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초기 사진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단체사진. 단장 김원봉(오른쪽 끝)과 부단장 곽재기를 비롯해 강세우·김기득·이성우 등 창립 초기 단원들이 모여 찍었다. /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의열단 초기 사진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단체사진. 단장 김원봉(오른쪽 끝)과 부단장 곽재기를 비롯해 강세우·김기득·이성우 등 창립 초기 단원들이 모여 찍었다. /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19년 11월 10일. 중국 지린성의 한 농가에서 13인의 청년이 모여 전날부터 밤을 새운 끝에 항일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함께 약조한 10개 조항의 공약 중 1조인 ‘천하에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한다’는 내용을 따서 단체 이름은 ‘의열단’으로 했다. 단체의 맏형이자 대표 격인 ‘의백(義伯)’은 당시 21세이던 약산 김원봉이 맡았다. 그해 3월부터 조선 전역을 뒤덮은 3·1운동이 결과적으로 뜻한 만큼의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는 판단과 역시 같은 해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와는 달리 무장투쟁 노선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첫발을 내디딘 의열단의 시작이었다.

의열단원 최대 2000명 추산하기도 

100년이 지난 올해 11월 10일.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는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주최한 의열단 창립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김원봉, 윤세주, 신채호, 유자명, 김성숙, 김산, 이육사, 김지섭, 김상옥, 김익상, 나석주, 최수봉, 박재혁, 박열….” 김원웅 광복회장이 의열단원으로 활동한 의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의열단 활동에 참여한 단원이 모두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경무국 첩보를 보면 의열단원 숫자를 200명 안팎으로 파악한 기록이 남아 있다. 

미국 작가 님 웨일스가 의열단원 김산을 인터뷰한 뒤 쓴 <아리랑>에도 1927년까지 체포돼 처형당한 의열단원만 7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2010년 공개된 영국 정보기관 SIS 극동지부의 1923년 보고서는 의열단원을 약 2000명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김원웅 회장이 “일제가 가장 무서워했던 조직인 의열단 단원들은 목숨을 버려야 하는 거사를 앞두고 서로 나서겠다고 추첨까지 했다”고 말할 정도로 독립과 새로운 사회 건설을 향한 선조들의 열망은 컸던 것이다.

현재 알려진 의열단의 활동 중 특히 일제 식민지배 주요시설 및 인사에 대한 폭파·암살 활동은 1920년대 초반에 집중됐다. 1920년 6월 만주에서 경남 밀양 등지로 폭탄을 반입하던 이성우·곽재기 의사 등이 일제 경찰에 발각돼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그해 9월에는 박재혁 의사가 상하이에서 부산으로 입국해 부산경찰서장과 순사들에게 폭탄을 던져 절명케 하고 본인도 중상을 입는 의거를 실행했다. 이어 조선총독부와 종로경찰서, 도쿄에서는 일왕과 일왕이 사는 궁성 등 주요인물과 시설을 향해 폭탄을 던지거나 총탄을 발사하는 등 독립의지를 표명하는 의거가 계속됐다. 창단 10년 후인 1929년 12월 해단까지 공식적으로 수행한 의거만 34건에 이를 만큼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이다.

하지만 의열단의 활동과 노선을 두고 내부에서도 격렬한 토론은 이어졌다. 단장인 약산은 아나키스트가 아니었지만 의열단의 이론적 기초를 다진 류자명과 의열단 선언이라고도 알려진 1923년의 ‘조선혁명선언’을 쓴 단재 신채호 등 아나키즘을 사상적 기반으로 활동한 인물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의열단이 당시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아나키즘 단체의 공통된 행동노선이었던 ‘행동에 의한 선전’ 전략에 따라 파괴·암살 활동에 치중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민족주의·공산주의·아나키즘 등 내부에서 이념적 분화가 나타나면서 각 분파는 지향하는 목적을 위해 서로 다른 행보를 이어갔다. 

약산은 1932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한 데 이어 1935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며 의열단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더욱 확장된 정치·군사적 성격의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조선민족혁명당 산하의 조선의용대를 세워 당시 공산주의의 주류이던 레닌주의적 성향을 표방한 점도 현재까지 이어지는 논란을 낳았다.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간 약산이 한국전쟁 발발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대상에서 계속 제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 견줄 만해 

그럼에도 좌우 이념대립 문제와는 별개로 당시 항일 독립운동에 나선 의열단의 업적은 그 자체로 조명받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의 학술대회에서도 이러한 입장은 강조됐다. 100년이 지난 현대에 와서 국민은 당시의 구체적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울 뿐더러 의열단원들의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은 점까지 더해져 오히려 객관적인 평가가 힘든 상태로 놓여 있다는 것이다. <약산 김원봉 평전>, <의열단, 항일의 불꽃> 등을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의열단은 일제강점기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도 해방 후 남북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그 행적이 왜곡되거나 주요인물들이 숙청당했다”며 “이제라도 의열단이 활동했던 중국 각지의 기록을 찾고 증언을 들어 독립운동사의 정사로 기록돼야 한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저항했다는 점에서 의열단은 나치 독일 치하의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 견줄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는 비교적 짧은 4년여의 기간 동안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했지만 전후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인물들은 국가로부터 최고의 예우를 받으며 기념관사업 역시 활발했다. 그래서 해방 후 월북했다는 이유로 재평가를 받지 못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는 새로운 특별조항을 만들어 서훈해야 한다는 등의 대안도 나오고 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사회주의계라도 북한 정권 수립에 일조하지 않은 분들은 서훈하게 됐지만 이들 독립운동가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많은 안타까움이 있었다”면서 “건국훈장 명칭을 독립·광복·항일훈장 등으로 바꿔 대한민국의 포용력을 확장하고 정통성을 확립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의열단 1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을 이어가는 단체들은 현재 역사청산 문제를 두고 한·일관계가 악화된 상황에 맞춰 일본의 반성과 사죄를 촉구하는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11월 7일 미국 뉴욕에서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기를 2020 도쿄올림픽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촉구하는 삼보일배 행진과 함께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욱일기 사용을 비판하는 광고를 내보내는 등의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동안 약산 김원봉을 기념하는 별도의 기념사업회가 없었던 상황에서 11월 9일 ‘의열단 약산 김원봉 장군 기념사업회’가 뒤늦게 발족하기도 했다. 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분단된 나라, 그리고 ‘헬조선’이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는 분명히 아닐 것”이라며 “그들이 꿈꾼 나라를 이 땅에 만들 때까지는 모두가 의열단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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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11170945001&code=960100&nv=stand&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row1_thumb_1#csidx8885db61e3f146895b82801eb5efd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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