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요원 “성 처장 잘되라”…전두환 정권 끝났구나 확신

등록 : 2014.06.09 18:55수정 : 2014.06.09 21:37

1987년 6월5일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는 ‘6·10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열기로 결의해 전두환 정권을 압박했다. 이에 따라 6월9일 전국의 대학에서 ‘6·10 국민대회 출정식’이 열린 와중에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경찰의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쓰러지면서 역사적인 ‘6월 항쟁’이 촉발됐다. 사진은 7월1일 끝내 숨을 거둔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이 열린 7월9일 서울시청 앞에서 진행된 노제 때 수만명의 시민이 운집한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96)

나는 한국 현대사에서 ‘4월 혁명’을 제1의 시민혁명, ‘6월 항쟁’을 제2의 시민혁명이라고 본다. 근대 시민혁명은 국민들이 ‘나라의 주권자 자리’를 쟁취해 나가는 운동사이기도 하다. 4월 혁명과 6월 항쟁은 한국의 시민혁명사라 할 수 있다.

6월 항쟁은 1987년 ‘6·10 국민대회’, ‘6·18 최루탄 추방대회’, ‘6·26 평화대행진’에 이르기까지 “호헌 철폐”, “직선제 개헌”, “민주헌법 쟁취”, “전두환 정권 타도”를 외치며 국민들이 20일 동안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인 현대 한국사 최장 최대의 민중운동 파노라마였다. 어림잡아 전국적으로 연인원 500만명 이상이 참여했다.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가 뜨고 6월 항쟁이 뜨거웠던 그 격변의 시기에 나는 정작 ‘도망자 신세’였다. 87년 4월19일 ‘민통련’과 ‘서대협’ 학생들이 함께 벌인 ‘4월 혁명 27돌’ 시위로 수배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5월 중순 이런 일이 있었다. 이해찬과 함께 정현백 교수(성균관대) 집에 들렀다가 헤어져 사당역 지하도로를 혼자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성 처장” 하고 불렀다. 돌아보니 국가정보원 정보국의 ‘민통련’ 담당 정아무개씨였다. 그가 “차나 한잔 합시다”라고 말해 다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는 “위에서 당신을 잡으라고 난리다. 열흘 전에는 수사국 요원과 같이 당신 집 앞에서 일주일간 잠복했다. 나는 그때 당신이 내 손에 잡히지 않기를 하늘에 빌었다. 다행히 당신은 나타나지 않더라”며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나는 그때 ‘전두환 정권은 이제 끝났구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그 뒤 어떻게 됐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4월 시위로 수배자 신세였지만
‘체육관 전당대회’ 맞춰 6·10 기획
시민참여 위해 ‘저녁 데모’ 주장
대중노선 선회 ‘서대협’ 항쟁 예열

이한열 비통한 죽음에 전국 ‘눈물’
호헌 무효 선언에 6·10항쟁 점화
6·18 최루탄 추방의 날, 6·26 행진
500만 시민 전두환 독재 타도 함성

절차적 민주주의 확립하는 성과
경제·노동·사법민주화엔 소홀
평화 걸림돌 보안법 폐기도 방치
“양김의 너무 빠른 재야결별 문제”

■ ‘6월 항쟁’의 성공조건

국본에서 87년 6월10일을 ‘국민대회의 날’로 잡은 것은, 민정당이 이날 노태우를 ‘체육관 선거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전당대회를 열기 때문이었다. 김대중-김영삼 ‘양김씨’는 국민대회 시간을 오전 10시로 하자고 제안했다. 민정당 전당대회와 야당·재야의 군부독재 반대 시위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일어나야 국제적 매스컴을 탄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그 제안을 반대했다. “최근의 박종철군 추모 집회를 통해 점점 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아침부터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전투경찰이 곳곳에서 ‘수상한 청년’들을 검문하는 마당에, 아침 데모에 나서면 경찰이 먹을 욕을 민주화운동 세력이 뒤집어쓰게 될 거다. 거꾸로 저녁 데모를 하면, 퇴근하던 시민들이 구경꾼에서 응원군으로, 나중에는 시위대의 일원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애초 민통련은 학생운동권도 국본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성사시키지 못했다. 학생운동의 ‘극렬 반미 구호’가 정치권과 종교계의 발목을 잡았다. 한국 민주화운동은 늘 학생운동이 선도해왔다. 하지만 86년 들어 학생데모 하면 “전투경찰의 최루탄 대 학생들의 화염병과 투석전, 전투경찰·백골단의 곤봉 대 학생들의 각목이 맞붙는 거리 전투”가 국민들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래서 전두환 반대 시위에 참여하기로 작정한 시민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학생들의 전투적 데모가 이를 가로막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었다. 운동권 학생과 일반 학생들 사이도 틈이 많이 벌어져 있었다.

