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없는 SNS혁명… 민주주의 뿌리 못내리고 독재 U턴
기사입력 2014-05-23 03:00:00 기사수정 2014-05-24 00:17:57
[뒷걸음치는 ‘아랍의 봄’]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의 권리를 보도하지 말라.”
26∼28일 실시되는 이집트 대선에서 유력한 차기 대통령인 압둘팟타흐 시시 전 국방장관은 최근 이집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난해 7월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로 뽑힌 무함마드 무르시 전 대통령을 쿠데타로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최소 14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1만5000명 이상이 투옥됐으며 수백 명은 간이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2010년 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기폭제로 튀니지부터 불어 닥친 민주화 열풍인 ‘아랍의 봄’이 혁명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내부역학 탓에 뒷걸음질 치고 있다. 서구식 민주주의를 바라는 세속주의자들, 신정 국가를 꿈꾸는 이슬람 세력, 군부 간의 다툼으로 가까스로 민주적 절차를 이뤄낸 국가들이 내전으로 치닫거나 군사 독재로 회귀하기 시작한 것이다.
‘SNS 혁명’은 준비된 대안세력을 동반하지 않으면 ‘리더 없는 혁명’에 갇힐 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40년간 주요 혁명 지도자들을 만나왔던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최근 에릭 슈밋 구글 회장과 만나 “페이스북에서 드골, 처칠과 같은 강력한 리더가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 리드했지만 리더 없는 ‘SNS 혁명’
이집트와 함께 ‘아랍의 봄’을 맞이한 리비아 역시 최근 사실상의 내전에 들어갔다. 아랍권 위성방송인 알자지라 등에 따르면 퇴역 장성인 칼리파 하프타르가 이끄는 무장단체인 국민군은 18일 수도 트리폴리 의사당을 공격하고 의회의 권한을 중단시켰다. 이번 공격은 2011년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을 붕괴시킨 민중 봉기 이후 규모가 가장 크다. 현재 리비아에는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소부대 무장 세력이 2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동 전문가들은 아랍권이 민주화를 다지지 못하는 주요 이유로 강력한 리더가 없다는 점을 꼽는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2010년 말 튀니지의 과일행상인 무함마드 부아지지가 경찰의 부당함에 저항해 분신한 동영상을 급속히 확산시키며 대중의 분노를 이끌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과거에는 침묵했을 시민들이 SNS를 통해 다른 사람과 생각을 공유하자 거리로 뛰쳐나와 독재자 타도에 앞장섰다. 당시 튀니지 인구의 34%가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문제는 독재자가 물러나고 민주세력이 힘을 결집할 시점이 되자 준비된 리더나 대안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SNS도 리더를 만들거나 일으켜 세우는 데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이집트 민중은 2011년 독재자인 무바라크를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세속·자유주의 세력이나 이슬람 세력인 무슬림형제단, 어느 쪽도 확고한 리더십을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타협안으로 무슬림형제단 세력인 무르시가 최초의 민선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경제 파탄 속에 이슬람 원리주의가 득세하자 군부의 반격을 받았다. 리비아는 카다피가 물러난 뒤 수없이 정쟁을 겪다가 결국 내전까지 맞았다.
이에 반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피해 도피 생활을 하던 넬슨 만델라나 타보 음베키는 모두 수십 년에 걸쳐 평판과 신뢰,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아산정책연구원 장지향 중동연구센터장은 “혁명 이후의 상황을 계획한 준비된 리더가 없는 상황에서 결국 이름만 바꾼 독재자가 다시 나타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회 구조가 성숙하지 않은 아랍 사회를 SNS가 성급히 혁명으로 이끌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서정민 한국외국어대 교수(국제정치학)는 “1인당 국민소득 2600달러 수준의 이집트에서 민주화보다 안정을 원하는 대중이 독재자의 복귀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지적했다.
○ 갈 길 먼 아랍 민주주의
전문가들은 상대적으로 민주화 과정이 순조로운 튀니지를 그나마 아랍 민주화의 유일한 희망으로 보고 있다. 튀니지도 이슬람 세력인 엔나흐다당과 세속주의 야권이 충돌하면서 정치적 분열을 겪어왔다. 지난해 말에는 야권 지도자 2명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암살되기도 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올해 초 튀니지 정치세력은 이슬람교를 국교로 인정하면서도 이슬람 율법을 법의 근간이라고 명시하지 않은 헌법에 합의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튀니지에서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야당 세력과 온건한 이슬람 세력이 있어 타협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 사정이 개선되지 않으면 튀니지의 민주화 여정도 가시밭길일 수밖에 없다.
아랍권에서 일찍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한 터키도 최근 정권이 심각한 국민적 저항에 처하면서 아랍국가의 민주화는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는 “아랍 민중에게는 현재 민주주의보다 물과 빵, 전기, 젊은층 실업 문제를 해결해 줄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다만 광장에서 독재자를 무너뜨린 아랍 시민들의 경험은 향후 민주화 여정의 든든한 자산이 될 것이란 관측이 적지 않다. 인 교수는 “아랍 시민이 SNS를 통해 준비 없는 민주화를 경험했지만 이런 경험이 언제든지 다시 시민들을 광장에 모이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의 권리를 보도하지 말라.”
