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통합의 盛唐시대가 시진핑과 현대 중국의 롤 모델
[중앙일보] 입력 2015.05.16 15:30
『대당제국과 그 유산』펴낸 박한제 서울대 명예교수
중국분열론은 당송(唐宋) 이후 유효하지 않다. 맹자의 일치일란(一治一亂) 패러다임은 끝났다.” 박한제(69) 전 서울대교수(동양사)는 중국분열론을 서구와 일본, 일부 한국인의 헛된 욕망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중국사를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갈등과 통합의 과정으로 해석하는 ‘호한체제론(胡漢體制論)’을 창안한 박 교수는 일생의 연구 업적을 담은 신간 『대당제국과 그 유산-호한통합과 다민족국가의 형성』(세창출판사)을 펴냈다. 박 교수는 이 책을 통해 개방과 통합의 대당제국을 재현하는 것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비전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중국의 피상적 트렌드를 쫓지말고 심층에 흐르는 저류를 살피라고 권했다. “시진핑 주석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중국의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려면 과거를 알아야 한다며 역사 공부를 권했던 사실을 상기하라”는 말이다. 지난 7일 은퇴 후에도 서향(書香) 가득한 서울 낙성대 인근 일청서실(一靑書室)서 연구에 매진하는 노(老) 교수를 찾아 그의 중국론에 빠져들었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
-서재 ‘일청서실’ 이름이 참 맑다.
“일준위청(一遵爲靑) ‘한결같이 푸르고자 노력한다’라는 뜻이다. 청(靑)은 ‘젊음’ ‘티 없는’이란 뜻이다. 개관사정(蓋棺事定)이란 말처럼 인생은 관 뚜껑을 닫은 뒤에 결정된다. 그 때까지 젊은이처럼 최선을 다하자는 바램을 담았다. 나옹선사(懶翁禪師)는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라 말했다. 젊은 시절 그렇게 살지 못했다. 희망 같은 잡다한 것이 섞인 두 글자다. 편액(사진)은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1914∼1999) 선생이 써주셨다.”
-1980년대 초부터 ‘호한체제’라는 토종 이론을 제시했다. ‘호한체제’는 무엇인가.
“위진남북조시대에 호족과 한족이 중국 영토에서 서로 뒤섞여 하나의 문화체제를 융합·형성해가는 현상을 말한다. 이론의 핵심은 한족과 비한족이 모순과 갈등을 겪으며 상대를 인정하는 공존관계로 바뀌면서 수(隋)와 당(唐)으로 이어지는 대제국 형성을 이끌었다는 논리다. 이후 중국 역사는 호(胡)와 한(漢)이 길항·공존하는 형식으로 전개됐다. 궁극적으로는 현대 중국도 호한체제 국가라고 보는 관점이다.”
-신간 제목이 『대당제국과 그 유산』이다. 대당제국이 현대 중국에 남긴 유산은?
“나는 현재 중국을 호한 복합국가(제국)로 본다. 책의 부제를 ‘호한통합과 다민족국가의 형성’이라 한 이유다. 현재 중국 영토는 지리학자 후환융(胡煥庸·1901~1998)의 이름을 딴 후환융라인으로 양분된다. 헤이룽장성 헤이허(黑河)와 윈난성 텅충(騰衝)을 잇는 대각선에 의해 서북 소수민족지구와 동남 한족지구로 나뉜다. 서북은 소수민족이 주로 사는 자치구, 동남은 한족이 사는 성(省)으로 되어 있다. 이질적인 것을 합쳐 하나의 중국을 형성했다. 이제 한쪽을 분리해서는 중국이 온전히 성립할 수 없도록 불가분의 하나로 융합됐다. 이런 중국은 오호족(五胡族)이 만리장성 안으로 남하한 이후 이질적인 두 문화가 융합돼 세계 최다 인구를 가진 나라가 됐다. 대당제국에 와서 이런 국면이 형성됐다. 가장 이질적인 문화인 농경과 유목문화가 만나 충돌하고 반목했지만 이는 통합을 위한 과정이었다. 세계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지대물박(地大物博)한 중국은 이러 과정을 거쳐 등장했다.”
-그렇다면 당제국에서 현대중국으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은?
