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1936년 4월 3차 보고서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마친 나이위원회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공하지 못했다. 첫째, JP모건과 록펠러, 듀퐁 등 미국 대기업들이 전쟁을 통해 어마어마한 이윤을 취했다는 사실은 밝혀냈다.

둘째, 무기업자가 정부를 전쟁으로 몰아갔는지에 대해서, 즉 윌슨의 참전 동기가 JP모건 구하기였는지에 관해서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했으나 정치, 언론, 대학 등 제도권세력의 물타기 작전에 희석됐다. 즉 '미국 이상주의 외교의 위대한 선구자, 윌슨'이라는 신화는 큰 타격을 입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쟁은 최고의 장사다"

 

 

[전쟁국가 미국·1강-④] 1차 대전, 'JP모건을 위한 전쟁
"전쟁은 최고의 장사다"
 
 
"최고로 신뢰할 만한 회계자료에 따르면 지난 1차 대전 때 군인 1명을 죽이는 데 드는 비용은 약 2만 5000달러였다. 그런데 유럽의 어떤 대기업도 정부가 저지른 이런 극도의 낭비에 대해 단 한 차례도 항의하지 않았다. 살인을 개별 조폭들에게 맡긴다면 건당 비용은 100달러를 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대기업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살인이 이들 대기업의 주업이기 때문이다. 무기는 그들이 자랑하는 상품이다. 정부는 그들의 고객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들이 만든 제품은 아군이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적군도 사용해왔다. 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매 순간 터지는 포탄 파편이 전선에 나가 있는 한 인간의 뇌와 심장과 내장을 파고드는 동안, 2만 5000달러의 대부분인 이윤은 무기 제조업자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춘>의 1934년 3월자 기사 '무기와 인간'의 첫 부분이다. 다음 달 별도의 소책자로도 발간된 이 기사는 유럽 무기산업의 추악함을 고발한다. 그러나 이 고발 기사는 유럽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미국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1차 대전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이 전쟁이 '민주주의에 안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전쟁'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며 참전을 단행했다. 나아가 민족 자결, 국제연맹 창설 등 14개 평화 원칙을 내세우며 미국의 주도로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하겠다고 다짐했다. 윌슨의 평화 원칙은 지금까지도 미국 외교의 대원칙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미국의 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도, 평화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파산 위기에 빠진 미국의 은행가와 무기 제조업자들을 구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금융재벌 JP모건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당시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 측의 무기 구입 및 차관 획득을 위한 유일한 대행자였던 JP모건은 연합국 측의 패배 가능성이 보이면서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 거액의 전쟁물자 외상 대금과 대출금을 모두 떼일 판이었다. 미국이 참전한 진정한 이유다. 이 때문에 어떤 이는 1차 대전을 '세상을 JP모건에 안전하게 만들어준 전쟁'이라고까지 말한다. 그 실상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제국주의 열강의 자살극, 1차 대전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위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이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한 세르비아 인에게 암살된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면서 1차 대전이 발발한다.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그리고 오스만제국을 한편으로(Central Powers : 중부세력),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을 다른 한편으로(Allies : 연합국) 4년 3개월여 동안 자본주의 열강 간에 참혹한 전쟁이 벌어진다. 1815년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이후 100년간 지속됐던 유럽의 평화가 깨진 것이다.

1918년 11월 11일 전쟁이 끝났을 때 군인 사망자가 1000만 명, 민간인 사망자는 2000만 명으로 무려 3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 비용은 자그마치 1860억 달러. 미국 등 연합국이 1230억 달러를 사용했고 독일은 390억 달러를 썼다. 연합국 중에서는 영국이 540억 달러, 미국이 220억 달러를 지출했다. 

전쟁 발발 당시 이미 영국은 노쇠한 제국이었다. 전쟁 비용 540억 달러의 36%를 국민 세금으로, 64%는(352억 달러) 외부 대출로 충당했다. 대출의 주요 공급원은 미국이었다. 1914년 3월부터 1920년 3월까지 영국이 지출한 540억 달러는 그 이전 225년간의 정부 지출을 합친 것보다 많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전쟁 직전 7억 1100만 파운드였던 영국의 국채는 종전 즈음에는 82억 파운드로(390억 달러 ; 당시 1파운드는 4.76 달러) 6년 만에 정부 부채가 1150% 증가한다. 사실상 국고가 파산 상태에 이른 것이다.  