서중석 교수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86년은 서울대에서 휴학이 가장 많았던 해였다. 학교 앞 술집에서 노랫소리가 사라졌고 술만 먹으면 우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학교가 무서워 나오기 싫다는 학생도 생겨났다.”(<6월 항쟁>, 돌베개, 2010년)

이 위기의 학생운동사에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으로”라는 구호 아래 대중운동 노선으로 조용한 선회가 일어나고 있었다. 87년 5월 18개 대학 학생 대표들이 연세대에 모여 ‘서울지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서대협)를 결성했다. 의장에 이인영 고려대 총학생회장, 부의장에 이남주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선출하고 동부·서부·남부·북부 지역 평의회로 나눠, 동부권은 한양대의 김병식, 서부권은 연세대의 우상호, 남부권은 서울대의 이남주, 북부권은 고려대의 이인영이 각각 의장을 맡았다.

민통련과 서대협은 5월23일 ‘호헌 철폐’ 공동 시위를 벌였다. 이때 탑골공원에 모인 서대협 시위대 3000명은 돌, 화염병, 각목 등을 전혀 지니지 않았다. 시위대는 전투경찰이 연행하려 하자 서로서로 팔깍지를 끼고 ‘연좌 연와(連臥) 투쟁’을 벌였다. 지나던 시민들이 열렬히 지지와 격려, 박수를 보냈다. 이날 1284명을 연행했던 경찰은 학생들을 구속할 명분을 잃고 전원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성유보)는 1987년 6월 항쟁 당시 ‘4월 혁명 27돌 시위’ 주도 혐의로 수배 상태였다. 사진은 그해 5월23일 필자가 서울와이엠시에이(YMCA) 건물 앞에서 열려던 ‘호헌 철폐’ 시위가 무산되자 단독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 서대협 학생들 ‘6월 항쟁’을 예열하다

6·10 국민대회 직전 열흘간 학생운동은 6월 항쟁을 예열했다. 고려대에서는 ‘대자보 백일장’을 열어 “두환아, 종 쳤데이. 아무 소리 말고 미련 없이 잘 가거래이”라는 구호를 만들어 내었고, 5월29일에는 전국 29개 대학에서 “고문 추방”, “호헌 철폐” 시위가 있었고, 6월1일부터는 서대협 13개 대학 총학생회장과 학생회 간부 20여명이 서울대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으며, 6월9일에는 전국의 대학에서 ‘6·10 대회 출정식’을 열었다. 이 와중에 고 이한열 열사가 경찰의 최루탄에 뒤통수를 맞고 의식불명으로 쓰러지는 모습, 그를 끌어안고 있는 동료 학생의 애절한 모습이 <중앙일보>에 대문짝만하게 실려 온 국민들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이한열 열사의 한스러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서대협 학생들이 6·10 대회 출정식 행동원칙에서 “(화염병과 각목 대신에) 태극기를 들고 나오라”고 한 것은 참으로 놀랄 일이다.

“군사독재에 대한 항의 방법에 꼭 거리시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김도현·이명준·황인성 그리고 나는 6월 항쟁 전략을 기획하면서 “국민들이 전두환 독재에 대한 저항을 표시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궁리하였다.

국기 하강식 때 ‘애국가 제창과 1분간 묵념하기’, ‘전국 교회, 성당, 사찰의 42번 타종(1987년은 해방 후 42년 되는 해였다)과 기도회’, 자동차 경적, ‘밤 9시에 10분간 소등하기’(땡전 뉴스 안 보기 운동의 일환으로), 각계각층의 기자회견과 성명, 강론 등 국민 누구나가 어떤 방식으로든 항의행동에 동참하라는 것이 우리들의 주문이었다. 우리는 농민운동의 경험을 통해서, 시위가 여러 곳에서 동시에 일어났을 때 군사독재가 약점을 드러낸다는 시실을 알게 되었다. 6월 항쟁도 전국적 동시다발 봉기 여부가 승패를 좌우할 터였다.