“대당제국은 이전 몇 백 년간 이어진 호한 반목·갈등·투쟁·타협의 결과물이었다. 전진(前秦)의 부견(?堅)이 기(起), 북위 효문제가 승(承), 북주의 우문태가 전(轉), 당 태종을 결(結)로 본다. 이전 중국은 한족만의 땅이었다. 그런데 한족적인 것이 아닌 사람과 물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한(漢) 제국 시기 흉노는 장안(長安)에 와서 살려고 하지 않았다. 약탈하고 초원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당 제국의 수도 장안은 외국인이 활보하고 거리에는 이국적인 풍조로 채워졌다. 여러 호족 황제들이 제창한 ‘호월형제(胡越兄弟)’ 즉 한족과 더불어 북쪽의 호(胡)와 남쪽의 월(越)이 뒤섞여 호·한·월이 공존하는 국면이 전개된 것이다. 미국의 흑인처럼 원주지인 아프리카로 되돌려보려는 ‘사융론(徙戎論)’에서 적극적으로 불러들이는 대상으로 변했다. 이것이 이후 거란(契丹·요) 여진(女眞·금) 몽골(원) 만주(청) 등이 중원국가로 등장하게 된 배경이 됐다. 송대 이후에는 호한을 화이(華夷)로 불렀다. 현재 중화민족이 이른바 ‘다원일체격국(多元一體格局)’을 이룬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나왔다. 한화(漢化) 뿐만 아니라 호화(胡化)도 많았다. 나는 이를 중화화(中華化)라 부른다.”
-현대 중국의 원형을 이룬 당제국의 특징은?
“제국은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몰려오는 나라다. 사람이 몰려오려면 기회가 균등해야 한다. 미국이 한동안 그러했고 아직도 그렇다. 추신수·류현진·강정호가 메이저리그로 갔고, 박병호도 가고 싶어한다. 실력과 노력이 통하는 사회가 제국의 필수조건이다. 지극히 선하고 평등한 나라는 없다. 당나라에도 나쁜 측면이 많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봐야한다. 당제국은 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먼저, 가장 대규모로, 가장 평등하게 다른 문화를 포용한 나라다. 흑인도 활동하고 있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 흑인 선수가 출전한 것은 1947년에 이르러서였다.”
-신간에 ‘중국분열론’은 이제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는 구절이 나온다.
“중국의 전 역사의 전개과정으로 볼 때 일치일란의 패러다임은 당송, 특히 원대 이후에는 유효하지 않다. 지방적인 분파나 일시적인 분열은 있겠지만 ‘중국’이라는 국체(國體)는 쉽게 분열되지 않을 것이다. 오호십육국 이후의 역사를 통해 호와 한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었다. 그 켜켜히 쌓인 상호관계가 다른 다민족국가와 다른 형태를 만들었다. 만일 분열된다면 소수민족지구와 한족지구로 분열을 가정할 수 있을 것인데 그 켜켜한 역사가 분열하는 원심력보다 통합이라는 구심력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티베트와 위구르 갈등은 라마교와 이슬람이란 종교가 개입돼있다. 순수 민족문제가 아니다. 몽골·조선족이 독립하겠다는 말은 없지 않나.”
-교수님은 사료와 현지를 다니며 수많은 ‘황제’와 ‘제국’을 섭렸했는데 현대인에게 가르침을 주는 황제나 왕조를 꼽는다면?
“황제를 많이 보았지만 진정으로 고민하는 황제는 별로 보지 못했다. 중국은 예로부터 빈부격차가 심해 평균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 구성원이 복잡하고 큰 나라여서 거의 모든 황제들이 지역적·민족적 통합을 무엇보다 중요한 치정 목표로 인식했다. 나는 후자에 관심이 많았다. 이 문제를 가장 진지하게 고민한 황제는 성패에 관계없이 전진의 부견과 당태종 정도였다. 당태종은 도덕성 문제에도 불구하고 집권 후 이 문제를 가장 진지하게 고민한 황제다. 당왕조는 한국과 악연이 있지만 현대인에게 인사이트를 주는 왕조로는 가장 적절하다.”
-중국은 당률(唐律)의 본산이지만 동시에 뿌리 깊은 인치의 제국이기도 하다. 시진핑 주석도 법치를 내세워 국가개조에 나서고 있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중국에서 법의 위상은.
