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19. 명성황후의 시해, <을미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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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6.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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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 8일, 조선의 친러 정책을 경계한 일본은 미우라 공사와 오카모토 고문, <한성신보> 기자, 극우 집단, 일본 낭인, 조선군 훈련대, 일본 순사, 일본군 등을 조직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사건을 은폐 시도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시해 주모 자객들이 찍은 기념사진.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경. 일본 미우라 공사와 오카모토 궁내부 고문, 일본 극우 집단 현양사와 천우협, 일본 낭인, 일본군, 일본 순사, 일본인 기자들로 구성된 <한성신보> 사장과 기자단, 우범선 등이 이끄는 조선군 훈련대 등이 왕의 침전인 경복궁을 일시에 습격하였다. 조선군 훈련대가 경복궁 주변을 강제 방비하는 사이, 일본인들은 왕의 침천까지 들어가 고종과 태자까지 강제 구인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그 사이, 핵심 세력은 황후의 침천인 건청궁 곤녕합까지 들어가 명성황후를 잡아 끌어내려 했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그 앞을 막아서다가 두 팔이 잘려 나가고 허리가 베여 숨졌다. 궁녀들도 황후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으나 그들 또한 힘없이 스러지긴 마찬가지였다. 


  강제로 끌어낸 황후를 능욕하고 시해한 일본인들은 황후의 시체를 불태우면서까지 시체에까지 능욕을 주는 등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은 새벽 가마를 타고 일본군과 함께 궁궐에 도착해 있었으며, 황후가 시해된 아침 고종의 사후 회의에까지 참석한다. 


  청일전쟁으로 청나라를 조선에서 몰아낸 일제가 조선 왕실이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제압하려 하자 일으킨 황후 살해의 만행, 을미사변이다. 이 일로 전국 의병들이 궐기하기 시작했으며, 이듬 해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시행한 단발령으로 갑오경장을 이끈 친일파정권은 막을 내리고, 고종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일국의 왕이 자신의 수도 서울에서 일개 외국의 대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까지 단행하기에 이른다.
  구한말, 탐욕에 눈먼 일제가 조선 정부에 대해 일으킨 사상 초유의 테러, 을미사변으로 들어가 본다.  

친일파와 흥선대원군의 명성황후 살해 기도
 

 

경로 1) 10월 8일 새벽 5시, 일본은 광화문을 거쳐 근정전으로 진입했다. 조선군 시위대가 응전했으나 홍계훈 등이 사망했을 뿐 큰 효과는 없었다.

 

    일본 주도의 황후 살해 사건이 발생했지만, 명성황후 살해 사건은 일본만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니다. 갑오경장으로 다시 세력을 잡은 박영효와 언제든지 정권 핵심으로 복권을 누리는 흥선대원군 또한 다양한 방법으로 황후 살해를 모색했다.
  같은 개화파로 김홍집과 함께 공동정권을 꾸렸던 박영효는 김홍집까지 내치고 아예 황후까지 살해해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생각을 가진다. 그는 유길준에게 이 생각을 털어놓았으나 유길준이 이를 고종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일본으로 망명한다.
  흥선대원군은 언제든지 며느리 명성황후를 제거하고 권력 중심에 앉을 생각이 있었다. 갑오경장 초기에도 명성황후를 견제한 일본의 계략으로 잠깐 정권 핵심으로 복귀했으나, 실권 없는 허수아비 존재였던 그는 이내 개화파에 의해 내치고 다시 실각한다. 그에게 오카모토 등 일본 공사관 인물들이 끊임없이 회유하고 계획에 참여할 것을 회유한 것은 여러모로 사실인 듯하다. 


  내부에선 박영효와 흥선대원군의 정권 야욕이 있었다면, 밖으로는 러시아의 남진과 이를 견제한 일본이 친러파로 돌아서는 황후를 제거했다는 설명이 설득력 있다. 명성황후는 초기에는 개화파에 그다지 반대하지 않았으나, 일본을 끌어들인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에서 의붓 오빠로 유일한 가족이다시피했던 민승호의 양자 민영익까지 크게 다치자 크게 마음이 선회했다. 


