에 미치는 영향에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그 동안 보이는 것만 연구했던 과학자들이 이젠 들리는 것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초월명상』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현대과학은 소리가 생체에 심오한 효과를 준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예를들어 어떤 박테리아는 어떤 악보가 연주되면 번식하나 다른 악보가 연주되면 죽는다.
그리고 식물들도 록(Rock) 음악보다는 브란덴브르크 협주곡이 연주될 때 더욱 잘 자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어떤 해초의 경우 대장간의 큰 망치소리를 들려주면 그것의 유전인자가 변하며 이 특정한 망치소리를 내는 진동이 그런 효과를 준다는 사실도 증명되었다. 어떤 특수한 소리가 사람들에게 특수한 영향을 미친다는 말은 무리한 주장이 아니다.’
우리의 청각은 보통 30헤르츠에서 2만 헤르츠 사이에 대해서만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너무 높거나 낮은 소리는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데, 예를 들어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나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는 들을 수 없다. 만약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 즉시 고막이 터져버릴 것이다. 또한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청각이 예민해지면 균형감각을 상실해 버릴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청의 범위는 2%뿐, 나머지 98%는 거의 들을 수 없다. 소리가 80데시벨이 넘으면 소음이고, 100데시벨이 넘으면 인체에 물리적인 영향을 준다고 한다. 공항주변 사람들은 항상 120데시벨에서 140데시벨의 소음에 시달리고 있는데, 임산부인 경우 미숙아(未熟兒) 출산률이나 유산률(流産律)이 상대적으로 높다. 그밖에 난청이나 정서불안, 우울증에 많이 시달린다고 한다.
이처럼 소리는 그 정도에 따라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Nazis)는 음향병기(音響兵器)라는 인명살상용 무기를 연구, 실험했을 정도다. 또한 히틀러는 대중 선동전략의 일환으로 연설할 때는 음향(音響)을 크게 하였다고 한다.
요즘의 록이나 헤비메탈같은 음악은 듣는 이로 하여금 거의 무아지경까지 몰고 가 열광케 만드는데, 이도 음향이 100데시벨이 훨씬 넘어 균형감각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볼 때, 특정한 소리가 건강과 생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같은 물이라도 뱀 혀끝에 닿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 그렇듯이 같은 소리라도 나쁘게 사용하면 나치가 사용한 인명살상용 무기가 되지만, 좋게 사용하면 질병을 고치고 생명을 조화시키는 축복의 소리가 된다.
즉, 소리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독(毒)이 될 수도 있고 약(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심(正心), 정음(正音), 정송(正誦)이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소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잘 이용만한다면 조화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소리의 영향은 절대적일 것이다(후천선경에서의 율려의 조화와 관련).
서파(徐波)의 기적
알파파(α)는 뇌파의 일종으로 주파수가 낮은 쎄타파(θ)나 주파수가 높은 베타파(β) 사이의 중속파를 일컫는다. 즉, 8∼17 헤르츠(Hz) 사이의 뇌파다. 여기서 뇌파는 뇌세포에서 생긴 전자기장파를 말한다. 알파파는 보통 수면상태에선 9∼10 헤르츠(Hz)의 뇌파가 나오고
최면(催眠), 명상(瞑想), 정신통일의 상태에선 이보다 진폭이 더 크고 느린 뇌파가 나온다고 한다.
파장이 느린 서파(徐波)가 나올수록 상대적으로 염파는 올라간다. 이에 따라 염력이나 텔레파시, 미래예지 등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즉, 뇌파는 떨어져 10헤르츠(알파파)를 가리키고, 염파는 올라가 500∼3000헤르츠를 가리킬 때 초자연적인 힘이 발생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초능력자 유리겔라가 스푼벤딩(spoon bending, 숟가락을 구부림)을 할 때 그의 염파지수는 2000헤르츠 이상이 된다고 한다. 이를 볼 때, 결국 알파파의 비밀은 뇌파의 진폭을 떨어뜨리고 염파를 올리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TM 연구가인 하버드대학의 지안 폴 방께 박사는 알파파가 나올 경우 뇌의 좌반구와 우반구가 서로 기능적으로 통합되어 후두부(後頭部), 두정부(頭頂部), 전두부(前頭部), 뇌전체로 확대되는 동조화(synchronization)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뇌의 좌반구는 분석력과 이성, 언어능력을 주관하고 우반구는 직관력과 공간인식능력, 심미적 감상을 주관한다. 그럼 이런 생체적 뇌파지수와 알파파를 통한 공명현상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벤토프는 뇌의 자장과 공명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자장은 머리에서 방사되는 것으로 안테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주변에 이미 존재하는 전기장, 자장과 상호 작용한다. 머리는 동시에 수신과 송신을 하는 안테나와 같은 것이며, 두뇌에서 발생하는 몇 개의 공진하는 주파수 중에 특별한 어느 하나의 파장에 맞춘다.
파장의 동조화
우선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유럽 마하리쉬 연구대학(M.E.R.U.)에 있는 폴레빈 연구진은 여러 사람이 함께 TM(만트라수행)을 했을 때 같은 파장이 나오는지에 관한 알파파 동조화 실험을 했다.
우선 매우 미세한 주파수도 감지할 수 있는 정밀한 기계를 설치한 후 본인은 물론 그의 동료들도 모두 TM 수련에 들어갔다. 얼마 후 모두에게서 알파파를 그리는 EEG(뇌파기록 장치)의 그래프가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동조현상이 일어난 것이다.만약 개인차가 났었다면 같은 주파수 형태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왜, 뇌파는 베타파에서 델타파까지 골고루 나오지 않고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수치의 뇌파가 나타난 것일까? 이 실험은 알파파 공명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반증해주고 있다.
즉 폴레빈과 그의 연구진들이 TM 에 들어갔을 때, 각기 따로 따로 알파파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한사람이 알파파에 도달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뇌파가 이에 동조한 것(감화통感化通이란 이런 것이다. 주문수행의 동기감응同氣感應의 원리가 이와 같다)이다. 다시 말해 방께박사 말대로 동조화(同調和)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동조화란 말은 낯설 테니 ‘공명’이란 말로 바꿔보자. 공명은 서두에서도 말했 듯 발음체가 외부의 음파에 자극을 받아 동일한 진동수의 소리를 내는 것을 말한다.
알파파가 전염되는 원리를 살펴보자. 일단 파장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뇌파가 겹쳐지면 ‘맥놀이 주파수’가 발생한다. 그러면 강한 파장이 상대적으로 약한 파장을 흡수하게 되고 ‘리듬편승’에 의해 같은 파장으로 진동한다. 큰 파도(波濤)가 치면 작은 파랑(波浪)은 병합되는 원리이다.