한마디로 영국은 미국이 제공하는 무기와 미국에서 빌린 돈으로 전쟁을 치렀다. 이에 따라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은 전쟁이 끝난 후 전쟁 부채를 갚느라 몰락의 길을 걷는다.

반면 미국은 1917년 4월 2일 참전을 결정했지만 실제 전투에 참여한 것은 종전 6개월 전인 1918년 5월이었다. 미군은 연 인원 200만 명이 참전해 11만 6000명이 전사하고 20만 4000명이 부상을 당했다(반면 4년 이상 전쟁을 치른 프랑스는 100만 명 이상이 전사했고 영국 전사자 역시 100만 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 중 영국, 프랑스 등에 제공한 군수물자와 신용 대출 덕에 전쟁 이후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최대 채권국이라는 지위를 바탕으로 향후 세계의 진로를 좌우하는 핵심적 지위를 차지한다. 전쟁 기간 미국 대기업과 정부는 유례없이 긴밀한 결탁 관계를 맺었다. 경쟁을 통제하고 대기업의 이윤을 보장하면서 은행과 군수기업들은 크게 번창했다. 

이처럼 연합국 측에 전쟁 물자를 공급하고 전쟁 자금을 빌려주는 과정에서 2만 1000명의 백만장자와 억만장자가 생겨났다. 반면 미국의 공공부채는 1913년 10억 달러에서 1919년 말 250억 달러로 2500% 늘어난다. 미국 국민 1인당(1억 3000만 명)의 200달러의 전쟁 부채를 진 셈이다. 국민들의 혈세와 수십만 군인의 목숨을 대가로 2만 1000명의 거부가 태어난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단숨에 경제 부흥을 이룩한 일본, 베트남전쟁에 참여해 경제 개발의 기반을 닦은 한국의 경우와 비교해 보라. 1차 대전 당시 세계 최강의 국가들이 벌이는 전쟁에서 연합국 측의 군수물자 공급 및 신용 대출을 독점한 JP모건은 도대체 얼마나 벌어들였을까. JP모건에게 1차 대전은 '최고의 장사' 기회였던 셈이다. 

'죽음의 상인' 

사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다수 미국인들은 관심이 없었다. 1차 대전은 구대륙 제국주의 열강의 추악한 이권 다툼이었을 뿐이다. JP모건이 군수물자 공급과 신용 대출로 영국과 결탁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참전할 이유도 없었다.  

이러한 전쟁의 실상, 즉 대다수 국민이 혈세와 목숨을 희생하는 동안 미국의 군수기업과 은행들은 떼돈을 벌었다는 추악한 진실은 1930년대 이후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그 진실이 소상히 밝혀진 것은 1934년 4월부터 2년간 지속된 미 상원 군수산업조사특별위원회의 조사에 의해서였다.(나이위원회에 대해서는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공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 1권 138~158쪽과 스메들리 버틀러 <전쟁은 사기다> 참조)

▲ 스메들리 버틀러(1881∼1940년) 장군의 저서 <전쟁은 사기다>(War is a Racket) ⓒFeral House

공화당 소속의 노스다코타 주 상원의원 제랄드 나이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조사위원회는 일명 나이위원회, 또는 '죽음의 상인' 조사위원회로 불린다. 군수기업을 '죽음의 상인'으로 지칭한 것이다. 조사위원회는 조사관과 회계사 80명을 동원해 1차 대전 당시 미국 대기업들의 회계장부를 샅샅이 조사했다. 특위 위원들은 그 결과를 보고 경악했다.

특위 위원 중 한 명인 제임스 포프 상원의원은 앞으로 청문회를 통해 "그 탐욕과 음모와 전쟁 공포를 조장하는 선전과 로비의 실태가 공개되면 국민은 경악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관련 정보가 공개되는 순간 온 나라가 충격에 빠질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참전 이유는 민주주의도 평화도 아닌, 미국의 제국주의적 영향력 확대와 대기업의 이윤 때문이었다.

