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18. '일본 제국'의 시작, 청일전쟁+갑오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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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5. 3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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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갑오년은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된 해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조선 합병 야욕이 본격화된 해이기도 하다.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청, 일 양국군이 출동해 조선 패권을 둘러싸고 남의 나라에서 싸움을 벌이고 남의 나라 민중인 동학농민군과 전쟁을 벌였으며, 경복궁을 침탈해 흥선대원군을 허수아비로 세우고 갑오경장 개혁을 시작했다


동학군은 610,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자진 해산했다. 문제는 그전, 조정에서 청나라에게 원군 요청을 했고 청나라가 약 2,800명의 군대를 파견하면서 일본이 텐진조약에 따라 자국도 약 8,000명에 달하는 군대를 출병한 것이다. 동학운동이 해산한 뒤인지라 조선은 철병을 요구했지만, 이왕 나온 군대로 조선을 집어삼킬 생각까지 하고 있는 일본은 전혀 해산할 뜻이 없었다


오히려, 청나라에 조선의 내정개혁에 함께 힘을 합치자는 제안을 했다가 2번에 걸쳐 절교서까지 발행하면서 청일전쟁의 빌미를 만든다. 한편으로는 눈에 가시 같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제거할 발판을 놓기 위해, 김홍집과 박영효를 내세워 조선 내정개혁을 추진하도록 한다. 갑오년을 물들인 양대 사건,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의 발단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시작, 청일전쟁

갑오경장의 추진 세력 중 하나인 박영효. 이미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그는 조선으로 복귀해 갑오경장을 이끈 뒤 역모사건으로 일본 망명, 이후 다시 귀국해 일제강점기에 후작을 지내는 등 친일파의 거두로 자리잡는다.

내용에 들어가기 앞서, 일본이 왜 조선을 탐냈던 것인지부터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얼핏 들으면 답이 뻔히 정해져 있는 질문 같지만, 양국 관계가 나쁘다고 항상 상대편을 집어삼키려고 전면전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니 당시 배경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94년이 있던 19세기말은 서양 열강의 전세계 식민지 개척 전쟁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을 때였다.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서구 열강들은 만들어낸 제품을 갖다 팔 시장과 제품을 만들 값싼 노동력과 원료 모두가 필요했다. 그래서 아프리카를 비롯해 아시아까지 진출해 전세계 식민지, 즉 식민지를 기반으로 한 제국주의의 기틀을 닦기 시작한다

제국주의 국가들 중에는 비교적 늦은 1853년, 뒤늦게 강제개항된 일본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1876, 강화도조약으로 조선 침탈의 신호를 올리기 불과 20년전 일본 또한 똑 같은 상황에서 강제개항됐으며, 20년 동안 일본은 자본주의의 씨앗은 물론 서구 문물을 제대로 배우는 데에 주력했다. 정치적으로는 천황제의 복구와 함께 내정 안정을 이루려 했고, 기술적으로는 서구 문물과 함께 아시아 지역으로 눈을 돌려 그들 또한 시장 팽창을 노리고 있었다

바로 옆에 위치한 조선은 그들에게 가장 좋은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오랜 기간 역사의 라이벌이기도 했지만, 남북 지역을 모두 합해 자원도 풍부하고, 근면한 노동력도 충분히 있으며, 무엇보다 섬나라 입장에서 보면 대륙과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좁은 섬을 벗어나 대륙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통로로 조선을 지배하고 나아가 청, 아예 그를 넘어 세계 전체까지 연결되는 좋은 통로가 조선이었던 셈이다

일본이 조선을 노린 것만큼이나 중국과 러시아 또한 조선의 패권을 두고 다툴 만했다. 러시아는 얼지 않는 항, 부동항이 절실했고, 중국은 조선의 전통적인 종주국으로 조선을 잃으면 역으로 중국 또한 일본의 시야권에 들어가게 된다. 이외, 이미 중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서구 국가들 또한 중국의 확장으로 조선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 일본이 조선 패권을 두고 중국과 전쟁을 일으키긴 했지만, 사실 그 전에 어느 나라가 조선을 집어삼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제국 열강들의 패권 다툼장이 중국과 그 밑 조선이었던 것이다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은 바로 그 맥락에서 일본이 가장 빨리 조선의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 벌인 제국주의의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조선부터 확보하고 나아가 중국까지 지배하며, 그 자원과 노동력을 기반으로 세계 제패까지 꿈꿀 수 있게 된 것이다. 겉으로 보면, 조선 왕실 하나만 유린된 것 같지만, 세계 입장에서 보면 일본이 국제 무대에서 제국중 하나로 데뷔하는 한 장면이 바로 청일전쟁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의 안과 밖을 모두 삼켜라, 청일전쟁과 갑오경장