1987년 5~6월 국본 주도로 줄기차게 전개된 시민들의 ‘호헌 철폐’ 투쟁은 제도적 민주화를 이뤄내는 성과를 거뒀다. 사진은 그해 6월29일 당시 집권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가 발표한 “직선 개헌” 등의 담화를 1면 머리기사로 올린 <경향신문>.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 명동성당 농성자 보호가 1차 분수령

6·10 국민대회는 이날 오후 6시 성공회 대성당에서 박형규 목사, 고 계훈제 선생, 오충일 목사, 서경원, 고 오대영, 고 제정구, 유시춘, 금영균 목사, 성공회의 김재열, 박종기 신부, 지선·진관 스님, 민추협의 양순직·김명윤·김병오·김현수·이규택·송석찬 등 70여명이 모여 “4·13 호헌조치는 무효임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한다”는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시작되었다.

전국 22개 도시에서 30만명이 참가한 6·10 대회는 서울의 2000여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도피했다가, 전투경찰과 밤새도록 최루탄-화염병 공방을 벌이면서 계속되었다. 이때 농성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보여준 천주교 사제단들의 용기와 지혜, 김수환 추기경의 “이들을 잡아가려면 나를 밟고 지나가라”는 순교자적 자세가 전두환의 기세를 꺾어 버렸고, 농성자들은 신부들의 보호 아래 6월14일 안전하게 귀환했다.

앞서 6월9일 교문 앞에서 시위중이던 연세대생 이한열군을 혼수상태에 빠뜨린 최루탄에 대한 분노가 6월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정하게 만들었다. 전투경찰은 이날 최루탄을 가장 많이 쏘았다. 최루탄이 동이 나 더는 쏘지 못할 지경이었다.

명동성당 농성투쟁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학생과 시민들은 이날 전국 16개 도시에서 60만명이 시위에 나섰는데, 이는 6·10 대회 때보다 갑절이나 많은 규모였다. 특히 고 노무현 대통령이 상임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던 부산에서는 30만 시민이 “최루탄 추방” “전두환 독재 타도”를 외쳤다.

■ 전두환의 항복과 6월 항쟁의 한계

6월19일 ‘6·26 평화대행진’을 결의하기 위해 ‘국본 고문·상임공동대표·상임집행위원 연석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민추협 쪽에서 평화대행진을 연기하자고 주장했다. 전두환의 비상조치 발동설이 있으니 여야 영수회담 이후에 집회 일정을 다시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의 정치개입을 국민들이 힘으로 막지 못하고는 민주화를 달성할 수 없다, 군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정치군부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 ‘80년 서울의 봄’에서 학습한 교훈이었다. 마침 전두환과 김영삼 회담이 결렬되는 바람에 6·26 평화대행진이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평화대행진 집회에는 전국적으로 150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서울과 광주에서는 각각 30만명이, 부산에서는 15만명이 밤새 시위를 벌임으로써 전국의 사회기능이 마비되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민심에 굴복했다. 6월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을 통해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6월 항쟁은 ‘직선제 대통령 선거 제도 도입’, ‘대통령 5년 단임제’, ‘지방자치제 도입’ 등으로 대한민국 수립 이래 30년 넘게 지속되어온 정치의 국민 대표성 부재를 해소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해 나가는 성과를 거두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하지만 6월 항쟁의 성과는 그야말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에 그쳤다. 경제 민주화, 노동의 민주화, 언론의 민주화, 사법의 민주화, 교육의 민주화, 문화예술의 민주화 등 사회 각 분야에서의 민주화는 너무나 소홀히 취급되었다. 남북의 평화 공존과 교류 협력에 필수적인 ‘국가보안법’ 폐기도 방치되었다.

이러한 결말은 ‘양김씨’가 재야 세력과 너무 빨리 결별했기 때문에 빚어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권 경쟁이 급했던 두 정치인은 민주, 민중, 통일운동의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운동권 인사들을 세 확보를 위한 ‘포섭 대상’으로 삼았다. ‘재야’는 분열되었다.

그날 이후 ‘87년 체제’에서 27년째 살고 있는 우리는, 독재체제로 퇴행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시민운동을 일으켜 다시 민주화 개혁에 나서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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