나이위원회가 소집되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있었다. 1917년 11월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혁명에 성공하며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는 차르 치하 당시 외무장관의 비밀서류를 발견해 이를 공표했다. 그것은 전쟁이 끝난 후 전승국들이 전체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적절히 나누어 갖는다는 내용이었다(사이크스-피코 협정).

이 비밀협약은 1916년 2월에 수립되었고 같은 해 5월 관련 국가 정부들로부터 비밀리에 비준을 받았다. 당시까지 명목상 중립을 지켰던 미국 정부도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타 국가들은 물론 관련 국가의 국민들도 이 비밀협약의 내용을 알지 못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단의 수정주의 역사가들이 전쟁 당시 비밀 외교 등을 연구하면서 미국이 참전한 진짜 이유는 민주주의나 세계 평화가 아니라 영토 획득과 기업의 이윤 때문이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또한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고 1933년에는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유럽에 새로운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에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전쟁',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윌슨의 주장이 거짓임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나이 의원은 1934년 2월 상원 외교위에 무기, 탄약 등 전쟁 장비 제조 및 판매에 관련된 개인과 기업들에 대한 조사를 제안했다. 미국이 새로운 해외 전쟁에 말려드는 것과 미국 군대가 기업인들의 해외투자 보호수단으로 쓰이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1934년 4월, 상원 군수산업조사특별위원회가 설립됐고 군수품재벌 관련 청문회가 시작됐다. 조사위원회의 활동 목적은 전쟁을 통한 부당이득 취득이 있었는지, 무기 제조업자들이 선전 활동을 통해 정부를 전쟁으로 몰아갔는지를 조사하는 한편 앞으로 전쟁 수행 과정에서 대기업의 이윤 추구가 일절 없도록 정부가 모든 무기 제조에 대해 독점권을 행사해야 하는지 등 향후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청문회 시작되기 직전 미 군수산업을 고발하는 두 권의 책이 같은 날 발간됐다. H. C. 엥겔브레히트와 F. C. 해니건 공저의 <죽음의 상인들>, 그리고 언론인 조지 셀드스가 쓴 <철, 피, 이윤>이 그것이다. 두 책은 대중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고 특위 조사관들에게 많은 기초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서두에 말한 <포춘> 3월자 '무기와 인간' 이 별도의 소책자로 발간됐다.  

영국과 JP모건의 결탁 

1차 대전 발발 당시 중립을 표방했던 미국은 어떻게 전쟁에 끌려들어 간 것일까? 그것은 미국의 금융재벌 JP모건이 영국 정부와 결탁한 때문이었다.

석유, 금융, 식량 등 주요 국제 문제에 대해 30년 넘게 비판적 글을 써온 윌리엄 엥달은 저서 <화폐의 신>(Gods of Money)에서 "월가의 머니트러스트는 전쟁에 참여해야만 유럽에 재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파산한 영국이 남겨놓은 공백을 치고 들어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이른바 '미국의 세기'를 창출한 첫 걸음이다"라고 지적한다.

1936년 2월 24일 발표된 나이보고서는 "조사 대상이 된 군수업계는 때로 비정상적인 편법, 미심쩍은 특혜와 커미션 같은 방법을 써먹었다. 그들은 일이 되게 하기 위해 외국 정부 관료나 그들의 절친한 친구에게 뇌물을 먹이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쟁 발발 직후 JP모건은 영국이 군수품, 무기, 군복, 화학물질 등 현대전을 치르는 데 필요한 모든 물품을 구매하는 데 영국 정부를 위한 유일한 거간꾼 노릇을 하게 된다. 더욱이 영국 정부는 JP모건을 미국 민간은행에서 빌리는 모든 영국 전쟁부채의 독점적인 금융대행사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JP모건은 전시 구매를 조직하고 거기에 자금을 조달하는 일, 그리고 어떤 회사가 공급처가 될 것이며 물품 가격은 어떻게 책정할지 따위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모건가와 연계된 기업들은 모건이 눈치 빠르게 벌인 이 사업에서 가장 큰 이득을 챙겼다.