“중국에서 법이 등장한 역사는 오래지만 동아시아 법률의 기초를 당률에서 찾는 데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렇게 평가되고 수용된 것은 나름의 진보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률은 시간적으로 중국 고대로부터 내려온 농경세계의 모든 법률을 종합한 위에, 공간적으로는 유목세계의 법까지 통합했다. ‘제국’이 성립하기 위해서도, 제국을 질서 있게 통치하기 위해서도 법의 엄격하고 공평한 적용은 불가결하다. 시진핑으로서는 다른 카드가 없다. 그 만큼 국가의 구성성분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법의 적용은 공평해야 한다. 현재 미국도 법은 상밀한 데 비해 그 적용에 있어서 공평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문제를 키우고 있다. 당제국은 다양하게 구성된 국민에 대해 기회 균등과 법적용의 공평성을 보장한 것이 강점이었다. 시진핑에게도 인치와 법치의 조화가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중국의 굴기가 전세계의 화두다. 중국이 대당제국의 영화를 재현하려면 시진핑 주석을 비롯해 차세대 정치지도자들이 갖춰야 할 자세는.
“1000여년 전의 역사를 연구하는 내 소관을 벗어나는 질문이다. 다만 이제 바람직한 ‘제국’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중국이 미국을 대신할 것이라는 예견이 많지만, 내부 문제(인구·지역별 빈부격차·자원 등)로 그 역할을 수행하기란 쉽지는 않을 것이란 예상도 많다. 어렵겠지만 존경 받는 나라가 되어야한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중국적인 것을 배우기 위해 찾아갈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시진핑은 세계적인 뉴스메이커가 됐다. 청(淸) 옹정제와 비교된다. 시진핑과 당 태종은 비슷한 점이 없나.
“옹정제와 시진핑을 비교하는 것은 부패와의 전쟁과 개혁 추진이 유사해서다. 하지만 부패 척결은 통치의 과정이고 기반이지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시진핑이 나아가는 목표와 방향은 중화부흥, 즉 중화민족의 꿈(中國夢)의 실현이다. 중화민족에 방점이 찍혀있다. 중화민족은 한족만이 아니라 전 인민을 구성원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만주족 출신의 옹정제의 지향과 어느 정도 부합된다. 다만 시진핑이 서양 세력에 의한 굴욕을 벗어난 강력한 중국뿐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신 실크로드)’를 제시한 것은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중화를 재건하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당 태종 뿐만 아니라 당 황제들이 추구한 방향과 시진핑의 정책은 유사하다.”
-중국은 과거를 숭상하는 상고(尙古)사상이 뿌리깊다. 일대일로는 어떤 역사적 맥락을 갖나.
“우선 자원확보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마침 당대의 대외 진출로와 일치한다. 명(明) 정화(鄭和) 이전에 당은 이미 동남아를 거쳐 아프리카로 진출했다. 동남 연안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활약했다. 시진핑은 중국을 세계의 굴뚝으로 만들어 외국 상인들이 찾아와 국내총생산(GDP)를 올리는 개방 전략을 펼치려는 것이다. 시진핑은 진시황부터 당 이전까지 강력했던 역사를 말하다가 최근에는 당나라만 주로 언급하고 있다. 한과 당의 차이는 대외 개방 여부였다. 당 역시 외국인을 포용해 경제를 발전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이것이 내가 파악하는 일대일로 전략이다.”
-천인커(陳寅恪·1890~1969) 선생의 “학문을 물을 뿐 정치를 묻지 않는다”는 발언을 인용해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판했다.
“현재의 상황이나 입장에 서서 역사를 해석해서는 안된다. 각 시대적 실상은 현재와 다르다. 중국에서 ‘현재 중국강역 내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다’라고 하니 당연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고구려 영토는 지금 한국과 중국의 영토에 나누어 편입되어 있다. 역사는 역사대로 그냥 두어야 한다.”
-한국인에게 ‘혼혈의식’ ‘관용’ 등 ‘제국의식’이 없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역사는 제국을 지향하지 않았다. 이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나아가서도 안된다. 제국의식의 결여를 탓한게 아니라 ‘제국’을 이해해야 한다는 얘기다. 순혈주의가 갖는 장점이 있으니 이 장점은 잘 다듬되, 우리와 다른 나라의 역사와 방향도 이해해야 한다. 연대의식은 너무 강해도 문제다. 순혈주의는 자기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폐단이 있다. 의견이 다른 사람과 공존하며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개인이 양보하고 함께 사는 훈련이 필요하다.”
