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2006년 1/2월 호 42페이지에 “확장된 마음”이라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이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뇌 속에 있으며 정신활동은 뇌활동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도록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쉘드레이크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즉, 쉘드레이크는 마음은 뇌 속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확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은 뇌의 안에도, 밖에도 존재하는 마음의 장을 통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두개골 속에 갇힌 존재가 아니며, 우리의 마음은 서로에게서 분리되거나 고립된 것도 아니고,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신체나 환경, 다른 사람들에게 낮선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상호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쉘드레이크의 “확장된 마음”은 칼 융의 동시성(synchronicity)의 원리 그리고 데이비드 봄(D. Bohm)의 양자이론에서 말하는 비국소성(non-locality) 원리 등이 모두 같은 개념의 내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쉘드레이크의 “확장된 마음”을 다음과 같이 자의적으로 비유해서 해석해보았습니다.
물이 담긴 어항이 있는데 이 어항을 우주라고 비유하겠습니다. 어항 속의 물은 우주의 허공을 꽉 채우고 있는 매질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이 어항 속의 물을 칼 융은“집합무의식”이라고 불렀고, 비국소성 원리를 주장한 봄(Bohm)은 초양자장(superquantum field)이라고 불렀으며 또 어떤 사람은 한마음(One Mind)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어항 속의 물은 누가 만들어서 거기에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그냥 태초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이며 그래서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어항 속의 물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요동(holymovement)을 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이 물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이 존재들은 다시 가지치기를 하면서 존재의 분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우리의 우주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니까 은하계도, 태양과 달도, 너와 나도, 나무와 짐승, 공기와 물, 산소와 탄소, 원자와 전자, 양성자와 중성자, 앞 쿼크와 참 쿼크 등 모든 것들이 이 어항 속의 물에서 생겨나서 모두 어항 속의 물 속에 잠겨 있습니다. 물속에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도 따지고 보면 근본 질료는 물입니다. “너”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동일한 부모인 우주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너”도 “나”도 동일한 물로부터 출발은 했지만 우주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세월 동안 진화를 거듭한 결과로 이제 와서는 “너”와 “나”의 겉 모습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너”와 “나”의 근본은 물이기 때문에 가끔은 이 물을 매체로 해서 “너”와 “나” 사이에, 혹은 “나”와 바람 사이에, “나”와 바위 사이에, “나”와 나무 사이에, 혹은 “나”와 물고기 사이에 정보가 저절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어항 속의 물로 따지면 여기와 저기의 구별이 있을 수 없어 공간적으로 하나이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별이 있을 수 없어 시간적으로도 하나입니다. 그냥 모두 ‘하나’일 뿐입니다. 그리고 물이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듯이 “확장된 마음”은 관념적인 것도 아니며, 형이상학적인 논란거리도 아니며 귀신의 장난도 아닙니다. 그것은 엄연한 진실이고 현실이며 우주의 실재(reality)입니다.
그러니까 쉘드레이크가 말하는 “확장된 마음”이란 우주의 허공은 “마음으로 충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단지 “마음으로 확장되어 있다”라고 표현을 달리 했을 뿐입니다. 이 “확장된 마음”은 실존적이기 때문에 텔레파시나 “누군가 쳐다보는 느낌” 같은 현상은 비정상적인 유령 현상이나 기괴한 심리 현상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인 것입니다.
최종덕은 “부분의 합은 전체인가”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식으로 비유하였습니다. “버틀만이라는 사람은 항상 색깔이 다른 양말만을 신고 다닌다. 이 사실을 아는 한 사람이 있는데, 버틀만의 오늘의 한쪽 양말이 빨간색이라면 다른 쪽 양말은 보지 않고도 최소한 빨간색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반면에 그의 어린 아들은 그에게 어떻게 아버지는 다른 쪽 양말을 보지도 않고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느냐고 감탄스럽게 묻는다.” 이 비유는 정보가 전달된다는 개념이 아리나 개체로서의 두 쪽의 양말은 버틀만이라는 사람의 전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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