1915년 1월 금융회사 JP모건의 수장 J. P. 모건 2세는 백악관에서 윌슨 대통령을 만나 JP모건과 영국의 결탁 문제를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윌슨은 모건그룹이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행하는 그 어떤 조치에도 반대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1916년 한 해에만 미국 업계는 12억 9000만 달러 상당의 군수품을 영국과 프랑스에 수출했다.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기 직전인 1917년 4월 JP모건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50억 달러어치(현재 시세 900억 달러) 군수품을 수출했다. 만일 그 대금이 상환되지 않으면 심각한 금융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JP모건의 동업자 토머스 라몬트는 1915년 4월 필라델리아에서 열린 정치사화과학아카데미에서 행한 "전쟁이 미국의 금융적 지위에 미치는 영향"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는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전쟁 관련 품목을 취급하는 우리나라 제조업체와 상인들은 사업을 통해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중략)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진척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미국이 국제적인 금융대출시장에서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역이나 금융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문제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전쟁을 끝내지 않고 질질 끄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독일의 수출무역이 거의 완전히 바닥상태지만, 만약 전쟁이 조기에 끝나버리면 우리는 십중팔구 독일이 재빠르게 기사회생해서 다시 경쟁국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1917년이 되면서 별안간 상황이 좋지 않게 굴러갔다. 1917년 2월 러시아 군부가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러시아 황제가 폐위되었다. 러시아 군 지도부는 반란을 진압할 힘이 없었다. 만일 러시아 군대가 전쟁에서 손을 뗀다면 독일은 더 이상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을 동시에 감당하느라 기진맥진할 필요 없이 오로지 서부전선에만 전력을 집중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은 곧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패배를 의미했다.

JP모건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에 15억 달러가 넘는 전쟁 차관을 주선해주고, 유럽 교전국에 제공된 50억 달러어치의 군수물자에 관한 인수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니만큼 끝내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는 거두는, 그들로서는 전혀 뜻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이런 상황에서 1917년 3월 5일 월터 하인스 페이지 영국주재 미국 대사가 윌슨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밀서를 보낸다. 그는 록펠러 가문과 가까운 사이였다. 영국 대사로 부임하기 직전 록펠러재단 산하 일반교육위원회의 위원을 맡기도 했다.

"저는 우리를 서서히 압박해오는 이 위기에 대처하려면 JP모건의 역량으로는 턱없이 모자라다고 봅니다. 일개 민간기관이 담당하기에는 너무 엄청나고 급박한 상황입니다. (중략) 그렇지만 우리가 독일과의 전쟁에 직접 참가한다면, 연합국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아마도 신용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 정부는 얼마든지 영국과 프랑스에 차관을 제공하거나 아니면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을 겁니다. (중략) 우리가 독일과 전쟁을 벌이지 않는 한 우리 정부는 당연히 그러한 직접적인 신용을 제공할 수 없을 겁니다."

4주 후인 1917년 4월 2일, 윌슨은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한다. "민주주의에 안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참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명분이었다. 그러나 윌슨이 참전을 선택한 진정한 동기는 참전을 해야만 전후 협상 과정에서 발언권이 보장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2월 28일 백악관을 방문한 민간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 참여한 국가의 수반이라면 미국 대통령은 평화협상 테이블에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중립국 대표로 간다면 기껏해야 '문틈으로 떠드는' 정도밖에 할 수 없겠지요. 미국 대통령의 말이 먹히려면 협상 테이블에 참가해서 우리의 외교정책을 밀어붙이고 옹호해야지, 안 그러면 아무것도 될 수 없어요."  