병균이 공기에 의해 전염되듯 파장이 진동(vibration)에 의해 전염된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무엇엔가 전염 당한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누구도 전염 당하고 싶어 당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전염된다. 파장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전염을 통해 감염시킨다. 여기서 전염이란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맥놀이 현상’을 통한 리듬편승을 말한다. 감염은 공명으로 비교하여 생각하면 될 것이다.
좌뇌와 우뇌를 동시에 사용하는 주문수행
주문수행을 하면 알파파나 기타 느린 서파(徐波)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왜냐 하면 좌반구와 우반구를 동시에 사용하는 전뇌(全腦)적인 수행법이기 때문이다. TM자료에 따르면 만트라(주문)를 할 경우 주의력을 우반구의 활동으로 이동시킨다고 한다. 우반구는 직관력을 주장하고 있다. 수행자에게 있어 직관력은 곧 생명이다. 이처럼 주문수행은 소리와 직관력을 병행하기 때문에 우반구를 쓴다는 것은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좌반구는 언어능력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언어를 많이 사용하면 상대적으로 좌반구의 뇌를 많이 사용한다는 증거다. 주문수행은 소리를 내는 수행법이다. 그러니 당연히 좌반구 활동을 촉진시킬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 언어라는 것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무미건조한 언어가 아닌 매우 특별한 파장을 지닌 언어들인 것이다.
이렇게 뇌장(腦漿, 머리골 속의 점액)에 진동하는 전류가 형성되면 자극이 활성화되고 일종의 극성을 갖게 되어 두뇌의 각 반구에 진동하는 자장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뇌파를 알파파나 기타 서파로 만드는 첩경은 좌우반구의 동조성(同調性)과 균형상태(homeostatic balance)에 있다.
그런데 주문수행은 좌우반구를 통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동조성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는 좌우반구가 주관하는 해당기관은 물론 세포 하나하나, 신경계 하나하나에까지 영향력을 미쳐 동조성을 이끌어 내고 같은 파장으로 굽이치도록 만든다.
그래서 로보트 온 슈타인은 만트라 실천은 좌우반구의 균형을 잡아준다고 말했다. 인도의 디팍 초프라(Deepak Chopra)박사는 ‘만트라는 신경계에 삽입되는 매우 특별한 메시지다.’ 라고 했다.
왜냐 하면, 주문이 혈압, 호흡, 맥박수 등의 이완효과(弛緩效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미 수행하는 그 순간부터 알파파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실 알파파 뿐이겠는가? 조금만 주의력을 키우면 훨씬 느린 서파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래서 마하리쉬(Maharishi)는 만트라를 통해 얻어진 알파파나 기타 서파를 이용하여 범죄율을 떨어뜨리고 지구를 정화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율려의 파워를 실감할 수 있다. 그래서 후천선경은 이 율려의 힘으로 세상을 조화롭게 다스린다). 주문은 이처럼 무력을 쓰지 않고 전 영토를 항복 받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법력(몸에 32상을 갖추고 하늘로부터 금, 은, 동, 철의 네 윤보를 얻어서 이를 굴리면서 사방을 위엄으로 굴복하게 하여 천하를 다스린다는 인도 신화 속의 임금 - 과연 전륜성왕은 누구인가?)을 지니고 있다.
염파(念波)는 곧 영파(靈波)
뿐만 아니라 주문은 뇌파를 떨어뜨리고 염파는 올라가게 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현상은 물론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일들을 해낼 수 있다. '일수대일수익(一手擡一手溺)'이라는 말처럼 한 손을 올리면 다른 한 손을 내려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그처럼 염파가 올라가면 뇌파가 떨어지는 것 또한 진리요, 이치인 것이다.
염파란 단순한 생각의 파장이 아니다. 왜냐 하면 염파(念波)는 곧 영파(靈波)이기 때문이다. 신은 신끼리 통하고 영은 영끼리 통하듯 영파는 푸뉴마(바람, 영(靈))처럼 꽉 차있는 영들과 접속하여 그들의 힘과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무수한 정보를 얻어내는 채널과 같은 역할을 한다.
물론 이러한 영적인 힘들을 환상이나 불가사의 정도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우리의 지성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식의 확장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학을 종교처럼 신봉(信奉)하는 현대인들에게, 최근 과학계에서 이해를 돕는 연구자료들이 속속 공개되는 일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전(秘傳), 운율, 신도수행(神道修行)
그 동안 3차례에 걸쳐 ‘주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미력하게 나마 다각도로 살펴보았다. 다시 한번 그 뜻을 짚어보면 주문은 외형적인 조건에 종속되는 피동법(被動法)이 아니라 깨달음과 완성을 추구하는 자동법(自動法)이라는 것이다. 일부 술사들이 주문을 피동적 의미로 사용하였기에 그 뜻이 왜곡된 것뿐이다.
이제 주문의 정의를 바로 세움으로서 주문과의 새로운 조우(遭遇)가 이루어질 수 있다. 주문은 아직도 많은 부문에서 베일에 쌓여있다. 양파껍질처럼 까고 또 까도 신비하기 그지없어 새로운 면모를 계속 드러내 보인다. 기존의 수행법은 [호흡+마음+자세]에 국한된 데 비해 주문수행은 여기에 소리를 추가한다. 즉, 호흡의 효과에 소리의 효과를 더한 것이다.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엔진에 터보를 장착했다고나 할까?
주문의 특성은 크게 6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깨달음을 얻은 ‘성인(聖人)’에게 계시로 내려와 후세에 전수된 것이다.
둘째, 주문은 일정한 ‘운율(韻律)’을 갖는다.
셋째, 그와 함께 일정한 ‘주재신(主宰神)’을 갖는다.
넷째, 주문은 특수한 힘을 갖는 ‘씨앗(核)’을 갖는다.
다섯째, 주문 안에는 ‘성스런 힘’이 존재한다.
여섯째, 순수의식이 열릴 때까지 부단히 반복해야만 열리는 ‘자물쇠’를 갖고 있다.
