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이용우, 2008) | 책을보다

이민표 2010. 8. 26. 12:24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이용우, 역사비평사, 2008.



해방후에 일제잔재를 확실하게 청산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프랑스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2차대전 때 나치에게 4년밖에는 점령되지 않았지만 독일이 항복하면서 아니 이미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연합군이 점차 프랑스 국토를 수복하면서부터 나치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철저하게 숙청해버린 나라이기에 프랑스는 더욱더 아름다운 나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현실과 대비되는 막연한 사실 혹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듣고 판단하는 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 실상을 정확히 알게 해주는 책을 보았다. 이 책은 프랑스인이 지은 것도 아니다. 한국인이 썼다.


프랑스에서는 오히려 이 분야의 책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프랑스인이 프랑스인을 숙청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숙청작업이 강하게 일어나고 난 직후 피숙청자들의 목소리가 강하게 나온 것도 작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유태인들을 잡아들이고 수용소에 보내고 결국 죽게 만드는데 일조한 범죄(반인륜죄)에 대한 숙청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란다. 초기에 이쪽 부분에 대한 정리가 미흡했고 유태인들이 당시에는 큰 소리를 내지 않다가 최근에 들어서 목소리를 크게 내는 이유도 작용한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최근에는 유태인학살에 대한 죄목으로 수십년이 흘러서 체포되어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에 처해지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부스케, 바르비, 투비에 등이 그들이다.


21세기 현재, 수십년전에 벌어진 일들을 갖고 노무현 정부 들어서까지 과거청산이라는 문제가 정권의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하는 현실은 그만큼 과거청산이 미진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현재도 과거청산을 반대하는 논리, 즉 국론을 분열시킨다든가, 경제문제가 더 중요하다든가, 지나간 과거에 더 이상 얽매이지 말자든가, 정치적으로 이용될 우려가 있다든가 하는 식의 주장이 나오지만 이것은 프랑스의 경우와는 다른 상황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프랑스는 거의 철저하게 숙청을 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던 것에 비해 우리는 ‘반민특위’가 정권에 의해 강제로 해산될 정도로 치욕적인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역사앞에서 정의가 바로세워지기 힘들며, 후세에 두고두고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30)

중장기적으로는 어차피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고, 그리하여 독일이 지배하는 ‘새로운 질서’의 유럽이 탄생할 것이므로 그러한 유럽 체제에서 프랑스가 적어도 독일 다음가는 지위를 차지하자는 것이었다. 그러한 지위를 차지하려면 현재의 전쟁에서 독일을 적극적으로 밀어줘야 한다는 것이 비시정부 인사들의 생각이었다.


(39)전세가 갈수록 독일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비시 정부와 프랑스 국민에 대한 독일측의 요구 수준은 점점 더 높아졌고, 그에 다라(보상없는) ‘협력’과 희생은 커져만 갔다. 협력의 수준은 프랑스인들이 독일 군복을 입고 동부전선에서 독일 정규군의 일원으로 혹은 ‘무장 친위대’로서 소련군과 맞서 싸우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49)

이렇듯 프랑스의 국내외 레지스탕스가 드골을 중심으로 단결했다 하더라도, 만약에 프랑스를 나치를 독일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는 데 레지스탕스가 별 기여를 하지 못했더라면, 혹은 기여할 기회를 아예 놓쳐버렸다면 프랑스의 와거사 청산은 우리가 앞으로 보게될 양상과는 사뭇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해방은 오느 날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감자기 이루어진 게 아니라 여러 달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통해 이루어졌고, 이 전투의 주력부대는 미국과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프랑스 국내외의 레지스탕스 부대가 수행한 역할도 상당한 것이었다. - - - 가장 중요한 날짜는 역시 수도 파리가 해방된 8월 25일(1944)일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이때 파리에 해방군으로 가장 먼저 들어온 부대는 연합군이 아니라 프랑스의 드골파 장군인 필립 르클레르가 이끈 제2기갑사단이었다.


(53)

대독협력자들에 대한 처벌과 숙청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장소는 재판소나 징계위원회가 아니었다. 대독협력자에 대한 첫 번째 형태의 ‘응징’은 숲속이나 거리에서 벌어졌다. 부역자 숙청의 가장 핵심적인 형태가 재판을 통한 ‘사법적’ 숙청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러한 숙청 앞에 앞서 먼저 ‘초법적’ 숙청이 전국 규모로 벌어졌다. 정식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처형하는 행위인 ‘약식처형’과 여성 부역자들의 머리를 깎는 ‘삭발식’이 바로 이러한 초법적 숙청의 대표적인 형태라 하겠다.