윌슨의 선전포고 요청에 대해 상원에서는 단 6명만이, 하원에서는 50명이 반대했다. 반대 의원들은 윌슨을 '월스트리트의 앞잡이'라고 공격했다. 조지 노리스 상원의원 "우리는 이제 성조기에 달러 문양을 그려 넣게 될 것"이라고 비아냥댔다. 로버트 라폴레트 상원의원은 참전 문제를 놓고 국민투표를 한다면 반대가 10배 이상 나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만큼 미국 국민들은 유럽 열강들이 벌이는 전쟁에 관심이 없었다. 정부는 자원병 100만 명 확보를 호소했지만 참호전과 독가스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열기는 식어갔다. 자원병 모집 공고 6주 만에 입대를 자원한 사람은 7만 3000명에 불과했다. 결국 의회는 징병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선전포고 이후 1918년 11월 11일 종전까지, 이번에는 미국 정부가 연합국에 93억 8631만 달러를 대출해 준다. 영국이 41억 3600만 달러, 프랑스가 22억 9300만 달러를 빌렸다. 그러나 사실 영국 정부나 프랑스 정부는 그 돈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그 돈은 연합국에 공급되는 전쟁물자 대금으로 미국 재계가 부리나케 쓸어갔다. 미국 재계는 대부분 모건그룹, 아니면 록펠러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나이위원회 활동은 성공했는가? 

나이위원회의 근본 취지는 미국이 새로운 해외 전쟁에 말려드는 것, 그리고 미국 군대가 기업인들의 해외투자 보호수단으로 쓰이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1차 대전 동안 군수기업 등의 부당한 이득 취득이 있었는지, 무기 제조업자들이 선전 활동을 통해 정부를 전쟁으로 몰아갔는지를 조사하는 한편 앞으로 전쟁 수행 과정에서 대기업의 이윤 추구가 일절 없도록 정부가 모든 무기 제조에 대해 독점권을 행사해야(무기산업 국유화) 하는지 등 향후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1936년 4월 3차 보고서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마친 나이위원회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공하지 못했다. 첫째, JP모건과 록펠러, 듀퐁 등 미국 대기업들이 전쟁을 통해 어마어마한 이윤을 취했다는 사실은 밝혀냈다.

둘째, 무기업자가 정부를 전쟁으로 몰아갔는지에 대해서, 즉 윌슨의 참전 동기가 JP모건 구하기였는지에 관해서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했으나 정치, 언론, 대학 등 제도권세력의 물타기 작전에 희석됐다. 즉 '미국 이상주의 외교의 위대한 선구자, 윌슨'이라는 신화는 큰 타격을 입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셋째, 전쟁으로부터 이윤을 제거하겠다는 노력은 완전히 실패했다. 나이 의원을 비롯한 위원들은 한때 무기산업 국유화라는 근본적 개혁까지 고려했고, 현실적으로는 전쟁 이윤에 대해 중과세하는 법안을 제출했으나 이 모든 노력은 5년간 미 의회 내에서 잠자고 있다가 1941년 12월 미국의 2차 대전 참전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30년대 대중들의 분노에 전전긍긍했던 대기업들은 2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오히려 당당한 태도를 취한다.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쟁을 하려면 전쟁 수행 과정에서 기업들이 돈을 벌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들이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라고 말할 정도였다. 미국 대기업은 2차 대전에서 1차 대전보다 훨씬 더 큰 이윤을 취했으며 이후 미국에는 군산복합체가 정착되면서 영구 전쟁 국가로의 길을 걷게 된다.

나이위원회의 활동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미 국민의 지지는 차고 넘쳤다. 출범 1년이 채 안 된 1934년 12월 말 현재 나이위원회 활동을 지지, 격려하는 편지가 자그마치 15만 통이나 접수됐다. 위원회 활동이 끝나가던 1936년 3월 7일 갤럽 여론조사에서 "사적인 이윤을 위한 무기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82%가 '그렇다'(18% '아니다')고 대답했다.  

이 여론조사에서 펜실베이니아주 서부의 한 잡화상은 "지난 수 세대 동안 무기 관련 이윤 시스템이 우리를 전쟁으로 몰아갔다"고 지적했다. 이는 윌슨이 JP모건을 연합국 전담 금융거래자로 허용했을 때 이미 "참전으로 가는 길은 뚫렸다"는 나이 위원장의 발언과 정확히 같은 맥락이다. "미국에게 전쟁이란 국민을 속여 대기업을 배불리는 수단이다"(노엄 촘스키), 또는 "외국과의 전쟁은 부르주아계급이 생각하기에 이득이 생길 것 같을 때만 일어난다"(조지 오웰)는 발언도 마찬가지다. 