비전(秘傳)되는 진리
주문의 특성 중 첫 번째는 연원(淵源)이나 법통(法統)을 말한다. 주문은 바슐라르의 말처럼 신에 의해 만들어져 우연히 인간에게 던져진 것이 아니다. 거기엔 필연적인 당위성과 올바른 전승의 맥(脈)이 있다. 주문의 창조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 즉 ‘마스타(Master)’만이 가능하다. 왜냐 하면 주문은 ‘깨달음의 소리’이며 ‘진리의 음성’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에 도달하면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바꾸게 된다. 그것이 올바른 체형으로 갖춰지면 사자후(주문)로 토해내어 제자에게 전수된다. 만약 전수되지 않는다면 그 주문은 단 한사람을 위해 존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개인은 생멸하지만 주문은 구전심수(口傳心受)되어 새로운 영적 챠크라의 개척과 처방약으로 쓰여진다.
이처럼 주문은 스승이 제자에게 내려준 최고의 법령(法令)이다. 스승의 도력과 심법이 코드화 되어 주문 속에 담겨있다. 따라서 읽기만 하면 그 순간 스승과 전수자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 전수되지 않는 주문은 없다. 반드시 책으로 만들어지거나 제자에게 심수되어 백년이고 천년이고 전수된다. 그러므로 주문 속엔 전수된 역사의 과정이 응축돼 있다.
우리가 음송(吟誦)하는 태을주가 완성되기까지는 무려 3천년이라는 긴 역사 과정을 겪었다. 원래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사파하’의 13자는 한어(韓語)가 아닌 범어(梵語)를 음역(音譯)한 것으로 3천년전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세상에 내어놓은 주문이다. 그후 조선 선조때 충청남도 비인면에 살았던 도인(道人), 김경흔선생이 이 주문을 가지고 공부하다 신명의 계시로 주문서두에 ‘태을천 상원군’을 붙여 19자로 2차 완성하였다. 여기에 상제님께서 ‘훔치 훔치’를 덧붙여 읽게 하심으로써 23자의 태을주가 완성된 것이다.
* 하루는 성도들에게 물어 말씀하기를 “최수운의 시천주에는 포교 50년 공부가 들어 있고 김경흔(金京言斤)은 50년 공부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나니 경흔이 그 주문을 받을 때에 신명이 이르기를 ‘이 주문으로 사람을 많이 살리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이제는 신명시대라. 같은 50년 공부에 어느 주문을 해원시킴이 옳으냐?” 하시니 광찬이 대답하기를 “선생님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하니라. 이에 말씀하시기를 “시천주는 이미 행세되었으니 태을주를 써라.” 하시고 “훔치 훔치를 덧붙여 읽어라.” 하시며 술잎같이 ‘훔치’ 두 줄을 붙이시니 이러하니라. 훔치훔치 태을천 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사파하. (道典 7:57)
만트라의 운율
주문의 두 번째 특성은 일정한 운율(韻律)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주문은 고유한 리듬, 곡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물결’이라 할 때, 그것이 물의 높낮이에서 생겨나는 수파의 모양을 의미하듯, 주문도 제각기 운(韻)과 율(律)에 따라 소리의 결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읽는 운율에 따라 열리는 에너지의 차원이 다르게 된다. 따라서 읽을 때는 반드시 정연한 ‘운율의 법칙’을 준수해야 그에 합당한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운율은 해당 주파수를 잡아내는 채널이나 안테나 같은 역할을 한다. 만약 채널이 어긋나면 잡음이 나거나 그 방송을 수신할 수가 없다. 그처럼 주송을 할 때 자칫 하모니가 깨지게 되면 일정 부분 에너지(기운) 누수현상이 벌어질 수가 있다.
주문을 만든 창주자(創呪者)나 전수 받은 마스타급의 스승에 의해서만 그 주문에 대한 올바른 정운(正韻), 정율(正律)이 규명될 수 있다. 그래서 스승은 제자에게 정확한 운율을 전수해 준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제 멋대로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주문은 우주의 율려음(律呂音)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존재를 움직이는 생명의 소리요 해방의 소리다. 아무렇게나 읽어선 절대 안 된다. 따라서 스승으로부터 올바르게 전수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도수행(神道修行)
(위 사진: 빛을 향해 노를 저으며 강을 건너가는 사공의 모습, 이와 같이 '주문'은 보통의 인간세계에서 깨달음의 신도神道세계로 건너가는 나룻배와 같은 것이다. 그 광명의 신성神性과 하나되기 위해 부지런히 노를 저어 나아가는 것은 오직 나의 몫이다.)
주문이 주재신(主宰神)을 갖는다는 것은 주문수행이 신도수행이라는 말이다. 모든 음절은 그 음을 주관하는 일정한 신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 음을 소리내면 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 형성되어 신력(神力)이 제공된다.
예를 들어 진각종(밀교)이 본주로 주송하고 있는 ‘옴마니반메훔’의 경우 옴은 비로자나불, 마는 아축불, 니는 보생불, 반은 아미타불, 메는 불공성취불, 훔은 금강불로 각각의 글자에 주재신이 존재한다. 그 주문을 지속적으로 송주할 경우 그 공덕으로 육바라밀을 갖추어 야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주문 속에 담겨진 신력과 주력으로 불생불멸의 법신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주문 각각의 글자에 맞는 주재신이 존재하기도 하며, 주문전체가 하나의 주재신을 갖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문을 정성껏 지속적으로 읽을 경우 절대자나 그 밖의 신들의 구체적인 신성과 모습을 불러 일으켜 ‘합일의식(=正覺정각)’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뿌리소리, 비자만트라(Bija Mantra)
주문의 네 번째 특징은 특수한 힘을 갖는 씨앗(Bija)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神 또는 우주의 힘을 상징하는 뿌리소리(根本音)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비자만트라(Bija Mantra)라고 한다.
우주엔 신성을 대변하는 ‘뿌리소리’가 존재한다. 일종에 ‘종자음절’이다. 예를 들어 우파니샤드에 보면 ‘옴’이라는 글자 안에 특수한 힘의 씨앗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옴'을 모든 소리와 글자의 뿌리이자 모든 언어와 사고의 뿌리인 근원 만트라로 보고 있다(옴AUM: 전지, 전능, 편재를 뜻하는 Omniscient나, Omnipotent, Omnipotent 등이 모두 AUM에서 파생되었다).
‘훔(HUM)’이나 ‘치(CHI)’라는 불멸의 소리도 마찬가지다. ‘HUM’은 깨달음의 본래자리를 뜻한다. 불가(佛家)에선 ‘훔’을 깨달음의 마음자리라 한다. 종정님께서는 생명의 소리, 생명의 근원 에너지, 생명의 마음자리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치’는 그 생명의 근원자리를 향해 입을 크게 열고 그 기운을 동력화시키는 소리라고 하셨다.
