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추적자'에서 대통령후보 강동윤과 그의 장인인 한오그룹 서회장의 암투는 "과연 대통령과 재벌오너 중 누가 더 셀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대통령은 일시적 권력이고 재벌오너는 항구적 권력이다. 게다가 세습이 가능해서 더 무서운 권력이다. 당장 우리나라 현실만 봐도 대통령 권한은 민주화, 분권화에 따라 나날이 왜소해져 간다. 그와 대조적으로 대기업 회장이 행사하는 오너쉽은 2세, 3세들로 이어지면서 영구 불멸성을 과시한다.
새파란 오너2세 앞에서 나이 많은 임원들이 쩔쩔 매는 모습은 마치 "오너쉽은 모든 권력과 질서에 우선한다"라는 명제를 웅변하는 듯 하다. 한시적 권력인 대통령을 계단삼아 한오그룹 오너의 자리를 꿈꾸는 드라마 주인공의 야심은 현실 세계의 권력관계를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줘서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오너쉽을 '제1권력'이라고 부르는 것 아닐까.
소유는 사회가 아닌 개인에게 과연 어떤 의미인가.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처럼 통제받지 않는 소유권의 행사가 사회에 해악을 끼치듯 개인도 지나치게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면서 스스로 욕망의 노예가 돼가고 있지 않는가.
소유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으라는 법정스님의 '무소유 사상'.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저서 소유냐, 삶이냐를 통해 강조한 '소유보다 체험에 가치를 두는 삶'은 공감할 수 있으되 실행하기 쉽지 않다.
지당한 말씀이지만 행하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수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섬김을 받는 '공자왈 맹자왈'이라 생각했다. 현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트로피 법칙'을 제시한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제레미 리프킨이 `소유의 종말`을 주창했을 때 공상과학소설처럼 솔깃하지만 미심쩍었다.
윌리엄 깁슨의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라는 말대로 소유의 종말은 제레미 리프킨이 예견했을 때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던 미래가 아닐까. 어느날 갑자기 우리 주변에서 전통적인 소유의 개념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례는 무수히 많아서 인터넷만 검색해봐도 차고 넘칠 지경이다.
왼쪽부터 에리히 프롬, 제레미 리프킨, 로렌스 레식.
자동차를 공유하는 카셰어링 서비스는 이제 낯설지 않은 비즈니스 모델이 됐다. 회원제 사이트인 '코럭스'는 회원들이 수백만원대 명품 핸드백 하나를 기부하는 댓가로 한번에 2~3만원만 내면 다른 고가 명품핸드백을 일주일간 대여해서 사용해볼 수 있다. 금방 자라서 못 쓰게 되는 아이옷을 사는대신 공유하는 '키플'도 인기를 누리고 있다. 면접이나 맞선 때 말고는 잘 입지 않는 명품정장을 구입하는 대신 1~2만원대에 빌려서 쓸 수 있는 `열린옷장`도 각광을 받고 있다.
책을 공유하는 '국민도서관 책꽂이'도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세계적으로 번져가는 이런 현상들을 잽싸게 '공유경제(Sharing Economy)'라고 이름붙여 유명해진 사람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이자 사회운동가인 로렌스 레식이다.
공유경제의 신화로 거론되는 모델이 미국 샌프란시코에서 출발한 에어비앤비(AirBnB)다. 2008년 파산위기에 처한 창업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아파트를 대여해주고 돈을 모으기 시작한데서 출발했다. 현재 전세계 192개국 3만3000여 도시의 빈방을 SNS를 통해 중개해서 2초에 한번씩 부킹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창업 5년만에 1조4000억원 규모의 기업가치를 인정받고 세계최대 호텔체인인 힐튼을 위협할 정도가 됐다.
그런데 이건 얼핏 보면 방을 공유하는 것 같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노는 방을 저렴하게 대여하도록 정보를 제공해주는 민박중개사업의 일종이 아닌가 싶다. 종전에도 존재하던 민박이나 홈스테이를 SNS라는 플랫폼을 통해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자칫하면 공유경제의 본질이 호도될 위험성이 있다는 점에서 우려된다. 아직까지 공유경제의 개념이 성숙되지 못해 거품도 끼고 사이비도 섞여 있는듯 하지만 어쨌든 요즘 공유경제가 뜨고 있다.
공유경제가 가능해진 것은 사람에 대한 신뢰, 삶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내 것이 아닌 남의 가방을 들고 다니고, 내 아이에게 남의 아이가 입던 옷을 입히고, 핸들조작이 익숙치 않고 어딘가 고장이 나서 사고를 일으킬지 모를 남의 차를 탄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의 의식구조상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일탈이었다.
그 고정적 행동양식에서 일탈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SNS를 통해 낯모르는 타인과의 거리감이 많이 좁혀진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분석되고 있다. 여기에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부실 사태이후 유럽재정위기로 이어진 장기 경제불황이 '아껴쓰고 나눠쓰자'는 현실적 필요를 진작시켰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공유경제를 무소유 사상이나 사회운동적 관점에서만 보면 설레이는 유토피아의 예고편일지 모른다.
'네것 내것'이 없어서 가진 것의 규모로 사람의 우열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사회, 뭔가를 소유하기 위해 아등바등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법정스님처럼 너그러우신 분들로 넘치는 사회가 도래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하지만 소유라는 관계가 가진 막강한 지배력, 거기서 파생되는 사회적 경제적 권력이 너무도 생생하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공유경제란 그저 잠깐의 유행 정도에 그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성장을 위해 무한질주해야 하는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이다. 모든 경제주체들이 이를 악물고 생산하고 등골이 빠지도록 소비해서 국가총생산이 연간 1~2% 일지언정 플러스 성장을 해야 소비와 고용과 생산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도록 짜여져 있다.그런데 공유경제는 이중 하나인 소비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결과를 가져올텐데 그동안의 시스템이 과연 이 변화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공유경제는 많이 갖지 못한, 앞으로도 원하는 만큼 많이 소유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필자같은 사람들에게는 무척 반가운 현상이다. 하지만 기대만큼 사회 전체를 바꿔놓을 큰 물결이 될 수 있을지는 조금 더 차분하게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세상이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한발 한발 전진하는 것 같아 희망적이다.
글 : 이창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