청일전쟁 당시 평양전투를 그린 일본의 한 그림. 욱일기가 보이는 등 일본 제국주의의 맹아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일본의 야욕에 본의 아닌 좋은 빌미가 된 것이 동학농민운동이다. 자국 군대로는 도저히 동학운동을 진압할 여력이 없는 왕실에서 청나라에 구원 요청을 보내고, 청이 군대를 보내면서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에 그 사실을 알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은 청나라 군대의 3배 이상인 약 7,000 ~ 8,000명의 군대를 보내 조선 장악을 시도한다. 동학농민군이 해산하고 위험이 없어졌으니 돌아가라는 조선의 철병 요청에도 이들은 꿈쩍하지 않고 오히려 청나라에 절교서를 던지더니, 18947 25일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청일전쟁의 막은 올랐다. 이어, 충청도 성환전투에서 청군을 격파한 뒤, 81일 청나라에 본격적인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이때, 중요한 사건 하나가 있다. 725일 청나라를 공격하기 이틀 전인 723, 조선 왕실의 핵심인 경복궁을 먼저 공격했다는 점이다. 철군을 요청하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눈에 가시였던 이들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에 내세우며 김홍집과 박영효를 중심으로 친일내각을 세우기에 이른다. 이들이 727일부터 시작해 1896211일까지 총 3차에 걸쳐 진행한 것이 갑오경장이다


청일전쟁은 그래도아시아의 맹주라는 중국이 어이없게도 함대와 육군 모두 대파되면서 손쉽게 일본의 승리로 기운다. 915, 평양의 청나라 육군 14,000명이 대파된 것을 비롯해, 917일에는 황해에서 청국함대가 격침되고 급기야 10~11월에는 2개 군으로 나누어 청나라 본토와 랴오둥반도 공격에 나선다. 이듬해 2, 청나라가 화해하자고 구원 요청을 보내지만, 회담에서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싶은 이들은 마지막까지 밀어붙여 랴오둥반도, 즉 요동반도를 완전 점령한 4월이 되어서야 협의를 완료하고 랴오둥반도의 영유권과 배상금 2억냥의 지급을 골자로 한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다


그 기간, 조선에서는 무려 김홍집과 박영효가 서로 세력다툼을 벌여가며 정부와 사회 차원에서의 개혁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목할 것은 일본의 경복궁 침탈로 시작된 개혁이긴 하지만, 일본이 청일전쟁과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어 내부적으로는 김홍집과 박영효가 이끌고 간, 즉 조선 자체적인 개혁적 측면도 있다는 점이다


1차 개혁은 흥선대원군을 앞세우고, 정부 조직을 의정부와 8아문, 왕실 업무를 다루는 궁내부로 분리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후 과거제를 없애고, 반상제도, 공사노비법 등을 철폐하는 등 조선의 근간인 신분제도와 왕실 모두에 크게 손을 댄다. 위정척사의 거두인 흥선대원군은 역설적으로 일본의 도움으로 친일내각의 수장으로 다시 입궐하지만, 그 또한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 하다 18941217일부터 시작된 2차 개혁때부터는 다시 실각하고 만다


2차 개혁의 중심은 1027일 부임한 이노우에 공사다. 일본의 높은 관료였던 그는 조선에 오자마자 동학농민군에 대한 진압을 서둘러 10월 중순부터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사이의 조일전쟁의 서막이 오른다. 동학농민군은 10월말 기준 11만 명까지 세를 불리지만, 11월 목천 전투에 이어 12월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1230, 전봉준 장군까지 체포되면서 미완의 혁명으로 날개를 접히고야 만다.
이 즈음이면 일본의 청일전쟁 승기도 거의 잡혔을 때다. 이때, 조선은 2차 갑오개혁이 한창이었는데, 욕심을 부린 박영효의 질주로 동반자였던 김홍집은 18955, 삼국간섭 이후 자리에서 물러나고 만다. 박영효 또한 일본과 고종, 명성황후 모두의 탐탁치 않은 시선을 받으며 반역사건에 휘말려 일본으로 재차 망명하고 만다


3차 개혁은 이노우에 이후 미우라 공사가 부임한 이후 1895년부터 시작된다. 이때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다시 반환하라는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의 압력에 의해 랴오둥반도를 다시 반환하고 배상금에만 만족해야 했지만, 이 배상금이 바로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군대를 양성하고 자국 경제를 부활시키는 데에 요긴한 역할을 한다.  