(65)

프랑스에서 여성 투표권은 1944년 10월에야 처음 도입되었는데, 부역 여성 삭발식이란 현상은 바로 당시까지도 팽배했던 철저한 남성 우위 문화가 과거사 청산에서도 그대로 관철된 단적인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91)

그리하여 1946년에는 2만 9,179명에 달했던 수감자수가 1947년의 사면법 공포이후에는 1만 8,384명으로, 1950년에는 6,715명으로 계속 줄었고, 1951년 사면법 공포뒤에는 약 1,500명, 1953년 사면법 공포뒤에는 975명, 그리고 1956년에는 62명, 1960년에는 9명만 남게되었다. 결국 해방 20주년에 해당하는 1964년에 이르면 독일강점기의 부역죄로 감옥에 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게 되었다.


(143)

이들 가운데 12만명 이상이 재판을 받았고, 그중 약 9만 8,000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약 3만 8,000명이 수감되었다. 약 1,500명이 정규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에 처형되었고, 8,000-9,000명이 정식재판 없이 처형되었으며, 약 2만명의 여성 부역자가 삭발당했다. 또한 21,000명 이상의 공무원이 독일강점기의 행위를 이유로 각종 징계를 받았고, 5,700명 이상의 공사직원과 1만 5,000명 이상의 군인도 공무원과 같은 종류의 ‘행정 숙청’을 겪었다. 그밖에 프랑스 거의 모든 부문에서 정확한 비율은 알 수 없지만 직업활동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징계가 이루어졌다.


(163)

그러나 레지스탕스 출신의(강점기 초기에 잠시 비시파로서의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대통령 미테랑은 ‘프랑스 국가’는 공화국이 아니라 비시 체제이며, 공화국 정부는 이 ‘프랑스 국가’에 대립되는 것이므로 공화국 대통령이 그러한 선언을 할 필요가 없다며 그 요구를 거부했다. 이 거부의 대가로 미테랑 대통령은 그래 7월 16일 벨디브 사건 50주년 추모집회에서 군중들로부터 야유를 받아야 했다. - - -

- - - 이어서 벨디브 53주년에 해당하는 1995년 7월 16일에는 프랑스의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벨디브 사건에 대한 “프랑스인들과 ‘프랑스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연설을 했다. 레지스탕스 출신의 사회당 대통령이 거부한 것을 레지스탕스와 무관한 우파 대통령이 행한 것이다.


(175)

투비에 재판의 가장 큰 의의는 무엇보다도 판결 자체에서 할 것이다. ‘반인륜범죄’라는 죄목이 이제 나치 독일인(바르비)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인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해방 직후에 처벌받지 않았다면 반세기가 지난 뒤에라도 법정최고형(사형은 이미 폐지되었으므로)을 선고받을 수 있다는 것을 프랑스 사법당국은 입증한 것이다. 79세의 이 전 민병대 간부는 정확히 50년정의 자신의 행위에 대해 처벌을 받았고, 2년 뒤(바르비와 마찬가지로)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184-185)

지구 반대편에서 가명을 쓰고 활동하거나 국내에 꽁꽁 숨어있던 자들을 끝까지 추적하고, 그들의 존재를 밝히고, 현직 장관의 끔직한 행적을 폭로한 것은 누구보다도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유대인 희생자의 가족들과 몇몇 양심적인 언론인들이었다. 또한 수십년간 잊힌 자들을 반인륜범죄 혐의로 처음 고소한 것도 모두 이들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희생자 가족들이었다.


(206)

해방과 종전이 이루어졌음에도 경제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특히 식량난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그리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논쟁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부역자 숙청 문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단기간의 철저한 숙청은 숙청을 열망했던 이들 대부분이 애초에 바랐던 것이므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다른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이기도하다. - - - 숙청은 사람들에게 그다지 만족감을 주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절박한 사안들에 묻혀 잊혀갔다.


(244)

따라서 1970-1980년대의 역사가들이 ‘10만 명 이상이나 학살한 숙청’이라는 신화-해방 직후부터 이미 존재했던-와 심지어 ‘숙청이 전혀 없었다’는 신화에 맞서야 했다.


- 프롤로그 : 청산해야 할 과거 / ‘암울했던 시절’ (1940~1944)

1 협력의 프랑스 / 패전, 비시, 대독협력

2 저항의 프랑스 / 레지스탕스


1부 해방 전후의 과거사 청산

1 숲 속과 거리에서의 응징

2 재판을 통한 처벌

3 공직자 숙청

4 숙청에 들어간 사회

5 평가


2부 반세기 만의 과거사 청산

1 반민족행위에서 ‘반인륜범죄’로

2 반인륜범죄의 발견 : 벨디브 사건

3 레지스탕스 기억과 유대인 기억의 충돌 : 바르비 재판

4 사법적 논리와 역사적 진실의 충돌 : 투비에 재판

5 최후의 독일강점기 재판 : 파퐁 재판

6 평가


3부 과거사 청산에 대한 여론과 기억(1944~2004)

1 해방 직후의 여론

2 분열된 기억

3 기억의 매체

4 맺음말


- 부록

- 주 / 참고문헌 /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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