-한국인에게 ‘당나라 군대’는 형편 없었다는 편견이 있다.
“청일전쟁 당시 청군이 일본군에 지는 것을 목격하고 생긴 편견이다. 당은 당제국이 아니라 중국을 지칭하는 대명사다. TV앵커와 국회의원 몇몇이 잘못 발언한 적이 있었다. 실제 당군은 강했다. 강했다는 한나라 군대가 30만 흉노군에 패했던 반면 당은 100만 돌궐제국을 격파했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자 황제였던 무측천(武則天)도 당나라의 황제였다.
“이번 정부가 출범할 때 한 잡지에 기고한 적이 있었다. 무후는 첫째 간언을 받아들이고 사람을 볼 줄 아는 용인의 천재였다. 둘째 탕평적 용인을 펼쳤다. 구정치 세력이 누리던 기득권을 용납하지 않았다. 셋째 젊은 인재를 등용했다. 넷째 민생을 중시했다. 통치 50년간 대규모 농민반란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간에서 현대 미국과 당 제국을 비교했다.
“다양한 민족 구성, 하나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 민족 간의 기회가 비교적 균등한 것, 대외 개방 등이 미국과 당의 비슷한 점이다.”
-당제국의 저력을 응집력·다원문화주의·세계주의로 평가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이른바 ‘보세가치(普世價値·세계에 통하는 보편적 가치)’를 거부하고 있다. 중국의 관용 부족 현상은 극복될 수 있을까.
“중국이 갑작스럽게 빈국에서 부국으로 부상해 혼돈상태인 것 같다. 미래학자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그 방향으로 나가야 중국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한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중국화하는데 300~400년이 걸렸다. 서구의 근대사상이 중국에 들어온지 이제 100년이 갓 넘었다. 중국식으로 소화하는데 좀 더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국제 중국학계에서 중국이 미국과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 경쟁에서 밀리자 머니파워 전략으로 전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당제국의 머니파워는 어땠나.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의 티머시 브룩 교수는 ‘현대 중국이 경제적으로 당, 문화적으로 명, 정치적으로 청을 모델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확하다 할 수 없지만 사실 당보다는 송이 경제적으로 더 발전했다. 다만 당의 경제정책이 없었다면 송의 번영은 나타나지 못했다. 모든 문물을 수용하는 열린 제국, 번성한 제국을 지향했기 때문에 당은 군사·정치적으로 쇠락했어도 오랜 기간 존속할 수 있었다. 당제국의 머니파워는 사실 외국 상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장안의 서역상인, 동남해안의 아라비아 상인, 동북해안의 신라상인이 장악했다.”
-한국의 중국정치 연구자들은 한국과 중국의 공진화(共進化·co-evolution)를 제안하고 있다.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은 당 태종·고종시기의 한반도 개입이 있었기 때문에 당제국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선한 제국은 지구상에 있지도 않았고 앞으로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다. 이웃하고 살아왔고, 살아가야 할 양국이 ‘공진화’ 외에는 해답이 없다. 신라 통일 이후 중국 중원왕조와 한반도 왕조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관계가 정립되어야 한다.”
-중앙SUNDAY 독자들께 한마디 덧붙인다면?
“중국이 최대 화두다. 중국을 이해하려면 중국 역사를 깊게 그리고 바로 알아야 한다. 피상적인 트렌드에만 눈길을 줄 것이 아니라 심층에 흐르는 저류(底流)의 방향을 알아야 한다. 시진핑 주석이 오마바 대통령에게 중국의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려면 중국의 과거를 알아야 한다며 역사 공부를 하라고 했다는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박한제(69) 서울대 명예교수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와 수당제국 역사의 세계적 권위자다.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학사ㆍ석사ㆍ박사과정을 마쳤다. 저서로 『중국중세호한체제연구』(1988), 『인생-나의 오십 자술』(1997), 역서로는 『진인각, 최후의 20년』(공역, 2008) 등이 있다. 제3회 서울대학교 학술연구상(2010)을 받았다.
신경진 기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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