주문의 성스런 힘, 샥티(Shakti)
회교문학을 대표하는 ‘아라비안나이트’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페르시아 어느 도성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다. 형 카심은 욕심쟁이라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무익하게 탕진하고 장인의 재산까지 가로채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우 알리바바는 가난하지만 순민하여 산에서 장작을 해다 시장에 팔아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알라신의 축복이었을까? 알리바바는 우연히 산에서 ‘열려라 참깨’, ‘닫혀라 참깨’라는 매우 기묘한 주문을 알게 되었다.
이 주문은 도적의 괴수가 거대한 암벽 앞에서 외었던 주문이었다. 이 주문을 힘차게 외었을 때, 바위벽이 양쪽으로 쩍! 갈라지는 기적이 벌어진 것이다. 하루아침에 알리바바는 알 수 없는 주문의 성스런 힘의 결과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러나 형 카심은 알라신의 저주를 받았을까? 그만 ‘열려라 참깨’라는 신비한 주문을 잃어버리고 말아 동굴 속에 갇히는 바람에 도적 떼들에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주문에는 성스런 힘이 존재한다. 만트라 안에는 우주의 충만해 있는 활동적인 음(音)에너지가 내장돼 있는 것이다. 이것을 힌두인들은 샥티(Shakti)라고 한다. 즉 모든 창조에 관여하는 힘, 초월적인 신성한 원리를 만들어 내는 근본에너지라 할 수 있다.
(영화 해리포터: 해리포터는 주문을 읽음으로써 마법을 부린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고대 서양문화에서도 도술의 세계가 있었고 그 바탕은 동양과 마찬가지로 신도神道의 조화를 부르는 주문 속에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옛 고대인들은 만트라 에너지를 다방면으로 사용해 왔다(영화 '해리포터'를 생각해보라). 수톤이나 되는 거대한 돌을 들어올리는 건축용으로, 성을 무너뜨리는 전술용으로도 사용했고 사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의학용으로도 사용했다. 또한 신과의 조우를 위해 종교용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지혜의 완성을 위해 철학용, 명상용으로도 사용했다. 그것은 많은 실효를 거두었다.
위에서 예화로 든 알리바바도 동화같은 얘기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세계의 불가사의라고 일컬어지는 피라미드의 축조에 주문의 신령한 에너지가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모든 소리를 소급해 들어가면 우주에는 하나의 소리(One Sound)만이 존재한다. 마치 모든 박자가 onE BIT에서 시작하듯 역동하는 우주의 에너지는 오직 한 소리에서 파생된다. 우리 인체부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소리가 심장(心腸) 박동 소리다. 心腸을 心場이라고도 한다. 즉 마음(心)이 있는 장소(場)란 뜻이다. 이것은 우주의 onE SOUND와 일치하는 것으로 바꿔 말하면 오직 마음의 소리, 마음의 눈으로만 우주의 원음(原音)을 느끼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소리는 다차원적 시공간의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무수한 음音의 파편들을 만들어 낸다.
마치 우주가 빅뱅을 통하여 무수한 은하계라는 다양한 가능성의 파편들을 만들어 냈듯이 소리 또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밤하늘의 별처럼 신성을 안고 쏟아진 것이다. 태을주와 운장주엔 어떤 성스런 힘이 존재할까?
* 태을주는 심령(心靈)과 혼백(魂魄)을 안정케하여 성령을 접하게 하고 신도(神道)를 통하게 하며 천하창생을 건지는 주문이니라. 관성주(關聖呪)는 삿됨을 제하고 모든 마(魔)를 끌러 안정케 하는 주문이니라. (도전 11:161)
성공의 열쇠, 부단(不斷)한 반복
* 하루는 상제님께서 “주문(呪文)은 무슨 주문이든지 믿고만 읽으면 좋으니라.”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혼기를 잃어 한이 된 어떤 처녀가 도나 닦으려고 이웃에 수도하는 노부처(老夫妻)를 찾아가 주문을 물으니 때마침 노부부는 서로 다투던 뒤라서 심사가 불안하여 귀찮은 마음에서 ‘아무 것도 싫다.’고 대답하였더니
처녀가 이를 주문으로 알고 앉으나 누우나 쉬지 않고 열성으로 읽으니 온 식구가 싫어하는지라. 하루는 그 말을 외우면서 물동이를 이고 오는데 그 아버지가 보리타작하던 도리깨로 이고 오는 물동이를 쳐서 돌 위에 넘어졌으나 동이도 성하고 물도 쏟아지지 않았느니라.” 하시니라. (道典 9:112)
주문이라는 자물쇠(Lock)를 여는 Master key는 ‘반복(Loop)’에 있다. 순수의식, 깨달음에 도달하기 의해선 부단히 반복의 반복을 거듭해야 한다. 마음을 다잡아 일념으로 주문을 읽을 때 한순간 소리의 진동이 사고의 진동과 공명이 되어 에메랄드같은 순수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시도로 자물쇠에 맞는 키(KEY)를 찾을 순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수십 만개, 수백 만개의 키중에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겠는가? 부단한 시도와 노력으로 일일이 맞춰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전면적인 행위가 필요한데 그것이 노처녀의 예화에서 처럼 주문을 반복해 외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키는 결코 안에서 열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누군가 열어주는 것도 아니며 열어줄 필요도 없는 수동문으로 오직 밖에서만 열리도록 되어있다. 오직 그 Key를 쥐고있는 자신만이 열 수가 있다. 그러므로 헛된 의뢰심이나 기대심은 애초부터 버려야 한다.
상제님께서는 “태을주는 역률(逆律)을 법했을 지라도 옥문이 스스로 열리니라. 운장주는 살인죄에 걸렸을 지라도 옥문이 스스로 열리느니라. (도전 9:104)”라고 하셨다. 여기서 주지할 사실은 '스스로 열린다'는 말이다.
또, 『성경』에서 예수그리스도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고 했다. 열릴 것이라고만 했지 열어 줄 것이라는 확언은 어디에도 없다. 즉, 스스로 열라는 말이지 열리길 기다리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내가 이 정도 읽었으면…’ 하면서 누군가 열어주길 기다리는 피동적 사고에 빠지지 않는지 자성해 볼 필요가 있다. 자신과 너무 쉽게 타협해 버리고 적당히 해버리고 만다.
옛말에도 ‘신은 보이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에 존재한다’고 했다. 별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진리를 믿고 확증할 때 내부로부터의 접속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도(道)의 세계에서는 터럭만큼도 사정이 없다. 자신이 딛고 올라선 만큼 열리고 깨진 만큼 성숙한다.