26∼28일 실시되는 이집트 대선에서 유력한 차기 대통령인 압둘팟타흐 시시 전 국방장관은 최근 이집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난해 7월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로 뽑힌 무함마드 무르시 전 대통령을 쿠데타로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최소 14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1만5000명 이상이 투옥됐으며 수백 명은 간이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2010년 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기폭제로 튀니지부터 불어 닥친 민주화 열풍인 ‘아랍의 봄’이 혁명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내부역학 탓에 뒷걸음질 치고 있다. 서구식 민주주의를 바라는 세속주의자들, 신정 국가를 꿈꾸는 이슬람 세력, 군부 간의 다툼으로 가까스로 민주적 절차를 이뤄낸 국가들이 내전으로 치닫거나 군사 독재로 회귀하기 시작한 것이다.
‘SNS 혁명’은 준비된 대안세력을 동반하지 않으면 ‘리더 없는 혁명’에 갇힐 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40년간 주요 혁명 지도자들을 만나왔던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최근 에릭 슈밋 구글 회장과 만나 “페이스북에서 드골, 처칠과 같은 강력한 리더가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 리드했지만 리더 없는 ‘SNS 혁명’
이집트와 함께 ‘아랍의 봄’을 맞이한 리비아 역시 최근 사실상의 내전에 들어갔다. 아랍권 위성방송인 알자지라 등에 따르면 퇴역 장성인 칼리파 하프타르가 이끄는 무장단체인 국민군은 18일 수도 트리폴리 의사당을 공격하고 의회의 권한을 중단시켰다. 이번 공격은 2011년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을 붕괴시킨 민중 봉기 이후 규모가 가장 크다. 현재 리비아에는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소부대 무장 세력이 2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동 전문가들은 아랍권이 민주화를 다지지 못하는 주요 이유로 강력한 리더가 없다는 점을 꼽는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2010년 말 튀니지의 과일행상인 무함마드 부아지지가 경찰의 부당함에 저항해 분신한 동영상을 급속히 확산시키며 대중의 분노를 이끌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과거에는 침묵했을 시민들이 SNS를 통해 다른 사람과 생각을 공유하자 거리로 뛰쳐나와 독재자 타도에 앞장섰다. 당시 튀니지 인구의 34%가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문제는 독재자가 물러나고 민주세력이 힘을 결집할 시점이 되자 준비된 리더나 대안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SNS도 리더를 만들거나 일으켜 세우는 데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이집트 민중은 2011년 독재자인 무바라크를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세속·자유주의 세력이나 이슬람 세력인 무슬림형제단, 어느 쪽도 확고한 리더십을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타협안으로 무슬림형제단 세력인 무르시가 최초의 민선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경제 파탄 속에 이슬람 원리주의가 득세하자 군부의 반격을 받았다. 리비아는 카다피가 물러난 뒤 수없이 정쟁을 겪다가 결국 내전까지 맞았다.
이에 반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피해 도피 생활을 하던 넬슨 만델라나 타보 음베키는 모두 수십 년에 걸쳐 평판과 신뢰,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아산정책연구원 장지향 중동연구센터장은 “혁명 이후의 상황을 계획한 준비된 리더가 없는 상황에서 결국 이름만 바꾼 독재자가 다시 나타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회 구조가 성숙하지 않은 아랍 사회를 SNS가 성급히 혁명으로 이끌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서정민 한국외국어대 교수(국제정치학)는 “1인당 국민소득 2600달러 수준의 이집트에서 민주화보다 안정을 원하는 대중이 독재자의 복귀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지적했다.
○ 갈 길 먼 아랍 민주주의
전문가들은 상대적으로 민주화 과정이 순조로운 튀니지를 그나마 아랍 민주화의 유일한 희망으로 보고 있다. 튀니지도 이슬람 세력인 엔나흐다당과 세속주의 야권이 충돌하면서 정치적 분열을 겪어왔다. 지난해 말에는 야권 지도자 2명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암살되기도 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올해 초 튀니지 정치세력은 이슬람교를 국교로 인정하면서도 이슬람 율법을 법의 근간이라고 명시하지 않은 헌법에 합의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튀니지에서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야당 세력과 온건한 이슬람 세력이 있어 타협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 사정이 개선되지 않으면 튀니지의 민주화 여정도 가시밭길일 수밖에 없다.
다만 광장에서 독재자를 무너뜨린 아랍 시민들의 경험은 향후 민주화 여정의 든든한 자산이 될 것이란 관측이 적지 않다. 인 교수는 “아랍 시민이 SNS를 통해 준비 없는 민주화를 경험했지만 이런 경험이 언제든지 다시 시민들을 광장에 모이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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