더글라스 맥아더보다 더 용맹했고, 그보다 훨씬 군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의 반전 고전 <전쟁은 사기다>가 출간된 것도 이때였다(1935년). 이 책에서 버틀러 장군은 다음과 같이 전쟁의 실상을 고발한다.  

"전쟁은 사기다. 언제나 그래왔다. 전쟁은 아마도 가장 오래됐고, 손쉽게 가장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으며, 그리고 확실히 가장 사악한 사업이다. 나아가 (한 나라의 국경을 넘어) 국제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사업이다. 또한 이윤은 돈으로 계산되지만 손실은 인간의 목숨으로 지불되는 유일한 사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사기'야말로 전쟁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라고 믿는다. 전쟁이 실제로 무엇인가 하는 것은 '(권력) 내부'의 극소수 사람들만이 알 뿐이다. 전쟁은 극소수의 이익을 위해 대다수가 희생하는 사업이다. 전쟁을 통해 극소수의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다."  

"나는 현역 군인으로 33년 4개월을 복무했으며 그 대부분을 대기업과 월가, 은행가들을 위한 고급 조폭(a high class muscle man)으로 일했다. 한마디로 나는 자본주의를 위한 사기꾼, 조폭이었다.  

1914년 나는 멕시코, 특히 탐피코를 미국 석유업계가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아이티와 쿠바를 내셔널시티뱅크가 돈을 긁어모으기에 적당한 장소로 변모시키는 것을 도왔다. 월가의 이익을 위해 중미 6개 국가를 침탈하는 것을 도왔고, 1902∼1912년에는 브라운브라더스국제은행을 위해 니카라과 소탕을 도왔다.  

1916년 미국 설탕업계가 도미니카공화국에 진출하는 것을 도왔으며, 1903년에는 온두라스를 미국 과일 기업들이 활동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만들어주었다. 1927년에는 스탠다드오일이 아무런 방해 없이 중국에서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알 카포네에게 한마디 조언을 해줄 것을,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기껏해야 시카고의 3개 구역에서 사기 행각을 벌였지만, 나는 세 대륙에 걸쳐 그 짓을 했으니 말이다."

나이위원회는 1936년 4월 발표한 3차 보고서를 통해 전쟁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이기심을 추구하는 조직(기업)이 국가로 하여금 군사행동에 나서도록 선동하고 겁박하는 행위를 방치하는 것은 세계 평화에 반하는 것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 국민의 염원, 나이위원회의 지적을 미국의 지배엘리트는 교묘하게 회피하고 거부했다. 일례로 <뉴욕타임스>는 위에 말한 갤럽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뿐만 아니라 <워싱턴 포스트>, <시카고 트리뷴> 등 유력 언론, 월터 리프먼 등 저명한 언론인들도 나이위원회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모두 회의적, 또는 적대적 태도를 취했다. 즉 대기업을 비롯해 미국의 제도권 세력은 전쟁을, 전쟁을 통한 이윤 획득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J. P. 모건, 나이위원회에 출석하다 