『데비마하트므얌』이란 책을 보면 여신에게 올리는 만트라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글자 하나 하나에 신비스런 힘이 박혀있어 헤아릴 수 없이 반복하여 외우고 기구(祈求)하면 여신(女神)으로부터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이것 또한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한 신성의 발현일 것이다.
수행자는 문(Mantra Gate: 그래서 주문(呪文)을 주문(呪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주(呪)의 반복을 통해 문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 문은 여러 단계의 코스로 존재한다. 공부세계는 끝이 없다.) 밖에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헛된 의타심이나 기대심도 버려야 한다. 오직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스스로 열어야 한다. 그것이 공부세계의 원칙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엔 이유불문하고 무조건 주문을 암기해야 한다. 거기에는 어떤 이유나 조건이 없다. 무의식이나 꿈속에서조차도 아무 걸림 없이 술술 터져 나올 정도로 의식 속에 각인시켜 놔야 한다.
일회일진(一回一進)
고리(Loop)는 하나의 원(圓)을 완성하는 순환(Circulation)의 의미를 갖는 것이지 단순한 반복(Repeat)의 의미가 아니다. 또한 순환은 그때그때 의식의 진보와 결합되어 선회(旋回, Turning)의 비약을 갖는다. 그러므로 순환은 변혁(Revolution)을 주도한다. 왜냐하면 순환은 새로운 질서와 창조를 계속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답보나 정체의 막다름(Stalemate)의 의미가 아니다.
의역(意譯)과 음역(音譯)
주문의 세계에선 의역(意譯)은 불문율(不文律)로 음역은 성문율(成文律)로 삼고 있다. 그럼 의(意)는 무엇이고 음(音)은 무엇인지 그 뜻을 살펴보자. 북계(北溪)선생은 의(意)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意是心上發起一念 思量運用要恁地底
- 마음에서 발생한 한가닥 생각으로 이러이러하겠다고 생각하고 운용하는 것.
以意比心 則心大意小 心以全體言 意只是就全體上發起一念慮處
- 의意를 마음에 비교하면 마음이 크고 意는 작다. 마음은 전체적으로 말한 것이고 意는 전체에서 발생되는 ‘한 가닥의 생각’이다.
이처럼 의(意)는 마음에서 발생한 한 가닥 분별의식으로 매우 지엽적이고 한정된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역(譯)을 붙이면 생각으로 뜻을 풀이한다는 의미가 된다(意譯). 그럼 음(音)은 무엇일까? 『예기(禮記)』 「악기(樂記)」편에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凡音者는 生人心者也니 情動於中故로 刑於聲하나니 聲成文을 謂之音이니라.
- 무릇 音이란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다.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까닭에 소리에 나타나게 되고 소리가 곡조(曲調)를 이루는 것을 音이라 한다.
여기서 소리가 나타나게 됐다는 것은 마음의 구체적인 표현이며 실제적인 행동을 염두해 둔 것이다. 즉 소리를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밖으로 표출해 내는 것으로 말한다. 여기에 역(譯)을 붙이면 마음에서 우러난 소리를 밖으로 내어 뜻을 풀이한다는 얘기가 된다(音譯).
정리해서 다시 말하면 의역은 뜻으로 주문을 해석하는 것이고, 음역은 소리와 직관을 동원하여 주문을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중대한 차이점이 생긴다. 의역은 단순히 그 뜻을 안다는 지식(알음알이)적인 차원이지만 음역은 그 지식(소리수행)을 실천과 결부시켜 지혜를 얻어내는 차원이다. 다시말해 음역은 지식의 완성(完成)을 꾀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동학의 시천주 주문 중에서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라는 시천주(侍天主)를 직역하면 '천주님을 모시고 조화를 정하니 영세토록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옵나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천주님은 누구이며 조화(造化)를 정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점은 도저히 의역으로 100% 풀어내기엔 불가능하다. 보다 구체적인 소리의 공식(音譯)을 통해 정답을 알아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음역인 것이다.
따라서 대의(大意)란 전체하에 주문의 뜻은 더 이상 언급되지 말아야 한다. 읽다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역이 전혀 불필요한 과정인 것만은 아니다. 앞에서 시천주의 의역을 예로 들었지만 그러한 주문의 뜻을 모르면 정확한 느낌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주력(呪力)이 바로 설 수 없게 된다.
(우 그림: 주문과 노래의 공통된 원리. 진정 좋은 노래는 가사와 음이 다 좋은 것을 말한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가사 속의 뜻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노래 속에 담긴 참된 메시지를 알게 되고, 나아가 반복적으로 부르다보면 그 속에 담긴 깊은 맛을 느끼게 되어 그 노래와 하나된 감동과 환희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주문을 무슨 주문이든 믿고만 읽으면 좋지만 대의적인 의(意)를 알아두는 것이 수행하는데 있어 훨씬 유익하다. 대의를 깊이 숙지하지 않는 소리는 마치 붕어가 입을 '뻐끔 ~ 뻐끔 ~'하는 것과 같다. 항상 주문의 뜻을 깊이 새기고 소리에 부합시켜 읽을 때 그 소리는 완전해 질 수 있다. 이처럼 의역(意譯)은 주문의 대의(大意)와 정의(正意)를 말하는 것이며, 음역(音譯)은 직접 소리내어 주문을 읽는 행위를 말한다.
지(知-앎)는 각(覺-깨달음)을 이끌어 낸다
상제님의 말씀에 '선지후각(先知後覺)'이란 말도 있듯 '먼저 아는 것이 있어야 깨닫게 되는 법'이다. 아는 것이 없으면 깨달을 것도 통달할 것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의역으로 먼저 그 뜻을 지(知)하고 음역으로 각(覺)을 이끌어 낸다. [앎(意: 뜻) --> 행함(音: 소리) --> 깨달음(覺: 완성)]
* 하루는 태모님께서 문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신도들이 각 주문의 뜻이나 알고 읽는지 모르겠다.” 하시며 고민환에게 명하시어 “각 주문의 기본 뜻을 알고 읽어야 주력(呪力)이 확고히 서나니 각 주문의 본뜻을 생각하여 말하라.” 하시므로 민환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올렸더니 “잘하였구나.” 하시며 “알지 못한 신도들에게 설명하여 알도록 하라.”고 명하시니라. [도전 11:161] |
주문의 대의(大意)와 정의(正意)
주문은 대의 즉 큰 범위안에서만 그 뜻을 이해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개인의 생각을 개입시키면 자칫 정도(正道)를 벗어나 사도(邪道)에 빠질 수 있다. 또 그것이 관념이 되어 수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언덕 위에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고 하자. 화가에게는 이 모습이 더없이 좋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 풍경화의 한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그럼 부처님이 본다면 어떨까? 아마 그 소가 또다시 생사윤회의 바다를 헤맬 것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백정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모르긴 몰라도 소가 소같이 안보일 것이다. 등심 따로 안심 따로 꼬리 따로 소가 거의 해체되어 예술적 가치나 측은지심이 들기는 커녕 부위 별로 근수와 고기만 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문의 뜻을 지나치게 파고 들거나 행하지 않고 알려고만 드는 것은 자칫 백정의 시야처럼 주문을 해제시키는 꼴 밖에 안된다. 주문이 주문같이 안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메스도 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화사첨족(畵蛇添足)이란 옛 고사처럼 뱀을 그리는데 쓸데없이 발까지 그려 넣을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 대의에 입각해 주문의 뜻을 알면 그것으로 족하다.