  이후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 등을 겪으면서 그녀는 청나라에 지원 요청을 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견제를 지속했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갑오경장 초기 전면에 내세우고 을미사변 또한 그를 강제 입궐시킴으로써 책임을 그에게 덮어 씌우고 자신들의 만행을 조선의 자발적인 정치 싸움이나 정변 수준으로 포장하려 했다.
  그런 그녀가 청일전쟁에서 믿었던 청이 패배하고 그런 청을 이긴 일본이 또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3강의 말에는 꼼짝없이 요동반도를 반환하는 것을 보고 친러시아로 방향을 바꿨다는 것이 정설이다. ‘인아거일’,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제압한다는 것인데, 이후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비롯한 러시아 정부와의 급격한 협력 기조가 조선 왕실을 이끌게 된다. 


  힘들여 전쟁까지 해서 얻은 대륙진출의 교두보, 조선을 일본이 포기할 수는 없다. 따라서, 흥선대원군과 조선군 훈련대를 사건의 책임으로 묻기 위해 자의든 타의든 흥선대원군을 사건 당일 입궐시키고 훈련대를 경복궁 사방에 둘러 사건을 마치 이들이 일으킨 것처럼 은폐하려 했던 것이다.


  일본의 황후 시해와 이의 은폐 조작은 오래 가지 않아 탄로났다. 왕실 수비를 돕던 미국인 교관 다이를 비롯해 많은 외국인 외교관, 협력 사절들이 사건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그러자 일본은 미우라 공사 등 사건 핵심 주동세력을 재판한다는 핑계로 자국 소환한 다음, 이듬해 곧 천황의 격려 속에 방면해 주고 말았다. 어차피, 황후 시해를 계획하고 조선에 파견된 육군 중장 미우라나 그의 시해를 도운 세력들이나 자신들이 세운 바둑판에서 임무 충실하게 한 충신이니 그들을 가둬 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출세 가도를 달린다.   

 

 

경로 2) 침입한 자객들은 경복궁 내 연못인 경회루를 지나친다. 사건 은폐를 위해 새벽에 전격적으로 진행하려 했으나 조선군 훈련대의 합류와 시위대와의 교전 등으로 시간이 지체됐다.

 

민심을 잃었던 명성황후의 죽음, 조선은 한일 강제병탄으로 급물살

 

경로 3) 마침내 일본은 황후의 침소인 건청궁 곤녕합까지 이르러 황후를 끌어내고 살해한 뒤 시신까지 능욕하고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른다. 대궐 서쪽 경로를 통해 진입한 이들은 동쪽 경로를 통해 달아난다.

 

    명성황후는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 등 민란 때에도 타도할 대상 중 하나로 지목되었다. 그녀 자신의 사치와 궁궐에 무당을 끌어들이고 국고를 낭비하는 등 실정도 요인이지만, 그녀를 위시한 여주 민씨 일가의 발호가 지나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들 사이에선 단호한 위정척사를 초기에 내세웠던 흥선대원군에 대한 향수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며, 이런 점 때문에 일본이 흥선대원군을 전면에 내세워 갑오경장과 을미사변 등을 무마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왕실은 이미 저물었다. 급진개화파를 위시한 신하들의 발호를 막을 만한 힘도, 일본 군대의 조선 진주와 이들의 왕실 유린에도 항의하거나 거사를 도모할 만한 기개는 남아 있지 않았다. 백성들은 결기 있게 민란과 항쟁 운동 등을 일으켰으나, 2년 후인 1897년 10월 12일 황제를 칭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제국’에 걸맞을 만한 위엄과 통치 행위는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이듬해인 1896년, 황후의 죽음 이후 단발령이 단행되면서 전국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고종은 일본을 피해 러시아대사관으로 몸을 피했으며, 분노한 민중은 김홍집 등을 살해하고 갑오경장을 좌절시켰다. 결국, 모든 마무리는 민중이 스스로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1898년, 며느리 명성황후와 오랜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던 흥선대원군이 사망했다. 고종은 그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았으며, 1910년 경술국치인 한일합병으로 조선을 강제 병탄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로 4) 황후 시해장소인 곤녕합 앞에 놓여 있는 신발들. 장미로 표시되어 있는 곳 앞에 신발들만 덩그라니 않아 있다.

  
덧붙임
명성황후의 호칭에 대해 ‘민비’나 ‘왕비’ 등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서는 사후 2년 후인 1897년, ‘명성’(明成) 시호가 공식적으로 추증되고 11월 홍릉 안장되었으며, 고종 황제 즉위 이후 ‘명성황후’로 공식적으로 불린 것을 감안해 모두 ‘황후’ 또는 ‘명성황후’로 통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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