1936년 1월 7일, 미국 금융계의 최고 거물 J. P. 모건이 나이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했다. 세기의 격돌이라고 할 만한 빅 이벤트였다. 만일 윌슨의 참전 결정이 JP모건의 군수물자 외상 대금 및 대출금 회수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 입증된다면 미국 정부와 대기업의 도덕성과 정당성은 추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비해 위원회 측은 1년 가까이 금융회사 JP모건의 각종 문서 200만 건을 조사했다. 나이 위원장은 라디오 방송에 나가 국민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대기업의) 상업적 이익 보장을 위해 미국의 중립정책을 연합국에 대한 대출을 허용하는 수준까지 밀고 갔습니다. 연합국들은 미국이 결국 어떻게 나올 것인가에 대해(결국은 참전할 것이라는) 일말의 의구심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잘 몰랐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치부책을 누가 쥐고 있는지,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J. P. 모건은 이런 추정을 부인하는 9쪽짜리 성명을 발표했다. 연합국들에 대한 대출은 (전쟁의 승패와 관련 없이) 회수에 전혀 문제가 없었으며, 대출을 해준 금융기관들이 '대출금의 안전 회수'를 위해 정부에 압력을 넣어 참전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판타지 같은 허구의 이론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1월 7일 청문회에서 위원회 측은 전쟁이 일어난 1914년 윌슨이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국무장관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로버트 랜싱 전쟁장관 편에 서서 미국 은행가들이 교전 당사국에 대출하는 것을 허용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를 공개했다(이 결정 직후 브라이언은 장관직을 항의 사퇴했다). 전쟁의 한쪽 당사국에 전쟁 자금을 대출해주면서 중립을 주장하는 것은 사실 '눈 가리고 아웅'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또한 나이 위원장은 윌슨이 참전 이전에 이미 연합국들의 밀약을(연합국이 이길 경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동맹국 영토를 분할 지배한다는) 알고 있었으며, 상원 외교위원들에게는 나중에(1919년) 베르사유 평화회담에서 비로소 알게 됐다고 '허위' 증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윌슨이 의회와 국민을 기만했다는 얘기다.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의 공저자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은 1차 대전 당시 윌슨의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나이 위원회 조사는 윌슨이 사실상 국민을 속이고 전쟁에 참전했음을 보여주었다. 윌슨은 연합국들에 대한 대출과 기타 지원을 허용함으로써 중립정책을 해쳤고, 독일군의 만행을 의도적으로 과장했으며, 연합국들 간의 밀약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했다. 1차 대전은 민주주의 확보를 위한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고. 제국의 전리품을 나눠먹기 위한 전쟁이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 153쪽)  

그러나 우드로 윌슨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민주당 의원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태를 두고 당시 <워싱턴 포스트>는 "항의와 분노의 회오리바람이"이 몰아쳤다고 표현했다.  

상원의원 톰 코널리(텍사스)가 공격을 주도했다. 그는 1월 17일 상원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나는 특위에서 주장하는 혐의들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악랄하기 그지없는 주장이니까요. (중략) 특위 위원장이라는 자가 우리를 평화로 안내하겠다고 하면서 돌아가신 분(윌슨)에 관한 역사의 기록을 바꿔놓고 있습니다. 그분은 위대했고 선하셨으며 살아생전에는 적들과 감연히 맞선 분이었습니다."  

그는 이어 나이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1차 대전 관련 미국 역사 기록에 먹칠을 하려는 가증스러운 짓거리"라고 비난했다. 

다음날에는 윌슨 행정부 말기 재무장관을 역임한 카터 글래스 상원의원(버지니아)이 공격에 나섰다. 그는 나이에 대해 "악랄한 중상모략, 돌아가신 대통령에 대한 말로 다할 수 없는 비방, 윌슨의 무덤에 오물을 뿌리는 짓거리"라고 비난했다. 주먹으로 탁자를 얼마나 세게 두들겼는지 들고 나온 문건에 마구 피가 튀었다. 글래스 의원은 이렇게 고함쳤다.

"아니 이런 악의적인 선전선동이 어디 있습니까. 거짓 주장입니다. 모건 가문이 우드로 윌슨의 중립정책을 바꿔놓았다니 말이나 됩니까!" 

나이 위원장은 차분하게 반박했다. "정말 놀라운 일은 특위 활동을 잠시 중단하기 위한 '사전 조율' 같은 것이 없었는데, 모건과 그 일파들이 출석하면서 특위에 대한 적대감이 분출됐다는 사실"이라며 사과 발언을 하는 대신 관련 서한과 문건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미국은 전리품을 나눠 먹기로 한 사실을 알면서 참전했다. 그런데 우리는 연합국들 간에 비밀협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베르사유 평화회담에 가서야 비로소 폭탄 같은 뉴스로 알게 됐다"(5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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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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