한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텔레비전을 보는데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전자시스템을 이해하고 시청하는 사람은 없다. 기본적으로 리모콘만 사용할 줄 알면 된다. 주문이 텔레비전이라면 주문의 뜻은 리모콘이며 주문을 읽는 것은 리모콘을 누르는 실절적인 행위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화면에 나오는 그림은 의(意)를 실행하여 돌출된 각(覺)으로 볼 수 있다. 자칫 자세히 알겠다고 TV를 뜯거나 건드렸다간 고장날 수도 있고 자신이 다칠 수 있다.
또 한가지 주의할 점은 주문의 뜻을 바르고 정확히 알아야 한다. 정의로도 말할 수 있는데 주문의 뜻을 알긴 알아도 정확히 알라는 의미다. 여기엔 정통성의 문제가 뒤따른다. 왜냐하면 주문의 뜻을 올바르게 명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주문을 만든 창주자(創呪者)나 법통을 전수받은 계승자 이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물건을 구입할 때 첨부되는 사용설명서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사용설명서는 그 물건을 가장 잘아는 사람이 써놓은 것이므로 반드시 사용 전에 참조해야 하듯 주문의 뜻은 그 주문을 완전히 알아버린 사람이 정의한 것이므로 읽기 전에 반드시 알아둬야 한다.
소리의 진행이 곧 마음
소리내어 주문을 읽는 것은 음역의 구체적인 행동이다. 병을 치유하기 위한 투약행위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약을 먹지 않고선 병을 다스릴 수 없듯 주문을 읽지 않고선 주문을 다스릴 수도 없고 참뜻도 개달을 수 없다. 음(音)이 완전한 의(意)로 귀일(歸一)하기 위해선 심신(心身)의 구체적 행위가 필요하다. 그것은 꾸준히 주문을 읽는 것이다. 그래서 음은 곧 성(聲)이 된다. 왜냐 하면 소리를 내어 주문의 음을 지속적으로 몸과 마음을 다해 읊조려야 하기 때문이다.
음(音)을 파자(破字)하면 말씀 언(言)에 입 구(口)와 여기에 하나 일(一)을 더한 형상을 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무언가를 입으로 부르거나 외우는 것을 의미하며 곡조나 운(韻)을 매긴다는 뜻에서 하나 일(一)을 입가운데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음(音) 밑에 심(心)자를 더하면 의(意)가 되는데 이것은 곧 소리의 진행이 마음이라는 뜻도 있고 소리에 마음을 결합시킨다는 뜻도 있다. 또 소리의 밑바탕이 마음이 돼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 즉 소리는 소리이되 막연한 소리가 아니라 의의 참뜻을 마음으로 깊이 숙지하고 읊조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의의 진면목을 알 수 있지, 입(口)을 꽉 닫고 소리를 내지 않으면 깜깜해져서 급기야 음(音)의 의의(意義)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음역(音譯)은 곧 행역(行譯)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입에 꽉차게 읽어야 한다.
만트라의 세계에 있어 발성법이 뚜렷하게 정형화된 것이 없다. ‘족적을 따라가다 보니 마구간이더라’하는 것처럼 막연하면서도 다분히 주관적이다. 자료를 좀 얻을 수 있을까 하여 만트라의 세계를 심도 깊게 걸었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추적해 보았지만 더욱더 막연한 신기루에 당착하게 될 뿐이다. 그래서 여러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을 참고하여 몇 가지 발성법을 체계화 시켜 보았다.
우렁차게 읽는다
처음에 주문을 읽을 때는 힘차고 씩씩하게 큰 소리로 읽는 것이 좋다. 아랫배(하단전)에 힘을 주고 꾹! 꾹! 눌러 읽는데 약하게 하면 소리의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 특히 처음에 읽을 때는 소리를 박력있게 내야 소리를 잡을 수 있다. 사운드가 미약하고 체내의 바이브레이션도 떨어진다. 큰 소리로 읽어야 심층에 있는 에너지를 자극할 수 있다.
우리의 몸은 하나의 울림통이다. 하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운드는 강력하게 심(心)과 성(性)을 자극, 그에 상응하는 기운을 촉발시킨다.
초보자가 처음부터 너무 낮고 작은 소리로 주문을 읽어 여기에 길들여지면 안된다. 나중에 수행이 깊어지면 자연히 사운드가 안으로 향하게 되어 저성(低聲)이 나오게 되지만 이건 고성(高聲)이 마스터된 다음의 얘기이다. 예를 들어 150W에 출력을 갖춘 스피커가 있는데 듣는 이가 조용한 음악만을 좋아한다고 해서 줄곧 그 한가지 음악만 들으면 스피커는 그 음에만 길들여져 150W의 제출력을 상실할 것이다. 때로는 락,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스피커의 음폭을 확장시켜 줘야 원하는 선율의 감동을 만끽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관해 라즈니쉬는 이렇게 말한다.
‘소리를 크게 바깥으로 내뿜어야 한다. 소리를 크게 내어야 자신이 그 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점점 그 소리를 통해 자신의 몸이 진동하며 깊은 조화 속에서 재조정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소리를 영창으로 할수록 몸은 감미로움으로 가득차게 된다.’