삼국간섭은 의도하지 않았던 비극을 낳았다. ‘종주국청나라까지 대파하는 것을 본 조선 왕실이 겁에 질렸을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그런 일본 또한 러시아의 압력에 굴복하는 것을 본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제 청나라가 아닌, 러시아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침 부동항을 얻고 싶은 러시아와도 의견이 잘 맞아 조선에 자문단을 파견하기로 하는 등 양국의 협의는 활발히 진행되어 간다.



갑오경장은 정치제제와 사회제도 모두를 급격하게 뒤흔들어 놓았는데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단발령이 아닐까 한다. 민심과 동떨어진 급격한 개혁으로 김홍집 등 개혁 내각은 이후 피살되기에 이른다.

갑오경장 3차개혁은 바로 그 연장선에 있다. 청나라까지 제거한 일본은 단연 조선의 패권을 쥐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실은 그들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친일파 중 박영효는 그 세력을 잃고 망명했다. 이제 김홍집 하나 남았다. ‘인아거일’(引俄拒日,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제거하자는 적으로 적을 제압하자는 조선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까지 외치는 조선왕실은 그들에게 눈의 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1895713일 부임한 미우라 공사는 불과 1달 후 양국은 물론, 조선에 주재했던 외교가를 경악하게 한 만행을 계획한다. 명성황후,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한 친러파 명성황후를 제거하는 을미사변이 그것이다. 황후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일본 낭인이라고 하지만 꽤 고급 엘리트 정치깡패, 조선의 신문기자까지 망라된 일대 정변이 그것이었다.
갑오경장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난 뒤에도 계속 될 수는 없었다. 황후까지 살해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란을 간 것이다. ‘아관파천이 그것으로, 고종이 궁을 떠나자 김홍집 등 개혁파 또한 추진 세력을 잃고 말았다. 이미 단발령으로 격렬한 국민 저항을 불러 일으킨 그는 고종과 왕세자가 아관파천을 단행한 1896211, 퇴궐하면서 분노한 군중에 의해 살해되었고 갑오경장도 막을 내렸다.

조선의 러시아 잡기, 그리고 '여우사냥'
청일전쟁 당시 제물포항에 상륙하는 일본군 모습. 근대식 군대이긴 했지만, 청나라에는 열세라는 분석을 뒤엎고 승리한다.

갑오경장은 갑신정변 때 급격한 변혁을 꾀했던 조선의 내부 개혁파가 다시 한번 일본을 등에 업고 개혁을 단행하려 했다는 점에서 나름 의의가 있다. 신분제 철폐와 단발령 등으로 민심과 동떨어진 정책으로 격렬한 저항을 낳기는 했지만, 임오군란 이후 사치와 궁궐 내 무당을 불러 들이는 등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던 명성황후 또한 그다지 나을 것은 없었다.
세계 열강의 식민지 정책 앞에 조선은 이미 태풍 앞의 촛불과도 같은 상태였다. 같은 시기, 강제개항 당한 것도 같지만 적극적으로 외부 세력과 협의하고 내정을 탄탄히 할 역량은 조선 지배층 어디에도 없었고, 개혁파는 민심에 맞춰 개혁을 추진할 만한 역량이 없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아시아 패권을 거머쥔 일본은 그 결과, 청나라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안 서구 열강의 아시아 침탈도 함께 불렀다. 삼국간섭으로 상징화된 러시아의 남하는 이들에게 더욱 위협이었고, 그 와중 러시아와 줄을 이으려 하는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들에게 눈에 가시였다.
3차 갑오개혁이 신호탄을 올리던 18958, 그보다 조금 앞선 723일 미우라공사는 조선을 뒤흔들 암수를 갖고 조선에 입국한다. 일국의 황후를 제거하는 여우사냥’, 을미사변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에 이를 살펴본다.

19편. 을미사변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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