열심히 수도하다 보면 소리가 세 번 바뀐다는 통설이 있다. ‘몸의 각성(체통體通)’을 통해 소리를 느끼게 됨으로써 한 번 바뀌고, ‘귀의 각성(총명聰明)’을 통해 소리를 듣게 됨으로써 두 번 바뀌고, ‘눈의 각성(관음觀音)’을 통해 소리를 보게 됨으로써 세 번 바뀌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엔 음 높이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불가에서 고성염불(高聲念佛: 높은 소리로 하는 열 가지의 공덕)을 원칙으로 하는 것도 큰 소리로 ‘아미타불’등 기타 염불을 대성(大聲)하노라면 목청도 좋아지고 용맹스런 정진심이 나오며 삼매력이 깊어지는 등 여러 가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주문을 큰 소리로 읽게 되면 잡념을 떨쳐 버릴 수 있고 소리에 쭉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너무 큰 소리로 갑작스럽게 발성하면 목소리가 상하거나 성대가 상할 우려가 있으므로 한 옥타브 한 옥타브 점진적으로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때 단전 즉, 복성(腹聲)을 내면 목소리가 쉬거나 상할 우려가 없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소리를 크게 내는 것이 정기훼손의 우려가 있다고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창이나 노래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모두 단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활력이 넘치고 대부분 장수한다는 통계도 있다. 문제는 소리의 높낮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운율의 준수와 단전 기운의 관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위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마구 고함을 질러대거나 주문을 포악하게 읽는 것은 듣는 이로 하여금 혐오감과 주위에 불협화음을 불러 일으킬 수 있으므로 따로 개별적으로 발성을 연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장(悠長)하게 읽는다
목소리를 길게 빼면서 느리게 오래 읽는 것이다. 짧고 숨가쁘게 읽는 것에 비해 진동이 길고 오래가기 때문에 소리의 효과를 빨리 볼 수 있다. 소리를 느리게 읽음으로써 심층으로 더 깊이 파고 들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관해 라즈니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슴은 너무나 예민하기 때문에 아주 느리고 리드미컬한 소리만이 가슴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가슴까지 소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한 만트라는 완성된 것이 아니다. 가슴 속까지 가장 깊은 중심부까지 소리가 들어가야 만트라는 완성된다. 만트라의 속도를 늦추고 그대는 더욱더 깨어 있어야 한다.’
느림은 빠름보다 그 감동이 한층 강하다. 영화에서 감동적인 부분을 느리게 처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느림을 통해 감정을 실을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낭낭(朗朗)하게 밝고 맑게 읽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소리가 나오긴 힘들고 어느 정도 목소리가 다듬어져 곰삭아야 한다. 배추를 다듬어 절여서 일정기간 삭혀야 김치 맛이 살아나듯 소리 또한 일정기간 절차탁마해야 한다. 그래서 소리의 흐트러짐 없이 낭랑하게 읽노라면 옥구슬이 소반 위에 굴러가는 소리가 나올 수 있다.
구성지게 읽는다
맛좋은 음식이 비위를 당기듯 주문을 은근하면서도 구수하게 읽는다. 마치 산사(山寺)에서 흘러나오는 스님의 염불 소리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읽는 것이다.
명명백백(明明白白)하게 읽는다
한 자 한 자 발음을 정확하고 또랑또랑하게 읽는 것이다. 글자 하나 하나의 의미와 법력(法力)이 상호 다르고 기운도 다르기 때문에 악기의 음처럼 제 발음, 제 소리로 또박또박 정확히 읽어야 한다. 슈리슈리 아나다무르띠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리를 통해 해방된 에너지는 저절로 드러나 마음에 특수한 형태의 사고 형식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만트라의 올바른 발음이 중요하다. 진지하게 수행하면 소리의 진동이 사고의 진동과 동조되어 순수의식에 이를 수 있다.’
정확히 발음해야 주문 속에 내재된 에너지도 정확히 발동한다. 주문은 ‘완전한 음절’이기 때문에 ‘완전한 발음’을 해야한다. 완전한 발음의 지름길은 '완전한 입모양'에 달려 있다. 특히 초심자나 소리가 부정확하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정확한 입모양을 만들어 주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즐기는 마음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읽는다
온화한 마음으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읽는다. 소리와 운율을 거스리지 않고 소리에 편승해 가며 읽으라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주문을 잘 하려고 하지 말고 주문을 즐기는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주문을 즐기려면 재미와 필요성을 느껴야 한다. 재미를 느끼면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면 주문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주문 읽는 것이 지루하지도 않고 또 고루하게 주문을 읽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즐기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주문 수도는 같은 글귀를 반복 습득하는 수행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인내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무리하지 말고 여유 있게 주문을 줄기는 마음으로 읽는다면 보다 쉽게 물 흐르듯 읽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은 다툼이 없다. 그래서 물을 보면 마음이 편안한 것이다.
지금까지 7차례에 걸쳐 주문수행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 내용들은 종정님께서 하신 말씀과 수행에 대한 각종서적들을 참고로 정리한 것이다. 태을주 수행은 본질적으로 지고지순한 마음과 정성으로 체험되는 세계이므로 여타의 방법들은 사족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을주의 세계에 첫 걸음을 내딛는 초신자들에게는 수행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호흡은 주문의 숨결
어느날 부처님이 어떤 사문에게 이렇게 물었다. “사람의 목숨은 얼마동안 있느냐?” 한 사문이 대답하기를 “며칠사이에 있습니다.”라고 하니 “너는 아직 도를 모른다.”라고 했다. 또다른 사문에게 물었다. “사람 목숨이 얼마동안 있느냐?” 그 사문이 대답하기를 “잠자는 사이에 있습니다.”하니 이번에도 “너도 아직 도를 모른다.”고 했다. 또 다른 사문에게 “사람의 목숨이 얼마동안 있느냐?”고 물었다. “호흡하는 사이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때 “네가 바로 도를 아는 자로구나!”했다. -사십이장경
한마디로 생사가 코끝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호흡이 짧아지면 그 만큼 수명도 짧아질 것이요, 호흡이 길어지면 그 만큼 수명도 길어질 것이다. 그래서 원상법(원상법요)에서 호흡을 생사지지(生死之至)라 하여 죽고사는 지극함이라고 말한다.
주문수행 또한 호흡을 배제하고는 올바른 수행을 이룰 수 없다. 혹 주문수행은 소리를 내기 때문에 호흡과는 무관하다고 알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주문을 읽다보면 저절로 호흡조절이 이루어진다. 일정하고 균형된 호흡만으로도 소리는 확고해지고 안정되며 깊어진다.
그러므로 주문수행에 있어서 호흡을 어떻게 조절하느냐는 주문소리를 어떻게 내느냐와 직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주문수행은 단전호흡처럼 호흡을 균일하고 면밀하게 유지할 수가 없다. 소리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끝임없이 공룡이 불을 뿜듯 소리를 입으로 토해내야 한다. 그래서 나름의 호흡법을 갖게 된다.
호흡은 하단전으로
그럼 어떤 호흡과 소리가 주문수행에 적합할까? 한마디로 복식호흡과 복성(腹聲)이다. 즉 아랫배인 하단전으로 내는 소리를 말한다. 보통 소리를 목성이나 흉성(胸聲)으로 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폐식(肺息)호흡을 하기 때문이다.
하단전은 정기신(精氣神) 중에 정에 해당하는 곳으로 기해혈(氣海穴)이 자리잡고 있다. 기해(氣海)는 기의 바다라는 뜻이다. 시냇물, 강물이 흘러 흘러 종래엔 모두 바다로 모이듯이 무한한 대생명의 에너지(기=프라나)가 1차적으로 모여 쌓이는 곳이다. 기해라는 말과 함께 따로이 음해(音海)라는 말로 대변될 수 있다. 즉 하단전은 ‘소리의 바다’라는 것이다.
하단전에서 나오는 복성은 소리가 우렁차고 절도가 있다. 또 숨이 깊어지므로 상대적으로 의식도 깊어진다. 또한 소리가 아랫배에서 나오기 때문에 오장육부를 비롯하여 세포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자극해 손끝까지 파동을 느낄 수 있다. 이때 병약한 사람은 상당한 치료효과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소리의 고유한 리듬과 파동이 호흡과 맞아 떨어져 병약한 부위나 세포에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복식호흡을 통한 복성은 장시간 수행을 해도 목소리가 쉬지 않는다. 마치 어린아이가 하루종일 울어도 목소리가 쉬지 않는 이치와 같다고 할까? 오히려 힘이 솟아나고 하면 할수록 다이나믹하고 심도깊은 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에 반해 폐식을 통한 폐성이나 목성은 우선 어깨가 들썩여 횡경막을 자극하게 되므로 가슴이 뻐근하고 갑갑하다. 소리의 진동이 가슴부위만 타고 돌기 때문에 심연에서 끌어 오르는 참된 소리를 내지 못한다. 또한 장시간 주문을 읽게 되면 목소리가 잠기거나 쉬어 버리는 단점도 있다. 그리고 허리가 자꾸 구부러지는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한다.
폐성과 복성의 차이를 악기에 비유해보면 그 차이를 좀더 쉽게 알수 있다. 예를 들어, 타악기의 경우 어디를 치느냐에 따라 음색이나 음질이 확연히 달라진다. 이때 중앙부위를 칠 때 가장 고른음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야 진동이 깊고 소리가 멀리까지 퍼져 나간다.
마찬가지로 신체 어느 부위에서 소리를 울려 주느냐에 따라 음폭이나 음질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이 바로 하단전이다. 그래서 소리를 전문적으로 다르는 사람치고 복성을 내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초보자의 경우 대부분 복성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소리가 들뜨거나 인위적인 가성을 내기 십상이다.
이를 볼 때 수행은 첫걸음은 복식호흡을 통해 단전에 소리의 중심을 잡는데서 시작한다. 일단 중심이 잡히면 그때부터 소리가 온몸에 뿌리를 내리게 되고 주송(呪誦)과 기운의 흔들림이 없게 된다.
소리의 리듬과 파동까지
단전호흡의 요지는 대자연에 충만해 있는 기를 호흡을 통해 내 몸에 끌여들여, 인체의 기와 융합해 양기(陽氣)를 생산하여 운기(運氣)함으로써, 종래엔 천지와 합덕(合德)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문수도는 이런 호흡의 효과와 더불의 소리의 효과를 추가한다. 그러므로 수행의 효과가 호흡만하는 것에 비해 월등하다. 여기서 소리의 효과란 ‘주문이란 무엇인가?’에서 밝힌 6가지 특성 중 2번째, 4번째 ‘일정한 운율’에서 얻어지는 '성스런 힘'과 '비밀스런 에너지'를 말한다.
주문은 정연한 운율이 존재하며 그것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해당되는 우주의 율려(律呂)와 공명(公鳴)하고, 그러면 순식간에 그 운율에 파동을 타고 에너지가 흡수된다. 즉 코드를 꽂으면 그 즉시 전기가 통하는 이치와 같다.
슈리 슈리 아난다무르띠는 소리와 호흡에 관해 ‘만트라의 파동에 호흡을 싣고 그 집중된 마음을 실어서 우주의 감미로운 리듬을 타는 것이다.’고 했다. 마치 회전목마에 몸을 싣듯 우주의 숨결, 맥박에 주문(소리, 호흡, 마음)을 싣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문수도의 삼요체를 호흡, 소리, 마음이라 한 것이다.
주문은 마음으로 읽는다
그 동안 7차례에 걸쳐 만트라에 대한 다양한 개론과 주송법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니체의 말대로 창공으로 높이 솟으려면 반대로 그 만큼 대지 속으로 깊게 내려가야 하듯 만트라를 읽는 마인드가 깊어야 하는 것이다.
만트라는 단순히 사운드만의 수행법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소리 지르고 기만 축적하면 모든 공부가 환희 열렸을 것이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여기서 핵심을 놓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만트라는 모종의 소자출(所自出)과 방향성(목적)을 갖고 역사 속에 그 이상을 성취하는 보이지 않는 힘과 권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 정신에 상응하는 역사정신과 인사(人事)체험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 증산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만일 도략(韜略)과 자비가 있다면 어찌 가만히 앉아서 볼 때리요.” 하시니라. [도전 5:155:15]
(속리산 법주사의 미륵불상: 석가모니불은 항상 앉아서 설법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좌불상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미륵불은 발로 걸어다니며 중생을 구제한다하여 항상 입불로 모시고 있다.
증산도는 미륵존불의 도법을 세상에 널리 펼치는 곳으로, 앉아서 수행만하는 데가 아니라 행동으로 자비를 실천하여 억조창생과 함께 숨쉼으로써 그들을 대개벽의 환란으로부터 구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예를 들어 태을주는 사람을 많이 살린다는 목적과 법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역사의 장에서 실제로 사람을 살리는 행위(포교)와 마음(상생정신)을 가졌을때 , 비로소 태을주라는 만트라의 정신과 부절과 같이 합쳐질 수 있다. 즉 사람을 살리는 인사체험을 통해 그 마음이 사무칠때 그에 상응한 깊이 만큼 만트라의 세계를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앉아서 주문만을 읽는 것은 반쪽짜리 수도밖에 안된다. 즉 좌불(坐佛- 앉아있는 부처)이 아니라 유불(遊佛- 행동하는 부처)이 되라는 것이다. (終)
....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문의 원리] 시리즈 총8편은 너무나도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프린트를 해서 다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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